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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고려시대 창건한 안양사(安養寺)와 현존하는 안양사 관계

안양지역얘기/담론

 

고려시대 창건한 안양사(安養寺)와 현존하는 안양사 관계

고운 전만수 글 전문 http://blog.daum.net/mindle49/18313718

 

원안양사 터에서 동쪽으로 200m를 가서 다시 북쪽으로 200m 쯤에 이르면

‘안양사’라는 돌기둥 하나가 맞이한다. 또 조금 오르면 일주문이나 금강문은 없고 다이야몬드형으로

생긴 바위에 안양사라고 새긴 표지석이 우둑 서 있다. 이 표지석은 현 주지스님의 글이다.

 

이 안양사는 염불암(현재 염불사) 주지스님이셨던 박기석 스님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분은 당시

염불암과 함께 두 개의 절을 사유(私有)하고 있었다.

 

이를 1955년도에 성인(成人, 비구니)스님께서 인수 받았다. 인수 받을 당시에는 현 요사 채와

종무소 자리에 작은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있었으며, 현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다.

 

성인스님은 각고 끝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천불전을 신축하였으며 1983년에는 심검당을 지었다.

성인스님이 1983년 입적하자 영심스님(현 안양사 주지)이 뒤를 이었다.

 

영심스님은 1945년생으로 6살에 성인스님의 인도로 불문에 들어 와 10살에 이곳 안양사에 성인스님과

함께 들어왔다.

 

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시고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셨으며 종전 대웅전

자리에는 명부전을 모시고, 천불전을 16나한전으로 개축하면서 산신각, 범종루, 대형 미륵부처님상을

2004년까지 완성하였다.

 

안양사 입구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안심당은 경기도청 직원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5급 사무관 시

험준비를 하던 곳인데 안양사에서 매입하여 안심당을 세웠다.

 

안양사 대웅전 앞에는 승탑과 탑비의 귀부(龜趺)가 남아있다. 승탑은 탑신과 기단중석도 없고 하대석은

2단의 8각 지대석으로 복연으로 장식하고 상대석은 앙연으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으로 추녀가

있고 3단의 옥개 받침위에 올려 있다. 양식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규모나 정교함, 그리고 비문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큰스님의 탑으로 생각된다.

 

승탑 옆에는 경기도지방문화재 제93호인 귀부가 남아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있는데

몇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이루고 굄대와 귀부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전체적인 모양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이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이다. 승탑주인공의 행적 등을 담을

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승탑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탑이나 비의 제작연대가 원 안양사가 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고승이셨을 것이다.


원 안양사와 현 안양사의 관계는?

 

통일신라시대인 827년경에 창건된 중추사 터 위에 왕건이 900년에 안양사를 세웠으며, 이

사찰은 조선 15세기 중엽까지 존재하였음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안양사와 현재의

안양사와는 어떤 관계일까? 즉 어떻게 계승되어 왔을까?

 

중초사지에 안양사를 창건한 것은 세운지 80여 년이 된 중초사가 천재지변, 화재 등 알 수

없는 사유로 폐사되고 그 곳에서 노스님이 소규모의 사찰을 운영하던 때 왕건과 인연이 되어

중창 내지는 창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양사는 조선의 억불에 눌려 태종, 세종 때에 유생들에 의하여 완전히 폐사되었는데

뜻있는

스님들의 원력으로 중건하였으나, 문종 때 다시 시련을 겪는다. 이 때 사찰은 폐사를 맞이

하였으나 현재의 안양예술공원 일대가 모두 안양사의 경지였을 것이며 현 안양사 자리에는

안양사의 창건자인 능정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있었거나, 아니면 큰 스님의 거처인 암자가 있었는데 그 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곳에 승탑과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1899년에 작성된 경기도 시흥군읍지나 이전의 해동지도, 금천현지도 등 조선말의 기록에

호압사와 삼막사, 망월사, 염불암 등은 보이나 안양사는 안 보인다.

 

아마도 현재의 안양사는 일본제국주의 때 요사 채와 두 간 정도의 전(殿)에 부처님, 또는

지장보살 정도를 모신 소규모 사찰로 운영되던 것을 1955년 성인스님이 인수한 후 현

주지스님이신 영신스님이 오늘과 같이 사격을 갖춘 사찰로 일으켜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 안양사는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사이며, 비구니스님의 사찰이다. (031- 471 - 4848)

[2020.09.17]언론에 보도된 최병렬 관련 기사

안양지역얘기/사람

언론에 보도된 최병렬 기사

 

https://peopleinfo.tistory.com/173

[피플인포넷]_김용현이 만난 사람들 최병렬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2005.04.04.)

 

https://news.v.daum.net/v/20070204112610712?f=o

안양시민연대 최병렬 대표, 무료 전자신문 400호 발행(2007.02.04)

 

https://blog.naver.com/allinda/20040064794

[창간과운영실무]이런 신문도 있다 / 전자팩스신문 /

안양지역시민연대 최병렬 대표(2007.08.02.)

 

http://www.nspna.com/news/?mode=view&newsid=232628

[NSP통신]안양지역시민연대 최병렬 대표, 안양시장 상 수상(2017.07.19.)

 

http://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A201904180119&t=KO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10항쟁 구술 아카이브-최병렬(2017.07.21)

http://blog.naver.com/tvanyanggokr/221272330129

[우리안양], '기억찾기탐사대'의 길잡이 최병렬 대표를 찾아서(2018.05.10.)

 

https://blog.naver.com/anyang_naeil/221402161861

[내일신문], 안양의 과거,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모색하다(2018.11.24)

러포터가 만난 사람, 최병렬 안양기억찾기탐사대 대표

 

https://blog.naver.com/dhgytjr55/221392220552

[경기IN] [전시] <안양, 시점>, 도시의 다양함을 기록하다(2018.11.05.)

[전시] <안양, 시점>, 도시의 다양함을 기록하다

 

http://ch4.tbroad.com/content/view?parent_no=24&content_no=60&p_no=68515

[abc] [뉴스창 초대석] 최병렬 안양기억탐사대 길라잡이(2018.11.06.)

 

https://blog.naver.com/anyang_naeil/221307745515

[교차로] <안양, 시점>- 도시의 다양함을 기록하다(2018.11.06.)

 

http://blog.naver.com/tvanyanggokr/221399468173

[우리안양]평촌아트홀에서 열린 안양, 시점전

 

https://blog.naver.com/anyang_naeil/221307745515

[내일신문]리포터가 간다, 안양기억찾기탐사대(2018.06.27.)

 

https://www.youtube.com/watch?v=2XnjUBCjfB0

[경기TV]최병렬 史官의 아카이브전시 안양 시점전 평촌아트홀(2018.11.16.)

 

http://www.kukinews.com/newsView/kuk201811050307

[쿠키뉴스]안양문화예술재단, 도시의 다양성 기록한 안양, 시점' 개최(2018.116)

 

https://www.youtube.com/watch?v=LaPdinhNfPM

티브로드 abc방송 뉴스창 - 안양, 시점 전시회(2018.11.16.)

 

http://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A201904180119&t=KO

[한국경제]"케이블 콘텐츠 파워 한눈에"`2019 케이블TV방송대상` 개최

지역파트너스상에 최병렬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2019.04.18.)

 

https://www.youtube.com/watch?v=CYa2eXNU8NU

[abc방송]파워인터뷰/ 최병렬 안양지역시민연대대표(2019.05.27.)

 

https://www.youtube.com/watch?v=8MUAEsQfqT0

[abc방송]파워인터뷰/최병렬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

오경숙 안양시 SNS 시민기자(2020.05.06.)

 

https://www.mediagunpo.co.kr/sub_read.html?uid=10805

[군포시민신문]안양지역 독립·노동운동 역사탐방기(2020.08.21.)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00916010003787

[경인일보] [인터뷰]'기록하는 1인 문화원' 최병렬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

"사라져가는 기억 아쉬움… 동네 속속들이 찰칵"(2020.09.18)

[조성현]‘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2018.07.11)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문화논단 <안양의 인물과 교육문화>

‘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

독암조종경, 창강조속을 배향한 호계서원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 목 차 -

 

□들어가는 말

□서원(書院)의 개요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한구(趙漢九, 1833~1965)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호계(창강)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참고문헌

 

 

 

□들어가는 말

 

호계서원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지역 교육기관으로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문헌 속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안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호계서원의 현위치는 ㈜효성 안양공장의 동쪽으로 서울의 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하부공간의 구,신진자동차학원(안양장례식장 인근)의 북쪽 나지막한 야산지역으로 추정되며 1990년 중반까지도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호계서원은 인재육성과 정신적 구심역할을 하였던 안양선비들의 최초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잊혀져가는 안양의 역사(교육사)를 바로 세우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가치 있는 일은 우리의 몫이며 사명이다. 호계서원과 관련된 구술을 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둘씩 떠나가고 호계서원과 관련된 주춧돌, 초석, 와편류 등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호계(창강)서원지의 흔적도 사라지고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점 여간 아쉽다. 관련 문헌 및 사료가 있더라도 전문적인 식견으로 자료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의 안양시민은 호계서원에 대해 관심조차 없고, 알 필요성과 가치를 못 느끼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인근 안산시는 잊혀져가는 인물인 일제강점기 최용신 선생을 발굴하여 ‘최용신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녀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장을 마련하여 무한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생은 꽃다운 나이 지병으로 돌아 가셨지만 농촌계몽운동가의 모델로서 육성한 안산시의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인접 과천시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살려 ‘추사기념관’을 설립하여 교육 및 문화관광자원 콘텐츠로 적극 육성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시도 타도시 사례와 같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상가, 계몽가, 교육가 등 역사적 인물 및 관련 유적지 등을 발굴하여 묻혀 사장되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향토자원으로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에 배향된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이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섬긴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년에 자기가 거주했던 ‘호계리, 호계촌사’를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시어로 ‘호계’를 찬미하며 노래했던 지역을 사랑했던 선비이다. 조종경의 선비정신, 지역사랑 정신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철저한 수양과 도덕으로 무장한 조선유생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덕목과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화에서 잊혀져가는 유교문화를 복원하여 유교의 가치와 덕목 등 장점을 살려서 지역에 계몽함은 가치 있는 일이며 우리사회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 논고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문헌검토, 인터넷검색 등을 통해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안양교육 발상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 위치에서 짚어보고 미래 발전방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또한 독암선생이 남긴 유고집 속의 시어를 분석 및 가공하여 그 당시의 호계일원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종경이 독암유고집에서 말하는 ‘호계’이외에 더 나아가 ‘호계동의 지명유래’, ‘호계동(안양)의 호랑이’를 포괄적으로 문헌 고찰하여 호계동을 실감 있게 그리고자 하였다.

단 부족한 실력 탓에 안양문화원발간 안양문화11호(3부,‘호계서원’파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요약수준으로 알기 쉽게 발췌 및 재가공하여 정리했음을 밝힌다. 덧붙여 본 노고를 수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도해주신 경기향토문화연구소 김정석 연구위원(문학박사, 수일재연구소 소장)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본 논고가 자료공유를 통한 기억 속에서 멀리 잊혀져가는 지역교육의 발상지와 뿌리를 찾아가는 단초를 마련하고 더불어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사회의 활발한 연구와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 부족하지만 본 논고가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어 지역에서 점차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미래발전방안을 고민하는 장(場)으로 연결되는 가교(브릿지)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서원(書院)의 개요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사림이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이다.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38)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안향을 봉사(奉祀)대상으로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에는 도동서원(대구광역시소재, 보물 제350호), 옥산서원(경북 경주시소재, 사적 제54호), 소수서원(경북영주시소재, 사적 제55호), 도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170호), 필암서원(전남 장성군소재, 사적 제242호), 병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260호)등이 있다.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호계서원 창건 문헌기록:

여지도서(영조 1757년 이후), 서원지(1799), 과천현읍지(1899), 증보문헌비고(1908), 연려실기술(1912), 전고대방(1926), 경기도서원총람(2007)
 

 


 

서원은 학문의 연구와 선대의 명현(선현)을 추모하며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설립한 인재양성기관으로 향사 및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다. 서원은 국립지방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달리 사설적인 교육기관이다.

호계서원은 ‘여지도서’ 등 여러 문헌 속에 등장하는 데 기록 속에는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한 숙종 42(병신, 1716)년 창건했으나 현판을 내려 받지 못했다.

김계명(金啓明) 등의 상소에 의해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호계서원의 제향인물은 조종경과 조속이다. 기록에 따라 창건연대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년(병신, 1716)이 등장하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계서원은 설립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98년 전(또는 333년 전)창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창강은 조종경의 증손자인 조속의 호이다(창강 조속의 증조부는 조종경이다).

서원의 옛 위치는 안양장례식장 부근(구, 신진자동차학원) 동쪽 약 100미터(호계 2동 산 43번지)지점으로 추정된다. 안양시의 지표조사결과 당시 초석(礎石)과 와편(瓦片)이 수습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7년(1870) 봄의 어느 날 폐원(훼철)되었다.

호계서원에 배향되었던 조종경과 조속의 후손들은 호계서원보다는 창강서원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조종경 보다는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조속을 더 존경하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로부터 받은 조종경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조종경의 올곧은 성격을 중시하기보다는 증손자 조속에 대한 평가가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창강은 호계서원(과천), 수곡서원(광주), 건암서원(서천), 백석사(白石祠, 김제) 등 여러 곳에 제향 된 점으로 볼 때 당시 덕망과 실력을 갖춘 유명 선비로 보인다. 한편 조선 숙종 42년인 1716년 창강서원과 비슷한 시기 과천군내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 사충서원(思忠書院)과 함께 지방교육기관으로 과천향교(果川鄕校)가 지방교육의 역할을 분담하며 지역 인재양성을 선도했다.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은 풍양인으로 아호가 독암(獨庵)이다.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의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1530년(중종25) 이임(李任) 등이 동궁(東宮, 세자궁)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론(士論)을 일으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중요하려하자 조종경은 반대하다가 중종26년(1531) 심정(沈貞)의 일당이라는 죄목으로 파직 당했다.

조종경은 김안로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조선시대 전한(典翰) 등 관직을 두루 엮임 한 바 있는 인물이다. 김안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 제2 繼妃 尹氏)를 폐하려다 실각하여 1537년(중종32) 진도로 유배된 이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조종경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과천현 호계서원에 제향 된다.

독암유고 속 옛시문을 분석해보면 그는 자기가 이미 일찍이 보유했던 대지(부지)가 호계동에 있었지만 관직을 따라 여기저기 각처로 이동하면서 그간 호계동에 터전을 잡지 못했다. 그는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36세 관직에서 파직된 이래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안양시 호계일원에 머물며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일반적으로 ‘촌사’는 풍류나 자연을 즐기고자 조성한 공간을 말하며 오늘날 별장에 해당된다. 그는 집 뒤 작은 언덕에 정자(별장)를 짓고 집의 편액을 ‘독암(정)’이라고 했다.

그는 호계촌사 별장에 묻혀 살며 술(酒)과 시(詩)로 시름을 달래며 세상일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한 가운데 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글(유고집)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안양 호계촌에 묻혀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애틋한 마음과 심정을 담은 주옥같은 한시를 다수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그의 생각을 담은 한시집인 독암유고(獨庵遺稿)저술을 통해 전해온다. 독암유고는 독암 조종경이 은둔하면서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말한다. 독암유고는 선조20년(1587) 아들 온양군수 조정추(趙廷樞)가 유고를 활자로 초간 이래 후대 후손들에 의해 3간 된다. 독암유고 속에는 당대 호계지역의 정서와 풍경, 시대상 등을 살필 수 있는 서정시들이 다수 있어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사견)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속(선조28~현종9)은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중기의 서화가(문인화가)이다.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의 호(號)는 창강(滄江)·창추(滄醜)이다. 본관 풍양(壤)이며, 저술로는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륜)의 셋째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부친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했으며 효종때 효행으로 발탁되어 진선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장령(掌令)·진선(進善)을 지낸 적이 있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른다. 창강 조속(선조28~현종9)은 사후 숙종21년(1695) 청백리에 녹권 되고 조선 인조때 장령과 이조참판(이참, 吏參)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조선 숙종 42년(1716)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서원을 세우고 제의를 올렸다. 창강은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배향되었다.

경학(經學)과 문예·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영모(翎毛)·매죽(梅竹)·산수(山水)를 잘 그렸는데, 특히 영모는 중국풍의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는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사군자와 수묵화조(水墨花鳥)에 능했다. 그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金櫃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남종화풍의 깃든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등을 남겼고, 대표작으로는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매작도(梅鵲圖, 간송미술관소장)’, ‘흑매도(黑梅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등이 남아있다. 글씨로는 ‘조회양은렴비(趙淮陽恩廉碑, 扶餘)’ ‘좌찬성이계맹비(左贊成李繼孟碑,金堤)’등이 전한다. 역대 명필들의 서체에도 관심을 보여 금석문(金石文)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방면의 선구자로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다. 조선 인조 때 화가인 창강 조속은 미술사학, 특히 미술사 회화사분야의 유명인사이다.

 

□조한구(趙漢九, 1833~1965)

조선총독부 서이면장을 지낸 조한구(고종20년~1965)는 독암 조종경의의 후손으로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조동순(趙東舜)의 셋째아들로 호계동(방죽말 27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행정가로 자는 장일(章日)이요 호는 금운(錦雲)이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의 초대 면장부임 이래 1927년 1월 서이면(안양면의 전신) 발전을 위해 시가지확장, 안양의 교육시책을 위해 모범사구(私塾, 사설서당, 글방)설치, 농촌진흥을 위해 양잠·축산·임업 등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보통농사를 보급하였다.

1932년 안양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고뢰 정태랑으로부터 1만평의 토지를 기부 받아 조선직물(주)를 현,대농단지에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는 등 안양의 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안양이 삼성산과 관악산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점에 착안하여 1932년 삼성천변(구,고바우식당앞)에 석수동수영장(안양풀)을 설치해 우리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지만,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등을 설득해 삼성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안양풀)을 조성하고 1933년 수영장을 개장한 되서 비롯되며, 안양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단초가 된다.

안양예술공원 구,고바우식당인근 옛날 삼성천 수영장초입에는 당시 일본어로 ‘(안양 풀 pool)'이라고 세운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된 암반의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조한구서이면장 등 행정가들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끌어 올리는 등 지역발전에 기여한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군포초등학교와 안양초등학교 설립에도 힘써 지역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안양금융조합장에 재직하면서 안양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또한 1936년 4월 1일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상도리와 영등포읍(영등포리, 당산리, 양산리)가 서울시 확장책에 의거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자 당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 청사를 안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시흥군청사이전군민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광복이후 시흥군 청사가 안양(현,뉴코리아호텔자리)으로 이전케 함으로서 안양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시흥군 청사가 오면서 경찰서 등 각종 행정기관이 입주하면서 안양1번가는 행정타운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현재 안양1번가에는 당시의 옛,서이면사무소가 복원되어 안양시 행정사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한구 초대면장이 부임했던 구,서이면사무소(경기도문화재자료 100호)에는 당시 사용하던 행정소품 및 일제강점기관련 안양지역 항일운동사료, 안양지역 독립투사들의 유품,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망라하여 전시·진열되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직후 서이면을 우량 면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면서 황무지인 안양발전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는 국민회시흥군지부 감찰부장과 시흥군보승회 조사부장 등을 거쳐 1949년에는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하여 격동기 안양건설을 견인하였다. 하지만 1930년 1월 28일 조선총독부 공훈자 명단에 올라가 있고 서이면이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로부터 1933년 6월 30일 한차례 더 훈장을 받아 친일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란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의 묘지는 호계동 방죽말(일제강점기 방앗간자리 옆 큰 느티나무 부근)에 있었는데 도시화 건설로 1977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지라 친일파 논란이 다소 있지만 그는 행정가로서 안양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지역 발전을 견인한 지역의 선배이다. 친일논란은 다소 있지만 안양의 지역선배로서 안양의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려해볼 때, 그에 대한 재평가도 조심스럽게 필요해 보인다. 한편 일제강점기 뼈아픈 역사이지만 독암의 후손인 행정가로서 안양발전을 견인하며 근대 안양발전의 기틀을 다진 조한구 서이면장을 안양의 역사 속 인물로 다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고,

병신년(丙申年) 창건되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창건: 숙종7년(1681)창건,

제향인물: 조종경, 조속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말(마을), 샛터(新基)말,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가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이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칭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 속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바, 당시 기록 속 ‘과천현 호계리’라는 공식지명이 오늘날까지 자연지명(또는 행정지명)으로 계승됨을 알 수 있고, 오늘날 ‘호계’라는 자연지명이 지역의 호랑이서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은퇴 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에 거주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그가 남긴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안양과 관련된 지명에 호랑관련 지명이 흔한 편이지만 문헌 속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안양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반가웠다. 그는 36세 관직에서 파직이후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독암조종경(1495~1535)의 생몰연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에는 지역에 호랑이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가 많다(원어: 日出籬邊多虎跡)”는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호계촌사(별장) 주변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호계동’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당시 조종경이 거주하던 지역에 호랑이가 많았고, 또한 그가 안양지역(호계동) 거주이전부터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1757년이후) 등 여러 문헌에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이 있다’라고 기술한 문헌상 정황으로 보아 영조 1757년경에도 지역의 호랑이가 유독 많은 지역만의 특성을 감안한 ‘호계’라는 지명은 사용되었으며 또한 조종경은 자기가 세운 정자의 이름도 호계리의 이름을 차용하여 그의 사저를 ‘호계촌사’라고 부른 연유가 된 것 같다. 문헌 등 사료를 통해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인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당시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호랑이가 지역에 많이 있었고 오늘날 ‘호계’라는 마을지명도 호랑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독암 조종경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금의 안양시 호계동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며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독암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호계가(원어, 虎溪邊)에 머물며 말년의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은일(隱逸)적 삶을 누렸다.

그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머문 별장인 호계촌사 앞에는 하천이 있고 뒤에 야산이 있었다. 부지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

한편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이 저술한 ‘과천호계농장잡기(果川虎溪農庄雜記)’를 통해 호계촌사의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다.

집은 서면 호계리에 있고 과천 관문에서 15~16리 떨어져 있다. 동남은 청계산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큰길에 임하여 있다. 독암정은 집 뒤 작은 언덕위에 있는데 언덕위에 서쪽으로 안양평과 금천을 경계로 바라보며 서남으로 수리산, 장항, 명악암 등지를 바라본다.
 

 


 

독암 조종경이 남긴 옛 시문(독암유고) 속에 등장하는 시어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 및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조종경은 독암유고에서 남긴 한시 209편 중 약 40여편이 호계일원에서 은거하며 읊조린 작품이다. 조종경은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40여편의 한시작품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 특히 그가 거주하던 당시 조선시대 과천현 호계리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의 시풍은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경향이 보이며 자신의 마음을 담아 풍류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그의 옛 시문 속에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촌사(村舍)’, ‘호계(虎溪)’라는 자구가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와 연관된 연관단어(溪邊, 山亭 등)들이 많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호계 및 연관단어가 실린 한시는 약 40여 편에 이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계촌사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 집 ‘독암유고‘의 고찰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짚어본다. 독암은 ‘호계(현, 안양시 호계동)’를 사랑했고 이러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한시가 ‘독암유고’집을 통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시어 속에서 독암이 그려낸 당시 ‘호계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원문참조).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등에서 발췌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산촌에는 기이한 일 많도다.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다.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 계속되는 쌀 구걸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리 떨어져 있다.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창강서원은 210평 정도에 민가가가 6호가 있었으나 관가와 거리가 멀고 또한 산속이라 도둑의 출몰이 극심했다고 한다.
 

 


 

▲독암유고 29쪽 중 일부(‘卽事’편, 즉사, 문득일이 생각나서)

계변인적녹초과(溪邊印迹鹿初過),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고

잠녀촌촌수죽롱(蠶女村村收竹籠),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농부처처편춘전(農夫處處遍春田),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독암유고 30~31쪽 중

문외이심연독비(門外泥深燕獨飛),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

토박민빈고소전(土薄民貧古所傳),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초황교외소인연(草荒郊外少人烟),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미인촌맹걸미련(미忍村氓乞米連),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의 쌀 구걸

▲독암유고 34~35쪽 중(‘新居’, 신거, 새시골집)

석전하처차우경(石田何處借牛耕)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독암유고 37쪽, 정거삼수 중(靜居三首, 조용히 살며)

춘심청두견(春深聽杜鵑),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상지제협로(桑枝齊夾路),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견폐소리외(犬吠疎籬外),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독암유고 38쪽 제호계신거 중(題虎溪新居, 호계의 새집에서)

계변인산어연정(谿邊人散漁烟靜),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청계산재동근수리(淸溪山在東僅數里)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 리 떨어졌다.

▲독암유고 57쪽 야중풍우우서(夜中風雨偶書, 비바람치는 한밤 중 우연히 쓰다)

한계하사강명신(寒鷄何事强鳴晨),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청계백악개산명(淸溪白岳皆山名),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독암유고 75쪽 山亭日暮(산정일모, 해 저무는 정자에서)

낙일어초속속환(落日漁樵續續還),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독암유고 79쪽 산촌(山村)에서

산촌기사다(山村奇事多)라, 산촌에는 기이한 일이 많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계서원(창강서원) 옛 문헌을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학술연구 작업이 뒤따라야 하겠다. 안양문화원간행(2012년 12월 발간) ‘안양문화 11호(53~66쪽 참조)’를 열람하면 번역되지 않은 ‘창강서원중수통문(滄江書院重修通文)’, ‘상량문(上樑文)’등 많은 미번역 문헌자료들이 있다. 조종경이 남긴 ‘독암유고’ 옛시문도 다수 번역되지 않아 누군가 전문가의 손길로 한시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독암유고’와 ‘호계(창강)서원’관련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논의기구가 있으면 좋겠다.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지역 관악산과 삼성산 및 호계동에는 호랑이가 있었다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과 시흥 등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쪽에도 험준한 고개에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시 관양동 수촌마을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안양 및 안양 권에는 호랑이(범)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고 호환을 방지하고자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도당제 제례의식이 아직까지 계승되어 내려오는 정황 등으로 볼 때 안양지역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다(원문,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안양지역에는 호랑이가 여간 많았음을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虎患)와 관련된 민속신앙 – 수촌마을 도당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도당제(都堂祭)가 매년 추수 후 늦가을 관양동 현대아파트 뒤 관악산중턱 제당에서 열린다.

도당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으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얀 제례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은 단앞에 자리를 깔고 산위 웃당(당집)과 제단석이 있는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 신목)인 느티나무(수령 540년, 보호수)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도당제은 호환(虎患)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으로, 도당은 마을사람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을 돕는 존재로 여겨진다.

 

△범고개이야기 전설

범고개는 박달2동에서 시흥시 목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예전에는 고개가 험하고 으슥하여 강도나 도둑들이 득실거려 ‘도둑놈 고개’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고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조선조 중엽 범고개 마을의 윤씨성을 가진 한 부자의 시종(하인)을 호랑이가 물고 고개를 넘어 간데서 전래됐다는 설과 고개 중턱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 길을 보고 있는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고갯길이 험하고 나무가 울창해서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 고개를 넘어가려면 어른 5명 이상이 모여야 지나갔습니다.

이 고개는 1976년 안양에서 수원, 인천 간 도로 포장공사 때 아스팔트가 깔렸으며, 1991년에 박달로 확장공사로 4차선이 되었습니다.

 

△남태령과 호랑이

 

남태령은 서울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 가는 고개 길이다.옛날 관악산 호랑이가 나오는 고갯길로 유명한 곳. 옛날 한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여서 넘었다는 험한 고갯길이다

(출처: blog.naver.com/55072381/22000668619)
 

 


 

남태령 호랑이의 전설(동네방네이야기)

불과 수 십년 전만해도 남태령 고개는 비포장도로에 차들도 많지 않던 시절...

그 이전부터 동네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으니 남태령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다.

호랑이는 민첩하기로 유명하고 몇 미터씩 뛰어넘는 재주가 있으며 주로 밤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란다. 남태령 인근에는 범바위, 호랑이굴(관악산쪽) 등 호랑이에 대한 이름이 유독 많았었는데 그 흔적은 호랑이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철에 남태령 고개 주변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많이 발견되었었다. 호랑이의 발자국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난히 크다.

옛날에 사냥꾼이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산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데 한쪽은 관악산과 이어져 있고, 또 한쪽은 우면산을 지나 청계산에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참을 따라가 보면 발자국이 끊겨져 있어서 허당을 치기 일수 였다. 생각해 보건데 멀리 넓이뛰기를 하거나 뒷걸음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무꾼이 간혹 깊은 산속에서 나무하다가 호랑이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관악산 쪽에서 암놈이 서식하고, 청계산에서 숫놈이 서식하여 남태령에서 조우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호랑이가 급격한 산업화로 차량이 많아지고 포장도로가 생기고 군부대의 철책이 들어서는 등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동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호랑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이 멸종해 가고 말았다. 남태령 고개 도로 근방은 과거 야생동물의 시체가 엄청 많았었지만 이마저도 요즘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출처: blog.daum.net/lineme/10596936 남태령 전원농장 블로그 내 검색

농부의 지혜 2007.02.05 23:32

 

△지명 속에서 호랑이 관련성을 보이는 지명

▲안양시 -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동), 호암초교

▲금천구(시흥동) - 호암산(湖巖山), 호압사(虎壓寺), 호암로

호암산성(虎巖山城, 사적 제343호, 통일신라6~7세기, 문무왕 12년경 추정)

범계는 호계(虎溪)의 호(虎,호랑이)를 순 한글 말로 표기한 것이고 계(溪.골짜기)는 골짜기를 의미하므로 호랑이가 많은 골짜기를 ‘범계’로 풀이할 수 있다.

 

△문헌(독암유고) 속 등장하는 호랑이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지명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호계 1동- 덕고개(德峴), 덕현마을

군포신사거리에서 과천방면 약 400미터지점 흥안주유소 일원으로 예전에는 큰 고개가 있어 이 일대를 덕고개(德峴)라 불렀다. 오늘날 주변에 덕현초등학교가 있는데, 이는 덕고개(덕현)에서 따온 학교이름이다. 이 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라 현,호계시장 북쪽 100미터지점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 데, 지금도 이 지역 자연마을 지명을‘수풀아래’라 부르는 연유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2일 마을의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정제(德峴井祭, 덕고개우물제, 마을제, 민속신앙)를 지내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한그리스인회보’에 다르면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추정된다.

 

△호계 2동- 방축말(방죽마을, 房築洞)

방축말은 안말과 새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 과천군 하서면의 관가가 있었고 그후 1914~1917까지 시흥군서이면사무소가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조선시대 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둑(제방)을 쌓았는데, 그 주변이 취락지이므로 방축말(제방이 있던 마을)이라 부른 연유가 되었다. 숙종때 발간된 이천읍지(異川邑誌) 제언조(堤堰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堰在縣西南門十八里)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지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연대는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고,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 제언조(堤壙條)에 호게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고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 길일을 택해 방축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오다가, 1970년대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효성안양공장외곽 도로(호계도서관 방면)에 도로명으로 ‘방죽로’, ‘방축사거리’가 있는데 이는 자연마을지명인 방축말(방축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 안양의문화재, 자료제공 안양시, 참고:안양시지 )

 

△호계 3동- 포도원

구,군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 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경향포도협동조합’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자 주변일대가 포도단지로 변모되어 한때 안양포도산업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도시화 바람이 불어 주택지로 변모했다.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호계서원(虎溪書院), 경북 안동시소재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다가 광해군 12년(1620)에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2분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평면상으로는 一자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은 방이다.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 칭 호계서원 (虎溪書院)

경상북도유형문화재제35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73.08.3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번지 , 84-4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호계서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문화예술과 054-840-5230

자료제공 문화재청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서원.

 

도봉서원터는 서울(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으로 꼽힌다. 도봉서원터는 1573년에 창건, 조광조의 위패를 모셨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도봉서원의 모습은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봉산 등산로 계곡 한편에 사당만 남아 있다. 건국대박물관 소장, 도봉서원도 그림을 통하여 창건초기의 도봉서원 모습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道峯(도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송시열은 1723년(경종3) 중앙의 정치세력 변화로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배향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이 설치되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6·25사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700여평 등이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도봉서원 [道峯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전기

성격 교육기관, 서원

건립시기·연도 1573년(선조 6)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282-329

자료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고서원(臨皐書院), 경북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据) 등의 사람들이 칭송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 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 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齎), 서재는 함육재(涵育齎),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및 경외에는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출처: 포털 바로가기 임고서원 http://imgo.yc.go.kr)

 

△물계서원(勿溪書院), 경북 창녕군 소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 성삼문, 성담수, 성수침, 성운, 성제원, 성혼, 성윤해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성삼문(成三問)·성담수(成聃壽)·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成汝完)·성희(成熺)·성수경(成守慶)·성문준(成文濬)·성람(成灠)·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후기

성격 서원

건립시기·연도 1712년(숙종 38)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물계서원 [勿溪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출처: 디지털광명문화대전

[정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조선후기 서원 터.

[개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에 역대 명현을 모시고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함께 지닌 지방의 사설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는 전학 후묘의 배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재 양성과 유교적 향촌질서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원은 붕당의 정치적 이해를 지닌 역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1865년(고종2)부터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서원의 강제 철폐령을 내렸고, 이에 47개의 대표적인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충현서원 역시 이 시기에 함께 철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오리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퇴해 살면서, 처음에는 이곳 금천현의 촌로들과 상의하여 강감찬과 서견을 기리는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 이 고장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면서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여, 삼현사(三賢祠)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1676년(숙종2) 왕이 사액(賜額)을 하였다 이후 정조 때 사액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1856년(철종7)에 개축되었다. 현재 서원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 있다. 충현서원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원익의 구택이 있던 곳으로, 서원 터 아래에는 ‘탄금암(彈琴岩)’이라는 글씨가 있는 바위가 있으며, 이전에는 관감정(觀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현재 민가 형식으로 지어놓은 기와집 건물 바깥채에는 관감당(觀感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세기경에 건립되었다는 오리영우(梧里影宇) 1동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서원 터에는 예전에 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함께 초석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복원 사업을 하면서 위쪽으로 삼상대(三相臺)와 풍욕대(風浴臺)를 건립하였다. 충현서원지는 1985년 6월 28일에 경기도기념물(제8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왔으나, 2010년 경기도기념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을 배향했던 서원지이다. 주변에는 이원익의 유품과 정신을 기리는 전시관이 함께 있어 이원익의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잘 간직한 장소라 할 수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80호

문화재 지정일 1985년 7월 29일

소재지 주소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4 [오리로347번길 5-6]

이칭/별칭 삼현사(三賢祠),충현사(忠賢祠)

유형 유적/터(지정면적 450㎡)

시대 조선/조선 후기

건물 건립시기/일시 1658년

소유자 충현문화재단

집필자 김지석 안양시문화재전문위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사진제공(자료제공): 안양시

 

선현의 배향과 교육을 담당하던 호계서원의 터전은 호계동 ㈜효성안양공장 뒷산에 있는 호계근린공원 매봉광장 아래쪽 고가도로 하부지역이다. 구,신진자동차학원 동향 1백여 미터 지점에 자리했던 안양지역 유일한 서원인 호계서원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생기면서 공사로 인한 추가적인 멸실로 서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정이다. (소재 :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산43번지)

 

□호계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최갑환(崔甲煥, 2014년 94세)옹- 지역원로(안양원로회 회원)

안양시 호계동 방죽마을에 거주하면서 호계서원 주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갑환원로는 “호계서원터에 안양교육의 발상지로서 상징을 담은 표석(팻말)이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에 널린 와편과 주춧돌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매우 안타깝다고 토로하면서, 호계서원터에 넓은 공간과 밤나무 5~6그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수일제연구소장)

(문학박사, 다음카페 ‘수일제’ 운영자)

퇴색되는 도덕과 숭조사상(崇祖思想)을 가르치는 안양유교문화교육의 장이 필요하다. 체계적 사료의 정리와 함께 안양유일의 서원인 호계서원을 옛터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올곧은 선비의 정신 및 유교사상을 계승 및 육성하는 요람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지에 담긴 일화를 구술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 둘씩 떠나감으로서 그 문화적, 역사적 발자취도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최소한 서원지를 알 수 있는 표지석(表石)과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표석과 안내판이라도 최소한 설치하고 향토문화자원 컨텐츠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관련 사료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이 필요하고, 노출된 자료 중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사료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사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점 있다. 안양 유일의 서원지에 있었던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오늘날 혼탁한 시대에 있어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며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성현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

서원은 명현의 제사와 교육기능을 지닌 지방사립교육기관이다.

독암 조종경과 창강 조속을 배향했던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은 안양지역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말년 안양에 살았던 독암 조종경은 ‘호계’와 관련된 글을 다수 남긴 분으로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과 관련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점 여간 아쉽고 유감이다.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이 사라지면서 지역에 호계서원의 실존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와편과 주춧돌 등 서원유적 관련 유구가 발굴 조사되긴 했지만, 이후 아무런 후속대책 없이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에 있던 서원이지만 체계적인 자료정리와 연 구성과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아쉽다. 호계서원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이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논의기구인 ‘(가칭)호계서원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여 창강(호계)서원관련 옛 문헌자료를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한시번역 등)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연구위원회 설립이 어렵다면 안양향토문화연구소, 안양학연구소 등 지역사회 연구단체에서 이 분야에 대한 추가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안동에 있는 한자동명의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비롯하여 다수의 지방서원이 향토관광자원 및 시민 유교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부 시군구에는 폐서원지에 버젓한 서원을 복원하여 시민교육 및 역사관광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안양의 호계서원은 초라한 수준이다. 선비의 정신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안양시청 홈피 등에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게재하여 시민들과 더불어 함께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안양의 호계서원 관련 추가적인 연구 성과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 한편 호계근린공원과 연계 창강서원지(호계서원지)를 지역의 사랑받는 유적지(또는 문화공간)로 가꿀 필요가 있다. 향후 기회가 되면 서울특별시 도봉서원 복원사례(1972 복원) 등 타시군구의 서원복원사례를 벤치마킹하고 민관이 함께하는 ‘(가칭)호계서원 재건위원회’기구를 발족하여 안양의 잊혀진 서원교육의 역사복원을 추진하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고려해 볼 수 있다.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이며 발전방안에 대한 지역사회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참고문헌

1.안양문화(安養文化) 통권 제11호 2012년 12월

안양문화원발행(편집위원장 김정석)

2. 안양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08.25.인쇄 안양시,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

3. 안양문화사랑, 안양문화원 (1998.03.31.)

[202007028]부정투표하고도 뻔뻔한 안양시의회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을 구속 수사하라.

안양지역얘기/성명

(성명서)“부정투표하고도 뻔뻔한 안양시의회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을 구속 수사하라.”

풀뿌리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 기조와 가치, 희망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이 정치 일선에서 아귀다툼을 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부정투표에 책임지는 사과도 없이 간 괴한 꾀를 부리고 시민을 속이고 우롱하는 것도 모자라 그 뻔뻔함과 철면피는 도대체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적 망신을 당한 안양시의회 더불어민주당시의원들의 부정투표 담합과 협박, 강요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 사태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뻔뻔하게 안양시민의 행사에 참여했다고 오히려 언론 홍보를 하는 것을 보니 시민의 혈세를 이용하는 행정 광고비의 위력이 대단함을 새삼 느낀다.

엄중한 책임조차 철면피로 외면하고 불법투표 은폐를 삼삼오오 모여 모의하며 다니고 마치 당당하다는 듯 보여주기식 행사에 참여하고 자화자찬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행동들에 시민들이 속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어디서 못된 짓들만 배워 하는 행동이 역겹기 그지없다.

당신들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추태이며 위법행위이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 추악한 범죄일 뿐이다. 우리 소시민들이라면 자식, 가족들, 지인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낯부끄러워 집 밖에 얼굴조차 들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의원의 자리는 철면피 철 밥통 자리인가. 그 자리는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그 봉사가 인생의 보람인 자리인데. 작금의 사태를 보면 그 자리에 연연하며 양심을 팔아 먹 은지 오래 된 것 같다.

이러하니 안양시장이 5.18에 가수 데뷔 춤판을 벌여도, 골프나치고 다녀도, ~ 무엇을 하던 감싸기나 하고 시민이 내몰려 죽어간다 아우성을 쳐도 등 돌리고 외면하고 ,공공목적 부지를 사유화해 수천억 특혜가 누구에게 가는지 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거 같다.

오호 통재라~

양심 없는 이들이 시민 혈세를 축내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심히 부끄럽고 창피한건 안양시민의 몫일 뿐 그 창피함은 저들에겐 사치일 뿐이었다.

스스로 양심적이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요구를 해봐야 허공에 메아리일 뿐이다.

우리 시민정의사회실천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검찰은 뻔뻔한 부정투표 현행범들을 즉각 구속 수사하라!
2. 더불어 민주당은 이들을 즉각 제명하라!

우리는 정의로운 심판이 관철되는 그날까지 시민들과 함께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20. 7. 28

시민정의사회실천위원회

[202007028]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 2차 기자회견문

안양지역얘기/성명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문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7월 3일, 안양시의회의 의장선출 과정에서 사전 모의와 담합으로 기표용지의 표기 부분을 각 의원에게 배정해 누가 투표했는지 알아볼 수 있게끔 하여, 사실상 공개투표를 자행한 민주당 시의원들에 대해 7월 13일 1차 규탄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연대회의의 1차 성명을 통한 요구사항에 관하여 민주당 시의원들은 7월 21일 화요일에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이 입장문에 통렬한 사과도 아무런 실천계획도 없이, 변명과 책임전가만 나열했다. 이에 우리는 1차 규탄성명에서 촉구한 내용이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이번 제8대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건을 대응하기 위해 조직을 확대·개편하여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를 출범한다.

또한, 부정선거로 선출된 정맹숙 의원이 자진하여 의장에서 사퇴하고, 가담한 의원들 모두가 철저히 반성하여, 의장재선거를 통해 시의회가 정상화될 때까지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후속 대응방안을 결의하여 발표한다.

 

1. 이번 부정선거로 선출된 더불어민주당 정맹숙 의장은 본인의 과오를 통렬히 반성하고 시의장직에서 사퇴하라. 의회민주주의를 능멸한 책임을 지고 사퇴로 반성을 증명하라.

 

2. 민주당 안양시의원들은 이번 부정선거에 관해 구체적 행동을 즉각 실천하라. 시의장의 법령위반에 대한 법적 판단은 법원에 맡기고, 시의회는 시의장 불신임안을 결의하라.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는 위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안양시의회 구성원 모두를 인정하지 않겠다. 또한 의회 정상화를 위한 시민행동을 바로 지금부터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다.

 

이상.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안양시의회 의장선출 부정선거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

단체연명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안양YMCA,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 대안과나눔,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안양나눔여성회, 안양시장애인인권센터, 율목아이쿱생협, 안양군포의왕시민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안양평화의소녀상네트워크, 유쾌한공동체, 행복한마을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안양여성의전화, 안양YWCA) /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민주노총경기중부지부 / 경기중부민생민주평화연대 / 615공동선언실천경기중부본부

 

 

 

대표 발언(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이하나 사무국장)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에서 지방자치제의 근간을 마련했고, 1949년 지방자치법을 만들어 지방의회가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1961년 군사혁명위원회가 지방의회를 해산시켰고, 이후 30년동안 지방의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1988년 지방자치법을 부활시켜, 1991년, 군부독재가 30년간 가로막았던 지방자치제와 지방의회가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지방의회의 부활을 맞이한 지 30년이 됩니다.
무수한 시민의 희생과 목숨을 건 투쟁으로 부활시킨 지방의회를 당신들이 모욕했습니다.
6대 때도 이렇게 했다, 관행이다, 이탈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누군가 배신하면 우리 모두가 손해를 본다는 말이 방송을 타고 전국에 퍼졌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촛불이전의 적폐를 청산하고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 더 나은 의회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양시의회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촛불 이전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해,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원칙을 깨버렸습니다.
의회는 변명합니다.
몰라서 그랬다. 시켜서 했다. 원래 그렇게 했다.
몰라서 그랬다면 안양시의회는 무지한 것이며, 강자가 지시한대로 따른 것 뿐이라면 무능력한 것이며, 관행대로 따랐다면 바로 당신들이 적폐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가 사라졌던 바로 그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의지가 아니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바로 나치의 아이히만이 한 말입니다.
안양시의회는 시민들이 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한 표를 지금의 의원들에게 투표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의회가 앞장서서 권력에 기생하는 투표행위를 하면서, 시민들에게 무슨 낯으로 의원이라 말하고 다닙니까? 주말에도 여기 저기 의회의 이름으로 활동했던데, 시민들이 반겨주니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안양시의회는 이 모든 일을 함께 저질렀습니다. 시민들이 당신들 앞에서 웃어준다면, 의회를 무시하는 겁니다. 당신들 앞에서 화를 낸다면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주겠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준엄한 명령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파렴치한 안양시의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요구사항을 조속히 실천하고, 당신의 삶으로 반성을 증명하십시오.

 

 

 

 

 

 

 

 

 

 



 

[20200727]비리의혹 미래통합당 이희재 군포시의원 사퇴촉구 기자회견문

안양지역얘기/성명

 

비리의혹 미래통합당 이희재 군포시의원 사퇴촉구 기자회견문


군포시민사회는 참담한 심정으로 여러 번의 부적절한 행위로 문제를 일으킨 미래통합당 이희재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미래통합당 이희재 군포시의원은 군포시 금정역 일대 재개발사업과 관련하여 지주들로부터 토지매수 작업을 대행하는 용역 업무에 뛰어들어 다수의 개발업체와 금전문제로 분쟁에 얽혀 개발업체로부터 수억원대의 사기혐의로 피소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개탄스러운점은 지난해에도 이희재 의원은 법무사로 겸직하며 군포시 등기업무를 대행하여 영리 거래금지 위반으로 시의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재판부는 [지방자치법과 군포시의회 의원 윤리강령 및 윤리실천규범에 관한 조례] 위반은 인정하지만, 시의회가 경고나 출석정지 등 다른 징계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제명한 것은 재량권을 넘는다는 판결을 내려 시의원 자격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포시민은 이희재의원을 겨우 제명은 면했을 뿐 윤리강령을 위반한 부도덕한 시의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물의를 일으킨 이희재 의원은 자중하고 공직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재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또다시 사기혐의로 피소되어 28만 군포시민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6일 [市 등기대행 논란 군포시의원 '수억대 사기' 피소 사건] 기사가 보도된 직후 다급한 나머지 이희재 의원은 7월 15일 시의회에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사건을 보도한 언론에게도 사퇴 입장문을 보내 검찰 조사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의원직을 내려놓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7월 22일 이희재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과 의회에 공개 약속한 사퇴를
번복하는 뻔뻔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기혐의로 피소된 이희재 의원 자신은 법률자문만 했다는 항변을 하며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월22일 사퇴번복 기자회견 시 밝힌 소명서에는 개발동의를 받기 위해 설립된 비케이홀딩스라는 회사의 주식을 소유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고소한 시행사와 비케이홀딩스라는 회사의 계약서에 연대보증을 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의원의 자격으로 이해관계가 첨예한 재개발 관련 업체의 법률자문을 하는 것도 부적절한데 주식을 소유했었다는 점, 업체간 계약에 연대 보증인으로 날인하였다는 점은 이희재 의원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사퇴한다, 안한다 시의원이 장난하는 자리입니까!
개발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시의원이 해야 할 일입니까?
개발을 위한 용역 업체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시의원이 해야 할 일입니까?

옛말에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고 하였거늘 시민을 대의하여 행정을 감시해야할 시의원이 재개발사업 용역사업에 뛰어든 것도 모자라 개발업체로부터 사기혐의로 피소된 작금의 현실에 통탄할 일입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시민의 대표로 선출된 공직자가 시민을 위해 일은 하지 않고 직위와 권한을 남용하여 사익을 쫒는 행위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군포시민들과 군포시민단체협의회는 추후 법적인 판결과 무관하게 비리의혹 이희재 시의원 사퇴를 위해 대 시민 홍보전, 주민소환운동 검토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군포시민들에게 위 사실들을 알릴 것입니다.

군포시민사회는 모든 정당들에게 요청합니다.
이후 모든 정당들은 후보공천 시 도덕적 검증까지 철저히 하여 더 이상 불미스러운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 부적절한 행위로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킨 미래통합당 이희재 의원은 당장
      사퇴하라.
하나. 미래통합당은 자당 의원이라고 감싸지 말고 비리의혹 이희재 의원을 즉각         제명하라.
하나. 군포시의회는 비리의혹이 있는 이희재 의원을 즉각 제명하라.
                    
  
2020년 7월 27일

군포시민단체협의회, 교수노동조합 한세대지부, 교육자치를위한군포시민의모임,
군포YMCA, 군포경실련, 군포아이쿱생협, 군포여성민우회, 군포청년회, 군포탁틴내일, 군포환경자치시민회, 민주노총경기중부지역본부, 아시아의창,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인생나자작업장사회적협동조합, 케피코노동조합, 한세대정상화지역공동대책위원회, 행복한마을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한세대학노동조합

[20200717]안양시의회 의장선거 관련 더불어민주당 안양지역 각 지역위원장(국회의원) 성명

안양지역얘기/성명

<안양시의회 의장선거 관련 더불어민주당 안양지역 각 지역위원장(국회의원) 성명>

 

“통렬한 반성,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역 정치의 변화와 개혁을 반드시 실현해 내겠다.”

 

최근 안양시의회 의장 선거를 둘러싸고 빚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이재정(안양 동안을), 강득구(안양 만안), 민병덕(안양 동안갑) 국회의원은, 안양지역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지역위원장으로서 무거운 마음으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뒤흔든 일련의 사태에 대한 여러 시민들의 문제의식에 그 책임을 통감하며 뼈아픈 반성으로 함께 하겠다.
의회는 시민의 대표기능, 입법기능, 행정기관에 대한 견제와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시의원은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위임한 국민(시민)의 권위에 부합한 품격과 태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최근 일련의 상황들은 안양시의회 전체의 명예와 품격을 실추시키고, 안양시민들의 자존심마저 훼손시켰다. 시대에 맞지 않는 구태 정치로, 진작에 폐기됐어야 할 모습들이다.

지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양 시민들이 보여준 것은 정치 개혁의 뜨거운 여망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안양지역 국회의원들은 이번 일을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지역 정치의 구태 전반을 철저히 점검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통렬한 반성,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역 정치의 변화와 개혁을 반드시 실현해 내겠다.
어려운 시기, 그래도 정치에 희망을 걸고 풀뿌리 자치의 공동체를 가꾸어온 우리 안양시민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항상 귀 기울이겠다.

희망의 정치를 위한 개혁의 길에 앞으로도 아낌없는 질책과 응원 부탁드린다.

 

2020. 7. 16. 더불어민주당 안양지역 각 지역위원장(국회의원)
이재정(안양 동안을) · 강득구(안양 만안) · 민병덕(안양 동안갑)

[20200713]안양시의회의 민주주의 역행 행위를 규탄한다

안양지역얘기/성명

 

안양시의회의 민주주의 역행 행위를 규탄한다

지난 3일, 안양시의회는 전임 의장의 2년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의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2018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받들어 힘차게 출발한 안양시 제 8대 의회가 두 번째 의장을 선출하여 시민의 복지와 안녕에 집중하길 바랐다.
하지만 안양시의회는 의장 선거에 앞서, 무기명 비밀투표의 원칙을 깨고 당론에 대한 이탈표 방지를 막기 위해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자리를 지정하여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알 수 있는 꼼수를 부렸다.
심지어 의회 내에서는 ‘6대 때도 이렇게 했다’며,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며 무기명비밀투표의 원칙을 깨는 행위에 동참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지방자치법 제48조에는 의장과 부의장의 선거법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제48조 1항, 시ㆍ군 및 자치구의 경우 의장과 부의장 각 1명을 무기명투표로 선거하여야 한다. 지방자치법에 의거하여 구성된 의회에서 무기명투표라는 절대적인 조건을 위반한 선거는 무효이며 이로 인해 선출된 의장 역시 신임을 받을 수 없다.

촛불혁명을 완수하라는 시민의 명을 받고 당선된 시의회는 두 번째 의장선출을 반민주적 행위로 담합하여 민주주의를 모욕했다. 사전에 모의하여 투표용지에 표기법을 정하고 비밀투표의 원칙을 깨뜨렸으며, 각 개인이 가진 공정한 투표권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또한 이런 식의 의장선출이 관례라며, 동일한 수법으로 수차례 담합선거를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양시의회는 초등학생도 지키는 무기명비밀투표의 원칙을 위반해 민주주의에 역행하며 의회 민주주의에 오물을 끼얹었다. 기초단체의 의회민주주의가 얼마나 엉망인지 불법적, 비민주적 행동을 앞장서서 자행해 모든 국민에게 보여줬으며 안양시민의 명예를 훼손하고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했다. 이번 부정선거는 전국에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기초의회에 대한 능욕이며, 지방자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위법행위이다.

시민들이 지키는 모든 윤리와 도덕을 팽개치고, 짬짬이로 모략하여 의회를 구성하는 안양시의회는,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는 의회의 역할과 의원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렸다. 관례라는 핑계로 부정선거를 반복적으로 자행한다면, 안양시의회는 더 이상 촛불혁명을 완수할 자격이 없다. 이에 안양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가장 기초적인 시민의 의무와 의회민주주의를 내팽개친 안양시의회를 규탄한다.

안양시의회는 촛불혁명으로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능욕했다. 의회는 시민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의회가 가진 권력은 오롯이 시민들에게서 나온다. 의회가 앞장서서 시민들을 모독하고 지방자치제의 근간을 뒤흔든 행위에 대해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하나. 안양시의회는 지방자치법에서 명시한 무기명투표의 원칙을 위반했으므로, 선거를 무효화하고 의장당선을 취소하라!
하나. 안양시의회는 시의원들의 반복된 일탈행위로 인해 시민들의 품위를 현격하게 모독한 것에 대해 주요 언론에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하라!
하나. 지방자치법을 위반하고 불법선거를 저지른 의원들의 소속정당은 이들의 위법한 행위에 관해 철저히 조사하고 처벌하라!

2020년 7월 13일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연명
대안과나눔, 안양군포의왕시민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 안양나눔여성회, 안양YMCA, 안양YWCA, 안양여성의전화, 안양평화의소녀상네트워크, 안양시장애인인권센터, 율목아이쿱생협, 유쾌한공동체,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행복한마을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참고 : 제 8대 안양시의회의 구성
만안구
가 이호건 (더민주), 최우규 (더민주)
나 임영란 (더민주), 정완기 (미통당)
다 이은희 (더민주), 이재현 (미통당)
라 김선화 (더민주), 서정렬 (미통당)
동안구
마 강기남 (더민주), 이성우 (미통당)
바 김은희 (더민주), 박준모 (더민주), 박정옥 (미통당)
사 최병일 (더민주), 정맹숙 (더민주), 음경택 (미통당)
아 이채명 (더민주), 김필여 (미통당)
비례
윤경숙 (더민주), 정덕남 (더민주), 김경숙 (미통당)

더민주 13, 미통당 8 /여성 13, 남성 8

[20200708]의왕시의회,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 의왕역 정차 기본계획 반영을 위한 촉구 결의안

안양지역얘기/성명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 의왕역 정차 기본계획 반영을 위한 촉구 결의안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는 지하 대심도 터널굴착을 통한 노선 직선화 등으로 통행시간을 단축하여 수도권 교통난 해소에 획기적인 개선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며 이용객들의 출․퇴근 교통부담 완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가 되는 사업이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GTX-C노선 건설사업에 대하여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심의를 받을 당시 의왕역 인근에 상당한 공공택지개발사업이 계획되고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GTX 의왕역 정차를 통한 광역교통개선대책에 관한 국토부의 심도 있는 검토가 없다는 점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의왕역은 의왕시에 하나뿐인 철도특구 내 대표역이면서 인근 군포시 부곡지구와 송정지구, 수원시 입북동과 당수동 주민들도 이용하는 등 3개시에 걸쳐 있는 국철구간의 역이며, 또한 의왕역은 반경 2㎞이내 확정된 공공택지개발사업만 3개 지구로 신혼희망타운, 뉴스테이 사업 등 서민주거 안정을 위한 공공택지 분양 등 총면적 145만㎡, 2만7천명의 신규 입주가 계획되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의왕역 이용객이 상당수가 늘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국토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규모의 분할 개발로 광역교통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교통대책은 현재 제시되지 못하고 있어, 의왕ICD터미널, 의왕테크노파크 등 산업교통 수요와 신규입주 수요가 겹치는 시점의 영동고속도로 등 주변 도로의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민불편은 예견되는 점으로 시민을 대표한 의왕시의회는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이에 의왕시의회는 기술적 여건과 경제성을 모두 갖춘 의왕역의 정차는 그 명분과 당위성이 확보되었으므로 국토부가 수립중인 GTX-C 사업 기본계획상에 반영하여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17만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의왕시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문을 채택하고자 한다.

하나.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의왕역 정차를 기본계획에 반영하라.
하나. 광역교통개선 대책 없는 무분별한 공공택지 개발은 반대한다.
하나. 의왕역 인근 개발지역을「광역교통 특별대책지구」로 지정하라.

 

2020년 7월 8일

의왕시의회 의원 일동   

[20200708]의왕시의회, GTX-C 노선 의왕역 정차 기본계획 반영 촉구 결의안

안양지역얘기/성명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 의왕역 정차 기본계획 반영을 위한 촉구 결의안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는 지하 대심도 터널굴착을 통한 노선 직선화 등으로 통행시간을 단축하여 수도권 교통난 해소에 획기적인 개선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며 이용객들의 출․퇴근 교통부담 완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가 되는 사업이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GTX-C노선 건설사업에 대하여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심의를 받을 당시 의왕역 인근에 상당한 공공택지개발사업이 계획되고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GTX 의왕역 정차를 통한 광역교통개선대책에 관한 국토부의 심도 있는 검토가 없다는 점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의왕역은 의왕시에 하나뿐인 철도특구 내 대표역이면서 인근 군포시 부곡지구와 송정지구, 수원시 입북동과 당수동 주민들도 이용하는 등 3개시에 걸쳐 있는 국철구간의 역이며, 또한 의왕역은 반경 2㎞이내 확정된 공공택지개발사업만 3개 지구로 신혼희망타운, 뉴스테이 사업 등 서민주거 안정을 위한 공공택지 분양 등 총면적 145만㎡, 2만7천명의 신규 입주가 계획되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의왕역 이용객이 상당수가 늘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국토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규모의 분할 개발로 광역교통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교통대책은 현재 제시되지 못하고 있어, 의왕ICD터미널, 의왕테크노파크 등 산업교통 수요와 신규입주 수요가 겹치는 시점의 영동고속도로 등 주변 도로의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민불편은 예견되는 점으로 시민을 대표한 의왕시의회는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이에 의왕시의회는 기술적 여건과 경제성을 모두 갖춘 의왕역의 정차는 그 명분과 당위성이 확보되었으므로 국토부가 수립중인 GTX-C 사업 기본계획상에 반영하여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17만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의왕시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문을 채택하고자 한다.

하나.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의왕역 정차를 기본계획에 반영하라.
하나. 광역교통개선 대책 없는 무분별한 공공택지 개발은 반대한다.
하나. 의왕역 인근 개발지역을「광역교통 특별대책지구」로 지정하라.

2020년 7월 8일

의왕시의회 의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