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1010]안양 신촌동 언덕위 수령 200년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10.10/ #안양 #오래된것 #느티나무 #200년 #평촌 #신촌동/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에 있는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느티나무 공원이라고 하지요. 느티나무 앞에 느티나무 표지판이 있지만 언덕 올라가는 길목에는 쓰레기가 쌓여 보기에 흉합니다. 공원 주변을 청서하고 나무 아래에는 잠시 앉을 수 있는 벤치라도 있으면 깊어가는 가을에 어울리는 조망이 멋진 쉼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90924]수령 360년 넘는 안양 석수1동의 회화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15/ #안양 #동네 #골목 #보물 #미래유산 #오래된것 #360년 /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안양박물관 후문앞 골목에 자리한 회화나무. 수령 360년의 나이를 가진 이 나무의 높이는 15m, 나무의 둘레는 2m인 마을나무이다.
1850년대에 마을주민이 심어 가꾸어 왔고, 마을정자목으로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회화나무는 옛날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출세할 때 마다 심었다고 하여 선비나무, 학자나무로 불리우며 주로 궁궐(관가)이나, 서원 주변에 식재하어 장소의 품격을 높이 우러러 보는 상징으로 심었다. 안양시 행정 중심인 시청 주변에도 가로수로 회화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석수동 회화나무는 마을나무로서 수백년간 주민들과 함께하는 정자목으로 사랑을 받아온 노거수이기에 시가 보호수로 지정했지만 관리부재로 나무 아래에는 쓰레기, 나무앞에는 불법주차, 나무 옆으로는 도시생활형 주택 신축이 시작되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느티나무 수령이 현재 표지판에 360년으로 기록돼 있으나 이보다 더 오래됐다고 한다. 따라서 전문가의 정확한 나이테 분석 등 나이 측정과 함께 안양시 보호수 또는 마을나무로 지정해 주변 울타리와 표지판 설치 등 보호와 관리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90915]1955년 안양1동에 심어진 이승만대통령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14/ #안양 #동네 #골목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옛태평방직 #느티나무 #이승만 #1955/
재건축을 추진중인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1955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라 표식이 있는 나무이지요.
한때 지역신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와서 나무를 심었다는 글이 게제돼 직접 식수와 기증 식수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기록 조차 없지만 과거 굴뚝 산업도시 안양의 위상을 드러낸 나무인데 향후 아파트 재건축으로 나무가 잘 보전될지 궁금하네요.
이 나무를 처음 찾았던 2013년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보면 대략 나무에 얽힌 역사를 이해할 듯싶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560&fbclid=IwAR3-hDYr-v5B8EzAjeOX7QGr9yk1iW97x3sIhJACuALXJJzUEUOX45tZH4E

 

경기 안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식수(기증)한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6월 22일 오후 안양 마을 탐사길에 찾았다.
나무가 있는 곳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진흥아파트 단지내 8동 3∼4호 입구로 수종은 느티나무, 현재 크기는 밑동 둘레 약 1.6m에 높이 약 20m로 수령은 70~8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 서기 1955년 4월 5일'이라는 백색의 사각철재 표식이 세워져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해오고 있으나 정작 아파트 주민들은 이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안양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나무가 심어졌다는 1955년 당시 이 자리에는 삼흥방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흥방직은 1953년 1월 서선하 사장이 설립했다가 1956년 금성방직 김성곤 사장이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바뀐 곳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안양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였다.
안양에는 수량이 풍부한 안양천이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 섬유공장과 제지공장들이 들어섰다. 해방이후인 1950~60년대에는 산업시설들이 줄지어 자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의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안양을 몇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0월 17일 이기붕 민의원의장,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공보실장 등과 함께 안양을 찾았다. 이는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이 동양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안양시 석수동에 마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현재 석수2동 아파트와 군부대 자리) 기공식에 참석한 것으로 당시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94호)에는 영화연극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촬영소 모형도를 돌아보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어 1956년 10월 17일에는 안양3동에 있던 금성방직과 안양4동에 있는 삼덕제지 공장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했다.(대한뉴스 제94호)
그러나 1955년에 안양 삼흥방직(이후 태평방직)을 방문하거나 기념 식수한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느티나무에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란 표식이 부착됐을까.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에 온다고 해서 가봤더니, 안양역에서 태평방직까지 흰 광목이 깔렸고 대통령이 그 위를 걸어와 나무를 심는 것을 봤다. 그때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기념이라며 대통령이 밟고 지나갔던 광목을 조금씩 찢어가기도 했다."
이는 2008년 11월 14일자 <안양시민신문>에 실린 글로 안양토박이며 아파트 관리계장을 했던 서아무개(64)씨의 증언이다.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진흥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그 나무를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기증식수가 아닌 방문 기념식수가 되어야 한다.
이에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전문위원에게 확인한 바로는 "1955년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 금성방직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 대통령 이름으로 기증식수를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이 또한 일자가 맞지를 않는다.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15일로, 그는 당시 금성방직 공장을 방문했다.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66호)에는 방직공장의 내부 모습, 일하는 직공들,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작업모습을 살피는 함태영 부통령, 공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찾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나무 옆에는 목재 표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하게 부식돼 2005년에 현재의 철제 표식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주민이 증언과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규모 굴뚝공장들이 많았던 안양을 찾았던 기록을 볼 때 이 느티나무는 과거 산업도시로서의 안양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기념물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만은 분명한 듯하다.

 

 

 

[20190915]안양 삼막마을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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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안양 #느티나무 #500년 #석수동 #서낭할아버지나무 #/ 안양시 석수동 삼막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 나무가 2그루 있다. 바로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는 500년이나 된 느티나무로 군데군데 상처를 치유한 흔적에서 500년의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시원하게 쭉쭉 뻗은 가지들이 아직도 늠름한 모습을 자아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로 나뭇잎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할아버지 나무의 모습도 사뭇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 할아버지나무’라고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떠나 외지에 일을 보러갈 때나 또는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갈 때면 어김없이 이 나무에 와서 인사를 하고 다녀온다고 한다. 그저 큰일이 없어도 마을을 들고날 때 마을의 수호신인 할아버지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마음의 정성을 드린다.
이 할아버지 나무 옆에는 곧게 뻗은 고사목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 나무는 이 향나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향나무가 생명을 다하고 새로운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긴 세월을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일까. 얼핏 보면 느티나무의 한 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할아버지 나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전쟁 직후에 어느 미군이 이 느티나무 가지를 땔감으로 쓰기 위해 가지를 잘라 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신성한 나무라 안 된다고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부대에 원인 모를 불이 나 피해가 컸다. 사람들은 서낭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때마다 정성껏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할아버지 나무에서 삼막사방향으로 10m쯤 올라가면 할머니 나무가 있다.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에 비하면 그렇게 수령이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이 할머니 나무도 원래 할머니 나무는 아니다. 원래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고사목 향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 옆에 있는 고사목 향나무와 비교하면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은 향나무이다. 할머니 나무는 1977년 대홍수 때 뿌리 채 뽑혀 떠내려오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심은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그 옆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의 생김새가 워낙 멋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 가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며, 신성한 나무라 팔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할아버지 나무나 할머니 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들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러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막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이 되면 이 두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삼막골 당제 또는 삼막골 쌍신제라 불리우며 유구한 역사성과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내려오는 무형문화유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삼막골 당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때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불러 복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삼막골 동제

나무(수목)를 신앙하고 섬기는 삼막골 동제는 약500년의 역사성을 자랑하는 마을민속신앙으로 조선시대(세종 조)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 본관 진주)공의 후손이 500여년 전, 삼막마을에 정착하면서 자생적으로 태동한 마을제례문화로 분석된다. 따라서 조선전기 수목(삼막골 느티나무)의 식재와 더불어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제 제례의식은 시작된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 말(우왕 2)에 태어난 하연 선생(1376년~1453, 정치가, 행정관료)은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급제,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에는 황희 정승에 이어, 영의정까지 오른 역사 속 인물이다.
마을제는 오전 11시 우물 신에게 우물고사(우물제)를 먼저 지내고, 오후 3시 석수1동 마을회관(2통 소재)앞 할아버지나무(향나무와 느티나무)와 삼막교 옆(1통소재, 소공원내) 할머니나무(향나무와 은행나무)에서, 2개소의 제신인 고목을 대상으로 고목제를 올린다.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는 고사되어 고사목이 되었지만, 삼막골에서는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 옆 느티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옆 은행나무에 제를 올리며, 무형문화유산인 마을제의 원형을 유지하며, 복수의 자연신(나무)에게 제를 올리고 있다.
삼막골 동제는 제신인 수목을 암수(음·양)로 구분하여,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에서 거의 동시에 오후에 지내고, 수목고사에 앞서 오전에 우물신에게 우물고사를 지내, 모두 3개소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우물고사는 여름에는 1통 주관 하에 제관이 우물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2통 주관 하에 우물제를 번갈아 주관한다.
삼막골 동제는 동네를 수호하는 마을신인 성황나무 앞에 소머리, 통북어, 떡, 제주(술) 등 갖은 제물을 바치고, 수목제사를 올린다.
당고사는 △강신례 △초헌례 △독축 △아헌례 △종헌례 △기원례 △사신례 △소지 △철상 및 음복례 순으로 진행되며,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 앞 각각 제단(신과 만나는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열린다.
삼막골 마을고사는 마을을 아래 마을(2통)과 윗마을(1통)로 구분, 마을단위로 동시간대에 마을신(수호신)인 신성한 2개의 당산목(서낭할아버지나무, 서낭할머니나무)을 대상으로 각각의 나무에서 서낭제를 올리는데, 할아버지 나무를 살짝 먼저 지낸다.
삼막마을 아랫마을 2통장은 초헌관이 할아버지나무(숫나무 향나무, 느티나무)에 제주(술) 한잔을 올린 후, 바로 윗마을 1통장에게 통신(전화)으로 할머니나무(암나무 향나무, 은행나무)에게 고사를 지내라고 신호를 보내면, 이윽고 할머니나무 당제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0190915]안양 자유공원 갈산 둘레길에서 본 상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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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안양 #동네 #골목 #마실 #갈산 #자유공원 #둘레길 #상돌/ 안양 평촌 자유공원 뒤에는 해발 85m의 갈산. 산을 한바퀴 도는 둘레길을 걷다 눈에 띄인 석물 한점. 인공적으로 잘 다듬은 것이 무덤앞에 설치하는 상석(넓은 장방향의 돌로 된 상으로 제수나 향로를 놓는데 쓰인다)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저 상석 위에는 무덤이 있다는 얘기인데 흔적은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덤은 사라지고 상석만 남은 것은 아닐까^^

 

 

 

 

 

[20190915]안양 호계동 방앗간 터 100년 넘는 연자방아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8/ #안양 #동네 #골목 #호계2동 #연자방아 #안말어린이공원/ 안양박물관에 있음직한 연자방아가 동네 어린이공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 호계2동에는 함평 이씨 집성촌이 자리했었는데 어린이공원은 함평 이씨 후손인 이난헌씨의 방앗간 터로 그 자손인 이영범님이 관리해 왔 관리해 왔다고 합니다. 그 방앗간에는 140여년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2018년 11월 남아있는 연자방아의 윗돌을 갖고 연자방아를 재현했다네요. 지난 2019년 3월에는 안양시의회에서 '향토민속자료 지정 필요성 및 방안’에 대해 시의원이 질의가 있기도 했네요^^

 

 

[20190824]안양 골목에서 발견한 1971년 안양 표시 맨홀 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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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안양 #동네 #골목 #디자인 #맨홀/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현충로 길에서 오래된(1971년 안양 표시) 맨홀 뚜껑을 발견하다. 안양이라 글씨가 새겨진 50년이나 된 디자인 맨홀 뚜껑을 보기는 처음. 안양박물관에 보존해야 할 미래유산깜이다.

 

공공디자인은 도시와 거리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도시의 품격을 갸늠하고 21세기 도시 경쟁력의 핵심 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 도시를 어떤 공간으로 쾌적한 문화도시로 조성할 것인가. 도시 디자인과 경관조명, 공간설계 등 도시의 자연경관, 도시와 거리의 모든 부분과 밀접한 공공디자인은 매력있는 도시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고 있다.

[20190703]100년(1901년) 넘는 안양 석수동 한옥 기와집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안양 #기록 #한옥 #골목 #석수동 #화창로 #꽃챙이 #신축년 #1901년 #박서신도비 /

안양시 석수동 화창초등학교 아랫길(안양시 화창로 92번길 10)에 자리한 한옥 한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천장 대들보에 쓰여진 상량문에 신축년(1901년) 2월로 기록돼 있어 지어진지 100년이 넘는 안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가히 안양시의 문화유산감이라 할수 있다.
과거 안양읍내에 있던 옛날 집들은 도시 개발로 인해 모두 사라졌지만 이 집은 도심 변두리였기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집안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대문 위로 솟아 있는 나무틀을 볼때 1900년 당시 비교적 신분이 있던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한옥이 자리한 화창마을이 재개발 추진중으로 몇년 지나지 않아 철거될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
안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이 집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듯 싶다.
한편 이 한옥 주택이 자리한 마을은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와 철쭉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꽃챙이(花倉洞)이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 경기도 시흥군편에 申昌 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 일대가 안양천변에 위치한 곶(申, 바다에 뽀죽하게 내민 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인근 산자락(만안구 석수동 산168)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한 후 인조 때에는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의금부총관을, 효종 때에는 도승지, 공조판서, 예조펀서, 병조판서를 지낸 박서(1602-1653) 신도비와 무덤이 있다.
신도비는 종2품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인데 박서신도비는 1665년 만들어 졌는데 사각형의 받침돌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은 형태인데, 받침돌과 옥개석은 화강암을,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총고 3.82m에 달한다.
비문의 글은 낙정재(樂靜齋) 조석윤(趙錫胤)이 썼다. 박서가 병조판서를 지낼때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군사력 증강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효종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신도비가 세워진 위치는 화창마을에서 똥골(현 안양천생태이야기관)로 넘어가는 화창로 우측으로 과거에는 높은 고개였으나 산자락을 깍아 도로가 놓여지면서 신도비는 길에서 잘 보이지 않은 도로변 담장 위 산자락에 자리하고 했으며 전혀 관리가 안되는듯 사람의 접근이 곤란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어 도로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접근도 쉽지않다.
박서 묘소는 신도비로부터 북쪽 20m 지점 산자락에 있으며 묘소앞에 문인석이 서있고 묘비는 없다. 신도비에서 묘소 안내판 및 가는 길 이정표 조차 없어 무관심한 문화재 관리에 씁쓸하다. 안양에 있는 유일한 신도비라면 좀 더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박서 (朴 )1602(선조 35)∼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현계(玄溪). 온양출신. 병조좌랑(兵曹佐郞) 효남(孝男)의 아들이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백형(伯兄)에게 글을 배워 열살 때부터 시(詩)를 잘 썼다. 그 후 이항복(李恒福)문하에서 수학했다. 인조 2(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3년 후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선공감주부(膳工監主簿)·종묘사직장(宗廟寺直長)을 역임했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2등에 급제하여 1632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634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 弘文錄》에 올라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1년 수찬(修撰)이 된 뒤, 집의(執義)·교리(校理)를 차례로 거쳐, 1643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관찰사에 재직중에 선정을 펴 칭송이 자자했다. 1647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좌윤 겸 의금부총관(義禁府摠管)으로 있을 때 대사간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의견을 말하자 왕이 차자에는 비유가 사리에 맞지 않으니 고쳐서 바칠 것을 명했으나 '차자를 고치라고 명하는 것은 왕의 잘못이므로 언론을 맡은 신하로서 어찌 할 말도 아니하고 묵묵히 있을 수 있겠으며 임금의 잘못을 간한 내용은 고칠 수 없다' 고 하여 왕의 비위를 건드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당하였다. 인조가 승하(1649년)하자 그해 겨울에 부총관(副摠管)으로 기용되었고 효종1(1650년)도승지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지경연(知經筵)과 지춘추관사를 겸하였고, 이듬해 진향부사(進香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지의금부사·우참찬·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1653년 병조판서로 병권확립에 진력하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왕은 매우 애통해 하며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재(棺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데, 신도비의 비문은 조석윤(趙錫胤)이 찬(撰)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 國朝榜目), 시흥군지, 경기인물지, 시흥인물고, 안양시지(安養市誌)

 

 

 

 

 

 

 

 

 

[20190524]안양 중앙시장통 오래된 얼음가게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5.22/ #안양 #얼음가게 #얼음집 #중앙시장/

안양 도심 중앙시장 안에 있는 얼음가게입니다. 지금은 집집마다 가게마다 냉장고에 칵테일용 얼음 만드는 기계까지 갖춘 곳도 있고, 냉커피, 냉음료용 알갱이 얼음은 마트나 24시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과거 냉장고가 없어 여름철이면 집집마다 아이스박스를 사용하던 시절, 잦은 정전으로 얼음공장에서 얼음을 만들지 못하거나 얼음가게가 문을 닫기라도 하면 온 동네가 난리가 나지요.
무더운 여름철 얼음이라도 있으니 아이스께끼통에 담긴 깨끼와 모나까, 덩어리 얼음을 기계로 갈아 색색의 과즙을 뿌린 빙수, 얼음이 동등 뜬 수박화채도 맛볼 수 있었지요.
보관중이던 얼음이 다 녹기라도 한다면 여름철 생선 판매, 아이스박스 보관 등 여름나기는 커녕 음식이 몽땅 상해 버리고 마는 시대였던 것이지요.
요즈음 얼음가게가 예전같이 호황은 아니지만 사계절 얼음을 사용하는 업소들이 많아졌고 무더운 여름이 오면 대형 공장, 야유회, 등 그래도 여기저기서 주문이 빗발치기도 하지요.
사진속 안양얼음은 중앙시장의 역사 만큼이나 꽤 오래된 곳이랍니다. 주인장이 예전의 그분인지는 모르지만 주문이 오면 냉동창고에서 커다란 대형 얼음을 갈고리로 꺼낸후 톱으로(요즈음은 전기톱도 사용) 주문한 크기만큼 잘라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거나 비닐봉지에 담아 판매를 하기도 하지요.
이날 혹여나 얼음 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다렸는데 주인장이 어디로 마실을 나가셨는지 오질 않아 냉동창고속 대형 얼음과 얼음을 자르는 모습을 똑딱이로 담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지요^^
중앙시장 얼음가게 위치: 안양시 만안구 안양로 303번길 29 BYC오피스텔 뒷길 (010-5478-9037)

[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양명고'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7.04.18/ #안양 #양명고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두한미군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동은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사 등이 자주 열렸지요.
특히 내부가 전부 나무로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 앨범속 빛바랜 흑백 사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0년 말 무렵 이곳 예배당에서 있었던 결혼식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네요.
양명고에는 수령이 100년이 넘는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안양2동 주민지차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귀연 전 위원장은 과거 정조대왕 능행차길이 이곳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즉 한양을 출발한 능 행차가 노량진을 지나고 만안교를 지나 보육원 옆 야산(동네 어른들은 호랑이 꼬리 부분-관악산)을 끼고 돌아 이곳을 통과해 안양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좋은집과 양명고 자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던 것으로 예기되고 있습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양명고와 바로 옆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부지는 1918년 서울에서 경성기독보육원으로 출발한 고아원이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정작 안양시와 지역문화계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 싶네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