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 옛사진]1961년 안양5동 골목에 있던 구세군 안양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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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6./ #기록 #기억 #옛날사진 #구세군안양영문 #sine1961 #안양5동/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에는 '한 손에 빵을, 한 손에 복음을이라는 슬로건이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세군의 장점은 기동력, 헌신과 복종, 단결심, 추진력 등을 꼽는다. 외형적으로는 군대 조직을 빌려 왔지만, 구세군엔 늘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서가 있다".
구세군이 태동한 데는 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사회적 모순이 불거지던 산업혁명기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당대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거리를 예배장소로 삼은 게 구세군이었다.
또 구세군을 생각하면 떠오는 게 '자선냄비'다. 1928년부터 시작된 자선냄비 모금은 이제 하나의 국민운동이 됐다. 많은 사람이 구세군을 종교단체가 아닌 복지단체로 오해하는 이유기도 하다.
구세군은 자선냄비를 통해 모은 기금으로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노인복지, 아동복지, 노숙인 자활, 에이즈 치료, 알코올 중독 치료, 다문화 가정 지원 등 사회복지 전 분야를 아우르며 전국 150여 개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 중이다.

구세군안양교회
031-449-4201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707-128 구세군중앙교회

사진 출처: 구세군안양교회 http://www.ayksg.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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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68년, 안양근로자회관이 들어서기전 주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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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기록 #기억 #옛사진 #SINE1968 #근로자회관부지/ 안양4동 중앙성당 앞에 근로자회관(현 가톨릭관)을 짓기 이전 모습으로 사진 뒤 왼쪽에 종탑이 보이는 교회가 안양중앙교회의 옛 예배당이고 오른쪽 나무들 사이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한국스레트 고려석면 안양공장이다. 사진 왼쪽에는 안양유치원 초창기 건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안양 도심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중앙성당과 2001아울렛 주변은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2018-2019년에는 조선일보 주최의 전국 밤줍기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역사 기록을 보면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 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했으며,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는데 현 중앙성당 건너편 가톨릭회관 뒷 마당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밤줍기 대회는 밤을 줍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920-3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았기에 습률대회를 명분으로 수백명의 여성(여류 명사)들이 전세낸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안양으로 나들이를 나와 서로 교재하고 친목을 나누고 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행사를 언론사에서 직접 주관했는데 행사 참가를 꺼리는 경우가 적지않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자녀와 동반 참석토록 하고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재미있는 유희와 갖가지 상품과 경품도 마련하는 등 나들이 행사를 즐겁게 했다네요.

참고 글: 1920-30년대 안양에서 전국 부인 밤줍기대회 열렸다. ://ngoanyang.or.kr/2136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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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87년 6월의 안양은 민주화운동 열기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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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이와관련 안양군포의왕지역 현장에서는 민주화 열기가 보다 일찍  솟구쳤다. 이에 지난 200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 안양군포의왕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안양권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시점을 1987년 보다 2년 앞인 1985년 중반 이후로 정의했다. 사진은 1987년 6웧 어느날 안양 일번가(우측) 입구와  중앙시장 1문(좌축) 앞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1987년 6월의 안양은 뜨거웠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체제를 타도를 위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던 시기로 1980년 초반 안양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의 JOC(가톨릭노동청년회) 교육과 노동상담 및 교육, 공간대여를 통한 일부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1984년 말∼1985년 이후 사업장 중심 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단위 사업장에서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1985년부터 노동상담소와 민중교회(한무리·돌샘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사업장에서 적발돼 해고당하기 시작한 활동가들은 대부분 보안유지를 위해 써클 형태로 또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운동에 나섰다.

 

안양지역에서의 87년 6월 항쟁

안양에서는 6월 항쟁 기간중 6월 19일, 6월 23일, 6월 26일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6월 19일과 6월 26일 집회는 안양권역의 노동운동 그룹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개최된 집회였고, 6월 23일 시위는 경기대와 한신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6월 항쟁 당시 초기 안양에서는 이렇다 할 집회와 시위가 없어 경찰 병력이 전부 서울로 차출되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집회 성공의 주요 요인이다. 시민의 호응이 좋아 집회는 활기가 있었는데 안양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분위기가 주도해 갔었다.

안양에서의 첫 대중 집회인 6월 19일 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 … 약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 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 1987년 8월호

6월 23일 집회는 조직적이었다. 안양 중앙시장을 돌면서 동참자를 모으고 시위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중앙로에서 한신대 경기대 학생 2백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집회는 약 3시간가량 계속됐으며, 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됐다.

6월 26일 집회는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6·26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 맞물려 무려 2만 명의 시민들이 안양 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만안구청을 지나 (구)안양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면서 모든 차량이 끊긴 일종의 '해방의 거리'로 만들었다.

26일 오후 안양CGV앞(당시 안양 삼원극장) 사거리에 하나 둘 자연스럽게 모여들기 시작한 2만여 시민들은 서안양우체국(안양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만안구청(안양시청)과 성결대앞 사거리(안양경찰서) 까지 행진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당시 전국적인 집회가 열리면서 안양 경찰 병력이 서울과 수원으로 출동하면서 안양에는 최소한의 경찰 병력만 남은 상태였다. 밤 9시경 현 삼원극장 앞 중앙로에 소수의 시위대가 들어서자 인도에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환영하며 집회가 본격화되기 시작됐다.

이날 시위에는 노동자, 학생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무등 태운 일반시민까지 시위에 참여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리 시위로 확대되며 민정당 지구당사 화염병투척과 안양경찰서 담벼락을 무너트리고 경찰관사가 전소됐다.

밤 10시 30분경 시민들이 전투경찰을 무장해제시키자며 전경대열에 돌격을 감행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전경들은 도망을 쳤고, 성난 시위군중들은 "민정당사로 가자"고 외치면서 행진으로 바뀌었다.

투석과 화염병 세례에 안양시 안양4동 중앙로 옆에 자리했던 민정당 안양지구당사가 불타고 맞은편의 경찰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국계 은행인 한미은행에 돌이 날아갔으며, "시청으로 가자"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인파는 서안양우체국을 거쳐 안양8동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삽시간에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에워쌌다. 당시 시청 마당에는 공무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상태로 시위대 일부가 철문을 흔들고 돌멩이도 던졌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이 "여기는 시청이다. 안양경찰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방향을 돌렸다.

안양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노동부 안양출장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져 불태워졌으며 밤 11시 20분경 시위대는 안양경찰서에 육박하면서 경찰과의 본격적인 대치와 충돌이 발생하면서 다수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경찰서 벽돌담을 넘어뜨리고 경찰서 관내에 있던 관사가 불탔다.

당시 시간은 새벽 2시경으로 안양경찰서가 함락될 상황에 다급해진 경찰은 각지에서 지원병력을 급파하고 나섰다. 밤늦은 시각 수원에서 투입된 경찰병력은 시위대를 해산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았고 3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경찰의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시위대는 안양세무서 뒷길과 만안로를 우회하여 다시 안양역으로 재차 집결했다. 100여명의 시위대는 새벽 2시30분경 안양역 옆에 있는 역전파출소를 불태웠다. 당시 불길이 옆 상가로 번지려 하자 시위대는 소화기를 찾아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26일 시위대의 공격에 불탄 곳은 파출소뿐만이 아니다. 안양 민주정의당 당사와 노동부 안양 출장소도 불길에 휩싸였다. 노동부 안양출장소가 불에 탄 원인은 그동안 출장소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회사 측 편들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새벽 2시를 넘기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귀가했으나 중앙로 도로변에 머물던 200∼300명의 시민은 중앙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새벽 4시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대투쟁과 다양한 공개 사회운동 확산

안양권에서의 87년 6월 항쟁은 곧바로 사업장에서의 노조설립과 근무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7·8·9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어 한 묶음으로 진행되고, 다양한 문화운동을 꽃피우면서 안양지역의 사회운동이 만개하는 시기가 열리는 촉진제였다.

87년 7월 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한 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은 만도기계, 태광산업, 삼덕제지,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유신중전기, 금성전선, (주)농심, 안양전자, 다우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으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근로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흩어지면 노예되고 뭉치면 인간된다", "8시간 노동으로 생계비 보장받자" 등의 공통된 플래카드가 각 사업장마다 내걸리고 난생처음 해보는 파업은 훌륭한 민주주의의 학교로 자주적 인간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이 노조설립 등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현장활동가들은 안양지역노동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출범하였고 안양노동자회가 결성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민민운동) 단체들이 조직, 결성되고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1987년 하반기부터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의 문화단체가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면서 1988년에는 이들이 연대체로 결성하여 안양문화운동연합으로 발전하면서 안양권에서의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꽃피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교회권도 경서EYC 경서목정평을 중심의 활동이 대통령선거 시기에 민주쟁취 경서지역 기독교공대위를 통해 공정선거감시운동으로 발전하고, 박달교회, 살림교회, 우리교회 등 민중교회가 창립되면서 1988년에는 '안양지역민중교회협의회'라는 연대기구체로 발전하였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의 함성은 군사독재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민주주의 꽃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차원이 아닌 '사람의 세상'을 원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광장이, 모든 길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꽃을 활짝 피우고 함께 민중이 함께 모일 때 '불가능'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싹틔튀운 계기를 만들어 준 세상을 바꾼 함성의 주인공, 그들은 바로 시민들이었다.

[옛사진]통일호 열차 서던 1980년대 초 군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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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통일호 열차 서던 1980년대의 군포역(軍浦驛) 모습으로 사진속 역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신축한 역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군포시민 심태섭님이 소장한 것으로 군포시민신문의 '군포옛삶터사진展-10회'를 통해 소개된 자료이다. 

군포시 당동에 있는 군포역은 대한제구 당시인 광무 5년(1905년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연 경부선의 철도역으로 1905년 군포장역으로 개업하였다가 1937년에 군포역으로 변경, 1974년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전철이 운행하기 전에는 여객열차도 정차했었지만 현재는 수도권 1호선 완행과 서울-천안 급행열차가 정차한다. 한때 여객열차가 정차하던 역이기에, 역사 남쪽으로 과거에 사용하던 저상 승강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세대라는 부역명이 있었으나 당정역이 개업한 이후 한세대가 군포역보다 당정역이 더 가까워서 한세대 부역명은 폐기되었다.

1905년 1월 1일 : 군포장역(軍浦場驛) 영업 개시
1937년 1월 1일 :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 변경[1]
1938년 5월 1일 : 역사 신축 준공
1974년 8월 15일 :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1980년 2월 1일 : 화물 취급 중지[2]
1988년 12월 10일 : 현 역사 신축 준공
1999년 6월 1일 : 통일호 여객 취급 중지
2009년 12월 1일 :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2014년 10월 31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3]
2019년 12월 30일 : 서울-천안 급행 폐지

 

군포장의 변천 과정 https://anyangbank.tistory.com/2383

[옛사진]소외된 이읏을 위한 공간, 1984년의 안양근로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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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원도심 한복판인 안양4동(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3)에 있던  ‘안양근로자회관’(현 가톨릭복지회관)의 1984년 건물 모습으로 1969년부터 2007년까지 근로청소년, 노동조합, 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던 공간이다.
안양은 1960년대 공업지대와 함께 급성장을 하던 때였다. 정부가 이끈 경제시책으로 안양 지역에는 섬유공장, 제지공장 등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많은 공장이 생기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로자들이 살 곳을 찾자 안양 지역의 많은 집들이 남는 방을 하숙이나 자취방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많은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섬유, 제지 등 경공업이 많았던 만큼 여성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지 못해 지역사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주임신부였던 정원진(루까) 신부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기숙사 시설을 만들자고 교구에 건의했다.
1960년대 말 수원교구는 갓 설정된 가난한 교구였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구청도 외국의 원조를 받은 기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기숙사 시설 신축사업에 나선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또 그러한 노력을 통해 선교하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협조를 요청해 AFI는 독일인 선교사 서말가리와 한성인(벨따)를 파견한다. 말가리다와 한 벨따는 성당 한귀퉁이에 살면서 일용노동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교구는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땅을 제공하고 외국 기관의 원조와 외국인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도착하면서 천주교 수원교구가 제공한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부지에 여자청소년기숙사와 강당을 갖춘 근로자회관을 신축해 1969년 9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독일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근로자회관 봉헌미시를 통해 개관식을 갖는다.
이후 1976년에는 증축을 통해 남성근로자를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근로자복지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근로청소년기숙사의 경우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었던 만큼,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의 역할을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청소년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인간적 성숙을 위한 공동체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양교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노동교실, 신앙 교육 등을 제공하는 등 근로청소년 기숙사를 거쳐간 근로자 수만도 2000여명에 달한다.
또 근로자회관은 노둥자 및 일반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에도 나서 노동법 강좌 등 노동교육과 당시 국내에서는 상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노동관련 영화상영, 서예, 꽃꽂이, 포크댄스, 그림교실, 판화교실, 탈춤, 사뮬놀이 등 사회교육프로그램, 노조 창립, 워크셥 및 세미나, 교육 등 옥내외 행사가 수월치 않았던 시기에 지역사회 단체들에 공간 제공, 근로자가정 임대주택사업, 무료급식소 등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들이 펼쳤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 • 군포 • 의왕)은 서울 주변에 위치하면서  1980년 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 또는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활동이 거의 부재한 지역이었다. 대 학에서의 민주화 시위도 없었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의 활동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조건하에서 1982년부터 장내동성당의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 JOC(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1983~1987년 사이에 노동법 강좌 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활동은 안양권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근로자 문제가 점차 해소되자 회관은 빈민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1980년에는 근로자 가정을 위한 임대용주택(10가구)과 상가를 신축해 청소년기숙사에 살았던기숙생이 결혼후 가정을 꾸린 후 살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1990년도에는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룰 통해 매일 점심에 따뜻한 한끼를 제공했다.
이후 공간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운영자의 결정에 따라 1998년 기숙사사업을 종료하고 ‘천주교 수원교구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비롯 가정폭력상담소 및 여성쉼터 등의 사업 중심으로 변화를 꽤해 운영하다가  2007년 12월 31일을 기해 39년의 지역사회 및 노동사업을 마감하고 문을 닫고 수원교구의 요구에 의해 천주교 수원교구로 넘어간다.
근로자회관부터 전진상복지관까지 40여년 안양지역 사회속에서 펼쳐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 독일 십자훈장, ‘좋은 한국인 대상’, ‘아름다운 사람상’ 등을 복지관 대표를 통해 받기도 했다.
한편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은 2009년 교구의 사회복지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2년여 진행한후 2009년 12월 16일 교구사회복지의 중심기관인 가톨릭복지회관으로 재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회관에는 교구 사회복지회·교정사목위원회·이주사목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교구 사회복지회는 산하 130여 곳의 사회복지시설을 관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수형시설에 갇힌 수용자들을 돌보는 교정사목위원회와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이주사목위원회도 회관에 있다. 또한 회관은 단순히 교구 사회복지 지원을 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회관내에 안양시장애인보호작업장과 안양자활센터를 갖췄고 교구 장애인선교회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선데이아카데미,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장소로 회관을 제공한다.
근로자회관과 전진상복지관이 그랬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만나고 나눔을 실천하는 구심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 회관에서는 교구 사회복지회 수익사업단 ‘착한 사마리아인’의 매장도 운영되고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화원), ‘엔젤마트’(슈퍼마켓), ‘사랑의 국수가게 2호점’, ‘두드림과 열림’(자활매장), ‘카페 뽀르트’ 등 회관에 입점한 매장들의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가톨릭복지회관 축복식에서 “이 회관은 사회복지의 행정적 기능뿐 아니라 어려운 이들의 피신처 역할도 하는 행정과 사업 실천이 병행되는 공간”이라며 “회관을 통해 교구 내 지역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빛, 사랑이 전해지고 하느님의 정신이 널리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옛사진]1960년대 안양 사람들 결혼식장으로 인기였던 안양기독보육원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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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예배당 #교회 #결혼식장 #안양기독보육원 #좋은집 #양명고/ 안양2동 안양천변에 위치한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 경내에 있던 예배당(교회)으로 현재 양명고교 테니스장 자리에 있던 건물로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는 1960년대 기록 사진이다.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후 미군이 안양기독보육원에 지어준 교회로 추정된다. 대형 건물이 별로 없던 시절인 1950-1960년대 안양읍민뿐 아니라 시흥군민들이 신식결혼식장으로 자주 애용하던 곳으로 실내가 원목 나무 벽면으로 장식되고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는 등 분위기가 깔끔하고 좋아 종교 유무를 떠나 인기를 누렸던 공간이었다.

교회는 1978년 무렵까지도 있다가 안타깝게도 철거되어 사라졌는데 당시의 모습를 기억하는 6-70대 어르신들은 교회 외관은 소박했으며 실내는 벽면과 장식들이 나무로 짜여져 매우 아주 아름다웠다고 회고한다. 

이 교회에는 70년대까지 시목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안양ymca이사장을 역임하셨던 김영일 목사님의 부친이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제 기억으로는 만안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이 교회에서 열린 누군가의 결혼식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갔으며 답례품으로 받은 달콤한 모찌떡을 받았었다. 앨범을 둘춰보니 당시 아버지와 함께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 있는데 교회의 왼쪽모습이 기록돼 있다.

한편 교회가 있던 곳은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1936년 서울에 있던 경성기독보육원이 옮겨와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으며.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는 등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개교했다. 양명고 졸업생들 사진을 보면 교회는 학교 건립 이후인 1978년에도 존재했으나 이후 80년대 초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다. 교회가 정확히 언제 허물어졌는지 학교측에 확인해야 알 수 있을듯 싶다.

[옛사진]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0년대 중반 안양읍내에서 수암천을 건너는 다리 양지교(현 양지4교) 부근의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시가 다시 뜯어내 다리 왼쪽 상류는 철거됐고 오른쪽은 아직 복개돼 주차장 용도로 사용중인데 시는 복개된 남은 구간도 철거한다는 계획지요. 하천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위쪽은 안양2동으로 당시에는 북부동이라 불리우던 안양읍내 중심으로 골목에는 단독주택, 구도로(만안로)와 중앙로변에는 교회, 아아스케끼공공장, 제재소와 목재소, 철공소 등과 쌀창고와 정미소, 마부가 운행하는 마차대기소 등이 있었지요.  다리 위쪽으로는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공장안으로 연결되는 철길, 다리 아래쪽으로 안양역에서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병목안행 철길에는 80년대 초반까지 자갈을 실은 화물열차가 운행됐는데 화물열차가 중앙로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살짝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을 갈아서 칼이나 표창을 만들어 놀기도 했던 추억이 있지요. 

1934년 경부선 복선 공사시 레일용 자갈 채취를 위해 놓여진 병목안행 철길은 8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다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일부 철길은 도로로 확장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그나마 안양9동 금융아파트 뒤 100미터 구간에 이제 삭고 썩어 흔적만 알수있는 나무침목과 철도 레일이 남아있어 과거의 역사를 가늠케 합니다.

병목안행 철길을 철거하지 않아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병목안시민공원, 담배촌 수리산 천교성지, 가파른 동네 창박골까지 전차(트램)을 운행하면 지역교통 담당은 물론 색다른 관광거리도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도시 공상을 해봅니다. 

추억 담긴 얘기를 하다보니 잊었던 기억도 생각나네요, 다리밑에는 망태를 등에 메고 다니던 형님(?)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본거지였지요. 아치형 돌다리에는 문을 을 달아 마치 집같은 구조를 만들어 살았지요.  사진속 다리 우측으로 코너변에 있는 건물에는 호산나 시계점이 있었고, 사진 좌측으로 조그만 가면 원목이 철길에 쌓여있던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로 변전소(현 안양역전우체국 옆 모텔 자리)가 있었고 변전소 철망 옆으로 난 골목길은 안양중학교 가던 지름길이었지요. 그 길로 나오면 수암천을 건너는 아나방 다리가 있었고요. 가끔 철길에서는 보신탕용으로 개를 잡는 이들이 있어 등하교길에 눈을 찌푸리면도 구경했지요...또 1980년대 사진 좌측에는 구름다리라 불리우던 실내포장마차오오기찻길 골목 2층에는 길모퉁이카페, 사진 우측 기찻길 골목에는 방석집들이 쭈욱 있었지요.   

또다른 추억과 기억들이 생각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옛사진]1968년 안양 다운타운이었던 구시장-시대동(안양1동)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12.06 글씀/ #추억 #구시장 #시대동 #안양1동/
사진속 풍경은 1930-60년대 안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갔던 안양 시대동(현 안양1동) 구시장의 1968-69년 모습입니다. 사진속에 담긴 기록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땡땡땡 건널목(현 진흥육교자리)에서 비산동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 및 대림대쪽 방향으로 찍은 시장통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사진 좌측에는 양산을 쓰고 포대기로 어린이를 둘러맨 아주머니, 장바구니를 든 원피스 차림의 소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웃통은 훌러덩 벗은채 신발은 한쪽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는 어린이가 있고 사진 우측에는 비산동 방향으로 가는 마차 2대와 밀집모자를 쓰고 자전거 탄 남성이 보이고, 사진 중앙에는 군용트럭 한대가 달려오고 있네요. 

이곳 구시장(시대동)은 1968-9년 당시 안양읍내에서 가장 큰 번화가로 안양역에서  인덕원, 과천, 청계, 서울강남(말죽거리) 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이었으며 1950년대 이전 5일장이 서다 상설시장(1928년 1월28일 개서)이 형성된 곳이지요. 또 1929년 안양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며 1930-60년대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땡땡땡 철길(현 진흥육교 자리)을 건너면 안양역과 1번국도, 행정타운이, 시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시장을 지나고 안양천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를 건너면 수푸루지 마을(임곡마을)로 능선 사이 개울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산비탈(현재의 대림대학교)에는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요. 수푸루지 마을에서 자그마한 능선(이마트앞)을 돌아 언덕(안양운동장 남쪽)을 넘어가면 수촌마을이 나오고 인덕원을 지나 청계와 과천, 말죽거리로 갈 수 있었는데 안양(버스정류장_현 남부시장 문화철물옆)에서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현재의 진흥육교는 전철이 개통될 무렵인 1975년에 개설되었는데 육교가 놓여지기 이전 땡댕땡 건널목 좌우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건물들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광창라사, 안양 최초의 다방, 이발소, 중국집, 호떡집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기(전철) 위험 때문에 철길 횡단은 꿈도 못 꾸지만 당시 건널목에서 안양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옆은 주민들이 걸어다니던 통행로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기차가 오나 레일에 귀를 대고 전해지는 진동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레일에 못을 놓아 기차가 지나간후 납작해지면 이를 갈아 연필깍는 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공작소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사진속 죄측으로는 한국특수제지 공장으로 가던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골목길 양쪽으로는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었고 막걸리집이 다섯개가 있었다네요. 먹걸리집들은 한국특수제지 노동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들리는 단골 참새 방앗간이었다고 합니다.(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기억)
안양시장(구시장)은 안양천과 연접한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하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6.25전쟁이후 피난민들이 유입하며 판잣집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면서 상권이 이전하자 60년 중반이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후 시대동은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시장 주변에는 안양1동 주공뜨란채,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 부지에는 안양1동 삼성레미안, 태평방직 자리에는 안양1동 진흥아파트(현재 재건축 추진)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흔적도 사라지고 말지요.

 

시대동(구시장)
안양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사진]안양 일번가에 있던 1972년 안양경찰서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1972년 #안양1동 #옛안양경찰서 #중앙동/ 1970년대 안양 원도심(현 안양일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 건물의 모습으로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1972년 당시 시흥군청과 안양사무소 경계 골목(현 옛 서이면사무소 들어가는 길) 초입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과거로 되돌아보는듯 한 안양경찰서 건물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으로 당시 도로 앞에 있던 안양읍사무소도 기와 지붕을 얹은 2층으로 기억하는데 같이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재 60만 안양시민의 방범과 치안, 지역 교통을 책임지는 안양경찰서는 만안과 동안경찰서 2곳으로 1시 2경찰서 체계로 안양 토박이들 조차 안양 최초의 경찰서는 안양8동 명학역 옆에 있다 없어진 안양경찰서(현재 보라 오피스텔 신축중)가 첫 관서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이전인 1950-60년대에는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자료를 보면 안양경찰서의 첫 관서는 1945년 10월 21일 당시 금성방직 자리(현 대농단지)에 개서했으며 이후 1960년대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등과 함께 안양읍 안양리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시 안양1번가)로 이전해 문을 열지요.
당시 안양 중앙동은 구시장(시대동)과 새시장(장내동)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으로 안양역과 인접해 관공서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등이 밀집한 곳으로 다운타운이었지요.
당시 안양경찰서의 위치는 현재의 주소지로 보면 안양로 292번길 미엔미케익전문점 좌우가 해당됩니다. 또 경찰서 좌측으로는 의용소방대 건물이 잇었는데 현재의 피자헛 안양점 건물이 있는 자리로 뒷뜰에는 비상을 알리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당시 안양 중앙동에는 관공서와 양화점, 양복점 , 의원(병원), 중국 화상이 운영하던 중국집 2-3곳 등이 있었는데 경찰서 앞으로는 안양읍사무소(롯데리아 주변), 그 윗쪽으로 시흥군청(현 삼원프라자호텔 주변)이 있었지요.
이후 1980년대 중반 안양경찰서는 안양시청의 안양6동 이전과 함께 명학동(현 안양6동. 신필림아트센터)으로 이전하였으며 평촌 신도시 건설이후 1999년 11월 3일 다시금 평촌으로 이전하지요/ 사진출처; 국기기록원(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1103689532&dsid=000000000001&gubun=search)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 있었다(1971년) https://anyangbank.tistory.com/937

1970년대 안양1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와 역사 https://anyangbank.tistory.com/3070

1973년의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https://anyangbank.tistory.com/1218

1970년 안양의용소방대와 사이렌탑 https://anyangbank.tistory.com/1219

1970년대 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장비와 복장 https://anyangbank.tistory.com/1075

1970년대초 안양1동 골목길과 절미운동 https://anyangbank.tistory.com/652

1973년, 안양읍내 시흥군 관공서 거리 풍경 https://anyangbank.tistory.com/376

1970년 초반 안양읍내-현 2001아울렛 사거리 https://anyangbank.tistory.com/386

1968년 안양읍내(1.3.4동) 항공사진  https://anyangbank.tistory.com/712

 

[옛사진]1970년대 안양 망해암행 안양천 건너던 줄배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응답하라 #1970 #안양 #줄배 #양명교 #안양천 #나무다리 =/ 1970년대 초 안양천을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 양명교가 놓여진 곳인데 하천을 건너 망해암, 기독보육원, 삼영농장 등을 가려면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지름길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시 자료를 보면 1992년 안양천의 BOD(생화학적 산소요구량) 농도는 66.7ppm으로 양재천 16ppm, 중랑천 14.3ppm, 탄천 3.9ppm 등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는데, 2001년부터 시작한 안양천살리기 사업이 결실을 맺으며 2012년 측정한 안양천의 수질은 BOD는 3.9㎎/1으로 2급수를 유지하고 있지요.
따라서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