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687

[20250727]1966년 안양 전파연구소 개소식 기념사진

2025.07.27/ #도시기록 #안양 #옛사진 #옛전파연구소 #호계동/ 1966.10.05부터 2009.8.31일 까지 안양 호계동에 자리했던 전파연구소의 개소식 당시의 기념사진이다. 사진출처: 국립전파연구원 홈페이지전피연구소 (현 국립전파연구원)는 1960년대 초 전파의 관리와 감독이 중요하게 인식됨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전파가 국가의 중요한 자산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전파 관리 업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가기관으로 탄생했다.전파연구소는 전파에 관한 연구를 전담하기 위하여 1966년 2월 5일 대통령령 제2397호에 의해 설립되었다. 같은 해 10월 5일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전파연구소 청사를 마련하여 3과 6계의 조직을 갖추고 업무를 시작하였다.연구소 부지 선정의 기준 중에서 가장..

[20250722]안양 춘부산(꽃메산)에서 본 1967년 하천과 마을

2025.07.22/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 #춘부산 #since1967/ 안양 석수동 춘부산(현 꽃메산)에서 본 안양시내. 이사진은 1960-70년대 안양 석수동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90년대 브라질로 이민간 신수성 동창의 부친께서 춘부산(꽃메산)에 올라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위로 살짝 보이는 산이 망해암과 안양무선표지소가 있는 비봉산이다. 사진 중앙 위에 보이는 지역은 안양2동으로 위쯕에 멀리 보이는 시가지가 안양역을 중심으로 하는 안양읍내의 모습이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흰색 건물은 만안초등학교다. 1960년대 석수동에 사는 주민들은 석수동 꽃메산을 춘부산이라 불렀다. 기록을 찾아보니 춘부산은 충훈부산으로 불리웠다. 따라서 동네 주민들은 줄인말로 춘부산이라 부른듯 싶다. 사진을 찍은 춘..

[20250715]의왕 고천동 왕곡리 새마을회관 1975년 모습

2025.07.09/ #아카이브 #옛사진 #의왕 #기록 #since1972/ 의왕 고천동 왕곡리에 있던 새마을회관. 사진출처: 의왕문화원 사진아카이브.1970년대 대한민국 농촌에 울려 퍼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는 잠들어 있던 농촌을 일깨우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변화의 신호였다. 박정희 정부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새마을운동은 단순한 환경 개선을 넘어, 농민들의 의식을 고취하고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오랫동안 가난과 낙후의 그늘에 갇혀 있던 농촌은 이 운동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고, 우리 부모 세대의 땀과 열정이 어우러져 감동적인 변혁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20250709]의왕 고천동 왕곡리 새마을회관 1972년 모습

2025.07.09/ #아카이즈 #옛사진 #의왕 #기록 #since1972/ 의왕 고천동 왕곡리에 있던 새마을회관. 사진출처: 의왕문화원 사진아카이브/ 1970년대 대한민국 농촌에 울려 퍼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는 잠들어 있던 농촌을 일깨우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변화의 신호였다. 박정희 정부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새마을운동은 단순한 환경 개선을 넘어, 농민들의 의식을 고취하고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오랫동안 가난과 낙후의 그늘에 갇혀 있던 농촌은 이 운동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고, 우리 부모 세대의 땀과 열정이 어우러져 감동적인 변혁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20250704]1960년대 안양풀로 소풍 나온 이은섭님 가족

2025.07.04/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유원지 #since1960/ 1960년대 안양풀(안양유원지)로 소풍 나온 이은섭 님 가족. 사진은 1960년대 초중반에 찍은 사진으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 안양유원지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뒷편 돌로 계단깉은 석축을 쌓은 곳이 1932년 조성한 안양풀장(무료)이다. 사진속 풀은 제1풀(성인용)이며 윗쪽으로 제2풀(아동용)이 있었다. 사람들이 서잇는곳은 1풀장앞으로 가로지르는 아나방 다리(철판에 구멍이 뚫린 미군용 강판다리)다. 다리 뒷쪽 풀장 제방 가운데 대형 바위가 보이는데 지금도 현존하는 안양풀 표지석(일본어로 안양풀이라 쓰여져 있음)이다. 사진속 인물들은 수많은 안양 사람들의 결혼식이 열렸던 신도예식장(안양1동에 있다가 폐업)을 운영..

[20250704]의왕 왕곡동 초입에 있던 청풍김씨 묘문비각

2025.07.04/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청풍김씨묘문비각 #의왕 #since1989/ 의왕 왕림마을 입구에 있던 청풍김씨묘문비각/ 이 비는 청풍김씨 묘문으로 속칭 사면비이고 글씨체는 석봉공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조선 영조대왕 시절에 영의정을 역임하신 고정공(휘 치인. 시호 헌숙1716~1790)께서 1760년경 선영의 묘소에 석물을 설치할 시기에 함께 세운것으로, 원래의 자리는 삼남길에서 마을 초입인 복죽동 노변(왕곡동 604 왕곡초교 운동장)에 있었다. 묘문과 더불어 하마석이 노변(왕곡동296-2)에 있었으나 1978년경 개발로 유실되었다. 하마석의 크기는 가로4자 세로3자 두께2자의 크기이고 화강석으로 되어 있었다. 묘비는 1995년에 도시계획에 의하여 개발되면서 왕곡동 76에 이전하였..

[20250630]행정구역과 지명 모두 없어진 옛 시흥역(1954년)

2025.06.30/ #아카이브 #옛사진 #시흥역 #since1954/ 과거 시흥군 시절의 시흥역(현 금천구청역). 19300-40년대 시흥보통학교가 6년제, 안양보통학교가 4년제이던 시절 안양에 살던 학생들이 시흥보통학교로 다니면서 통학하던 역으로 경부선이 개통되던 구한말 1905년~1910년 무렵에는 안양역 보다 규모가 컸다. 옛 시흥은 과거 시흥군이 해체될 당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던 소래읍 등 행정구역이 시흥시로 분리되면서 조선시대부터 시흥땅이던 시흥역을 비롯 서울 금천구 시흥동 등 지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1908년에 시흥역이 개업했을 때에는 여기가 시흥군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시흥역'이 되었는데, 정작 개통 3년 만에 군청을 영등포로 옮겨서 중심지 또한 영등포로 옮겨졌다. 경성부가 193..

[20250627]1937년 8월 5일 안양풀(현 안양예술공원 계곡)

2025.06.27/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풀 #since1937/ 안양예술공원(안양유원지) 초창기 당시인 1937년 8월 5일에 찍은 삼성천 계곡의 모습으로 당시 안양풀장(제2풀) 위쪽에서 찍은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속 계곡 바닥에 깔린 넓찍한 너럭바위를 볼때 현 관악교(싸리골식당앞) 주변으로 보인다.사진속 인물들은 당시 시흥군 안양에 사는 부잣집 청년들로 안양풀로 놀러온듯 싶다. 양복에 게다짝을 신은 모습이 가관이다.

[20250626]1930년대 삼성산 등산후 안양풀서 기념사진 한컷

2025.06.26/ #아카이브 #옛사진 #일제강점기 #안양풀/ 일제강점기 당시 1930년대 삼성산 등산후 안양풀(1932년 현 안양에술공원 초입의 계곡을 막아 만든 풀장)에서 가념사진을 찍은 청년들. 머리에 교모를 쓴것으로 볼때 당시 고둥학생들로 추정된다. 사진에 쓰여진 글씨에 황기 2601년 등이 쓰여져 있는데 해독 불가. 년도와 출처 불명, 일행이 서있는 곳은 안양풀 수문이 있는 곳이다. 수문앞에는 커더란 암반(바위)이 있는데 일본어로 안양풀(安養プ―ル)이라 글자를 새겨 표지석을 만들었다. 이 표지석은 지금도 현존한다.사학자로 의왕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인 박철하 박사가 페북 사진을 보고 1941년이라 알려옴, . 안양풀 톺아보기 https://ngoanyang.or.kr/9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