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李熙昇, 1896~1989). 호는 일석(一石)이다.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 출생이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대를 이은 2세대의 대표적인 한글학자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는 한문을 배웠으나 청년기에는 서울에서 열정적으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회사를 다니며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업을 이어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이희승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는 조선어학회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제정, 사전 편찬 사업 전개 등 한글 정리와 통일 및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일제 강점 말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되는 등 우리 글과 말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 정책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다가 해방 직후에 석방된 학자 이희승은 독립운동가로도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희승의 대표적인 별명은 ‘딸깍발이’이다. 자전적 수필 ‘딸깍발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꼬장꼬장한 고지식”과 ‘죽음도 개의치 않고 덤비는 의기’는 현대인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 했다. 그는 스스로 ‘딸깍발이’를 자처했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의왕에서 출생한 이희승의 일생과 이희승의 우리글 연구, 조선어학회사건의 내용과 의미, 현재 의왕지역에서 이희승에 대한 기억의 방식 등을 의왕문화원 부설 의왕향토문화연구소 박철하 소장이 정리한 " 의왕 출신 이희승의 생애와 그리고 마을" 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의왕 출신 이희승의 생애와 그리고 마을
박철하(의왕문화원 부설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들어가며
이희승(李熙昇, 1896~1989). 호는 일석(一石)이다.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 출생이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대를 이은 2세대의 대표적인 한글학자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는 한문을 배웠으나 청년기에는 서울에서 열정적으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회사를 다니며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업을 이어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이희승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는 조선어학회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제정, 사전 편찬 사업 전개 등 한글 정리와 통일 및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일제 강점 말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되는 등 우리 글과 말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 정책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다가 해방 직후에 석방된 학자 이희승은 독립운동가로도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희승의 대표적인 별명은 ‘딸깍발이’이다. 자전적 수필 ‘딸깍발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꼬장꼬장한 고지식”과 ‘죽음도 개의치 않고 덤비는 의기’는 현대인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 했다. 그는 스스로 ‘딸깍발이’를 자처했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의왕에서 출생한 이희승의 일생과 이희승의 우리글 연구, 조선어학회사건의 내용과 의미, 현재 의왕지역에서 이희승에 대한 기억의 방식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이희승의 생애
이희승은 1896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儀谷面) 포일리(浦一里) 양지편 마을에서 이종식(李鍾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의 주소는 의왕시 양지편로 13-27(포일동 87-13)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촌(陽村)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이희승은 1900년 5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가 1902년에 선향(先鄕)인 개풍의 상조강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곳에서는 1903년부터 5년 동안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7년 다시 서울 아버지가 계신 서울로 와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했다. 학교에 다니던 중 13세 되던 해인 1908년 4월 이정옥(李貞玉)과 결혼했다. 한성외국어학교는 한일합병으로 폐교가 되면서 3학년에 다니던 중 1910년에 조기졸업하였다. 이후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편입학
1911년 자퇴
1912년 양정의숙 입학. 법학 전공
1913년 양정의숙이 양정교등보통학교로 개편되면서 자퇴. 가을에 전 가족이 고향 풍덕으로 내려감
1914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가 김포에서 사립 신풍학교 교원으로 취임
1915년 교원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정리과 고원으로 취직.
1916년 사립 중앙학교 3학년 편입학
1918년 중앙학교 수석 졸업. 학비를 벌기 위해 경성직뉴주식회사 서기로 취직. 1년 반 근무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 서기로 취직. 경성직뉴주식회사 서기로 근무하던 중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에 참여. 2일 밤부터 태극기를 그리고, 회사의 등사기를 몰래 가져다가 지하신문 제작(독립운동 소식, 조선문제에 대한 국제정세 등),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하신문을 만드는 생활을 4개월 동안 계속.
김성수가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그의 집에 2년간 기거하면서 경성방직 성립과 동아일보 창간 준비 지원. 회사에 4년 반 근무
1923년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 합격
1924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1학년 입학
1925년 연희전문학교 자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교 예과 입학
1927년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급 문학과 진학. 이희승의 동료로는 이효석, 이강국 등이 있음.
1928년 최현배를 찾아감. 그는 이희승을 조선어연구회에 소개하여 동지가 될 것을 맹약했다고 함.
1930년 조선어학 급 문학과 졸업. 학과 일본인 교수 다카하시 도루의 주선으로 경성사범학교 교유로 취임. 조선어연구회 정회원으로 입회
193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 급 문학과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어문학회 창립에 참여
1932년 경성사범학교 교유 사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4월 조선어학회 간사로 선출되어 이후 계속 중임. 철자법 제정과 정리, 강연 등에 적극 참여. 특히 브나로드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로 파견되어 여러 차례 현장에서 강연함.
1933년 10월에 완성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핵심적으로 참여
1934년 4월 조선어학회 제3대 간사장에 선임. 이듬해에도 중임. 5월에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윤재, 이병도, 김태준, 손진태 등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임. 이후 학회를 중심으로 연구에 매진.
1940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입학. 1년간 언어학 연구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과장.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 이후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
1945년 8월 17일 해방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출옥. 12월 경성대학(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로 번경) 법문학부 교수. 이후 문리과대학장 겸임하며 1961년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근무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에 선임
1956년 벙어리 냉가슴 출간
1959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강의(개정판) 출간.
1961년 국어대사전(민중서관) 출간
1963년 동아일보사 사장 취임
1966년 1989년까지 국어학회 명예회장과 고문 역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학원장 취임(1969년 퇴임)
1969년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창립. 초대 회장 취임
1971년 단국대학교 교수 겸 대학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 취임
1976년 수필집 딸깍발이 출간
1981년 동양학연구소장 사임. 3.1문화상 심사위원장. 광복회 고문.
1988년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명예회장 추대.
1989년 사망.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93년 국가유공자증 추서
주요 저서로는 조선어학논고(朝鮮語學論攷)(1947년, 을유문화사),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1946년, 신구문화사), 국어학개설(國語學槪說)(1955년, 민중서관), 국어대사전(1961년, 민중서림), 중등문법·고등문법(1956년, 박문출판사) 등이 가장 대표적인데, 특히 국어학개설(國語學槪說)은 당시 국어학 연구 수준의 이정표 역할을 한 역저로 평가된다.
5. 마을에서 한글과 놀다
의왕시에서는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이희승이 의왕시 포일동 출생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의왕시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알리고 나아가 그의 뜻을 기리고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널리 알리고자 2009년에 기존에(2006년) 조성된 문화의 거리 경관 광장과 조각공원을 ‘갈미한글공원’이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 공원은 한글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한글 알리기에 특화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14년 더불어가는 길, 사단법인 아리수, 한국미술협회 의왕지부 등이 중심이 되어 갈미한글공원을 무대로 ‘갈미한글축제’를 개최했다. 이후 의왕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내손 마을모임 등이 중심이 되어 ‘갈미한글축제위원회’가 구성되어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시민사회 독자적으로 추진되다가 의왕시 마을만들기 공모사업 또는 국토교통부 지원사업을 거쳐 2021년에는 경기도와 의왕시의 지원에 의한 갈미문화마을 사업과 연계하여 추진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2017년까지 중반까지 존재하던 이희승 생가는 현재는 사라졌다. 의왕시 도시개발 과정에서 마을 도로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이희승 생가를 헐어버렸다. 현재 이희승 생가터에는 5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이희승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안내도 없어서 일반인들은 이곳이 어떠한 역사적 공간인지 알지 못한다.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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