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 759

[박철하]의왕향토사료관이 번역 배포한 김직연의 연사록과 연행록

○ 김직연의 󰡔연사록󰡕과 󰡔연행록󰡕 의왕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많은 문집과 초상화 등 유물을 보존해 왔으며, 각종 석물과 신도비를 갖춘 왕곡동의 청풍 김씨 묘역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858년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온 김직연은 직접 그 내용을 󰡔연사록󰡕과 󰡔연행록󰡕이라 하여 각각 한문과 한글로 지어 후세에 전했다. 김직연 관련 기록물들은 현재 의왕시 향토사료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다.  김직연의 󰡔연행록󰡕과 󰡔연사록󰡕은 품산 김직연이 청나라에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한글 및 한문 필사본 기행문집이다. 1858년(철종 9) 10월 26일 출발하여 1859년 3월 20일 귀환하여 철종에게..

[빅철하]6명의 정승을 배출한 의왕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이야기

조선시대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의 입향조는 조선 전기 무신 김우증이다. 입향조란 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을 얘기한다. 김우증은 1506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올라 왕곡동을 중심으로 한 사방 십리에 달하는 사패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현재까지 왕곡동은 청풍 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의 하나로 이어져오고 있다. 왕곡동 마을 입구에는 청풍김씨 묘문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 중심부에는 청평군 김우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태도..

[박철하]의왕 능안마을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

능안마을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  임영대군 이구(1418~1469)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임영대군은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며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임영대군은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따서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문종대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했다. 형 수양대군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박철하]고려말 의왕 청계사를 중창한 조인규 이야기

고려말 조인규의 청계사 중창  조인규(1237~1308)의 가문은 본래 유이민의 후예로 양인 농민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려의 재상이자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아들들과 사위들은 장군과 재상과 같은 고위직에 오르는 등 고려에서 권세가 대단했다. 1231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30년에 걸친 대몽항쟁 기간을 거친 뒤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충렬왕을 시작으로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국가의 주권을 침해당했다. 이와 같은 고려와 원의 관계로 몽골어 통역관의 수요가 급증하던 때, 조인규는 몽골어 양성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몽골어에 통달하여 명성을 얻었다.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갈 때 그를 수행하..

[박철하]모락산 정상에 있는 한성기 백제 <모락산성>

삼국시대모락산 정상에 있는 한성기 백제의 산성  의왕 모락산성(義王 慕洛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에 있는 백제 시대의 산성이다. 2007년 9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모락산성은 2002년 및 2005년 세종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석축 또는 토석 혼축을 병용하여 축조된 길이 878m의 테뫼식 산성으로, 내부시설로는 문지, 망대지, 치성,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호, 옹, 완 등의 토기편류가 주로 채집되어 한성백제기에 초축된 성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석축성곽 축조의 시원양식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성곽이다. 현지 안내문의왕모락산성은 해발 385m 모락산 정상에 축조된 백제 한성기 시대 석축산성이다. 산 정상부..

[박철하]의왕시 이동 오봉산 청동기 마을 유적과 고인돌

의왕시 이동 오봉산 청동기 마을 유적은 오봉산 남쪽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 끝자락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심 유적은 청동기시대 집터인데, 토기와 석기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13동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성된 돌널무덤(석관묘) 4개도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고인돌보다 앞선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집터에서 오봉산 정산으로 오르는 중턱에 고인돌이 온전히 놓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이곳 이동 지역에 작은 마을을 이루며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집터 이동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집터의 형태로 보면, 오봉산 서쪽 끝자락 능선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좋고 관리와 통제가 쉬운 곳에 있는 가장 큰 ..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역사와 지역정체성

박철하(의왕문하원 향토문화연구소장) 목차1.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2. 내고장 역사문화 인식이 부재한 현실3. 전통마을의 파괴, 역사문화 유적의 파괴4. 역사문화의식을 갖는 창조도시 건설5. 내고장 우리 역사 바로알기 1.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란 무엇일가? 역사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지난 일보다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과거의 어떤 사실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즉 우리가 얘기하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들 가운데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판단 기준 아래 취사선택된 내용에 대하여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규명해서 우리에게 유용한 지식으로 전달된 것을 일컫는다고 하겠다. 우리는 역사가를 통해서 역사를 읽는다. 역사가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승언]安養의 由來_안양문화 제4호 글(1985.12.31)

1. 안양의 근원지1) 안양의 근원지에 대한 청설안양의 근원지 즉 뿌리는 필자(이승언)가 安養文化號에 「行政 域變쩔史」에서 언급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안양의 근원지는 금천현이었고, 금천현의 중심지는 안양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이러한 오류는 해방이후 향토사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없이 어느 한 책자가 발표한 용을 그대로 전재했기 때문인데,  살펴 본 바를 종합해 보연, 안양의 뿌리 즉 근원지는 삼성산에서 말원한 삼성천을 현계로 했고 뒤에서 언급을 하겠지만 안양의 영칭 유래가 삼성산.안양사에서 유래되었으니 염밀한 의미에서는 금천현이 안양의 근원지라는 것이 옳다고 보나 현 안양시의 인구 및 면적은 물론 안양 행정 중심지가 삼성천 이남의 지역으로  과거 과천현의 치역이었으니, 안양의 근원지는 과천현이라..

[20250420]성명/연현마을의 승리, 정의로운 판결을 환영한다

[성명서] 연현마을의 승리, 정의로운 판결을 환영한다 안양시 연현마을 아스콘공장 부지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도시관리계획 변경이 타당하다고, 법원이 다시 한 번 안양시의 손을 들었습니다. 제일산업개발과 한일레미콘 등이 안양시를 상대로 제기한 ‘연현공원 도시관리계획 취소소송’ 2심 소송에서 지난 3월 14일 수원고법은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도시관리계획 결정을 하면서 절차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고, 설령 절차의 하자가 있더라도 그러한 하자가 도시관리계획 결정을 취소할 정도의 위법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1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로써 안양시는 아스콘공장 관련 4건의 행정소송에서 모두 승소했습니다. 연현마을 지역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2심 판결에 안양군포의왕..

[20250311]안양 출신 독립운동가 하영홍과 삼막골교회

기독교인항일투사. 본관은 진주(晋州)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안양시 석수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한 후, 삼막골 마을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도하였다. 이어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이 교회의 속장이 되어 광무 5년(1901) 8월 6일 스웨어러(미국인) 선교사와 존스 장로사(현 감리사와 비슷한 직 책)와 각회 교회 형제·자매 70여명이 봉헌예배를 올렸다. 그 후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활하던 중 25세가 되던 광무 8년(1904)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시흥현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