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01120]가로수에 대한 이야기, 'KBS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

이야기보따리/자료

'KBS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

유튜브 영상보기:

KBS 스페셜 - 서울나무, 파리나무.20190613

https://youtu.be/zU2SDAnAZjM 

 

 

KBS 스페셜 - 너무 차이나는 서울나무, 파리나무.20190613

https://youtu.be/aJsBJyLc16Y

 

KBS 스페셜 - 알렉스 샤이고 박사, 전정의 원칙을 밝히다.20190613
https://youtu.be/gU_OPm_hBj0

 

KBS 스페셜 -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 좁힐 수 있을까.20190613

https://youtu.be/ynuQZml6ULI

 

KBS 스페셜 - 미스터리, 왜 파리나무는 전정 상처가 사라지나.20190613

https://youtu.be/BPS4k5FqRK4

 


사각형 콘크리트 건물로 꽉 들어찬 삭막한 서울의 풍경, 이 도시에 기괴함을 더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도시 곳곳의 나무들이다. 참 볼품없고 측은하다.

반면 파리, 런던 등 선진국의 나무들은 품위 있고 건강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왜 수종이 같은데도, 유독 한국에 서 있는 나무들만 자신의 품위를 잃고 이리도 초라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걸까? 나아가 최고의 도시경쟁력을 꿈꾸는 서울, 그리고 온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망치고 있는 것일까? 이제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나무의 삶과 비밀에 주목한다.

 

“한국에서 양버즘나무 봤을 때는 앙상하고 별로 이쁘단 생각을 못 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이게 같은 나무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이쁘고 자연스럽고 풍성해서 가로수 역할을 잘하는 거 같아요“ -류현심 (런던 거주)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운 양버즘나무와 서울의 양버즘나무.

같은 나무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한반도가 자생지인 벚나무조차 서울보다 파리가 더 건강하고 아름답다.

서울 나무는 자른 자리가 썩어들어 가 고통받고 있지만

놀랍게도 파리나무의 전정 상처는 아물어 새살로 덮여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스터리, 왜 파리나무는 전정 상처가 사라지나

 파리나무와 서울나무의 차이는 서로 다른 ‘전정법’의 당연한 결과다. 잘못된 전정은 나무를 추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반면 올바른 전정은 나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린다. 근대 수목관리학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만들어낸 파리의 전정 비밀을 밝힌다.

 

알렉스 샤이고 박사, 전정의 원칙을 밝히다

근대 수목관리학의 아버지인 알렉스 샤이고(Alex Shigo, 1930-2006) 박사는 30여 년 동안 15,000본 이상의 나무를 절개해보며 올바른 전정법을 연구한 인물이다.

그는 동물의 경우 상처 부위를 치유할 수 있지만, 나무는 상처를 격리하고 살아갈 뿐이라는 CODIT(Compartmentalization Of Decay In Trees , 나무의 부후 구획화) 이론을 발표했다.

샤이고 박사가 이 이론을 통해 밝혀낸 정확한 전정의 위치는 어디일까?

“나무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은 이해를 의미한다.“ -알렉스 샤이고 -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 좁힐 수 있을까

“만약 나무가 올바른 곳에 자연스럽게 원래 모습대로 커간다면 인간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니콜라 쥬브네(아제르리도성 공원 관리자)-

최근, 프랑스는 올바른 전정을 넘어 전정이 필요 없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전문적 아보리스트(수목관리전문가)를 양성하고, 나무의 전생애관리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은 아직도 뒤틀린 수형의 묘목들을 전선주 밑에 생각 없이 심고 있다. 이대로라면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KBS 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는 한국에 심어진 나무들의 절규를 듣고, 수십 년간의 논쟁과 연구 끝에 밝혀진 수목관리학의 과학적 성과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나무의 아름다움과 건강, 품위를 되찾고자 한다.

 

 

 

 

[기사]마라톤 손기정 1933.10.17 경성운동장-안양 코스에서 세계신기록 냈다(20201110)

이야기보따리/기사

 

마라톤 손기정 1933.10.17 경성운동장-안양 코스에서 세계신기록을 냈다. 1933년 10월 17일 제9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처음으로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성운동장을 반 바퀴 돌고 출발해 동대문~종로를 지나 경수가도 안양을 왕복하는 42.195㎞(26과 4분의1마일) 풀코스 마라톤에서 마치 중장거리 주자가 뛰는 것처럼 달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스피드를 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했지만 손기정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2시간29분34초로 1위, 남승룡은 2시간31분36초로 2위. 모두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의 자바라가 수립한 2시간31분36초를 뛰어넘는 세계신기록이었다.

 

[마니아리프트]정태화기자
승인 | 2020-11-10 08:00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46)마라톤이야기⑦권태하 편지받고 중장거리에서 마라톤으로 바꾼 손기정

http://www.maniareport.com/view.php?ud=20201110075445570818e70538d2_19&fbclid=IwAR3K1UGZtVW46_PHj1HWd2b4a-YWUPBEEhfQXFJEScYojXxWrQH3-LslE8M

 

 

[이진복]100년전 조선지지자료에 산본(山本) 순우리말 지명 '산밋' 확인(20190607)

이야기보따리/자료

 


[군포 역사·문화기행] 산본(山本) 보다 '산밋'으로 
 100년전 조선지지자료에 순우리말 지명 '산밋' 확인 
 군포시민신문/ 이진복 기자  ㅣ   기사입력  2019/06/07 [08:15]  

기사보기 링크: https://www.mediagunpo.co.kr/sub_read.html?uid=8517&section=sc14
 

산본(山本)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1919년 3.1운동과 4.11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100년에서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일제가 만든 지명도 청산하여 고유한 우리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지명(地名)은 특정 지역을 구별하고 인식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붙인 명칭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신앙, 전통과 풍속, 연희와 물산(物産) 등의 실정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지명(地名)은 작게는 우리 삶의 터전인 마을에서 국가까지 걸치는 가장 큰 표상(表象)인 것이다.

1914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명과 지지(地誌) 사항을 조사하여 작성한 지리정보 자료이다. 거기에는 100년 전 사용되던 순우리말 지명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전래의 지명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기 시작하는 1911년 당시의 지리정보 모두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산본(山本)의 순 우리말 명칭은 ‘산밋’으로 되어 있다. 즉 ‘수리산 아래(山底里)’라는 의미이다. ‘산밋’이라는 명칭은 이재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도 ‘山底里 산밋’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총9책) 2책(경기도) 과천현 남면에 “금정리(衿井里), 당리(堂里), 봉성리(鳳城里), 당정리(堂井里), 장간리(章干里), ‘산저리(山底里)’, 부곡리(富谷里) 마을과 함께 호구수 460호, 인구수 1929명(남 807명, 여 1,12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산밋’은 ‘수리산 아래’로 100여 전에 잃어버렸던 순수한 우리 마을의 고유명칭인 것이다. 더구나 수리산은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수리산은 속리산, 칠장산, 청계산, 광교산, 관악산 등 한남정맥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산지 중의 하나로 태을봉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 북쪽으로는 관모봉, 북서쪽으로는 수암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리산은 산자락이 많아서 서울 재상들의 조상 묘소가 많이 있다”고 하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수리산 자락에 있는 군포는 3대 문형(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을 포함 7명의 문형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 집안’인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 묘역과 함께 문익공 정광필(영의정)을 비롯하여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집안’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정광필의 아버지), 문익공 정광필(영의정), 동평위 정재륜(효종의 부마)등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20201111]안양의 5-60년대 야사 "희미한기억의편린들"(김정기저)

이야기보따리/자료

 

2020/ #안양 #기록 #기억 #편린 #김정기 #안양초25회 귀중한 책 한권을 선물받았습니다. 제목이 희미한_기억의_편린(片隣)들-"집에 가는길"(발행: 2020.3.1)로 안양초등학교 25회  동창이신 김정기(한양대명예교수) 선생이 동창회 카페( http://cafe.daum.net/anyangkk25)에 올린 글들을 정리해 책자로 낸것인데  6.25 한국전쟁의 기억부터 초등학교시절의 추억,  50-60년이 지난 현재와 과거의 현장 풍경 비교 답사 소감, 한국 과학발전 과정에 대한 소고,  등 다양한 글이 실려있다.  책자를 펴낸 김정기 선생은  이승언의 "안양시 지명 유래집 : 이승언 저(李承彥)"이 안양의 "정사"라면, 내가 여기에 쓴 내용은 "야사"라고나 할까? 우리가 어린세월을 지내온 안양이 어떻게 생겨난지를 잠깐 살펴 보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정기 선생 약력

1944.08 안양에서 출생.
1957.03 안양초등학교 졸업.
1960.03 안양중학교 졸업.
1964.02 안양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1969.09 육군 병장 만기 제대.
1971.02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1979.02 연세대하교 대학원 졸업(이학박사).
1979.03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 취임.
2009.08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정년퇴임.

 

 

 

 

 

[기사]피로 물든 태극기 60여년 보관한 할머니의 감동 사연(20101226)

이야기보따리/기사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6.25전쟁때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 고이 간직


<오마이뉴스>10.12.26 17:28l최종 업데이트 10.12.26 17:28l

최병렬(choipong)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6.25전쟁때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 고이 간직

 

   
맹은순 할머니가 60여년 보관해 온 피로 물든 태극기 
  

6.25 한국전쟁 당시 전쟁에 나가는 남편과 생이별을 하면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팬티 속에 감추어 오던 한 할머니가 반동가족으로 몰려 집단 처형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서 피로 물들었던 태극기를 보관해 왔던 사연이 60여 년만에 알려져 감동을 주고있다.

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에 '추억의 명화 거리'를 조성했다. 박달2동 주민자치센터가 3400여 만원의 예산으로 마련한 이곳은 안양고 앞과 아파트 주변에 흉물로 방치돼 왔던 150여 미터 옹벽 주변을 도시미관 차원에서 조성한 것으로 지난 24일 제막식을 가졌다.

이곳에는 동양화 8점과 세계명화 25점, 추억사진 9점 등 대형그림과 사진 등 42점이 옹벽과 담자락을 따라 '동양화의 거리', '추억의 거리', '명화의 거리' 등으로 구분지어 조성돼 지역주민들은 물론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특히 그림들을 따라 걷다 보면 안양고 정문 앞 옹벽에 내걸린 그림 속에 피로 얼룩지고, 찟겨져 나간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 헐머니의 사진과 글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

 

안양시 박달2동 주민센터가 조성한 추억의 명화거리 
14살 때부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겪은 할머니의 애국심

 

사진 속 주인공은 강원도 철원이 고향으로 현재 박달2동 지역에 거주하는 맹은순(88세)할머니로 그림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의 애국심이 담겨 있다.

할머니의 사연을 보면 1937년 일제 강점기 당시 14세였던 소녀는 한반도 문양의 자수를 몸속에 간직하다 일본 헌병에 발각돼 고초를 겪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모부에 보내져 24살까지 독립운동가들의 편지와 자금이송 등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이후 맹 할머니는 황해도 신천으로 돌아와 25세 되던 해에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결혼 1개월 열이틀만에 6.25 전쟁이 반발했다. 이로 인해 옹진전투때 남편이 속해 있던 국군 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새벽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때 할머니는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를 팬티 속에 넣어 보관해 오던 중 어느날 반동가족으로 집단 사살현장으로 끌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당시 죽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총검으로 엉덩이를 찔렀는데 그때 흐른 피가 태극기를 물들인 것이다.

맹 할머니는 38세때 안양 박달동에 정착했는데 아직도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태극기를 펼쳐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안양고교 정문앞 옹벽에 부착된 맹 할머니의 태극기 사연 
 

2010년 당시 박달2동주민자치센터 이엽 동장(51)은 "맹 할머니는 기초수급혜택자로 어렵게 사시면서도 애국심이 투철하시다"며 "주위로부터 태극기를 보관해 오고 있는 사연을 전해 듣고 이를 널리 알리는 방안으로 '추억의 명화 거리' 조성을 계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동장은 "할머니의 사연이 청소년들에게는 나라 사랑 정신을 본받는 산 교육으로 전해지고, 50-60년대 박달동지역 주변의 추억의 사진들과 명화들이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되살리고, 도시 미관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최병렬]안양(安養)권역 우체국 연혁(20200923)

이야기보따리/자료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  우체국 연혁 / 사용필    

2018. 11. 30. 8:30


1905년 5월 29일 : 안산(安山)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안산(安山)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16일 : 안산(安山)우편소 설치 (總告133, 1911.5.11) 경기도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1915년 7월 1일 : 안양(安養)우편소로 이전 개칭 (總告148, 1915.6.15) ◈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1941년 2월 1일 : 안양(安養)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1950년 1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개칭

2000년 5월 1일 : 서안양(西安養)우체국 개국 (情通部訓令200, 2000.4.17)

​1995년 9월 1일 : 안양평촌(安養坪村)우체국 개국 (서울廳公1995-111, 1995.8.31) 관인 등록

​2000년 5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1905년 5월 20일 : 과천(果川)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과천(果川)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31일 : 과천(果川)우체소 폐지 (總告157,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과천읍

1911년 6월 1일 : 과천(果川)우편소 설치 (總告156,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군내면 관문동

​1941년 2월 1일 : 과천(果川)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과천(果川)우체국


​1986년 12월 30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6년 10월 2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1997년 11월 10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270708) [과천우면] [KC. U-MYON]

2008년 5월 6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12월 30일 : 과천중앙(果川中央)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89, 1985.12.18)

                                (171-11) [과천중앙] [KC. CHUNGANG]

1997년 1월 31일 : 과천중앙동(果川中央洞)우편취급소 위탁계약 해지 (서울廳告1997-1, 1997.1.27)

​2009년 4월 6일 : 수원지방법원안양지원(水原地方法院安養支院) 출장소 개소

 


1973년 5월 19일 : 안양4동(安養四洞)우체국 개국

 

1997년 4월 7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9월 16일 : 안양관양동(安養冠陽洞)우체국 개국 (서울廳公672, 1985.9.3) 관인 등록

 

1997년 11월 10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310628) [안양새마을] [AY. SAEMAUL]

 

2008년 5월 6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새마을] [AY. SAEMAEUL]

2020년 8월 3일 : 안양관양2동(安養冠陽二洞)우편취급국으로 국명 변경 (京仁地廳告2020-14, 2020.7.9)

                            [안양관양2] [AY. GWANYANG2]

 

1992년 12월 30일 : 안양귀인동(安養貴仁洞)우체국 개국 (遞告1992-84, 1992.10.1)

                                6급 (4300701) [안양귀인] [AY. KWIIN]

 

 

1992년 11월 10일 :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우편취급소 개소 (遞告1992-94, 1992.10.27)

 

                                (4300839) [안양교도소] [ANYANG CI.]

1996년 11월 1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소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6-83, 1996.10.14)


​                           (4310839)  [안양덕고개] [AY.  TOKKOGAE] 이용자 불쾌감 고려

​2008년 5월 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4년 10월 1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4-16, 2015.9.15)

 

 

2012년 12월 29일 : 안양덕천(安養德泉)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2-10, 2013.1.3)

 


1994년 11월 26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1994-1, 1994.11.26)

 

2015년 6월 1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폐국

1992년 3월 30일 : 안양평촌동(安養坪村洞)우체국 (遞告1992-23, 1992.3.30)

 

                              6급 (4300706) [안양평촌] [AY. PYONGCHON]

1995년 9월 11일 : 안양부림동(安養富林洞)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5-113, 1995.9.13)

​                              6급 (4300656) [안양부림] [AY. PULIM]

 


​2001년 8월 20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소 개소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529) [안양비산삼호] [AY. BISAN SAMHO]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7년 9월 10일 : 안양석수동(安養石水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9, 1987.9.14) 관인 등록

 


1987년 12월 30일 : 안양석수아파트(安養石水-)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석수아파트] [AY. SOKSU APT]

 

 


1986년 10월 2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우체국 역전(驛前)분국

1971년 1월 4일 : 안양역전(安養驛前)우체국으로 승격 (遞信部令535, 1974.12.28)

 

 

1990년 1월 10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118) [안양진흥] [ANYANG JINHUNG]

2008년 5월 6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재개국 (京仁地廳告2013-1, 2013.1.17)

 

 

​1990년 1월 10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429) [안양충훈부] [AY. CHUNGHUNBU]

2008년 5월 6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2011년 12월 21일 : 안양호계동(安養虎溪洞)우체국 개국

 


1983년 12월 27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소 개소 (遞告213, 1983.12.31)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1987년 12월 30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호계3] [AY. HOGYE3]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828) [안양호계현대] [AY. HOGYE HYUNDAI]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51년 12월 1일 : 중앙청내(中央廳內)우체국 당분간 일반사무취급 중지 (遞公61, 1951.11.24)

                              광화문우체국 승계

중앙청구내(中央廳構內)우체국

1983년 5월 1일 : 과천정부종합청사구내(果川政府綜合廳舍構內)우체국으로 이전 국명 변경

                           (서울廳公502, 1983.4.28) 관인 등록

 


1983년 5월 11일 : 과천정부제2청사(果川政府第二廳舍)우체국 개국

1998년 3월 2일 : 정부과천청사(政府果川廳舍)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8-17, 1998.2.16)

                            6급 [정부과천청사] [GOVT. KWACHON]

 

 

1977년 7월 1일 : 제132군사우체국 개국 (체기행151.1-20281, 1977.7.15)

2005년 2월 1일 : 안양우체국 제132군사우편출장소로 명칭 변경

[출처]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작성자 강경원  https://blog.naver.com/400251/221409238383 

[최병렬]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2020.08.27)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

각 고장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있다. 안양시에도 8경이 있다. 문화, 역사 등을 아우르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안양8경이다. 수리산과 삼성산, 관악산으로 둘러싸인 안양시에는 도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명소가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안양시는 지난 2003년 안양을 대표하는 명소로 안양8경을 선정한 데 이어 안양시민으로서의 자긍심 고취와 도시경쟁력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2007년 3월 안양의 자랑거리 49가지 선정에 나서 시민과 공무원 의견을 수렴하고 지역원로, 교수,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6차례 걸친 심사를 거쳐 2008년 1월 28일 개최한 '안양의 자랑거리 심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자연환경 ▲문화유산 ▲문화체육분야 ▲산업경제분야 ▲조형·건축물분야 ▲안양시 우수시책 등 7개 분야에서 49가지를 안양의 자랑거리로 확정했다.

안양 8경중 제1경은 행운이 따르면 멀리 서해낙조도 가능한 관악산 '망해암 일몰', 제2경은 자연 형태의 모습이 이채로운 '삼막사 남녀근석', 제3경은 신도시에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평촌 중앙공원', 제4경은 사도세자 능참배 역사가 담긴 '삼막천 만안교'다.
제5경은 순교 성인의 정신이 담겨있는 수리산 최경환성지, 제6경은 안양유원지에서 예술작품의 보고로 변신한 '안양예술공원', 제7경은 돌을 한켜한켜 쌓아올린 '병목안삼림욕장 석탑', 제8경은 명실공히 안양중심이라는 할 수 있는 번화가인 '안양1번가'다.


제1경 - 망해암 일몰​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에 위치한 망해암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뜻[1]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視界)가 탁 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 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악산의 한 지류인 비봉산 망해암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대림대학교 옆의 관악산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망해암은 대림대학교 입구에서 임곡중학교를 거쳐 망해암까지 약 2km, 걸어서 30분, 자동차로는 7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가 울창하고 길이 좋아 차로 가도, 걸어서 가도 자연과 함께 하는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간혹 내려가는 차와 올라가는 차가 서로 마주칠 때가 있지만 중간 중간 폭이 넓은 공간이 있어 차량 이용에 큰 어려움은 없다.
날 좋은 날 시야가 탁 트인 망해암에 올라 바라보는 시가지와 서해 일몰의 조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망해암은 동안구 비산동에 위치한 전통사찰로 봉은사말사지에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조선 순조3년(1803)에 정조대왕의 모친인 홍대비께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망해암이란 명칭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가 탁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서해 너머로 붉게 물들어 가고, 갈 길을 재촉하는 도심의 차 소리와 어우러져 회상 속에 빠져들게 하는 곳, 서해의 붉은 바다와 해가 진 후 어둠이 깔린 안양 시내를 바라보는 야경은 망해암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


제2경 - 삼막사 남녀근석​
삼막사 남녀근석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위치해있다. 신기한 자연의 예술품인 남녀근석(男女根石)은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있으며, 1985년 6월 28일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풍화된 2개의 자연 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녀 성기(性器)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근과 여근의 거리는 2m이며 남근의 높이는 1.5m, 여근의 높이는 1.1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는바,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동남아 지역과 일본에도 많이 산재해 있다.
삼막사는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제3경 - 평촌중앙공원​
평촌중앙공원은 각종 조경수와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다목적운동장 등 체육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특히 4계절 테마(봄정원, 여름정원, 가을정원, 겨울정원)를 부여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4계절에 맞게 식재된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여 시민의 정서를 함양시키고 쾌적한 도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도심 공원의 미래상을 조명하며 공원내 수경시설은 207m의 계류와 다양한 형태의 분수 시설(상징분수, 스크린분수, 터널분수, 바닥분수)로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도심 속에 찌들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더 청량하게 해준다.

제4경 - 만안교​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천로211번길 5에 위치해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1795년(정조 19)에 축조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만안교는 길이 약 30m, 폭 약 8m, 높이 약 6m에, 7개의 아치형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으며 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멀리서 다리 전체를 바라보면 7개의 아치형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시 정조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 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만안교를 경유하게 되었다.
원래 위치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 쪽 이었으나 1980년 8월 국도 확장을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만안교는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태령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행차로를 닦는데 어려움이 있어, 정조가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도록 명을 내려, 영국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만안교 남단에는 건립당시 세운 만안교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만안교비 축조 당시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되었다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큰 공사였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뜻대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굳건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가 된 ‘만안교 다리 밟기’가 해마다 열린다. 

제5경 - 수리산 성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394에 위치한 수리산 성지는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연 성지이다. 수리산 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며, 전국 각지에서 연중 30,000여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양9동 병목안시민공원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담배촌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있다. 이곳은 하동 정씨를 비롯해 금녕 김씨, 원주 변씨, 청주 한씨 등의 거주지로 183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정착한 천주교인들이 담배를 경작하며 살던 곳이다. 1939년 최경환 성인이 옥에서 순교 후 매장된 지역으로 이후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성지성당에는 주일이면 미사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성당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리산성지가 있다. 수리산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연중 3만 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최경환은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의 아버지이다. 이성례 마리아와 담배촌에 정착, 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파하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 온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최경환은 배교하라는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장렬히 순교하였다. 부인 이성례도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으로 천묘 후 다시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25년 교황 성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위치 안양시 안양동 병목안로 394


제6경 -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일대에 위치해있다. 안양예술공원은 안양유원지의 새로운 이름으로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주변의 전통사찰 및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어 과거 수도권의 휴양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안양의 명물로 이름을 떨쳤던 포도가 오가는 이의 미각을 돋우어 주던 곳이다.
안양예술공원은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주변에는 안양사, 염불암 등 고찰과 중초사지 당간지주, 석수동 마애종 등의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고 안양박물관과 김중업박물관, APAP(안양예술공공프로젝트) 예술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인공폭포, 야외무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물이 맑아 물놀이하기에도 좋고 계곡 옆에는 수영장이 개설되어 있어 여름철 휴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안양예술공원의 중심도로인 예술로를 따라 올라가 산으로 진입하면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진행으로 설치된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다. 스탬프 투어도 가능하며 스탬프 리플렛은 주변에 있는 안양박물관이나 안양파빌리온, 김중업박물관에서 받을 수 있다.
이곳의 대표 예술작품인 전망대는 네덜란드 작가 MVRDV의 작품으로 삼성산의 등고선을 연장하여 산의 높이를 확장한 전망대로, 이곳에 올라가면 안양시를 비롯한 안양예술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다가오는 여름, 주말 나들이로도 제격인 안양예술공원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예술작품 감상하면서 더위도 날리고 이색적인 분위기도 느껴보자.
위치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2


제7경 - 병목안 산림욕장 석탑​
병목안 산림욕장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75에 위치해있다. 이 석탑은 병목안을 상징해 주면서도 수리산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한 병 모양의 석탑! 양쪽에 조화롭게 병모양으로 쌓아 올린 탑은 주변의 쓸모없는 돌무더기들을 이용해서 자연의 조화와 인공의 미를 살린 수리산 산림욕장의 명물이며 이정표이기도 하다. 석탑이 상징하듯 백영약수터 오르막길에는 돌무더기 곳곳마다 정성을 쌓아 올린 돌탑들이 무수히 쌓여있다.

제8경 - 안양1번가​
안양1번가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139번길 7에 위치해있다. 안양1번가는 1996년부터 매년 10월에 젊음의 도시·패션의 거리 안양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시민들에게 볼거리 제공과 함께 자유와 멋과 낭만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안양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안양1번가’는 안양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안양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안양의 금융과 교통, 상권을 태동시키고, 지역 발전을 이끌었다하여 ‘안양1번가’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평촌 신도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안양의 대다수 젊은이가 모이는 번화가 중의 번화가였다. 안양1번가 입구는 약속장소의 대명사였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단연 일순위였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곳은 많은 젊은이들이 쇼핑과 먹거리, 놀이를 위해 찾고 있다. 또, 3~40대 이상에서는 추억을 위해 찾기도 한다.안양1번가는 메인 거리를 중심으로 가지처럼 옆으로 길들이 나있다. 이 길에는 옷가게와 잡화점 등은 물론 다양한 즐길거리와 먹거리 등을 제공하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게들은 한자리에서 몇 십 년째 영업해 온 곳도 있고, 맛집이나 명소로 소문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도 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점들이 자리한 탓에 원스탑 쇼핑을 즐기러 오는 쇼핑족도 많다. 이들의 시선을 끌고자 유행의 변화도 빠른 편이다. 매년 10월에는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뿐만 아니다. 안양1번가 주변은 재래시장인 중앙시장과 남부시장은 물론 안양역 등이 자리해 있어 쇼핑과 교통의 편리함까지 더해준다. 거기다 안양1번가 아래는 수많은 상점들이 밀집한 지하상가가 조성돼 있어 또 하나의 거대 상권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안양1번가는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안양 최대의 번화가로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일원
시민이 뽑은 안양 자랑거리 49가지

 

'자연환경' 분야로는 안양을 병풍처럼 둘러싼 관악산, 수리산, 삼성산과 생태하천으로 돌아온 학의천, 서울대 관악수목원, 효성공장 진달래 동산, 병목안 시민공원, 석수체육공원, 석수동 염불암 보리수, 석수동 할아버지·할머니나무 등 10가지가 포함됐다.

'문화유산'으로는 경기도 유·무형문화재인 삼막사 삼층석탑, 생칠장, 북메우기, 삼막사 명부전, 안양사 귀부와 부도, 석수동 마애종, 구 서이면사무소와 비지정 기념물인 평촌 지석묘, 관양동 청동기 유적, 만안답교놀이, 안양날미농악, 안양시민의 소리북, 보물 제4호 증초사지 당간지주 등 14가지가 꼽혔다.

'문화체육' 분야는 안양의 대표적 축제인 안양시민축제를 비롯 예절교육의 메카인 안양예절교육관, 공연장인 평촌아트홀, 안양체육관, 세계대회를 훌륭히 치러낸 안양롤러경기장, 안양을 연고로 하는 프로구단인 안양KT&G 카이츠농구단과 안양한라 아이스하키단 그리고 유명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안양예술고등학교 등 8가지가 자랑거리에 합류했다.

'산업경제' 분야에서는 명학역~평촌역~인덕원역으로 연결되는 안양벤처벨리, 대표적 재래시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시장, 각종 산업기자재를 한데 모은 안양국제유통단지(호계3동), 안양 명품 농산물인 안양포도 등 4가지가 자랑거리에 이름을 올렸다.

'조형·건축물' 분야로는 안양예술공원의 대표적 건축물인 알바로시자홀, 안양전망대, 김중업 디자인 건축물 등 3가지와 '우수시책'에는 안양을 명품 예술도시로 디자인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안양아트시티 21과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등 2가지가 각각 선정됐다.

[최승원]의왕 도심속 부곡철도관사촌 조사 자료(20200825)

이야기보따리/자료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도를 까는 일이었다. 경성을 거쳐 평양, 의주를 지나 만주까지 군사와 물자를 보내는데 철도만큼 시급한 일도 없었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는 경원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함북선 등 국토 곳곳에 터널을 뚫고 철로를 깔아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의 지렛대로 삼았다.

철도가 깔릴수록 종사원도 늘 수밖에 없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가장 거대한 기관이었는데, 1906년 6월 통감국 철도국 시절에는 5400명이었으나 해방 직전 1945년까지 10만6000여명으로 급증했다.

거대해진 기관만큼 ‘철도가족’끼리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각종 후생복지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타 기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후생복지는 철도 종사원에게 제공되는 주거시설인 철도관사나 철도병원의 의료혜택이다.

경성의 용산, 청량리, 수색이나 부산 초량, 대전, 순천, 평양, 강계, 해주 등 전국 철도 교통 요충지에는 수백 동의 대규모 관사 단지가 조성됐다. 이뿐만아니라 역사의 규모에 따라 중규모 단지, 작은 역에는 소규모 단지를 이뤘다. 역장 관사는 단독 건물로 역과 인접하여 따로 지었다. 이러한 단독주택 주거단지는 요즘으로 치면 '타운 하우스'인 셈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택 문화였다.

현재 일제강점기 내내 얼마만큼 철도관사가 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오늘날 거의 소멸됐으며 철도관사가 존재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단지는 가로세로 구획을 잘 나눴고 주택들은 정남향이다. 초창기에 지은 철도노동자 숙소는 막사형의 연와조 목조 가건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돌로 벽을 올린 목조단층에 시멘트 기와를 얻은 일본 전통가옥양식의 근대화된 형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의 전통 난방 시설인 온돌을 가미하기도 했다.

[다크 헤리티지를 찾아] 일제강점기의 '타운하우스' 철도 관사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 또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말한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부설되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은 1943년 지금의 의왕시 삼동 192번지 일대를 철도기지화 시킨후 철도국 종사자를 위한 소규모 신도시를 계획하였고 100여동 200세대의 관사단지(官舍團地)를 조성하였다.
용산에 근무하는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부곡관사로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통근편의를 위하여 1944년 수원역과 군포역 사이에 철도역을 신설했는데 이 역이 부곡역(2003년 의왕역으로 명칭변경)이다.

부곡역은 경부선 수원∼군포 사이에 있는 역원이 배치된 간이정차장으로 위치로는 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였고 철도 거리상으로는 수원∼부곡은 8㎞, 부곡∼군포는 3.8㎞로 당시 의왕 철도관사촌이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후 이후 의왕지역에 철도관련 시설들이 대거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부곡역(현 의왕역)은 1964년 11월2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고, 1967년에는 역구내 인접지역에 남영금속주식회사(한국기계, 현 대우중공업)가 설립돼 의왕시가 철도차량 생산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는 시발점이 된다.
1974년에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철도화물기지 준공으로 의왕시 철도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연이어 철도박물관과 한국철도대학(현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철도공사 인재개발원 등 세계적 수준의 집적화된 철도시설이 들어서 그야말로 의왕시가 철도산업의 요충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철도 관사촌이 조성된 당시에는 넓은 대로변에 좌우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었으나 현재는 도로 폭이 좁아지고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현재 약 35동 정도의 건축물에는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고, 3동 정도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택들은 시멘트 몰탈 벽도 깨끗하고 복원도 가능한 상태로 이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대의 철도관사(鐵道官舍)로 문화재 가치가 높아 시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도시와 건축도 생명체처럼 생노병사한다. 의왕시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건축사로 안양지역 문화찾기와 보존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사료 발굴과 알리기에 앞장서온 시흥군 태생의 최승원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겸임)는 "건축의 나이도 60살이 되면 축하해 주자"며 오래전 부터 부곡역 주변의 철도 (구)관사의 보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부곡역 관사촌은 해방동이(1945년)로 태어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야생초처럼 살아 남아 있다며 태어날 때는 넓은 대로변 좌우로 건축 되었는데 도로 폭을 줄이고 난 개발로 인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모습이라고 느낌을 피력했다.
또한 오래된 건축이지만 시멘트 몰탈벽이 깨끗하고 복원이 가능하다며 "건축도 60살이 되면 수리도 해 주고 주변에서 칭찬도 해 주어야 오래 산다"고 철도 박물관이 철도관사의 부분 복원과 연계될 때 철도 관광의 볼거리가 풍부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부곡역 설치 이후 100년이 흘렀지만 도시의 유산(물)이 몇 개나 남아 있는가? 묻고 의왕시는 Celebration of Cities에 속한다고 문화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의왕시사에 기록된 철도관사 이야기

 

의왕역에서 내려 이정표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도와 관련된 많은 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철도대학, 철도박물관 이정표가 보이고, 철도공무원연수원(중앙연수원)이 있고, 일제시대 때 일본인 철도공무원들의 관사였던 집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인근의 (주)로템은 기관차, 전동차 객차를 생산하는 곳이며, 의왕ICD가 생긴 것도 이러한 철도와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기도내 철도용지 비교하면, 의왕시가 네 번째로 많은 철도용지(130만 1,975.3㎡)를 가지고 있다.8) 이것은 의왕시 전체 면적(5,395만 3,257.1㎡)의 2.4% 차지하는 면적이다.
그러나 의왕시가 철도와 깊은 인연을 짚은 것은 이 면적에서 보이는 비중이 아니라 옛 부곡역 외에도 철도관사가 있기 때문이다.9) 100세대 200호를 지었던 이 옛 일본철도공무원 관사는 현재 정확히 몇 채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부곡중앙길을 올라가며 좌우로 드문드문 보이는 지붕을 볼 수 있다. 이들 관사는 현재 음식점이나 주점으로, 월셋방을 놓은 다가구 임대주택으로 개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사는 사라졌으나 그 터에 새로 지은 연립주택들이 많고 이 길 끝에 이르면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만나게 된다. 중앙길을 올라가며 왼쪽은 1~50호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며, 그 끝에서 다시 내려오며 51~100호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이 옛 일본인 관사에 살고 있는 최재희는 이 관사가 “일본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려고 이렇게 지은 거”라고 한다.
1채 지으면 2가구가 살게 된 거, 이렇게 100호를 지어 200세대가 살았어요, 살기는 반반 짤라서 200세대가 살았어. 일본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 나서 서울 살면 위험하니까 피난집이지. 살기 위해서 지은 거야, (전쟁에) 졌으니까 일본으로 간 거고. 그 때 당시 해방돼서 한국사람이 철도에 다닌 사람들이 산거.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한국철도에 다니는 사람이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산거, 배당은 어떻게 된 줄 몰라도 철도의 각 분야 다니는 사람에게 불하를 한 거지. 살지 못한 사람들은 팔아서 나가고, 철도에 개인에게 팔았는데 철도를 관 둔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팔아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고, 팔아서 빌라 짓기도 하고.10)
일본인의 피난집은 지금 여러 형태로 개조하여 사용되고 있는 모습에서 그만큼의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지만, 최재희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앞뒤로 있는 연립들이나 빌라들과 달리 그의 집 대문은 장미덩쿨로 아치를 만들고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한쪽 귀퉁이에는 국화와 장미들이 자라고 우물이 있었던 자리 뒤로는 감나무가 있었다. 또 한쪽에는 배추와 고추들이 자라는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부곡이 공기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연립, 아파트가 들어와서 공기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 울타리 안만큼은 예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정경이 그대로였다. “이 집에 산 것은 약 50년이 되는데, 그것도 철도 전기계통에 근무하여서 지금의 집을 불하를 받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불하 받을 때 필요한 것 중에 입사증이 있었는데, 내가 산 것만 알지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이 없어. 철도에는 운전·전기 계통이 있어서 그 분야에 ‘너는 몇 채 갖고 있어라’ 배당 한 후 나중에 불하한 거고. 6·25가 나서 몇 채 없어지고 그 나머지는 빌라 아파트가 들어오고. 이렇게 관사를 왜놈들이 피난집으로 지은 거예요. 이거 짓기 위해서 간이역을 지은 거고. 철도공무원만 출퇴근 할 수 있게.
최재희에게 피난집으로 각인된 이 관사는 1960년대 후반, 개인에게 불하되었는데 이것을 관장한 곳은 수원세무서였다. 평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1가구가 보통 130~140평이었다. 1946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부곡으로 내려와 관사에 살았던 단창욱도 당시 관사의 내부에 대해, “관사 1가구는 목욕탕이 있었고, 다다미방이랑 온돌방이 두개 있는 19평짜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호가 두 가구로 46년 당시 전기, 목욕시설, 문화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어요. 일본사람 사용하던 거 그대로. 아침 출근시간엔 역사에서 싸이렌을 울려주곤 했어요”라고 하였다. 이 관사가 생김으로써 간이역이 생겼고, 해방 후 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은 부곡이 중심지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때 관사는 철도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목욕시설과 전기, 전화시설을 갖춘 ‘문화시설’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관사가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예를 들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고장을 집집마다 돌리는 게 가능하였고, “몇 호집이냐?”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 가능하였다. 체육대회가 열릴 때에도 관사를 중심으로 귀속의식이 있어서 중앙길을 중심으로 ‘남관사(1~50호)’, ‘북관사(51~100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철도가 생겨 전기·전화가 들어오면서, 부곡은 중심지가 되었고, 부유층은 관사에 살기도 하였다.11)
1943년 건립된 이 철도관사는 당시 교통국의 중추인 용산·경성지구의 배후기지로서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곡관사의 형태는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고 현관이 측면으로 되어 있다.12) 그리고 서너집이 공동우물을 있었고, 집 앞으로는 작은 도랑을 내어 하수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대체로 객화차 사무소 직원, 철도 전기수선공, 선로보수 관계자, 기차역 근무자, 기관사 등이었다.13)
지금은 여러 가게들과 월세방으로 변해버린 철도관사는 그래도 기와를 올린 지붕과 시멘트를 바른 허름한 벽이 옛 모습을 알게 해준다.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실제 60여 년 동안 부곡 주민의 주택으로서 버텨왔으며, 의왕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주택단지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따라서 사라져가는 관사의 옛 모습은 일제의 잔재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민이 겪은 근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로서 근대문화 유산의 의미가 있으며, 한국철도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며 그 시설이 집적되어 있는 의왕시에서 이는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1부) 중앙로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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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2부) 중앙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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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 탐행기(상편) 중앙로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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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 탐행기(하편) 중앙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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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학교풍경 1(2013.10.28)

이야기보따리/기억


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학교풍경 1

안양초 25회 졸업생 김정기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가? 비틀스 출신 폴 매카트니(71)가 비틑스와의 향수 짙은 과거를 다룬 신곡 "뉴"를 내면서. "옛날 회상은 내게 큰 기쁨"이라고 했다던가? 이말은 어쩌면 나에게도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희미한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쓸때면 마치 내가 철없이 즐겁게 뛰어 놀던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하게 돼지. 그러나 나이먹어 갈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기억은 잡을수록 멀어져 가기만 하는거 같다. 어찌보면 내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멀리 스러져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잡으려는 나의 마지막 발버둥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른 자료 없이 희미한 내 기억을 더듬어 어렸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1학년에서 6 학년 까지의 학교 풍경을 도면으로 그려 보고자 하였다. 혹시 내 기억에 동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 해 주시기를 바라고, 여러 동무들도 이 도면에서 뛰어 놀았던 생각나는 부분이 있으면 나와 동참하시기를 바라지.

1 북쪽 교문, 2 우리 동창 성춘강네가 운영한 문구점, 3 본관 뒤에 위치한 숙직실과 변소-정식 변소외에도 이지정이 빠졌다는 소문이 있던 간이변소가 있었던 것 같고,
4 본관-1~4학년 까지 배웠던 교실, 5 우리가 6학년때 교실, 6 연못안에 만든 한반도 지도, 7 본관 중앙문-조회 때는 선생님들이 이 문을 통해서 출입,
8 졸업사진 찍은 본관 앞 국기 게양대, 9 겉벽을 판자로 둘른 교실, 10 운동장으로 내려 가는 계단, 11 최근에 세워진 교실, 12 공민학교 학생들 천막교실,
13 교실난 해소를 위해서 임시로 세워진 천막교실 또는 나중에 운동회 응원석, 14 우물, 15 가축연구소쪽이나 김양복이네 가는 후문,
16 1번국도쪽 교문-이 문은 한번도 드나든 적이 없고 혹시 전유석이는 집에 갈때 이 문을 통하지 않았을까?, 17 운동장, 18 철봉대.
 

[기사]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20200629)

이야기보따리/기사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
뉴스워커(http://www.newsworker.co.kr)

신대성 기자 승인 2011.08.22 12:16 
 
의왕시민은 89년 市로 승격한데는 대우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 믿는다
대우사원아파트 37개동 1138세대, 4~인 기준 5~6천명 인구 유입효과

※글에 도움주신 분들
신창현 전 민선1기 의왕시장(대우건설 OB),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대우건설 OB),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대우건설 OB), 김주민 내손라재개발구역 이사, 임신택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대우건설 홍보실 외 다수

의왕시 정비사업현황을 취재(52페이지 참조)하던 중 가장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이 포일대우사원아파트이었다. 이곳은 현재 대림산업이 재건축을 수주해 현재 의왕 내손 대림e편한세상이 들어선 곳이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원아파트는 도심지에 건립한다. 출퇴근이 용이하여 업무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아파트는 지금 대림산업에 의해 리모델링되어 ‘압구정 아크로빌’이라는 고급아파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대우건설은 의왕면 포일리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다.(대우사원아파트가 건립된 때는 84년 4월이며, 의왕이 시로 승격한 때는 89년 1월이었다.) 그것도 1138세대라는 당시로는 메머드급 대형아파트였다. 일개 읍 따위에 이렇게 대단지 아파트를 짓게 된 것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읍에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했는가

이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기 위해서는 대우건설 출신들을 만나봐야 했다. 이 때 연락이 가능했던 분들이 신창현 전 의왕시장(민선1기)이었으며,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 그리고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등이었다. 이들 중 신창현 전 시장과 김동화 대표는 의왕대우사원아파트에 직접 살고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건네 오는 답은 간단했다. “땅값이 쌌으니까 그곳에 아파트를 지었지” 신창현 전 시장의 말이다. 김동화 대표는 당시 신입사원 시절이어서 잘 모른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내손 라구역의 김주민 이사가 알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포일택지개발지구로 1978년부터 개발계획이 나오고 택지개발공사가 이뤄졌다.

당시 포일동·내손동 일대는 배나무 밭이었다. 이곳에 땅을 깎고 평평하고 반듯하게 구획을 정리하는 사업이 이뤄졌다.

포일택지개발사업에 선두에 선 곳이 대우건설이었다. 대우건설은 1차 포일주공 터(지금의 포일자이)를 구획정리하고 2차로 대우사원아파트(지금의 포일 e-편한세상)터를 정리했다. 그 이후 대우건설 계열회사가 지금의 내손 가·나·다·라 지역의 구획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건설이 의왕 포일동에 대우사원아파트를 짓게 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앞서 신창현 전 의왕시장이 말했던 것처럼 땅 값이 쌌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당시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되고 주택건립사업을 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선 곳이 없었다. 주택공사에 1차부지인 포일주공은 짓게 했지만, 2차 부지까지 떠넘기기에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에 택지구획정리를 맡은 대우건설이 총대를 메고 아파트를 이곳에 건립하게 됐다.

대우건설이 아파트를 건립하게 된 시기는 81년부터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최초의 주택건립사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81년 12월에 착공하여 83년 4월에 준공을 마친 개포고층아파트(대우라는 이름을 당시에는 쓰지 않았다.)가 최초였다.(자료, 대우건설 홍보실) 그 이후 세 번째로 준공한 아파트가 바로 이곳 포일대우사원아파트다.

사원아파트 개념으로 초대형 단지를 조성한 것은 대우건설이 최초였다. 압구정현대사원아파트는 1개동에 33㎡(10평 남짓) 정도로 800세대를 지은 것이었으니 대규모라 보기 어렵다. 또한 분양이 아닌 임대 형태였으니 이 또한 대우사원아파트와 다르다.

대우건설 직원 대우사원아파트로 이주하다

 

다음으로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한 일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임·직원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신창현 전 시장이 의왕시와 인연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김동화 대표도 이 때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고 한다.

신 전 시장이 이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자연경관이 풍부해 살기 좋았다는 것과 서울역(당시 대우건설 사옥은 서울역에 있었다.)에서 사원아파트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이면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포일리 가자고 해야 한 적도 많았다 한다.)

또 하나는 대우건설이 사원아파트에 들어오는 임·직원들에게는 저리로 융자를 해줘 적은 돈으로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동화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는 당시의 아파트가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랬을 것이 아직 젊은 나이에 부동산 가격에 민감해 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것이 입사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아 둔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인데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을 보니 김우중 회장이 많은 혜택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저리 융자에 매달 월급받아 갚아가면 됐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그들은 회상했다.

이런 연유로 대우건설은 의왕과 특별한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의왕시가 시로 승격하기 위한 필수요건인 인구수도 대우건설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의왕시민들은 보고 있다.

1980년 통계청 자료 가족당 구성원 기준을 보면 1가족 당 자녀수는 3~7명까지로 평균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거주하는 대우건설 직원 또한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원아파트는 포일주공과 달리 큰 평형의 아파트가 건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최소 5천에서 6천~7천명의 대우건설 가족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의견이다. 신창현 전 시장이 민선1기로 당선된 것도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대우건설은 경영난으로 워크아웃을 겪게 되고 그 사이 2003년에 있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는 재건축사업의 동반자로 대림산업을 시공자로 선정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2006년~2008년까지 3회 연속 시공능력평가 1위를 달성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대우건설 정창두 남부사업소 지사장).

건설회사가 가지는 일반적인 통념이 본사 주변에서 발생하는 공사수주는 반드시 해야 하며, 회사명이 걸린 건물을 재수주할 때 또한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림산업은 대림아파트 리모델링공사에서 반드시 수주해야 한다는 각오였으며(2006년 대림산업 리모델링 팀장의 말), 코오롱건설은 과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로 과천본사 인근의 주공아파트 재건축은 기필코 수주해야 한다는 암묵적 목표를 잡고 있다.(코오롱건설 수주기획팀 부장의 말) 대우건설 또한 김우중 전 회장의 혼이 담겨있는 대우사원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하지 못했으니 얼마만큼의 자존심은 깎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우건설은 내손동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있었던 그곳, 그리고 포일택지개발지구의 구획정리 또한 대우건설이 한 이곳에 대우건설의 브랜드 ‘푸르지오’를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대우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이 의왕시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것만큼 이번 내손동 재개발구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대우건설의 자존심이 이곳 의왕에 있기 때문에 2003년 잃은 자존심을 이번에 기필코 되찾겠다는 각오다.

대우건설 그들은 ‘대우맨’이라는 자존심을 가슴에 담고 있다. 우리에게 대우맨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인식된다. 리비아의 악조건에서도 성공적으로 건설을 마무리했던 불굴의 의지처럼 그들 가슴에 ‘대우맨’을 담고 오늘도 현장을 누빈다.

 

출처 : http://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