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옛사진]1990년대 안양 호계2동 수령 250년 느티나무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옛사진]1990년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90년 중반에 찍은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동네의 정자나무이자 수호신으로 250년을 살다가 고사한 느티나무가 베어지기 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현재 호계2동 버스정류장앞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속 느티나무가 있는 위치는 현재 호계동시외버스정류장과 육교 중간(안양시 경수대로 717 건물 앞)으로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 북쪽이며 도로는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이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속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끝자락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나무 가지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옆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한편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옛사진]1973년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07.28/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73년 5월에 찍은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멀리 뒷쪽으로 수리산이 보이는 동네앞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이 담겨있는 흑백사진으로 현재 호계2동 버스정류장앞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으로 현재 호계동시외버스정루장과 육교 앞 일대의 옛 모습으로 사진속 어린이들이 노는 앞쪽 하얀 부분이 도로인데 이 도로는 향후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가 놓여지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 좌측 기와집 뒤로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사진속 호계동 느티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사진 찍을 당시 20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안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갑자기 이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무관심속에서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옛사진]1960년대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07.06/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60년대 중반 무렵의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초가집과 기와집,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블록 담장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담겨있는 동네의 흑백사진으로 호계2동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으로 사진 좌측 끝 지점은 지금의 호계시외버스정류장, 사진 우측의 스레이트지붕 집 앞은 지금의 호계육교 지점으로 추정됩니다. 한옥 뒤로는 나즈막한 야산이 보이는데 이 곳은 현재 호계현대홈타운 1차아파트 주변 지역으로 오밀조밀한 골목들과 단독주택, 연립 등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수 있지요. 

사진 앞쪽 넓은밭과 동네 중간으로는 트럭 한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 도로는 향후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가 놓여지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나무 한그루 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사진속 호계동 느티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사진 찍을 당시 20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안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갑자기 이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무관심속에서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옛사진]1960년대 말 안양 호계2동(호계도서관 주변)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대 말 안양 호계2동(현 호계도서관 주변) 

 

#안양 #기록 #기억 #호계2동 #호계도서관 #안양교육청 #호계서원 #청감서원 #방죽말/

1960년대 말 무렵의 안양 호계2동  923-34 일대로 현 호계도서관 주변으로 호계2동 토박이인 인형수 전 안양시의원이 소장하고 사진입니다.
사진은 현재의 귀인로 앞 흥화아파트에서 북쪽의 호계도서관을 향해 찍은 것으로 산자락 위쪽  무덤 있는 곳이 현 호계도서관(과거 안양교육청)이며 산자락을 깍아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호계도서관(1998년 3월 3일 개관)은 대지면적 5,220㎡, 건축면적 2,865㎡로 16만건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1980년대 안양시교육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1997년 인수해 도서관으로 용도 변경한 것으로 사실 오래된 건물이지요.
사진 아래쪽에 보이는 한옥이 자리한 곳은 현 주소지로 경수대로 685번길 51로 추정되는데 2014년 11월 28일 65차 탐사길에 고즈녁한 옛 한옥의 형태를 사진에 담을수 있었는데 2019년 7월 6일 165차 탐사길에 다시 가보니 도시생활형 원룸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아쉽기만 합니다. 
옛 지도(1872년 지방지도-규장각)를 보면 호계2동 주변에는 조선시대 사창(社倉- 조선 시대,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 대여 기관)이 있었으며 1910년 이전에는 과천군 하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서이면으로 통합되면서 서이면사무소가 설치되는 등 1900년대 초반까지 인덕원 남쪽의 민백리, 갈산, 당산미, 도양리, 군포장, 귀인, 신촌, 신기 등의 마을을 아우르는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청감서원(호계서원)과 일제 강점기 초에는 낙영학교 등이 자리해 안양 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기도 하지요.

 

고 변원신 선생이 들려준 안양이야기

호계동은 예전에 방죽말, 샛터말, 안말 일대가 범이 많은 곳이라 하여 범계 즉 호계(虎溪)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 호계1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상서면 도양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안양면 호계리에서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2호에 따라 안양읍 호계리로 칭했다.

호계1동은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에 의해 호계동을 분동해 덕고개, 금성마을 지역을 호계1동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동으로는 갈산동, 서로 군포시 금정도, 남으로 호계3동, 북으로 호계2동이 각각 위치해있다.
덕고개는 현 호계신사거리에서 교도소로 향하는 고개를 일컬었으며 옛날 지방에서 인자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고가던 고개라 하여 덕고개라 지칭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만안로가 개설된 이래 1930년대에는 서울과 과천, 남양을 관통하는 도로 및 경수산업도로의 개설로 서울, 과천, 수원,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이 발달해 아파트가 급속히 들어서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증한 곳이다. 또 중앙제지, LG전선 등 60여 업체가 소재한 중소기업 밀집지역으로 평촌신도시의 배후 상가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호계1동은 안양지방 최초 개신교의 전래지로 알려지고 있다. 1895년 보고에 의하면 덕고개 출신 허대진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때 덕고개교회 즉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 따르면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리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호계2동은 호계동에서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 제600호로 분동해 안말, 방죽말, 샛터말 등의 지역이 호계2동이 되었다. 동으로 신촌동, 서로 안양8동, 남으로 호계1동, 북으로 비산2동이 위치했으며 안양교육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동양나이론, 신아화학 등이 운집한 경공업 지역으로 강남, 경남, 대림, 덕원, 현대 등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밀집한 신흥개발지역이며 주민의 구성은 토박이가 다수를 차지한다.
방죽을 쌓아 농경지에 유입해 농사짓기가 수월했던 곳으로 안양면 이전에는 과천면 상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에는 안양면의 전신인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한 곳으로 관가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호계2동은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숙종 42년 1716년에 창건되어 대원군 집정 때 1870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창강서원(또는 호계서원)과 옛 범계주민들이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이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초에 설립된 낙영학교는 비록 남아있지 않고 그 기록만 전해질 뿐이지만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안양교육의 발아지였다는 사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파연구소가 있고 호계체육관이 최근 건립되었다.


지명유래 - 방죽말(防築洞)
<호계 2동>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果川郡 下西面의 면사무소 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始興郡 西二面의 면사 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있 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하여 방 죽은 虎界에서 虎溪里競宇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祭를 지내지 않는다.

 

 

행정구역 개편 과정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금천현도(衿川縣圖)에 실려 있는데,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금천현에 속한 안양리(安養里)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천 쪽에서는 여지도서 이후 30년이 지난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이 지역 리(里)의 명칭이 보인다. 즉, 과천군 하서면 6개리 중의 하나로 안양리(安陽里)를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안양역 인근으로 추정된다. 즉, 안양리는 현재의 안양대교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지역에 나뉘어져 있었던 옛 안양리가 속했던 시흥군과 과천군의 경계는 안양유원지에서 발원해서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삼성천이었다. 역대로 삼성천 이북은 시흥에 속했고, 그 이남은 과천이 되는 것이다. 시흥에 속했던 안양리(현재의 석수동)가 안양에 속하게 되는 시기는 1963년 1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을 통하여 박달동과 함께 광명에서 안양읍으로 편입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안양의 뿌리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시흥이 아니라 과천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안양시 행정구역의 90% 이상을 아울렀던 과천군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온 것일까. 고종 32년(1895)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군은 오늘날의 안양, 군포, 의왕의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동작동, 흑석동, 노량진까지 또 동쪽으로는 양재동, 포이동에 이르는 7개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서쪽의 2개 면이 오늘날의 안양이 된 상서면(오늘날의 동안구)과 하서면(오늘날의 만안구)이다. 

당시 과천군 현황은 7개면 55동지로 이루어졌다.

- 상서면(마을수 4개); 일동, 이동, 외비산동, 내비산동

- 하서면(마을수 9개); 일동, 이동, 도양리, 호계리, 후두미동, 장내동, 발사동, 석수동, 안양리

- 군내면(마을수 9개); 현재 과천 일대

- 동면 (마을수 7개); 현재 양재,서초,우면 일대

- 남면 (마을수 10개); 현재 군포 일대

- 상북면(마을수 8개); 사당,방배,동작,반포 일대

- 하북면(마을수 8개); 흑석동 일대

 

1914년 4월 1일 과천, 시흥, 안산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군은 북면, 신동면, 동면, 서면, 과천면, 서이면, 남면, 수암면, 군자면으로 9면 83리를 편제하는 거대한 군이 된다. 이 과정에서 상서면과 하서면은 서쪽의 2개 면이 합쳤다고 해서 서이면(西二面)으로 변하게 된다. 당시 서이면은 5개리(호계리, 안양리, 일동리, 이동리, 비산리)를 관할하는데 면사무소를 지금의 호계동(현재의 호계도서관 인근)에 두었다. 3년 뒤인 1917년에 서이면 사무소는 오늘날 안양 1번가로 옮겨오게 되고, 이어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1949년 8월 14일 시흥군 안양읍, 1973년 7월 1일 안양시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

[옛사진]1977년 안양 대수해_ 한국방송공사의 침수 텔레비젼(TV) 수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국가기록원(www.archives.go.kr/)이 2012년 7월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초복을 맞이하여 「이달의 기록」으로 기록으로 본 ‘초복과 여름나기’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올린 사진(1950~1970년대의 다양한 여름나기 풍경 동영상 16건, 사진 14건 등 총 30건) 준 한장으로 1977년 안양 일대에서 발생한 대홍수 당시 모습을 담은 '안양천 수해지구 이동봉사반의 모습'으로 한국방송공사(KBS) 이동봉사 차량이 안양에 내려와 침수된 TV를 수리해 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안양 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며 안양 대수해, 안양 대홍수, 쌍칠(77)년 대홍수 등으로 불리우고 있는 1977년의 집중 호우는 7월 8일 밤부터 9일까지 단 하루만에 내린 강우량이 무려 454.5mm로 당시 기상청 창설 이래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안양 원도심은 마치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듯한 물폭탄과 해일처럼 밀려드는 물살에 잠긴 수중도시가 됐다. 9천4백39명의 수재민과 사망.실종 257명 재산피해 1백85억에 이르는 유래없는 참사를 빚었으며 안양천, 학의천, 수암천, 삼성천 등의 제방이 유실되었고 안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안양대교는 교각이 주저앉았고 안양시내와 비산동을 연결하는 수푸루지 다리는 끊기는 등 그 피해가 엄청났다.
또 안양천 등 하천변에 자리한 각종 공장들도 침수돼 기계와 원자재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안양대수해 사진 보기: www.ngoanyang.or.kr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1977년 안양 대수해_안양유원지 산사태
https://anyangbank.tistory.com/3026

 

1977년 안양 대수해_수암천 안양3동.새마을 피해 복구 현장
https://anyangbank.tistory.com/2940

 

1977년 안양 대수해_안양천 수푸루지 피해 복구 현장
https://anyangbank.tistory.com/2909

 

1977년 안양 대수해_안양8동 성문여중고 복구 현장
https://anyangbank.tistory.com/2895

 

1977년 안양 대수해_안양3동 율목마을 매몰 현장
https://anyangbank.tistory.com/2893

 

1977년 안양 대수해_안양4동 산사태 매몰 현장
https://anyangbank.tistory.com/2881

 

1977년 안양대홍수로 주저앉은 안양대교
https://anyangbank.tistory.com/922

 

1977년 안양대홍수로 끊어진 수푸루지다리(임곡교)
https://anyangbank.tistory.com/634

 

1977년 안양대홍수로 끊어진 수푸루지다리(임곡교)

https://anyangbank.tistory.com/634

[옛사진]1946년 안양에 살며 기차 통학했던 이희호 여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년 6월 10일 별세한 이희호 여사께서 14일 각계 지도자와 시민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엄수된후 현충원 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으로 옮겨져 DJ옆에 묻혔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배우자이기 이전에 여성운동의 초석을 닦고 노인과 장애인, 빈곤층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여성 지도자였다. 이희호 여사께서 학생 시절 안양역 인근에 살며 서울로 기차 통학을 했다는 얘기를 오래전 들은 바 있어 혹시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옛 자료를 찾던 중 2015 한겨레신문에서 연재했던 [이희호 평전] ⑥ 제1부 학업시대-5회 연극배우 편에 나온 기록과 사진을 통해 안양에 살았던 사실을 확인했다.

 

“둘째오빠가 의사로 개업을 해서 안양역 근처에 살았는데, 거기에 한동안 얹혀살면서 통학을 했어요. 기차로 서울역까지 와서 학교로 갔지요. 그때 통학열차 안에서 승객들을 관객 삼아 연극을 했어요. 어떤 내용으로 연극을 했는지, 몇 사람이 같이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혼란한 시절이라 피난민 돕기 모금을 하는 차원에서 했던 것 같습니다."

 

한겨레신문 [이희호 평전] ⑥ 제1부 학업시대-5회 연극배우
등록 :2015-05-10 20:52수정 :2017-01-09 10:13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0588.html

 

위 사진은 1946년 12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기생들과 안양에서 연말 고아돕기 기금마련 공연을 마친 뒤 찍은 것인데 작품 제목은 확인되지 않았다. 뒷줄 왼쪽 넷째 벙거지 모자 차림이 이희호 여사이다. 이희호 여사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한겨레신문 평전과 기타 기록물에 이희호 여사가 안양에서 둘째오빠와 살았을 당시의 이야기가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한장의 흑백사진이 안양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하던 여학생 이희호를 추억하게 한다.

안양토박이로 1960년대 안양학생회를 이끌었던 임정조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1940-70년대까지 안양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하던 학생들로 경부선 안양통학생회(안양학생회 전신. 1970년대 까지 운영)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희호 여사는 안양통학생회 여성부장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은 여성·민주·평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00년 가까운 고인의 삶은 여성 권리 신장,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구현을 향한 투쟁으로 일관했다. 고인은 가부장제 아래 신음하던 여성들의 권익 실현을 위한 싸움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 50년 가까이 민주화 운동의 동반자로 살았으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바친 평화운동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낸 불굴의 신념가였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님과 편안한 영면을 기원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한겨레>는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이희호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80차례 장기 연재했다.

이희호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습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입니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이희호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고명섭 논설위원이 평전 형식으로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공적 지면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인간 이희호’의 극적인 삶이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 국민의 민주항쟁사와 더불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이희호평전 연재 기록물 보기: http://www.hani.co.kr/arti/SERIES/896/

 

[옛그림]우매한 조선인 행동으로 비하한 원태우 지사의 돌팔매질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05.02/ #기록 #역사 #원태우 #일로전쟁사진호보 #일본 #기무라고타로/
이 그림은 일본 搏文館(박문관)에서 1904~1905년 발행한 시리즈 화보책자인 《일로전쟁화보》 제39권(1905.12.8 발행)에 실린 삽화 자료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기록물이다. 그림에는 1905년 안양에서 일어난 원태우지사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돌팔매질을 일본인 화가가 삽화와 단신 기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원 지사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안양 서리재고개(현 안양시 석수동 안양육교 인근)에서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원태우 등 4명이 체포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히 그림에는 오류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림에는 머리에는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허리춤에는 칼을 찬 양반의 모습으로 표현한 중년의 남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뒷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사건 당시 원태우 지사의 나이는 23살의 청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등의 기록과 자료를 보면 원 지사는 농사를 짓던 농부였고, 돌절구와 맷돌을 잘 다듬어 그가 만든 것이 현재 독립기념관과 안양박물관에 있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일로전쟁화보》는 1904~5년 일본 搏文館(박문관)에서 발행한 시리즈 책자로 구 한말인 대한제국 당시의 우리나라의 풍경, 풍습, 사건 등에 대한 사진과 삽화가 일본인의 시각으로 본 글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각 64~68p. 일어 표기. 소프트커버. 상태 양호. 세로 26.5cm, 가로 18.3cm.
문제는 원태우 지사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후 안양 곳곳에 세워진 동상, 조형물 등을 보면 23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 대신 갓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적어도 40대 중년에서 60대 노인으로 표현해 젊은 청년의 항일투쟁 행동을 중장년의 어른이 한 것으로 호도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특히 지난 2018년 11월경 안양시 석수동 원태우 지사 돌팔매질 현장에 새롭게 세운 조형물은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일로전쟁화보》 화보집의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 제목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하여 부착함으로 원태우 지사에 대한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 진행되어 왔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조형물에는 작품 설명, 제작 시기, 작가 이름 등을 함께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데 이같은 기록도 없다. 이는 안양시 관내 적지않은 조형물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자칫 잘못된 역사를 후세에 전하는 일로 이어질 수 시급히 보완이 필요하다.
한편 원태우지사 조형물로는 1992년 11월 22일에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원태우지사 얼굴의 부조상, 평촌 자유공원 자유총연맹 안양지회 정문앞에는 동상이 있다.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관악역에서 서울 방향 300미터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는 안양시가 설치한 자그마한 돌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가 2018년 가을 석수2동에서 새 조형물로 교체했는데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일로전쟁화보》 화보집의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 제목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하여 부착한 것이다.
2018년 11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원 지사가 돌멩이를 던진 의거지와 원 지사가 태어나 자랐던 안양1동 생가터(안양1동 현 농협 안양역지점)에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표지판과 원태우 집터 표지석을 신규 설치했다.

 

 

 

 

[옛그림]시흥환어행렬도에 그려진 의왕 사근행궁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조선 시대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서울 창덕궁에서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 현릉원까지 약 60㎞.의 길로 13번의 원행길에 나섰다.

원행길에는 임금이 잠시 들러 머물던 곳 행궁(行宮·임금이 지방에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이 있었는데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화성행궁을 비롯 노량행궁, 과천행궁, 시흥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안산행궁 등이 있었다.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숭례문, 노량진, 용양봉저정을 거쳐 남태령을 넘고 과천행궁에 머물렀다가 군포로 진입하는 '과천길'을 이용하다가 환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원행에 나섰던 1795년을 기점으로 창덕궁에서 시흥행궁과 대박산과 만안교를 건너고 안양행궁을 거쳐 군포로 들어가는 '시흥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과천길은 연로한 어머니와 행렬이 지나가기에 지형이 협소하고 언덕이 많았다. 대신 넓고 평탄한 시흥길이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 길은 이후 1번국도이자 만안로이며 시흥대로이다.  

정조는 시흥길을 지나며 시흥행궁과 안양행궁, 사근행궁 등에 머물다 간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이들 행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만다.

금천구청이 발간한 '시흥행궁 복원 및 활용을 위한 학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보니 시흥행궁이 현재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자리했을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양행궁도 안양1번가 상가 건물앞에 '안양행궁지'라는 작은 표지석으로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표지석이 있는 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고 '대궐터'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안양4동 담안(중앙성당 인근) 등을 얘기하는 등 안양행궁의 정확한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안양행궁이 없어진 이유로는 시흥행궁에 불이 나서 이를 보수하는데 안양행궁 자재를 갖다 쓰면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또한 기록이 없어 사실이라 말할수 없다.

그나마 위치가 확실한 것은 사근행궁이다. 사근천이 흐르는 옆에 자리한 사근참행궁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양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는길목이자, 과천길과 시흥길, 안산길의 갈림길로 교통의 요지로 역대 왕들이 자주 이용했다.  

기록을 보면 현종(재위 1659∼1674)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 온천을 자주 다녔는데, 이때마다 이곳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원행에 나선 1795년에는 사근행궁에서 함께 식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근행궁은 일본 강점기인 1937년 3월까지 의왕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기와지붕 모습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돼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수원에 면사무소가 새로 짓는데 이때 사근행궁은 새 면사무소를 짓는데 돈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왕면협의회 결의를 거쳐 철거되고 만다.

당시 면협의회 기록을 보면 의원 중 한 명이 "전 의왕면사무소(사근행궁)는 조선 시대 행궁이므로 고적(古蹟)으로 보존하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했으나 의장인 면장은 "유지가 곤란하다. 매각 외 방법이 없다"고 반대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사근행궁터에서 기단으로 쓰인 돌과 기와들이 일부 수습됐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인근에 택지가 들어서면서 아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근행궁터였던 의왕시청별관 입구에는 지역유지 모임인 백운회에서 1989년에 세운 사근행궁터비의 존재가 이곳이 과거 임금들이 머물던 행궁터 였음을 전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의왕시의 고천동지역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근행궁터 일부가 새 도로에 포함되어 남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옛사진]안양초교 38회 졸업(1969년) 앨범속 얼굴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초등학교 38회(1969년 졸업) 졸업앨범이다. 40년의 세월을 말해주듯 빛바랜 앨범은 표지와 속장에 이어 두번째 페이지에는 교훈, 교가, 교기와 함께 교장선생님 얼굴, 세번째 페이지에는 은사들 얼굴, 이어 다음장 페이지부터는 각 반별 사진 그리고 사진 뒷페이지에는 사진속 인물을 따라 이름 적은 별지 순으로 8반까지 한반에 평균 6-70명씩 500여명의 학생들이 한 교정에서 공부하고 뛰놀았던 얼굴들이 담겨져 있다.

안양의 오래된 모습과 사람 등 옛 사진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1977년 안양대수해로 인해 기관, 회사, 직장은 물론 각 가정의 책장 또는 장롱속에 보관하던 두툼한 앨범도 대부분 물에 젖거나 훼손, 분실, 망실되면서 과거의 수많은 기록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깐 안양 대홍수를 살펴보면 1977년 7월 8일부터 9일까지 안양에 내린 비는 무려 467.2mm로 기상청 창설이래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했는데 당시 안양 원도심은 마치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듯한 물폭탄과 해일처럼 밀려드는 물살에 잠긴 수중도시 같았다. 당시 피해 규모는 수재민 9천4백39명, 사망.실종 257명, 재산피해 1백85억에 이르는 유래없는 참사를 빚었으며 안양천, 학의천, 수암천, 삼성천 등의 제방이 유실되었고 안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안양대교는 교각이 주저앉았고 안양시내와 비산동을 연결하는 수푸루지 다리는 끊기는 등 안양 최대의 사건으로 지금도 안양 대수해, 안양 대홍수, 쌍칠(77)년 대홍수로 불리우고 있다. 

다시 안양초교 이야기이다.

안양초등학교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우체국사거리 중화한방원 뒤에 위치한 공립 초등학교로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2018년 86회 졸업생(162명)까지 그동안 38,979명을 배출한 안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처음에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 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변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주접동과 남부동 사이에 있는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한다.
교화동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국 민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양초교보다 더 오래된 학교는 과천초교(1912년 4월1일 개교)와 군포초교(1920년 4월 1일 개교)다. 안양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안양역사 개설 이후 역 주변 주거지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을 형성해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1914년 호계동에 세워진 과천군 서이면면사무소 건물이 1917년 안양1동으로 이전해 안양면사무소 개설되고 관공서들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근대 도시(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군포장이 섰던 군포와 한양 초입인 과천이 더 컸으며 안양에 소학교가 없어 당시 학생들은 군포, 과천, 안산까지 등교했다.

사진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대부분 1957년에 태어나 닭띠생인 이들은 한국 사회의 상징적 아이콘인 '58년 개띠'와 더불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로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숲을 푸르게 하기 위해 송충이를 잡기 위해 휘발유가.석유가 든 깡통을 들고 수리산을 오르락 내리락해야 했고, 겨울에는 난로 땔감(갈탄)으로 부족한 것을 솔방울로 보태기 위해 푸대자루를 들고 또다시 산으로 가야했던 이들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베이비붐 세대만이 인식하고 공유하는 몇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가난'이다. 낡은 교과서를 보따리에 싸맨 채 밑창 달은 고무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 등교하던 일, 원조 받은 분유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 TV있는 집을 찾아가서 박치기 왕(김일)이 나오는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을 넋이 나간 듯 보던 일들이 동시에 공유된 경험 중의 하나다.

두 번째는 시대적 ‘다양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점이다. 즉 한 반에 60-70명이상, 3부제로 돌아가는 ‘콩나물’ 교실에서 수많은 급우와 경쟁했지만, 결국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높은 인구비율 때문에 당시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로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지만('77학번), 97년 말에는 IMF사태가 터지면서 40대일 때 ‘사오정(45세 정년)’, 50대가 되자 ‘오륙도(56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놈)’라는 말의 당사자가 된 세대이다. 다소 서글픈 추억도 있지만 이런 동일한 기억과 체험을 공유하면서 또래라는 결속감을 갖는 것이 58년 개띠를 주축으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다.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설립인가 7월 4일, 2학급 편성)
1931년 3월 16일 제1회 졸업식
1938년 4월 1일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안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5년 9월 10일 병설유치원 개원 (2학급 80명)
1994년 6월 27일 병설유치원 종일반 1학급 개설 (계 3학급)
1996년 3월 1일 안양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6년 5월 25일 학교 체육관 준공
2017년 9월 1일 제29대 송화순 교장 취임

2018년 2월 13일 제86회 졸업식(162명) / 총 졸업생 누계 38,979명

2018년 3월 1일 36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https://anyangbank.tistory.com/2257

[옛사진]1970년대 말 안양 관악역앞 만안로 이전 공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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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석수2동 국철 1호선인 관악역(冠岳驛. 석수2동 241)에서 안양역(남쪽) 방향으로 본 동네 풍경이다. 사진 우측 뒷쪽으로 보이는 큰건물이 당시 신상옥 역화감독이 운영하던 영화촬영소인 신필름(현재 안양로 532번길 현대아파트)이다. 큰 건물 2동중 왼쪽옆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학교로  안양영화예술학교(현재 안양로 510번길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속 풍경은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으로 수도권 전철1호선이 개통(1974년)한 이후 전철옆을 지나는 만안로(옛 국도 1호선)의 석수동 안양육교( 현 연현오거리)에서 안양유원지 입구인 안양교 사거리까지의 곡선 도로 선형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사진 좌측 전봇대옆 긑자락에 보이는 가로수가 서 있는 방향이 사진 우측으로 오면서 동네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음을 보면 알듯이 당시 도로는 안양유원지 입구에서 만안교(옛 고려석면 공장앞- 현재 영화아이닉스아파트)에서 삼성교를 지난후 도로 선형이 좌측으로 걱어지면서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해 현 석수주유소 삼거리에서 철길을 따라 이어지다 안양육교(1960년대 중반까지 땡땡땡 철길)를 건너 시흥(현 금천구)쪽으로 이어졌다. 

현재 안양시내(현 만안구)를 남북으로 관통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만안로, 안양로, 경수대로 등 3개 도로가 있으나 1970년 중반 까지만 하더라도 2차선의 만안로(당시 국도 1호선) 하나밖에 없었다.  

 

안양 석수2동에 대한 이야기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한다.
특히 안양육교는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 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 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이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다.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쌓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안양풀(과거 안양유원지 - 현 안양예술공원)에 개설된 수영장이 石水洞水泳場 으로 불리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된다.

 

영화의 산실이었던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해 좀더 알아볼까요.

안양하면 교과서에도 실렸던 안양포도가 유명했다. 또 안양하면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안양 석수2동에는 1960년대 동양최대의 종합영화촬영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안양시 석수동에 설립한다. 당시 기공식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대단했던 이 촬영소는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그러나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후 신필름(신필림)을 이름을 바꿔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한다.
신상옥(1925년생)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작자, 감독, 촬영기사였다.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惡夜)’로 감독 데뷰했다.
그가 신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면 젊은 그들(1956), 무영탑(1957), 연산군(1961·제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1회 대종상감독상 수상),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이(1964)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무수히 제작됐다.
신필름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당시 신필름이 소유하고 있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 두고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영화사로 당시 정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지원을 받아오던 신필림은 「장미와 들개」(1975년)영화 개봉을 앞두고 사전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해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신 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개명하고 전성기로의 복귀를 꾀해왔으나 재정난에 화재까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던 중, 1978년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으로 납치된 이후 신 감독 또한 북으로 넘가면서 신 필림은 문을 닫고 촬영소 부지는 매각돼 현재 관악현대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또 석수2동에는 국내 최초의 영화전문교육기관이 있었다. 파란곡절의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1966년 신필름 옆에 세운 영화전문교육기관 '안양예술학교'으로 1978년 1월14일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이후 문을 닫았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1980년 안양3동에 안양예술고등학교 개교하고 문을 닫은 안양예술학교 출신들과 동문회 등으로 연을 이어건다. 우연하게도 이 학교 교장의 성함이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같다. 그러다 보니 안양예고를 영화배우 최은희씨 연관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안양예고 재단과 영화배우 최은희씨와는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