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옛사진]1960년대 안양 사람들 결혼식장으로 인기였던 안양기독보육원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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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예배당 #교회 #결혼식장 #안양기독보육원 #좋은집 #양명고/ 안양2동 안양천변에 위치한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 경내에 있던 예배당(교회)으로 현재 양명고교 테니스장 자리에 있던 건물로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는 1960년대 기록 사진이다.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후 미군이 안양기독보육원에 지어준 교회로 추정된다. 대형 건물이 별로 없던 시절인 1950-1960년대 안양읍민뿐 아니라 시흥군민들이 신식결혼식장으로 자주 애용하던 곳으로 실내가 원목 나무 벽면으로 장식되고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는 등 분위기가 깔끔하고 좋아 종교 유무를 떠나 인기를 누렸던 공간이었다.

교회는 1978년 무렵까지도 있다가 안타깝게도 철거되어 사라졌는데 당시의 모습를 기억하는 6-70대 어르신들은 교회 외관은 소박했으며 실내는 벽면과 장식들이 나무로 짜여져 매우 아주 아름다웠다고 회고한다. 

이 교회에는 70년대까지 시목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안양ymca이사장을 역임하셨던 김영일 목사님의 부친이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쓰는 제 기억으로는 만안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이 교회에서 열린 누군가의 결혼식에 아버지 손을 잡고 갔으며 답례품으로 받은 달콤한 모찌떡을 받았었다. 앨범을 둘춰보니 당시 아버지와 함께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 있는데 교회의 왼쪽모습이 기록돼 있다.

한편 교회가 있던 곳은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1936년 서울에 있던 경성기독보육원이 옮겨와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으며.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는 등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개교했다. 양명고 졸업생들 사진을 보면 교회는 학교 건립 이후인 1978년에도 존재했으나 이후 80년대 초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다. 교회가 정확히 언제 허물어졌는지 학교측에 확인해야 알 수 있을듯 싶다.

[옛사진]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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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안양읍내에서 수암천을 건너는 다리 양지교(현 양지4교) 부근의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시가 다시 뜯어내 다리 왼쪽 상류는 철거됐고 오른쪽은 아직 복개돼 주차장 용도로 사용중인데 시는 복개된 남은 구간도 철거한다는 계획지요. 하천 따사로운 햇살이 드는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위쪽은 안양2동으로 당시에는 북부동이라 불리우던 안양읍내 중심으로 골목에는 단독주택, 구도로(만안로)와 중앙로변에는 교회, 아아스케끼공공장, 제재소와 목재소, 철공소 등과 쌀창고와 정미소, 마부가 운행하는 마차대기소 등이 있었지요.  다리 위쪽으로는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공장안으로 연결되는 철길, 다리 아래쪽으로 안양역에서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병목안행 철길에는 80년대 초반까지 자갈을 실은 화물열차가 운행됐는데 화물열차가 중앙로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살짝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을 갈아서 칼이나 표창을 만들어 놀기도 했던 추억이 있지요. 

1934년 경부선 복선 공사시 레일용 자갈 채취를 위해 놓여진 병목안행 철길은 8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다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일부 철길은 도로로 확장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그나마 안양9동 금융아파트 뒤 100미터 구간에 이제 삭고 썩어 흔적만 알수있는 나무침목과 철도 레일이 남아있어 과거의 역사를 가늠케 합니다.

병목안행 철길을 철거하지 않아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병목안시민공원, 담배촌 수리산 천교성지, 가파른 동네 창박골까지 전차(트램)을 운행하면 지역교통 담당은 물론 색다른 관광거리도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지 않을까 하는 도시 공상을 해봅니다. 

추억 담긴 얘기를 하다보니 잊었던 기억도 생각나네요, 다리밑에는 망태를 등에 메고 다니던 형님(?)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본거지였지요. 아치형 돌다리에는 문을 을 달아 마치 집같은 구조를 만들어 살았지요.  사진속 다리 우측으로 코너변에 있는 건물에는 호산나 시계점이 있었고, 사진 좌측으로 조그만 가면 원목이 철길에 쌓여있던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로 변전소(현 안양역전우체국 옆 모텔 자리)가 있었고 변전소 철망 옆으로 난 골목길은 안양중학교 가던 지름길이었지요. 그 길로 나오면 수암천을 건너는 아나방 다리가 있었고요. 가끔 철길에서는 보신탕용으로 개를 잡는 이들이 있어 등하교길에 눈을 찌푸리면도 구경했지요...또 1980년대 사진 좌측에는 구름다리라 불리우던 실내포장마차오오기찻길 골목 2층에는 길모퉁이카페, 사진 우측 기찻길 골목에는 방석집들이 쭈욱 있었지요.   

또다른 추억과 기억들이 생각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안양권지도]1976년 안양시(현 동안구 지역) 지도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77년 3월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안양의 현 동안구(비산동.호계동.평촌동-평촌) 1:5000 지도  

1974년 6월 항공촬영

1976년 편집

 

지도 상단에 표시된 하천은 청계저수지(현 의왕시 백운호수)에서 발원해 쌍개울(현 안양 중앙초교앞)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학의천으로 직강화된 지금과 달리 그야말로 구비구비 곡선을 그리고 모래사장이 폭넓게 분포돼 있음을 알수 있다.

지도 상단 우측 관양동에는 대한전선 안양공장(현 평촌 스마트스퀘어로 개발)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도 크게 보일만큼 면적이 8만여평에 가까운 260323.2m²에 달한다. 대한전선 우측으로는 태평제지, 신생화학, 태신화학 등 자그마한 규모의 공장들과 밤나무단지의 표기도 보인다.

참고로 안양하면 1950-60년대 안양읍내 전역이 포도밭으로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했지만 그 이전인 1920-30년대에는 밤나무가 참 많아 전국 밥줍기 대회가 열릴 정도로 밤 생산의 명산지로 유명했다.
실제 동아일보 옛 신문을 보면 1933년(10월1일)과 1934년(10월1일) 신가정(여성동아 전신) 주최로 제1회와 제2회 전국 부인 밤 줍기 대회가 안양에서 열렸는데 장소는 안양3.9동 일대인 노적봉 아래(현재의 성원아파트, 프라자아파트 주변)에서 열렸다.
노적봉은 현재의 안양예고가 자리한 나즈막한 산으로 과거 안양9동의 지명은 율목(栗木)마을, 율목동으로 불리울 정도로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또 1939년 10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보면 동아일보 영등포지국 주최 제1회 부인습률대회가 양짓말 밤나무밭 복판 넓은벌에서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1928년(10월 7일)과 1929년(10월 13일)에도 안양에서 조선일보 주최로 제2회와 3회 여자습률대회가 열렸는데 작고하신 변원신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담안(장내동, 안양4동, 중앙성당 주변)에서 열렸다고 한다.
안양4동은 과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墻內洞.澹安)이라 불리웠는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2001아울렛과 중앙성당 주변은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주최의 밤줍기 대회 기록은 안양 연표에도 올라 있다.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역사 기록을 보면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 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했으며,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는데 현 중앙성당 건너편 가톨릭회관 뒷 마당에 있다고 중앙성당 안으로 이전한다.
지도 중간 좌측 비산동 표기 아래는 달안마을(현 동안구 홈플러스 주변)로 가구 수는 13호 정도에 불과했다.

참고로 달안마을은 위쪽으로눈 광복 직전인 1944-45년 안양3동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현 대농단지)를 짓고 시제품을 생산하던 일제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박흥식)가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려던 곳이다. 

지도 중간 우측에는 민백마을(현 내손동)에는 20~25호 정도의 집들과 라이온상사, 부흥산업, 삼성아세치렌, 10여동의 공장들이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지도 아래 우측의 호계동은 경수산업도로(현 1번국도) 계획노선을 따라 위에서 부터 안말(현 호계시외버스정류장 주변), 방축말(현 호계중학교 주변), 신기(현 신기사거리 주변) 등 여러 마을들에 100호 이상의 가구들이 표기되어 있을 만큼 당시 꽤 컸다. 

참고로 호계동은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 시흥대로가 만나는 지점이었으며 지금도 수원시, 과천시, 군포시, 안산시 방면의 교차점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지다.

특히 옛 지도(1872년 지방지도-규장각)를 보면 호계2동 주변에는 조선시대 사창(社倉- 조선 시대,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 대여 기관)이 있었으며 1910년 이전에는 과천군 하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서이면으로 통합되면서 서이면사무소가 설치되는 등 1900년대 초반까지 인덕원 남쪽의 민백리, 갈산, 당산미, 도양리, 군포장, 귀인, 신촌, 신기 등의 마을을 아우르는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청감서원(호계서원)과 일제 강점기 초에는 낙영학교 등이 자리해 안양 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지도 아래 중간에는 신촌마을과 귀인마을이 표기되어 있는데 표시된 가구 수가 꽤 많다.  
지도 아래 우측 평촌동 우측에 붉은선으로 표기된 도로는 현재의 흥안대로이다. 도로 우측에 갈산마을(현 의왕 내손아파트 주변)이 표기되어 있으며 그조측으로는 안양남초등학교 자리하고 있다. 학교 좌측에는 당산미마을(현 자유공원 주변)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는 안양의 원로 건축사인 최승원 교수님께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미지 파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옛사진]1968년 안양 다운타운이었던 구시장-시대동(안양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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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글씀/ #추억 #구시장 #시대동 #안양1동/
사진속 풍경은 1930-60년대 안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갔던 안양 시대동(현 안양1동) 구시장의 1968-69년 모습입니다. 사진속에 담긴 기록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땡땡땡 건널목(현 진흥육교자리)에서 비산동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 및 대림대쪽 방향으로 찍은 시장통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사진 좌측에는 양산을 쓰고 포대기로 어린이를 둘러맨 아주머니, 장바구니를 든 원피스 차림의 소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웃통은 훌러덩 벗은채 신발은 한쪽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는 어린이가 있고 사진 우측에는 비산동 방향으로 가는 마차 2대와 밀집모자를 쓰고 자전거 탄 남성이 보이고, 사진 중앙에는 군용트럭 한대가 달려오고 있네요. 

이곳 구시장(시대동)은 1968-9년 당시 안양읍내에서 가장 큰 번화가로 안양역에서  인덕원, 과천, 청계, 서울강남(말죽거리) 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이었으며 1950년대 이전 5일장이 서다 상설시장(1928년 1월28일 개서)이 형성된 곳이지요. 또 1929년 안양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며 1930-60년대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땡땡땡 철길(현 진흥육교 자리)을 건너면 안양역과 1번국도, 행정타운이, 시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시장을 지나고 안양천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를 건너면 수푸루지 마을(임곡마을)로 능선 사이 개울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산비탈(현재의 대림대학교)에는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요. 수푸루지 마을에서 자그마한 능선(이마트앞)을 돌아 언덕(안양운동장 남쪽)을 넘어가면 수촌마을이 나오고 인덕원을 지나 청계와 과천, 말죽거리로 갈 수 있었는데 안양(버스정류장_현 남부시장 문화철물옆)에서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현재의 진흥육교는 전철이 개통될 무렵인 1975년에 개설되었는데 육교가 놓여지기 이전 땡댕땡 건널목 좌우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건물들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광창라사, 안양 최초의 다방, 이발소, 중국집, 호떡집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기(전철) 위험 때문에 철길 횡단은 꿈도 못 꾸지만 당시 건널목에서 안양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옆은 주민들이 걸어다니던 통행로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기차가 오나 레일에 귀를 대고 전해지는 진동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레일에 못을 놓아 기차가 지나간후 납작해지면 이를 갈아 연필깍는 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공작소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사진속 죄측으로는 한국특수제지 공장으로 가던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골목길 양쪽으로는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었고 막걸리집이 다섯개가 있었다네요. 먹걸리집들은 한국특수제지 노동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들리는 단골 참새 방앗간이었다고 합니다.(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기억)
안양시장(구시장)은 안양천과 연접한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하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6.25전쟁이후 피난민들이 유입하며 판잣집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면서 상권이 이전하자 60년 중반이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후 시대동은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시장 주변에는 안양1동 주공뜨란채,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 부지에는 안양1동 삼성레미안, 태평방직 자리에는 안양1동 진흥아파트(현재 재건축 추진)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흔적도 사라지고 말지요.

 

시대동(구시장)
안양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사진]안양 일번가에 있던 1972년 안양경찰서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1972년 #안양1동 #옛안양경찰서 #중앙동/ 1970년대 안양 원도심(현 안양일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 건물의 모습으로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1972년 당시 시흥군청과 안양사무소 경계 골목(현 옛 서이면사무소 들어가는 길) 초입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과거로 되돌아보는듯 한 안양경찰서 건물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으로 당시 도로 앞에 있던 안양읍사무소도 기와 지붕을 얹은 2층으로 기억하는데 같이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재 60만 안양시민의 방범과 치안, 지역 교통을 책임지는 안양경찰서는 만안과 동안경찰서 2곳으로 1시 2경찰서 체계로 안양 토박이들 조차 안양 최초의 경찰서는 안양8동 명학역 옆에 있다 없어진 안양경찰서(현재 보라 오피스텔 신축중)가 첫 관서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이전인 1950-60년대에는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자료를 보면 안양경찰서의 첫 관서는 1945년 10월 21일 당시 금성방직 자리(현 대농단지)에 개서했으며 이후 1960년대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등과 함께 안양읍 안양리 중앙동(현 안양1동. 안양시 안양1번가)로 이전해 문을 열지요.
당시 안양 중앙동은 구시장(시대동)과 새시장(장내동)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으로 안양역과 인접해 관공서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등이 밀집한 곳으로 다운타운이었지요.
당시 안양경찰서의 위치는 현재의 주소지로 보면 안양로 292번길 미엔미케익전문점 좌우가 해당됩니다. 또 경찰서 좌측으로는 의용소방대 건물이 잇었는데 현재의 피자헛 안양점 건물이 있는 자리로 뒷뜰에는 비상을 알리는 종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당시 안양 중앙동에는 관공서와 양화점, 양복점 , 의원(병원), 중국 화상이 운영하던 중국집 2-3곳 등이 있었는데 경찰서 앞으로는 안양읍사무소(롯데리아 주변), 그 윗쪽으로 시흥군청(현 삼원프라자호텔 주변)이 있었지요.
이후 1980년대 중반 안양경찰서는 안양시청의 안양6동 이전과 함께 명학동(현 안양6동. 신필림아트센터)으로 이전하였으며 평촌 신도시 건설이후 1999년 11월 3일 다시금 평촌으로 이전하지요/ 사진출처; 국기기록원(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1103689532&dsid=000000000001&gubun=search)

 

안양 일번가에 안양경찰서 있었다(1971년) https://anyangbank.tistory.com/937

1970년대 안양1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와 역사 https://anyangbank.tistory.com/3070

1973년의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https://anyangbank.tistory.com/1218

1970년 안양의용소방대와 사이렌탑 https://anyangbank.tistory.com/1219

1970년대 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장비와 복장 https://anyangbank.tistory.com/1075

1970년대초 안양1동 골목길과 절미운동 https://anyangbank.tistory.com/652

1973년, 안양읍내 시흥군 관공서 거리 풍경 https://anyangbank.tistory.com/376

1970년 초반 안양읍내-현 2001아울렛 사거리 https://anyangbank.tistory.com/386

1968년 안양읍내(1.3.4동) 항공사진  https://anyangbank.tistory.com/712

 

[안양권지도]1910년 당시 시흥군지도(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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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당시 시흥군 수기지도

 

명칭:  시흥군
크기:  55.5*79.2(0.04)

재질:  한지

설명: 개정전 면경계(일점쇄선) 및 면명은 검은색, 개정후 면경계 및 면명은 붉은색임.
출처: 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287786

 

시흥군(始興郡)은 1895년부터 1988년까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관악구·동작구·구로구와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일부를 관할하였던 경기도의 행정구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거대 시흥군으로 탄생했다가 해방이후 행정구역 개편 고정을 거치면서 소멸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시흥군청 또한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가 영등포로 그리고 안양으로 소재지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1914년 이전에는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 등이 존재했으나 일제는 과천군, 안산군을 시흥군에 편입시키면서 거대 지자체가 출범한다.

 

※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내용

시흥군 서면 : 구 시흥군 서면 + 남면 + 군내면 박달리 (현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시흥군 북면 : 구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 구 과천군 하북면 (현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노량진, 흑석동)

시흥군 동면 : 구 시흥군 군내면 (박달리 제외) + 동면 (현 서울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상도동,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시흥군 신동면 : 구 과천군 상북면 + 동면 (현 서울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시흥군 과천면 : 구 과천군 군내면 (현 경기도 과천시)

시흥군 서이면 : 구 과천군 상서면 + 하서면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

시흥군 남면 : 구 과천군 남면 (현 경기도 군포시, 단 이중 대야미 지역 제외.)

시흥군 군자면, 수암면 : 구 안산군 지역 (현 경기도 안산시, 시흥시 남부)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시흥군은 면적이 하나둘 쪼개지기 시작한다

1936년 - 영등포읍,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반대방리 일부, 도림리 일부, 동면 상도리 등 경성부 편입

1941년 - 서이면,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 동면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 잔여지역(현 신대방동) 서울특별시 편입. 안양면, 안양읍으로 승격. 군청이 영등포에서 안양읍으로 이전

1963년 - 동면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독산리, 시흥리, 신동면 전역(현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울특별시 편입.  화성군 일왕면 일부, 시흥군으로 이관되어 의왕면 설치.

이같은 분열은 계속된다

1970년 서면 광명출장소(광명, 철산리) 설치
1973년 안양읍 -> 안양시 승격 / 부천군 소래면 -> 시흥군 이관(7면)
1974년 서면 광명출장소 ->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7면 1출장소)
1979년 서면 -> 소하읍 승격 / 남면 -> 군포읍 승격 / 수암면(8개리), 군자면(7개리) 일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경기도 반월출장소 설치 (2읍 5면 1출장소)
1980년 의왕면 -> 의왕읍 승격 / 소래면->소래읍 승격(4읍 3면 1출장소)
1981년 소하읍+광명출장소 -> 광명시 승격(3읍 3면)

1982년 과천면에 경기도 과천출장소 설치(3읍 2면)
1983년 화성군 일부 의왕읍 편입 / 소래읍 옥길리 -> 부천시와 광명시에 분할 편입
1986년 경기도 반월출장소 -> 안산시 승격 / 경기도 과천출장소 -> 과천시 승격(3읍 2면)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시흥군은 점점 축소되고 결국 1989년에 군포읍이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그 외의 남은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결국 시흥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옛사진]1970년대 안양 망해암행 안양천 건너던 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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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0 #안양 #줄배 #양명교 #안양천 #나무다리 =/ 1970년대 초 안양천을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 양명교가 놓여진 곳인데 하천을 건너 망해암, 기독보육원, 삼영농장 등을 가려면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지름길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시 자료를 보면 1992년 안양천의 BOD(생화학적 산소요구량) 농도는 66.7ppm으로 양재천 16ppm, 중랑천 14.3ppm, 탄천 3.9ppm 등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는데, 2001년부터 시작한 안양천살리기 사업이 결실을 맺으며 2012년 측정한 안양천의 수질은 BOD는 3.9㎎/1으로 2급수를 유지하고 있지요.
따라서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안양권지도]1979년 안양시(군포.의왕) 도시계획 계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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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1979년 안양시 도시계획 계괄도

 

안양시가 읍에서 시로 승격(1973년)한 이후인 1978년의 도시 계획을 담은 지도로 최승원 건축사께서 소정하고 있는 지도입니다.

1979년 당시의 안양은 경부선 철도 아래로 안양천이 흐르고 지역특산물인 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인구 15만여 명의 작은 도시로 인구 변화를 보면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명, 1949년 8월 15일 안양읍 승격 당시에는 20,021명,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 당시에는 111,075명에 불과했지요.

지도에는 안양시와 당시 시흥군이었던 군포읍과 의왕읍을 포함하고 있네요.

눈에 띄는 것은 안양시 각동 행정지명으로 안양 1,2,3,45,6,7,8,9동 등 새로운 동이름과 함께 옛 동 이름이 함께 표기돼 있네요.

양지동 북부동, 주접동, 능골, 후두미동, 냉천동, 명학동, 골안, 방축말, 내비산동, 마분동, 간촌동, 준촌동, 부림동, 동편동, 삼막동, 벌터, 신촌, 화창, 친목, 호현 등 옛 동 지명과 마을의 이름들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1979년 2월 15일 발행

국립지리원 1978년 지도 참고

 

이 지도는 안양의 원로 건축사인 최승원 교수님께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미지 파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옛사진]1956년 미군과 외국원조단체에서 지어준 안양기독보육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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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안양 #양명고 #기독보육원 #안양2동 #1956년/ 

현재 양명고 뒷쪽에 있는 건물(수리 공구 창고 영선실)로 한국 전쟁이후 경제,사회, 정치적으로 어렵고 취약하고 혼란스러운시기였기에 외국원조단체의 자선구호활동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다. 미군도 보육원 신축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기독보육원 신축 건물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사진은 1956년 4월 10일 준공식에서 오긍선 기독보육원 설립자와 후원자들이 건물앞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미군고 외국 후원자들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지요.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1동은 사진속 건물로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안양으로서는 문화유산감으로 보존가치가 높지만 시급히 수리해야 할 곳이 많은 상태로 보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사 등이 자주 열렸지요.

특히 내부가 전부 나무로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 앨범속 빛바랜 흑백 사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0년 말 무렵 이곳 예배당에서 있었던 결혼식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네요.

양명고에는 수령이 100년이 넘는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안양2동 주민지차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귀연 전 위원장은 과거 정조대왕 능행차길이 이곳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즉 한양을 출발한 능 행차가 노량진을 지나고 만안교를 지나 보육원 옆 야산(동네 어른들은 호랑이 꼬리 부분-관악산)을 끼고 돌아 이곳을 통과해 안양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좋은집과 양명고 자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던 것으로 예기되고 있습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양명고와 바로 옆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부지는 1918년 서울에서 경성기독보육원으로 출발한 고아원이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정작 안양시와 지역문화계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 싶네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옛사진]1990년대 안양 호계2동 수령 250년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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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90년 호계2동 느티나무(현 육교옆) 주변 풍경

#안양 #느티나무 #호계2동 #호계육교 #느티나무버스정류장 #호계시외버스정류장/ 
1990년 중반에 찍은 안양시 호계2동 풍경으로 동네의 정자나무이자 수호신으로 250년을 살다가 고사한 느티나무가 베어지기 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현재 호계2동 버스정류장앞에서 선 열린조각공방을 운영하는 김수선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사진속 느티나무가 있는 위치는 현재 호계동시외버스정류장과 육교 중간(안양시 경수대로 717 건물 앞)으로 사진 좌측은 남쪽(호계신사거리 방향) 우측은(비산사거리 방향) 북쪽이며 도로는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 1번국도)이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은 사진속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2012년 베어지기까지 수령 250년이나 되는 동네의 수호신이자 정자나무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한 느티나무는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기도 했지요.

이 느티나무는 도시 개발과 함께 서서히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중반 마을 앞 도로가 넓어지면서 느티나무는 도로 끝자락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나무 가지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느티나무 추돌 위험 지역이란 오명을 받게 되지요.

더욱이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옆에 자리하면서 매연 등 환경 오염원으로 인한 탓일까, 결국 느티나무는 죽고 말지요.

죽은채 한동안 방치되던 느티나무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공사를 앞두고 다시금 주민들의 관심을 받게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느티나무가 비록 고사돼 죽었지만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하기에 베어야 함을 통보합니다. 

결국 이 느티나무는 베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80년대 서울에서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와 조각 등 공예 작업을 하고 있는 공예가 김수선 작가의 눈에 띈 것이지요.

전남 광주가 고향인 김 작가는 중학 시절 미국에서 공예가로 활동하던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안양으로 이주해 느티나무 앞 건물에 공방을 차리고 작업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250년을 살다가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느티나무였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1990년대 경수산업도로 확장 공사시 고사된 느티나무를 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안양시와 맞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나무를 벨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 작가에게 기증했다고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아온 수령 250년의 나무를 베어내기는 쉽지 않았다네요.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건 아닐까 걱정하며 모두가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하기에 1996년 8월 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이 정중히 제물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냈다고 합니다. 

김수선 작가는 나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어느하나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공방으로 옮겨 작업에 들어갑니다. 동네 유지와 인척은 물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분 두터운 작가들까지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합니다.

안양시가 고향이자 호계동의 역사라 할수 있는 느티나무는 작가의 손과 12년의 기나긴 시간을 거쳐 특성에 따라 부분별, 분야별 작업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느티나무 공예 작품들은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에서 한차례 전시를 통해 일반에 선을 보입니다마는 행정기관, 문화예술단체는 물론 홍보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역 주민들도 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더욱이 32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보존 및 전시할 공간을 찾지만 이 또한 문화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보금 자리를 찾지 못해 지금도 32점의 작품들은 지하 공방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지요.   

당시 김 작가는 안양문화원을 찾아 느티나무 공예 작품 보존을 위해 도움줄 것을 요청했는데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했다면서 지금도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이 있던 자리인 호계동 육교앞에는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느티나무 식당이 있었고, 현재의 호계동 시외버스정류장은 공식 명칭이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으로 불려져 왔지요.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다음정류장은 "느티나무 버스정류장입니다"라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이같은 멘트는 대중교통 덕후들이 늑음으로 남겨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한편 느티나무는 1,000년 이상 오래 사는 나무로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서당 훈장이 학문을 가르치거나 동네 주민들이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국가적으로도 느티나무는 신라시대부터 신성시하며 벌채를 금지해 온 나무라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았는데 근대에 와서도 마을앞으로 도로가 뚫리는 경우 찬반 격론끝에 결국 원형 로터리 식으로 도로가 내는 등 그야말로 지극한 예우를 받으면서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받고 있지요.

안양에도 오래된 느티나무 몇그루가 현존하는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6에 있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높이 25m, 둘레 5.3m)는 매년 마을제를 지낼 정도로 대접받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1982년 10월 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요.

안양시 동안구 관악대로 275번길 수목공원(관양1동 1377)에도 수령 550년(2014년 150->550년으로 안내판 수정)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안양시가 2005년 6월 보호수로 지정했으며 이곳에서도 매년 마을제(수촌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지요. 

또 안양시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언덕위 느티나무공원에도 수령 200년 가까운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시 이 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경관녹지 1개소(소공원)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별도 수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