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옛그림]우매한 조선인 행동으로 비하한 원태우 지사의 돌팔매질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19.05.02/ #기록 #역사 #원태우 #일로전쟁사진호보 #일본 #기무라고타로/
이 그림은 일본 搏文館(박문관)에서 1904~1905년 발행한 시리즈 화보책자인 《일로전쟁화보》 제39권(1905.12.8 발행)에 실린 삽화 자료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기록물이다. 그림에는 1905년 안양에서 일어난 원태우지사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돌팔매질을 일본인 화가가 삽화와 단신 기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원 지사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안양 서리재고개(현 안양시 석수동 안양육교 인근)에서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원태우 등 4명이 체포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히 그림에는 오류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림에는 머리에는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허리춤에는 칼을 찬 양반의 모습으로 표현한 중년의 남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뒷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사건 당시 원태우 지사의 나이는 23살의 청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등의 기록과 자료를 보면 원 지사는 농사를 짓던 농부였고, 돌절구와 맷돌을 잘 다듬어 그가 만든 것이 현재 독립기념관과 안양박물관에 있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참고로《일로전쟁화보》는 1904~5년 일본 搏文館(박문관)에서 발행한 시리즈 책자로 구 한말인 대한제국 당시의 우리나라의 풍경, 풍습, 사건 등에 대한 사진과 삽화가 일본인의 시각으로 본 글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각 64~68p. 일어 표기. 소프트커버. 상태 양호. 세로 26.5cm, 가로 18.3cm.
문제는 원태우 지사가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후 안양 곳곳에 세워진 동상, 조형물 등을 보면 23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 대신 갓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적어도 40대 중년에서 60대 노인으로 표현해 젊은 청년의 항일투쟁 행동을 중장년의 어른이 한 것으로 호도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특히 지난 2018년 11월경 안양시 석수동 원태우 지사 돌팔매질 현장에 새롭게 세운 조형물은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일로전쟁화보》 화보집의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 제목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하여 부착함으로 원태우 지사에 대한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 진행되어 왔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조형물에는 작품 설명, 제작 시기, 작가 이름 등을 함께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데 이같은 기록도 없다. 이는 안양시 관내 적지않은 조형물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자칫 잘못된 역사를 후세에 전하는 일로 이어질 수 시급히 보완이 필요하다.
한편 원태우지사 조형물로는 1992년 11월 22일에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원태우지사 얼굴의 부조상, 평촌 자유공원 자유총연맹 안양지회 정문앞에는 동상이 있다.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관악역에서 서울 방향 300미터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는 안양시가 설치한 자그마한 돌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가 2018년 가을 석수2동에서 새 조형물로 교체했는데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일로전쟁화보》 화보집의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 제목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하여 부착한 것이다.
2018년 11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원 지사가 돌멩이를 던진 의거지와 원 지사가 태어나 자랐던 안양1동 생가터(안양1동 현 농협 안양역지점)에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표지판과 원태우 집터 표지석을 신규 설치했다.

 

 

 

 

[옛그림]시흥환어행렬도에 그려진 의왕 사근행궁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조선 시대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서울 창덕궁에서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 현릉원까지 약 60㎞.의 길로 13번의 원행길에 나섰다.

원행길에는 임금이 잠시 들러 머물던 곳 행궁(行宮·임금이 지방에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이 있었는데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화성행궁을 비롯 노량행궁, 과천행궁, 시흥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안산행궁 등이 있었다.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숭례문, 노량진, 용양봉저정을 거쳐 남태령을 넘고 과천행궁에 머물렀다가 군포로 진입하는 '과천길'을 이용하다가 환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원행에 나섰던 1795년을 기점으로 창덕궁에서 시흥행궁과 대박산과 만안교를 건너고 안양행궁을 거쳐 군포로 들어가는 '시흥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과천길은 연로한 어머니와 행렬이 지나가기에 지형이 협소하고 언덕이 많았다. 대신 넓고 평탄한 시흥길이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 길은 이후 1번국도이자 만안로이며 시흥대로이다.  

정조는 시흥길을 지나며 시흥행궁과 안양행궁, 사근행궁 등에 머물다 간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이들 행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만다.

금천구청이 발간한 '시흥행궁 복원 및 활용을 위한 학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보니 시흥행궁이 현재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자리했을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양행궁도 안양1번가 상가 건물앞에 '안양행궁지'라는 작은 표지석으로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표지석이 있는 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고 '대궐터'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안양4동 담안(중앙성당 인근) 등을 얘기하는 등 안양행궁의 정확한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안양행궁이 없어진 이유로는 시흥행궁에 불이 나서 이를 보수하는데 안양행궁 자재를 갖다 쓰면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또한 기록이 없어 사실이라 말할수 없다.

그나마 위치가 확실한 것은 사근행궁이다. 사근천이 흐르는 옆에 자리한 사근참행궁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양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는길목이자, 과천길과 시흥길, 안산길의 갈림길로 교통의 요지로 역대 왕들이 자주 이용했다.  

기록을 보면 현종(재위 1659∼1674)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 온천을 자주 다녔는데, 이때마다 이곳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원행에 나선 1795년에는 사근행궁에서 함께 식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근행궁은 일본 강점기인 1937년 3월까지 의왕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기와지붕 모습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돼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수원에 면사무소가 새로 짓는데 이때 사근행궁은 새 면사무소를 짓는데 돈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왕면협의회 결의를 거쳐 철거되고 만다.

당시 면협의회 기록을 보면 의원 중 한 명이 "전 의왕면사무소(사근행궁)는 조선 시대 행궁이므로 고적(古蹟)으로 보존하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했으나 의장인 면장은 "유지가 곤란하다. 매각 외 방법이 없다"고 반대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사근행궁터에서 기단으로 쓰인 돌과 기와들이 일부 수습됐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인근에 택지가 들어서면서 아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근행궁터였던 의왕시청별관 입구에는 지역유지 모임인 백운회에서 1989년에 세운 사근행궁터비의 존재가 이곳이 과거 임금들이 머물던 행궁터 였음을 전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의왕시의 고천동지역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근행궁터 일부가 새 도로에 포함되어 남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옛사진]안양초교 38회 졸업(1969년) 앨범속 얼굴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초등학교 38회(1969년 졸업) 졸업앨범이다. 40년의 세월을 말해주듯 빛바랜 앨범은 표지와 속장에 이어 두번째 페이지에는 교훈, 교가, 교기와 함께 교장선생님 얼굴, 세번째 페이지에는 은사들 얼굴, 이어 다음장 페이지부터는 각 반별 사진 그리고 사진 뒷페이지에는 사진속 인물을 따라 이름 적은 별지 순으로 8반까지 한반에 평균 6-70명씩 500여명의 학생들이 한 교정에서 공부하고 뛰놀았던 얼굴들이 담겨져 있다.

안양의 오래된 모습과 사람 등 옛 사진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1977년 안양대수해로 인해 기관, 회사, 직장은 물론 각 가정의 책장 또는 장롱속에 보관하던 두툼한 앨범도 대부분 물에 젖거나 훼손, 분실, 망실되면서 과거의 수많은 기록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깐 안양 대홍수를 살펴보면 1977년 7월 8일부터 9일까지 안양에 내린 비는 무려 467.2mm로 기상청 창설이래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했는데 당시 안양 원도심은 마치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듯한 물폭탄과 해일처럼 밀려드는 물살에 잠긴 수중도시 같았다. 당시 피해 규모는 수재민 9천4백39명, 사망.실종 257명, 재산피해 1백85억에 이르는 유래없는 참사를 빚었으며 안양천, 학의천, 수암천, 삼성천 등의 제방이 유실되었고 안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안양대교는 교각이 주저앉았고 안양시내와 비산동을 연결하는 수푸루지 다리는 끊기는 등 안양 최대의 사건으로 지금도 안양 대수해, 안양 대홍수, 쌍칠(77)년 대홍수로 불리우고 있다. 

다시 안양초교 이야기이다.

안양초등학교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우체국사거리 중화한방원 뒤에 위치한 공립 초등학교로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2018년 86회 졸업생(162명)까지 그동안 38,979명을 배출한 안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처음에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 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변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주접동과 남부동 사이에 있는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한다.
교화동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국 민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양초교보다 더 오래된 학교는 과천초교(1912년 4월1일 개교)와 군포초교(1920년 4월 1일 개교)다. 안양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안양역사 개설 이후 역 주변 주거지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을 형성해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1914년 호계동에 세워진 과천군 서이면면사무소 건물이 1917년 안양1동으로 이전해 안양면사무소 개설되고 관공서들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근대 도시(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군포장이 섰던 군포와 한양 초입인 과천이 더 컸으며 안양에 소학교가 없어 당시 학생들은 군포, 과천, 안산까지 등교했다.

사진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대부분 1957년에 태어나 닭띠생인 이들은 한국 사회의 상징적 아이콘인 '58년 개띠'와 더불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로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숲을 푸르게 하기 위해 송충이를 잡기 위해 휘발유가.석유가 든 깡통을 들고 수리산을 오르락 내리락해야 했고, 겨울에는 난로 땔감(갈탄)으로 부족한 것을 솔방울로 보태기 위해 푸대자루를 들고 또다시 산으로 가야했던 이들이다.   

자료를 찾아보면 베이비붐 세대만이 인식하고 공유하는 몇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가난'이다. 낡은 교과서를 보따리에 싸맨 채 밑창 달은 고무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 등교하던 일, 원조 받은 분유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 TV있는 집을 찾아가서 박치기 왕(김일)이 나오는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을 넋이 나간 듯 보던 일들이 동시에 공유된 경험 중의 하나다.

두 번째는 시대적 ‘다양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점이다. 즉 한 반에 60-70명이상, 3부제로 돌아가는 ‘콩나물’ 교실에서 수많은 급우와 경쟁했지만, 결국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높은 인구비율 때문에 당시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로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지만('77학번), 97년 말에는 IMF사태가 터지면서 40대일 때 ‘사오정(45세 정년)’, 50대가 되자 ‘오륙도(56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놈)’라는 말의 당사자가 된 세대이다. 다소 서글픈 추억도 있지만 이런 동일한 기억과 체험을 공유하면서 또래라는 결속감을 갖는 것이 58년 개띠를 주축으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다.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설립인가 7월 4일, 2학급 편성)
1931년 3월 16일 제1회 졸업식
1938년 4월 1일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안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5년 9월 10일 병설유치원 개원 (2학급 80명)
1994년 6월 27일 병설유치원 종일반 1학급 개설 (계 3학급)
1996년 3월 1일 안양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6년 5월 25일 학교 체육관 준공
2017년 9월 1일 제29대 송화순 교장 취임

2018년 2월 13일 제86회 졸업식(162명) / 총 졸업생 누계 38,979명

2018년 3월 1일 36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https://anyangbank.tistory.com/2257

[옛사진]1970년대 말 안양 관악역앞 만안로 이전 공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옛사진 안양 #역사 #기록 #기억 #골목 #철길 #석수동 #관악역 #만안로 #신필름 #안양영화예술전문학교 #영화촬영소 #1970년대 말/
안양시 석수2동 국철 1호선인 관악역(冠岳驛. 석수2동 241)에서 안양역(남쪽) 방향으로 본 동네 풍경이다. 사진 우측 뒷쪽으로 보이는 큰건물이 당시 신상옥 역화감독이 운영하던 영화촬영소인 신필름(현재 안양로 532번길 현대아파트)이다. 큰 건물 2동중 왼쪽옆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학교로  안양영화예술학교(현재 안양로 510번길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속 풍경은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으로 수도권 전철1호선이 개통(1974년)한 이후 전철옆을 지나는 만안로(옛 국도 1호선)의 석수동 안양육교( 현 연현오거리)에서 안양유원지 입구인 안양교 사거리까지의 곡선 도로 선형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사진 좌측 전봇대옆 긑자락에 보이는 가로수가 서 있는 방향이 사진 우측으로 오면서 동네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음을 보면 알듯이 당시 도로는 안양유원지 입구에서 만안교(옛 고려석면 공장앞- 현재 영화아이닉스아파트)에서 삼성교를 지난후 도로 선형이 좌측으로 걱어지면서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해 현 석수주유소 삼거리에서 철길을 따라 이어지다 안양육교(1960년대 중반까지 땡땡땡 철길)를 건너 시흥(현 금천구)쪽으로 이어졌다. 

현재 안양시내(현 만안구)를 남북으로 관통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만안로, 안양로, 경수대로 등 3개 도로가 있으나 1970년 중반 까지만 하더라도 2차선의 만안로(당시 국도 1호선) 하나밖에 없었다.  

 

안양 석수2동에 대한 이야기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한다.
특히 안양육교는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 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 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이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다.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쌓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안양풀(과거 안양유원지 - 현 안양예술공원)에 개설된 수영장이 石水洞水泳場 으로 불리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된다.

 

영화의 산실이었던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해 좀더 알아볼까요.

안양하면 교과서에도 실렸던 안양포도가 유명했다. 또 안양하면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안양 석수2동에는 1960년대 동양최대의 종합영화촬영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안양시 석수동에 설립한다. 당시 기공식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대단했던 이 촬영소는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그러나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후 신필름(신필림)을 이름을 바꿔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한다.
신상옥(1925년생)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작자, 감독, 촬영기사였다.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惡夜)’로 감독 데뷰했다.
그가 신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면 젊은 그들(1956), 무영탑(1957), 연산군(1961·제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1회 대종상감독상 수상),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이(1964)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무수히 제작됐다.
신필름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당시 신필름이 소유하고 있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 두고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영화사로 당시 정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지원을 받아오던 신필림은 「장미와 들개」(1975년)영화 개봉을 앞두고 사전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해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신 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개명하고 전성기로의 복귀를 꾀해왔으나 재정난에 화재까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던 중, 1978년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으로 납치된 이후 신 감독 또한 북으로 넘가면서 신 필림은 문을 닫고 촬영소 부지는 매각돼 현재 관악현대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또 석수2동에는 국내 최초의 영화전문교육기관이 있었다. 파란곡절의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1966년 신필름 옆에 세운 영화전문교육기관 '안양예술학교'으로 1978년 1월14일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이후 문을 닫았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1980년 안양3동에 안양예술고등학교 개교하고 문을 닫은 안양예술학교 출신들과 동문회 등으로 연을 이어건다. 우연하게도 이 학교 교장의 성함이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같다. 그러다 보니 안양예고를 영화배우 최은희씨 연관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안양예고 재단과 영화배우 최은희씨와는 관련이 없다.

1940년대 군포보통학교 2학년(25회 졸업생) 학기초 기념사진

타임머신/옛사진읽기

 

군포보통학교(1920년 개교. 현 군포초등학교) 25회 졸업생들이 2학년 재학시인 1940년대 2학기 시작을 기념하며 찍은 단체사진이다.

지난 2015년 '군포옛삶터사진展'에 심태섭 어르신이 제공한 사진으로 사진속에는 군복 입은 담임선생님이 뒤로 단발머리 소녀들과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차렷 자세로 카메라를 응시한 모습이다.

중간 중간 흰색도 있지만 여학생들은 검정색 치마저고리에 남학생들은 단추달린 웃옷이 당시 교복으로 보인다.

군포초등학교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6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보통학교 인가를 받아 다음해인 1920년 4월 1일 군포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다. 개교 당시에는 학교가 군포장역이 있던 시흥군 남면 역전 인근(현 군포로 43. 우리은행 군포지점 삼거리)에 있었으나 1959년 10월 20일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군포보통학교 설립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신문에 게제될 정도로 유별났다. 

당시에는 근대식학교 교육이 도입되기 전으로 안양권역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서당교육을 받거나 멀리 과천보통학교로 틍학을 해야했다. 

​지역에 사시던 노년분들의 회고에 따르면

서당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며 훈장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글을 아는 다른 이가 자기 집에서 훈장을 하며 가르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학비로는 여름에는 보리 한말, 가을에는 쌀 한말 정도를 냈는데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이것도 준비를 못해서 서당을 포기하거나 아예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같은 현실에서 주택이 700호에 불과한 자그마한 군포에 학교가 설립되었으니 대단한 사건이었다.  
군포공립보통학교 설립 이야기가 실린 매일신보(1924.11.27일자)를 보면

군포시는 당시 행정구역상 시흥군 남면에 속해 있었는데 호수가 700호 미만의 작은 면이었으나 일찍이 교육과 산업에 대한 노력이 남달라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열의로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고 그 설립이유를 적고 있다.
특히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당시 대부분의 소도시 초등학교 과정은 4년제로 중학교로의 진학이 어려운 실정이었으나 군포공립보통학교는 인근에서 유일하게 6년제 학교로 설립이 되었으여 이 때문에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려면 6년제 학교인 군포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할 수 밖에 없어 주변지역인 의왕이나, 안양, 안산, 광명, 시흥지역에서 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 1930년대까지도 통학난을 겪었다고 한다.

군포공립보통학교(現 군포초등학교) 설립에는 당시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 면장을 지내고 군포우체국장, 경기도 평의회원 등을 역임했던 故 조중완(1879~1942)옹의 역할이 컸는데 교육부는 2017년 8월 28일 교육 불모지였던 시흥군 남면에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세워 지역 및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을 인정해 국민교육 발전 유공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하였다.

조원극 초대 군포시장 조부인 故 조중완 옹은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무관학교를 거쳐 조선육군연성학교 교관(참령)을 역임하던 중 일본군에 편입하라는 강권을 거부하고 경기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로 이주했다. 당시 초등학교조차 없어 교육 불모지와도 같았던 모습에 개탄하여 50% 이상의 사재를 출연하여 7개 교실, 11개 학급의 군포공립보통학교를 1920년 건립했고, 現 군포역사 옆에 사설 우체국을 설립해 지역주민들에게 정보문화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 또한, 시흥시 남면 진흥회장을 거쳐 1916년 남면 면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소득원이 빈약한 지역사회 현실을 개선하고자 남면 농촌계량연합회를 창립하여 농촌 생활환경 개선사업 및 소득 증대사업을 추진하고, 조혼·미신 등의 폐풍을 일소하는 대신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위생 향상을 위해 경진회 등 시상제를 도입해 농민들의 의식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지속적인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왔다.

한편 마을과 도시의 역사를 보면 인구수 따라 설립되는 초등학교 역사와 비례한다. 2018년 졸업 회수로 본 안양권(안양.군포.의왕.과천) 초등학교 역사를 볼때 1900-1940년대 마을의 크기와 인구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과천초등학교 104회(1912.04.01 개교/ 1900.07.20 과천군공립소학교로 개교)
군포초등학교 97회(1920.04.01 개교)
안양초등학교 86회(1929.12.20 개교)
고천초등학교 79회(1936.12.01 개교)
덕장초등학교 70회(1949.03.25 국교 승격)
안양남초등학교 69회(1946.03.15 흥안국교 개교/ 1970.12.07 안양남국민학교로 교명 변경)
관양초등학교 69회(1948.04.01 개교)

부곡초등학교 69회(1946.08.10 반월국교 부곡분교장 인가/ 1948.10.06 부곡국민학교 승격)
삼성초등학교 64회(1954.04.01 개교/ 1949.03.01 안양초교 삼성분교 개설)
만안초등학교 55회(1962.03.01 개교)
안양동초등학교 48회(1969.03.01 개교)
안양서초등학교 45회(1972.11.25 개교) 

[옛사진]1968-69년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 인근 아이들(흑백)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응답하라1968 #안양 #기록 #역사 #동네 #추억 #석수동 #닐미샬로프/ 안양시 석수동에 있던 미군부대(83병기대대) 전령으로 근무했던(1968년 3월~1969년 4월) 닐 미샬로프씨가 컬러 슬라이드필름으로 촬영한 당시 미군부대 주변, 안양 석수동에 살았던 아이들의 모습으로 콧물이 흐르던 천진만만한 아이들의 표정은 책가방과 옷차림 드을 통해 당시 어린이들의 삶을 살펴볼 수있다. 사진속 주인공들은 아마도 미군부대 인근에 자리한 삼성초등학교와 안양중. 안양여중에 다니던 어린이와 학생들로 그들은 이제 60-70대의 어른들이 되어 있을터.

83병기대대는 삼성천옆에 자리했던 대규모 부대(현재 석수 이편한세상아파트)로 1970년대 중반까지 있었다. 이 부대는 특수탄약을 관리하던 부대로 박달동 수리산 자락의 군용지라 불리우던 탄약 벙커에 있던 전술 핵탄두와 로켓을 관리.운용했다. 부대내에 PX는 물론 영화관, 소방대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부대 주변 동네에는 양복점, 양화점, 잡화점, 병원, 여관(Hotel) , 고깃집, 식당 등이 있었고 미군을 상대로 하숙까지 치면서 안양시내 못지 않게 상권은 물론 생활에 있어서도 여유가 있던 동네였다.
당시 비포장도로였던 안양-안산간 도로에서 허큘리스미사일을 싣고 가던 대형트레일러 트럭을 목격했었다. 간혹 트레일러와 호위 차량이 지나가면서 사탕과 쵸콜렛 등을 아이들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어느날 던져주는 노란 과일을 받았는데 껍질에 영어로 'Made in USA'라 덕혀 있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볼 수 없던 미깡(귤감)이었다.
석수동 미둔부대는 1970년대 중반쯤 철수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안양 석수대림아파트 단지로 변모했고 경부선 철길에 있던 건널목도 없어졌으나 대림아파트와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옛 동네와 골목길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닐 미샬로프는 석수도 미군부대에 근무(1968.3-1969.4)하던 1년동안 석수동 빌리지, 사람들, 안양의 다양한 풍물은 물론 서울, 평택, 오산, 인천 등의 당시 모습을 900장의 컬러슬라이드, 흑백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을뿐만 아니라 1977년 안양 대홍수로 집안에 보관돼 있던 각 가정의 앨범까지 수많은 자료들이 망실된 안양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역사의 흔적을 되돌려준 인물이다. 안양시는 지난 2003년 10월 안양시민축제때 그의 사진들로 '특별사진전'을 개최하면서 그를 초청했으며 안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당시 그에게 "당신의 사진을 보면 그속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참 정서직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는 "사람속에는 그 나라의 얼굴이 담겨있다. 특히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표정은 너무 깨끗하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닐 미셜로프 홈페이지(http://www.mishalov.net/)
 그가 보관했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지난 2017년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 기증함으로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는 명언을 실천했다.

 

 

 

 

 

 

 

 

 

 

 

 

 

 

 

 

 

 

 

 

 

 

 

 

 

 

[옛사진]1968-69년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 인근 아이들(컬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응답하라1968 #안양 #기록 #역사 #동네 #추억 #석수동 #닐미샬로프/ 안양시 석수동에 있던 미군부대(83병기대대) 전령으로 근무했던(1968년 3월~1969년 4월) 닐 미샬로프씨가 컬러 슬라이드필름으로 촬영한 당시 미군부대 주변, 안양 석수동에 살았던 아이들의 모습으로 천진만만한 아이들의 표정은 물론 컬러 색상을 통해 당시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고무신, 머리 형태 등을 살펴볼 수있다. 사진속 주인공들은 아마도 미군부대 인근에 자리한 삼성초등학교와 안양중. 안양여중에 다니던 어린이와 학생들로 그들은 이제 60-70대의 어른들이 되어 있을터.

83병기대대는 삼성천옆에 자리했던 대규모 부대(현재 석수 이편한세상아파트)로 1970년대 중반까지 있었다. 이 부대는 특수탄약을 관리하던 부대로 박달동 수리산 자락의 군용지라 불리우던 탄약 벙커에 있던 전술 핵탄두와 로켓을 관리.운용했다. 부대내에 PX는 물론 영화관, 소방대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부대 주변 동네에는 양복점, 양화점, 잡화점, 병원, 여관(Hotel) , 고깃집, 식당 등이 있었고 미군을 상대로 하숙까지 치면서 안양시내 못지 않게 상권은 물론 생활에 있어서도 여유가 있던 동네였다.
당시 비포장도로였던 안양-안산간 도로에서 허큘리스미사일을 싣고 가던 대형트레일러 트럭을 목격했었다. 간혹 트레일러와 호위 차량이 지나가면서 사탕과 쵸콜렛 등을 아이들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어느날 던져주는 노란 과일을 받았는데 껍질에 영어로 'Made in USA'라 덕혀 있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볼 수 없던 미깡(귤감)이었다.
석수동 미둔부대는 1970년대 중반쯤 철수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안양 석수대림아파트 단지로 변모했고 경부선 철길에 있던 건널목도 없어졌으나 대림아파트와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옛 동네와 골목길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닐 미샬로프는 석수도 미군부대에 근무(1968.3-1969.4)하던 1년동안 석수동 빌리지, 사람들, 안양의 다양한 풍물은 물론 서울, 평택, 오산, 인천 등의 당시 모습을 900장의 컬러슬라이드, 흑백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을뿐만 아니라 1977년 안양 대홍수로 집안에 보관돼 있던 각 가정의 앨범까지 수많은 자료들이 망실된 안양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역사의 흔적을 되돌려준 인물이다. 안양시는 지난 2003년 10월 안양시민축제때 그의 사진들로 '특별사진전'을 개최하면서 그를 초청했으며 안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당시 그에게 "당신의 사진을 보면 그속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참 정서직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는 "사람속에는 그 나라의 얼굴이 담겨있다. 특히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표정은 너무 깨끗하지 않냐"고 말하더군요. 닐 미셜로프 홈페이지(http://www.mishalov.net/)
 그가 보관했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지난 2017년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 기증함으로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는 명언을 실천했다.

 

 

 

 

 

 

 

 

 

 

 

 

 

 

 

 

 

 

 

[옛사진]1970년대 초반 안양유원지 인기 놀이터 그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0년대 초반 안양유원지 최근 인기 놀이터 그네
#안양 #기록 #기억 #역사 #동네 #골목 #1960년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그네/ 1970년 초 안양유원지 그네장의 풍경으로 당시 석수동 미군부대(83병기대대)에 근무했던(1969년 9월–1972년 6월/2년 10개월) 밥 아후어한(Bob Auerhahn)씨가 찍은 사진으로 2017년 3월 구글+를 통해 찾아낸 것으로 구글+에 올려진 그의 앨범(https://plus.google.com/photos/... )속 200여장의 사진중 하나입니다.

당시 안양유원지는 풀장과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여름뿐만 아니라 봄에는 딸기, 초가을에는 포도와 보트를 타며 데이트를 할 수 있어 그야말로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였지요. 안양유원지 초입인 버스정류장에서 염불암 가는길 도로변에는 필림, 과자, 음료수 등을 팔고 수영복과 고무주브를 대여해주는 상점들과 도깨비터널, 활쏘기, 총쏘기, 공던지기 등 당시로서는 재미있는 놀이시설이 많았지요,

그네장도 그 중에 하나로 맘모스 수영장 건너편 지금으로서는 벽천분수 광장에 있었는데 아찔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치솟는 그네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때로는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경쟁을 벌이면서 환호성이 울려 퍼질 정도로 인기였던 어르신들의 놀이터 였지요.

한편 밥 아후어한이 근무했던 이 부대에는 앞서 1968-69년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Neil Mishalov)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는 이 부대에 근무(1968.3-1969.4)하던 1년동안 석수동 빌리지, 사람들 등 안양의 다양한 풍물은 물론 서울, 평택, 오산, 인천 등의 당시 모습을 900장의 컬러슬라이드, 흑백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을뿐만 아니라 1977년 안양 대홍수로 집안에 보관돼 있던 각 가정의 앨범까지 수많은 자료들이 망실된 안양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역사의 흔적을 되돌려준 인물이기도 하기요. 안양시는 지난 2003년 10월 안양시민축제때 그의 사진들로 '특별사진전'을 개최하면서 그를 초청했으며 안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는데 그가 보관했던 한국 관련 자료들을 2017년 국가기록원에 기증해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는 명언을 실천하기도 했지요.

 

[옛사진]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 계곡의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 계곡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옛사진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닐미샬로프
수도권 주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받던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 계곡의 1968년 여름 풍경으로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 전령을 근무했던 닐미샬로프가 코닥슬라이드 필름으 로 찍은 사진입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근래에는 해외여행이나 시설 좋은 물놀이 공원에서의 피서가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삶이 궁핍했던 1950~1960년대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서울에서 멀리는 대천·송도로 피서를 떠나기도 했지만 가까운 시냇가, 계곡, 한강, 뚝섬 등에서 물놀이를 했으며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는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중 한곳으로 사진속 풍경은 안양유원지 계곡의 모습으로 사진 뒷쪽으로 멀리 보이는 삼성산과 천말, 물길 등을 볼때 지금의 벽천분수광장 앞쪽으로 보여집니다.

당시의 안양유원지 계곡은 지금가 달리 깊숙이 파인 것이 아니라 도로와 바로 연접해 있을만큼 낮았으며 은모래가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이 흘렀지요. 계곡에는 길가 상점에서 천막을 치고 나무 침상을 놓아 자릿세를 받았는데 가격을 깍는 흥정을 통해 자리를 잡으면 천막앞 물가에서 하루종일 첨벙첨벙 물놀이에 집에서 바라바리 싸온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요.

안양유원지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말에는 관료들의 피서지였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계곡을 돌로 막아 안양풀이라 명명하고 유원지입구 철길에는 임시역이 만들어지고 열차가 정차할 정도로 역사도 오래되고 유명했으며, 1970년대 초에는 한해 여름 100만 인파가 안양유원지로 피서올 정도로 수도권의 대표적인 피서지였지요.
안양유원지 계곡 초입에는 제1풀, 제2풀이라 불리우던 공짜풀장이 현 주차장(2번 버스 종점)에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있었고, 그 위쪽으로는 유료풀장인 대영풀장(현 워터랜드 자리), 맘모스풀장(현 벽천광장앞), 관광호텔수영장(현 블루몬테), 만안각수영장(현 블루몬테 건너편) 등이 있었지요.

가족들이 피서를 오면 풀장에 가지 않다라도 너럭바위가 좌악 깔린 계곡옆 천막을 빌려 바리바리 싸온 음식과 수박에 칠성사이다를 마시고 아이들은 물가에서 물장구 치기도 했지요.
공짜풀장의 제1풀은 수심이 꽤 깊어 어른들이 이용했는데 매년 1-2명의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지요. 풀장 좌우측 스탠드는 엉덩이를 드러 낸채 수영복을 갈아입거나, 옷을 보관하기도 하고, 차디찬 계곡물에 몸이 추우면 햇빛에 달구어진 돌 계단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했던 곳이었지요.
돌계단을 올라가면 뒤쪽으로 상점들이 쭈욱 있었는데 수영복과 자동차 타이어에 바람을 넣은 고무 쥬브를 빌려주기도 했고 사이다를 파는 가게에 활쏘기, 총쏘기 게임과 도깨비굴도 있었지요.

[옛사진]1977년 안양6동에 자리했던 옛 시흥군청 모습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7년 안양6동에 자리했던 옛 시흥군청 모습

#시흥군 #안양 #안양6동 #공공기관 #옛사진/ 경기도 안양시 안양 6동에 있는 옛 시흥군청(1977년 개관)의 모습으로 건물은 서너차례 증축과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만안평생교육센터로 사용중이다.
시흥군 청사는 1936년 영등포에 있다가 1945년 안양1동(안양 1번가 현 삼원프라자호텔)으로 이전해 왔으며 이후 1977년 8월 30일 안양6동에 새 청사를 마련해 다시 이전했다.
안양6동에 있던 시흥군청은 1980년 소래면이 소래읍(현 시흥시)으로 승격되면서 안양에서 소래읍으로 다시 이전했다가 소래읍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소멸된다.

 

■과거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던 시흥군

시흥(始興)이라는 명칭이 "넓은 땅(廣野)"을 의미하고 고구려 시대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의 뜻풀이인 "뻗어가는 땅"과 걸맞다는 점에서 과거 시흥군은 서울의 영등포구ㆍ구로구ㆍ금천구ㆍ관악구ㆍ동작구ㆍ서초구 등과 경기도의 안양시ㆍ광명시ㆍ안산시ㆍ과천시ㆍ군포시ㆍ의왕시 등을 분가 시켰을 만큼 거대한 행정 구역이었다.
시흥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5년 5월 26일 탄생했다.
1895년 5월 발족한 시흥군은 1914년 3월1일 과천. 시흥. 안산군을 합병, 시흥군으로 통합됐다.
1936년, 1949년, 1963년 각각 영등포읍, 서면, 동면, 신동면 등이 차례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금천, 영등포, 양천, 구로, 관악, 동작구 등 6 개 구로 재 분리됐다.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됐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엔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됐다.
이때 시흥군청과 안양읍사무소(안양시청)는 안양 중앙동(현 안양1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삼원프라자호텔이 시흥군청, 롯데리아1번가점 건물이 안양읍사무소(안양시청)였다. 로 안양시청은 안양6동에 새 청사(현재의 만안구청)를 신축해 1975년 7월1일 이전하고, 시흥군청 또한 안양6동(현재의 만안평생교육관)에 새 청사를 신축해 1975년 8월30일 이전했다가 이후 1980년 소래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소래읍으로 다시 이전했다.
시흥군은 1973년 7월 관내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郡)에서 분리됐다.
1979년 5월 1일 시흥군 남면이 시흥군 군포읍으로 승격했다.
1980년 12월 1일에는 시흥군 의왕면이 시흥군 의왕읍으로, 소래면은 소래읍으로 승격됐다.
1981년 7월 1일에는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분리됐다.
1982년 6월 10일에는 시흥군 과천면이 과천출장소(현 果川市)로 분리되어 나갔다.
1986년 1월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돼 분리됐다.
1989년 1월 1일 시흥군 군포읍이 군포시로 분리돼 나갔으며, 의왕읍과 동부출장소는 의왕시로, 소래읍과 수암면, 군자면이 통합되어 시흥시로 각각 승격됐다.
시흥군은 1988년 12월 31일 종무식을 끝으로 93년만에 해체(폐군)되면서 행정구역상에서 그 명칭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헷갈리는 서울 시흥, 경기도 시흥
1. 개요

시흥(始興)은 원래 구한말까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영등포구(양화동과 조선시대-구한말 한정으로 여의도 제외), 구로구 동부, 관악구 상당 부분, 동작구 일부 및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박달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시흥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고구려 때 잉벌노현(仍伐奴縣)에 속해 있었으며 757년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고쳐 율진현(栗津縣)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폐하여 수주(樹州)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설치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416년(태종 16) 금천현(衿川)으로 하여 현감을 두었다. 세조 때 과천군에 편입되었으나 정조 때 시흥이라 개칭하였다. 금천현은 조선 초기 과천현의 일부를 병합하기 전의 독립된 현이었으므로 그 뒤의 시흥현과는 영역이 다소 다르다.
일제강점기~1989년 폐군까지의 기간 중 시흥군에 속했던 지역은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관악구, 동작구, 금천구, 서초구 대부분 및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안산시, 시흥시, 의왕시 일대를 포함했을 만큼 거대했다.
오늘날에는 '시흥'이라 하면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를 가리키는데 혼란을 야기한다. 

 

2.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5개 행정동이 나누어 관리하는 법정동이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흥이라는 지명의 기원이자 시흥의 뿌리.

이 지역은 원래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이 근처의 지명인 '시흥'을 따 시흥군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한 시흥군의 중심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 시흥군청이 이 곳에 있다가 영등포(1914년)-안양1동(1945년)-안양6동(1975년)-소래읍(1980년)-소멸(1989년)으로 이전한다.

1963년 시흥군 동면일대가 서울특별시로 편입이 되었고 기존 경기도 시흥군에서 분리되면서 지금처럼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으로 재정립 되는데 서울 대확장 이전에는 '시흥'이라고 하면 지금의 금천구 일대 내지는 금천구를 비롯한 주변 지역(관악구, 광명시)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금천구 쪽에 있었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영등포권을 거쳐가는 버스들 노선표에는 '시흥동' 대신에 그냥 '시흥'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서울에서 영등포 지역 택시를 이용할 때 시흥에 가달라고 하면 90% 이상의 확률로 금천구청 앞이나 시흥사거리, 금천우체국 등 시흥동으로 간다. 서울 택시로 시흥시에 가려면 기사에게 신천동, 월곶, 시화산업단지 등 동 단위 지역명을 말해 주거나 시흥'시'같이 시를 붙여 말해 주어야 한다.

특히 현재의 금천구청역은 2008년까지 시흥역이었다. 시흥역은 1908년 4월 1일 역사를 개업한후 100여년을 시흥역으로 영업을 해 왔으니 '시동네 주민뿐 아니라 수도권 주민들에게는 시흥하면 금천구의 시흥동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에 타지에서 방문한 사람들에게 경기도 시흥시를 지칭하는 줄 착각해 시흥역을 잘못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시흥역 구내에는 '경기도 시흥으로 가실분은 4호선 오이도역이나 정왕역에서 하차'를 권하는 문구가 있었다. 여튼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008년 말 금천구청 신청사가 준공되면서 시흥역을 금청구청역으로 역명을 변경하며 혼란을 줄이지만 아직 시흥군 시절에 친숙하게 불리웠던 시흥동이 아직 현존하고 있다. 

 

3. 경기도 시흥시
현재의 시흥시 지역은 원래 인천도호부(옛 소래읍)와 안산군(옛 수암면, 군자면)의 땅으로, 현재의 시흥시 남부는 1914년에, 현재의 시흥시 북부는 1973년에 시흥군으로 편입되었으나 전통적 의미의 시흥과는 단한치의 연관도 없다 할수 있다. 

1914년 이전의 오리지널 시흥 땅을 가지고 있지 않던 시흥시가 시흥이라는 이름을 물려받는 바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시흥하면 아직도 서울 시흥동을 가리킨다. 시흥동이 과거 시흥군의 핵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현 시흥시는 '소래'나 '신천리', '시화'나 '정왕동'이라 해야 알기 쉽다. 편이 더 낫다. 이런 현상은 시흥시의 정체성이 확고해지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