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0518]5.18민주화운동 39주년, 다시 꺼내 보는 옛 기록

이야기보따리/자료

 

2019.05.18/ #광주 #민주화 #39주년 #자료 #기록 #기억/ 광주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책장에서 꺼내본 5.18 자료들. 기억은 기록을 만들고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광주 자료들을 잘 보관해 줄 만 한 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몇가지가 더 있네요.
1985년 광주교구 정의평화원회가 발간한 <광주의거자료집>, 1988년 광주의거자료집1.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8년 발간한 광주의거자료집2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 대한가톨릭학생전국연합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이 펴낸 연도 미상의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빛바랜 책자에는 역사의 진실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기억합니다...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5.18. 삼가 5.18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승원]안양 6.8동 근현대 건축물 여행 자료(2019.04.13)

이야기보따리/자료

 

 

 

[ 최승원 건축사의 안양6동 소개글 ]

 

< 우리 동네에는 무엇이 인나요? > 修理山 東便동편 마을
安養市 萬安區 안양8동 안양6동 답사

안양지역은 서남부 중심도시로 풍광이 좋은 도시입니다.
시흥군의 군청소재지 안양읍을 거치면서 근현대 공도(工都)로 형성 되면서 좋은 건축이 여럿 존재합니다. 건축사(建築史)에 나오는 김중업 나상기등 유명건축가들이 여러 명 설계 시공 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방치되고 철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3.1 운동100주년기념을 기하여 건축문화를 지속적 답사문화로 이어나가 마을을 재생하고 풍성한 아트시티로 유토피아를 조영(造營)하고자 3.1독립만세 100주년을 기하여 안양 근 현대건축중심으로 ‘건축과 문화’ 답사를 시작합니다.

1차로 수리산 동편자락 안양6동 8동을 갑니다.
수리산은 명당이 많아 7080시 최고의 국내현금 갑부 단사천, 윤필노(안양양조장), 안치상(부흥산업사사장)등이 거주하였고, 안양시청(나상기설계), 시흥군청, 성결대학교, 국립수위과학검역원(이광노설계)등이 근접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이용한 경민식당 설농탕을 냄비에 사다가 집에서 먹기도 한 음식입니다. 90년대는 엄마와 애기 형태의 신병원에 제원컬렉션이 있었습니다.이 지역은 1890년대 지도에 집이 3채 있다가 강점기시 경부선공사용 철도와 공소(公所)가 먼저 생기고, 1.4후퇴시 박수근화백의 가족등 피난민움집이 100여 세대 충혼탑남측아래 자리를 잡습니다. 근 현대는 구 국립가축위생연구소 설치로 안양최초의 석 박사들이 근무하며 주변에 살던 터이다. (5060 오긍선박사 거주) 동덕개발 정덕한사장이 지은 만수원 주택단지가 2개소 있었습니다. 또한 임업시험장이 있어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수위과학농림수산검역원정원-만안구청 녹지 명학공원이 있어 우람한 나무와 더불어 녹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군포에 대한 조사(2019.04.16)

이야기보따리/자료

군포 이야기(건축사 최승원)

 

군포 軍浦
포浦는 강변 해안마을의 뜻이고 (예:永登浦읍)
(서울시 지명사전에서)

당동堂洞 옛날산제를 지내던 당堂(집당)이 있던 데서 이름이 유래
堂山 新黨 舍堂 등은 무속과 관계되는 동리명
경부선 계획시 군포장역 계획이 현위치로 노선변경으로 군포역 형성.
1885년 대원군은 밤새 군포장경유 마산포(화성시 송산면 고포리)로 끌려가 하루를 묵고 청군군함 등영주 1258t 9.1 텐진 도착
수리 산의 위치는 동경 126°50″∼126°55″, 북위 37°20″∼37°24″이고
37도~38도 사이가 전쟁 시 공방이 치열한곳 터키군 수리 산 공격 높이는 469m이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의 명산으로 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며 산곡이 깊었다. 전체 면적 36.155㎢ 중 안양시가 19.5㎢,(54%) 군포시가 10.475㎢,(29%) 안산시가 6.18㎢(17%)를 점유하고 있다.
수리산은 광주산맥을 구성하는 산지 중의 하나로 군포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太乙봉(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슬기 봉(451.5m), 북서쪽으로 관모봉(426m), 남서쪽으로 수암봉(395m) 등이 있다.

 

*군포역 주변 군포 초등학교 이전
*군포장 서편야산에 옹기가마가 있었다, *군포장 북측에 김영림 검정벽돌공장있었다.(7080시)
*군포장 남측에 그릇점. 봉성鳳城리

 

숲은 2002년에는 생명의 숲 및 산림청에서 주최한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수리산유원지와 수리산 삼림욕장이 있는 수리산은 2009년 7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관모봉-여자가 관을 쓰다 김 연하 안양의 양궁 기 보배 배출
동기(冬期)에는 청계산 에서 장작을 해 서울에 팔아 카메라 악기 등 구입- 군포현재부농 농부 김 주호 조부
원주민유지(7080)- 이해천소아과의사 부친은 치과의사.

 

최 승원 건축 작품 (Destruction)
1985년 3대를 위한 L씨 주택 군포원주민 이 해천 의사 댁, 사망후 얼마 있다가 철거되다.- 우리은행 한 불럭 뒤 서 북측
1986년 Lee 소아과의원(군포)1987년 준공 군포제일의원 (의사 이 해천) 산본로 개설시 철거되다. 이 해천 많이 상심하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병렬]옛 군포장터(안양 호계동)에 항일운동 표지석 설치해야(2019.04.15)

이야기보따리/자료

 

옛 군포장터(안양 호계동 구사거리)에 항일운동 표지석 설치해야 한다

 

100년전 1919년 안양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을 아시나요? 군포시가 군포장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적극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 이 만세운동은 당시 군포장이 자리했던 안양 호계동 호계구사거리에서 시작돼 경찰관주재소가 있던 군포역까지 행진하며 펼친 것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상 안양.군포.의왕으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 시흥군 주민들이 함께 벌인 만세운동이라 할수 있다.

군포시와 국가보훈처 및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3월 31일 열린 군포장(軍浦場, 5일장)에서는 독립을 열망하는 인근 지역(현재의 군포, 안양, 의왕) 거주민 2천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군포장(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서 군포장역(전철 1호선 군포역/ 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의 일본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했는데, 일제는 경찰 외에도 군 병력까지 동원해 총을 쏘는 등의 폭력으로 군중들을 해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군포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많은 이와 함께 기억하기 위해 2016년 5월 10일 군포역 광장에 ‘군포항일독립 만세운동기념탑’을 세웠다. 높이 11m의 기념탑은 3∙1 정신을 상징하는 3개의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탑의 양옆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시민들과 이들을 총으로 제압하려는 일본 경찰의 대조적인 모습이 조각돼 있다. 특히 3.1절 100주년을 맞는 오는 3월 30일에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펼친다.

의왕시도 만세운동이 전개된 고천동에 표지판을 세우고 매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반면 안양시는 호계동 구사거리 지역인 100년전 3월 30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에도 이를 알리는 만세운동 표지석이나 조형물은 커녕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도 전혀 없어 안양에서의 만세운동 연구와 이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20190401]군포장역 만세운동 100년 만에 다시 울리다
출처: https://ngoanyang.or.kr/4923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탐사대 150차 탐방(20190316)_만세운동지 안양 호계 구사거리
출처: https://ngoanyang.or.kr/4865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독립기념관 사이트에 기록된 군포장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755


[자료]군포장의 변천과정 이야기 https://ngoanyang.or.kr/2383


군포장을 아시나요 https://ngoanyang.or.kr/2132

 

 

 

 

 

 

 

만세운동 시작된 군포장은 지금의 안양 호계동이다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은 현재의 안양시 호계3동 구장터길 일원으로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 부근이다.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기도 하며,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포와 안양, 의왕의 경계점인 호계3거리 인근인 이곳은 한양-과천-인덕원-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삼남길과 한양-금천-안양-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시흥대로가 교차하던 수원과 안양, 안산, 과천의 길목으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까지 안양.군포.의왕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컷던 장(5일장)이 섰으며 당시에는 상업적 요충지였다.

5일마다 개설되던 군포장은 처음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불리웠다.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군포천 옆에 장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지읍지]와 [과천현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군포장이 서던 곳(현 호계동, 구 군포사거리)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과천시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장(현 호계3동)을 구 군포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장역'(현 군포역) 인근을 신 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가 범람하자 군포역 앞으로 이전하고 시장 명칭을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맑은내의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겼는데 상설시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거주지로 커지면서 군포장역은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60년대에 와서 5일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진다. 이미 그 자리는 상설시장이 자리잡았다. 처음 장이 서던 곳은 구군포 또는 구장터로 불리웠다.
군포장은 193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하게 장이 섰다. 수원과 안양, 안산, 남양, 과천에서 모여들 수 있는 길목이었기에 숱한 이야깃 거리를 생산하면서 발전했고, 수많은 장꾼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당시 군포장하면 소설가 이무영을 빼놓을 수 없다. 죽마지우이자 시인인 ‘이흡’을 따라 군포로 낙향했던 이무영의 눈에 비친 군포장은 예사로움이 아니었다. 그는 군포장으로 생산되는 이야기를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로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서민들의 생황상을 그려냈다. 그 후, 이무영은 10여년간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경생활에 깊은 참여를 하게 되고, 그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궁촌기>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함으로서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더불어 농민 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울 정도로 군포는, 그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궁촌 마을(군포) 하면 이무영의 농민소설 요람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군포장에서는 1919년 3월 31일 2천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포장터(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 모인 주민들은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1.8km 떨어진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군포장 규모가 컷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안양.의왕지역의 주민들까지 함께한 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됐으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대적인 시위운동이었는데 군포역 경찰관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이를 멈추기 위해 군대까지 불러들여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선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2018년 군포역앞에 설치한 항일운동유적지 표지판에는 “군포장 경찰주재소”라 명기돼 있다. 따라서 1919년 3월 31일 2천여명이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되어 군포장 만세운동의 근원지인 안양 호계동 구사거리에 “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 표지판이 설치되어야 한다.

 

 

군포역앞 만세운동 기념탑 건립 취지글에 “군포에서도 3월 31일 장날을 맞아 군포장(호계동)에 모인 2,000여명의 주민들이 1.8Km 떨어진 군포장 경찰관주재소(당동 750-8)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 군포에서 본 관점이지만 그래도 군포장 만세운동 출발점이 안양 호계동임을 명기함.

 

 

 

군포역앞 항일운동 표지판의 내용을 보면 “군포장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훙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만세를 전개한 곳이다“고 적었다. 이는 당시 만세 운동 시작이자 출발점이었던 군포장(안양 호계동)에서의 만세운동 전개과정 등은 전혀 없이 군포역 상황만 나열한 군포시 관점에서 본 내용이다. 더욱이 일부 글이나 언론 기사를 보면 군포장 만세운동하면 마치 군포 만세운동으로 여기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다수 시민들은 물론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 안양문화원 관계자들 조차 군포장이 안양 호계동이며, 군포장 만세운동이 안양에서 시작돼 군포역으로 전개된 사실 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3.1 독립만세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 안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안양 출신 항일운동,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기록으로 남길 것은 명확하게 남기고, 표지석과 표지판을 세울 곳에는 세우고, 오류가 있어 수정해야 할 것은 정확하게 고치는 등의 과정이 필요하다.  

[20190408]안양시 관내 천주교 성당 설립일

이야기보따리/자료

.
안양시 관내 천주교 성당 설립일

수원교구 제2대리구 안양1지구(본당 6개소) 안양2지구(본당 6개소)

 

안양1지구 본당[6개소]
​관악 성당(설립일;1998년01월)  - 안양시 만안구 안양2동 18-114 -
명학 성당(설립일;1978년10월)  -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551-1 -
석수동 성당(설립일;1983년08월)  -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323-2 -
중앙 성당(설립일;1954년09월)  -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6 -
호계동 성당(설립일;1975년12월)  - 안양시 동안구 호계1동 953
​호평동 성당(설립일;1997년02월)  - 안양시 호계2동 893-3 -
                    
안양2지구 본당[6개소]순
​매곡 성당(설립일;2003년09월)  - 안양시 동안구 비산3동 318-2 -​
​​벌말 성당(설립일;2003년01월)  - 안양시 동안구 관양2동 951-2 -
범계 성당(설립일;1998년08월)  - 안양시 호계2동 917 -
비산동 성당(설립일;1978년10월)  - 안양시 비산1동 540-1 -
인덕원 성당(설립일;1997년02월)  - 안양시 동안구 관양2동 1480 2 -
평촌 성당(설립일;1995년01월)  -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1113 -

 

[자료]정조의 화성을묘원행(花城乙卯園幸) 옛길 지금 어디인가

이야기보따리/자료

 

조선후기 중흥기를 이끌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방문을 비롯해 재위기간 동안 총66회의 궁궐밖 행차를 했다. 또한 현릉원 자리에 있었던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하고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직할부대인 외장용을 설치하였다. 이는 정조의 개혁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당시 기득권세력이었던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차에는 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었는데, 당시 행렬에 동원되었던 6,000여명의 인원 중 절반이 정조의 친위부대이 장용영 군사였다. 이는 오늘날 ‘국군의 날’ 행사가 갖는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일반백성들이 국왕의 행렬을 구경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백성들과 함께 하는 국왕의 모습을 연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정조의 재위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방문은 상당히 많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행궁을 방문했던 을묘원행(乙卯園行)이 대표적이며, 당시의 모습을 대표적인 화가였던 김홍도에게 제작하게 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담았다. 이 그림을 참조하여 제작된 <화성능행도>에는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행궁에서 열렸던 회갑잔치, 낙남헌에서 과거시험, 낙남헌에서 열렸던 노인들의 위한 양로연, 한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그린 환어행렬도 등 당시 정조의 화성행차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왕실 최대의 사건이 일어나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도 궁궐 밖 나들이인 행행(幸行)을 자주했다. 재위 24년간 총66회의 행행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했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연민과 어머니 혜경궁에 대한 효성의 실천이다. 특히, 1795년에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사도세자의 구갑(舊甲)까지 경축하면서 자신의 재위 20년을 정리하는 뜻깊은 행사로 화성으로의 행차를 가졌는데 가장 잘 연구한 이의 블로그 글을 전하면서 그길을 따라가 본다.

 

정조대왕과 시흥행궁(始興幸宮)- 화성원행(華城園行) 길을 금천으로 변경하다

http://blog.daum.net/mindle49/18313886

 

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花城乙卯園幸)(1),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놓고 건너다

http://blog.daum.net/mindle49/18313850

 

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華城乙卯園幸)⓶, 만안(萬安)고개를 넘다

http://blog.daum.net/mindle49/18313850

 

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華城乙卯園幸)⓷, 시흥행궁(始興幸宮)에서 경숙(經宿)하다

http://blog.daum.net/mindle49/18313886

 

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華城乙卯園幸)⓸, 시흥행궁(始興幸宮)에서 화성(수원)행궁으로

http://blog.daum.net/mindle49/18313850

 

 

[자료]13개 지자체 하천이 거쳐가는 안양천(安養川)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천(安養川)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경기도의 의왕시, 군포시, 안양시, 광명시, 시흥시, 부천시 등 7개 시와 서울의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관악구, 동작구, 양천구, 강서구 등 7개 구 등 13개 지자체 지역에서 지천이 흘러들고 지나면서 성산대교 서쪽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유역의 면적은 286km²이며, 총 길이(지류 제외)는 32.5km에 달한다.

안양천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하천이 안양 시가지 앞을 지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고, 만안교(萬安橋)는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안양천에서 수원(水原)으로 통하는 대로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안양천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안양을 중심으로 그 뒤로는 수암천이 지나고 앞으로는 안양천이 흐르기 때문에 안양천을 '앞개울'이라 하고, 수암천을 '뒷개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양평동 근처에서는 내의 모양이 오목하다 하여 '오목내'라고도 하며, '갈천(葛川)'은 안양천의 옛 이름으로 전해진다.

안양천은 국가에서 관리상 하천 명을 붙이기 이전에는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안양천만이 아니고 한강을 비롯한 전국에서도 그렇게 했다.

『여지도서』 「과천현」 산천 항목에 안양천(安陽川)이라 기록되어 있고,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 하나의 근원이 사근천(沙斤川)이고, 또 하나의 근원은 인덕원천(仁德院川)인데, 합해져서 금천현의 염천(?川)으로 흘러간다."라고 나온다. 오늘날 쓰는 안양천(安養川)의 한자와 다르게 표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근천은 현재의 안양천 상류에 있는 의왕시 고천리의 사그내이며, 인덕원천은 현재의 안양천 지류인 학의천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와 달리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안양천 상류지역에서는 사근천(沙斤川), 그 아래에서는 군포천이라 불렀고, 학의천을 인덕원천, 안양에서는 갈천, 동천이라 했으며, 금천에서는 한내·한천·대천(大川) 등으로 불렀다. 또 오목교 부근에서는 오목내, 한강에 연한 양천에서는 철곶포라고 불렀다.

기록을 보면 『해동지도』 「과천현지도」에도 안양천 상류에 사근천이, 금천현과의 경계선인 안양사와 안양교 부근에 안양천(安陽川)이라 표기되고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금천현 구간을 염천이라 했기 때문에 "금천현의 염천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했다. 

『1872년지방지도』 「과천현」 편에는 안양천 상류가 군포천(軍浦川)으로 기록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광여도』 「금천현」에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임을 알 수 있고, 이 하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로,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천(大川)이 기록되어 있고, "금천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과천현의 관악 · 청계 등 여러 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금천현 구간을 대천이라 기록한 것인데, 금천현에서 가장 큰 하천이란 뜻으로 보통 순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 표기로 많은 고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천현의 안양천 구간을 철곶포라 불렀음도 알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포구나 갯가의 특수한 지형을 하천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 현재의 양천구와 영등포구 사이의 오목교 사이에서는 '오목내'라고도 불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하천관리를 위해 본류와 1 · 2 · 3차 지류를 설정하면서 발원지에서 차수가 더 높은 하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하였고, 그것이 현재의 하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양천은 크게 9개의 지천을 거느리고 있다. 상류에서부터 왕곡천, 오전천, 당정천, 산본천, 수암천, 학의천, 삼성천, 목감천, 도림천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부르는 이름까지 하면 더욱 많다.

학의천은 청계산과 백운산의 물을 담아 내려오고, 삼성천은 삼막천과 관악산 남쪽지역의 물을 받으며, 도림천은 관악산 물을 받아오고, 수암천과 산본천은 수리산(일명 佛見山)의 물을 담아내고 있다. 목감천은 시흥시 일대의 물을 담아 온다.

안양천은 금천, 구로, 양천 등 평야지대를 흐르면서 자연지형에 맞추어 흐르다 보니 구불구불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직각공사를 하여 비교적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으며, 1974년경에 하상정비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됐다.

이곳은 1973년 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천엽하는 등 수질이 양호했다. 이후 수질이 갑자기 오염돼서 1979년경에는 악취가 심하여 접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1994년경부터 하수관 분류 사업을 시행하여 점점 되살아나 오늘은 1970년대 초의 수질을 다시 찾았다.

 

안양천은 어디에서 발원(發源) 할까?

고운(高雲)  전 만 수

 

혹자는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백운산(백운산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학의천으로 안양천의 지류이다.

안양천의 발원지는 지지대(遲遲臺)이다.

지지대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
정조대왕이 1792년 1월 26일 화성의 현륭원<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후에 장조(壯祖)로 추존>에 참배를 갖다 환궁할 때 수원 북쪽 사근현(沙斤峴, 사근고개)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려 가슴 막히는 증세도 조금 가라앉았다. 이 지역은 바로 수원지역의 경계이니 내가 말에서 내려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행차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다.”고 하면서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 천천히 가는 고개)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 후 이 고개에 ‘遲遲臺’라는 비와 비각을 세우고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러니 이 고개는 1792년부터 사근고개에서 지지대고개로 바뀌었다.

정조는 평생을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壯獻世子로 고침)를 가슴에 품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야 했다. 이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아버님이 계신 화성이 안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고 싶은 마음에서 머뭇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인다.

나는 정조의 어전에 두 무릎을 꿇고 알현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나는 안양천의 발원지와 지류 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양천 앞 안양천에서 계속 물을 따라 걸어서 지지대고개까지 왔다.

지지대 고개에 떨어진 빗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수원천을 이루고, 북쪽으로 구르면 안양천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양천과 정조대왕의 깊은 인연을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안양천 발원지는 일정한 샘이나 저수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지대고개 언덕마루에서 시작한다.

[박철하]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

이야기보따리/자료

한적한 농촌마을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기운이 돋다

 

의왕시는 대한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효율적으로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의곡면과 왕륜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하고 수원군에 편입시켰다. 당시 의왕지역은 지금의 부곡동(삼동, 이동), 고천동(왕곡동, 고천동), 오전동, 내손1.2동, 청계동(청계동, 학의동, 포일동) 등을 포함하였다.

고천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천)주정소가 있었다. 현종 때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지만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이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설치한 뒤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주정소를 수리 확장하고 ‘사근행궁’이라 명명했다. 일제는 바로 이 사근행궁을 그대로 의왕면사무소로 이용하였다. 곧이어 면사무소 가까이에 경찰관주재소도 설치되었다. 고천 일대에는 소규모 장을 볼 수 있는 곳과 주막이 들어서고 의왕면의 읍내로서 모습을 갖춰갔다.

1910년대 의왕면에는 800여 호 안팎에 3,00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다. 농업인구가 90% 이상 절대적으로 많았고 약간의 상업인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농업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영세빈민으로 불안한 소작인의 지위에 처한 주민들이 많은 아주 궁벽한 농촌마을이었다. 학교도 없어서 인근의 과천으로 가야 했고, 일본인은 한 두 가구 거주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크게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며 평범한 농민들의 삶터에 불과한 곳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도가 설치되면서 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논밭 및 임야의 주인과 소작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조상의 묘역이 훼손된 어느 가족은 저항하다가 ‘반일분자’로 몰리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청계산일대에는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광주군 학현(현 의왕시 청계동)에 거주하던 박성삼은 윤치장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청계산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군량미와 군자금모집에 참여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특히 청계지역에는 마을마다 작은 서당을 중심으로 한학을 배우는 학동들이 적지 않았고, 19세기 후반 이후 하우현성당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성당에서 운영하는 근대적인 학교인 경애강습소가 있어서 그곳에서 신학문을 습득하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있었다.

 

청계마을 청년들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5일에는 서울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대문역 앞에서 종로에 이르는 곳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에는 의왕면 청계리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성주복도 참여했다. 성주복(成周復, 1894~1971)은 당일 아침 남대문 밖에서 고향에서 온 동생 성주관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학교 도구와 양복을 동생에게 건네주고, 두루마기를 건네받아 갈아입고 만세운동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소식은 성주복의 동생을 통해 청계 마을에 있는 친구 이복영((李復英, 1893~1938. 호적 이봉근)에게 전달되었다. 훗날 이복영의 사촌 동생 이철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복영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전에 의왕지역에서 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먼저 청계지역을 중심으로 인근 4개리(포일리, 내손리, 청계리, 학의리)의 책임자를 정하였다. 1주일 동안 비밀리에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고, ‘숲밖에’(현 백운호수 주차장 지역) 집결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은 마을 구장(이장)에게 통문으로 전달되었고, 그의 책임 아래 의무적으로 한 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했다. 만약 이 기밀을 누설하거나 만세운동에 불참하는 가정에 대해서는 만세시위 후 방화한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전계획과 준비는 고개 너머 고천리와 오전리, 삼리에도 전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3월 중순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폭력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월 27~28일 인근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군수를 협박하는가 하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의 총기를 빼앗고,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안양과 군포, 과천에서도 300명에서 1천명이 넘는 시위대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는 3월 31일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청계마을 주민들은 3월 31일 저녁 무렵 ‘숲밖에’ 모여 시위대를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300~35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와 횃불이 들려 있었다. 시위대는 오전리 고개를 넘어 오매기 마을과 전주나미 마을을 지나고, 고천리 사그내마을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거쳐 의왕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일부는 지지대고개의 산봉우리에 올라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의왕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인 마을주민들이었으며,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참여했다. 군중 수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인근의 왕곡리와 이리, 삼리지역의 주민들도 함께 했다.

시위대는 준비해온 태극기를 흔들고 횃불을 높이 들어 의왕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오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왕면사무소앞 시위대에는 면장도 함께 했다. 시위대는 주재소로 달려갔다. 주재소에 있던 조선인 순사는 “저는 (총독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관리이므로 내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으나 마음은 함께 합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세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 라며 시위대를 격려했다고 한다.

시위대의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수원으로부터 일본 보병이 출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보병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하던 동료 시위자들은 부상자를 부축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여 수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46명이었다. 체포된 시위대는 밤새워 조사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41명은 4월 1일 태형 60~90대의 무자비한 폭력적 처벌을 받고 풀려났다. 부상자 두 명 가운데 한 명, 즉 청계리의 독립만세운동 지도자 이복영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실행되었다는 점, 둘째는 비밀 누설자 또는 불참자에 대한 시위조직자들의 강력한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는 점, 셋째는 농민만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는 점, 넷째 순사와 면장도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 다섯째는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는 폭력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 여섯째는 일본군의 무력적인 탄압과 경찰의 폭력적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점 등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의왕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운동을 역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의왕문화원은 2011년 독립만세운동 사실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2012년부터 매년 3.1절을 기해 기념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2017년부터는 기념식 중에 중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연극반을 구성하여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한편, 2013년부터 의왕시민사회단체들은 연합하여 3월 31일 저녁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던 의왕면사무소터(현 고천동 소재 의왕시청 별관/사근행궁터)에서 독립만세운동 재현생사를 해오고 있다. 특히 3.1운동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 및 인권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혁명임을 인식하고 마을공동체, 장애인단체, 생활협동조합, 교육공동체, 노동조합 기타 시민사회단체가 각각 3.1운동을 기념하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1919년 만세시위대의 발자취를 따라 거리행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 현장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의왕시는 3월 31일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 기념일로 지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보존하고, 시위대가 행진하던 거리를 ‘만세거리’로 조성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료]안양의 독립운동가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의 독립운동가

 

1. 원태우(元泰祐) (고종19(1882)∼1950) 독립운동가. 본관은 원주(原州). 원태성과 이호순 사이에서 2남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1동 642(현 농협중앙회 안양시지부 부근)에서 태어났다.문헌에 따라 원태근; 김시근;.김태근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로 되어 있다. 그의 형이 원영우인 것으로 보아 「우(祐)」가 항열로 보여진다.
그는 본래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에 의기가 높고 바른 일에 앞장을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그가 23세 되던 해(1905)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광무8년(1904) 러일전쟁의 승리로 이끈 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 박탈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광무9년(1905) 10월에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를 비롯하여, 주한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쯔라등이 조약을 체결 할 모의를 하고, 그해 11월 9일에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히로부미를 황제 위문 특파대사라는 구실로 한국에 파견, 한일협상안을 정부에 제출 토록하고,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는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봉정(奉呈)하고,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의 반대가 심하였다.
16일에는 정동에 있는 손택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여덟 대신을 위협하여 헙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우리 정부의 전 각료를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 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 사이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는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시위하였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 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 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한편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히로부미는 즉시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병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반대 하였을 따름이고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조약이 체결 되어 외교권이 탈취 당하였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동 조약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통곡과 격분속에서 한때 나마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한 채 통곡하는가 하며, 각급 학교는 문을 닫고 스승과 제자가 손을 맞잡고 개탄과 비분에 빠졌다.
3일 후에는 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 선생이 자신이 사장겸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 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480여 자(字)의 논설을 실어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 해서 풀어준 결과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2천만 한국민을 항쟁의 대열로 끌어 들이기에 족 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5일 후인 11월 22일에는 조약체결의 장본인이자 우리민족의 不共戴天之怨讐인 이토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의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 하고 이날 오전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수원에서 안양까지 사냥을 하며 안양에 도착,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 행 열차를 탔다.
한편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 한다는 소식을 접한 원태우 지사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그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이때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 사건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던 열차가 1시간이나 지체해 8시에 도착했다.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해서 였고, 일본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날부터 신문에 보도되었다.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에는 원태근이란 이름으로 안양시장「22통1호」라는 주소와 함께 보도했고, 도쿄에서 발행하는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는 「이토 히로부미 조난 전말」의 기사로 사건상황을 설명했으며, 일본 박물관 발행의《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보도했다.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것으로 명기된 이 그림은,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을 앞둔 궁중의 고뇌에 찬 어전회의 장면 등도 함께 담겨 있는데, 동 화보에 의하면 이토히로부미는 그해 11월 25일 낮 12시 30분부터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군사령부 정원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 입구에는 화려한 아취를 세우고 세계 각국의 만국기가 휘날렸으며 또 10개소의 음식 테이블을 설치하고 일본과 한국기생들을 동원, 내빈들을 접대하고 여흥으로 일본씨름 스모와 줄타기 등을 했다.
한편 원 지사는 사건 직후 사이토 일본 헌병대장이 수명의 헌병과 경찰들을 이끌고 현장에 내려와 철도 공부 다니노와 야마사키의 도움으로 원 지사를 포함한 4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그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 지사는 철도 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영등포 감옥에서 풀려난 원 지사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에 흉측 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더욱이 생계를 꾸려 나가기 여의치 못해 원 지사 형(영우)의 삼남인 계복(1910∼)씨가 원 지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쓸쓸히 타계해 안양시 만안구 안양 4동 709∼16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뤘는데, 그후 1982년 이곳에 화영아파트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원 지사의 유품으로는 원 지사가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고, 또 한 개와 맷돌 1개는 원 지사의 양자인 계복씨가 소장하고 있다. 의거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1990년 8월15일에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11월 22일에는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참고문헌]《기려수필》,《속음청사》,《대한계년사》,《독립운동사》,《안양문헌》, 시흥군지》,《경기인 물지》,《일로전쟁화보》,《대한매일신보》

 

 

2.한흥이(韓興履. 恒吉) (광무 1(1897)∼1979)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몽당(夢當). 본관은 청주(淸州). 용익(用翼)의 아들로 부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시절 안양으로 이전하여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에서 성장하였다.
아명은 정봉(丁鳳)인데 8살 때(1904) 민적법(民籍法)이 실행되자 조부가 「한 나라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으로 「흥이」로 이름을 지었다.
10살(1906)까지는 조부로부터 천자문·소학 등을 배웠고, 13살(1909)부터는 호계동 소재낙영학교(樂英學校) 2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 해 폐교되자 수원군 반월면 4리(현 안산시 4동)소재 장화의숙(長華義塾)에 편입하여 맹자·수학·일어 등을 수학하고, 이어 1915년에 시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교 전신)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학비문제와 집안내의 반대의견에 부딪히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조부의 시국관인 일제가 운영하는 관립교육에 대한 반감의식과 정면으로 대립 되었던 것이다.
즉 조부의 뜻은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관립학교로서 일제가 주관하는 학교인데 어찌 한국인으로서 그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겠느냐? 는 지론이었으나 그는 신지식을 습득하여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의 불행을 막아보자는 어린 마음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부모가 아들에 대한 뜻을 표명하여 끝내는 조부를 설득시켜 입학을 허락받자 서울 만리동 소재 김달환 댁에 기숙하며 통학하였다.
입학 후 학생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특히 2학년 때(1919) 일어난 3·5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1919년 3월 3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초로 반일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11살 되던 해(1907)년 밭에서 김매고 있던 한국인 농부를 왜병이 구타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때였다.
그 후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한 것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경기고보 재학중에 기차 통학생의 임무로 독립선언서를 분배받아 시흥·안양·군포역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연 성을 역설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일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있은 후 3월 5일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항일독립운동이 경성역(현 서울역) 광장을 기점으로 계획되어 오전 9시경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고종의 인산(因山)을 마치고 귀성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일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다.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시위군중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남대문에 이르렀다.
이날 남대문에 모인 전체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둘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학생시위대들과 왜경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도 이때 경기고보 학생신분으로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게 구금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잘못했다」 한마디만 했으면 학생의 신분이므로 훈방으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부친은 영등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송된 두루마기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졸도 하였다가 그 후 병을 얻기 까지 하였다.
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 하자 요시찰인물이라는 낙인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이때 국권의 회복과 구국(救國)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보통학교 교원 양성소를 지원, 1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전과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 당국자로서는 불합격시키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후일의 책임문제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등포경찰서에 전화로 조회한 결과 당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학생들은 모두 복권되었으니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받고서야 입학을 허가하였다. 재학중에는 반장을 맡아 학과목 담임이 공무상 출장으로 수업이 결강되면 으레 대강(代講)을 하였다.
1923년 3월 수료식을 앞두고 전과 사실로 또 한 차례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급기야는 수료식을 1주일 동안 연기 하고 야간회의까지 거듭한 결과 졸업은 시키고 우등상을 주나 상장 문안(文案)에 「품행방정」이라는 말을 빼기로 하고, 학교 배치는 공립학교가아닌 사립학교 3년 의무 복무로 한다는 등의 결정을 보았다.
그 후 서울 수창동에 소재한 경성보인학교(현 보인상고 전신)에 부임하여 졸업반 담임에 학생감·교무주임의 중책을 맡았다.
1927년 경성부에서는 학교 행정의 효율화와 모범교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학사 시찰단을 구성하였는데, 그는 사학(私學)의 대표격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여러 곳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낙후성과 현재의 우리 학교 교육이란 결국 일인양성정책의 일환이란 느낌이 들어 귀국하는 길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일본 시찰 중에 절감했던 또 한가지 사실은 법률 지식에 대한 부족이었다.
그래서 경성법정학교 야간부에 입학, 3개년의 과정을 이수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동년 4월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기사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신문사에서 알게 된 한 상사의 추천으로 경기도 포천의 연초판매소의 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 하였는데, 일본 식민통치의 「눈에 가시」 같은 요주의 인물이라 하여 일반인들로부터 철저히 격리 시키기 위하여 함남 영흥을 거쳐 삼수갑산, 강원도 양구 등 춥고 외진 벽촌에서만 근무케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에 정착, 그해 11월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안양시 안양동 603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하였다.
안양직물의 제품은 질 위주로 튼튼하고 건실하게 만들어져 「쇠가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이 제품에 외제상표를 붙여 판매 한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있었다.
당시 공장 내의 근로자들의 학력수준이 매우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장 내에 공민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이때 시흥군면보단장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94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효자상을 받았고 이 해에 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항길(恒吉)」 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장문을 닫고 5리 밖에 있는 호계동 본가로 가있다가 그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이듬 해 일자리를 찾던 중 부산 시내에 소재한 <국제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서울의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경 했던 길에 안양직물공장이 완파된 것을 목격했다.
공장은 전쟁이 나자 도보로 남하하는 인민군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략상 대형폭탄을 투하하여 완전 파괴시킨 것이다. 전쟁으로 공장이 완파되자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부천시 중구 심곡동 424)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 안양에서 기계 부품들을 뜯어와 닦고 손질하기 수 개월 만에 제품을 생산하였다.
회사명은 안양에서의 전직원이 다시 모였으므로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여 1953년 5월에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에는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를 육성해야 되고, 한 산업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를 양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학교 설립을 신청, 인가를 받아 공장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3년 후(1961)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문부가 각각 증설되었다.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이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1979)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후 이해 5월 8일,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8월15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에 있다.

 [참고문헌]
《몽당한한길선생유고집》,《독립운동사》,《현대사자료》, 《시흥군지>,<동아일보>,<경기신문>,<경기교육신보>,<중앙일보>,<안양신문>


 

3. 하영홍(河永泓) (고종 16(1879)∼1915)

 

기독교인. 항일투사. 본관은 진주(晋州). 일명 주명(周明). 진찬(鎭瓚)의 아들.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연(演)의 15대손이며 조선 중기에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우청(遇淸)의 10대손이다.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안양시 석수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한 후, 삼막골 마을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도하였다.
이어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이 교회의 속장이 되어 광무 5년(1901) 8월 6일 스웨어러(미국인) 선교사와 존스 장로사(현 감리사와 비슷한 직 책)와 각회 교회 형제·자매 70여명이 봉헌예배를 올렸다.
그 후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활하던 중 25세가 되던 광무 8년(1904)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시흥읍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 시흥농민들이 봉기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견은 일본이 동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을사조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원활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사역키 위하여 동년 8월 청국 안동현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건설에 노동자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다.
이에 농민들은 과대한 역부의 모집과 시흥군수 박우량이 역부들의 노임을 한푼도 주지 않고 착복하는가 하면 역부 모집에 있어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자 시흥의 6개면 농민 수 천명(혹은 1만명)이 항쟁을 한 것이다.
그는 성우경(광명시 가학동 출신)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곧바로 순검에게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가 그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 3동 병목안(?)에 있었는데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하여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시흥직산안핵사주본》,《일한외교사료》,《수원지방교회자료집》,《향기》,《시흥군지》, 《한말시흥농민운동에 관한 연구》,<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신학월보>, <감리교회 연회록>, <안양시지>


 

4. 이영래(李永來) (고종 10년 (1873)∼1949)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태순(泰純)의 장남으로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27일 광목 행상도중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백기화(白基和) 집에 들러 그 집에 모여 있던 이종교(李種敎)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 날 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옥에서 석방된 후에는 광명시 일직동 220번지에 이주해 살다가 1949년 2월 17일 상오 11시 사망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쟁골에 있었는데 군부대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자료집》, 《시흥군지》


 

5. 이재현(李在賢) (1917. 2. 2 ∼1997. 2. 24)

 

경기도 시흥 동면 사람이다.
이명(異名)으로 이해평(李海平), 이재두(李績) 로 사용.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지에 나가 대일 항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공작대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공작대는 서안(西安)으로 이주 하였으며, 그는 김동수(金東洙), 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서성(山西省) 등지로 파견 되어 중국 호종남(胡宗南) 직속의 산서지구(山西地區) 유격대와 합류, 정보 수집, 적정탐색, 초모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 소동구(小東口)를 본거지로 하여 노안성(路安省) 및 하남성(河南省)의 초작( 炸)등지로 진출하여 과감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 됨에 따라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월환(羅月煥)은 지대장으로 임명 되었으며, 그는 이하유(李河有), 박기성(朴基成), 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5 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 하면서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정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광복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5지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 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 하던 중 광복을 맞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7년 2월 24일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며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가족으로 부인 김숙 여사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한국독립사(김승학), 무장독립운동비사, 일제침략하36년사,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6. 이재천(李在天) ((1913. 5. 10 ∼ ?)

 

경기 시흥 동면 사람이다.
호(號)는 우봉(牛峰). 상해 망명 독립지사 이용환(李龍煥)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상해에 있는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뜻을 계승할 것을 결심하고 1929년 2월에 화랑제도를 본 따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조직된 화랑사(花郞士)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의 연락업무, 임시정부 요인 등의 송영(送迎)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임정(臨政) 국무위원 조소앙 선생의 지도 아래 '화랑보(花郞報)' 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상해(上海) 교포들에게 배포 하였다.
1931년 백범 김구(白帆 金九)선생 지도하에, 상해 한국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하여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 하였으며(단원 약 200명), 월간지 '새싹'을 발행하여 상해는 물론 조선내(朝鮮內) 각지로 발송하고, 3·1절 기념일(紀念日)에는 '3·1 기념일(紀念日)을 경축(慶祝)함' 이란 격문 700∼800매를 인쇄하여 살포하고 조선내로도 발송하였다.
1932년 8년 29일 기념식을 상해 중국가(中國街) 침례예배당에서 거행 하였는데 등단(登壇)하여 연설을 하였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임시 정부의 밀명(密命)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김구(金九) 일파로써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감옥(大田監獄)과 에서 복역하였는데 1940년 8월 18일 석방된 기록이 있다.
이후 행발불명되었으나 일본이 자료 공개를 거부하여 자세한 내막을 모르며, 고문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어 석방 하였을 것으로 추정함(4년 5개월 21일 복역).
일본 경시청의 자료 공개 거부로 사망 일자 확인이 불가능하고 시신도 없어 순국선열(殉國先烈) 위패(位牌)조차 모실 수 없었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을, 1991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11월 7일 보훈처에서 그의 후손이 없으므로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기로 결정.
2000년 12월 10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충렬대(忠烈臺)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재 직계가족은 없으며 동생 이재현의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기억-조동범]안양 태창목재소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기억

태창목재소 / 조동범

<시와정신> 2003 가을호 시인이 쓴 산문

 

 며칠 전인가 퇴역 군함을 수장시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사진 속의 군함은 제 생명을 다하고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뱃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군함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일생을 바다에서 보내고 바다로 돌아가는 군함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 없이 많은 전투와 항해를 겪었을 군함의 최후는 장엄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다이버들의 훈련용으로 쓰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고철로 분해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즐겁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군함은 천천히 녹이 슬어가며 아주 오래도록, 바다에서 보낸 일생을 추억할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몇 달 전에 문을 닫은 태창목재소를 떠올렸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던,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창목재소. 태창목재소는 1976년에 문을 열고 올 봄에 문을 닫은, 말 그대로 나무를 파는 상점이다. 태창목재소는 27년의 세월을 견디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아이의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2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27년 전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만큼 자란 나는 그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엘 다녀오고 결혼을 하였다. 언제나 나무 향 가득하던 목재소는 그렇게 세월을 남겨두고 문을 닫고 말았다.

  목재소 가득 퍼지던 나무의 향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배어 나온 그 향은 마치 깊은 숲에서 나는 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무에서는 언제나 그런 기분 좋은 선선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목재 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부모님께 인사를 했고 친구들과 그 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으며 나무가 가득 쌓인 통로를 지나 변소엘 갔다. 그 곳에는 언제나 나무의 향이 가득했다.

  한번은 목재소가 있던 안양에 대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목재소가 문을 연 다음 해였던 1977년의 일이었다. 물은 천장까지 차올랐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밀려들었는지 삽 한 자루를 들고 물을 막아보려던 아버지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물은 삽시간에 나무가 쌓여 있던 마당과 창고까지 차올랐다. 밤 새, 물 위로 떠오른 나무와 그 향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혹시 나무가 홍수에 모두 휩쓸려 먼바다를 떠도는 꿈을 꾸신 것은 아닐까? 참담한 여름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늘에서 아주 오래도록 나무를 말렸다. 물에 젖은 나무의 향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마르자 허옇게 일어난 톱밥이 우수수 떨어졌다. 톱밥은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공중에 흩뿌리던 톱밥은 아마도 부모님의 눈에 박혀 눈물과 함께 나무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을 것이다.


태창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나무를 들어내자 세월을 뒤집어 쓴 톱밥이 뿌옇게 드러났다. 나는 그날, 톱밥에 섞인 뿌연 먼지와 함께 폐부로 들어오는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바다 너머 낯선 이국의 밀림과 밀림의 푸른 나무를 떠올렸다. 태창목재소는 한 번도 푸른 나무를 들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선선한 나무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지난 27년 동안 나는 목재 창고 안에 배어 있던 나무 냄새를 맡으며 언제나 밀림을 눈앞에 그리곤 했다.

  톱밥은 곱고 부드러웠다. 손끝에 올려놓은 톱밥을 지그시 누르자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왔다. 지금이야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당시만 해도 톱밥은 매우 유용한 보온재였다. 톱밥 위에 누우면 전해지는,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톱밥에 누워 손끝에 전해지는, 푹신하면서도 까칠한 느낌을 주먹에 가득 쥐고는 잠이 들곤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 태창목재소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님은 목재소를 차리기 위해 살던 집을 팔았는데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살던 집에서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목재소를 찾지 못해 무척 당황했었다. 우리 식구는 그 후로 오랫동안 목재소 귀퉁이의 무허가 집에서 나무와 함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목재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커다란 트럭이 들어와 내 키보다 높게 나무를 부려 놓았다. 부모님은 내 키보다 높은, 아득한 곳에 차곡차곡 나무를 쌓았다. 밀림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을 나무는 언제나 나이테를 드러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팔려나가 집이 되고 가구가 되고 기둥이 되었으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 소년을 키웠다. 나무의 뿌리는 바다 너머 아득히 먼 이국에 남았지만 목재소의 나무는 내게 언제나 단단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거대한 푸른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 식구는 그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언제나 행복했다. 목재소는 몇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빈 공터에 허술한 나무 담장을 두르고 있던 목재소는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상호도 태창목재소에서 태창종합목재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번 없이 네 자리였던 전화번호도 한 자리 국번과 두 자리 국번을 거쳐 세 자리 국번을 갖춘 전화번호로 바뀌었다.

  수장되는 군함의 사진을 보며 나는 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켜켜이 쌓인 톱밥을 쓸어내며 느꼈던 아련함을 보았다.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세월을 간직한 채 깊은 바다에 수장되는 군함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목재소의 추억을 떠올렸다. 군함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지만 바다에 잠겨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바다 속 깊은 곳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제 몸 곳곳에 바다를 담고 바다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목재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바다가 되어 가는 군함처럼 내 마음 속에 담겨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고 나무의 향을 뿜어 27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재소를 그만두게 되어 편하다고 하시는 부모님 역시 꿈 속에서 나무 향기 가득한 추억을 건져 올릴 것이다.


지금은 피아노 상점이 들어선, 목재소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정리된 피아노 상점 바닥의 귀퉁이에 아직도 치우지 못한 톱밥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의 향은 거의 잃었지만 톱밥 부스러기는 아직도 목재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목재소와 나무 그리고 나무의 향을 아직까지 가슴 속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일까? 목재소에 관한 시 한 편 변변히 써보지 못하고 시인이 되었는데 이제 목재소는 그 자리에 없다. 수장된 군함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담긴 목재소를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나무의 향기 내 마음 속에 가득한데 어쩐 일인지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려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1동 557-34번지.

  아직도 목재소가 있었던 그 자리를 지날 때면 나무의 향이 나는 것만 같다.

  그 곳에, 나를 키운 목재소가 있었다.

  나무의 향 가득한, 태창목재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