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0915]1955년 안양1동에 심어진 이승만대통령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14/ #안양 #동네 #골목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옛태평방직 #느티나무 #이승만 #1955/
재건축을 추진중인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1955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라 표식이 있는 나무이지요.
한때 지역신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와서 나무를 심었다는 글이 게제돼 직접 식수와 기증 식수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기록 조차 없지만 과거 굴뚝 산업도시 안양의 위상을 드러낸 나무인데 향후 아파트 재건축으로 나무가 잘 보전될지 궁금하네요.
이 나무를 처음 찾았던 2013년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보면 대략 나무에 얽힌 역사를 이해할 듯싶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560&fbclid=IwAR3-hDYr-v5B8EzAjeOX7QGr9yk1iW97x3sIhJACuALXJJzUEUOX45tZH4E

 

경기 안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식수(기증)한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6월 22일 오후 안양 마을 탐사길에 찾았다.
나무가 있는 곳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진흥아파트 단지내 8동 3∼4호 입구로 수종은 느티나무, 현재 크기는 밑동 둘레 약 1.6m에 높이 약 20m로 수령은 70~8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 서기 1955년 4월 5일'이라는 백색의 사각철재 표식이 세워져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해오고 있으나 정작 아파트 주민들은 이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안양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나무가 심어졌다는 1955년 당시 이 자리에는 삼흥방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흥방직은 1953년 1월 서선하 사장이 설립했다가 1956년 금성방직 김성곤 사장이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바뀐 곳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안양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였다.
안양에는 수량이 풍부한 안양천이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 섬유공장과 제지공장들이 들어섰다. 해방이후인 1950~60년대에는 산업시설들이 줄지어 자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의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안양을 몇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0월 17일 이기붕 민의원의장,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공보실장 등과 함께 안양을 찾았다. 이는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이 동양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안양시 석수동에 마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현재 석수2동 아파트와 군부대 자리) 기공식에 참석한 것으로 당시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94호)에는 영화연극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촬영소 모형도를 돌아보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어 1956년 10월 17일에는 안양3동에 있던 금성방직과 안양4동에 있는 삼덕제지 공장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했다.(대한뉴스 제94호)
그러나 1955년에 안양 삼흥방직(이후 태평방직)을 방문하거나 기념 식수한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느티나무에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란 표식이 부착됐을까.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에 온다고 해서 가봤더니, 안양역에서 태평방직까지 흰 광목이 깔렸고 대통령이 그 위를 걸어와 나무를 심는 것을 봤다. 그때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기념이라며 대통령이 밟고 지나갔던 광목을 조금씩 찢어가기도 했다."
이는 2008년 11월 14일자 <안양시민신문>에 실린 글로 안양토박이며 아파트 관리계장을 했던 서아무개(64)씨의 증언이다.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진흥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그 나무를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기증식수가 아닌 방문 기념식수가 되어야 한다.
이에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전문위원에게 확인한 바로는 "1955년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 금성방직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 대통령 이름으로 기증식수를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이 또한 일자가 맞지를 않는다.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15일로, 그는 당시 금성방직 공장을 방문했다.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66호)에는 방직공장의 내부 모습, 일하는 직공들,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작업모습을 살피는 함태영 부통령, 공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찾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나무 옆에는 목재 표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하게 부식돼 2005년에 현재의 철제 표식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주민이 증언과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규모 굴뚝공장들이 많았던 안양을 찾았던 기록을 볼 때 이 느티나무는 과거 산업도시로서의 안양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기념물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만은 분명한 듯하다.

 

 

 

[20190915]안양 삼막마을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08/ #안양 #느티나무 #500년 #석수동 #서낭할아버지나무 #/ 안양시 석수동 삼막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 나무가 2그루 있다. 바로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는 500년이나 된 느티나무로 군데군데 상처를 치유한 흔적에서 500년의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시원하게 쭉쭉 뻗은 가지들이 아직도 늠름한 모습을 자아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로 나뭇잎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할아버지 나무의 모습도 사뭇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 할아버지나무’라고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떠나 외지에 일을 보러갈 때나 또는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갈 때면 어김없이 이 나무에 와서 인사를 하고 다녀온다고 한다. 그저 큰일이 없어도 마을을 들고날 때 마을의 수호신인 할아버지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마음의 정성을 드린다.
이 할아버지 나무 옆에는 곧게 뻗은 고사목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 나무는 이 향나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향나무가 생명을 다하고 새로운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긴 세월을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일까. 얼핏 보면 느티나무의 한 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할아버지 나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전쟁 직후에 어느 미군이 이 느티나무 가지를 땔감으로 쓰기 위해 가지를 잘라 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신성한 나무라 안 된다고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부대에 원인 모를 불이 나 피해가 컸다. 사람들은 서낭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때마다 정성껏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할아버지 나무에서 삼막사방향으로 10m쯤 올라가면 할머니 나무가 있다.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에 비하면 그렇게 수령이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이 할머니 나무도 원래 할머니 나무는 아니다. 원래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고사목 향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 옆에 있는 고사목 향나무와 비교하면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은 향나무이다. 할머니 나무는 1977년 대홍수 때 뿌리 채 뽑혀 떠내려오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심은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그 옆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의 생김새가 워낙 멋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 가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며, 신성한 나무라 팔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할아버지 나무나 할머니 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들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러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막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이 되면 이 두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삼막골 당제 또는 삼막골 쌍신제라 불리우며 유구한 역사성과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내려오는 무형문화유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삼막골 당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때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불러 복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삼막골 동제

나무(수목)를 신앙하고 섬기는 삼막골 동제는 약500년의 역사성을 자랑하는 마을민속신앙으로 조선시대(세종 조)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 본관 진주)공의 후손이 500여년 전, 삼막마을에 정착하면서 자생적으로 태동한 마을제례문화로 분석된다. 따라서 조선전기 수목(삼막골 느티나무)의 식재와 더불어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제 제례의식은 시작된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 말(우왕 2)에 태어난 하연 선생(1376년~1453, 정치가, 행정관료)은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급제,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에는 황희 정승에 이어, 영의정까지 오른 역사 속 인물이다.
마을제는 오전 11시 우물 신에게 우물고사(우물제)를 먼저 지내고, 오후 3시 석수1동 마을회관(2통 소재)앞 할아버지나무(향나무와 느티나무)와 삼막교 옆(1통소재, 소공원내) 할머니나무(향나무와 은행나무)에서, 2개소의 제신인 고목을 대상으로 고목제를 올린다.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는 고사되어 고사목이 되었지만, 삼막골에서는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 옆 느티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옆 은행나무에 제를 올리며, 무형문화유산인 마을제의 원형을 유지하며, 복수의 자연신(나무)에게 제를 올리고 있다.
삼막골 동제는 제신인 수목을 암수(음·양)로 구분하여,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에서 거의 동시에 오후에 지내고, 수목고사에 앞서 오전에 우물신에게 우물고사를 지내, 모두 3개소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우물고사는 여름에는 1통 주관 하에 제관이 우물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2통 주관 하에 우물제를 번갈아 주관한다.
삼막골 동제는 동네를 수호하는 마을신인 성황나무 앞에 소머리, 통북어, 떡, 제주(술) 등 갖은 제물을 바치고, 수목제사를 올린다.
당고사는 △강신례 △초헌례 △독축 △아헌례 △종헌례 △기원례 △사신례 △소지 △철상 및 음복례 순으로 진행되며,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 앞 각각 제단(신과 만나는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열린다.
삼막골 마을고사는 마을을 아래 마을(2통)과 윗마을(1통)로 구분, 마을단위로 동시간대에 마을신(수호신)인 신성한 2개의 당산목(서낭할아버지나무, 서낭할머니나무)을 대상으로 각각의 나무에서 서낭제를 올리는데, 할아버지 나무를 살짝 먼저 지낸다.
삼막마을 아랫마을 2통장은 초헌관이 할아버지나무(숫나무 향나무, 느티나무)에 제주(술) 한잔을 올린 후, 바로 윗마을 1통장에게 통신(전화)으로 할머니나무(암나무 향나무, 은행나무)에게 고사를 지내라고 신호를 보내면, 이윽고 할머니나무 당제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0190915]안양 호계동 방앗간 터 100년 넘는 연자방아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8/ #안양 #동네 #골목 #호계2동 #연자방아 #안말어린이공원/ 안양박물관에 있음직한 연자방아가 동네 어린이공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 호계2동에는 함평 이씨 집성촌이 자리했었는데 어린이공원은 함평 이씨 후손인 이난헌씨의 방앗간 터로 그 자손인 이영범님이 관리해 왔 관리해 왔다고 합니다. 그 방앗간에는 140여년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2018년 11월 남아있는 연자방아의 윗돌을 갖고 연자방아를 재현했다네요. 지난 2019년 3월에는 안양시의회에서 '향토민속자료 지정 필요성 및 방안’에 대해 시의원이 질의가 있기도 했네요^^

 

 

[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양명고'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7.04.18/ #안양 #양명고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두한미군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동은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사 등이 자주 열렸지요.
특히 내부가 전부 나무로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 앨범속 빛바랜 흑백 사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0년 말 무렵 이곳 예배당에서 있었던 결혼식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네요.
양명고에는 수령이 100년이 넘는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안양2동 주민지차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귀연 전 위원장은 과거 정조대왕 능행차길이 이곳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즉 한양을 출발한 능 행차가 노량진을 지나고 만안교를 지나 보육원 옆 야산(동네 어른들은 호랑이 꼬리 부분-관악산)을 끼고 돌아 이곳을 통과해 안양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좋은집과 양명고 자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던 것으로 예기되고 있습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양명고와 바로 옆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부지는 1918년 서울에서 경성기독보육원으로 출발한 고아원이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정작 안양시와 지역문화계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 싶네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좋은집'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안양 #좋은집 #기독보육원 #해관보육원 #근대문화유산 #나해석/
안양시 안양2동 안양천변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입니다. 이곳에는 1930~1950년대 지어진 옛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은 한국인 최초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운영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의사 면허 보유자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가 설립한 복지시설이지요.
1918년 12월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에 7명의 고아가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시작한 경성고아원(1922년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으로 개칭)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안양 기독보육원 자리는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경시기독보육원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8만평을 매입해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았는데 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1954-56년 무렵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고 다시 둥지를 틀었지요.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와 양명여고가 개교했는데 지금도 양명고 뒷쪽에는 1950년대 주한미군이 보육원에 지어준 의무실과 사무실, 예배당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목조 건물로 지어진 예배당은 1960년대 안양사람들의 결혼식장 등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1980년대 초 철거된 후 그 자리에 학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기만 합니다.
한편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집과 바로 옆의 양명고(과거 기독보육원 땅)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다고 합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의학자ㆍ사회사업가 오긍선(吳兢善1879.고종 16∼1963)

 

오긍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協成會)ㆍ독립협회ㆍ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 공주·논산·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와 개인교사를 하였다.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 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직을 맡아가며 청소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하였다. 1910년 봄,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가서 광주야소교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員)을 설립하여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하고, 1934년 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취임을 축하하는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년 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한 뒤로 보육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그간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 분야 사회사업공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公益褒章), 새싹회의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 19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다.

 

<의학박사 제1호> - 동아일보(1985. 10. 5)

   우리 나라 의학박사 제1호, 최초의 고아원 설립자.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 서재필이 주도하던 학생자치조직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 활약하던 중 1899년 체포령이 내리자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센추럴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수학, 1907년 한국 국적자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5년 동안 군산, 광주, 목포 등지에서 [야소교] 병원장을 지내며 [안락학교] [정명학교] 등을 설립, 어린이교육을 시작했으며,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 의전(醫專)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서대문구 옥천동에 [경성보육원]을 설립, 그가 평생을 바친 고아양육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1936년 사재를 털어 안양에 땅 15만 평을 구입, 현재의 [안양기독보육원]을 만들었다. 1962년 소파상을 받았다. 1963년 대한민국장 추서. 1885년 10월 4일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동상 제막.(발췌)

[20170325]1977년 세운 옛 안양소방서 망루는 근대문화유산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에 있는 안양소방서 안양119치안센터에 있는 소방 망루입니다. 2013년 3월 9일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의 여섯번째 탐사로 냉천마을에 대한 탐사를 하면서 안양소방서의 협조를 얻어 망루에 올라가 시설을 살펴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불이 나면 현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나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하루종일 화재를 감시하던 탑을 '소방 망루'라고 하는데 이제는 다 없어지고 경기도에 딱 하나 전국에 두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망루에는 망루 요원이 24시간 주·야로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징후가 있으면 타종과 싸이렌을 통해 화재발생을 알리고 출동대원에게 이를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했지요.
기록을 보면 한국역사상 소방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최초의 소방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금화도감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화재감시용 종루를 설치하고 배정된 화재감시인이 항상 종루에 올라 간망하다가 궁이나 민가에 불이나면 종을 쳐서 알리도록 했는데 이것이 초기의 소방통신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 망루는 경성소방조가 남산에 세운 소방망루였고, 이후 도시든 시골이든 마을 중심 높은 곳에 설치되었는데 1970년 말 전화가 보급되면서 119 신고로 대체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대구동부소방서(1977년 설치)와 안양소방서 망루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하네요.
안양소방서 망루는 1977년 6월에 세워졌습니다. 1977.06.18 안양소방서가 개서하면서 함께 마련된 것이지요. 망루의 높이는 25M(8층 층고)로서 외벽에는 붉은 글씨로 「불조심」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망루 정상 공간에 가려면 115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합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망루 끝자락의 공간은 약 3평 남짓합니다. 안양시내뿐 아니라 평촌 신도시 아파트촌, 멀리는 의왕 청계, 포일지구와 내손지구, 군포 금정역 주변 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는 안양소방서 신축 당시 지리적으로 안양시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안양시내뿐 아니라 멀리 군포와 의왕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니, 2-3층 건물이 가장 높았던 70년대에는 안양 인근에서 연기가 나면 금방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장을 안내한 소방관계자는 “당시 시내를 관찰하여 불꽃이나 연기와 같은 화재의 징후를 발견했을 때는 즉시 인터폰으로 촐동 대기 소방관에게 연락하여 출동하는 체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지난 2011년에는 1964년에 지어진 충무로 119안전센터(과거 중부소방서)의 소방 망루가 철거돼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소방 센터를 재건축하기 위해서 결국 소방 망루까지 허물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도시화에 따른 건물의 고층화 및 전화와 이동통신 등 정보통신의 혁명으로 뒷전이 되어버린 망루.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일선에 있던 상징물이자 안양소방의 문화유산 역사로 잘 보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0323]1960년 초반에 지어진 옛 시흥군도서관 건물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안양 도심에 옛 시흥군도서관 건물 있다

1960년 초반에 지어진 옛 시흥군 도서관이 안양 만안구의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200아울렛 사거리에 현존하고 있다. 
이 일대는 1936년 영등포읍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시흥군의 중심지는 안양으로 이동하고, 1945년에 시흥군청이 안양으로 이전하면서 시흥군과 안양읍 당시 관공서들이 자리했던 안양 일번가 지역으로 현재는 당시 관공서 건물들이 모두 없어졌고 도서관 역시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이 건물만은 50년 넘게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건물이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고, 언제 기능을 상실했으며 언제 매각됐는지에 대한 기록들을 찾지를 못했다. 안양시가 최근 발간한 안양시지에서도 아직 현존하는 이 건물에 대한 이력조차 없다. 
그나마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68년 석수동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씨가 헬기를 타고 찍었던 안양읍내의 항공 사진에서 당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 시흥군 도서관에 대해 안양 출신의 건축사 최승원(63세.앙가주망-央加周望 건축사사무소) 교수는 안양지역건축사회 카페 기고글(2011.2.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나는고교(62~64년)시 방학때 이도서관에서 공부했다. 1층은 문화 다방이 있었는데 가끔 전시도 했다. 친척집인 미승당빵집사장님 소개로 1968년 대학 3학년 수학여행을 못가고 문화다방 수리 디자인&감리를 해주고 큰돈을 받았는데 천정은 건축과 도시를 표현하고 벽에1:3정도 (300x900mm)상하로 긴 가운데 고정되고 좌우로 움직이는 조명기구를 디자인해서 6개소 정도 부착해 준 일이 있다".
그는 "아직도 옛 시흥군 도서관 건물이 살아있는 것이 놀랍고 좋은 장소인 것 같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시흥군 도서관은 그리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매각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중반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옛 안양극장의 사진을 보면 1층은 경기민생상호신용금고, 3층은 문화양재전문학원으로 사용중이며 안양리이온스콜럽, 기타연구실, 다방 등의 간판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1층에는 다얀한 상점들, 2층에는 치과, 3층에는 미용실로 사용중으로 건물 외벽이나 창문의 틀 등은 많이 변했지만 당시의 건물 형태만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어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를 되들아 보게한다.

 

 

 

 

 

 

[이웃동네수원]역사와 종교의 공간 북수동성당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6년 6월 6일 월요일
수원 최초의 성당 북수동성당

수원 화성의 중심부인 장안문 인근에 있는 북수동성당(구 수원성당)은 수원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으로 과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치명한 중영(中營, 摠理營)인 포도청 터와 그리고 수원 최대의 부잣집들이 모였던 팔부자의 집터와 일부 겹쳐지는 공간으로 2000년 천주교 수원성지로 선포한 역사와 종교의 숨결이 깃든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북수동성당은 1890년 왕림성당의 수원공소로 출발해 1904년부터는 남수리 황학정 정자와 그 대지 800평을 사들여 공소 강당과 화양학교를 개설하여, 남녀 아동 200여 명을 교육하다가 1906년 북수리(현 북수동 성당 자리)의 세칭 팔부자 집이라 불리운 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를 매수하여 본당 창설 기지를 삼아 1923년 11월 23일 수원성당 본당으로 독립한다.
1932년 11월 13일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며 근대식 건축물인 성당을 건립하였다. 옛 성당은 1978년 철거되고 1979년 4월 현재의 성당이 건립되었다.
1930년 북수동성당 4대 주임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심응영-폴리(Polly, 沈應榮, 1884~1950, 데시데라토) 신부가 부임하고 나서부터 재임 18년간 수원의 천주교회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6.25 때 몸을 피하지 않고 의연히 성당 안에서 기도하던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하였다.
심 신부는 수원 화성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원조와 그의 모친이 삯바느질로 모아서 보내 준 돈으로 기와집 성당을 헐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고딕식 성당(75평)을 신축하였는데 이는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며 근대식 건축물이다.
1934년 학술 강습회 소화학원을 개설하였고,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소화국민학교를 인가받아 성당안에 개교하였는데 수원시민들이 가장 보내고 싶은 사립학교였다.
1976년 구식의 석조 사제관을 헐고 다목적 사제관을 다시 건립하고, 1979년 4월 5일에는 40년 묵은 옛 고딕 성당을 철거하고 연건평 236평의 주교관(主敎冠) 모양으로 된 현재의 새 성당을 준공 축성하였다.
현재 성지 마당에는 정약용이 설계한 봉화대 보양의 묵주 알고 버드나무 형태로 성곽 둘레를 축소한 로사리오의 화단이 조성되어 우리 꽃, 야생화 1천여 종이 심어진 방화수주길을 이루고 있다.
 

그럼 북수동성당이 수원성지가 된 배경을 살펴보자.
정조대왕이 49세에 갑자기 의문사하자 이듬해인 1801년(신유박해)부터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수원 지역에는 신유박해를 계기로 서울, 광주, 내포 등지로부터 신자들이 숨어들어 공동체를 형성하자 한강 이남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은 수원유수부 관할하던 정조의 정치 무대였던 수원화성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박해를 겪는다.
올해는 병인박해(1866년~1871년)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에서의 순교는 병인박해 때 집중되는데 수원 화성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형, 참수형, 미루나무에 교수형, 아사형, 장살형 등 다양한 형태로 순교를 당한다. 파악된 기록에 의하면 수원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83위이며 대부분이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기록 없이 순교한 분들이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순교지로 밝혀진 곳은 ‘화성행궁’, ‘화청관 이아’, ‘중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이며 그 외에도 ‘종로 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토포청’, ‘방화수류정’, ‘화홍문’ 등도 순교지로 추정돼 수원 화성 성곽 전체나 다름없다.
수원성지에서는 박해 시대에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일흔여덟분(『치명일기』)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특별히 그 가운데 지 다두를 비롯한 수원 성지 순교자 여덟분의 시복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수원 화성(華城 : 아름다운 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다산 정약용(요한) 선생이 설계, 시공한 성으로 1794년(정조 18년) 1월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성된 둘레 총길이 5.743km, 직경 평균 1.8km의 성곽이다.
화성은 다산 선생의 천주 신앙을 뿌리로 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성벽은 외측만 쌓고 내측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축성술뿐 아니라 성곽 곳곳에 천주교를 상징하는 삽자가 형태 양식이 가미되는 등 신앙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산 선생이 수원 8경 중의 하나인 화홍문과 그 위쪽에 방화수류정을 세웠는데 화홍문은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란 뜻으로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은 구약의 계약을 상징하고, 화홍문을 떠받치고 있는 7개의 수문은 예수님께서 인간과 맺은 신약의 계약인 7성사를 상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쫓고 버드나무 길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란 의미이다. 서쪽 벽에 십자가 문양이 86개(기둥 때문에 5개는 반쪽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천주학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라 하여 서쪽 벽에 새겨 넣었고, 해가 져 어두워질 무렵에 십자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만들었다. 이는 세상 어둠이 드리우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광명의 빛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지붕도 8각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고 방화수류정 안으로 올라서서 위를 바라보면 천정을 받치고 있는 서까래들이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다.
이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천주교 성지로 선포됐다.
 수원화성의 박해지는 수원성(화성) 곳곳에 거쳐 산재해 있는 데 다음과 같습니다.
-. 행궁 :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융능참배 행차시 처소. 양반 교인을 심문한 곳
-. 이아(화청관) :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관아. 중인이하 일반인, 천민들이 심문을 받던 곳
-. 중영(토포청) : 지방포도청, 치안 및 검찰청. 비공개적으로 백지사형과 교수형이 집행된 곳
-. 동남각루 : 동남쪽의 보초경계지. 천주교인을 참수형에 처해 몸을 성밖으로 내던진 곳
-. 남암문(시구문) : 화성 남쪽 팔달문 동편의 비상문. 참수된 천주교인 목을 매달아 놓았던 곳
-. 형옥(초혹) : 6칸으로 된 형무소 감옥. 현재도 옥거리라 부름. 비공개 아사형이 집행된 곳
-. 팔달문(남문) 밖 장터 :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인의 장살형(몽둥이)이 집행된 곳
-. 장안문(북문) 박 장터 :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인의 장살형(몽둥이)이 집행된 곳
-. 사형터 :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 천주교신자들도 일반죄수들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종로사거리 : 행궁앞 광장사거리. 왕래가 빈번한 종로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동장대 : 서장대와 함께 군사훈련장. 군사 제식행사 중에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다산 정약용(요한)의 깊은 신심표출. 7성사수문, 십자가지붕, 서벽에 십자가 문양 새김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 한국천주교주교회의著 외
 

 

 

 

[이웃동네수원]수원 최초의 사립 소화국민학교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6년 6월

수원 화성의 중심부인 장안문 인근에 있는 북수동성당(구 수원성당)은 수원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이며, 과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치명한 중영(中營, 摠理營)인 포도청 터와 일부 겹쳐지는 공간으로 2000년 천주교 수원교구가 성지로 선포한 수원성지로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성당 안 왼쪽에는 돌을 쌓아 지은 오래된 석조건물이 있는데 수원 최초의 사립 소화초등학교 건물이다. 현재 뽈리 화랑과 수원성지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순교 박물관과 종교 미술관으로 리모델한다는 계획으로 2층에 임시로 오래된 십자가, 박해시대 유품 등 성물과 그림등이 전시돼 있다.
소화국민학교는  1934년 학술 강습회 소화학원을 개설하였고,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소화국민학교를 인가받아 성당안에 개교하였는데 수원시민들이 가장 보내고 싶은 사립학교였다. 
 소화초등학교는 2016년으로 개교 75주년을 맞이했다. 가톨릭신문은 6월6일자 신뭉을 통해 일제 치하 수원 지역사회 민중의 문맹퇴치와 교리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돼 수원의 명문 배움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소화초등학교(교장 김미리 수녀, 천주교 수원교구 학교법인 광암학원)의 75년 발자취를 소개했다. 그 역사를 살짝 보면 다음과 같다.

 

■ 소화초등학교 역사
1930년대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 많은 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인권을 박탈당하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안타까워한 수원본당 4대 주임 심응영 신부(파리외방전교회)는 1934년 10월 2일 4년제 '소화강습회'를 설립했다. 소화초등학교의 태동이다.
심 신부는 소화강습회 원장으로 취임해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 3명이 학교에 파견돼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교장의 명의를 바꾸는 등 일제의 탄압을 가까스로 버티며 운영돼온 강습회는 2회 졸업생(1회 50명, 2회 24명)을 배출하며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1946년 1월에는 6학급의 수원 소화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는 학교 운영이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변경됐다. 한국전쟁의 아픔도 고스란히 겪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는 무기한 휴교됐으며 1951년 1월에는 학교 교사가 폭격으로 전소되기도 했다.1954년 석조 6개 교실로 새롭게 문을 연 학교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지역 교육개혁의 맨 앞자리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1967년에는 8학급 441명으로 규모를 확대했다. 설립자 명의도 수원교구 유지재단 이사장 윤공희 주교(현 대주교)로 바뀌었다. 1968년에는 북수동본당 스카우트와 소화유년대가 통합된 전국 초유의 한국 보이스카우트 135단이 발족돼 사회 봉사활동이 전개됐고 불우한 이웃을 위한 봉사와 위문공연을 활발히 전개해 지역 사회 안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신뢰받는 학교'라는 평판을 얻었다.1971년에는 학교문집 작은꽃을 창간했으며 이듬해인 1972년에는 '책가방 없는 토요일' 제도를 도입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학교교육을 시도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학교법인 광암학원 이사장 김남수 주교로 재단명의가 변경됐다. 폐교가 논의되기도 했었지만 당시 신입생 모집은 매년 높은 경쟁률이 지속돼 여전히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교육기관이었다.1993년 2월 20년간 재임해 온 정덕진 신부가 퇴임한 뒤 그 해 3월 수원교구는 학교 운영을 살레시오수녀회에 위임했다. 1994년 5월 '제1회 소화 어린이 놀이마당'을 개최했으며 10월에는 개교 60주년 기념 학예발표회와 전시회를 열었다.2002년 학교 신축이전과 함께 54회 졸업식을 가진 학교는 같은 해 4월 9일 최덕기 주교 주례로 학교 신축 이전 축복미사와 축복식을 가졌다. 새 학교는 2003년 제4회 수원시 건축문화상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개교 70주년 기념 예술제 및 나눔의 잔치가 마련됐으며 2008년에는 제60회 졸업식을 가지며 학교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소화초등학교의 건학이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본받아 국가사회와 세계 복음화에 기여하는 인간을 육성한다', 교훈은 '하느님을 사  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이다. 2009년 2월 17일 제61회 졸업식을 가진 학교는 개교 후 현재까지 496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학급 수는 18개, 재학생은 619명이며 교직원은 84명이다.

 

 

 

[안양]많은이들의 추억이 깃든 안양6동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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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밧데리골목과 변전소골목이 만나는 옛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사거리 코너에 2014년인가 10층 높이의 주거형빌딩 '미학'이 새로 세워졌는데요.
이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미학' 이란 자그마한 카페가 있었지요. 2000년대 초반인가 2층 양옥집을 개조해 홍차와 허브차 전문 카페로 문을 연 곳인데... 도로변에서 골목같은 정원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커다란 동상이 반겨주었지요.
1층에는 시원한 통유리로 밖으로 볼 수 있었고 삐그던 소리나는 계단을 올라 다락방 같은 2층에 가면 유리창틀 아래 파아노 한대가 놓여져 있었고, 중세풍의 고색창연한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적당히 어두운 조명과 차분한 실내 분위기.
봄.가을에는 정원이 좋았고 밤이되면 테이블에 촛불이 켜지고 겨울에는 석유난로의 냄새를 맡으며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요.
아기자기한 내부 공간이 마치 스위스 농가주택 같은 분위기로 예쁜 찻잔과 유리잔에 담겨져 내오는 홍차와 진주밀크티, 토란 밀크티를 음미할 수 있어 바삭바삭한 토스트가 맛있어 멀리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매니아들도 적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이 곳 주인장은 '아름다운 마음을 배우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 카페 이름을 '미학'이라고 했다는데 아담했던 카페는 사라지고 그 이름 딴 대형 건물이 과거 미학의 추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