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공지]안양탐사대 186차 탐방(20200704) 안양 옛 담안마을(4.5동)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6차 여정- 과거 담안이라 불리우던 안양 원도심 4(장내동).5동(냉천동)

7월 04(토) 오후 4시 / 집결_안양 중앙성당(안양4동)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마지막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번 186차 탐방은 과거 담안이라 불리우던 안양 원도심 지역인 안양4동(옛지명:장내동)과 안양5동(옛지명:냉천동)을 찾아가려 합니다.

이날 탐사에서는 마치 교황님의 모자를 연상케하는 중앙성당(안양성당-장내동성당-안양중앙성당)을 출발해 1969-2007년 근로자기숙사, 사회복지사업을 운영해왔던 근로자회관(sine 1969, 현 가톨릭회관)을 들러본후 도랑/실개천(공동묘지가 있던 성원 상떼빌-항아리골목)이 흐르던 물길과 70-80년대 주택들이 남아 있는  있는 골목길, 냉천어린이놀이터-실개천(냉천약수터-남부시장-안양천), 간만에 중고서점인 아단문고(sine 1984, 경향문고), 흥농종묘(sine 1956)도 둘러보고, 화단과 2층 양옥집들이 있던 냉천동을 돌아보고, 14년만에 진행되는 주거환경경선사업(재개발)이 본격 시작되면서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한 냉천마을의 아랫동네 골목도 살펴본후 안양6동 배터리골목(배이모포차)에서 전반기 탐사 종강 뒷풀이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안양4동
안양4동의 행정구역 변화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果川君 下西面 墻內里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으며 1914년 서이면 안양리, 1941년 안양면 안양리, 1964년 안양면 안양리가 된후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양시 안양4동이 되었다. (장내동 명칭이 언제부터 언재까지 사용됐는지 기록을 못찾음) 
안양4동에는 과거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澹安) , 장내동(墻內洞) 이라 불리웠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벽산쇼핑 일대는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삼왕제지였던 삼덕제지 앞에 안양변전소가 설치된 후 삼길양상 등의 공장과 천주교 장내동 성당 등이 건립되면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했다.
장내동의 중심은 천주교수원교구 장내동성당(현 안양 중앙성당)과 중앙시장이라 할 수 있다.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24평을 구천우(具天祐)신부가 건축하고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져 시흥군 안양읍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자리했다. 1956년 5월4일 성당에서 안양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으며, 그 후 건물의 노후화로 재건축을 실시하여 1991년 김영섭 건축가의 설계로 1998년 새로운 성당이 준공되면서 옛 고딕식 성당은 사라졌다.
성당 맞은편에는 근로자회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독일여성이 관장으로 임명되었고 근로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형편이 어려운 근로자에게는 숙박이나 식사를 제공했고 노숙자나 걸인, 홀로사시는 어르신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었다. 지금은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지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9월 7일 초대 주임신부인 구천우(具天祐)신부가 안양읍내에서는 처음으로 24평의 목조건물 성당을 지어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안양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1956년 5월4일에는 안양 최초의 안양유치원이 개원한다. 1958년에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성당을 세멘트와 목조로 신축해 1959년 봉헌식을 갖고 안양지역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해 오는 과정에서 성당 명칭도 안양성당, 안양4동성당, 장내동성당, 중앙성당으로 변경된다. 성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화로 안전문제가 생기자 1991년 사진속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새 성당을 새로 지었다. 성당 주변은 1950-60년대 당시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불렀다.

 

근로자회관

안양시 원도심 한복판인 안양4동(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3)에 있던  ‘안양근로자회관’(현 가톨릭복지회관)의 1984년 건물 모습으로 1969년부터 2007년까지 근로청소년, 노동조합, 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던 공간이다.
안양은 1960년대 공업지대와 함께 급성장을 하던 때였다. 정부가 이끈 경제시책으로 안양 지역에는 섬유공장, 제지공장 등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많은 공장이 생기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로자들이 살 곳을 찾자 안양 지역의 많은 집들이 남는 방을 하숙이나 자취방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많은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섬유, 제지 등 경공업이 많았던 만큼 여성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지 못해 지역사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주임신부였던 정원진(루까) 신부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기숙사 시설을 만들자고 교구에 건의했다.
1960년대 말 수원교구는 갓 설정된 가난한 교구였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구청도 외국의 원조를 받은 기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기숙사 시설 신축사업에 나선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또 그러한 노력을 통해 선교하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협조를 요청해 AFI는 독일인 선교사 서말가리와 한성인(벨따)를 파견한다. 말가리다와 한 벨따는 성당 한귀퉁이에 살면서 일용노동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교구는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땅을 제공하고 외국 기관의 원조와 외국인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도착하면서 천주교 수원교구가 제공한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부지에 여자청소년기숙사와 강당을 갖춘 근로자회관을 신축해 1969년 9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독일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근로자회관 봉헌미시를 통해 개관식을 갖는다.
이후 1976년에는 증축을 통해 남성근로자를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근로자복지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근로청소년기숙사의 경우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었던 만큼,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의 역할을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청소년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인간적 성숙을 위한 공동체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양교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노동교실, 신앙 교육 등을 제공하는 등 근로청소년 기숙사를 거쳐간 근로자 수만도 2000여명에 달한다.
또 근로자회관은 노둥자 및 일반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에도 나서 노동법 강좌 등 노동교육과 당시 국내에서는 상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노동관련 영화상영, 서예, 꽃꽂이, 포크댄스, 그림교실, 판화교실, 탈춤, 사뮬놀이 등 사회교육프로그램, 노조 창립, 워크셥 및 세미나, 교육 등 옥내외 행사가 수월치 않았던 시기에 지역사회 단체들에 공간 제공, 근로자가정 임대주택사업, 무료급식소 등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들이 펼쳤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 • 군포 • 의왕)은 서울 주변에 위치하면서  1980년 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 또는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활동이 거의 부재한 지역이었다. 대 학에서의 민주화 시위도 없었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의 활동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조건하에서 1982년부터 장내동성당의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 JOC(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1983~1987년 사이에 노동법 강좌 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활동은 안양권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근로자 문제가 점차 해소되자 회관은 빈민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1980년에는 근로자 가정을 위한 임대용주택(10가구)과 상가를 신축해 청소년기숙사에 살았던기숙생이 결혼후 가정을 꾸린 후 살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1990년도에는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룰 통해 매일 점심에 따뜻한 한끼를 제공했다.
이후 공간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운영자의 결정에 따라 1998년 기숙사사업을 종료하고 ‘천주교 수원교구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비롯 가정폭력상담소 및 여성쉼터 등의 사업 중심으로 변화를 꽤해 운영하다가  2007년 12월 31일을 기해 39년의 지역사회 및 노동사업을 마감하고 문을 닫고 수원교구의 요구에 의해 천주교 수원교구로 넘어간다.
근로자회관부터 전진상복지관까지 40여년 안양지역 사회속에서 펼쳐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 독일 십자훈장, ‘좋은 한국인 대상’, ‘아름다운 사람상’ 등을 복지관 대표를 통해 받기도 했다.
한편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은 2009년 교구의 사회복지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2년여 진행한후 2009년 12월 16일 교구사회복지의 중심기관인 가톨릭복지회관으로 재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회관에는 교구 사회복지회·교정사목위원회·이주사목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교구 사회복지회는 산하 130여 곳의 사회복지시설을 관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수형시설에 갇힌 수용자들을 돌보는 교정사목위원회와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이주사목위원회도 회관에 있다. 또한 회관은 단순히 교구 사회복지 지원을 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회관내에 안양시장애인보호작업장과 안양자활센터를 갖췄고 교구 장애인선교회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선데이아카데미,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장소로 회관을 제공한다.
근로자회관과 전진상복지관이 그랬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만나고 나눔을 실천하는 구심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 회관에서는 교구 사회복지회 수익사업단 ‘착한 사마리아인’의 매장도 운영되고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화원), ‘엔젤마트’(슈퍼마켓), ‘사랑의 국수가게 2호점’, ‘두드림과 열림’(자활매장), ‘카페 뽀르트’ 등 회관에 입점한 매장들의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가톨릭복지회관 축복식에서 “이 회관은 사회복지의 행정적 기능뿐 아니라 어려운 이들의 피신처 역할도 하는 행정과 사업 실천이 병행되는 공간”이라며 “회관을 통해 교구 내 지역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빛, 사랑이 전해지고 하느님의 정신이 널리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항아리골목

안양 골목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며 아직도 정감있게 불리우는 골목이 여럿 있다. 밧데리골목. 변전소골목, 곱창골목, 한복골목 등등.. 1970년대 초반에 생긴 항아리골목도 그중 하나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안양에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며 인구도 늘어나고 당연히 생필품 가게가 줄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다.1977년 중앙로가 개통되면서 안양4동의 새시장(현 중앙시장)은 인근 군포, 의왕, 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군자에서도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빌 정도로 호황이었다.
당시 그릇으로는 양은그릇과 함께 항아리 그릇들이 인기였는데 안양4동 중앙시장과 안양1동 남부시장 주변에는 항아리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에는 철조망 담벼락을 따라 항아리들을 쌓아놓은 가게가 있었고 이에 이 골목을 자연스럽게 항아리골목이라 부르면서 통상적인 지명이 생길 정도였다.
과거 주택에는 뒷뜰, 뜨락, 앞마당, 우물가, 대문위 등에 장독대가 있었고, 장을 담아 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말 그대로 그집의 장 맛을 보여주었지만, 현대화의 물결속에 가볍고 간편한 플라스틱에 이어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항아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유약파동까지 겪게 되자 남부시장 주변에 있던 항아리 가게들이 하나 들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중앙시장 주변의 항아리 가게들도 줄줄이 문을 닫고는 성당 담벼락에 있던 신일항아리 단 한 곳만이 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신일항아리’는 안양5동 냉천로길(175-5)에 있다. 신일항아리 창업주는 신영철씨이다. 한동안 그의 둘째아들 신동윤씨가 가업을 이어 점방을 지키다 최근 공부에 매진하고자 부친이신 신영철씨가 다시 점방을 지키고 있다.신일항아리는 1990년대까지는 현 위치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장내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 담장 앞에 꽃집들과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은 고딕양식의 성당이었는데 종탑이 위험해 지는 등 낡아 새로 신축에 들어가면서 시에서 도로를 새롭게 정비하자 현재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신일항아리는 당초 있던 항아리골목에서 벗어나 주택가 골목길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군포나 의왕, 과천, 광명, 성남 등에서도 주문이 올 정도로 오랜 단골과 입소문으로 항아리하면 신일항아리를 찾는다.
안양중앙성당 뒷편 골목길로 점어들면 단독주택 앞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신일항아리 간판이 보이고 점포안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항아리부터 화분, 컵, 장식품, 주전자 등 흙으로 빚은 그릇들이 진열돼 있고, 담벼락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유약을 반짝이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일항아리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옹기가 다 모여 있다. 그 옹기들은 주로 충청도나 전라도에 있는 동기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그 곳의 흙이 옹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옹기는 물론, 약탕기, 떡시루, 콩나물시루, 옹기정수기 및 김칫독, 크고 작은 양념통들 그리고 요강까지.. 각종 항아리들이 있다. 또 옹기로 된 화분들도 즐비하다. 요즘에는 항아리 수요가 많지 않아서 옹기명장,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등 주로 장인들의 작품을 많이 가져온다고 한다.
한 집안의 장맛을 보면 음식 솜씨를 알고, 장맛은 장독에서 나온다고 해서 예전엔 집집마다 장독대를 두고 항아리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가 고이 모셨지요. 항아리는 숨쉬는 쳔연용기로 장뿐 아니라 쌀독, 김치독으로도 사용되고 뒷간이 먼 집에서는 안방에서 오강으로도 쓰여지며 이사갈때는 깨질까봐 애지중지하며 가장 귀하게 모시던 거였지요.
시대는 흘러가고 현대화속에 단독주택들이 아파트와 연립, 다세대로 바뀌며 뒷마당의 장독대도 사리졌지요. 아파트문화에 김치냉장고까지 생기고 단순 간편한 것을 추구하면서 장 담그는 것고 잊혀져 가고, 이제 장독대도 사라지고, 집집에서 큼지막한 항아리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발효에도 좋고, 저장 기능이 탁월하고, 내용물을 정화해 주는 숨쉬는 항아리의 효율성으로 아파트에 둘 수 있는 자그마한 응기와 신세대형 항아리를 찾는단다.
예전에는 큰 독이 많이 팔렸는데 주거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즈음에는 아파트에 둘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고, 자그마한 옹기 소품. 즉 신세대형 항아리가 잘 팔리고, 쌀독 용도의 항아리도 많이 나간다고 한다.
골목길 한쪽에 크고 작은 항아리를 보는 것도 옛 문화를 더듬는 하나의 추억이지요. 옛날 잠자기전 방 한쪽에 곱게 자리했던 오강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는데 요즈음은 어떤 용도로 쓰일려나 궁금하네요. 어느 글에서 보니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 가정에 갔더니 이주 예쁜(어떤 것은 난초, 국화 등 그림까지 그려 있으니까여) 요강단지가 식탁위 스프 단지로 요긴하게 쓰여지고 있더란 믿거나 말거나 야그도 있고요.
신일항아리(☎ 447-1048. 만안구 안양 5동 707-77)

 

음기와 양기가 모여 신기가 센곳, 점집 많은 동네 안양4동

/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유래된 ‘즐거움이 가득하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뜻한다. 이같은 지명 탓일까. 안양은 예로부터 기와 영성이 강한 도시라고들 했다.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 신과의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일까. 안양 만안구 수리산 계곡에는 치성을 드리는 장소가 많았고, 굿당도 서너곳 자리할 만큼 기가 세다고 소문나기도 했다.. 자연환경 복구차원에서 계곡과 산 깊숙이 있던 치성을 드렸던 장소들은 사라지고, 굿당도 이젠 두곳 밖에 남지 않았지만 현재도 안양 만안구 4.5.6동을 중심으로 8.9동까지 만안구 원도심의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무속인이 터를 잡고 있음을 알리는 빨간.하얀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안양4동 골목과 안양5동 충혼탑 뒷편 언덕위에는 무속용품을 파는 대형 전문매장이 있을 정도다.
안양 수리산에서 안양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속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태민안과 시민 안녕을 기원하는 신명나는 굿판이 자난 28일 펼쳐졌다.
한국무속연합회 안양본부 한상윤 본부장 말에 의하면 안양에는 120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등록하지 않은 이들까지 합치면 2천여명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인구 밀도로 따지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토속신앙인 무속을 전통문화로서 시민들에게 전파하고, 유. 무형의 가치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한다는 뜻으로 지난 2003년 부터 수리산 자락 병목안시민공원에서 국태민안과 시민안녕을 기원하는 무예술제를 해마다 열고 있다.
한상윤 본부장은 "무속인들이 사회에서 멸시, 천대를 받고있는 현실에서 신앙성과 예술성, 축제성을 지닌 무속문화를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리고 무속인들의 규합을 통해 권익 신장을 찾고자 매년 수천만원의 경비를 갹출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4년 안양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뒷골목

https://anyangbank.tistory.com/2844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0-3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https://ngoanyang.or.kr/5348

 


 

[공지]안양탐사대 185차 탐방(20200627) 산본신도시 초입 산본1동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5차 여정_맛집을 찾아가는 골목여행 산본1동 지역

6월 27일(토) 오후 4시 / 집결_금정역 6번 출구앞 쉼터


 

2020.6월 마지막 토요일 28일에 실시하는 185차 탐방은 맛집을 찾아가는 골목여행으로 군포시에서 가장 노후화된 주택과 상가가 밀집한 지역, 산본신도시 초입, 금정역세권 개발 붐과 함께 재개발이 추진중인 산본 1동을 찾아갑니다. 이날 골목 탐사후에는 가성비 최고로 살얼음 동동 뜬 냉모밀과 초밥을 맛볼 예정입니다. 
산본1동은 1970년대 중반이후 주거지로 자리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산본신도시 초입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신본 진입 도로가 개통되고 금정역 개통이후 군포를 대표하는 유흥가와 상업지역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2010년대 이후에는 골목 한쪽에는 중국 동포들이 밀집해 거주하면서 중국인촌을 연상케하며 제2의 차이나타운이라 불리우기도 하지요.
산본 1동은 다른 지역 골목길들과는 다르게 골목길은 다소 좁지만 이미 어느정도 획일화된 구조를 가진 동네입니다.
동네주민들이 아픈 애환을 달래주었던 민우약국은 50년 넘게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골목에서는 만성슈퍼, 개성슈퍼, 동우슈퍼, 텃밭마트, 모닝마트, 한아름마트, 부림세탁소 등 시간의 흐름에도 변치않고 존재하는 것들과 얼마전 새로 생긴 경기행복마을관리소 동 만날 수있지요.  조용한 동네엿던 산본1동에 증국 동포들이 들어온 이후 중국 본토 음식점들이 대거 생기는  등 골목에 활기가 넘칩니다. 문제는 인구 밀집도가 높아 항상 주차문제로 다툼이 잦지요.
그리고 최근에는 금정역 GTX 확정 발표이후 가파르게 집값이 상승하고 있고 여기에 발맞춰 재개발도 추진되고 있다네요.
군포시의 2020년 군포도시기본계획(안)을 보면 .산본1동 재개발과 산본천 복원D ㅣ우선순위입니다.
이에 현재 산본1동1지구 재개발추진현황과 관련 소유자분들이 지난 6월 2일 구역지정신청서(소유자동의율 72.8%, 면적동의율 51.2%)를 군포시청에 접수하였네요.
하지만 안양 의왕과 다르게 군포는 개발에 다소 미온적인 도시이기에 미지수로 재개발까지는 10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군포 지명유래

 

군포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대체로 군포천이나 군웅산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군포의 지명 유래에 대한 몇 가지 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설로는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던 승려, 의병과 관군이 군포지역에서 군장을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을사람들이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사기를 북돋워주어 이에 힘을 얻은 관군과 의병, 승병들이 왜병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지역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배부를 포(飽)자를 써서 군포(軍飽)라 하였고, 이후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 물가 포(浦)자로 바뀌어 군포(軍浦)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군포시 옆을 흐르는 하천을 군포천(軍浦川)이라 하는데, 이 하천이 북쪽으로 흐르며 안양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합류되므로 안양천의 상류인 군포천은 예부터 한강의 지류로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의 포구로 널리 알려져 왔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거쳐서 안양천을 경유하여 상류인 군포에 머물렀다고 하여 군포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지금의 안양시 호계3동의 구군포지역을 조선시대에는 시장으로 개설하여 군포장(軍浦場)이라 한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시흥군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지으면서 역 이름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하였고, 이후 역사 주변에 민가가 늘고 날로 번창하자, 안양시 호계3동의 군포장을 ‘구군포(舊軍浦)’라 하고 군포장역 인근을 군포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안양시의) 호계파출소 앞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이 1980년대 까지는 군웅제(軍雄祭)를 지내는 산이었으며 이 군웅산 아래에 있는 군포천의 물가(浦) 마을이므로 군웅산의 군(軍)자와 물가 포(浦)를 합쳐서 군포라 이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군포동과 산본동 

군포시에서 연원한 것이 군포동이다. 산본은 산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산 밑이라는 뜻이다. 


산본1동 지명유래

본래 과천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수리산 밑이라 하여 산밑 또는 산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안, 도장골, 둔전, 광정, 골안을 병합하여 산본이라 창하다가 이후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1동이 됨. 한편 산본은 일본 사람들의 성과 같은 이름이니 혹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는 분들이 있으나 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과천현 읍지에 호구총수에 기록된 산저리가 산본리로 바뀌어 표기된 후 현재에 이루고 있으니 일제시대 그이전에 지어진 지명임이 확실하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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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84차 탐방(20200620) 의왕 내손2동 재개발지역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4차 여정_재개발로 주민 떠난 의왕 내손2동 지역

6월 20일(토) 오후 4시 / 집결_의왕 계원예술대학교 버스정류장(안양시내에서 51번 버스)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오는 6월 20일 184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의왕 내손2동 지역으로 재개발 추진이 본격시작된 곳으로 예전에 포일리라 불리던 곳이지요. 이 동네에 오래 살은 이종명씨는 "오래전부터 불리던 포일리 지명이 더 정겹고 도깨비 시장으로 유명했던 고향같은 곳이다. 하지만 재개발로 이주가 시작되었고, 조만간 철거를 앞두고 있다. 동네 아지트로 사랑방 역할 독특히 했던 우리집 김밥도,수미향도 사라진다. 20여년전 민주노동당 한다고 이쪽에 정착했고 의왕과천 당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아쉬움이 깊지만 그래도 다행인건 일부는 재개발 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채 도시재생 사업으로 아트 거리등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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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83차 탐방(20200613) 옛 덕천마을 메가트리아 단지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3차 여정_안양7동 옛 덕천마을이었던 메트리아 단지

6월 13일(토) 오후 3시 / 집결_메가트리아 북문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2020년 6월 13일 183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안양7동의 덕천마을로 지금은 레미안 안양메가트리아 단지로 안양탐사대는 탐사 초창기로 마을의 집들과골목 모습이 남아있던 2013년과 집들이 허물어지고 폐허로 변해갔던 2014년 집중 탐사를 통해 많은 모습을 사진에 담아냈지요.

골목과 마당이 있던 엣 집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들이 떠나고 새로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애는 새로 이주한 주민들이 살고있지만 그래도 안양민들에게 친숙한 동네 이름은 메가트리아 보다는 덕천마을입니다.

개인적으로 관양동 엣 동편마을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동편마을로 불리우고 둥편마을 축제까지  열리는 것처럼 덕천마을로 계속 불리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날 동네 탐사에서는 마치 천지개벽을 하듯 바뀐 메가트리아 단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예정으로 동네 안내는 메가트리아 단지에 사는 주민으로 안양7동 V터전 회장 , 안양시자원봉사센터 SNS 기자 등으로 할동하고 있는 류근숙님께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덕천마을 지명유래

이 마을 본래의 이름은 넓은 벌판에 있다고 하여 벌터 (坪村)라 칭했는데, 1977년 7월 대홍수 때 안양천의 범람으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재민촌(水災民村)으로 불리웠고, 이 해 9월에 안양의 시내버스(삼영운수)가 이 곳에 버스노선을 개설하면서 버스 안내판에 수재민촌으로 명기하자, 당 시 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였던 최돈세(崔燉世)가 중심이 되어 긴급 주민회의를 개최한 결과 수재민촌 이란 마을명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2세 교육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므로 차제에 새로운 마을명을 짓자는 제의가 많아, 큰 하천인 안양천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큰 德 자에 내 川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川洞)으로 명명했다가, 안양천의 오염으로 이미 지가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1년만인 이듬 해(1978) 9월에 이곳 어린 이들이 샘솟듯이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에 큰 일꾼이 되라 는 뜻으로 큰 德 자에 샘 천(泉)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泉洞)로 개칭하고 마을입구에 덕천마을 이란 표석을 설치했었다.

 

덕천마을의 역사

안양 덕천마을은 주접동 동북쪽에 있는 안양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시흥시 정왕동에 살던 원정상(元貞常, 안양여고 원종면 선생의 증조부)씨가 분가를 나와 지금의 안양7동 213에 정착했고, 이어 전주 이씨, 창령 성씨등이 세거하면서 자연마을이 형성되었고 ‘벌터’라 불리었다. 1978년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 ‘덕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5월 1일 안양 6동에서 분리되어 안양7동으로 분동(分洞)된다.
이곳은 196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다. 예컨대, 명학역과 주접지하도에 이르는 경부선 철도변은 아카시아 동산이었으며, 안양 냉동사(안양7동 196-15)자리는 농경지(논), 주식회사 삼풍(안양7동 199)자 리는 논과 포도밭, 대영모방주식회사(안양7동 196-12)자리는 잎두밭, 동화 약품공업주식회사(위치, 안양 7동 189)자리는 농장이었다.
이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 원종만(안양7동 138-32, 원정상 증손)씨가 허허벌판에 덕천슈퍼 건물을 신축한 후, 7동새마을금고(안양7동 130-27)를 비롯 덕천국민학교(안양7동 192-5), 덕천우편취급소 등의 기관과 공장들을 유치하는데 부터다.
196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안양냉동, (주)삼풍, 대영모방, 동화약품 등 크고작은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덕천마을 남쪽은 공업지대로 변하였다. 이어 덕천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지금은 아파트형 공장인 유천팩토피아 건물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으며 동아아파트, 준마아파트를 비롯한 다세대 주택들이 많이 건축되면서 공업과 상업 주거지역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덕천마을은 지난 1973년 구획정리사업으로 계획적으로 개발된 지역이지만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로 인한 인구과잉, 도시기반시설의 과부하, 도로폭의 협소, 안양천 범람으로 인한 잦은 침수와 철도소음에 시달려 왔다.
결국 주거지역이 자리했던 만안구 안양7동 148의 1 일원 25만7천590㎡에 달하는 면적에 대한 재개발사업이 추진돼 안양시는 총 4천250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주택재개발사업에 대해 지난 2006년 9월 7일 사업시행자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 를 지정 고시했다.
이어 LH는 2008년 12월 19일 사업시행 인가를 받아 삼성물산·동부건설을 시공사로 결정했다. 또 2009년 2월10일 권리가액을 통보한데 이어 8월 25일 분양신청을 완료했다.
안양 덕천지구 재개발사업은 대규모 공공물량으로 사업규모가 클뿐 아니라 주택공사가 턴키베이스 방식으로 발주한 아파트중 최대 규모인 5950억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대형사들이 눈독을 들인 결과 삼성물산 건설부분과 동부건설이 65:35 지분 컨소시움으로 참여해 수주했다가 동부건설의 부도로 삼성물산이 단독 시공에 나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했다.
이에 덕천마을에는 전용면적 39㎡ 633가구를 비롯 49㎡ 96가구, 59㎡ 1천308가구, 84㎡ 1천634가구, 114㎡ 384가구, 139㎡ 195 가구 등 32층 높이 아파트 35개동이 들어서, 세대수만 4천2백50가구. 입주자만 1만 2천여 명에 미니 신도시인 '래미안 안양 메가트리아'가 태어났다.
여름철 물난리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골목길이 물에 잠기던 동네 덕천마을은 이제 고층 건물이 우뚝선 미니 신도시로 변모해 과거의 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추억과 기억만으로 남게됐으며 마을의 절반에 해당하는 덕천초교 주변의 동네와 더불어 남쪽의 명학역까지 이어지는 소규모 공장들과 아파트형 공장들이 자리한 지역 또한 서서히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양 석수3동은 예로부터 충훈부(忠勳府)라 불리워 왔다. 충훈부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 공훈을 세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사무와 공신으로 책록할 때 해당자의 업적을 조사하거나 공신 책봉 후 그 후손들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는 등 현재의 국가보훈처와 유사한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으로 현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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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82차 탐방(20200607) 석수3동 충훈부시장 주변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2차 여정_안양 석수3동 충훈부시장 주변

6월 6일(토) 오후 3시/ 집결_충훈1교 버스정류장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2020년 6월 6일 182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석수3동 충훈부시장과 주변지역이다.

 

안양 석수3동은 예로부터 충훈부(忠勳府)라 불리워 왔다. 충훈부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 공훈을 세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사무와 공신으로 책록할 때 해당자의 업적을 조사하거나 공신 책봉 후 그 후손들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는 등 현재의 국가보훈처와 유사한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으로 현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양 석수3동은 일제강점기에는 밤의 명산지로, 1950년대에는 화훼와 고등 채소로 키우던 곳이다. 1970년대 초 시흥군 안양읍 시절에는 현 럭키아파트 자리 인근에 안양공설운동장이 설치돼 시흥군과 안양읍 행사들이 펼쳐진 곳이다. 특히 1977년 안양 대홍수때는 이곳에 수백동의 천막이 설치돼 피난민들이 임시 수용돼 생활하기도 했다. 안양공설운동장은 1986년 6월 30일 비산동에 새 운동장(안양종합운동장)을 건립해 이전한다. 지역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전인 1960년대 공설운동장 마련을 처음 논의할 당시에서 안양9동 새마을지역을 후보지로 낙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양 석수3동에는 1970년대 말부터 단독주택들이 들어섰으나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빈 공터였다. 1983년 도시계획에 따라 주공아파트를 비롯 아파트와 빌라,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었고, 석수주공2단지(07.02.08착공)과 석수주공3단지(07.07.26착공)에 대한 재건축이 완료됨에 따라, 석수아이파크아파트(2009.09.30준공),석수코오롱아파트(2010.02.12준공) 완공되며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만나는 주택들은 대부분 연립,다세대.다가구 주택이지만 과거 양욕집이라 부르던 단독주택들도 눈에 띈다. 특이한 점은 연립이나 다세대 집들을 지을때 집 장사꾼들이 똑같은 형태의 집을 여러채 잇다라 짓는 것과 달리 이 곳에서는 각각 다른 형태의 건물들이 많다는 점에서 건축업자들이 소규모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택과 주택 사이 작은 공터들이 적지않은데 텃밭 보다는 화분을 이용하여 꽃이나 화초를 가꾸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절도범이 많아서 일까. 방범망 설치한 곳이 많으며 주택과 주택 사이를 철조망으로 막은 곳도 눈에 띈다. 



충훈부라 불리우는 이유


충훈부는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 설치돼 공신도감(功臣都鑑 )으로 부르다 1434년에는 충훈사(忠勳司)로 개칭했으며, 1454년 세조(世祖)때 충훈부(忠勳府)로 개칭하여 승격시켜 공신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렇다면 안양 석수3동이 충훈부로 불리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당시 관청 충훈부는 공해전(公廨田: 국가 기관이나 궁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설정한 토지)이라 하여 직접 관장하는 토지가 있었는데 경기도내 사성리와 우두리, 광화대리(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석수3동)일대에도 넓은 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훈부는 이 지역을 관리 운영했는데, 일반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도지를 받았으며 마을이 형성되자 관청의 명칭을 취해 충훈부(忠勳府)로 호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훈부 현대아파트 옆 공원에는 커다란 충훈부 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은 당초 충훈1교 앞 옛주공아파트 입구에 있었는데, 주공아파트 단지가 재개발되면서 이전한 것으로 이 자리로 재개발전 충훈목욕탕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아울러 안양시는 충훈2교 다리 둔치에 관람석을 갖춘 공연장을 조성하면서 관람석 하단에 충훈부 유래에 대한 설명을 돌 표석에 새겨 부착했다.


안양 석수3동의 행정 변화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1795) 음력 윤 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1일 부령 제 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3리(新安養3리)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고, 1979년 4월 28일 시 조례 제340호에 따라 석수1동은 분동해 충훈부(忠勳府), 화창동(花倉洞) 등의 제 지역을 석수2동(石水二洞)이라 하였으며, 1987년 1월1일 대통령령 제 12007호에 따라 광명시 소하1동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1일 시 조례 제 931호에 따라 만안출장소에 편제된 후, 1990년 1월1일 시 조례 제1000호에 의거 충훈부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分洞)해 석수2동에서 분리되었고, 이어 1992년 10월 1일 만안구로 편제되었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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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81차 탐방(20200530)_안양 서쪽 끝자락 호현마을. 친목마을 & 새물공원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1차 여정_안양의 서쪽 끝자락 호현마을 그리고 친목마을 &새물공원

5월 23일(토) 오후 3시/ 집결_호현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2020년5월 30일 181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안양의 서쪽 끝자락 박달2동의 호원마을, 친목마을, 새물공원을 찾아갈 계획입니다.. 호현마을과 친목마을은 탐사대에서 2013년 9월 28일 25차 여정을 통해 처음 찾아간 이후 7년만의 방문이라 그동안 얼마나 변햇을까 궁금하네요.

 

호현마을은 안양에서 마지막 남은 자연부락중 하나로 시흥시와의 경계지점인 범고개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호랑이가 번번히 출현한다고 해서 호현마을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는데요. 예전에는 살기 좋았던 마을이 서해안고속도로가 마을 위로 지나가면서 동네를 양분화시키고, 쓰레기 집하장과 골재처리장, 정육공장(도살장) 등 각종 주민기피시설 들어서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주민들이 한때 집단이주를 요구할 만큼 환경이 열악하지요. 그래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너댓갈래의 골목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곳이 있고  담배가게가 있었던 듯 담장박으로 창이 나 있는 단독주택 등 아기자기한 정감 어린 풍경이 마치 시골에 온 듯한 했는데 지금 그대로 남아있을까나..

또 지난 2010년에는 마을 골목에 은은한 빛깔의 옷을 입해 한때 안양 벽화마을로 입소문나면서 정책의 정책브리핑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남아있을까나.

 

호현마을은 범 호(虎)에 고개 현(峴). 수리산 범고개에서 이름을 딴 호현마을은 시흥으로 넘어가는 만안구 박달2동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박달 사거리에서 광명 방향으로 노루페인트 안양공장을 얼마 지나지 않아 왼편으로 마을의 입구를 알리는 아기자기한 팻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름 탓에 호랑이가 나올법한 으슥한 분위기이지 않을까 하는 으레 짐작과 달리 마음을 간지럽히는 문구와 그림들이 그려진 파스텔 톤의 벽화를 만날 수 있다. 마치 한 편의 동화 속 마을처럼 화사하고 따뜻하다.

호현마을은 과거 박달리 열두 골에 형성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로 흡수되어 없어졌다가 안양과 안산을 잇는 도로가 만들어진 이후, 1970년대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 번창했다.

하지만 서해안고속도로로 마을이 양분화되고 근처에 쓰레기 집하장과 골재처리장, 정육공장 등 기피시설이 생기면서 점점 낙후됐다. 7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은 주민들이 점점 떠나 40여 가구만이 남았고, 젊은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르신들만 남아 살기 좋았던 옛 시절을 추억하며 안양의 마지막 자연부락을 지키고 있다.

이런 호현마을이 2014년 예쁜 벽화를 만날 수 있는 동동길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사람들의 발길이 늘먄서 잠사나마 횔기를 찾았다. '호현마을 동동길' 만들기 프로젝트는 경기도의 생활환경복지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 8월부터 4개월 동안 안양시, 호현마을주민협의회,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공공미술 프리즘, 노루표페인트 안양공장, 안양대학교 학생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냈다.

호현마을 동동길의 백미는 굽이굽이 좁은 골목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다른 벽화마을과 달리 차분한 파스텔 톤의 노란색, 연두색, 보라색이 쓰였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자연에서 걷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장 눈길을 끄는 벽화는 경로당 옆 너나들이 쉼터 가림막이다. '청춘을 돌려다오~', '어릴 적 꿈은 가수였지!' 어르신들의 캐리커처와 옆에 적힌 소박하고 순수한 꿈과 소망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기울어진 담장과 삐걱거리는 낡은 철문, 마당 빨랫줄에 널린 할머니 몸배 바지까지…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오래된 집과 골목 사이를 채우고 있다. 처음엔 고왔을 파스텔 빛깔이 지금은 조금 바래졌지만 멈추지 않고 흐르는 세월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정겹다. 이곳을 걸으며 만난 한 어르신께서 "오랫동안 안양의 서쪽을 지켜온 이 호현마을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씀하신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한 바퀴 다 도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한쪽 벽을 가득 메운 김춘수 시인의 '꽃'과 맞닥뜨린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의 구절처럼 이곳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불리기를 바라본다.

 

 

안양 호현마을 새옷을 입다(2015.01)

https://ngoanyang.or.kr/2413

 

[위클리공감]http://www.korea.kr/policy/cultureView.do?newsId=148827427&call_from=naver_news

영상 https://vimeo.com/116835786
출처: https://ngoanyang.or.kr/1847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범고개(虎峴洞) <박달2동>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새물공원

새물공원은 안양시가 박달하수처리장을 지하화하고 하수처리장 상부에 공원(총면적 18만㎡)을 조성한 곳으로 2018년 준공했다..
1992년 최초 가동을 개시한 박달하수처리장은 군포․의왕․광명을 포함하는  일 25만톤 규모의 수도권 광역하수처리시설로 광명 역세권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 주민들이 악취에 대한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2008년 광명 역세권 개발사업과 관련된 3개 기관인 안양시, 광명시, LH공사는 악취방지를 위해 박달하수처리장의 지하화를 결정하고, 지난  2013년 4월부터 지하화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기간 60개월, 총 사업비 3,297억원을 투자해 가동 중인 대규모 하수처리시설을 완전 지하화한 안양새물공원 조성사업은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내 최초의 사업이다.
하수처리과정에서 발생되는 악취는 3~4단계의 처리공정을 거쳐 깨끗한 공기로 재생산되어 외부로 배출되며, 하수처리장 상부에 공원 및 체육시설을 설치해 대표적 기피 혐오시설로 인식되던 하수처리장을 시민들의 여가 및 체육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2019년 5월에는 새물공원애 인공암벽장이 들어섰다. 16억원을 들여 기존 하수처리장의 굴뚝을 리모델링한 시설물로 마치 거대한 예술작품을 연상케 한다. 높이 18m에 벽면이 7백판(1m×1m)에 이르며 스피드 벽면이 있고 난이도에 따른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지]안양탐사대 180차 탐방(20200523)_안양3동 양지마을과 대농단지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0차 여정_골목이 남아있는 안양3동 양지마을과 안양공고 주변

5월 23일(토) 오후 3시/ 집결_안양3동 주민자치센터 앞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2020년5월 22일 180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안양3동 양짓말(양지마을)로 대농단지 동네입니다. 안양3동 양지마을은 탐사대가 2013년 3월 2일(5차) 이후 여러차례에 찾아가 당시 풍경을 기록으로 전하기도 했는데  안양의 동네와 골목이 재건축,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옛 골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지요.
이곳은 개개발이 추진되지는 않지만 도시생활형 원룸주택들이 글목마다 들어서면서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날 탐방에서는 그동안 알마나 변했는지  안양3동 주민자치센터 앞애서 출발해 연성대학교와 안양예고, 안양외고, 안양공고 주변 , 안양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 동네. 우성아파트 뒷길, 요즈음 뜨는 댕리단길(대농단지) 까지 골목 골목을 들어볼 에정입니다.

 

 

■양지마을(양짓말) 이야기

 

양짓말은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예로 부터 '양짓말'로 불리우다 행정명칭인 양지동(陽地洞)으로 지금은 안양3동이라 불리우지요.
안양시사 등 기록을 보면 이 마을에는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답니다.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는군요.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 일제강점기에는 아사히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를 개교해 산업 역군을 배출하던 학교를 유명세를 날렸으며 이후 안양서초, 안양예고, 안양여상, 안양외고, 연성대학교 등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들어서 안양에서 학교들이 가장 많이 운집한 지역으로 안양교육의 요람지라 할 수 있지요.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2018)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특히 1938년 <조선일보>에 '탁류'를 연재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풍류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전북 군산의 대표적 작가인 채만식이 1940년 이곳으로 이사와 살다가 1941년까지 살았는데 당시 이곳에서 살던 얘기를 쓴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가 매일신보에 발표되기도 했지요.
현 안양과학대학 자리에는 절이 있었으나 빈대를 잡으려고 붙인 불이 원인이 되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28년에는 엄기승이 안양3동사무소 부근에 안양 최초의 회사인 안양산업사를, 현 대농단지에는 1932년에는 조선직물이 들어섰고 광복이 되자 그 자리에 금성방직이 설립되었는데, 조선직물은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던 곳으로 해방직전인 1944년에 군수공장으로 운영되어 프로펠러 전투기 생산에 나섰다가 조립과정에서 폐망하며 문을 닫습니다.
수암천 건너편의 현 성원아파트 자리는 일제 때 일본인이 내하목제회사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 삼영하드보드회사로 바뀌어 건축자재를 생산하던 곳으로 당시 수암천물은 펄프찌거기가 쌓여 주민들이 이를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여.
안양은 예전에 안양포도로 유명했는데 그 이전에는 밤나무가 참 많았다고 합니다. 안양예고 자리는 노적봉이라 불리우던 산이었는데 1932년 조선일보신문에 전국 부녀자 밤줍기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답니다.

 

■대농단지 이야기

 

대농단지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조선견직이 들어섰던 대규모 공장이었지요. 이 곳에는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만주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징용자들이 차출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 5월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었고 평촌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등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로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아마도 안양은 일제의 전투기지가 됐을 것입니다.
해방이후 이 부지는 1948년 10월 5일 안양1동에 금성방직을 설립한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성곤 씨가 인수해 1949년 3월 10일 섬유 공장을 준공합니다.
1960년대 사진을 보면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안양공장안까지 철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들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습니다.
또 공장안에는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있었지요.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었는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답니다. 당시 만안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시멘트블록 담장 중간 중간에 난 구멍으로 이회택 등 국가대표선수의 볼 차는 모습을 보며 축구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안양중,안양공고가 전국 축구를 재패하던 것도 이 무렵이고 이는 축구하면 안양을 떠올리던 부흥기였지요.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도 인수하여 공장 확대에 나서는데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하지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당시 3천여명의 여성근로자들이 근무해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가 싶습니다.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안양 1동에 자리한 태평방직(현 레미안 아파트)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1977년 일반에 640여개의 단독필지로 분양된 안양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로 대농단지로 불리워 오고 있는데 농사를 짓던 평촌벌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 안양에서 주택가격이 가장 비쌌던 주택가였지요.

 

■안양3동 출신 시인 文鄕 김대규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20일 안양시 양지동 946번지에서 태어나 2018년 3월 24일 타계하여 26일 화장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시흥시 논곡동 선영에 묻히기 전까지 살아 생전 70여 평생을 태어나신 곳 안양 양지마을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아왔다.

시인의 아호인 “文鄕(문향)”은 삶과 문학의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하면 ‘김대규 시인’을 말하고, 김대규 시인하면 ‘안양’을 생각나게 할 만큼 文鄕 김대규 시인은 詩와 함께 안양사랑의 한길을 평생 걸어왔다.

김대규 시인은 1960년 첫 시집인 「靈의 流刑」을 상재하여 등단했으며, 1976년에 저술한 「흙의 사상」과 1985년에 발간한 「흙의 시법」을 통해 많은 독자들로부터 “흙의 시인” 이라 불리웠다.

1977년 평생의 스승이신 고 조병화 시인과 함께 출간한 「시인의 편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진솔한 편지글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1989년 한겨레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사랑의 팡세」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한 유명세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중앙문단의 다양한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안양에 남아 여러 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지역 문학 역량들을 모아 안양문인협회와 안양문화원, 안양예총 창립을 주도 하는 등 후진양성과 안양지역 문학의 토대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안양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언론, 상공기업 시정발전 등 다양한 부문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등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김대규 시인이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문안 작품들은 안양시 곳곳에 퍼져 있다. 먼저 안양시청에 설치된 “안양시민헌장비”를 비롯 안양5동 현충탑에 새겨진 “현충탑 진혼시”,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기념탑 헌시”, 평촌도서관 옆 공원에 설치된 “6·25 참전공적비 헌시“, 석수동 ”만안각기“, 안양예술공원 ”안양정기“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품들이 있다.

또 ”안양시민의 노래“와 ”안양시 로고송“ 그리고 애향 동요인 ”여기가 안양이다“와 ”새처럼 별처럼“을 작사했으며 호성초를 비롯 안양시 초, 중, 고, 대학 등의 교가는 물론, 캐피코(주)를 비롯한 안양시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사가(社歌)들도 작사했다. 또 김대규 시인의 대표시인 ”엽서“, ”가을의 노래“, ”사랑 잠언“등 다수의 작품들은 노래로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https://anyangbank.tistory.com/3829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삼덕제지 이야기

 

양지마을 옆에 있는 삼덕공원에 자리했던 삼덕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삼덕제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인 1941년 일본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있었는데 일반 종이류의 제조 및 가공 판매, 제지업 관련 투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자본금은 49만 원이었으며 최초 12만2500원이 불입되었는데 모조지 생산에 주력했답니다.
경영진은 사장 이하 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삼왕제지의 설립 후 일제 패전 시까지의 경영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내용을 잘 알기 어렵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이 떠나고 삼왕제지는 귀속기업체로 미군정에 접수되었고,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었다가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관리인이었던 조경묵(曺庚黙)에게 174만 환에 불하되지요.(안양시 연표에는 1945년 11월 25일 설립. 좀 더 확인해야 할 사안 )
조경묵은 회사명(社名)을 삼덕제지(三德製紙)로 바꾸고, 운크라(UNKRA) 원조자금을 받아 시설을 개선하여 모조지와 선화지를 생산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을 시작하였으나 회사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고, 1950년대 말에는 경영난에 직면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1961년 조경묵은 개성 출신의 전재준(全在俊)에게 경영권을 넘겨 이후 2003년 삼정펄프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될 때까지 경영을 지속하였는데 삼덕제지는 신문지와 함께 국내 제지업계의 양대 축이었던 백상지(모조지) 생산 분야의 선두기업으로 자리잡지요.
삼덕제지에서는 공장 수암천으로 종이슬러지가 흘러나왔고, 갈수기에는 삼덕제지 아래쪽 하천이 이 슬러지로 뒤덮일 지경으로 오염되기도 하였으나, 모든 물자가 귀하던 1960년 이전에는 인근주민들이 이 슬러지로 땔감으로 쓰기도 했는데 병목안 철길과 천변 뚝방은 물론 인근 집등 마당에는 슬로지를 말리는 풍경이 펼쳐졌지요.
삼덕제지는 2003년 7월 폐업합니다. 기업주인 전재준 회장은 11월 3일 공장부지를 공원으로 만들 것을 조건으로로 안양시에 기부하였는데 일방적인 굴뚝 철거와 지하주차장 조성 등으로 시와 기증자간에갈등을 빚기도 하다가 2007년 7월18일 공원 조성 공사를 착공해 2008년 11월에 삼덕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역사를 남긴 공원이 만들어지지요.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공지]안양탐사대 179차 탐방(202200516)_안양1동 진흥아파트+a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79차 탐사: 재건축 추진하는 안양1동 진흥아파트단지와 1940-60년대 다운타운이었던 구시장  

5월 16일(토)  오후3시/ 집결_안양1번가 쌈지공원(서이면사무소옆)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2020년 5월 16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79차 여정은 안양1동의 재건축 추진으로 주민들이 이주를 완료하고 길고양이들만 남은 진흥아파트(옛 태평방직 공장) 단지와 1940-60년대 안양읍시절 다운타운으로 구시장이라 불렀던 지역, 한국특수제지공장 등이 있던 지역을 한바퀴 돌아볼 계힉입니다.

 

■시대동 (市垈洞, 舊市場) <안양1동>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태평방직 이야기
사진 중앙의 면적이 거대한 공장은 태평방직이다. 이 공장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당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자금사정을 겪자 안양3동에 있는 금성방직이 1956년 5월 15일 인수하면서 공장은 다시 기운차게 돌아갔다.
당시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두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여노동자를 일컬어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당시 두 공장에만 3천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일해 월급날에는 안양시내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의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는 소리가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로 안양사람들의 기억에는 거대기업이었다.
특히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은 안양의 인구를 증가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1960년대 당시 안양시 인구는 불과 5만여명 정도에 불과해 공장에서 일할 인력이 태부족했다. 이에 두 공장에서는 수시로 지방으로 내려가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보릿고개로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중학교를 갓 졸업하면 취업이 가능했다. 이에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안양으로 상경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 가까운 충청도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안양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오빠, 삼촌 등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불러오는 계기도 만들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이같은 배경은 안양시 인구수에서도 나타난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명, 1949년 8월 15일 안양읍 승격 당시 인구는 20,021명에 불과했는데 많은 굴뚝공장들이 들어선 이후인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 당시의 인구는 111,075명으로 무려 9만여명이나 증가했다.
태평방직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1983년 신축한 진흥아파트(5층/12층. 33개동
1940세대)로 지어진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재건축이 추진중에 있다.

 

사진 아랫쪽의 단독주택들이 있는 곳이 안양 남부동(안양1동과 남부시장)이고 그 위로 오른쪽에 버스가 지나는 길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던 1번국도(현 만안로. 안양 토박이들은 현재 이길을 구도로라 부름)이며 그 위로는 경부선 철길이 지난다. 그 위로는 거대한 공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성방직과 상벽을 이루었던 태평방직으로 이 공장내에는 공장시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온실과 연못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장 왼쪽으로 보이는 길은 안양에서 과천, 청계와 말죽거리로 연결하던 주요 도로였는데 가는 길의 주요지점을 보면 안양역에서 1번국도(구도로)에서 땡땡땡철길을 건너면 당시 시흥군사람들이 장보러 왔던 구시장이 나오고 태평방직 정문앞을 지나 수푸루지 다리를 건너면 임곡마을이다. 이곳에서 나즈막한 야산(현 이마트 건너편)을 돌아 다시 공동묘지가 있던 구릿고개(안양운동장남문, 임철호감자탕 앞)를 넘고 수촌마을 지나 인덕원으로 이어진다.
요 대목에서 살짝 귀띔하면 현재의 운동장치안센터 옆에서 관양동 노을어린이공원까지 이어지는 수촌마을의 뒷길(평촌대로 374번길. 관평로 305번길)은 조선시대 선비와 보부상들이 한양에서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에서 안양과 안산으로 가던 그야말로 옛길을 유지하고 있다. 이 골목은 현재 안양1번가, 범계, 평촌에 버금갈 만큼 식당과 숨은 맛집들이 자리한 동네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사진속 철길이 지나가는 왼쪽 끝으로 대형 건물이 보이는데 쌀 창고가 있던 삼광정미소다. 당시 안양역 앞(현 현대코아 자리) 에는 삼창정미소가 있었는데 이 두개의 정미소들은 정부양곡을 도정하고 보관하는 영단(營團)방앗간으로 규모가 아주 컸다.
삼광 정미소앞에는 넓은마당이 있었는데 어릴적 구시장에 살던 동네 꼬마들의 집합소로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술레잡기, 자치기, 말뚝받기 등을 하며 놀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사진 중간의 공장 왼쪽 끝자락에 보이는 다리가 안양과 비산동, 인덕원, 청계와 과천을 연결하던 수푸루지다리다.

 

 

마을과 도시연구, 건축, 사진, 골목,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함께 동참할 수 있다. 2시간여 골목길을 걷는 여정에는 편한 신발과 복장에 물 한병은 필수. 회비는 없다.

집결지는 안양 명학공원 분수대앞에서 오후3시에 출발한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공지]안양탐사대 178차 탐방(202200509)_안양8동 상록지구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78차 재개발이 추진중인 안양8동 상록마을

5월 09일(토)  오후3시/ 집결_명학공원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코로나19로 실시하지 못했던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2020년 5월 9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78차 여정은 안양8동 상록마을을 찾아갑니다.

상록마을은 안양8동 성결대사거리(구 안양경찰서앞)에서 성결대학교 가는 길 좌측 야산 자락에 있는 동네로 한동안 재개발 움직임이 있다가 취소됐다가 다시 추진되는 등 갈등을 빚고 있는 곳이다.  이날 여정에서는 한국특수제지 창업주인 단사천 회장이 거주했던 해성농장(벚꽃길이 아름다운 곳)도 살짝 들여다 보고 만안청소년수련관 하늘정원에서 안양시내도 내려다 보고, 안양8동 동네 텃밭도 볼 예정이다.

마을과 도시연구, 건축, 사진, 골목,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함께 동참할 수 있다. 2시간여 골목길을 걷는 여정에는 편한 신발과 복장에 물 한병은 필수. 회비는 없다.

집결지는 안양 명학공원 분수대앞에서 오후3시에 출발한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

 

■상록마을(常綠洞)
안양8동 11통 지역으로, 골안 동쪽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야산으로 돌이 많았던 곳인데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하여 상록마을 (常綠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1990년 10월 경부터 성도, 대신, 일진, 한진, 삼성빌라 등이 들어서면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수리산 삼림욕장의 시발지가되며, 지대가 높아 선풍기가 없어도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최적의 주택지로 손꼽힌다.

 

■골안(谷內洞)
주접동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본래 주접동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1962 년에 성결교신학교(안양동 산 1417-1),1971에 성문여중(안양동 산 117-1) 등이 설립되면서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주접동에서 분리되어 골안(谷內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골안(谷內洞)이란 관모봉(성문여중 뒷산) 골짜기 안에 형성된 취락이란 뜻이다. 이곳엔 일찌기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가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라잡이 최병렬(016-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https://ngoanyang.or.kr/5348

[공지]안양탐사대 177차 탐방(20200502)_사라지는 동네 안양5동 냉천마을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77차 재개발로 없어지는 안양5동 냉천마을 

4월 02일(토)  오후3시/ 집결_안양문화원 앞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코로나19로 실시하지 못했던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2020년 5월 2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76차 여정은 안양5동 냉천마을을 찾아갑니다.

이 동네는 15년전 정부가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했으나 사업 자체가 10년 넘게 표류해오다가 결국 무산됐으나 안양시와 경기도의 협의에 따라 경기도시공사가 바턴을 이어받아 재개발을 하는 곳입니다.

경기도시공사는 2019년 3월 28일 안양지역의 노후·불량주택 정비를 위해 추진 중인 ‘안양 냉천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았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안양시 냉천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이 국토부의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 지정 15년만에, 안양시와 경기도시공사의 사업 재개 3년만의 결정이지요.

냉천마을은 이제 안양에서 골목과 옛 풍경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동네로 이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고, 2020년 이주가 마무리되면, 2021년 첫 삽을 뜰 예정으로 없어지는 동네의 사계의 모습를 남기기 위해 안양탐사대에서 2020년에는 수시로 이 동네를 집중적으로 찾아갈 예정입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라잡이 최병렬(016-311-1001)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지난 발걸음(2013-2019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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