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009222]1970년대 지어진 안양4동우체국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20.09.22/ #안양 #문화유산 #안양4동우체국 #건축물/ 197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양 최초의 우체국 건물로 안양4동 중앙사거리에서 병목안방향 도로 일번가 CGV 1번가 클리닉 옆에 있다..이 건물은 안양5동 안양초교 건너편에 안양우체국(현 서안양우체국)이 신축된 이후 1970-90년대에는 안양역전우체국이라 불리우다가 지금은 안양4동우체국이 공식 명칭이다. 우체국 좌측으로는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 시흥군 안양읍 당시 안양 최초로 전기를 공급해주던 안양변전소가 있었다. 변전소 철망 담벼락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끼고 돌면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과 수암천을 지나 안양중.고교로 가는 샛길이 있었다.

 

 

 

 

[20200923]오래된 식당 안양유원지 봉암식당(sine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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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안양 #동네 #골목 #봉암상회 #안양예술공원 #안양유원지/ 안양시지속협 세미워크숍을 야외식당이 있는 공간을 찾아 오랫만에 들린 봉암상회. 코로나19 여파로 한산하니 거리두기 하기가 좋네요. 이제 칠순이 훌쩍 넘으신 주인아주머니께서 제 본명이 "소피아"예요 라며 환한 미소로 오랜만에 찾아온 저를 반갑게 맞아주네요. 80년대 이집 불고기가 맛있어 자주 왔었는데(지금은 메뉴에 사라짐).
안양에서 현존하는 오래된 상점들은 대부분 안양예술공원(과거 안양유원지)에 있지요. 봉암상회는 1968년 개업해 한자리에서 50년 넘게 식당을 하고 있고요. 봉암상회 앞에 있는 보은식당, 그리고 폭포수식당, 천연식당, 자연식당 등도 50-60년의 나이를 먹은 노포 식당들입니다.. 안양 토박이들은 한번쯤 들려 백숙에 도토리묵, 오리고기에 닭도리탕을 맛보지 않았을까 싶은 곳들이지요.
봉암상회의 경우 1세대는 영업 최일선에서 물러나고 2세대인 자제분(문병철사장)이 운영하지요.
1960-70년대의 안양유원지는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인파가 어마어마했습니다. 1972년 발행된 중앙지 신문들을 보면 안양유원지에 한해 평균 100만 인파가 몰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안양유원지에는 국립도서관 임간문고, 우표 간인까지 별도로 있는 임시 우체국, 임시 경찰서까지 있었지요. 또 1번국도(현 만안로.구도로)에서 안양유원지로 들어오는 경부선 철길(현 굴다리)에는 안양유원지 임시기차역이 설치돼 완행 열차들이 이 곳에 정차해 피서객들을 실어나를 정도였습니다.
안양시는 과거 신중대 시장 시절 낙후된 안양유원지를 안양예술공원으로 리모델링 하면서 운치있고 멋진 카페 거리를 만들겠다며 apap(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세워 진행해 왔지만 정작 10년이 지난 지금 안양예술공원 뒷길에는 10여년전 3층의 원룸형태 도심생활형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대로변 곳곳에도 3-5층의 원룸 형태의 주거형건물들이 우후죽순식으로 들어서 예술공원은 커녕 상업과 주거가 뒤죽박죽 혼재된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지요.

 

 

 

 

 

[20200816]박달군용지 곤드레미 고개 진입 일제시대 다리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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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7/ #안양 #동네 #골목 #철길 #병목안 #채석장/ 일제강점기 흔적을 찾아 전국을 누비는 KBS 다큐멘터리국 이완희 PD를 안내해 박달군용지, 병목안채석장과 철길 흔적, 담배촌 수리산성당과 미군통신대가 있던 수리산 계곡 등을 돌아보다. 이 PD는 일제가 한반도에서 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부산, 거제, 통영, 남해 등에 구축한 군사시설 50여곳을 추적, 조사하여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나남)를 펴냈는데 안양도 그중 한곳으로 박달 군용지 탄약고 터널이 일제시대에 지은것은 아닐까 관심을 보였다. 이날 탐사에서는 뜻밖에도 도로 한쪽애서 곤드레미 고개 진입 다리를 찾았다. 다리 기둥 한쪽에는 한자로 박달, 한쪽에는 글씨가 마모돼 불분명하지만 일본 연호인 소화0년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일제가 건설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폭이 좁았던 다리는 미군이 전술핵 무기고를 운영할 당시인 60년대 대형트레일러의 진출입을 위해 확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곤드레미 고개길은 조선시대부터 군용지가 건설되기전 안양에서 수암(안산),소래,인천으로 왕래하던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길로 박달 삼거리에서 공병부대 앞을 지나 서쪽 산봉우리 사이를 뚫린 곤두레미고개를 넘어갔는데 군용지 건설로 길이 폐쇄되었다.

기록을 보면 박달 군용지에는 일제강점기 이전 동수암, 막상골, 미름물, 선녀골, 양호다리, 붓골, 웃말, 웃박달리, 횃골 등 9-12개의 마을이 있엇는데 일제가 1930년대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 건설을 하면서 폐동하였다. 또 이곳에 있던 후령군, 엄정구, 엄황, 엄성 등의 묘 및 구만(충신)의 정문 등 선현묘와 문화재가 일실 되었다고 한다.
곤드레미 고개길 폐쇄 이후 안산지방을 왕래하던 도로는 박달삼거리에서 호현(범고개)-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우회도로(박달로)가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날 함께 탐사에 나섰던 이완희 PD로부터 다음날 연락이 왔다귀가후 아시역사자료센터를 검색해보니 박달교 관련 문서가 있었다는 것. 19415월 조선군경리부에서 안양-안산 도로 개축공사를 한 설계도인데, 도로의 길이는 12M 1,190M, 7M 5,238M인데, 그 공사의 일부로 박달교를 만들었던 것 같다는것. 박달교는 길이 15M, 4M라고 되어있는데 처음 만들 때는 목조다리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콘크리트로 만들고 해방이후 미군이 보강공사라를 한 것 같다고 하면서 관련 문서 자료르 보내왔다..

 



박달군용지의 역사

안양시 박달2동 삼봉천을 따라 수리산 골짜기 안쪽은 그야말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으로 이곳을 군용지라 부르는데 산악 분지형에 보안 및 방호에 유리하고 시설 배치에 필요한 공간 확보는 물론 주둔지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입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37년(일부 기록은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납니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 2월 22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번지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曹郞에 임명돼 노왜적 수천병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구만의 묘와 숙종 34년(1708)에 族閭를 내려 세윤 비각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10(1632)에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총관(副摠管)등을 역임한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이란 이가 이곳에 묻혔었는데 군용지가 개설되면서 화장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1625년(인조 3) 사간(司諫)을 거쳐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던 엄성 (嚴惺) 선조 8(1575)∼인조 6(1628)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고 하네요.
마을을 통째로 옮겨야 했으며, 선조들의 묘까지 이장토록 할 정도였으니 군용지는 그야말로 군사 요충지로 면적만도 23만677평에 달하는 방대한크기입니다.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기 전에는 안양에서 수암지방(안산)으로 갈때 박달삼거리에서 곤드래미 고개를 넘어갔는데 군용지가 들어서면서 왕래하던 도로를 폐쇄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는데 이 도로가 범고개를 넘어 목감, 수암, 안산을 잇는 우회도로로 지금에 이르고 있지요. 곤드레미 고개는 탄약고들이 자리한 콘크리트 벙키로 진입하는 용도로 사용중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안양 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는 2차 대전 때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으며,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고 합니다.
또 일제의 패망으로 탄약저장 시설과 탄약을 인수한 미군은 일본군 탄약을 안산 넘어가는 본드레미 고개 아래 굴을 파서 그 안에서 폭발시켜 폐기처리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목격자 중의 한 분이셨던 고 변원신 선생은 주민대피령이 내린 가운데 지축을 울리는 폭발소리에 구도심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떨어졌고, 파편은 자신이 살고 있던 안양3동 양짓말까지 날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합니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국 문건(인터넷에서 검색) 보면 1860년대 한국내 '핵탄두 저장소' 들이 있었고 그중 한곳이 '안양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박달동 군용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그 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하던 '닐 미셜로프'가 찍은 사진(헬기 안)을 설명한 글을 보면 내 발 앞에 핵탄두가 있다고 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이후 부터 1970년대 초까지 박달 군용지는 주한 미 83병기대대가 관리했습니다. 이 부대는 석수동 삼성천옆에 자리했던 대규모 부대(현재 석수 이편한세상아파트)였는데 1970년대 중반까지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특수탄약을 관리하던 부대로 박달동 수리산 자락의 군용지라 불리우던 탄약 벙커에 있던 전술 핵탄두와 로켓을 관리.운용했지요.
부대내에는 PX는 물론 영화관, 소방대까지 있을 정도로 컸습니다. 당시 부대 주변 동네에는 양복점, 양화점, 잡화점, 병원, 여관(Hotel) , 고깃집, 식당 등이 있었고 미군을 상대로 하숙까지 치면서 당시 석수동은 안양시내 변두리에 있었지만 상권과 생활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풍족했던 동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군용지와 미군에 얽힌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만안초교) 다니던 무렵 안양여고에서 박달리로 가던 길이 흙길이었는데 하교실에 가끔 미군들이 대형 트레일러에 미사일(나이키, 허쿨리스)을 싣고 가던 모습을 목격했었지요. 차량에 타고 있던 미군들은 간혹 사탕과 쵸코렛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쩌다 처음보는 것을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노란색에 검정글씨(기억이 안나요)가 찍혀있는 과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이건 귀한 미깡(귤)"인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깡은 당시 우리네 시장에서는 볼 수도 없던 것이었지요.
석수동 미군부대는 1970년대 중반쯤 철수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안양 석수대림아파트 단지로 변모했고 경부선 철길에 있던 건널목도 없어졌으나 대림아파트와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옛 동네와 골목길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미군이 주둔하던 군용지는 1970년 후반부터는 우리 군 부대시설들이 줄줄이 자리합니다. 이 일대는 평지만 면적이 9만3천여㎡(8만2천평)에 달하는데 기존 군 시설외에 육군의 군 부대시설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예비군 훈련장이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지요.
안양시는 한때 이곳 군용지를 공업지역 조성을 추진합니다. 지난 1994년 박달동 군부지의 대체공업부지를 전제로 호계 1.2동과 안양 7동 일원을 공업 및 준공업지역에서 주거용지로 변경한 '2011년 도시기본계획'을 수립 승인받았으며 '2016년 도시기본계획'에서 호계2동 16만4천여평을 주거용지로 용도변경했으나 2001년 국방부와의 협의에서 부대 이전계획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지요.
오히려 군용지에는 새로운 군 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국방부는 2008년 12월 정보사의 안양이전 결정을 발표한 것이지요. 이에 박달동주민들은 "지난 60여 년간 군부대로 인해 보행권(어린이, 노약자, 학생), 환경권(사격장 총성, 군차량 통행 소음 및 매연), 재산권 침해(군사보호시설 구역의 행위제한), 지역개발의 낙후성(건축물 행위제한 등) 등의 피해를 보며 살아왔다고 2010년까지 이전 반대운동을 벌였었지요.
히지만 안양시, 정보사, 지역주민들이 민·관·군 협의체를 구성하여 '주민지원사업 협약' 을 체결하고 군 부지 한쪽에 박달중학교 신설 및 정보사 진입도로 확장 등 현안 문제를 타결하도 정보사가 들어오면서 동네가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한듯 달라졌지요.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인 ‘서안양친환경융합테크노밸리’ 조성사업과 맞물려 또다시 관심을 받고있지요.
가칭 안양 박달테크노밸리 조성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의 19대 대통령선거 공약중 하나로 대규모 군사시설, 환경기초시설(도축장, 폐기물처리), 노후 공업시설(노루페인트) 등으로 개발이 정체된 박달동 일대를 기존 시설 재배치와 공업부지 고도화를 통해 오는 2025년까지 KTX 등의 광역교통망과 광명역세권지구를 연계해 수도권 내 대표적인 첨단산업·문화·주거 복합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입니다.
이 사업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이종걸 국회의원의 공약으로 제시된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담겼다가 정권 출범 이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과제로 채택되면서 내부적인 추진절차를 진행하고 있지요.
사업지역을 살펴보면 전체 부지 342만㎡ 중 군용지가 252만5000㎡, 공업지역 등 사유지가 89만5000㎡에 이릅니다. 특히 군용지 중 50탄약대대가 181만3000㎡, 관동예비군교장이 71만2000㎡에 달하는 등 자연녹지·개발제한구역으로 분류되고 있는데요.
시는 세부적으로 50탄약대대 탄약고를 이전 또는 지하화를 통한 가용부지 확보, 환경기초시설 이전 및 부지 개발, 노루페인트 등 노후 공업시설 이전 및 고도화를 추진해 4차 산업 육성을 위한 친환경 첨단산업, 문화, 주거 복합단지 조성을 이루겠다는 계획이지요.
이와관련 지난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청와대에서 지역공약을 담당하는 황태규 균형발전비서관이 2017년 11월 27일 대상지인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탄약고 일대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안양시도 발벗고 나서 2018년 3월 9일 제237회 안양시의회 임시회에서 ‘안양시 서안양 친환경 융합테크노밸리 조성 지원에 관한 조례안’과 ‘안양시 행정기구 및 공무원 정원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원안 가결함으로 박달테크노밸리 조성 사업의 추진과 지원을 위한 근거를 마련했으며, 전담부서(테크노밸리전략관)를 신설하고 사업 추진을 위한 전담인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지요.
특히 최근에는 국방부가 안양 박달동 소재 50탄약대대 재배치를 위한 운영 소요 검토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지요.
그런데 최근 여기에 변수가 생겼습니다. 정부가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방안’으로 도심 내 유휴부지와 군 유휴시설,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 등을 활용한다는 계획인데 <시사저널> <조선비즈> 등 일부 언론에서 대상지중 한곳으로 안양 박달테크노밸리 조성사업 지역을 거론한 곳이지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과거 일제 강점기기 부터 군수물자를 저장하면서 군용지라 불리운 이후 탄약고, 군부대 등으로 개발이 제한되었던 이 지역에 탄약고가 지하로 건설되어 그대로 존치할지 아니면 공공택지로 개발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안양에는 비행기 공장도 있었습니다. 1944년 조선직물(이후 금성방직-대농) 공장에서 비행기 조립응 시작해 시제품 2기를 생산하고, 현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도 시작하다가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해방되면서 중단되지요.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안양은 일제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전투기지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군용지를 통과해 수암(안산.소래.인천)으로 가던 길 곤드레미고개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과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에 걸쳐 있는 고개. 곤두레미고개는 시흥시 목감동과 안양시 박달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안양시에서 안산시로 연결되는 자동차 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두 지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예전에는 고개가 있는 곳의 산림이 우거져 험준한 데다 후미진 곳이어서 산적이나 강도 등이 많아 이곳을 지나갈 때는 황급히 서둘러 곤두박질쳐야 지나칠 수 있었다고 한다.

박달동군용지(軍用地)의 슬픈사연
박달동 군용지에는 이 땅의 식민역사를 포함하여 농민의 아픈 눈물이 배어있는 땅이다. 즉, 안양시 박달동 및 안양동 일원의 만 677 평에 달하는 지역은 귀속농지에 대하여 276 명의경작인들이 300 여년간조상대대로경작해온세전농토 l 였다
8.15 해방 직전 간악한 일본군은 이 조상 전래의 농토에다 군용시설을 한다는 핑계로 강제로 빼앗아버렸지만,그들은등기부에만육군성 이라해놓았을뿐경작은 그대로 해오다가 조국광복이 되자 그땅을 되찾은 우리 농민들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일본식민지화의착취의앞잡이동양척식이탈바꿈한신한공사 가경작료를강제로 징수하여갔으며 그 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이 우리의 농토가 일본인 적산 이라 하여 귀속농지관리국 If !I" 에서경작료를받아갔다가농지개혁법 - 에따라합법적으로경작자에게 분배되었던 것이다 즉, 1941 년 일본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강제 수용당했지만 경작을 계속해왔고,해 방후농지개혁법에따라경작자에게 분배되었다.
이렇게 분배농지상환곡 - 을 개년 분납부 하고 영농을 하여오던 중농민에게 분배된 이 농지들을 1960 관 5.16 쿠데타후불법적으로그 명의만을국유로등기 하는조치를내리게된다.이에 농지개혁법에따라분배를받아지가상환료 개년분이나납부하여소유권이확정된자기들의유일한농토재산을일부농민들은부득이 땅값의 몇 배의 돈을드려 법에 따른심판을구하고자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바, 천만다행 사펼귀정으로 대법원까지 승소하였다(문원식 j 성결대 안양학연구소 소장 2006.6.23 안양시민신문) .

‘박달’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현재 채록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2) 박달은 ‘박치기’에서 알수있듯이 ‘머리’에서 파생되었다. 예를들면 머리산,높은산 등이다
3) ‘달풀 이 있는 바깥 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가장 최근에 조사된 견해다.
4) ‘박달’의 의미는 안과 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전엔 이곳이 달동네였는데 안양의 중심부에서 볼때 밖이라고 하여 ‘밖 달동네’라고 불렀고, 그후 ‘박달동’이 되었다.
그러나 ‘박달’이란 명칭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러 차례 변천하여 그 유래가 깊다.
‘박달리(博達里)’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조선 정조대이다. 그후 1963년 1월1일에 시흥군 안양읍 박달리가 만들어지고 그이듬해 박달1,2리로 분리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안양시로 승격하면서 ‘박달동’이 되었고, 1994년 7월 1일에 ‘박달1동’ , ‘박달2동’으로 나뉘어졌다.
박달동의 유래에 대한 주민들의 구술 내용은 이러한 행정구획 변천 외 역사와 부합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조선시대부터 ‘박달’이란 명칭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모른채, 안양 중심가에서 벗어나 있는 현재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해석이라고 보인다.

박달리에서 없어지고 남은 동네들 지명

■능골(陵谷) <박달2동>
범고개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新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 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 주민들과 함께 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박달동 753-11, 1989년에 설립)과 세원화학(박달동 753-9, 1972년에 설립)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 까지 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동수암(東秀岩) <박달2동>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 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미름물 <박달2동>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명도 우물명을 취해 미름물 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제 때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1575-1628, 응교), 엄황(1580-1653, 영흥부사), 엄정구 (1605-1670, 한성좌윤)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범고개(虎峴洞) <박달2동>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붓골(筆洞.富谷) <박달2동>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등이 세거해 40여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골 (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 (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族閭閣)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때(1591) 사화(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으로 향하던 중,왜병 수천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라고 상소하여 숙종 34 년(1708)에 정려(族閭)를 내려 이곳(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삼봉마을(三峯洞) <박달2동>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박달동 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샛터말(新其村) <박달2동>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 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선녀골(仙女谷) <박달2동>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하여 선녀골 (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 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이씨령군파가 집성(20여호)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웃박달리(上博達里) <박달2동>
조선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 김씨 등 15여 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20191010]안양 신촌동 언덕위 수령 200년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10.10/ #안양 #오래된것 #느티나무 #200년 #평촌 #신촌동/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에 있는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느티나무 공원이라고 하지요. 느티나무 앞에 느티나무 표지판이 있지만 언덕 올라가는 길목에는 쓰레기가 쌓여 보기에 흉합니다. 공원 주변을 청서하고 나무 아래에는 잠시 앉을 수 있는 벤치라도 있으면 깊어가는 가을에 어울리는 조망이 멋진 쉼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90924]수령 360년 넘는 안양 석수1동의 회화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15/ #안양 #동네 #골목 #보물 #미래유산 #오래된것 #360년 /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안양박물관 후문앞 골목에 자리한 회화나무. 수령 360년의 나이를 가진 이 나무의 높이는 15m, 나무의 둘레는 2m인 마을나무이다.
1850년대에 마을주민이 심어 가꾸어 왔고, 마을정자목으로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회화나무는 옛날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출세할 때 마다 심었다고 하여 선비나무, 학자나무로 불리우며 주로 궁궐(관가)이나, 서원 주변에 식재하어 장소의 품격을 높이 우러러 보는 상징으로 심었다. 안양시 행정 중심인 시청 주변에도 가로수로 회화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석수동 회화나무는 마을나무로서 수백년간 주민들과 함께하는 정자목으로 사랑을 받아온 노거수이기에 시가 보호수로 지정했지만 관리부재로 나무 아래에는 쓰레기, 나무앞에는 불법주차, 나무 옆으로는 도시생활형 주택 신축이 시작되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느티나무 수령이 현재 표지판에 360년으로 기록돼 있으나 이보다 더 오래됐다고 한다. 따라서 전문가의 정확한 나이테 분석 등 나이 측정과 함께 안양시 보호수 또는 마을나무로 지정해 주변 울타리와 표지판 설치 등 보호와 관리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90915]1955년 안양1동에 심어진 이승만대통령 느티나무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9.14/ #안양 #동네 #골목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옛태평방직 #느티나무 #이승만 #1955/
재건축을 추진중인 안양1동 비산진흥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1955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라 표식이 있는 나무이지요.
한때 지역신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와서 나무를 심었다는 글이 게제돼 직접 식수와 기증 식수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기록 조차 없지만 과거 굴뚝 산업도시 안양의 위상을 드러낸 나무인데 향후 아파트 재건축으로 나무가 잘 보전될지 궁금하네요.
이 나무를 처음 찾았던 2013년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보면 대략 나무에 얽힌 역사를 이해할 듯싶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8560&fbclid=IwAR3-hDYr-v5B8EzAjeOX7QGr9yk1iW97x3sIhJACuALXJJzUEUOX45tZH4E

 

경기 안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식수(기증)한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6월 22일 오후 안양 마을 탐사길에 찾았다.
나무가 있는 곳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진흥아파트 단지내 8동 3∼4호 입구로 수종은 느티나무, 현재 크기는 밑동 둘레 약 1.6m에 높이 약 20m로 수령은 70~8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 서기 1955년 4월 5일'이라는 백색의 사각철재 표식이 세워져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해오고 있으나 정작 아파트 주민들은 이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안양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나무가 심어졌다는 1955년 당시 이 자리에는 삼흥방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흥방직은 1953년 1월 서선하 사장이 설립했다가 1956년 금성방직 김성곤 사장이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바뀐 곳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안양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였다.
안양에는 수량이 풍부한 안양천이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 섬유공장과 제지공장들이 들어섰다. 해방이후인 1950~60년대에는 산업시설들이 줄지어 자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의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안양을 몇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0월 17일 이기붕 민의원의장,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공보실장 등과 함께 안양을 찾았다. 이는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이 동양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안양시 석수동에 마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현재 석수2동 아파트와 군부대 자리) 기공식에 참석한 것으로 당시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94호)에는 영화연극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촬영소 모형도를 돌아보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어 1956년 10월 17일에는 안양3동에 있던 금성방직과 안양4동에 있는 삼덕제지 공장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했다.(대한뉴스 제94호)
그러나 1955년에 안양 삼흥방직(이후 태평방직)을 방문하거나 기념 식수한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느티나무에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란 표식이 부착됐을까.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에 온다고 해서 가봤더니, 안양역에서 태평방직까지 흰 광목이 깔렸고 대통령이 그 위를 걸어와 나무를 심는 것을 봤다. 그때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기념이라며 대통령이 밟고 지나갔던 광목을 조금씩 찢어가기도 했다."
이는 2008년 11월 14일자 <안양시민신문>에 실린 글로 안양토박이며 아파트 관리계장을 했던 서아무개(64)씨의 증언이다.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진흥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그 나무를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기증식수가 아닌 방문 기념식수가 되어야 한다.
이에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전문위원에게 확인한 바로는 "1955년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 금성방직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 대통령 이름으로 기증식수를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이 또한 일자가 맞지를 않는다.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15일로, 그는 당시 금성방직 공장을 방문했다.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66호)에는 방직공장의 내부 모습, 일하는 직공들,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작업모습을 살피는 함태영 부통령, 공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찾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나무 옆에는 목재 표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하게 부식돼 2005년에 현재의 철제 표식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주민이 증언과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규모 굴뚝공장들이 많았던 안양을 찾았던 기록을 볼 때 이 느티나무는 과거 산업도시로서의 안양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기념물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만은 분명한 듯하다.

 

 

 

[20190915]안양 삼막마을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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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안양 #느티나무 #500년 #석수동 #서낭할아버지나무 #/ 안양시 석수동 삼막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 나무가 2그루 있다. 바로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는 500년이나 된 느티나무로 군데군데 상처를 치유한 흔적에서 500년의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시원하게 쭉쭉 뻗은 가지들이 아직도 늠름한 모습을 자아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로 나뭇잎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할아버지 나무의 모습도 사뭇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 할아버지나무’라고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떠나 외지에 일을 보러갈 때나 또는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갈 때면 어김없이 이 나무에 와서 인사를 하고 다녀온다고 한다. 그저 큰일이 없어도 마을을 들고날 때 마을의 수호신인 할아버지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마음의 정성을 드린다.
이 할아버지 나무 옆에는 곧게 뻗은 고사목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 나무는 이 향나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향나무가 생명을 다하고 새로운 느티나무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긴 세월을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일까. 얼핏 보면 느티나무의 한 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할아버지 나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전쟁 직후에 어느 미군이 이 느티나무 가지를 땔감으로 쓰기 위해 가지를 잘라 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신성한 나무라 안 된다고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날 밤 부대에 원인 모를 불이 나 피해가 컸다. 사람들은 서낭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때마다 정성껏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할아버지 나무에서 삼막사방향으로 10m쯤 올라가면 할머니 나무가 있다.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에 비하면 그렇게 수령이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이 할머니 나무도 원래 할머니 나무는 아니다. 원래 할머니 나무는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고사목 향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 옆에 있는 고사목 향나무와 비교하면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은 향나무이다. 할머니 나무는 1977년 대홍수 때 뿌리 채 뽑혀 떠내려오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심은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그 옆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의 생김새가 워낙 멋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사 가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며, 신성한 나무라 팔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할아버지 나무나 할머니 나무 옆의 고사목 향나무들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러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막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이 되면 이 두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삼막골 당제 또는 삼막골 쌍신제라 불리우며 유구한 역사성과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내려오는 무형문화유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삼막골 당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때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불러 복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삼막골 동제

나무(수목)를 신앙하고 섬기는 삼막골 동제는 약500년의 역사성을 자랑하는 마을민속신앙으로 조선시대(세종 조)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 본관 진주)공의 후손이 500여년 전, 삼막마을에 정착하면서 자생적으로 태동한 마을제례문화로 분석된다. 따라서 조선전기 수목(삼막골 느티나무)의 식재와 더불어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제 제례의식은 시작된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 말(우왕 2)에 태어난 하연 선생(1376년~1453, 정치가, 행정관료)은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급제,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에는 황희 정승에 이어, 영의정까지 오른 역사 속 인물이다.
마을제는 오전 11시 우물 신에게 우물고사(우물제)를 먼저 지내고, 오후 3시 석수1동 마을회관(2통 소재)앞 할아버지나무(향나무와 느티나무)와 삼막교 옆(1통소재, 소공원내) 할머니나무(향나무와 은행나무)에서, 2개소의 제신인 고목을 대상으로 고목제를 올린다.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는 고사되어 고사목이 되었지만, 삼막골에서는 할아버지향나무(숫나무) 옆 느티나무와 할머니향나무(암나무)옆 은행나무에 제를 올리며, 무형문화유산인 마을제의 원형을 유지하며, 복수의 자연신(나무)에게 제를 올리고 있다.
삼막골 동제는 제신인 수목을 암수(음·양)로 구분하여,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에서 거의 동시에 오후에 지내고, 수목고사에 앞서 오전에 우물신에게 우물고사를 지내, 모두 3개소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우물고사는 여름에는 1통 주관 하에 제관이 우물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2통 주관 하에 우물제를 번갈아 주관한다.
삼막골 동제는 동네를 수호하는 마을신인 성황나무 앞에 소머리, 통북어, 떡, 제주(술) 등 갖은 제물을 바치고, 수목제사를 올린다.
당고사는 △강신례 △초헌례 △독축 △아헌례 △종헌례 △기원례 △사신례 △소지 △철상 및 음복례 순으로 진행되며,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 앞 각각 제단(신과 만나는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열린다.
삼막골 마을고사는 마을을 아래 마을(2통)과 윗마을(1통)로 구분, 마을단위로 동시간대에 마을신(수호신)인 신성한 2개의 당산목(서낭할아버지나무, 서낭할머니나무)을 대상으로 각각의 나무에서 서낭제를 올리는데, 할아버지 나무를 살짝 먼저 지낸다.
삼막마을 아랫마을 2통장은 초헌관이 할아버지나무(숫나무 향나무, 느티나무)에 제주(술) 한잔을 올린 후, 바로 윗마을 1통장에게 통신(전화)으로 할머니나무(암나무 향나무, 은행나무)에게 고사를 지내라고 신호를 보내면, 이윽고 할머니나무 당제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0190915]안양 자유공원 갈산 둘레길에서 본 상돌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8.22/ #안양 #동네 #골목 #마실 #갈산 #자유공원 #둘레길 #상돌/ 안양 평촌 자유공원 뒤에는 해발 85m의 갈산. 산을 한바퀴 도는 둘레길을 걷다 눈에 띄인 석물 한점. 인공적으로 잘 다듬은 것이 무덤앞에 설치하는 상석(넓은 장방향의 돌로 된 상으로 제수나 향로를 놓는데 쓰인다)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저 상석 위에는 무덤이 있다는 얘기인데 흔적은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덤은 사라지고 상석만 남은 것은 아닐까^^

 

 

 

 

 

[20190915]안양 호계동 방앗간 터 100년 넘는 연자방아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8/ #안양 #동네 #골목 #호계2동 #연자방아 #안말어린이공원/ 안양박물관에 있음직한 연자방아가 동네 어린이공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 호계2동에는 함평 이씨 집성촌이 자리했었는데 어린이공원은 함평 이씨 후손인 이난헌씨의 방앗간 터로 그 자손인 이영범님이 관리해 왔 관리해 왔다고 합니다. 그 방앗간에는 140여년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있었는데 2018년 11월 남아있는 연자방아의 윗돌을 갖고 연자방아를 재현했다네요. 지난 2019년 3월에는 안양시의회에서 '향토민속자료 지정 필요성 및 방안’에 대해 시의원이 질의가 있기도 했네요^^

 

 

[20190824]안양 골목에서 발견한 1971년 안양 표시 맨홀 뚜껑

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8.22/ #안양 #동네 #골목 #디자인 #맨홀/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현충로 길에서 오래된(1971년 안양 표시) 맨홀 뚜껑을 발견하다. 안양이라 글씨가 새겨진 50년이나 된 디자인 맨홀 뚜껑을 보기는 처음. 안양박물관에 보존해야 할 미래유산깜이다.

 

공공디자인은 도시와 거리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도시의 품격을 갸늠하고 21세기 도시 경쟁력의 핵심 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 도시를 어떤 공간으로 쾌적한 문화도시로 조성할 것인가. 도시 디자인과 경관조명, 공간설계 등 도시의 자연경관, 도시와 거리의 모든 부분과 밀접한 공공디자인은 매력있는 도시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