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598

[20240319]샘병원 초창기 안양1동 안양의원(since1969)

2024.03.19/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기억 #안양병원 #since1969/ 안양병원의 초창기 시절로 1967년 안양1동(현 안양일번가)에서 개인병원으로 개업한 안양의원(사진 뒤 흰색건물)과 주변 모습이다. 사진속 간호원이 안고있는 아기가 이상택.황영희 부부의 큰아들(돌이 갓 지났을때)로 현 샘병원의 모체인 의료법인 효산의료재단 이대희 이사장이란다. 사진과 글 출처는 국민일보에 연재된 [역경의열매]이상택(12) 편에 실린 이상택 샘병원 설립자의 회고록이다.(2023.12.2일자) 안양병원은 1967년 11월 안양1동에서 작은 개인 의원으로 출발했다. 당시에는 부인인 황영희 박사가 원장을 맡았다. 이상택.황영희 부부는 의원을 병원급 규모로 키워 1972년 5월 1일 안양5동에 안양병원의 문을 열..

[20240314]1970년대 안양6동 현충로 주변 모습

2024.03.14/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냉천동 #충혼탑 #농촌지도소 #since1970 #이정범컬렉션/ 주접동이라 불렸던 안양6동 현충사거리에서 현충탑( 1970-90년대에는 충혼탑이라 불렀음) 올라가는 도로(현 현충로)의 1970년대 모습으로 안양시청 홍보실에 근무했던 이정범 선생이 사진으로 남긴 기록이다. 정면에 현충탑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보이는 집들이 소골안 마을의 시작점이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도로(현 현충로)에서는 주민들이 진입도로 확장후 소쿠리에 담아온 마사토를 길에 뿌리며 정비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로 왼쪽에 건물이 보이지 않지만 농촌지도소(현 안양문화원 자리)가 있었으며 그위쪽으로 전봇대가 보이는 곳 왼쪽 땅에는 1976년에 안양소방서가 건립되었다. 현..

[20240312]국내 최초 자동차부품 생산한 현대양행 안양공장

2024.03.12/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군포 #한라 #만도 #현대양행/ 현대양행 안양공장의 1970년대 모습.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이 만도-한라-HL로 이어지는 그룹의 출발점에는 안양과 군포에 있던 공장들이 한몫을 했다. 1962년 10월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의 사명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92번지에서 ㈜현대양행으로 창립한 후 1964년 6월1일 안양시 박달동 120에 안양공장(안양기계제작소)를 신축한다. 안양기계제작소는 초창기 스푼, 나이프, 포크와 주전자, 냄비 등을 생산한 양식기 공장이었으나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을 생산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

[20240311]한국 기계공업 전초기지 현대양행 군포공장

2024.03.11/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군포 #한라 #만도 #군포종합기계공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이 만도-한라-HL로 이어지는 그룹의 출발점에는 안양과 군포에 있던 공장들이 한몫을 한다. 1962년 10월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의 사명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92번지에서 ㈜현대양행으로 창립한 후 1964년 6월1일 안양시 박달동 120에 안양공장(안양기계제작소)를 신축한다. 안양기계제작소는 초창기 스푼, 나이프, 포크와 주전자, 냄비 등을 생산한 양식기 공장이었으나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을 생산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1976..

[20240303]1957년 국보도록에 실린 <중초사지 삼층석탑>

2024.03.03/ #아카이브 #기록 #문화유산 #역사 #중초사삼층석탑/ 1957년 에 수록된 중초사지삼층석탑의 모습이다. 원위치에서 촬영된 것은 분명하나, 1층 옥개석만 남아 있을 뿐이지 석탑의 제모습은 이 당시로서도 이미 거의 망가진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1934년 8월 27일자에 고시된 보물 제7호 '중초사삼층석탑(中初寺三層石塔)'의 지정내역에는 그 소재지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 213번(田)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편 보물 제6호 '중초사당간지주(중초사당간지주)은 그 소재지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 212번1 (田)으로 표시하고 있어, 애당초 그 위치가 서로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이다. 원래는 보물 제5호였다가 지난 199..

[20240220]1969년 안양 박달동 현대양행(만도기계) 안양공장

2024.02.20/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기록 #현대양행 #만도기계 #since1967/ /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현대양행-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의 항공사진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공장 위쪽에 흐르는 물줄기가 안양천이고 아래쪽으로는 안양-안산간 박달로이다.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는 1980년 2월 만도기계(주)로 사명이 변경되고 1999년 만도(주)로 다시 변경된다. 만도는 ‘인간은 할 수 있다’(man do)와 ‘1만가지 도시’(萬都)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뜻으로 창업주인 정인영 명예회장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만도기계는 1996년 평택 경주 청주 등지로 공장시설을 분산이전하고 부지가 한라건설에 매각된후 한라비발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2000년 1천385가구가..

[20240217]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 직원들 안양풀 소풍(1965년)

2024.02.17/ #아카이브 #옛사진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 #만도기계 #since1965/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현대양행-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 직원들이 1965년 5월 3일에 가졌던 안양유원지 야유회 사진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1962년 무역업으로 출발한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은 1964년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며 제조업에 본격 진출했다. 박달동에 있던 안양기계제작소에서는 양식기를 제조 수출했다. 이를 통해 부족하지만 기계공업과 해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현대양행은 1969년 자동차부품 생산에 착수했다. 우리나라 자동차부품산업의 효시였다

[20240217]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의 양식기 제조(1966년)

2024.02.17/ #아카이브 #옛사진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 #만도기계 #since1966/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에서 양식기를 생산하는 모습이다 자동차강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한 출발점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1962년 무역업으로 출발한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은 1964년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며 제조업에 본격 진출했다. 박달동에 있던 안양기계제작소에서는 양식기를 제조 수출했다. 이를 통해 부족하지만 기계공업과 해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현대양행은 1969년 자동차부품 생산에 착수했다. 우리나라 자동차부품산업의 효시였다. 한라그룹 통사 기록을 보면 현대양행을 설립한 정인영 명예회장은 무역업과 현대건설의 해외 사업을 펼치며 기계 생산을 위한..

[20240216]1964년의 안양 박달동 안양기계제작소(만도기계)

2024.02.16/ #아카이브 #옛사진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 #만도기계 #since1964/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의 안내 표지판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중공업진출을 위한 현대양행 출범(1962년) 1964년 안양 박달동에 안양기계제작소 설립 1962년 무역업으로 출발한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은 1964년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며 제조업에 본격 진출했다. 박달동에 있던 안양기계제작소에서는 양식기를 제조 수출했다. 이를 통해 부족하지만 기계공업과 해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현대양행은 1969년 자동차부품 생산에 착수했다. 우리나라 자동차부품산업의 효시였다. 한라그룹 통사 기록을 보면 현대양행을 설립한 정인영 명예회장은 무역업과 현대건설의 해외 ..

[20240216]1954년 삼덕제지 안양공장의 종이 생산 모습

2024.02.16. #아카이브 #옛사진 #삼덕제지 #안양 #since1954/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재건단의 후원으로 북구해 가동을 시작한 삼덕제지 안양공장의 1954년 모습으로 국가기록원 보관되어 있는 기록물이다. 국가기록원의 사진설명으로는 공장이 복구된후 전쟁전의 생산량을 회복했다고 되어있다. 삼덕제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인 1941년 일본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전신으로 일반 종이류의 제조 및 가공 판매, 제지업 관련 투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자본금은 49만 원이었으며 최초 12만2500원이 불입되었는데 모조지 생산에 주력했다. 경영진은 사장 이하 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삼왕제지의 설립 후 일제 패전 시까지의 경영 실태에 대해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