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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철하]6명의 정승을 배출한 의왕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5. 3. 24. 01:24

 

선시대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의 입향조는 조선 전기 무신 김우증이다. 입향조란 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을 얘기한다. 김우증은 1506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올라 왕곡동을 중심으로 한 사방 십리에 달하는 사패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현재까지 왕곡동은 청풍 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의 하나로 이어져오고 있다. 왕곡동 마을 입구에는 <청풍김씨 묘문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 중심부에는 청평군 김우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태도를 취했다. 특히 18세기에 100년 동안 6명의 정승을 배출하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6정승이란 우의정 김구(1703)를 시작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김구의 아들 김재로(1740), 역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1766),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낸 김구의 증손자 김종수(1793) 등 내리 4대에 걸쳐 배출된 4명의 정승, 그리고 김유(김구의 동생)의 아들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1749)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1759) 형제 등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노론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의 하나로 조선 후기 특히 숙종과 영조 시기를 거쳐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가장 세력이 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정책을 실시했다. 앞의 6정승들은 노론과 소론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영조의 탕평정책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청렴하였고,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주장하였으며, 탕평의 성과 가운데 하나인 균역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영조대에 노론 벽파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장헌세자, 정조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주요 인물로 지목된 김상로는 정조가 즉위하면서 삭탈관직 되었고, 그 직계 자손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자녀인 조카들까지 유배를 당하여 귀양길에 오르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많은 문집과 초상화 등 유물을 보존해 왔으며, 각종 석물과 신도비를 갖춘 왕곡동의 청풍 김씨 묘역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858년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온 김직연은 직접 그 내용을 󰡔연사록󰡕󰡔연행록󰡕이라 하여 각각 한문과 한글로 지어 후세에 전했다. 김직연 관련 기록물들은 현재 의왕시 향토사료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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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