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11020]1970년대 안양천 기독보육원앞 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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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0/ #응답하라 #1970년대 #안양 #양명고 #안양천 #줄배/ 1970년대 초 안양천 안양2동 만안초교앞 구도로에서 망해암(양명고쪽) 및 기독보육원(현 좋은집), 삼영농장, 안양유원지 지름길쪽으로 가기위해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인데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이후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고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20211017]전술핵 보관했던 안양 박달 군용지의 1968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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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한국에 전술핵이 있던 안양 박달동 군용지의 1968년 풍경.

#안양 #기록 #기억 #미군부대 #주한미군 #83병기대대 #역사 #전술핵 #닐미샬로프/

안양시 박달2동 삼봉천을 따라 수리산 골짜기 안쪽은 그야말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으로 이곳을 군용지라 부르는데 사진들은 1968-69년 군용지를 관리랬던 석수동 미군 83병기대대에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거 남긴 기록이다.

박달군용지는 산악 분지형에 보안 및 방호에 유리하고 시설 배치에 필요한 공간 확보는 물론 주둔지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난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이다.

조선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 2월 22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번지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曹郞에 임명돼 노왜적 수천병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구만의 묘와 숙종 34년(1708)에 族閭를 내려 세윤 비각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10(1632)에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총관(副摠管)등을 역임한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이란 이가 이곳에 묻혔었는데 군용지가 개설되면서 화장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1625년(인조 3) 사간(司諫)을 거쳐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던 엄성 (嚴惺) 선조 8(1575)∼인조 6(1628)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

마을을 통째로 옮경야 했으며, 선조들의 묘까지 이장토록 할 정도였으니 군용지는 그야말로 군사 요충지로 면적만도 23만677평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이다.

안양 원로이신 고 '변원신'(2015년 작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는 2차 대전 때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으며,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한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국 문건(인터넷에서 검색)을 보면 1860년대 한국내 '전술핵 저장소' 들이 있었고 그중 한곳이 '안양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박달동 군용지로 지금은 없어진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부대)에서 이곳을 관리했다. 이는 1968-69년 그 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셜로프'가 남긴 글과 사진 기록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하던 군용지는 1970년 후반부터는 우리 군 부대시설들이 줄줄이 자리한다. 이 일대는 평지만 면적이 9만3천여㎡(8만2천평)에 달하는데 기존 군 시설외에 육군의 군 부대시설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예비군 훈련장이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정보사령부도 들어섰으며 최근에는 탄약고를 이전 또는 지하화하고 지상을 개발하려 박달스마트벨리 사업이 추진중이다.

한편 닐 미샬로프는 한국을 떠난지 34년만인 지난 2003년 10월에 안양시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당시 안양시는 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안양시민축제에서 안양의 역사와 과거를 담은 '닐 미샬로프 특별전'을 열었으며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에도 국내 사진작가들의 도움으로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곳이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 변모한 모습을 사진을 그의 홈페이지에 올려 비교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닐 미샬로프는 그가 보관했던 한국 관련 자료들을 2017년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20211014]1995년 안양역과 내고장 담배 구입 홍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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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안양 #옛사진 #기록 #기억 #안양역 #sine1995/ 안양역과 안양시 공무원들의 내고장 담배구입 홍보전/ 1995년의 안양역 풍경으로 안양시 공무원들의 내고장 담배를  구입해 달라는 홍보전이 이색적이다. 이는 담배 판매로 부과되는 ‘담배소비세’가 지방자치단체의 세수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담배소비세는 지방자치제 시행을 앞둔 지난 1989년부터 지방세로 이양됐다. 각 시·군의 ‘알짜’ 재정수입이다. 이 때문에 시·군마다 앞다퉈 내고장 담배사기 운동을 전개했다. ‘내고장에서 담배를 구입하면 시세(市稅) 460원이 내고장 발전을 위해 쓰여진다’는 '내가 산 안양담배 복지안양 꽃피운다' 등 담배소비 권장(?) 현수막까지 버젓이 내걸고 홍보에 나섰다.

 

 

[20211009]1938년 안양소학교(현 안양초교) 1학년 소풍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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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9/ #안양 #기록 #기억 #안양소학교 #안양초둥학교 #sine1938 #사진읽기

일제강점기 당시인 소화 13년(1938년) 4월27일 안양소학교(현 안양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소풍 기념사진.

사진속 돌계단 배경으로 볼때 1933년 개장한 안양풀(현 안양에술공원)로 간것으로 보인다.

사진에 설명 글씨에 안양소학교 1학녀 원적(遠適) 기념 소화 13년 4월27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소풍의 의미인 원족(遠足)을 잘못 표기한 보인다. 이는 SDGS전문가 중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있는 경주대학교 이창언 박사를 통해 일본인 교수의 확인을 거쳐 알아낸 사실로 아마도 사진관에서 사진에 글씨를 기록할때 원족을 원적으로 잘못 기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초등학교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우체국사거리 중화한방원 뒤에 위치한 공립 초등학교로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2018년 86회 졸업생(162명)까지 그동안 38,979명을 배출한 안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처음에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 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변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주접동과 남부동 사이에 있는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한다.
교하동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국 민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양초교보다 더 오래된 학교는 과천초교(1912년 4월1일 개교)와 군포초교(1920년 4월 1일 개교)다. 안양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안양역사 개설 이후 역 주변 주거지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을 형성해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1914년 호계동에 세워진 과천군 서이면면사무소 건물이 1917년 안양1동으로 이전해 안양면사무소 개설되고 관공서들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근대 도시(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군포장이 섰던 군포와 한양 초입인 과천이 더 컸으며 안양에 소학교가 없어 당시 학생들은 군포, 과천, 안산까지 등교했다.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설립인가 7월 4일, 2학급 편성)
1931년 3월 16일 제1회 졸업식
1938년 4월 1일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안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5년 9월 10일 병설유치원 개원 (2학급 80명)
1994년 6월 27일 병설유치원 종일반 1학급 개설 (계 3학급)
1996년 3월 1일 안양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6년 5월 25일 학교 체육관 준공
2017년 9월 1일 제29대 송화순 교장 취임

2018년 2월 13일 제86회 졸업식(162명) / 총 졸업생 누계 38,979명

2018년 3월 1일 36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20210929]안양 동편마을 입구에 있던 4H클럽 표지판(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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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9/ #안양 #동네 #골목 #기록 #기억 #동편마을 #4H클럽 #표지석/ 동편마울이 개발될 무렵인 2014년경 마을입구에서 찍은 4H클럽 표지판 사진이다.
농촌마을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천지개벽을 한 동편마을 입구에 새워져 있던 추억의 지덕노체 4H 클럽 콘크리트 펫말. 2014년부터 관악산 남쪽아래 명당이라 불리우면서 안양에서 유일하게 농사지으며 아늑했던 전원마을이 개발될 당시 함께 사려져 버렸다.
4H클럽은​ 실천을 통해 배운다는 취지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로 189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되어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4H클럽은 19세기말 미국사회가 공업화로 진행되면서 농촌경제가 위출되자 교사와 농촌지도자등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이 일면서 확산되었고, 1902년 알버트 그레이엄이 학생과 공무원을 모아 만든 것이 모태가 된 것이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가 늘어나면서
각국으로 파견된 4H클럽 출신이 고문단에 의해 4H사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4-H의
H 이니셜은
두뇌(head) · 마음(하트) · 손(hand) · 건강(health)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 4H회원으로 활동할 당시 마을회관 느티나무에 걸려있는 스피커에서 새마을운동 노래소리가 흘러나오면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나와 마을길 청소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각 마을 어귀에는 4H라는 표지석이 동네마다 설치되어 4H의 이념을 심어주면서 학문과 농사일을 동시에 일깨우며 농촌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덕노체와 4H영어를 외치며 손으로 머리,가슴,팔,다리등을 가리키는 행동을 동네 선후배들과 열심히도 배웠다.
저녁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4H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농사일과 마을가꾸기 사업, 새마을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로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인해 표지석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4H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듯 하다.
위 4H표지석은 안양시 동안구의 동편마을 입구에서 촬영한 모습인데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표지석도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진듯 하다.
82년 쌀다수확선도 농가라는 표찰이 시골 대문옆에 부착되어 있듯이
4H운동과 새마을운동등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쌀 자급을 위해
각 시군마다 쌀다수확상을 선발하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쌀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다가 신품종 통일벼를 개량하면서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쌀 수확량을 높여 1977년에는 우리나라 쌀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한다.
1981년 한국4-H중앙연합회가 창립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면서 조직관리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었으며,
‘4-H구락부’ 명칭도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뀌었습니다. 1983년에는 한국4-H후원회 사업 일부 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어 4-H운동은 새마을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고 100만 회원이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87년에는 ‘한국4-H운동40년사’를 발간하여 그간의 역사를 정리 하였고, 88년에는 ‘4-H회’라는 이름을 되찾는 등 4-H운동이 전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김정진 시인-전 안양경찰서 정보과 정보관 글중에서) 

 

동편마을의 2014년 무렵 사진들

[20210903]안양 근명중학교는 1962년 안양보육원에서 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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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2/ #안양 #기록 #역사 #근명학교 #안양보육원/ 안양유원지 안양보육원에서 1962년 개교할 당시의 근명학교. 근명중학교는 1962년 3월 14일 재단법인 '근명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후 1962년 3월 14일 초대 이사장 사태현 선생 취임과 1962년 3월 17일 근명중학교 설립인가(각 학년 2학급)에 이어 1963년 03월 10일 초대 교장으로 이종범 선생이 취임한다.
학교 연혁 등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근명학교는 개교 당시 학교가 안양시 석수동 안양보육원내에 있었다.
이는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안양시건축사회와 공동으로 지난 2018년 10월 6일 140차 탐사로 안양예술공원 일대 근대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안양보육원 강당 건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또 근명중학교는 개교 당시 남녀가 입학했던 남녀공학으로 1회부터 9회 졸업생까지 남녀가 학교를 다녔는데 10회 부터 여학생만 입학하면서 1973년 3월 근명여자중학교로 개명됐다가 2009년 3월부터 다시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다시 근명중학교로 게명되었다.
근명중학교가 오랜기간 여자중학교로 인식되면서 초기 졸업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근명중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였지만 이들 기수는 그 어느 기수보다 우애가 두텁고 동창모임도 활동적으로 60대가 넘는 지금도 모임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근명학교는 1969년 들어 안양5동 현재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하는데 1971년 11월 11일 제 2대 설립자로 이영주 선생이 취임한다.
근명학교는 1972년 2월 12일 해암 박순천 이사장과 3대 교장으로 이말영 선생이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박순천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 1야당 여성 당수를 역임한 원로 정치인으로 박순천 여사가 은퇴 후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육영사업을 시작하자 학교 명성이 전국에 빨리 퍼진 것이다.
근명학교는 1973년 3월 1일 근명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한다. 당시는 은행은 물론 기업에서 회계를 담당하려며 주산, 부기, 타자 등이 필수적인 시절로 서울에서는 서울여상이, 경기도에 근명여상이 대표할 정도였다.
이후 업무환경이 컴퓨터 처리로 바뀌면서 상업고등학교는 학교이름을 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바꾸게 되면서 근명여자정보고등학교로 개명했다가 남녀 공학이 되면서 2019년 근명고등학교로 다시 개명된 것이다. 

 

[옛사진]1964년 앨범속에 담긴 안양유치원과 아이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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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기록 #역사 #기억 #추억 #졸업앨범 #안양유치원 #sine1964/ 안양유치원 6회 졸업생 어린이들. 1957-58년생으로 2021년 현재 63-64세가 되었을 어르신들의 유년시절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안양유치원 이야기
1964년 2월 졸업(6회)한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유년시절의 안양 똑딱이 얼굴도 있네요.
안양유치원은 천주교 안양성당(현중앙성당) 부설로 1956년에 개원한 안양 최초의 보육시설이지요. 초창기에는 신부님, 이후에는 수녀님이 원장을 맡았지요.
당시는 시흥군 관내 국민학교들이 안양국민학교에 모여 초등학교 연합체육대회를 개최했는데 안양유치원이 초청 받아 참여했고, KBS텔레비젼 출연을 위해 남산 사옥을 방문했던 생각도 나네요.
안양유치원은 현재 중앙성당안에 있지만 예전에는 안양 중앙성당앞 가톨릭회관(이전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내 뒷뜰 주차장 자리에 있었지요. 유치원 옆으로는 자그마한 동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옛사진]1960년대 구세군 안양교회 사람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59년 2월22일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 구세군 하비 사령관의 안양 방문 기념사진이다.

2021.04.14/ #기록 #기억 #옛날사진 #구세군안양영문 #sine1959-1963 #안양5동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1962년 안양급식소를 신설하는등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 많았으며 1978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안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구세군냄비 모금활동을 펼쳤다.

구세군안양교회
031-449-4201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707-128 구세군중앙교회
사진 출처: 구세군안양교회 http://www.ayksg.pe.kr ......

 

1961년 6월18일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신도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런듯 교회당을 판잣집처럼 나무로 지었다.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가 많았다.

 

1963년 3월29일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서 부흥회 기념사진(강사 이성옥사관). 

판잣집형태의 교회당 건물이 회칠을 한듯한 세멘트건물로 바뀌었다.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안양5동에 둥지를 튼 구세군 안양교회는 생활이 궁핍했던 시절 1962년 안양급식소를 신설하는등 자선사업과 사회복지 등 다양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들이 많았으며 1978년 12월 24일 성탄절에 안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구세군냄비 모금활동을 펼쳤다.

 

1953년 성탄절날 안양5동 골목에 있던 구세군 안양교회에서의 찬양성가대 기념사진
1960년대 어느날 안양5동 구세군 안양영문 예배당앞에 긴줄을 섰다. 바구니, 솥단지 등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걸 보니 보릿고개 시절 보리쌀 등 구호물자를 타가려는듯 싶다.
1988년 10월30일완공한 3층 건물의 구세군 안양교회 새 성전 모습이다.

[ 옛사진]1961년 안양5동 골목에 있던 구세군 안양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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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6./ #기록 #기억 #옛날사진 #구세군안양영문 #sine1961 #안양5동/ 연말이 되면 자선남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에는 '한 손에 빵을, 한 손에 복음을이라는 슬로건이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 목사에 의해 세워진 기독교의 한 교파다. '기독교선교회'란 이름으로 처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교단 명칭을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란 뜻의 구세군으로 바꾸고 군대식 조직을 갖췄다.
실제 구세군에서는 군복, 군기, 계급 등 군대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세군의 장점은 기동력, 헌신과 복종, 단결심, 추진력 등을 꼽는다. 외형적으로는 군대 조직을 빌려 왔지만, 구세군엔 늘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서가 있다".
구세군이 태동한 데는 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사회적 모순이 불거지던 산업혁명기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당대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거리를 예배장소로 삼은 게 구세군이었다.
또 구세군을 생각하면 떠오는 게 '자선냄비'다. 1928년부터 시작된 자선냄비 모금은 이제 하나의 국민운동이 됐다. 많은 사람이 구세군을 종교단체가 아닌 복지단체로 오해하는 이유기도 하다.
구세군은 자선냄비를 통해 모은 기금으로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노인복지, 아동복지, 노숙인 자활, 에이즈 치료, 알코올 중독 치료, 다문화 가정 지원 등 사회복지 전 분야를 아우르며 전국 150여 개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 중이다.

구세군안양교회
031-449-4201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707-128 구세군중앙교회

사진 출처: 구세군안양교회 http://www.ayksg.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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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68년, 안양근로자회관이 들어서기전 주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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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기록 #기억 #옛사진 #SINE1968 #근로자회관부지/ 안양4동 중앙성당 앞에 근로자회관(현 가톨릭관)을 짓기 이전 모습으로 사진 뒤 왼쪽에 종탑이 보이는 교회가 안양중앙교회의 옛 예배당이고 오른쪽 나무들 사이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한국스레트 고려석면 안양공장이다. 사진 왼쪽에는 안양유치원 초창기 건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안양 도심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중앙성당과 2001아울렛 주변은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2018-2019년에는 조선일보 주최의 전국 밤줍기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역사 기록을 보면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 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했으며,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는데 현 중앙성당 건너편 가톨릭회관 뒷 마당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밤줍기 대회는 밤을 줍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920-3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았기에 습률대회를 명분으로 수백명의 여성(여류 명사)들이 전세낸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안양으로 나들이를 나와 서로 교재하고 친목을 나누고 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행사를 언론사에서 직접 주관했는데 행사 참가를 꺼리는 경우가 적지않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자녀와 동반 참석토록 하고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재미있는 유희와 갖가지 상품과 경품도 마련하는 등 나들이 행사를 즐겁게 했다네요.

참고 글: 1920-30년대 안양에서 전국 부인 밤줍기대회 열렸다. ://ngoanyang.or.kr/2136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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