안양지역얘기 715

[20240125]군포여성민우회 신임 김다미 대표 선출

군포여성민우회 신임 대표로 김다미 대표가 선출됐다. 군포여성민민우회는 1월 19일 제24차 정기총회를 통해 김다미 대표를 선출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지난 30여년간 기독여민회 간사, 군포여성민우회 운영위원, 지역자치위원장, 사무국장으로 성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서울시한부모가족지원센터, 노인종합복지관, 경기중부비정규직센터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수행하였다. 김다미 대표는 성평등사회를 위해,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와 제도에 회원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것이며 지역사회와 연대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박철하]1919년 일제에 대한 저항 의왕 만세운동

한적한 농촌마을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기운이 돋다 의왕시는 대한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효율적으로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의곡면과 왕륜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하고 수원군에 편입시켰다. 당시 의왕지역은 지금의 부곡동(삼동, 이동), 고천동(왕곡동, 고천동), 오전동, 내손1.2동, 청계동(청계동, 학의동, 포일동) 등을 포함하였다. 고천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천)주정소가 있었다. 현종 때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지만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이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설치한 뒤 ..

[20080320]마을을 지킨 나무, 나무를 지킨 사람 김수선

안양시민신문 2008. 3. 20. 18:41 김수선 안양공예가 회장 마을을 지킨 나무, 나무를 지킨 사람 마을 지키던 정자나무에 12년 인생 바쳐 “그 나무 때문에 안양이 고향 됐지요” 250년 동안 한 마을을 지켰던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나무는 뙤약볕을 피해 쉴 수 있는 정자였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는 회의공간이었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소원을 빌 수 있는 수호신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6?25전쟁 때도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도시화의 물결로 마을 앞에 대로가 뚫리면서 이 나무가 서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나무는 쭉쭉 뻗어 나가야 할 산업도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가게 간판을 가리는 애물 단지였으며, 나무에서 놀던 아..

[장지섭]안양문학의 뿌리 "청포도" 동인지 찾았다(2019.12.16)

안양문학의 뿌리를 찾다 안양문학의 효시“청포도”동인지를 찾아서 장지섭(안양문인협회 부회장) 2019.12.16 안양문학 창간 제30집 특집호 글에서 2019년 4월 21일 늦은 저녁, 벨이 울렸다. 이재철 이사였다. 우리 고장 최초의 동인지 『청포도』찾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지난 수십 년간 김대규 선생님을 모시고 안양문학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발품을 팔았던가. 1947년 박두진 시인이 주관 결성한「안양문학동인회」와 그 동인지 『청포도』는 현재의 안양문학과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하여 2008년 김대규 시인이 주관하여 발간한『안양문학 60년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찾고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안양문학 60년사』에는 그 내용이 간략히 기술될..

[이정진]의왕에는 세종대왕 손녀의 무덤이 있다(2022.01)

초평동에는 세종대왕 손녀 무덤이 있다 이정진 | 부곡향토문화연구회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의왕은 서울과 수원 등 인근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임에도 자연환경이 살아 있는 오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이다. 녹지 비 율이 높으며 산과 호수 등이 지닌 청정함과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는 도시라는 것이 내 가 의왕시에 살아오며 내내 지녀온 느낌이 다. 2006년 의왕에 이사 왔을 때 2년만 머물 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지금껏 부곡동에 정착 해 마을에 맘 붙이고 살게 된 이유도 좋은 자 연환경과 이웃들이 함께하는 따뜻한 정서가 좋아서이다. 부곡동에 있는 다양한 마을 커뮤 니티 중에서 부곡향토문화연구회도 내가 의 왕에 정주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고 말할..

[박철하]일제강점기 모락산에 결핵요양원 있었다(2022.01)

일제강점기 모락산 결핵요양원 박철하 |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서남쪽 기슭 골짜기에 '성라자로마을'이 있다. 우리 가족이 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매달 한 번씩 '치유의 집'에서 봉사를 해왔기에 내겐 아주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성라자로마을은 70년 전 나환자들, 즉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 복귀 및 자활을 마련해 주고자 설립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事業)기관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2일 미국메리놀회 소속 죠지캐롤 안 주교가 광명시 신기촌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구호와 의료사업으로 시작한 '성라자로 요양원'이 그 모태이다. 그런데 설립 23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 7월 5일 전..

[20240110]안양 기부문화의 선구자 안정호 선생

안정호 선생은 안양에 국민학교 증설 자금 5만원(현재 가치 50억)과 안양중학교 신설을 위한 땅 10만4천평(당시 700만원현재 가치 7000억원), 평화보육원에 토지 1만6천평을 희사한 인물이다.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안양에 초등학교 만들라고 5만원 기부(자유신문 1946.03.13.) 군포국교에 굦구입비 1만5천원 기부(자유신문1946.0414) 평화보육원에 사유지1만6천평과 현금1만원 기부(자유신문 1947.02.24) 安養中學 신설 토지 10만4천평/당시 시가 700여만원) 희사(자유신문 1947.03.05.) 기사 초등학교 만들라고 안씨 오만원 기부(자유신문 1946.03.13) “새 조선의 공업도시;로 도시로 그 그 장략 ㅏ역속되고있는 안양지방에는 아직까지도 1개소의 초등학..

[문동원]안양 부림말의 참새와 방앗간(2008.12.12)

우리동네 '부림말' 그 곳의 방앗간((?) 이름은 버드나무 집이다. 동네 초입에 버드나무 아래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인것 같다.조롱내 개울을 건너면 조그마한 집이 나무 아래서 목을 축이고 가라고 사람들을 부른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것 같다. 아버지와 둘이서 어디를 다녀오다 그 앞을 지나는데,내가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으며,하는말.... "아빠!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면 돼?" 아버지는 웃으시며 나를 데리고 버드나무 집으로 들어가셨다.-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내 머리만한 왕대포에 김치 한조각,그리고 걸직한 주인 할머니의 웃음 소리가 귀머리를 돌아 다닌다. 술 한잔에 어린 놈이 맛이 갔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웃겼던지 계속 '허허..

[20240106]안양지역 여성운동의 선구자 故 정어진원장

1939년 시흥군 의왕 청계에서 태어나 2021년 11월 26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정어진 원장은 시흥군 시절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경기도 여성정책국장까지 시흥군, 안양시, 경기도 공무원으로서의 공직 생활과 아동복지시설 해관보육원(좋은집) 원장, 홀트아동복지회 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안양시여성단체협의회를 설립하고 안양시에서 여성 권익향상을 위해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육성하고 안양시가 현재의 여성친화도시로 선정되는 데 그 초석을 다진 안양시 여성발전을 위해 헌신해 안양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여성계의 대모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어진 원장은 1939년 의왕 청계에서 태어나 안양여중고를 졸업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공부했다. 유년시절 덕장교회를 다녔던 그는 관양동 부림말381번지 문씨 ..

[20240106]안양제일교회 설립자 故 이형래장로

지난 2000년 9월28일 외할아버님의 유고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애국지사도 아니었고 고위공무원직을 지내신 분도 아니었으나, 경기도 안양시 근대사에서 기독신앙인과 의료인으로 남긴 자취는 자못 큰 것이었다. 만 94세로 결혼 81주년을 목전에 두고 만96세이신 외할머님을 홀로 남기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교훈 되는 점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여 보려한다. 나는 학교 갈 나이인 일곱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고, 손주를 키워보고 싶으셔서 자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학 때면 늘 외갓집에서 지냈었다. 그 곳에서 보고자란 일들은 후의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