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82

[20250218]조선총독부 1942년 조사한 안양 삼성산 사적 기록

2025.02.18/ #아카이브 #문화재 #안양 #삼성산 #조선총독부 #since1942/ 조선충독부가 1942년에 조사한 시흥군 삼성산의 사적 기록. 경기도 시흥군 삼성산 서남록(西南麓) 비‧귀부‧고분(제5호지), 암벽 조각(제6호지), 안양리 오층탑(제7호지)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마애종 등이 수록돼 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https://www.museum.go.kr/modern-history/view.do?seq=20249&aseq=238&fbclid=IwY2xjawIhXQxleHRuA2FlbQIxMAABHQuMLAqUQqnTCXbyl1RrDV..

[20250218]안양영화촬영소 제작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단지

2025.02.18./ #아카이브 #안양영화촹영소 #기록 #전단지 #since1959/명칭/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단지/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은 당시 국내 최고의 제작비인 7200만환을 투자하여, 당시 최대 규모의 세트장인 안양스튜디오에서 촬영하였다. 소장처/유물번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한박004014 1. 개요 전창근 감독이 연출하고 직접 안중근 역으로 출연한 1959년 개봉 영화.당시 한국 영화 3편을 제작할 수 있는 7,200만환 규모의 제작비가 들어간 대작이다. 영화의 하일라이트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을 위해 안양 스튜디오에 300여평 규모의 하얼빈역 세트를 만들었고, 출연진과 스태프 총 300여명, 연 인원 ..

[20250216]안양기독보육원 설립과정 및 초창기 운영 기록

네이버 블로그(2008jsl)2014. 11. 15. 7:45출처: https://blog.naver.com/2008jsl/220181778497 경성보육원(안양기적보귝원-해관육원-좋은집)의 설립과 운영(1919-1945)  이 글은 광주대학교 한규무교수가 향토서울 79호 (2011.10월)에 게재한 내용으로 현재 안양에 있는 좋은집(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해관육원-좋은집)의 총창기 설립과장과 운영실태는 물론 안양기독보육원이 분원 형태로 운영된 이야기. 농장을 운영하게 된 배경 등 귀중한 역사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기록은  네이버 블로그(2008jsl)에서 발견했으며 소중한 기록을 연구차원에서 함께 나누고 공유한다.  경성보육원의 설립과 운영(1919-1945)  1. 머리말 경성보육원은 일제강..

[20250215]1983년 <사진으로 본 안양시의 어제와 오늘> 기록

2025.02.15/ #아카이브 #옛사진 #역사 #기록 #사진첩/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첩   1993년 발간된 안양시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안양시 발간 도서로 당시 시승격 20주년을 맞이하여 안양이 형성된 초기부터 평촌신도시가 막 조성되던 1993년 당시까지 안양시의 모습을 담은 일종의 화보집이다. 두툼한 누런 보호뚜겅에 보관된 책자를 갖고 있고 이를 공유할까 하는데 분량이 많고 화보집 사이즈가 커서 스캐너로 사진 파일로 만들기가 용이하지 않아 고민하던차에 누리꾼 쥰(jiwoon39)이라 분이 네이버 블로그에 각 지면을 상하권에 담아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상권  https://blog.naver.com/jiwoon39/223270839923 소장자료 리뷰 43편 - 사진으로 본 안양의..

[20250215]안양기독보육원장 오긍선박사 길러낸 존 A. 알렉산더

조선의 醫師 오긍선박사 발굴하고 길러낸 미국인  존 A.  알렉산더[출처]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409100057 월간조선: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 [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 프린스턴·컬럼비아의대 나온 大부호의 아들… 1902년 來韓했으나 父親喪으로 두 달 만에 귀국⊙ 조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지속 교제… 순천에 알렉산더 병원 등 교회당과 병원 건립⊙ 배재학당 졸업한 청년 吳兢善을 켄터키 루이빌로 데려가 朝鮮 최고의 의사로 키워⊙ 1929년 우드포드에서 향년 53세로 별세… 吳兢善 키우는 등 선교사 역할 톡톡히 해내 1902년 늦가을 11월, 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 ..

[20250213]1919년 의왕 독립만세운동(매일신보 4월 5일자)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면사무소 앞에서 주민 80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당시 매일신보 4월5일자 신문기사에 경기도지역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실렸다. [박철하]일제강점기 시대의 의왕의왕문화원 부설 의왕지역문화연구소장 1910년 강제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적인 무단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은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헌병경찰을 동원해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토지를 비롯한 경제수탈을 자행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를 내세웠지만 이는 민족분열정책에 불과했다. 일제는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 수탈했어요.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반일 독립운동을 전..

[20250208]단군 이래 최대 비극 100년 전 <을축년 대홍수> 보고서

2025년 올해는 국내 ‘20세기 최대 자연재해’라고 불린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한지 100년째 되는 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단군 이래 최대 비극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의 그것보다 크다고 평가한다. 1925년 을축년에 발생해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라 불리우는 국내 역사상 가장 큰 훙수 당시 서울·경기 300~500mm, 파주엔 무려 650mm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한강이 넘쳐났다. 7~8월에만 전국 4곳에서 대홍수가 터졌다. 피해도 상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사망자 647명, 피해액 1억300만원이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최병구)은 을축년 대홍수를 톺아보는 기획연구인 ‘을축년 대홍수 그 후 ..

[20250207]1937년 발행 <경기명승사적> 수록된 안양풀

202502.07/ #아카이브 #기록 #옛사진 #안양풀 #경기명승사적 #시흥군/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지방행정학회에서 소화12년(1937년)에 발행한 경기명승사적 책자에 수록된 1930년 안양풀의 모습이다.  지금은 안양예술공원이라 부르는 이곳이 과거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명했던 수도권주민들의 여름철 휴양지 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까.안양예술공원(안양풀-안양유원지)에 대한 사진 기록으로는 현재까지 찾은 것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이 아닐까 싶다.현재의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계곡을 막아 풀장을 조성하고 하천 암반 초석에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安養プ―ル(안양 풀 pool)'이라고 기록하고 일본 연호와 조성자 이름도 새겼다.기록을 보면 안양풀..

[20250206]대한제국기, 시흥군 민중운동과 의병

[금천신문]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시흥군, 민중운동을 견인하는 에너지원최석희 ・ 2019. 4. 11. 13:08​ '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를 주제로 우리동네 '마을신문 금천in'에 기고한 마지막 기사 입니다. 원문보기 1898년 1차 시흥농민봉기와 1904년 2차 시흥농민봉기 그리고 1919년 시흥군의 3.1운동을 볼 때 시흥군은 우리나라 근대 민중운동의 중심지 였다. 당시 시흥군은 금천과 구로, 영등포, 동작, 관악, 광명과 안양, 과천, 의왕, 안산을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차 시흥농민봉기는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지 4년 만에 일어났다. 당시 위정자들은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요구는 수렴되지 않았으며..

[20250205]한글학자 이희승 선생의 내가 겪은 3·1운동

[금천마을신문]금천구의 3.1운동-2] 내가 겪은 3·1운동-이희승2019. 2. 28. 11:03원문보기 https://gcinnews.tistory.com/4966 내가 겪은 3·1운동-이희승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시흥군(의왕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희승 선생은 “내가 겪은 3·1운동”을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에 1969년 게제했다. 본 지는 시흥군 출신의 이희승 선생의 글을 100주년을 맞아 다시 읽어봄으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되짚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회승 선생은 “호시탐탐한 일본은 1910년 기어이 한일합방이란 명목으로 한국을 완전히 병탄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태왕이란 치욕의 칭호 밑에서 10여년을 지내다가, 1919년 1월 21일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