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옛사진]1960년대 안양 사람들 결혼식장으로 인기였던 안양기독보육원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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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예배당 #교회 #결혼식장 #안양기독보육원 #좋은집 #양명고/ 안양2동 안양천변에 위치한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 경내에 있던 예배당(교회)으로 현재 양명고교 테니스장 자리에 있던 건물로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는 1960년대 기록 사진이다.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후 미군이 안양기독보육원에 지어준 교회로 추정된다. 대형 건물이 별로 없던 시절인 1950-1960년대 안양읍민뿐 아니라 시흥군민들이 신식결혼식장으로 자주 애용하던 곳으로 실내가 원목 나무 벽면으로 장식되고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는 등 분위기가 깔끔하고 좋아 종교 유무를 떠나 인기를 누렸던 공간이었다.

교회는 1978년 무렵까지도 있다가 안타깝게도 철거되어 사라졌는데 당시의 모습를 기억하는 6-70대 어르신들은 교회 외관은 소박했으며 실내는 벽면과 장식들이 나무로 짜여져 매우 아주 아름다웠다고 회고한다. 

이 교회에는 70년대까지 시목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안양ymca이사장을 역임하셨던 김영일 목사님의 부친이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제 기억으로는 만안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이 교회에서 열린 누군가의 결혼식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갔으며 답례품으로 받은 달콤한 모찌떡을 받았었다. 앨범을 둘춰보니 당시 아버지와 함께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 있는데 교회의 왼쪽모습이 기록돼 있다.

한편 교회가 있던 곳은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1936년 서울에 있던 경성기독보육원이 옮겨와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으며.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는 등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개교했다. 양명고 졸업생들 사진을 보면 교회는 학교 건립 이후인 1978년에도 존재했으나 이후 80년대 초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다. 교회가 정확히 언제 허물어졌는지 학교측에 확인해야 알 수 있을듯 싶다.

[옛사진]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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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안양읍내에서 수암천을 건너는 다리 양지교(현 양지4교) 부근의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시가 다시 뜯어내 다리 왼쪽 상류는 철거됐고 오른쪽은 아직 복개돼 주차장 용도로 사용중인데 시는 복개된 남은 구간도 철거한다는 계획지요. 하천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위쪽은 안양2동으로 당시에는 북부동이라 불리우던 안양읍내 중심으로 골목에는 단독주택, 구도로(만안로)와 중앙로변에는 교회, 아아스케끼공공장, 제재소와 목재소, 철공소 등과 쌀창고와 정미소, 마부가 운행하는 마차대기소 등이 있었지요.  다리 위쪽으로는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공장안으로 연결되는 철길, 다리 아래쪽으로 안양역에서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병목안행 철길에는 80년대 초반까지 자갈을 실은 화물열차가 운행됐는데 화물열차가 중앙로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살짝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을 갈아서 칼이나 표창을 만들어 놀기도 했던 추억이 있지요. 

1934년 경부선 복선 공사시 레일용 자갈 채취를 위해 놓여진 병목안행 철길은 8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다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일부 철길은 도로로 확장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그나마 안양9동 금융아파트 뒤 100미터 구간에 이제 삭고 썩어 흔적만 알수있는 나무침목과 철도 레일이 남아있어 과거의 역사를 가늠케 합니다.

병목안행 철길을 철거하지 않아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병목안시민공원, 담배촌 수리산 천교성지, 가파른 동네 창박골까지 전차(트램)을 운행하면 지역교통 담당은 물론 색다른 관광거리도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도시 공상을 해봅니다. 

추억 담긴 얘기를 하다보니 잊었던 기억도 생각나네요, 다리밑에는 망태를 등에 메고 다니던 형님(?)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본거지였지요. 아치형 돌다리에는 문을 을 달아 마치 집같은 구조를 만들어 살았지요.  사진속 다리 우측으로 코너변에 있는 건물에는 호산나 시계점이 있었고, 사진 좌측으로 조그만 가면 원목이 철길에 쌓여있던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로 변전소(현 안양역전우체국 옆 모텔 자리)가 있었고 변전소 철망 옆으로 난 골목길은 안양중학교 가던 지름길이었지요. 그 길로 나오면 수암천을 건너는 아나방 다리가 있었고요. 가끔 철길에서는 보신탕용으로 개를 잡는 이들이 있어 등하교길에 눈을 찌푸리면도 구경했지요...또 1980년대 사진 좌측에는 구름다리라 불리우던 실내포장마차오오기찻길 골목 2층에는 길모퉁이카페, 사진 우측 기찻길 골목에는 방석집들이 쭈욱 있었지요.   

또다른 추억과 기억들이 생각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옛사진]1968년 안양 다운타운이었던 구시장-시대동(안양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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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글씀/ #추억 #구시장 #시대동 #안양1동/
사진속 풍경은 1930-60년대 안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갔던 안양 시대동(현 안양1동) 구시장의 1968-69년 모습입니다. 사진속에 담긴 기록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땡땡땡 건널목(현 진흥육교자리)에서 비산동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 및 대림대쪽 방향으로 찍은 시장통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사진 좌측에는 양산을 쓰고 포대기로 어린이를 둘러맨 아주머니, 장바구니를 든 원피스 차림의 소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웃통은 훌러덩 벗은채 신발은 한쪽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는 어린이가 있고 사진 우측에는 비산동 방향으로 가는 마차 2대와 밀집모자를 쓰고 자전거 탄 남성이 보이고, 사진 중앙에는 군용트럭 한대가 달려오고 있네요. 

이곳 구시장(시대동)은 1968-9년 당시 안양읍내에서 가장 큰 번화가로 안양역에서  인덕원, 과천, 청계, 서울강남(말죽거리) 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이었으며 1950년대 이전 5일장이 서다 상설시장(1928년 1월28일 개서)이 형성된 곳이지요. 또 1929년 안양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며 1930-60년대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땡땡땡 철길(현 진흥육교 자리)을 건너면 안양역과 1번국도, 행정타운이, 시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시장을 지나고 안양천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를 건너면 수푸루지 마을(임곡마을)로 능선 사이 개울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산비탈(현재의 대림대학교)에는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요. 수푸루지 마을에서 자그마한 능선(이마트앞)을 돌아 언덕(안양운동장 남쪽)을 넘어가면 수촌마을이 나오고 인덕원을 지나 청계와 과천, 말죽거리로 갈 수 있었는데 안양(버스정류장_현 남부시장 문화철물옆)에서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현재의 진흥육교는 전철이 개통될 무렵인 1975년에 개설되었는데 육교가 놓여지기 이전 땡댕땡 건널목 좌우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건물들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광창라사, 안양 최초의 다방, 이발소, 중국집, 호떡집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기(전철) 위험 때문에 철길 횡단은 꿈도 못 꾸지만 당시 건널목에서 안양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옆은 주민들이 걸어다니던 통행로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기차가 오나 레일에 귀를 대고 전해지는 진동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레일에 못을 놓아 기차가 지나간후 납작해지면 이를 갈아 연필깍는 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공작소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사진속 죄측으로는 한국특수제지 공장으로 가던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골목길 양쪽으로는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었고 막걸리집이 다섯개가 있었다네요. 먹걸리집들은 한국특수제지 노동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들리는 단골 참새 방앗간이었다고 합니다.(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기억)
안양시장(구시장)은 안양천과 연접한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하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6.25전쟁이후 피난민들이 유입하며 판잣집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면서 상권이 이전하자 60년 중반이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후 시대동은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시장 주변에는 안양1동 주공뜨란채,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 부지에는 안양1동 삼성레미안, 태평방직 자리에는 안양1동 진흥아파트(현재 재건축 추진)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흔적도 사라지고 말지요.

 

시대동(구시장)
안양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사진]안양 일번가에 있던 1972년 안양경찰서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1972년 #안양1동 #옛안양경찰서 #중앙동/ 1970년대 안양 원도심(현 안양일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 건물의 모습으로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1972년 당시 시흥군청과 안양사무소 경계 골목(현 옛 서이면사무소 들어가는 길) 초입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과거로 되돌아보는듯 한 안양경찰서 건물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으로 당시 도로 앞에 있던 안양읍사무소도 기와 지붕을 얹은 2층으로 기억하는데 같이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재 60만 안양시민의 방범과 치안, 지역 교통을 책임지는 안양경찰서는 만안과 동안경찰서 2곳으로 1시 2경찰서 체계로 안양 토박이들 조차 안양 최초의 경찰서는 안양8동 명학역 옆에 있다 없어진 안양경찰서(현재 보라 오피스텔 신축중)가 첫 관서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이전인 1950-60년대에는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자료를 보면 안양경찰서의 첫 관서는 1945년 10월 21일 당시 금성방직 자리(현 대농단지)에 개서했으며 이후 1960년대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등과 함께 안양읍 안양리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시 안양1번가)로 이전해 문을 열지요.
당시 안양 중앙동은 구시장(시대동)과 새시장(장내동)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으로 안양역과 인접해 관공서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등이 밀집한 곳으로 다운타운이었지요.
당시 안양경찰서의 위치는 현재의 주소지로 보면 안양로 292번길 미엔미케익전문점 좌우가 해당됩니다. 또 경찰서 좌측으로는 의용소방대 건물이 잇었는데 현재의 피자헛 안양점 건물이 있는 자리로 뒷뜰에는 비상을 알리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당시 안양 중앙동에는 관공서와 양화점, 양복점 , 의원(병원), 중국 화상이 운영하던 중국집 2-3곳 등이 있었는데 경찰서 앞으로는 안양읍사무소(롯데리아 주변), 그 윗쪽으로 시흥군청(현 삼원프라자호텔 주변)이 있었지요.
이후 1980년대 중반 안양경찰서는 안양시청의 안양6동 이전과 함께 명학동(현 안양6동. 신필림아트센터)으로 이전하였으며 평촌 신도시 건설이후 1999년 11월 3일 다시금 평촌으로 이전하지요/ 사진출처; 국기기록원(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1103689532&dsid=000000000001&gubun=search)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 있었다(1971년) https://anyangbank.tistory.com/937

1970년대 안양1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와 역사 https://anyangbank.tistory.com/3070

1973년의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https://anyangbank.tistory.com/1218

1970년 안양의용소방대와 사이렌탑 https://anyangbank.tistory.com/1219

1970년대 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장비와 복장 https://anyangbank.tistory.com/1075

1970년대초 안양1동 골목길과 절미운동 https://anyangbank.tistory.com/652

1973년, 안양읍내 시흥군 관공서 거리 풍경 https://anyangbank.tistory.com/376

1970년 초반 안양읍내-현 2001아울렛 사거리 https://anyangbank.tistory.com/386

1968년 안양읍내(1.3.4동) 항공사진  https://anyangbank.tistory.com/712

 

[옛사진]1970년대 안양 망해암행 안양천 건너던 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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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0 #안양 #줄배 #양명교 #안양천 #나무다리 =/ 1970년대 초 안양천을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 양명교가 놓여진 곳인데 하천을 건너 망해암, 기독보육원, 삼영농장 등을 가려면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지름길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시 자료를 보면 1992년 안양천의 BOD(생화학적 산소요구량) 농도는 66.7ppm으로 양재천 16ppm, 중랑천 14.3ppm, 탄천 3.9ppm 등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는데, 2001년부터 시작한 안양천살리기 사업이 결실을 맺으며 2012년 측정한 안양천의 수질은 BOD는 3.9㎎/1으로 2급수를 유지하고 있지요.
따라서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옛사진]1956년 미군과 외국원조단체에서 지어준 안양기독보육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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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안양 #양명고 #기독보육원 #안양2동 #1956년/ 

현재 양명고 뒷쪽에 있는 건물(수리 공구 창고 영선실)로 한국 전쟁이후 경제,사회, 정치적으로 어렵고 취약하고 혼란스러운시기였기에 외국원조단체의 자선구호활동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다. 미군도 보육원 신축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기독보육원 신축 건물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사진은 1956년 4월 10일 준공식에서 오긍선 기독보육원 설립자와 후원자들이 건물앞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미군고 외국 후원자들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지요.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1동은 사진속 건물로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안양으로서는 문화유산감으로 보존가치가 높지만 시급히 수리해야 할 곳이 많은 상태로 보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사 등이 자주 열렸지요.

특히 내부가 전부 나무로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 앨범속 빛바랜 흑백 사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0년 말 무렵 이곳 예배당에서 있었던 결혼식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네요.

양명고에는 수령이 100년이 넘는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안양2동 주민지차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귀연 전 위원장은 과거 정조대왕 능행차길이 이곳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즉 한양을 출발한 능 행차가 노량진을 지나고 만안교를 지나 보육원 옆 야산(동네 어른들은 호랑이 꼬리 부분-관악산)을 끼고 돌아 이곳을 통과해 안양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좋은집과 양명고 자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던 것으로 예기되고 있습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양명고와 바로 옆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부지는 1918년 서울에서 경성기독보육원으로 출발한 고아원이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정작 안양시와 지역문화계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 싶네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옛사진]1990년대 안양 호계2동 수령 250년 느티나무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옛사진]1990년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90년 중반에 찍은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동네의 정자나무이자 수호신으로 250년을 살다가 고사한 느티나무가 베어지기 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현재 호계2동 버스정류장앞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속 느티나무가 있는 위치는 현재 호계동시외버스정류장과 육교 중간(안양시 경수대로 717 건물 앞)으로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 북쪽이며 도로는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이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속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끝자락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나무 가지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옆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한편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옛사진]1973년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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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73년 5월에 찍은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멀리 뒷쪽으로 수리산이 보이는 동네앞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이 담겨있는 흑백사진으로 현재 호계2동 버스정류장앞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으로 현재 호계동시외버스정루장과 육교 앞 일대의 옛 모습으로 사진속 어린이들이 노는 앞쪽 하얀 부분이 도로인데 이 도로는 향후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가 놓여지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 좌측 기와집 뒤로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사진속 호계동 느티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사진 찍을 당시 20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안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갑자기 이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무관심속에서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옛사진]1960년대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07.06/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60년대 중반 무렵의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초가집과 기와집,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블록 담장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담겨있는 동네의 흑백사진으로 호계2동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으로 사진 좌측 끝 지점은 지금의 호계시외버스정류장, 사진 우측의 스레이트지붕 집 앞은 지금의 호계육교 지점으로 추정됩니다. 한옥 뒤로는 나즈막한 야산이 보이는데 이 곳은 현재 호계현대홈타운 1차아파트 주변 지역으로 오밀조밀한 골목들과 단독주택, 연립 등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수 있지요. 

사진 앞쪽 넓은밭과 동네 중간으로는 트럭 한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 도로는 향후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가 놓여지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나무 한그루 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사진속 호계동 느티나무를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사진 찍을 당시 20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안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갑자기 이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무관심속에서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옛사진]1960년대 말 안양 호계2동(호계도서관 주변)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대 말 안양 호계2동(현 호계도서관 주변) 

 

#안양 #기록 #기억 #호계2동 #호계도서관 #안양교육청 #호계서원 #청감서원 #방죽말/

1960년대 말 무렵의 안양 호계2동  923-34 일대로 현 호계도서관 주변으로 호계2동 토박이인 인형수 전 안양시의원이 소장하고 사진입니다.
사진은 현재의 귀인로 앞 흥화아파트에서 북쪽의 호계도서관을 향해 찍은 것으로 산자락 위쪽  무덤 있는 곳이 현 호계도서관(과거 안양교육청)이며 산자락을 깍아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호계도서관(1998년 3월 3일 개관)은 대지면적 5,220㎡, 건축면적 2,865㎡로 16만건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1980년대 안양시교육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1997년 인수해 도서관으로 용도 변경한 것으로 사실 오래된 건물이지요.
사진 아래쪽에 보이는 한옥이 자리한 곳은 현 주소지로 경수대로 685번길 51로 추정되는데 2014년 11월 28일 65차 탐사길에 고즈녁한 옛 한옥의 형태를 사진에 담을수 있었는데 2019년 7월 6일 165차 탐사길에 다시 가보니 도시생활형 원룸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아쉽기만 합니다. 
옛 지도(1872년 지방지도-규장각)를 보면 호계2동 주변에는 조선시대 사창(社倉- 조선 시대,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 대여 기관)이 있었으며 1910년 이전에는 과천군 하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서이면으로 통합되면서 서이면사무소가 설치되는 등 1900년대 초반까지 인덕원 남쪽의 민백리, 갈산, 당산미, 도양리, 군포장, 귀인, 신촌, 신기 등의 마을을 아우르는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청감서원(호계서원)과 일제 강점기 초에는 낙영학교 등이 자리해 안양 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기도 하지요.

 

고 변원신 선생이 들려준 안양이야기

호계동은 예전에 방죽말, 샛터말, 안말 일대가 범이 많은 곳이라 하여 범계 즉 호계(虎溪)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 호계1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상서면 도양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안양면 호계리에서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2호에 따라 안양읍 호계리로 칭했다.

호계1동은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에 의해 호계동을 분동해 덕고개, 금성마을 지역을 호계1동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동으로는 갈산동, 서로 군포시 금정도, 남으로 호계3동, 북으로 호계2동이 각각 위치해있다.
덕고개는 현 호계신사거리에서 교도소로 향하는 고개를 일컬었으며 옛날 지방에서 인자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고가던 고개라 하여 덕고개라 지칭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만안로가 개설된 이래 1930년대에는 서울과 과천, 남양을 관통하는 도로 및 경수산업도로의 개설로 서울, 과천, 수원,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이 발달해 아파트가 급속히 들어서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증한 곳이다. 또 중앙제지, LG전선 등 60여 업체가 소재한 중소기업 밀집지역으로 평촌신도시의 배후 상가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호계1동은 안양지방 최초 개신교의 전래지로 알려지고 있다. 1895년 보고에 의하면 덕고개 출신 허대진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때 덕고개교회 즉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 따르면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리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호계2동은 호계동에서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 제600호로 분동해 안말, 방죽말, 샛터말 등의 지역이 호계2동이 되었다. 동으로 신촌동, 서로 안양8동, 남으로 호계1동, 북으로 비산2동이 위치했으며 안양교육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동양나이론, 신아화학 등이 운집한 경공업 지역으로 강남, 경남, 대림, 덕원, 현대 등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밀집한 신흥개발지역이며 주민의 구성은 토박이가 다수를 차지한다.
방죽을 쌓아 농경지에 유입해 농사짓기가 수월했던 곳으로 안양면 이전에는 과천면 상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에는 안양면의 전신인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한 곳으로 관가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호계2동은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숙종 42년 1716년에 창건되어 대원군 집정 때 1870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창강서원(또는 호계서원)과 옛 범계주민들이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이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초에 설립된 낙영학교는 비록 남아있지 않고 그 기록만 전해질 뿐이지만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안양교육의 발아지였다는 사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파연구소가 있고 호계체육관이 최근 건립되었다.


지명유래 - 방죽말(防築洞)
<호계 2동>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果川郡 下西面의 면사무소 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始興郡 西二面의 면사 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있 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堤壙條에 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하여 방 죽은 虎界에서 虎溪里競宇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祭를 지내지 않는다.

 

 

행정구역 개편 과정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금천현도(衿川縣圖)에 실려 있는데,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금천현에 속한 안양리(安養里)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천 쪽에서는 여지도서 이후 30년이 지난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이 지역 리(里)의 명칭이 보인다. 즉, 과천군 하서면 6개리 중의 하나로 안양리(安陽里)를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안양역 인근으로 추정된다. 즉, 안양리는 현재의 안양대교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지역에 나뉘어져 있었던 옛 안양리가 속했던 시흥군과 과천군의 경계는 안양유원지에서 발원해서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삼성천이었다. 역대로 삼성천 이북은 시흥에 속했고, 그 이남은 과천이 되는 것이다. 시흥에 속했던 안양리(현재의 석수동)가 안양에 속하게 되는 시기는 1963년 1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을 통하여 박달동과 함께 광명에서 안양읍으로 편입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안양의 뿌리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시흥이 아니라 과천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안양시 행정구역의 90% 이상을 아울렀던 과천군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온 것일까. 고종 32년(1895)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군은 오늘날의 안양, 군포, 의왕의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동작동, 흑석동, 노량진까지 또 동쪽으로는 양재동, 포이동에 이르는 7개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서쪽의 2개 면이 오늘날의 안양이 된 상서면(오늘날의 동안구)과 하서면(오늘날의 만안구)이다. 

당시 과천군 현황은 7개면 55동지로 이루어졌다.

- 상서면(마을수 4개); 일동, 이동, 외비산동, 내비산동

- 하서면(마을수 9개); 일동, 이동, 도양리, 호계리, 후두미동, 장내동, 발사동, 석수동, 안양리

- 군내면(마을수 9개); 현재 과천 일대

- 동면 (마을수 7개); 현재 양재,서초,우면 일대

- 남면 (마을수 10개); 현재 군포 일대

- 상북면(마을수 8개); 사당,방배,동작,반포 일대

- 하북면(마을수 8개); 흑석동 일대

 

1914년 4월 1일 과천, 시흥, 안산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군은 북면, 신동면, 동면, 서면, 과천면, 서이면, 남면, 수암면, 군자면으로 9면 83리를 편제하는 거대한 군이 된다. 이 과정에서 상서면과 하서면은 서쪽의 2개 면이 합쳤다고 해서 서이면(西二面)으로 변하게 된다. 당시 서이면은 5개리(호계리, 안양리, 일동리, 이동리, 비산리)를 관할하는데 면사무소를 지금의 호계동(현재의 호계도서관 인근)에 두었다. 3년 뒤인 1917년에 서이면 사무소는 오늘날 안양 1번가로 옮겨오게 되고, 이어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1949년 8월 14일 시흥군 안양읍, 1973년 7월 1일 안양시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