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10903]안양 근명중학교는 1962년 안양보육원에서 개교했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1.09.02/ #안양 #기록 #역사 #근명학교 #안양보육원/ 안양유원지 안양보육원에서 1962년 개교할 당시의 근명학교. 근명중학교는 1962년 3월 14일 재단법인 '근명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후 1962년 3월 14일 초대 이사장 사태현 선생 취임과 1962년 3월 17일 근명중학교 설립인가(각 학년 2학급)에 이어 1963년 03월 10일 초대 교장으로 이종범 선생이 취임한다.
학교 연혁 등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근명학교는 개교 당시 학교가 안양시 석수동 안양보육원내에 있었다.
이는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안양시건축사회와 공동으로 지난 2018년 10월 6일 140차 탐사로 안양예술공원 일대 근대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안양보육원 강당 건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또 근명중학교는 개교 당시 남녀가 입학했던 남녀공학으로 1회부터 9회 졸업생까지 남녀가 학교를 다녔는데 10회 부터 여학생만 입학하면서 1973년 3월 근명여자중학교로 개명됐다가 2009년 3월부터 다시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다시 근명중학교로 게명되었다.
근명중학교가 오랜기간 여자중학교로 인식되면서 초기 졸업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근명중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였지만 이들 기수는 그 어느 기수보다 우애가 두텁고 동창모임도 활동적으로 60대가 넘는 지금도 모임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근명학교는 1969년 들어 안양5동 현재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하는데 1971년 11월 11일 제 2대 설립자로 이영주 선생이 취임한다.
근명학교는 1972년 2월 12일 해암 박순천 이사장과 3대 교장으로 이말영 선생이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박순천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 1야당 여성 당수를 역임한 원로 정치인으로 박순천 여사가 은퇴 후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육영사업을 시작하자 학교 명성이 전국에 빨리 퍼진 것이다.
근명학교는 1973년 3월 1일 근명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한다. 당시는 은행은 물론 기업에서 회계를 담당하려며 주산, 부기, 타자 등이 필수적인 시절로 서울에서는 서울여상이, 경기도에 근명여상이 대표할 정도였다.
이후 업무환경이 컴퓨터 처리로 바뀌면서 상업고등학교는 학교이름을 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바꾸게 되면서 근명여자정보고등학교로 개명했다가 남녀 공학이 되면서 2019년 근명고등학교로 다시 개명된 것이다. 

 

[옛사진]1964년 앨범속에 담긴 안양유치원과 아이들 모습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1.04.15/ 기록 #역사 #기억 #추억 #졸업앨범 #안양유치원 #sine1964/ 안양유치원 6회 졸업생 어린이들. 1957-58년생으로 2021년 현재 63-64세가 되었을 어르신들의 유년시절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안양유치원 이야기
1964년 2월 졸업(6회)한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유년시절의 안양 똑딱이 얼굴도 있네요.
안양유치원은 천주교 안양성당(현중앙성당) 부설로 1956년에 개원한 안양 최초의 보육시설이지요. 초창기에는 신부님, 이후에는 수녀님이 원장을 맡았지요.
당시는 시흥군 관내 국민학교들이 안양국민학교에 모여 초등학교 연합체육대회를 개최했는데 안양유치원이 초청 받아 참여했고, KBS텔레비젼 출연을 위해 남산 사옥을 방문했던 생각도 나네요.
안양유치원은 현재 중앙성당안에 있지만 예전에는 안양 중앙성당앞 가톨릭회관(이전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내 뒷뜰 주차장 자리에 있었지요. 유치원 옆으로는 자그마한 동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옛사진]1960년대 구세군 안양교회 사람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59년 2월22일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 구세군 하비 사령관의 안양 방문 기념사진이다.

2021.04.14/ #기록 #기억 #옛날사진 #구세군안양영문 #sine1959-1963 #안양5동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1962년 안양급식소를 신설하는등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 많았으며 1978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안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구세군냄비 모금활동을 펼쳤다.

구세군안양교회
031-449-4201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707-128 구세군중앙교회
사진 출처: 구세군안양교회 http://www.ayksg.pe.kr ......

 

1961년 6월18일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신도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런듯 교회당을 판잣집처럼 나무로 지었다.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가 많았다.

 

1963년 3월29일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서 부흥회 기념사진(강사 이성옥사관). 

판잣집형태의 교회당 건물이 회칠을 한듯한 세멘트건물로 바뀌었다.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1962년 안양급식소를 신설하는등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 많았으며 1978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안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구세군냄비 모금활동을 펼쳤다.

 

1953년 성탄절날 안양5동 골목에 있던 구세군 안양교회에서의 찬양성가대 기념사진
1960년대 어느날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 긴줄을 섰다. 바구니, 솥단지 등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걸 보니 보릿고개 시절 보리쌀 등 구호물자를 타가려는듯 싶다.
1988년 10월30일완공한 3층 건물의 구세군 안양교회 새 성전 모습이다.

[ 옛사진]1961년 안양5동 골목에 있던 구세군 안양영문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1.04.06./ #기록 #기억 #옛날사진 #구세군안양영문 #sine1961 #안양5동/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에는 '한 손에 빵을, 한 손에 복음을이라는 슬로건이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세군의 장점은 기동력, 헌신과 복종, 단결심, 추진력 등을 꼽는다. 외형적으로는 군대 조직을 빌려 왔지만, 구세군엔 늘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서가 있다".
구세군이 태동한 데는 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사회적 모순이 불거지던 산업혁명기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당대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거리를 예배장소로 삼은 게 구세군이었다.
또 구세군을 생각하면 떠오는 게 '자선냄비'다. 1928년부터 시작된 자선냄비 모금은 이제 하나의 국민운동이 됐다. 많은 사람이 구세군을 종교단체가 아닌 복지단체로 오해하는 이유기도 하다.
구세군은 자선냄비를 통해 모은 기금으로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노인복지, 아동복지, 노숙인 자활, 에이즈 치료, 알코올 중독 치료, 다문화 가정 지원 등 사회복지 전 분야를 아우르며 전국 150여 개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 중이다.

구세군안양교회
031-449-4201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707-128 구세군중앙교회

사진 출처: 구세군안양교회 http://www.ayksg.pe.kr 

간단히 보기

[옛사진]1968년, 안양근로자회관이 들어서기전 주변 모습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기록 #기억 #옛사진 #SINE1968 #근로자회관부지/ 안양4동 중앙성당 앞에 근로자회관(현 가톨릭관)을 짓기 이전 모습으로 사진 뒤 왼쪽에 종탑이 보이는 교회가 안양중앙교회의 옛 예배당이고 오른쪽 나무들 사이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한국스레트 고려석면 안양공장이다. 사진 왼쪽에는 안양유치원 초창기 건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안양 도심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중앙성당과 2001아울렛 주변은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2018-2019년에는 조선일보 주최의 전국 밤줍기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역사 기록을 보면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 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했으며,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는데 현 중앙성당 건너편 가톨릭회관 뒷 마당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밤줍기 대회는 밤을 줍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920-3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았기에 습률대회를 명분으로 수백명의 여성(여류 명사)들이 전세낸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안양으로 나들이를 나와 서로 교재하고 친목을 나누고 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행사를 언론사에서 직접 주관했는데 행사 참가를 꺼리는 경우가 적지않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자녀와 동반 참석토록 하고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재미있는 유희와 갖가지 상품과 경품도 마련하는 등 나들이 행사를 즐겁게 했다네요.

참고 글: 1920-30년대 안양에서 전국 부인 밤줍기대회 열렸다. ://ngoanyang.or.kr/2136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간단히 보기

[옛사진]1987년 6월의 안양은 민주화운동 열기로 뜨거웠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이와관련 안양군포의왕지역 현장에서는 민주화 열기가 보다 일찍  솟구쳤다. 이에 지난 200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 안양군포의왕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안양권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시점을 1987년 보다 2년 앞인 1985년 중반 이후로 정의했다. 사진은 1987년 6웧 어느날 안양 일번가(우측) 입구와  중앙시장 1문(좌축) 앞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1987년 6월의 안양은 뜨거웠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체제를 타도를 위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던 시기로 1980년 초반 안양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의 JOC(가톨릭노동청년회) 교육과 노동상담 및 교육, 공간대여를 통한 일부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1984년 말∼1985년 이후 사업장 중심 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단위 사업장에서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1985년부터 노동상담소와 민중교회(한무리·돌샘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사업장에서 적발돼 해고당하기 시작한 활동가들은 대부분 보안유지를 위해 써클 형태로 또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운동에 나섰다.

 

안양지역에서의 87년 6월 항쟁

안양에서는 6월 항쟁 기간중 6월 19일, 6월 23일, 6월 26일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6월 19일과 6월 26일 집회는 안양권역의 노동운동 그룹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개최된 집회였고, 6월 23일 시위는 경기대와 한신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6월 항쟁 당시 초기 안양에서는 이렇다 할 집회와 시위가 없어 경찰 병력이 전부 서울로 차출되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집회 성공의 주요 요인이다. 시민의 호응이 좋아 집회는 활기가 있었는데 안양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분위기가 주도해 갔었다.

안양에서의 첫 대중 집회인 6월 19일 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 … 약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 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 1987년 8월호

6월 23일 집회는 조직적이었다. 안양 중앙시장을 돌면서 동참자를 모으고 시위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중앙로에서 한신대 경기대 학생 2백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집회는 약 3시간가량 계속됐으며, 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됐다.

6월 26일 집회는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6·26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 맞물려 무려 2만 명의 시민들이 안양 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만안구청을 지나 (구)안양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면서 모든 차량이 끊긴 일종의 '해방의 거리'로 만들었다.

26일 오후 안양CGV앞(당시 안양 삼원극장) 사거리에 하나 둘 자연스럽게 모여들기 시작한 2만여 시민들은 서안양우체국(안양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만안구청(안양시청)과 성결대앞 사거리(안양경찰서) 까지 행진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당시 전국적인 집회가 열리면서 안양 경찰 병력이 서울과 수원으로 출동하면서 안양에는 최소한의 경찰 병력만 남은 상태였다. 밤 9시경 현 삼원극장 앞 중앙로에 소수의 시위대가 들어서자 인도에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환영하며 집회가 본격화되기 시작됐다.

이날 시위에는 노동자, 학생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무등 태운 일반시민까지 시위에 참여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리 시위로 확대되며 민정당 지구당사 화염병투척과 안양경찰서 담벼락을 무너트리고 경찰관사가 전소됐다.

밤 10시 30분경 시민들이 전투경찰을 무장해제시키자며 전경대열에 돌격을 감행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전경들은 도망을 쳤고, 성난 시위군중들은 "민정당사로 가자"고 외치면서 행진으로 바뀌었다.

투석과 화염병 세례에 안양시 안양4동 중앙로 옆에 자리했던 민정당 안양지구당사가 불타고 맞은편의 경찰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국계 은행인 한미은행에 돌이 날아갔으며, "시청으로 가자"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인파는 서안양우체국을 거쳐 안양8동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삽시간에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에워쌌다. 당시 시청 마당에는 공무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상태로 시위대 일부가 철문을 흔들고 돌멩이도 던졌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이 "여기는 시청이다. 안양경찰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방향을 돌렸다.

안양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노동부 안양출장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져 불태워졌으며 밤 11시 20분경 시위대는 안양경찰서에 육박하면서 경찰과의 본격적인 대치와 충돌이 발생하면서 다수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경찰서 벽돌담을 넘어뜨리고 경찰서 관내에 있던 관사가 불탔다.

당시 시간은 새벽 2시경으로 안양경찰서가 함락될 상황에 다급해진 경찰은 각지에서 지원병력을 급파하고 나섰다. 밤늦은 시각 수원에서 투입된 경찰병력은 시위대를 해산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았고 3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경찰의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시위대는 안양세무서 뒷길과 만안로를 우회하여 다시 안양역으로 재차 집결했다. 100여명의 시위대는 새벽 2시30분경 안양역 옆에 있는 역전파출소를 불태웠다. 당시 불길이 옆 상가로 번지려 하자 시위대는 소화기를 찾아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26일 시위대의 공격에 불탄 곳은 파출소뿐만이 아니다. 안양 민주정의당 당사와 노동부 안양 출장소도 불길에 휩싸였다. 노동부 안양출장소가 불에 탄 원인은 그동안 출장소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회사 측 편들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새벽 2시를 넘기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귀가했으나 중앙로 도로변에 머물던 200∼300명의 시민은 중앙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새벽 4시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대투쟁과 다양한 공개 사회운동 확산

안양권에서의 87년 6월 항쟁은 곧바로 사업장에서의 노조설립과 근무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7·8·9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어 한 묶음으로 진행되고, 다양한 문화운동을 꽃피우면서 안양지역의 사회운동이 만개하는 시기가 열리는 촉진제였다.

87년 7월 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한 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은 만도기계, 태광산업, 삼덕제지,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유신중전기, 금성전선, (주)농심, 안양전자, 다우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으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근로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흩어지면 노예되고 뭉치면 인간된다", "8시간 노동으로 생계비 보장받자" 등의 공통된 플래카드가 각 사업장마다 내걸리고 난생처음 해보는 파업은 훌륭한 민주주의의 학교로 자주적 인간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이 노조설립 등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현장활동가들은 안양지역노동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출범하였고 안양노동자회가 결성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민민운동) 단체들이 조직, 결성되고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1987년 하반기부터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의 문화단체가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면서 1988년에는 이들이 연대체로 결성하여 안양문화운동연합으로 발전하면서 안양권에서의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꽃피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교회권도 경서EYC 경서목정평을 중심의 활동이 대통령선거 시기에 민주쟁취 경서지역 기독교공대위를 통해 공정선거감시운동으로 발전하고, 박달교회, 살림교회, 우리교회 등 민중교회가 창립되면서 1988년에는 '안양지역민중교회협의회'라는 연대기구체로 발전하였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의 함성은 군사독재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민주주의 꽃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차원이 아닌 '사람의 세상'을 원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광장이, 모든 길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꽃을 활짝 피우고 함께 민중이 함께 모일 때 '불가능'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싹틔튀운 계기를 만들어 준 세상을 바꾼 함성의 주인공, 그들은 바로 시민들이었다.

[옛사진]통일호 열차 서던 1980년대 초 군포역

타임머신/옛사진읽기

 

비둘기,통일호 열차 서던 1980년대의 군포역(軍浦驛) 모습으로 사진속 역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신축한 역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군포시민 심태섭님이 소장한 것으로 군포시민신문의 '군포옛삶터사진展-10회'를 통해 소개된 자료이다. 

군포시 당동에 있는 군포역은 대한제구 당시인 광무 5년(1905년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연 경부선의 철도역으로 1905년 군포장역으로 개업하였다가 1937년에 군포역으로 변경, 1974년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전철이 운행하기 전에는 여객열차도 정차했었지만 현재는 수도권 1호선 완행과 서울-천안 급행열차가 정차한다. 한때 여객열차가 정차하던 역이기에, 역사 남쪽으로 과거에 사용하던 저상 승강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세대라는 부역명이 있었으나 당정역이 개업한 이후 한세대가 군포역보다 당정역이 더 가까워서 한세대 부역명은 폐기되었다.

1905년 1월 1일 : 군포장역(軍浦場驛) 영업 개시
1937년 1월 1일 :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 변경[1]
1938년 5월 1일 : 역사 신축 준공
1974년 8월 15일 :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1980년 2월 1일 : 화물 취급 중지[2]
1988년 12월 10일 : 현 역사 신축 준공
1999년 6월 1일 : 통일호 여객 취급 중지
2009년 12월 1일 :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2014년 10월 31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3]
2019년 12월 30일 : 서울-천안 급행 폐지

 

군포장의 변천 과정 https://anyangbank.tistory.com/2383

[옛사진]소외된 이읏을 위한 공간, 1984년의 안양근로자회관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시 원도심 한복판인 안양4동(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13)에 있던  ‘안양근로자회관’(현 가톨릭복지회관)의 1984년 건물 모습으로 1969년부터 2007년까지 근로청소년, 노동조합, 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들이 운영되던 공간이다.
안양은 1960년대 공업지대와 함께 급성장을 하던 때였다. 정부가 이끈 경제시책으로 안양 지역에는 섬유공장, 제지공장 등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많은 공장이 생기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로자들이 살 곳을 찾자 안양 지역의 많은 집들이 남는 방을 하숙이나 자취방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많은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섬유, 제지 등 경공업이 많았던 만큼 여성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지 못해 지역사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주임신부였던 정원진(루까) 신부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기숙사 시설을 만들자고 교구에 건의했다.
1960년대 말 수원교구는 갓 설정된 가난한 교구였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구청도 외국의 원조를 받은 기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기숙사 시설 신축사업에 나선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또 그러한 노력을 통해 선교하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협조를 요청해 AFI는 독일인 선교사 서말가리와 한성인(벨따)를 파견한다. 말가리다와 한 벨따는 성당 한귀퉁이에 살면서 일용노동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교구는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땅을 제공하고 외국 기관의 원조와 외국인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도착하면서 천주교 수원교구가 제공한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부지에 여자청소년기숙사와 강당을 갖춘 근로자회관을 신축해 1969년 9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독일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근로자회관 봉헌미시를 통해 개관식을 갖는다.
이후 1976년에는 증축을 통해 남성근로자를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근로자복지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근로청소년기숙사의 경우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었던 만큼,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의 역할을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청소년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인간적 성숙을 위한 공동체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양교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노동교실, 신앙 교육 등을 제공하는 등 근로청소년 기숙사를 거쳐간 근로자 수만도 2000여명에 달한다.
또 근로자회관은 노둥자 및 일반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에도 나서 노동법 강좌 등 노동교육과 당시 국내에서는 상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노동관련 영화상영, 서예, 꽃꽂이, 포크댄스, 그림교실, 판화교실, 탈춤, 사뮬놀이 등 사회교육프로그램, 노조 창립, 워크셥 및 세미나, 교육 등 옥내외 행사가 수월치 않았던 시기에 지역사회 단체들에 공간 제공, 근로자가정 임대주택사업, 무료급식소 등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들이 펼쳤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 • 군포 • 의왕)은 서울 주변에 위치하면서  1980년 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 또는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활동이 거의 부재한 지역이었다. 대 학에서의 민주화 시위도 없었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의 활동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조건하에서 1982년부터 장내동성당의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 JOC(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1983~1987년 사이에 노동법 강좌 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활동은 안양권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근로자 문제가 점차 해소되자 회관은 빈민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1980년에는 근로자 가정을 위한 임대용주택(10가구)과 상가를 신축해 청소년기숙사에 살았던기숙생이 결혼후 가정을 꾸린 후 살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1990년도에는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룰 통해 매일 점심에 따뜻한 한끼를 제공했다.
이후 공간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운영자의 결정에 따라 1998년 기숙사사업을 종료하고 ‘천주교 수원교구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비롯 가정폭력상담소 및 여성쉼터 등의 사업 중심으로 변화를 꽤해 운영하다가  2007년 12월 31일을 기해 39년의 지역사회 및 노동사업을 마감하고 문을 닫고 수원교구의 요구에 의해 천주교 수원교구로 넘어간다.
근로자회관부터 전진상복지관까지 40여년 안양지역 사회속에서 펼쳐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 독일 십자훈장, ‘좋은 한국인 대상’, ‘아름다운 사람상’ 등을 복지관 대표를 통해 받기도 했다.
한편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은 2009년 교구의 사회복지 중심지로 다시 태어난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2년여 진행한후 2009년 12월 16일 교구사회복지의 중심기관인 가톨릭복지회관으로 재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회관에는 교구 사회복지회·교정사목위원회·이주사목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교구 사회복지회는 산하 130여 곳의 사회복지시설을 관할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수형시설에 갇힌 수용자들을 돌보는 교정사목위원회와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이주사목위원회도 회관에 있다. 또한 회관은 단순히 교구 사회복지 지원을 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회관내에 안양시장애인보호작업장과 안양자활센터를 갖췄고 교구 장애인선교회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선데이아카데미,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장소로 회관을 제공한다.
근로자회관과 전진상복지관이 그랬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만나고 나눔을 실천하는 구심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 회관에서는 교구 사회복지회 수익사업단 ‘착한 사마리아인’의 매장도 운영되고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화원), ‘엔젤마트’(슈퍼마켓), ‘사랑의 국수가게 2호점’, ‘두드림과 열림’(자활매장), ‘카페 뽀르트’ 등 회관에 입점한 매장들의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가톨릭복지회관 축복식에서 “이 회관은 사회복지의 행정적 기능뿐 아니라 어려운 이들의 피신처 역할도 하는 행정과 사업 실천이 병행되는 공간”이라며 “회관을 통해 교구 내 지역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빛, 사랑이 전해지고 하느님의 정신이 널리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옛사진]1960년대 안양 사람들 결혼식장으로 인기였던 안양기독보육원 예배당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예배당 #교회 #결혼식장 #안양기독보육원 #좋은집 #양명고/ 안양2동 안양천변에 위치한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 경내에 있던 예배당(교회)으로 현재 양명고교 테니스장 자리에 있던 건물로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는 1960년대 기록 사진이다.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후 미군이 안양기독보육원에 지어준 교회로 추정된다. 대형 건물이 별로 없던 시절인 1950-1960년대 안양읍민뿐 아니라 시흥군민들이 신식결혼식장으로 자주 애용하던 곳으로 실내가 원목 나무 벽면으로 장식되고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는 등 분위기가 깔끔하고 좋아 종교 유무를 떠나 인기를 누렸던 공간이었다.

교회는 1978년 무렵까지도 있다가 안타깝게도 철거되어 사라졌는데 당시의 모습를 기억하는 6-70대 어르신들은 교회 외관은 소박했으며 실내는 벽면과 장식들이 나무로 짜여져 매우 아주 아름다웠다고 회고한다. 

이 교회에는 70년대까지 시목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안양ymca이사장을 역임하셨던 김영일 목사님의 부친이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제 기억으로는 만안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이 교회에서 열린 누군가의 결혼식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갔으며 답례품으로 받은 달콤한 모찌떡을 받았었다. 앨범을 둘춰보니 당시 아버지와 함께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 있는데 교회의 왼쪽모습이 기록돼 있다.

한편 교회가 있던 곳은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1936년 서울에 있던 경성기독보육원이 옮겨와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으며.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는 등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개교했다. 양명고 졸업생들 사진을 보면 교회는 학교 건립 이후인 1978년에도 존재했으나 이후 80년대 초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다. 교회가 정확히 언제 허물어졌는지 학교측에 확인해야 알 수 있을듯 싶다.

[옛사진]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0년대 중반 안양읍내에서 수암천을 건너는 다리 양지교(현 양지4교) 부근의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시가 다시 뜯어내 다리 왼쪽 상류는 철거됐고 오른쪽은 아직 복개돼 주차장 용도로 사용중인데 시는 복개된 남은 구간도 철거한다는 계획지요. 하천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위쪽은 안양2동으로 당시에는 북부동이라 불리우던 안양읍내 중심으로 골목에는 단독주택, 구도로(만안로)와 중앙로변에는 교회, 아아스케끼공공장, 제재소와 목재소, 철공소 등과 쌀창고와 정미소, 마부가 운행하는 마차대기소 등이 있었지요.  다리 위쪽으로는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공장안으로 연결되는 철길, 다리 아래쪽으로 안양역에서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병목안행 철길에는 80년대 초반까지 자갈을 실은 화물열차가 운행됐는데 화물열차가 중앙로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살짝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을 갈아서 칼이나 표창을 만들어 놀기도 했던 추억이 있지요. 

1934년 경부선 복선 공사시 레일용 자갈 채취를 위해 놓여진 병목안행 철길은 8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다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일부 철길은 도로로 확장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그나마 안양9동 금융아파트 뒤 100미터 구간에 이제 삭고 썩어 흔적만 알수있는 나무침목과 철도 레일이 남아있어 과거의 역사를 가늠케 합니다.

병목안행 철길을 철거하지 않아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병목안시민공원, 담배촌 수리산 천교성지, 가파른 동네 창박골까지 전차(트램)을 운행하면 지역교통 담당은 물론 색다른 관광거리도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도시 공상을 해봅니다. 

추억 담긴 얘기를 하다보니 잊었던 기억도 생각나네요, 다리밑에는 망태를 등에 메고 다니던 형님(?)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본거지였지요. 아치형 돌다리에는 문을 을 달아 마치 집같은 구조를 만들어 살았지요.  사진속 다리 우측으로 코너변에 있는 건물에는 호산나 시계점이 있었고, 사진 좌측으로 조그만 가면 원목이 철길에 쌓여있던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로 변전소(현 안양역전우체국 옆 모텔 자리)가 있었고 변전소 철망 옆으로 난 골목길은 안양중학교 가던 지름길이었지요. 그 길로 나오면 수암천을 건너는 아나방 다리가 있었고요. 가끔 철길에서는 보신탕용으로 개를 잡는 이들이 있어 등하교길에 눈을 찌푸리면도 구경했지요...또 1980년대 사진 좌측에는 구름다리라 불리우던 실내포장마차오오기찻길 골목 2층에는 길모퉁이카페, 사진 우측 기찻길 골목에는 방석집들이 쭈욱 있었지요.   

또다른 추억과 기억들이 생각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