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00923]안양(安養)권역 우체국 연혁

이야기보따리/자료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  우체국 연혁 / 사용필    

2018. 11. 30. 8:30


1905년 5월 29일 : 안산(安山)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안산(安山)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16일 : 안산(安山)우편소 설치 (總告133, 1911.5.11) 경기도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1915년 7월 1일 : 안양(安養)우편소로 이전 개칭 (總告148, 1915.6.15) ◈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1941년 2월 1일 : 안양(安養)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1950년 1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개칭

2000년 5월 1일 : 서안양(西安養)우체국 개국 (情通部訓令200, 2000.4.17)

​1995년 9월 1일 : 안양평촌(安養坪村)우체국 개국 (서울廳公1995-111, 1995.8.31) 관인 등록

​2000년 5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1905년 5월 20일 : 과천(果川)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과천(果川)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31일 : 과천(果川)우체소 폐지 (總告157,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과천읍

1911년 6월 1일 : 과천(果川)우편소 설치 (總告156,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군내면 관문동

​1941년 2월 1일 : 과천(果川)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과천(果川)우체국


​1986년 12월 30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6년 10월 2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1997년 11월 10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270708) [과천우면] [KC. U-MYON]

2008년 5월 6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12월 30일 : 과천중앙(果川中央)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89, 1985.12.18)

                                (171-11) [과천중앙] [KC. CHUNGANG]

1997년 1월 31일 : 과천중앙동(果川中央洞)우편취급소 위탁계약 해지 (서울廳告1997-1, 1997.1.27)

​2009년 4월 6일 : 수원지방법원안양지원(水原地方法院安養支院) 출장소 개소

 


1973년 5월 19일 : 안양4동(安養四洞)우체국 개국

 

1997년 4월 7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9월 16일 : 안양관양동(安養冠陽洞)우체국 개국 (서울廳公672, 1985.9.3) 관인 등록

 

1997년 11월 10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310628) [안양새마을] [AY. SAEMAUL]

 

2008년 5월 6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새마을] [AY. SAEMAEUL]

2020년 8월 3일 : 안양관양2동(安養冠陽二洞)우편취급국으로 국명 변경 (京仁地廳告2020-14, 2020.7.9)

                            [안양관양2] [AY. GWANYANG2]

 

1992년 12월 30일 : 안양귀인동(安養貴仁洞)우체국 개국 (遞告1992-84, 1992.10.1)

                                6급 (4300701) [안양귀인] [AY. KWIIN]

 

 

1992년 11월 10일 :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우편취급소 개소 (遞告1992-94, 1992.10.27)

 

                                (4300839) [안양교도소] [ANYANG CI.]

1996년 11월 1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소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6-83, 1996.10.14)


​                           (4310839)  [안양덕고개] [AY.  TOKKOGAE] 이용자 불쾌감 고려

​2008년 5월 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4년 10월 1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4-16, 2015.9.15)

 

 

2012년 12월 29일 : 안양덕천(安養德泉)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2-10, 2013.1.3)

 


1994년 11월 26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1994-1, 1994.11.26)

 

2015년 6월 1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폐국

1992년 3월 30일 : 안양평촌동(安養坪村洞)우체국 (遞告1992-23, 1992.3.30)

 

                              6급 (4300706) [안양평촌] [AY. PYONGCHON]

1995년 9월 11일 : 안양부림동(安養富林洞)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5-113, 1995.9.13)

​                              6급 (4300656) [안양부림] [AY. PULIM]

 


​2001년 8월 20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소 개소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529) [안양비산삼호] [AY. BISAN SAMHO]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7년 9월 10일 : 안양석수동(安養石水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9, 1987.9.14) 관인 등록

 


1987년 12월 30일 : 안양석수아파트(安養石水-)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석수아파트] [AY. SOKSU APT]

 

 


1986년 10월 2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우체국 역전(驛前)분국

1971년 1월 4일 : 안양역전(安養驛前)우체국으로 승격 (遞信部令535, 1974.12.28)

 

 

1990년 1월 10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118) [안양진흥] [ANYANG JINHUNG]

2008년 5월 6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재개국 (京仁地廳告2013-1, 2013.1.17)

 

 

​1990년 1월 10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429) [안양충훈부] [AY. CHUNGHUNBU]

2008년 5월 6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2011년 12월 21일 : 안양호계동(安養虎溪洞)우체국 개국

 


1983년 12월 27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소 개소 (遞告213, 1983.12.31)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1987년 12월 30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호계3] [AY. HOGYE3]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828) [안양호계현대] [AY. HOGYE HYUNDAI]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51년 12월 1일 : 중앙청내(中央廳內)우체국 당분간 일반사무취급 중지 (遞公61, 1951.11.24)

                              광화문우체국 승계

중앙청구내(中央廳構內)우체국

1983년 5월 1일 : 과천정부종합청사구내(果川政府綜合廳舍構內)우체국으로 이전 국명 변경

                           (서울廳公502, 1983.4.28) 관인 등록

 


1983년 5월 11일 : 과천정부제2청사(果川政府第二廳舍)우체국 개국

1998년 3월 2일 : 정부과천청사(政府果川廳舍)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8-17, 1998.2.16)

                            6급 [정부과천청사] [GOVT. KWACHON]

 

 

1977년 7월 1일 : 제132군사우체국 개국 (체기행151.1-20281, 1977.7.15)

2005년 2월 1일 : 안양우체국 제132군사우편출장소로 명칭 변경

[출처]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작성자 강경원  https://blog.naver.com/400251/221409238383 

[최병렬]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2020.08.27)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

각 고장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있다. 안양시에도 8경이 있다. 문화, 역사 등을 아우르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안양8경이다. 수리산과 삼성산, 관악산으로 둘러싸인 안양시에는 도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명소가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안양시는 지난 2003년 안양을 대표하는 명소로 안양8경을 선정한 데 이어 안양시민으로서의 자긍심 고취와 도시경쟁력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2007년 3월 안양의 자랑거리 49가지 선정에 나서 시민과 공무원 의견을 수렴하고 지역원로, 교수,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6차례 걸친 심사를 거쳐 2008년 1월 28일 개최한 '안양의 자랑거리 심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자연환경 ▲문화유산 ▲문화체육분야 ▲산업경제분야 ▲조형·건축물분야 ▲안양시 우수시책 등 7개 분야에서 49가지를 안양의 자랑거리로 확정했다.

안양 8경중 제1경은 행운이 따르면 멀리 서해낙조도 가능한 관악산 '망해암 일몰', 제2경은 자연 형태의 모습이 이채로운 '삼막사 남녀근석', 제3경은 신도시에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평촌 중앙공원', 제4경은 사도세자 능참배 역사가 담긴 '삼막천 만안교'다.
제5경은 순교 성인의 정신이 담겨있는 수리산 최경환성지, 제6경은 안양유원지에서 예술작품의 보고로 변신한 '안양예술공원', 제7경은 돌을 한켜한켜 쌓아올린 '병목안삼림욕장 석탑', 제8경은 명실공히 안양중심이라는 할 수 있는 번화가인 '안양1번가'다.


제1경 - 망해암 일몰​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에 위치한 망해암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뜻[1]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視界)가 탁 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 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악산의 한 지류인 비봉산 망해암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대림대학교 옆의 관악산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망해암은 대림대학교 입구에서 임곡중학교를 거쳐 망해암까지 약 2km, 걸어서 30분, 자동차로는 7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가 울창하고 길이 좋아 차로 가도, 걸어서 가도 자연과 함께 하는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간혹 내려가는 차와 올라가는 차가 서로 마주칠 때가 있지만 중간 중간 폭이 넓은 공간이 있어 차량 이용에 큰 어려움은 없다.
날 좋은 날 시야가 탁 트인 망해암에 올라 바라보는 시가지와 서해 일몰의 조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망해암은 동안구 비산동에 위치한 전통사찰로 봉은사말사지에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조선 순조3년(1803)에 정조대왕의 모친인 홍대비께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망해암이란 명칭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가 탁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서해 너머로 붉게 물들어 가고, 갈 길을 재촉하는 도심의 차 소리와 어우러져 회상 속에 빠져들게 하는 곳, 서해의 붉은 바다와 해가 진 후 어둠이 깔린 안양 시내를 바라보는 야경은 망해암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


제2경 - 삼막사 남녀근석​
삼막사 남녀근석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위치해있다. 신기한 자연의 예술품인 남녀근석(男女根石)은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있으며, 1985년 6월 28일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풍화된 2개의 자연 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녀 성기(性器)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근과 여근의 거리는 2m이며 남근의 높이는 1.5m, 여근의 높이는 1.1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는바,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동남아 지역과 일본에도 많이 산재해 있다.
삼막사는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제3경 - 평촌중앙공원​
평촌중앙공원은 각종 조경수와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다목적운동장 등 체육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특히 4계절 테마(봄정원, 여름정원, 가을정원, 겨울정원)를 부여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4계절에 맞게 식재된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여 시민의 정서를 함양시키고 쾌적한 도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도심 공원의 미래상을 조명하며 공원내 수경시설은 207m의 계류와 다양한 형태의 분수 시설(상징분수, 스크린분수, 터널분수, 바닥분수)로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도심 속에 찌들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더 청량하게 해준다.

제4경 - 만안교​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천로211번길 5에 위치해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1795년(정조 19)에 축조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만안교는 길이 약 30m, 폭 약 8m, 높이 약 6m에, 7개의 아치형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으며 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멀리서 다리 전체를 바라보면 7개의 아치형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시 정조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 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만안교를 경유하게 되었다.
원래 위치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 쪽 이었으나 1980년 8월 국도 확장을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만안교는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태령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행차로를 닦는데 어려움이 있어, 정조가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도록 명을 내려, 영국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만안교 남단에는 건립당시 세운 만안교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만안교비 축조 당시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되었다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큰 공사였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뜻대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굳건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가 된 ‘만안교 다리 밟기’가 해마다 열린다. 

제5경 - 수리산 성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394에 위치한 수리산 성지는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연 성지이다. 수리산 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며, 전국 각지에서 연중 30,000여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양9동 병목안시민공원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담배촌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있다. 이곳은 하동 정씨를 비롯해 금녕 김씨, 원주 변씨, 청주 한씨 등의 거주지로 183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정착한 천주교인들이 담배를 경작하며 살던 곳이다. 1939년 최경환 성인이 옥에서 순교 후 매장된 지역으로 이후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성지성당에는 주일이면 미사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성당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리산성지가 있다. 수리산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연중 3만 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최경환은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의 아버지이다. 이성례 마리아와 담배촌에 정착, 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파하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 온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최경환은 배교하라는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장렬히 순교하였다. 부인 이성례도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으로 천묘 후 다시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25년 교황 성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위치 안양시 안양동 병목안로 394


제6경 -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일대에 위치해있다. 안양예술공원은 안양유원지의 새로운 이름으로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주변의 전통사찰 및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어 과거 수도권의 휴양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안양의 명물로 이름을 떨쳤던 포도가 오가는 이의 미각을 돋우어 주던 곳이다.
안양예술공원은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주변에는 안양사, 염불암 등 고찰과 중초사지 당간지주, 석수동 마애종 등의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고 안양박물관과 김중업박물관, APAP(안양예술공공프로젝트) 예술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인공폭포, 야외무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물이 맑아 물놀이하기에도 좋고 계곡 옆에는 수영장이 개설되어 있어 여름철 휴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안양예술공원의 중심도로인 예술로를 따라 올라가 산으로 진입하면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진행으로 설치된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다. 스탬프 투어도 가능하며 스탬프 리플렛은 주변에 있는 안양박물관이나 안양파빌리온, 김중업박물관에서 받을 수 있다.
이곳의 대표 예술작품인 전망대는 네덜란드 작가 MVRDV의 작품으로 삼성산의 등고선을 연장하여 산의 높이를 확장한 전망대로, 이곳에 올라가면 안양시를 비롯한 안양예술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다가오는 여름, 주말 나들이로도 제격인 안양예술공원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예술작품 감상하면서 더위도 날리고 이색적인 분위기도 느껴보자.
위치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2


제7경 - 병목안 산림욕장 석탑​
병목안 산림욕장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75에 위치해있다. 이 석탑은 병목안을 상징해 주면서도 수리산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한 병 모양의 석탑! 양쪽에 조화롭게 병모양으로 쌓아 올린 탑은 주변의 쓸모없는 돌무더기들을 이용해서 자연의 조화와 인공의 미를 살린 수리산 산림욕장의 명물이며 이정표이기도 하다. 석탑이 상징하듯 백영약수터 오르막길에는 돌무더기 곳곳마다 정성을 쌓아 올린 돌탑들이 무수히 쌓여있다.

제8경 - 안양1번가​
안양1번가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139번길 7에 위치해있다. 안양1번가는 1996년부터 매년 10월에 젊음의 도시·패션의 거리 안양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시민들에게 볼거리 제공과 함께 자유와 멋과 낭만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안양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안양1번가’는 안양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안양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안양의 금융과 교통, 상권을 태동시키고, 지역 발전을 이끌었다하여 ‘안양1번가’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평촌 신도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안양의 대다수 젊은이가 모이는 번화가 중의 번화가였다. 안양1번가 입구는 약속장소의 대명사였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단연 일순위였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곳은 많은 젊은이들이 쇼핑과 먹거리, 놀이를 위해 찾고 있다. 또, 3~40대 이상에서는 추억을 위해 찾기도 한다.안양1번가는 메인 거리를 중심으로 가지처럼 옆으로 길들이 나있다. 이 길에는 옷가게와 잡화점 등은 물론 다양한 즐길거리와 먹거리 등을 제공하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게들은 한자리에서 몇 십 년째 영업해 온 곳도 있고, 맛집이나 명소로 소문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도 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점들이 자리한 탓에 원스탑 쇼핑을 즐기러 오는 쇼핑족도 많다. 이들의 시선을 끌고자 유행의 변화도 빠른 편이다. 매년 10월에는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뿐만 아니다. 안양1번가 주변은 재래시장인 중앙시장과 남부시장은 물론 안양역 등이 자리해 있어 쇼핑과 교통의 편리함까지 더해준다. 거기다 안양1번가 아래는 수많은 상점들이 밀집한 지하상가가 조성돼 있어 또 하나의 거대 상권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안양1번가는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안양 최대의 번화가로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일원
시민이 뽑은 안양 자랑거리 49가지

 

'자연환경' 분야로는 안양을 병풍처럼 둘러싼 관악산, 수리산, 삼성산과 생태하천으로 돌아온 학의천, 서울대 관악수목원, 효성공장 진달래 동산, 병목안 시민공원, 석수체육공원, 석수동 염불암 보리수, 석수동 할아버지·할머니나무 등 10가지가 포함됐다.

'문화유산'으로는 경기도 유·무형문화재인 삼막사 삼층석탑, 생칠장, 북메우기, 삼막사 명부전, 안양사 귀부와 부도, 석수동 마애종, 구 서이면사무소와 비지정 기념물인 평촌 지석묘, 관양동 청동기 유적, 만안답교놀이, 안양날미농악, 안양시민의 소리북, 보물 제4호 증초사지 당간지주 등 14가지가 꼽혔다.

'문화체육' 분야는 안양의 대표적 축제인 안양시민축제를 비롯 예절교육의 메카인 안양예절교육관, 공연장인 평촌아트홀, 안양체육관, 세계대회를 훌륭히 치러낸 안양롤러경기장, 안양을 연고로 하는 프로구단인 안양KT&G 카이츠농구단과 안양한라 아이스하키단 그리고 유명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안양예술고등학교 등 8가지가 자랑거리에 합류했다.

'산업경제' 분야에서는 명학역~평촌역~인덕원역으로 연결되는 안양벤처벨리, 대표적 재래시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시장, 각종 산업기자재를 한데 모은 안양국제유통단지(호계3동), 안양 명품 농산물인 안양포도 등 4가지가 자랑거리에 이름을 올렸다.

'조형·건축물' 분야로는 안양예술공원의 대표적 건축물인 알바로시자홀, 안양전망대, 김중업 디자인 건축물 등 3가지와 '우수시책'에는 안양을 명품 예술도시로 디자인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안양아트시티 21과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등 2가지가 각각 선정됐다.

의왕 도심속 부곡철도관사촌 조사 자료(2020.08.25)

이야기보따리/자료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도를 까는 일이었다. 경성을 거쳐 평양, 의주를 지나 만주까지 군사와 물자를 보내는데 철도만큼 시급한 일도 없었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는 경원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함북선 등 국토 곳곳에 터널을 뚫고 철로를 깔아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의 지렛대로 삼았다.

철도가 깔릴수록 종사원도 늘 수밖에 없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가장 거대한 기관이었는데, 1906년 6월 통감국 철도국 시절에는 5400명이었으나 해방 직전 1945년까지 10만6000여명으로 급증했다.

거대해진 기관만큼 ‘철도가족’끼리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각종 후생복지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타 기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후생복지는 철도 종사원에게 제공되는 주거시설인 철도관사나 철도병원의 의료혜택이다.

경성의 용산, 청량리, 수색이나 부산 초량, 대전, 순천, 평양, 강계, 해주 등 전국 철도 교통 요충지에는 수백 동의 대규모 관사 단지가 조성됐다. 이뿐만아니라 역사의 규모에 따라 중규모 단지, 작은 역에는 소규모 단지를 이뤘다. 역장 관사는 단독 건물로 역과 인접하여 따로 지었다. 이러한 단독주택 주거단지는 요즘으로 치면 '타운 하우스'인 셈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택 문화였다.

현재 일제강점기 내내 얼마만큼 철도관사가 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오늘날 거의 소멸됐으며 철도관사가 존재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단지는 가로세로 구획을 잘 나눴고 주택들은 정남향이다. 초창기에 지은 철도노동자 숙소는 막사형의 연와조 목조 가건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돌로 벽을 올린 목조단층에 시멘트 기와를 얻은 일본 전통가옥양식의 근대화된 형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의 전통 난방 시설인 온돌을 가미하기도 했다.

[다크 헤리티지를 찾아] 일제강점기의 '타운하우스' 철도 관사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 또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말한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부설되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은 1943년 지금의 의왕시 삼동 192번지 일대를 철도기지화 시킨후 철도국 종사자를 위한 소규모 신도시를 계획하였고 100여동 200세대의 관사단지(官舍團地)를 조성하였다.
용산에 근무하는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부곡관사로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통근편의를 위하여 1944년 수원역과 군포역 사이에 철도역을 신설했는데 이 역이 부곡역(2003년 의왕역으로 명칭변경)이다.

부곡역은 경부선 수원∼군포 사이에 있는 역원이 배치된 간이정차장으로 위치로는 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였고 철도 거리상으로는 수원∼부곡은 8㎞, 부곡∼군포는 3.8㎞로 당시 의왕 철도관사촌이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후 이후 의왕지역에 철도관련 시설들이 대거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부곡역(현 의왕역)은 1964년 11월2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고, 1967년에는 역구내 인접지역에 남영금속주식회사(한국기계, 현 대우중공업)가 설립돼 의왕시가 철도차량 생산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는 시발점이 된다.
1974년에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철도화물기지 준공으로 의왕시 철도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연이어 철도박물관과 한국철도대학(현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철도공사 인재개발원 등 세계적 수준의 집적화된 철도시설이 들어서 그야말로 의왕시가 철도산업의 요충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철도 관사촌이 조성된 당시에는 넓은 대로변에 좌우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었으나 현재는 도로 폭이 좁아지고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현재 약 35동 정도의 건축물에는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고, 3동 정도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택들은 시멘트 몰탈 벽도 깨끗하고 복원도 가능한 상태로 이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대의 철도관사(鐵道官舍)로 문화재 가치가 높아 시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도시와 건축도 생명체처럼 생노병사한다. 의왕시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건축사로 안양지역 문화찾기와 보존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사료 발굴과 알리기에 앞장서온 시흥군 태생의 최승원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겸임)는 "건축의 나이도 60살이 되면 축하해 주자"며 오래전 부터 부곡역 주변의 철도 (구)관사의 보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부곡역 관사촌은 해방동이(1945년)로 태어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야생초처럼 살아 남아 있다며 태어날 때는 넓은 대로변 좌우로 건축 되었는데 도로 폭을 줄이고 난 개발로 인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모습이라고 느낌을 피력했다.
또한 오래된 건축이지만 시멘트 몰탈벽이 깨끗하고 복원이 가능하다며 "건축도 60살이 되면 수리도 해 주고 주변에서 칭찬도 해 주어야 오래 산다"고 철도 박물관이 철도관사의 부분 복원과 연계될 때 철도 관광의 볼거리가 풍부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부곡역 설치 이후 100년이 흘렀지만 도시의 유산(물)이 몇 개나 남아 있는가? 묻고 의왕시는 Celebration of Cities에 속한다고 문화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의왕시사에 기록된 철도관사 이야기

 

의왕역에서 내려 이정표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도와 관련된 많은 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철도대학, 철도박물관 이정표가 보이고, 철도공무원연수원(중앙연수원)이 있고, 일제시대 때 일본인 철도공무원들의 관사였던 집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인근의 (주)로템은 기관차, 전동차 객차를 생산하는 곳이며, 의왕ICD가 생긴 것도 이러한 철도와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기도내 철도용지 비교하면, 의왕시가 네 번째로 많은 철도용지(130만 1,975.3㎡)를 가지고 있다.8) 이것은 의왕시 전체 면적(5,395만 3,257.1㎡)의 2.4% 차지하는 면적이다.
그러나 의왕시가 철도와 깊은 인연을 짚은 것은 이 면적에서 보이는 비중이 아니라 옛 부곡역 외에도 철도관사가 있기 때문이다.9) 100세대 200호를 지었던 이 옛 일본철도공무원 관사는 현재 정확히 몇 채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부곡중앙길을 올라가며 좌우로 드문드문 보이는 지붕을 볼 수 있다. 이들 관사는 현재 음식점이나 주점으로, 월셋방을 놓은 다가구 임대주택으로 개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사는 사라졌으나 그 터에 새로 지은 연립주택들이 많고 이 길 끝에 이르면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만나게 된다. 중앙길을 올라가며 왼쪽은 1~50호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며, 그 끝에서 다시 내려오며 51~100호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이 옛 일본인 관사에 살고 있는 최재희는 이 관사가 “일본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려고 이렇게 지은 거”라고 한다.
1채 지으면 2가구가 살게 된 거, 이렇게 100호를 지어 200세대가 살았어요, 살기는 반반 짤라서 200세대가 살았어. 일본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 나서 서울 살면 위험하니까 피난집이지. 살기 위해서 지은 거야, (전쟁에) 졌으니까 일본으로 간 거고. 그 때 당시 해방돼서 한국사람이 철도에 다닌 사람들이 산거.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한국철도에 다니는 사람이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산거, 배당은 어떻게 된 줄 몰라도 철도의 각 분야 다니는 사람에게 불하를 한 거지. 살지 못한 사람들은 팔아서 나가고, 철도에 개인에게 팔았는데 철도를 관 둔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팔아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고, 팔아서 빌라 짓기도 하고.10)
일본인의 피난집은 지금 여러 형태로 개조하여 사용되고 있는 모습에서 그만큼의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지만, 최재희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앞뒤로 있는 연립들이나 빌라들과 달리 그의 집 대문은 장미덩쿨로 아치를 만들고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한쪽 귀퉁이에는 국화와 장미들이 자라고 우물이 있었던 자리 뒤로는 감나무가 있었다. 또 한쪽에는 배추와 고추들이 자라는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부곡이 공기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연립, 아파트가 들어와서 공기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 울타리 안만큼은 예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정경이 그대로였다. “이 집에 산 것은 약 50년이 되는데, 그것도 철도 전기계통에 근무하여서 지금의 집을 불하를 받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불하 받을 때 필요한 것 중에 입사증이 있었는데, 내가 산 것만 알지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이 없어. 철도에는 운전·전기 계통이 있어서 그 분야에 ‘너는 몇 채 갖고 있어라’ 배당 한 후 나중에 불하한 거고. 6·25가 나서 몇 채 없어지고 그 나머지는 빌라 아파트가 들어오고. 이렇게 관사를 왜놈들이 피난집으로 지은 거예요. 이거 짓기 위해서 간이역을 지은 거고. 철도공무원만 출퇴근 할 수 있게.
최재희에게 피난집으로 각인된 이 관사는 1960년대 후반, 개인에게 불하되었는데 이것을 관장한 곳은 수원세무서였다. 평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1가구가 보통 130~140평이었다. 1946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부곡으로 내려와 관사에 살았던 단창욱도 당시 관사의 내부에 대해, “관사 1가구는 목욕탕이 있었고, 다다미방이랑 온돌방이 두개 있는 19평짜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호가 두 가구로 46년 당시 전기, 목욕시설, 문화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어요. 일본사람 사용하던 거 그대로. 아침 출근시간엔 역사에서 싸이렌을 울려주곤 했어요”라고 하였다. 이 관사가 생김으로써 간이역이 생겼고, 해방 후 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은 부곡이 중심지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때 관사는 철도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목욕시설과 전기, 전화시설을 갖춘 ‘문화시설’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관사가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예를 들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고장을 집집마다 돌리는 게 가능하였고, “몇 호집이냐?”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 가능하였다. 체육대회가 열릴 때에도 관사를 중심으로 귀속의식이 있어서 중앙길을 중심으로 ‘남관사(1~50호)’, ‘북관사(51~100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철도가 생겨 전기·전화가 들어오면서, 부곡은 중심지가 되었고, 부유층은 관사에 살기도 하였다.11)
1943년 건립된 이 철도관사는 당시 교통국의 중추인 용산·경성지구의 배후기지로서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곡관사의 형태는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고 현관이 측면으로 되어 있다.12) 그리고 서너집이 공동우물을 있었고, 집 앞으로는 작은 도랑을 내어 하수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대체로 객화차 사무소 직원, 철도 전기수선공, 선로보수 관계자, 기차역 근무자, 기관사 등이었다.13)
지금은 여러 가게들과 월세방으로 변해버린 철도관사는 그래도 기와를 올린 지붕과 시멘트를 바른 허름한 벽이 옛 모습을 알게 해준다.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실제 60여 년 동안 부곡 주민의 주택으로서 버텨왔으며, 의왕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주택단지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따라서 사라져가는 관사의 옛 모습은 일제의 잔재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민이 겪은 근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로서 근대문화 유산의 의미가 있으며, 한국철도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며 그 시설이 집적되어 있는 의왕시에서 이는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1부) 중앙로 남쪽

https://blog.naver.com/kgh19941061/220498320565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2부) 중앙로 북쪽

https://blog.naver.com/kgh19941061/220519040520

 

의왕 철도관사 탐행기(상편) 중앙로 남쪽

https://m.blog.naver.com/kgh19941061/221076489708

 

의왕 철도관사 탐행기(하편) 중앙로 북쪽

https://m.blog.naver.com/kgh19941061/221078381124

[김정기]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학교풍경 1(2013.10.28)

이야기보따리/기억


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학교풍경 1

안양초 25회 졸업생 김정기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가? 비틀스 출신 폴 매카트니(71)가 비틑스와의 향수 짙은 과거를 다룬 신곡 "뉴"를 내면서. "옛날 회상은 내게 큰 기쁨"이라고 했다던가? 이말은 어쩌면 나에게도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쓸때면 마치 내가 철없이 즐겁게 뛰어 놀던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하게 돼지. 그러나 나이먹어 갈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기억은 잡을수록 멀어져 가기만 하는거 같다. 어찌보면 내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멀리 스러져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잡으려는 나의 마지막 발버둥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른 자료 없이 희미한 내 기억을 더듬어 어렸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1학년에서 6 학년 까지의 학교 풍경을 도면으로 그려 보고자 하였다. 혹시 내 기억에 동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 해 주시기를 바라고, 여러 동무들도 이 도면에서 뛰어 놀았던 생각나는 부분이 있으면 나와 동참하시기를 바라지.

1 북쪽 교문, 2 우리 동창 성춘강네가 운영한 문구점, 3 본관 뒤에 위치한 숙직실과 변소-정식 변소외에도 이지정이 빠졌다는 소문이 있던 간이변소가 있었던 것 같고,
4 본관-1~4학년 까지 배웠던 교실, 5 우리가 6학년때 교실, 6 연못안에 만든 한반도 지도, 7 본관 중앙문-조회 때는 선생님들이 이 문을 통해서 출입,
8 졸업사진 찍은 본관 앞 국기 게양대, 9 겉벽을 판자로 둘른 교실, 10 운동장으로 내려 가는 계단, 11 최근에 세워진 교실, 12 공민학교 학생들 천막교실,
13 교실난 해소를 위해서 임시로 세워진 천막교실 또는 나중에 운동회 응원석, 14 우물, 15 가축연구소쪽이나 김양복이네 가는 후문,
16 1번국도쪽 교문-이 문은 한번도 드나든 적이 없고 혹시 전유석이는 집에 갈때 이 문을 통하지 않았을까?, 17 운동장, 18 철봉대.
 

[기사]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20200629)

이야기보따리/기사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
뉴스워커(http://www.newsworker.co.kr)

신대성 기자 승인 2011.08.22 12:16 
 
의왕시민은 89년 市로 승격한데는 대우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 믿는다
대우사원아파트 37개동 1138세대, 4~인 기준 5~6천명 인구 유입효과

※글에 도움주신 분들
신창현 전 민선1기 의왕시장(대우건설 OB),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대우건설 OB),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대우건설 OB), 김주민 내손라재개발구역 이사, 임신택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대우건설 홍보실 외 다수

의왕시 정비사업현황을 취재(52페이지 참조)하던 중 가장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이 포일대우사원아파트이었다. 이곳은 현재 대림산업이 재건축을 수주해 현재 의왕 내손 대림e편한세상이 들어선 곳이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원아파트는 도심지에 건립한다. 출퇴근이 용이하여 업무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아파트는 지금 대림산업에 의해 리모델링되어 ‘압구정 아크로빌’이라는 고급아파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대우건설은 의왕면 포일리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다.(대우사원아파트가 건립된 때는 84년 4월이며, 의왕이 시로 승격한 때는 89년 1월이었다.) 그것도 1138세대라는 당시로는 메머드급 대형아파트였다. 일개 읍 따위에 이렇게 대단지 아파트를 짓게 된 것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읍에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했는가

이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기 위해서는 대우건설 출신들을 만나봐야 했다. 이 때 연락이 가능했던 분들이 신창현 전 의왕시장(민선1기)이었으며,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 그리고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등이었다. 이들 중 신창현 전 시장과 김동화 대표는 의왕대우사원아파트에 직접 살고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건네 오는 답은 간단했다. “땅값이 쌌으니까 그곳에 아파트를 지었지” 신창현 전 시장의 말이다. 김동화 대표는 당시 신입사원 시절이어서 잘 모른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내손 라구역의 김주민 이사가 알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포일택지개발지구로 1978년부터 개발계획이 나오고 택지개발공사가 이뤄졌다.

당시 포일동·내손동 일대는 배나무 밭이었다. 이곳에 땅을 깎고 평평하고 반듯하게 구획을 정리하는 사업이 이뤄졌다.

포일택지개발사업에 선두에 선 곳이 대우건설이었다. 대우건설은 1차 포일주공 터(지금의 포일자이)를 구획정리하고 2차로 대우사원아파트(지금의 포일 e-편한세상)터를 정리했다. 그 이후 대우건설 계열회사가 지금의 내손 가·나·다·라 지역의 구획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건설이 의왕 포일동에 대우사원아파트를 짓게 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앞서 신창현 전 의왕시장이 말했던 것처럼 땅 값이 쌌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당시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되고 주택건립사업을 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선 곳이 없었다. 주택공사에 1차부지인 포일주공은 짓게 했지만, 2차 부지까지 떠넘기기에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에 택지구획정리를 맡은 대우건설이 총대를 메고 아파트를 이곳에 건립하게 됐다.

대우건설이 아파트를 건립하게 된 시기는 81년부터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최초의 주택건립사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81년 12월에 착공하여 83년 4월에 준공을 마친 개포고층아파트(대우라는 이름을 당시에는 쓰지 않았다.)가 최초였다.(자료, 대우건설 홍보실) 그 이후 세 번째로 준공한 아파트가 바로 이곳 포일대우사원아파트다.

사원아파트 개념으로 초대형 단지를 조성한 것은 대우건설이 최초였다. 압구정현대사원아파트는 1개동에 33㎡(10평 남짓) 정도로 800세대를 지은 것이었으니 대규모라 보기 어렵다. 또한 분양이 아닌 임대 형태였으니 이 또한 대우사원아파트와 다르다.

대우건설 직원 대우사원아파트로 이주하다

 

다음으로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한 일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임·직원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신창현 전 시장이 의왕시와 인연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김동화 대표도 이 때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고 한다.

신 전 시장이 이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자연경관이 풍부해 살기 좋았다는 것과 서울역(당시 대우건설 사옥은 서울역에 있었다.)에서 사원아파트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이면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포일리 가자고 해야 한 적도 많았다 한다.)

또 하나는 대우건설이 사원아파트에 들어오는 임·직원들에게는 저리로 융자를 해줘 적은 돈으로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동화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는 당시의 아파트가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랬을 것이 아직 젊은 나이에 부동산 가격에 민감해 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것이 입사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아 둔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인데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을 보니 김우중 회장이 많은 혜택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저리 융자에 매달 월급받아 갚아가면 됐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그들은 회상했다.

이런 연유로 대우건설은 의왕과 특별한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의왕시가 시로 승격하기 위한 필수요건인 인구수도 대우건설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의왕시민들은 보고 있다.

1980년 통계청 자료 가족당 구성원 기준을 보면 1가족 당 자녀수는 3~7명까지로 평균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거주하는 대우건설 직원 또한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원아파트는 포일주공과 달리 큰 평형의 아파트가 건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최소 5천에서 6천~7천명의 대우건설 가족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의견이다. 신창현 전 시장이 민선1기로 당선된 것도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대우건설은 경영난으로 워크아웃을 겪게 되고 그 사이 2003년에 있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는 재건축사업의 동반자로 대림산업을 시공자로 선정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2006년~2008년까지 3회 연속 시공능력평가 1위를 달성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대우건설 정창두 남부사업소 지사장).

건설회사가 가지는 일반적인 통념이 본사 주변에서 발생하는 공사수주는 반드시 해야 하며, 회사명이 걸린 건물을 재수주할 때 또한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림산업은 대림아파트 리모델링공사에서 반드시 수주해야 한다는 각오였으며(2006년 대림산업 리모델링 팀장의 말), 코오롱건설은 과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로 과천본사 인근의 주공아파트 재건축은 기필코 수주해야 한다는 암묵적 목표를 잡고 있다.(코오롱건설 수주기획팀 부장의 말) 대우건설 또한 김우중 전 회장의 혼이 담겨있는 대우사원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하지 못했으니 얼마만큼의 자존심은 깎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우건설은 내손동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있었던 그곳, 그리고 포일택지개발지구의 구획정리 또한 대우건설이 한 이곳에 대우건설의 브랜드 ‘푸르지오’를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대우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이 의왕시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것만큼 이번 내손동 재개발구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대우건설의 자존심이 이곳 의왕에 있기 때문에 2003년 잃은 자존심을 이번에 기필코 되찾겠다는 각오다.

대우건설 그들은 ‘대우맨’이라는 자존심을 가슴에 담고 있다. 우리에게 대우맨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인식된다. 리비아의 악조건에서도 성공적으로 건설을 마무리했던 불굴의 의지처럼 그들 가슴에 ‘대우맨’을 담고 오늘도 현장을 누빈다.

 

출처 : http://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

 

 

안양군포의왕과천의 선사(先史)·고대(古代)시대 이야기

이야기보따리/자료


선사.고대와 원과천


 

과사모 추천 0 조회 24 06.02.26 16: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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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선사(先史)·고대(古代)와 원과천(元果川)

 

현 과천시 지역에 관련된 선사나 고대의 유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과천 신도시를 개발하는 데에 있어 고고학적 조사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택지를 개발하거나 댐 등을 건설하는 데 반드시 그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사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후의 처리에 대하여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천의 경우는 이러한 조사 및 보고서의 작성이 없이 신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신도시지역 내의 선사나 고대의 유적들이 개발과정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산본이나 평촌에서 신도시를 개발할 때 나온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 지역에 적지 않은 문화 유적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 과천 지역에서도 선사나 고대의 문화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주】1) 다만, 원과천이었던 현 서초구 원지동과 양재동 일대 및 안양시 평촌 지역, 그리고 군포시 산본 지역의 경우에 비추어 과천 지역의 선사와 고대 유적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원과천으로 분류된 지역들은 삼국시대의 율목(栗木)·율진군(栗津郡)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고려시대의 과주(果州)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과천현(果川縣)의 관할에 속하고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도 과천군 상서·하서면(안양시 평촌)·남면(군포시)·동면(서울시 양재동·우면동·신원동)이 있었던 이 곳들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에서 분리되어 각각 시흥군 하서면(평촌)과 남면(산본), 그리고 신동면(원지동·양재동·우면동)으로 관할되게 된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에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우리 역사로 볼 때 그 시기는 매우 적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해도 큰 지나침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불행히도 현 과천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선사 및 고대 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은 위의 지역 사이에 위치했던 현재의 과천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제1절 평촌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2절 산본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3절 기타 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

 

▣ 제1절 평촌지역(坪村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주】4)

○ 1. 개관
○ 2. 평촌마을 지석묘군
○ 3. 신촌마을 지석묘군
○ 4. 기타 지석묘
○ 5. 귀인마을 백제 주거지

 

▣ 1. 개관

현재 안양시에 편입되어 있는 평촌 신도시 개발지구는 1914년 과천이 시흥군에 폐합되기 이전까지는 삼국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과천의 일부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의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과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의 협소한 지형인데 비해 비교적 넓은 개활지로 선사시대인들이 주거지로 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평촌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부터 5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주】2) 두 차례의 조사는 평촌지구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지표의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어 실시된 것으로, 주택단지 조성에 앞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그나마 원과천 지역의 선사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모두 13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은 평촌산(坪村山) 동북쪽 논에서 발견된 6기, 신촌(新村)마을 입구의 구릉 정상부의 5기, 평촌산 남서쪽 기슭의 1기, 귀인(貴仁)마을 안쪽 구릉의 1기이다. 그리고 귀인마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住居址) 유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신도시의 택지개발을 위해 실시된 조사였으므로 조사 후에 유적들을 현장에 복원하여 보호하지 못하고, 지석묘 중 일부는 경기도에서 건립중인 도립박물관의 전시용 유물로 옮겨 가고, 귀인마을 지석묘는 명지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신촌마을 지석묘는 평촌신도시내의 중앙공원에 복원되도록 결정되어 지석묘와 그 유구(遺構)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산본 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山本里)로 불리웠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서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그 시기는 매우 짧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다. 불행히도 현 과천 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으나 원과천 지역에 선사 및 고대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현재의 과천 지역에도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2. 평촌(坪村)마을 지석묘군

이곳의 지석묘는 인덕원(仁德院) 4거리에서 군포(軍浦) 방향으로 약 1㎞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의왕시(儀旺市) 포일(浦一) 주공아파트단지 서쪽 약 200m 지점에 6개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해발 약 80m의 구릉지가 있다.
【지도】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1) 제1호 지석묘

  화강암인 덮개돌(蓋石)의 크기는 150×85×30∼40㎝이고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3개의 성혈(性穴)이 있으며, 사방에는 매끈하게 다듬어 치석(治石)을 한 흔적이 있고, 남동쪽 모서리는 정(釘)으로 깨뜨린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의 유구(遺構)는 할석(割石)들이 결실되는 등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형을 찾아 복원한 결과 유구의 길이는 약 230㎝이며, 폭은 40∼50㎝의 규모로 성인(成人)을 신전장(伸展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하부에 토광(土壙)의 흔적은 없었다.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북쪽 2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그 크기는 220×150×30∼40㎝의 규모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2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의 유구는 석관(石棺)으로 55∼80㎝의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판석(板石) 6매(枚)를 깔아 놓았다.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생토(生土) 위에 판석으로 된 석관을 구축한 후 덮개돌을 덮은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평촌마을 제2호 지석묘 하부구조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북쪽 약 2.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6개의 지석묘 중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덮개돌 위에 170×110×25∼40㎝의 석괴가 얹혀 있었는데, 이 석괴는 제5호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 지석묘의 덮개돌은 440×210×40∼50㎝의 대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하나의 성혈이 있었으며, 하부 유구로 3개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주석곽(主石槨)으로 보이는 제1호 석곽은 덮개돌을 받치는 4개의 지석(支石) 사이에 있었는데 할석을 연결시켜 벽석을 만들고 내부를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크기는 250×60㎝ 정도로 성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곽의 남쪽에 있는 제2호 석곽은 크기가 135×55㎝ 정도로 판석을 장축 방향으로 양쪽 벽석에 걸쳤으며, 양쪽 끝은 판석 2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석곽은 크기로 보아 아동용이었거나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특수한 매장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첫번째 사례이다. 덮개돌의 동북쪽에 있는 제3호 석곽은 크기가 140×45㎝이며, 할석이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제2호 석곽과 같이 세골장용이었거나 아동용 석곽으로 보이며,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간 할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과 민무늬토기[無紋土器] 파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사진】평촌마을 제3호 지석묘 하부구조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370×290×40∼50㎝ 규모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매장터가 발견되었다.
  제1호 유구는 덮개돌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100×40×50㎝의 규모로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로 보아 세골장을 했던 유구로 추정된다. 제2호 유구는 제1호 유구의 동쪽에 있는데, 토광을 판 후 그 위에 할석을 얹은 모습으로 토광의 크기는 길이가 120×50∼70㎝, 폭이 40∼50㎝의 규모이다. 제3호 유구는 제2호 유구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모양이나 덮개돌에 눌려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제4호 유구도 토광의 규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제4호 지석묘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유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서 가족들이 사망한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한 세골장식 가족묘로 추정된다.

  5) 제5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75×50×15∼20㎝ 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4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을 들어낸 후 할석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덮개돌도 그 규모로 보아 유구 위의 덮개돌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제3호 지석묘 덮개돌에 올라가 있던 석괴가 여기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6) 제6호 지석묘

  제1호부터 5호까지의 지석묘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00m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하여 송유관 등 시설물이 있어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7) 출토 유물

  평촌마을 지석묘군에서는 몇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형토제품(原形土製品)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직경 4.4∼5㎝, 두께 1.4∼1.5㎝의 크기로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나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민무늬토기 조각들은 제3호와 4호 지석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이 곳에 있는 지석묘의 연대 추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간돌화살촉도 제3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6㎝, 폭 1.2㎝의 크기이다. 날의 한쪽은 떨어져 나갔으며, 가운데가 도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제6호 지석묘의 덮개돌 하단에서 발견된 숫돌은 길이 12.1㎝, 폭 7.2∼4.1㎝ 크기로 땅에 박아 놓고 사용하던 숫돌로 추정된다. 돌도끼는 제6호 지석묘에서 2개가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길이가 11.1㎝, 폭 5.5∼8.5㎝, 두께 0.6∼1.4㎝의 크기이며 몸체의 중앙부에 자루를 고정시키는 홈이 있다. 같이 발견된 돌도끼 조각은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 3. 신촌(新村)마을 지석묘군

  신촌마을은 안양남국민학교에서 평촌 신도시 건설지구 쪽으로 약 500m 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발굴·조사 후 평촌단지내에 들어설 중앙공원에 이전·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모두 4개의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도】신촌마을 지석묘군

  1) 제1호 지석묘

  신촌마을 지석묘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340×250×30∼40㎝ 정도이며, 성혈이 하나 발견되었다. 지석묘가 위치한 구릉은 지표밑 10∼15㎝ 아래에 부식 암반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에 하부 구조가 시설되어 있다. 덮개돌 밑의 주 유구 외에도 덮개돌 주위에서 유구가 2개 더 발견되었는데, 서쪽의 석관유구는 형태가 완전하였으나, 석관 남쪽의 유구는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석관의 규모는 80×60㎝에 깊이가 30㎝정도로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덮개돌 아래의 유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나, 덮개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의 바닥조각과 간돌화살촉, 숫돌이 발견되었다.
 【사진】신촌마을 지석묘 유적 개석 노출 상태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서남쪽 약 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174×110×30∼40㎝로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5°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할석을 이용해 석곽(石槨)을 만들었던 것 같으나 훼손되었다.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남동쪽 약 3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언덕 정상부에 덮개돌이 거의 노출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185×155×20∼30㎝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위에 3개의 성혈이 있었으며, 사방에는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에는 90×30㎝정도 크기의 반월형(半月形) 판석 2매가 놓여 있는데, 이외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매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약 6m쯤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90×25㎝이고 장축은 동-서에서 북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산의 경사에 의해 덮개돌이 미끌어지면서 하부구조는 훼손된 듯 하며 30㎝ 정도 크기의 할석 2개만이 남아 있었다.

  5) 출토 유물

  간돌화살촉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약 7.7㎝로 날과 날개 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숫돌은 역시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5.7㎝, 폭 3㎝, 두께 1.5㎝의 규모이며 사용으로 인한 마모흔적이 뚜렷하다. 민무늬토기의 바닥 조각은 민무늬토기 제작양식상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닥에서 그릇의 배쪽에 연결되는 부분이다.

 

  ▣ 4. 기타 지석묘

  평촌마을 및 신촌마을의 지석묘균 외에 평촌지구 발굴조사에서는 2기의 지석묘가 더 발굴되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인(貴仁)마을 지석묘

  평촌동 365-3번지 뒷산의 정상부에 있는데 주민들에 의해 ‘신선바위’라고 불리웠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75×110×20∼30㎝ 규모이고 7개의 성혈이 있었다. 지석묘는 산 정상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덮개돌 밑에서 아무런 시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석묘는 현재 명지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갈산(葛山)마을 지석묘

  경수산업도로에서 군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안(大安)여중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여 m쯤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지석묘가 있다. 이 곳은 신도시 중앙공원의 끝자락 일부이기도 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05×20∼25㎝로 장축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에서 유구 등 하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 5. 귀인(貴仁)마을 백제 주거지

  평촌 신도시 개발을 위한 명지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지석묘들과 함께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주】3) 이 주거지는 귀인마을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쯤 떨어진 산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표조사시 타제(打製)석기가 흩어진 채 여러 점 발견된 곳이었으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조사과정에서 백제주거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백제시대 주거지는 온돌구조를 하고 있는데, 온돌은 할석들이 4줄의 석렬(石列)을 형성하고 있다. 석렬 사이의 골에는 숯가루가 깔려 있고 돌에는 불을 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솥을 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북쪽으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백제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토기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시 집을 세웠던 기둥자리와 함께 저장고(貯藏庫)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귀인마을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지표면으로부터 30∼50㎝ 정도 깊이의 움을 판 후 온돌시설·부엌·저장고 등을 갖춘 것이었다. 바깥 기둥내의 집은 지름 4.5m 정도의 원형이며, 면적은 25.25평방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3점으로 초기 백제시대의 토기로 보이는 승석문토기의 파편 1점과 곁면을 마연한 흑색토기 파편 1점, 그리고 돌도끼 1점이다.
 【사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지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평면도

 

  ▣ 제2절 산본지역(山本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

  산본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써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 1. 산본지구 지석묘
     ○ 2. 산본지구 삼국시대 고분군


  ▣ 1) 골안 지석묘군

  골안은 군포의 산본 주공아파트 1단지 우측으로 당성사(堂成寺)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의 구간이다. 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논이 보이는데, 논의 중간 쯤 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골안[內谷]이란 말에서처럼 수리산에서 뻗어 내린 2개의 작은 능선 사이에 있다. 현재에는 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리산의 밑부분이 파괴되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줄기가 없어졌다. 또한 산본 신도시 개발로 인해 그 지역에 10m 쯤 땅을 돋우어 우성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사진】골안 지석묘군 근경

  (1) 1호 지석묘
  해발 45m의 계단식 논에 위치하는데, 덮개돌은 장축이 남-북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5㎝, 너비 140㎝로 약간 긴 타원형이고 두께는 50㎝ 내외이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 점토층이었으며, 덮개돌 하부의 중앙과 남쪽 부분에서 할석들이 노출되었다. 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자연적인 유실로 유구가 상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검출된 유물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4m쯤 떨어진 논두렁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길이 180㎝, 너비 85㎝, 두께 30∼50㎝의 규모로 부정형이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석질은 화강암이고 둘레를 치석하였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의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교란층이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 2) 광정(光亭)마을 지석묘군

  광정마을 지석묘군은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능선의 하단부에 있는 계곡의 삼각지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 2동 345번지의 밭에 위치한다. 유적 뒤편으로 산본중학교가 있으며, 옆쪽으로는 옐림복지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방향 약 70m 사이에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기가 조사되었다.

  (1) 1호 지석묘
  유적의 가장 서편에 위치하는데, 광정마을 지석묘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265㎝, 너비 140㎝, 두께 50∼55㎝의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약 40°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은 지반의 경사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온 듯 한데, 덮개돌의 동북쪽에서 하부 구조로 보이는 할석이 노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훼손 상실되고, ‘U’자 모양의 석곽 형태만 확인되었다. 복원된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폭 80㎝ 내외로 추정된다.
 【사진】제1호 지석묘 석관 노출상태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동북으로 약 40m 떨어져 위치한다. 길이 100∼200㎝, 폭 50∼100㎝ 내외의 석괴 5개가 모여 있는데, 중앙의 돌은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3호 지석묘와 합쳐 모두 7개의 석괴가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5개의 석괴 중 남쪽에 있는 장축방향 동-서인 장방형의 석괴가 주석괴로 추정된다. 이 주 석괴의 규모는 길이 196㎝, 폭 93㎝, 두께 37㎝였다. 5개의 석괴를 모두 옮긴 결과 2개의 석곽이 노출되었다. 이 지석묘는 별개의 2개 지석묘 유구가 있었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석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약 3m 지점에 2개의 석괴가 마주 고인 듯이 서 있는데, 큰 것은 길이 210㎝, 폭 151㎝의 크기이며, 작은 것은 148㎝, 90㎝의 규모이다.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6°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교란되었고, 덮개돌의 동편 바닥에 100×70㎝ 규모의 판상할석이 노출되었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5m 쯤 떨어져 위치한다. 덮개돌은 4쪽으로 쪼개져 있는데, 규모는 길이 154㎝, 폭 100㎝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가량 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5) 5호 지석묘
  4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19m 떨어져 있다. 광정의 지석묘군 중 가장 평평한 덮개돌로 이루어졌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66㎝, 폭 145㎝의 크기로 타원형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하부구조는 발견되지 않았고, 덮개돌 밑에는 홍수의 영향으로 보이는 토사층이 있으며,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지석묘도 홍수 등의 영향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된다.

 

  ▣ 3) 문화촌(文化村) 지석묘군

  문화촌 지석묘군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에서 다시 남으로 뻗은 중간 지맥의 해발 55m 지점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동 산1∼2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전주 이씨 묘역이 서쪽에 위치하며, 지표면은 남쪽으로 경사진 사면을 이루고 있다. 주위에 지석묘의 덮개돌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럿 분포하는데, 이 중에서 지석의 흔적이 뚜렷한 4기가 되었다.

  (1) 1호 지석묘
  구릉 사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80㎝, 두께 20㎝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고, 타원형이다. 둘레에는 치석이 되었던 흔적이 완연하였으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m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폭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사진】문화촌 제2호 지석묘 개석 노출상태

  (3) 3·4호 지석묘
  2호에서 북쪽으로 5∼10m 떨어져 위치한다. 3호는 크기 120×80㎝ 규모의 돌 위에 210×150㎝ 크기의 석괴가 겹쳐 있는 모습이고, 4호는 210×130㎝의 크기이다. 석질은 모두 편마암이며, 치석에 의해 깨어진 모습이 확연히 구별되었다. 3호 지석묘의 하단에서 지석으로 보이는 판석이 발견되었으나 하부 구조는 교란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 2. 산본지구(山本地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군(古墳群)

  산본 지역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고분군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기 신라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된 산본 지역의 고분은 모두 9기였으며, 그 구조는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혼재해 있었고, 당시에 사용된 토기 등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의 위치는 군포시 산본동 산 1∼2번지이며, 안양과 군포의 시계를 지나는 34번 국도의 우측에 있는 해발 60∼90m의 구릉지대의 동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밑으로는 전경부대가 있다. 고분군의 앞면에는 산본천과 안양천이 흐르며 그 주위에 분지형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분 조성 당시에는 이 곳이 매장된 이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전경

  1) 제1호 고분

  조사지점의 구릉 정상부에 노출되었는데,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구조이며 분구(墳丘)는 유실되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석곽 북쪽 분구 기저부에 반원형의 호석(護石)시설이 남아 있는데 남쪽의 호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길이 80∼90㎝의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장축은 남-북향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 있다. 석곽의 바닥에는 길이 80㎝, 너비 60㎝, 두께 15㎝의 판석 2장을 깐 시상대(屍床臺)가 설치되었다. 유물로는 북벽과 시상대 사이에 놓인 판석 위에서 인화문유개합(印花文有蓋盒)과 점열타인문완(點列打印文碗) 뿐만 아니라 청동제의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출토유물

  2) 제2호 고분

  1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13m정도 떨어진 구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는 거의 유실되어 지표 하 15∼20㎝에서 호석과 석실 4벽의 상단부가 발견되었다. 석실은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는데, 현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연도는 왼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횡혈식석실이다. 호석은 길이 50∼60㎝ 정도의 비교적 면이 고른 돌을 이용하여 서로 겹치게 쌓았다. 이로써 보면 분구의 밑면이 직경 6.4m인 원형분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토기병(土器甁)이 동쪽 시상대의 북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입둘레는 6.7㎝이고 둘레는 8.5㎝이며 밑의 둘레는 8.5㎝, 높이 15.5㎝의 작은 병이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2호 고분 전경

  3) 제3호 고분

  구릉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 5∼10㎝ 아래에서 석곽의 4벽 상단부가 나타나 있으며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으로서 석곽의 평면은 남북 방면으로 긴 축을 둔 장방형이다. 길이 220㎝, 너비 87㎝이고 남아있는 벽면인 북벽의 높이는 80㎝이다. 석곽은 80∼90㎝의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들을 쌓아 구축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인화문병(土器印花文甁)이 출토되었는데, 시상대에 접하여 석곽 북벽과 서벽의 모서리 부분에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크기는 입둘레 10.2㎝, 둘레 17㎝, 밑바닥의 둘레는 10.8㎝이고 높이는 18㎝로 2호 고분의 것보다 약간 크다.

  4) 제4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동편으로 10m 떨어진 동쪽의 경사면에 있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인데, 봉토는 유실되고 석곽의 상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석곽의 경우 지표에서 100㎝ 정도의 장방형 토광을 조성하고 그 안을 막돌과 포갠돌 등으로 쌓았다. 석곽은 폭이 82∼92㎝, 길이 220㎝ 정도, 높이 88㎝의 대형이고 잔존 형태도 양호하며, 주축방향은 남-북으로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지도】산본동 삼국시대 고분군 지형도

  5) 제5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8m정도 떨어진 구릉의 비탈에 있다.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석곽의 남쪽 상단부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곽으로 장방형의 토광 안에 만들어졌다. 남쪽 부분은 파괴되어 소실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로는 서북의 시상대 위에서 토기단지 1점과 왼쪽 어깨부분에서 청동제 허리띠 장식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토기단지는 입구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상했을 뿐 거의 완제품에 가깝다. 검은 회색을 띠고 있고 형태와 바탕흙의 성격으로 보아 백제 계통의 것으로 여겨진다. 입둘레 11.4㎝, 둘레 17.4㎝, 밑둘레 11.8㎝, 높이 16㎝이다.

  6) 제6호 고분

  구릉 남쪽 비탈의 제2호 석실분에서 13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분구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된 상태이다. 석곽 바닥의 전면에는 포갠돌을 한 겹으로 깔아 시상대를 설치하고 있으며, 남쪽 시상대의 경우는 1/3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시상대에서 깨진 점열문토기와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석곽의 평면 구조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약 15도 편제되어 있다. 관뚜껑으로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무뚜껑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60㎝, 폭 110㎝, 높이 106㎝이다.

  7) 제7호 고분

  구릉 사면의 남단에 위치하며, 단애에 걸쳐 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파괴되어 남벽과 서벽을 상실한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150㎝ 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벽을 축조하였다. 북벽과 동벽은 각각 크기 60×25㎝의 돌을 가로로 눕혀서 7∼8단의 높이로 축조하였다. 비교적 면이 고른 석재를 이용하여 벽면이 정연한 편이다. 석곽의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북벽으로부터 43㎝ 떨어져 소형 판석이 있어 시상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제8호 고분

  발굴지의 서편 구릉에 위치하며,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상단 일부가 노출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60㎝ 정도로 낮은 토광을 파고 축조되었다. 4벽은 모두 50∼30㎝ 정도의 큰돌을 포개 눕히고 그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형태로 4∼5단을 구축하였다. 석곽의 바닥에는 남벽 쪽으로 20×15㎝의 판석이 놓여 있을 뿐 시상대는 별도로 축조되지 않았다. 생토를 깍아 만든 바닥에 고운 흙을 깔았으며, 석판은 매장자의 신발 등 유물을 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너비 73㎝, 길이 212㎝, 높이 64㎝이다.

  산본동의 고분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을 이루고 있는 해발 65m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릉지대의 고분군은 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군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나 중부지역에서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찾아질 뿐이다. 고분의 축조형태는 수혈식석곽분(8기)과 횡혈식석실분(1기)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수혈식고분은 지표에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토광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고, 석곽 바닥에 시상대를 조영한 것이다. 그리고 덮개는 나무덮개 형식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횡혈식석실분은 수혈식과 같이 토광을 파고 남벽에 연도를 마련한 평면방식에 가까운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로 2개의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3점의 토기 등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말경에서 신라통일기에 이르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제3절 기타 지역(地域)에서 조사된 지석묘(支石墓)

     ○ 1. 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 2. 원지동 지석묘군

  ▣ 1. 서초구(瑞草區) 양재동(良才洞) 지석묘(支石墓)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양재동·우면동 일대는 원과천의 동면 지역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해 있었다. 이 곳에서 1958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이를 당시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정리해 보기로 한다.【주】5)
 【지도】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위치도

  1) 양재동 지석묘

  양재천 남방 약 100m 지점의 넓은 공터에서 매몰된 채 6기가 발견되었는데, 북방식 지석묘로 추정되었다. 지석묘가 조사된 곳은 현재의 양재동에 속한 거여(巨餘)마을로 지금의 양재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 마을은 ‘게리’라고도 불리웠는데, 조사 당시 이 동네에서는 지석묘를 ‘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고인바위의 준말이며, 동네에서는 년 1회 도장제(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고 전한다.

  2) 우면동 지석묘

  양재동 지석묘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남서쪽 산록에 위치하였는데,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조사 보고되었다. 조사 당시 그 일대에서 ‘고름장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지석 바로 위에 병풍같은 바위가 둘러 쳐져 있었다고 한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00㎝, 폭 300㎝, 두께 50㎝이며, 지상으로 약 70㎝ 높이의 두 개의 지석 위에 놓여 있었다. 지석 밑에는 길이 170㎝, 넓이 130㎝의 석실이 있었음이 조사되었다.

 

  ▣ 2. 원지동(院趾洞) 지석묘군(支石墓群)【주】6)

  원지동의 지석묘군은 현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한강 하류의 양재천 남쪽 지류인 염곡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지동은 조선시대 말기의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하였다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신원동과 분리되어 바람굴·양수리·원터마을의 3개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서 4지구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위치는 한강 하류 양재천의 남쪽 지류인 염곡천을 끼고 청계산의 지봉인 옥녀봉(玉女峰)의 지맥을 따라 해발 40∼60m 능선의 끝부분인 밭 가운데 동북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지형상 광주평원의 서쪽 병풍산이 청계산 기슭에서 동북 방향으로 광주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비옥한 농경지대로 적합하다.
 【지도】원지동 지석묘 위치도

  1) A지구 지석묘군

  원지동의 원터마을 미륵당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지하통로를 건너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0m 쯤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 원지동 350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 3기의 지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1호 지석묘는 고속도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5°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길이 258㎝, 너비 154㎝, 두께 77㎝이다. 주위에서 무공반월형 석도 1점과 긁게 1점이 발견되었다.
  제2호 지석묘는 1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하고 받침돌은 없었으며,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148㎝, 너비 108㎝, 두께 84㎝로 사면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제3호 지석묘는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장축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4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245㎝, 너비 148㎝, 두께 88㎝ 로 비교적 큰 편이다.

  2) B지구 지석묘군

  A지구 지석묘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원지동 336∼7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에 7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7기 중 제6호 지석묘가 제일 규모가 크며, 나머지 중에 5기는 동서로 나열한 모습으로 6호 지석묘를 호위하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4호 지석묘는 제3호 지석묘에서 동북 방향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덮개돌의 북쪽 부분이 묻혀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길이 325㎝, 너비 146㎝ 두께 58㎝로 굉장히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놓여져 있고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30°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그 위에 길이 100㎝, 너비 43㎝의 판석이 있다.
  제5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의 동쪽 끝부분과 맞닿아 있는 상당히 큰 것으로 덮개돌의 밑이 들려 있기 때문에 하부 구조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조그마한 잡석들만 남아 있다. 제6호 지석묘는 제5호 지석묘와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크기도 크고 두껍다. 길이 440㎝, 너비 245㎝, 두께 50∼70㎝로 원지동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크다. 제4, 5호 지석묘와 같이 덮개돌이 들려 있으며 주변에서 석기 몇 점이 출토되었다.
  제7호 지석묘는 제6호 지석묘와 붙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북 방향으로 길이 220㎝, 너비 180㎝, 두께 60㎝로, 다른 것과 비교해 덮개돌 위에 잡석이 많이 쌓여 있어 정확한 외형을 파악할 수 없다.
  제8호 지석묘는 제7호 지석묘의 동쪽으로 2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246㎝, 너비 148㎝, 두께 43㎝로 괴석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5° 정도 기울어져 있으며 지형에 의해 남쪽으로 약 1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제9호 지석묘는 제8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에서 서쪽으로 약 15° 정도 기울어져 있다. 길이 328㎝, 너비 174㎝, 두께 6㎝로 동쪽이 서쪽보다 얇다. 제1호와 같이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제10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23㎝, 너비 134㎝, 두께 25㎝로 불규칙하고 마름모꼴이다. 그 밑에는 10∼30㎝ 정도의 할석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3) C지구 지석묘

  원터부락 미륵당으로부터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고속도로로부터 약 10m 떨어져 동서 450㎝, 남북 500㎝, 높이 150㎝의 괴석이 있는데, 바닥이 비교적 평탄하여 받침돌이 없는 무지석식 지석묘이다.

  4) D지구 지석묘

  경부고속도로의 구 서울톨게이트의 남쪽 1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동서 방향으로 1기가 매몰된 채 발견되었다. 덮개돌은 길이 230㎝, 너비 180㎝, 두께 50㎝로 대부분이 묻혀 있고 동쪽면만 드러나 있다.

  원지동 지석묘군의 특징은 제1, 9, 10호와 같이 외형이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기들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매우 원시적인 모습으로 타제수법에 의해 거칠게 다듬어졌으며, 석질도 석기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날부분이 모두 마멸되어 있었다. 또한 돌칼류는 수확도구로서 손잡이용 끈을 묶기 위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에 주로 사용된 장주형(長柱形)과 즐형(櫛形)의 구멍없는 반월형 석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청동제의 도끼를 모방한 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조사된 지석묘의 형태와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형태와 보아 원지동의 지석묘들은 초기 단계의 남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또한 B지구의 제4, 5, 6, 7, 8호의 지석묘군이 동서로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제6호 지석묘를 가운데에 두고 나머지의 지석묘가 이를 호위하듯이 붙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제6호 지석묘가 신분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묘였을 가능성이 있다.

 【집필자】 編輯部

[최승원]안양 석수3동 충훈부 이야기(2020.06.06)

이야기보따리/기억


삼막천 삼성천이 안양천을 만나 U자(역수천)로 흘러 좋은 양분의 흙이 충훈부에 쌓이는(퇴적) 지형이기에 농사가 잘되어 부농이 되는 지역이다. 이 좋은 땅이 국유지가 된 것이 당연하다. 북측에 아름다운 꽃뫼가 있고 산세가 등대같이 곶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는 안양천 뚝방 위 벚꽃축제로 지명의 이미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에센스 국어사전 (이희승 감수)에 곳<옛>꽃. 곶<옛>꽃. 곶(串)[곧] 명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부분이라고 되어있다.

고대 미추홀은 주변이나 안양지역 낮은 곳은 바다 이었다고 본다. 청일전쟁시에도 배가 군포까지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근현대도 중국은 큰개울(한천 한내) 로 배가 다닌다. 바닥이 걸리면 로프로 양편에서 끈다. 유럽에서는 말이 끈다고 배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하천으로 친입하는 적을 곶에서 관측하고, 박달 군용지를 보호할 수도 있다고본다. 6.25전쟁초기에도 충훈부에 면한 안양천은 좋은 방어라인 이었다. 소래포구로 들어온 소정방도 소래산지희소에서 이 지역을 교두보로(공략)攻略하였을 것이다.

‘70년대 초 곶 후면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미 군정(軍政)시 축산 교육은 안양이 중심이었다. ‘47년 초 당시4H사업은 농촌교육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농업시험소는 ‘4H농장학교’로 바뀌었다. 이곳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농장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좋은 장비를 가추고 있었다. 면적이12에이커인 이곳에는 포도농장과 배 과수원, 곡물 그리고 한국의 온갖 채소가 있다. 순혈종의 젓소와 버크셔산 흑돼지는 현재농장에서 주된 관심을 받고 있다. 경기도 전역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농장으로 견학을 온 가장 총망 되는 4H클럽 소년들은 실직적인 체험을 통해 가장 최신의 농업기술과 가축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서울지역관할 미군정문서 서울역사편찬원 88p


1987년 안양중학교가 들어왔고 2004년 충훈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주차장의무규정이 없을 때 다세대주택이 들어와 안정감은 있으나 주차장이 없어 불편하다.

2004년 4월1일 KTX광명역이 보통역으로 영업하므로 충훈고에서 1km 도보15거리로 남서울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62년 건축법개정당시 지하층의 천장높이의 1/3 지하에 있을 경우 지하층으로 인정

1972년에 지하 천장높이의 2/3가 지하에 있는 경우

1984년엔 단독과 다세대주택의 경우엔 지하 층고의 1/2이 지하에 있는 경우

1999년엔 모든 건축물의 지하층고가 1/2이하에 있는 경우 지하층으로 인정

#안양시만안구 #안양천 #충훈부 #석수3동

사진:1965년경 충훈부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조성현]안양의 독립운동가(2020.05.29)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의 독립운동가

 

이 글은 안양문화원 해설사들의 자료 공유 공간인 다음카페 마애종사랑(dhttp://cafe.daum.net/maejongsarang)에 올려진글로 조성현 해설사가 안양시 사이버향토사박물관에 있는 자료를 재수정한 내용입니다.

 

  1. 원태우(元泰祐) (고종19(1882)∼1950) 독립운동가.

본관은 원주(原州). 원태성과 이호순 사이에서 2남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1동 642(현 농협중앙회 안양시지부 부근)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라 원태근; 김시근;.김태근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로 되어 있다.

그의 형이 원영우인 것으로 보아 「우(祐)」가 항열로 보여진다.

그는 본래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에 의기가 높고 바른 일에 앞장을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그가 23세 되던 해(1905)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광무8년(1904) 러일전쟁의 승리로 이끈 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 박탈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광무9년(1905) 10월에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를 비롯하여, 주한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쯔라등이 조약을 체결 할 모의를 하고, 그해 11월 9일에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히로부미를 황제 위문 특파대사라는 구실로 한국에 파견, 한일협상안을 정부에 제출 토록하고,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는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봉정(奉呈)하고,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의 반대가 심하였다.

16일에는 정동에 있는 손택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여덟 대신을 위협하여 헙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우리 정부의 전 각료를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 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 사이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는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시위하였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 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 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한편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히로부미는 즉시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병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반대 하였을 따름이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조약이 체결 되어 외교권이 탈취 당하였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동 조약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통곡과 격분속에서 한때 나마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한 채 통곡하는가 하며, 각급 학교는 문을 닫고 스승과 제자가 손을 맞잡고 개탄과 비분에 빠졌다.

3일 후에는 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 선생이 자신이 사장겸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 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480여 자(字)의 논설을 실어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 해서 풀어준 결과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2천만 한국민을 항쟁의 대열로 끌어 들이기에 족 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5일 후인 11월 22일에는 조약체결의 장본인이자 우리민족의 不共戴天之怨讐인 이토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의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 하고 이날 오전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 수원에서 안양까지 사냥을 하며 안양에 도착,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 행 열차를 탔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 한다는 소식을 접한 지사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그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이때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 사건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던 열차가 1시간이나 지체해 8시에 도착했다.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해서 였고, 일본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날부터 신문에 보도되었다.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에는 원태근이란 이름으로 안양시장「22통1호」라는 주소와 함께 보도했고, 도쿄에서 발행하는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는 「이토 히로부미 조난 전말」의 기사로 사건상황을 설명했으며, 일본 박물관 발행의《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보도했다.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것으로 명기된 이 그림은,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을 앞둔 궁중의 고뇌에 찬 어전회의 장면 등도 함께 담겨 있는데, 동 화보에 의하면 이토히로부미는 그해 11월 25일 낮 12시 30분부터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군사령부 정원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 입구에는 화려한 아취를 세우고 세계 각국의 만국기가 휘날렸으며 또 10개소의 음식 테이블을 설치하고 일본과 한국기생들을 동원, 내빈들을 접대하고 여흥으로 일본씨름 스모와 줄타기 등을 했다.

한편 원 지사는 사건 직후 사이토 일본 헌병대장이 수명의 헌병과 경찰들을 이끌고 현장에 내려와 철도 공부 다니노와 야마사키의 도움으로 원 지사를 포함한 4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그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 지사는 철도 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영등포 감옥에서 풀려난 원 지사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에 흉측 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더욱이 생계를 꾸려 나가기 여의치 못해 원 지사 형(영우)의 삼남인 계복(1910∼)씨가 원 지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쓸쓸히 타계해 안양시 만안구 안양 4동 709∼16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뤘는데, 그후 1982년 이곳에 화영아파트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원 지사의 유품으로는 원 지사가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고, 또 한 개와 맷돌 1개는 원 지사의 양자인 계복씨가 소장하고 있다. 의거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1990년 8월15일에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11월 22일에는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참고문헌]《기려수필》,《속음청사》,《대한계년사》,《독립운동사》,《안양문헌》, 시흥군지》,《경기인 물지》,《일로전쟁화보》,《대한매일신보》

 

 

   2. 한흥이(韓興履. 恒吉) (광무 1(1897)∼1979)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몽당(夢當). 본관은 청주(淸州). 용익(用翼)의 아들로 부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시절 안양으로 이전하여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에서 성장하였다.

아명은 정봉(丁鳳)인데 8살 때(1904) 민적법(民籍法)이 실행되자 조부가 「한 나라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으로 「흥이」로 이름을 지었다.

10살(1906)까지는 조부로부터 천자문·소학 등을 배웠고, 13살(1909)부터는 호계동 소재 낙영학교(樂英學校) 2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 해 폐교되자 수원군 반월면 4리(현 안산시 4동)소재 장화의숙(長華義塾)에 편입하여 맹자·수학·일어 등을 수학하고, 이어 1915년에 시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교 전신)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학비문제와 집안내의 반대의견에 부딪히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조부의 시국관인 일제가 운영하는 관립교육에 대한 반감의식과 정면으로 대립 되었던 것이다.

즉 조부의 뜻은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관립학교로서 일제가 주관하는 학교인데 어찌 한국인으로서 그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겠느냐? 는 지론이었으나 그는 신지식을 습득하여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의 불행을 막아보자는 어린 마음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부모가 아들에 대한 뜻을 표명하여 끝내는 조부를 설득시켜 입학을 허락받자 서울 만리동 소재 김달환 댁에 기숙하며 통학하였다.

입학 후 학생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특히 2학년 때(1919) 일어난 3·5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1919년 3월 3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초로 반일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11살 되던 해(1907)년 밭에서 김매고 있던 한국인 농부를 왜병이 구타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때였다.

그 후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한 것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경기고보 재학중에 기차 통학생의 임무로 독립선언서를 분배받아 시흥·안양·군포역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연 성을 역설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일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있은 후 3월 5일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항일독립운동이 경성역(현 서울역) 광장을 기점으로 계획되어 오전 9시경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고종의 인산(因山)을 마치고 귀성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일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다.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시위군중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남대문에 이르렀다.

이날 남대문에 모인 전체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둘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학생시위대들과 왜경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도 이때 경기고보 학생신분으로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게 구금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잘못했다」 한마디만 했으면 학생의 신분이므로 훈방으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부친은 영등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송된 두루마기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졸도 하였다가 그 후 병을 얻기 까지 하였다.

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 하자 요시찰인물이라는 낙인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이때 국권의 회복과 구국(救國)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보통학교 교원 양성소를 지원, 1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전과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 당국자로서는 불합격시키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후일의 책임문제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등포경찰서에 전화로 조회한 결과 당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학생들은 모두 복권되었으니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받고서야 입학을 허가하였다. 재학중에는 반장을 맡아 학과목 담임이 공무상 출장으로 수업이 결강되면 으레 대강(代講)을 하였다.

1923년 3월 수료식을 앞두고 전과 사실로 또 한 차례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급기야는 수료식을 1주일 동안 연기 하고 야간회의까지 거듭한 결과 졸업은 시키고 우등상을 주나 상장 문안(文案)에 「품행방정」이라는 말을 빼기로 하고, 학교 배치는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 3년 의무 복무로 한다는 등의 결정을 보았다.

그 후 서울 수창동에 소재한 경성보인학교(현 보인상고 전신)에 부임하여 졸업반 담임에 학생감·교무주임의 중책을 맡았다.

1927년 경성부에서는 학교 행정의 효율화와 모범교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학사 시찰단을 구성하였는데, 그는 사학(私學)의 대표격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여러 곳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낙후성과 현재의 우리 학교 교육이란 결국 일인양성정책의 일환이란 느낌이 들어 귀국하는 길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일본 시찰 중에 절감했던 또 한가지 사실은 법률 지식에 대한 부족이었다.

그래서 경성법정학교 야간부에 입학, 3개년의 과정을 이수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동년 4월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기사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신문사에서 알게 된 한 상사의 추천으로 경기도 포천의 연초판매소의 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 하였는데, 일본 식민통치의 「눈에 가시」 같은 요주의 인물이라 하여 일반인들로부터 철저히 격리 시키기 위하여 함남 영흥을 거쳐 삼수갑산, 강원도 양구 등 춥고 외진 벽촌에서만 근무케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에 정착, 그해 11월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안양시 안양동 603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하였다.

안양직물의 제품은 질 위주로 튼튼하고 건실하게 만들어져 「쇠가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이 제품에 외제상표를 붙여 판매 한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있었다.

당시 공장 내의 근로자들의 학력수준이 매우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장 내에 공민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이때 시흥군면보단장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94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효자상을 받았고 이 해에 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항길(恒吉)」 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장문을 닫고 5리 밖에 있는 호계동 본가로 가있다가 그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이듬 해 일자리를 찾던 중 부산 시내에 소재한 <국제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서울의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경 했던 길에 안양직물공장이 완파된 것을 목격했다.

공장은 전쟁이 나자 도보로 남하하는 인민군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략상 대형폭탄을 투하하여 완전 파괴시킨 것이다. 전쟁으로 공장이 완파되자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부천시 중구 심곡동 424)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 안양에서 기계 부품들을 뜯어와 닦고 손질하기 수 개월 만에 제품을 생산하였다.

회사명은 안양에서의 전직원이 다시 모였으므로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여 1953년 5월에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에는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를 육성해야 되고, 한 산업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를 양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학교 설립을 신청, 인가를 받아 공장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3년 후(1961)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문부가 각각 증설되었다.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이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1979)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후 이해 5월 8일,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8월15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에 있다.

 [참고문헌]

《몽당한한길선생유고집》,《독립운동사》,《현대사자료》, 《시흥군지>,<동아일보>,<경기신문>,<경기교육신보>,<중앙일보>,<안양신문>

 

  3. 하영홍(河永泓) (고종 16(1879)∼1915)

기독교인. 항일투사. 본관은 진주(晋州). 일명 주명(周明). 진찬(鎭瓚)의 아들.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연(演)의 15대손이며 조선 중기에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우청(遇淸)의 10대손이다.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안양시 석수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한 후, 삼막골 마을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도하였다.

이어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이 교회의 속장이 되어 광무 5년(1901) 8월 6일 스웨어러(미국인) 선교사와 존스 장로사(현 감리사와 비슷한 직 책)와 각회 교회 형제·자매 70여명이 봉헌예배를 올렸다.

그 후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활하던 중 25세가 되던 광무 8년(1904)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시흥읍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 시흥농민들이 봉기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견은 일본이 동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을사조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원활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사역키 위하여 동년 8월 청국 안동현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건설에 노동자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다.

이에 농민들은 과대한 역부의 모집과 시흥군수 박우량이 역부들의 노임을 한푼도 주지 않고 착복하는가 하면 역부 모집에 있어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자 시흥의 6개면 농민 수 천명(혹은 1만명)이 항쟁을 한 것이다.

그는 성우경(광명시 가학동 출신)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곧바로 순검에게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가 그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 3동 병목안(?)에 있었는데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하여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시흥직산안핵사주본》,《일한외교사료》,《수원지방교회자료집》,《향기》,《시흥군지》, 《한말시흥농민운동에 관한 연구》,<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신학월보>, <감리교회 연회록>, <안양시지>

 

  4. 이영래(李永來) (고종 10년 (1873)∼1949)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태순(泰純)의 장남으로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27일 광목 행상도중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백기화(白基和) 집에 들러 그 집에 모여 있던 이종교(李種敎)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 날 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옥에서 석방된 후에는 광명시 일직동 220번지에 이주해 살다가 1949년 2월 17일 상오 11시 사망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쟁골에 있었는데 군부대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자료집》, 《시흥군지》

 

   5. 이재현(李在賢) (1917. 2. 2 ∼1997. 2. 24)

경기도 시흥 동면 사람이다.

이명(異名)으로 이해평(李海平), 이재두(李在斗) 로 사용.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지에 나가 대일 항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공작대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공작대는 서안(西安)으로 이주 하였으며, 그는 김동수(金東洙), 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서성(山西省) 등지로 파견 되어 중국 호종남(胡宗南) 직속의 산서지구(山西地區) 유격대와 합류, 정보 수집, 적정탐색, 초모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 소동구(小東口)를 본거지로 하여 노안성(路安省) 및 하남성(河南省)의 초작( 炸)등지로 진출하여 과감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 됨에 따라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월환(羅月煥)은 지대장으로 임명 되었으며, 그는 이하유(李河有), 박기성(朴基成), 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5 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 하면서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정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광복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5지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 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 하던 중 광복을 맞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7년 2월 24일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며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가족으로 부인 김숙 여사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한국독립사(김승학), 무장독립운동비사, 일제침략하36년사,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6. 이재천(李在天) ((1913. 5. 10 ∼ ?)

경기 시흥 동면 사람이다.

호(號)는 우봉(牛峰). 상해 망명 독립지사 이용환(李龍煥)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상해에 있는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뜻을 계승할 것을 결심하고 1929년 2월에 화랑제도를 본 따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조직된 화랑사(花郞士)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의 연락업무, 임시정부 요인 등의 송영(送迎)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임정(臨政) 국무위원 조소앙 선생의 지도 아래 '화랑보(花郞報)' 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상해(上海) 교포들에게 배포 하였다.

1931년 백범 김구(白帆 金九)선생 지도하에, 상해 한국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하여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 하였으며(단원 약 200명), 월간지 '새싹'을 발행하여 상해는 물론 조선내(朝鮮內) 각지로 발송하고, 3·1절 기념일(紀念日)에는 '3·1 기념일(紀念日)을 경축(慶祝)함' 이란 격문 700∼800매를 인쇄하여 살포하고 조선내로도 발송하였다.

1932년 8년 29일 기념식을 상해 중국가(中國街) 침례예배당에서 거행 하였는데 등단(登壇)하여 연설을 하였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임시 정부의 밀명(密命)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김구(金九) 일파로써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감옥(大田監獄)과 에서 복역하였는데 1940년 8월 18일 석방된 기록이 있다.

이후 행발불명되었으나 일본이 자료 공개를 거부하여 자세한 내막을 모르며, 고문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어 석방 하였을 것으로 추정함(4년 5개월 21일 복역).

일본 경시청의 자료 공개 거부로 사망 일자 확인이 불가능하고 시신도 없어 순국선열(殉國先烈) 위패(位牌)조차 모실 수 없었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을, 1991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11월 7일 보훈처에서 그의 후손이 없으므로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기로 결정.

2000년 12월 10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충렬대(忠烈臺)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재 직계가족은 없으며 동생 이재현의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최승원]안양1동 구시장 (시대동)이야기(2020.05.18)

이야기보따리/기억

 

안양1동 구시장 (시대동)이야기
1905년 안양역이 생기기고 1917년 서이면사무소가 이사온, 시대동은 1925년 을축 대홍수시 많은 인명이 사망하고 집이 침수붕괴 되자 군포시장을 안양리로 옮기고 안양천지류에 대대적인 제방공사를 하였다. 이로 인해 구시장과 도로가 안양면의 중심이 된다.
1945년 해방후 도시기획에 따라 ‘47년 영등포에서 군청이 내려오고 ’47.10.25년 안양경찰서가 준공 49년 읍사무소가 생기면서 신읍거리가 구성되었다, 시흥군청 뒤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일본강점기에 건축되고 운영되던 방직공장은 한국인이 인수하여 전후 태평방직으로 운영한다.
나는 49년초 모친이 시장남측 태평방직에 경비로 취직하게 되어, 서울서 세발자전거를 가지고이사하여 구시장 도로 북측상가 가계 뒷방에 거주하였다. 경비는 모방을 몸에 숨겨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 엄무 이었다. 북측으로 시장이 격자형으로 구성되고 동측에는 커다란 우시장과 공터가 있었다, 이어서 커다란 안치과 안종호집 이 있고 적산인 농장과 단지무 창고가 있었다.
6.25가 터지자 철길에는 하얀 옷을 입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난민이 가득히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친이 철길에 들어서자 넘어져 스플리지 공장관사로 들어갔다. 전쟁 중에는 유지들도 시장에서 꿀꿀이죽(부대찌개)을 사먹었다 . 그리고 밀기을로 만든 개떡이 유일한 시장음식이었다. 1.4후퇴 시는 탄약열차가 안양역에 와 고장이나 출발이 불가능하자, 헌병은 지붕위에 피난민에게 하차를 하게하여 도보로 걸어가게 하고 폭팔 시켜 이리폭파사고 같이 주변을 강타하여 시대동 일대와 군청 읍사무소 등 모든 읍내가 쑥밭이 되었다. 일부 피난민은 거짓말인 줄 알고 숨어 있다가 피해를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
안양도시계획에는 안양에서 과천 서울 가는 철도계획이 있었다.
전후에는 안양천변에 사격장이 있어 매년 사격대회가 열였다. 타겥은 대림대학 북측아래 있었다. 시장북측에는 함경도에서 피난와 포목점을 하던 구읍의원을 지낸 박주안님 내외가 가게뒷방에서 살았다. 안양역 동편에 ‘60년 단사천이 만든 한국특수제지가 들어오고 67년에는 인접 구적산토지를 인수하여 초지2호기를 운전하는 바람에 안영천은 치명적인 종이 찌거기 폐수에 시달렸다.
’74년11월10일 불이난 삼광점미소는 지금 진흥아파트자리 초입에 있었다. 이상윤의 둘째 큰아버지인 이광순이 운영했고, 이상윤은 초대읍장출신으로 안양6동에서 주유소를 했고 안양시 자문회의시 건축박물관을 동의하여 주었다.
태평방직자리에 들어온 진흥아파트는 ‘83.10월 입주 1940세대 4.7억~7.5억 33개동 5~12층 매매 707만원 전세196만원(1m2기준) 2020.05.16. 철거 준비 중이다. 사진은1965년경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삼성산자락 삼성국민학교 재학 시절(2020.05.11)

이야기보따리/기억

 


1957년 9월초 집에서 북서로 1,2km 20분 거리 삼성초등학교 5학년2학기 편입하였다. 교사는 목조木造단층으로 가운데 현관을 두고 좌우 각 3개 교실을 배치하였다. 저학년은 오전오후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5학년은남36명 여29명 합 65 명이었다. 하순용등 하 씨들이 학교뒷동네 집성촌이라 똘똘한 학생들이 다녔다. 수영특기학교 이고, 광명초교에서 열리는 시흥군 체육대회준비로 축구 등 종일 운동만하고 있었다, 단체로 트럭을 타고 가서 나는 축구선수로 라이트하프를 맡아서 뛰었다. 가을소풍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사이 고개를 도보로 넘어 낙성대 강감찬 장군 유적지에 다녀왔다. 산에는 아주 큰 노송老松들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목에 미군부대(83병기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밖으로 천연색 서부영화를 잠시 볼 수 있었고, 인근 미군부대 쓰레기통에는 포르노사진, 잡지, 건축과도시사진, 아주 두꺼운 상품소개 책, 깡기리 등을 보았다. 일본은 캔 따는 깡그리 에 U,S,A 대신 USA로 표시 모방한다고 어린이들이 흉을 보았다.미국은 TV안테나가 잠자리 떼만큼 많다고 이야기를 하였고,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위해 먹는냐?’ 논쟁을 초등생들이 하였는데 지금은 건강식이지만 나는 보리밥(보리7:쌀3)이 먹기 실어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였다. 미술대회에 나가는 학생은 일제크레파스가 공급 되었다. 당시는 국산연필이 조악하여 운크라원조, 미국의 원조로 공급되는 노트와 미제연필을 사용하였다.가을견학에는 학교 동편으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건축가 강명구 설계의 동양최대 안양영화촬영소에 견학 가서 ‘성웅 이순신’ 특수촬영 수조장치를 보고 설명도 들었다.6학년 봄 비가 많이 오자 농번기 지원하라고 집으로 보낸다. 동급생 조씨는 안양유원지에서 수영하다가 물막이 물살이 세어 틈새에 붙어 사망하였고, 여동생 조씨는 성장후 국제선수가 되었다.어느날 안양사가는 중턱 김창룡 장군 장례행사에서 우울하게 서있는 이승만대통령을 근거리에서 보았다. 강명구가 설계한 안양영화촬영소 기공식 정초식에 2번을 합하면 50년대 이승만대통령은 석수동에 3번 방문한 것이다.가을에는 주산대회가 있기에 담임은 군내경진대회에서 일등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야간까지 열심히 하여 일등을 하였다. 상금을 기다렸지만 단임 선생님은 졸업시 상금대신 콘사이스 한권을 주었다. 변경이 되어 아쉬웠다. 4개의 초등학교 2년2학기~3학년 1년 반의 공백 1년 휴학을 거쳐 간신이 초교를 졸업했다.#시흥군 #안양읍 #삼성산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