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10121]1920년대 안양4동에 있던 안양우편소 건물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2.01.20/ #안양 #기록 #sine1920 #안양우체국 #안양우편소 #응답하라/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양우체국 최초의 건물로 현재의 안양4동우체국 자리 또는 그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자가 불분명한 1920년대 찍은 이 엽서 사진은 안양시청 공보실에서 사진을 담당했던 이정범 선생이 현재 갖고 있다. 기록을 보면 일제 강점기때인 1915년 7월1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 있던 안산우편소를 1920년대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로 이전하면서 안양우편소로 업무를 시작하였는데 그때의 안양우편소 위치가 지금의 안양4동우체국 주변이 아닐까 추정된다는것. 그후 안양우체국(현 서안양우체국)은 안양5동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지속하다 1990년대 평촌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동안구 달안동에 우체국청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안양4동우체국은 1970-90년대에는 안양역전우체국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우체국 좌측으로는 제재소가 있었고 그 옆으로 시흥군 안양읍 당시 안양 최초로 전기를 공급해주던 안양변전소가 있었다. 변전소 철망 담벼락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끼고 돌면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과 수암천을 지나 안양중.고교로 가는 샛길과 구름다리가 있었다.

[20220109]1992년 노찾사 안양 공연을 준비한 안양사랑청년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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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안양 #기록 #기억 #응답하라1992 #사람들 #안양사랑청년회/ 1992년 10월 10일 노래를찾는사람들 공연(안양문예회관에서 2차레 공연) 리플렛에 실린 공연을 준비한 안사청 회원들 사진.

[20220105]1970년대 중반의 안양역과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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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기억 #역사 #옛사진 #응답하라 #안양 #안양역 #기차 #광장 #역전/

전철역이 생긴 이후의 모습으로 보아 1970년대 후반 무렵의 안양역사와 그 앞의 풍경으로 보이는데 역사 출입문 앞 과정에 시계탑이 있네요. 80년대 후반까지 존재했던 이 시계탑은 누군가를 만나는 약속 장소로의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사진 등 과거 기록을 보면 안양역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기와를 얹은 형태의 자그마한 역사가 설치된 이후 현재까지 서너차례 중개축 및 신축을 통해 현재의 대형 역사를 갖추었지요.

안양역은 190511일 경부선이 개통되자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합니다. 부연하면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공교롭게도 하서역도 명학역도 아닌 안양역으로 결정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그 자리를 내줍니다.

사진 등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안양역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기와를 얹은 형태의 자그마한 역사가 설치되었다가 역사의 노후로 19388월 공사비 4만원(당시금액)으로 건평 88평에 목조콘크리트 스레트식으로 착공하여 2개월만인 1021일 정오에 신축 낙성식을 가졌으나 한국전쟁 기간인 19511261.4후퇴 당시 완전 소실됩니다.

그 뒤 1956617일 공사비 13백여만환(당시금액)으로 건평 95평의 준공하였고 1974815일 전철개통과 동시에 선상역사를 증설하지요. 

사진들을 들여다 보면 안양역사는 증개축을 통해 건물 형태가 여러차례 바뀌는데 1969년의 사진에는 예쁜 격자무늬의 유리창틀을 한 예쁜 안양역사 사진도 있습니다..

안양역은 20011213일 민자역사 개통식을 갖고 재탄생해 다음날인 14일부터 영업을 시작합니다.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모두 1100억원을 들여 안양1881 일대 2847부지에 지난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LG건설이 시공했으며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693규모로 시민편의를 위해 대합실과 개찰구.승강장으로 이루어졌지요.

이와는 별도로 역무시설 바로 옆에 롯데백화점. 골프연습장. 문화센터와 769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 등을 갖춘 지하 1, 지상 9, 연면적 7814규모의 부대건물이 2004년 완공됐습니다

롯데백화점 안양점은 2032년까지 30년간 임차계약을 맺었는데 2012년 3월 개장한 롯데 평촌점과 상권 중복 등으로 매출이 크게 감소하면서 매각 소문이 나돌더니 결국 중견기업 엔터식스에 매각돼 패션쇼핑몰 '엔터식스 안양점'으로 이름을 바꿔 Z세대 쇼핑 아지트로 변신을 꾀합니다.

엔터식스는 왕십리, 강변테크노마트, 상봉, 천호, 한양대 등에서 복합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최근에는 온라인쇼핑몰에도 진출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는 기업으로 인수한 안양점은 8번째 오프라인 점포로 가장 큰 규모라고 하네요.

한편 안양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여름철이 되면 안양풀장(옛 안양유원지, 현 안양예술공원)으로 놀러오는 피서객들이 많았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운행하는 미니 합승버스가 있었는데 몇대 없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파가 역앞 광장에 줄지어 서다가 마음 급한 이들은 안양유원지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 다반사로 안양역에서 석수동 방향으로 철길을 따라 걷다가 안양유원지 입구 안양철교를 건너야 했는데 철교다리 아래로 흐르는 시퍼런 냇물에 아찔아찔했지요.

또다른 지름길도 있었는데 안양역전에서 철길을 따라 걷다가 현재의 양명고 앞에서 나무다리를 건너 안양천을 넘고,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 정문앞을 지나 안양유원지 초입인 현재의 지하차도 옆 골프장으로 나오면 아이스크림 리어카, 시원한 물에 담긴 칠성사이다 노점상이 반겨주었는데 이곳에서 더위와 갈증을 잠시 식혔다 안양출장으로 가기도 했지요.

1950년대부터 70년까지 당시 철도청은 안양유원지 입구(현 전철 전력분배함 설치자리)에 임시역을 개설해 오전과 오후에 피서 열차가 이곳에 정차하기도 당시 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인파가 걸어가는 행렬이 장관으로 당시 신문에는 100만 인파가 안양유원지로 피서왔다고 기사를 쓸 정도였답니다.

 

안양 원로건축사 최승원 교수님이 제공한 자료

1. 1905간이역개통 볕양

2. 1939.8 복선으로 신축 88평 중앙합각

3. 1951.1.26 대폭파 1952년경 임시복구역

4. 1956.6.17 95

5. 1974.8.15 전철역개통시새역건축

6. 2001.12.13 민자역사 역은 하이텍크디자인

 

 

[20220102]1963년 크리스마스 축하 안양기독연합합창대 공연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2.01.02/ #옛사진 #기록 #기억 #응답하라1963/ 1963년 12월 크리스마스때 조직된 안양기독연합합창대와 성탄축하공연사진. 장소미정.

[20211020]1970년대 안양천 기독보육원앞 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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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0/ #응답하라 #1970년대 #안양 #양명고 #안양천 #줄배/ 1970년대 초 안양천 안양2동 만안초교앞 구도로에서 망해암(양명고쪽) 및 기독보육원(현 좋은집), 삼영농장, 안양유원지 지름길쪽으로 가기위해 건너던 줄배입니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인데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이후 1970년대 중반에는 안양2동 토박이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부친께서 나무다리를 놓아 양명고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애쓰셨지요. 평소에는 나무다리라도 건너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여름철 비라도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거나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면 비산동 임곡교 또는 안양유원지쪽으로 빙 돌아다녀야 했답니다.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해 8-90년대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며 물고기가 살수 없던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답니다.
안양의 가장 큰 변화는 되살아난 안양천이 아닐까 싶네요. 철새와 버들치, 참게가 다시 돌아오고 기피했던 천변 아파트가 살기좋은 곳이 됐으니까요./ 사진 제공; 고 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20211017]전술핵 보관했던 안양 박달 군용지의 1968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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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한국에 전술핵이 있던 안양 박달동 군용지의 1968년 풍경.

#안양 #기록 #기억 #미군부대 #주한미군 #83병기대대 #역사 #전술핵 #닐미샬로프/

안양시 박달2동 삼봉천을 따라 수리산 골짜기 안쪽은 그야말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으로 이곳을 군용지라 부르는데 사진들은 1968-69년 군용지를 관리랬던 석수동 미군 83병기대대에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거 남긴 기록이다.

박달군용지는 산악 분지형에 보안 및 방호에 유리하고 시설 배치에 필요한 공간 확보는 물론 주둔지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난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이다.

조선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 2월 22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번지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曹郞에 임명돼 노왜적 수천병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구만의 묘와 숙종 34년(1708)에 族閭를 내려 세윤 비각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10(1632)에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총관(副摠管)등을 역임한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이란 이가 이곳에 묻혔었는데 군용지가 개설되면서 화장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1625년(인조 3) 사간(司諫)을 거쳐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던 엄성 (嚴惺) 선조 8(1575)∼인조 6(1628)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

마을을 통째로 옮경야 했으며, 선조들의 묘까지 이장토록 할 정도였으니 군용지는 그야말로 군사 요충지로 면적만도 23만677평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이다.

안양 원로이신 고 '변원신'(2015년 작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는 2차 대전 때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으며,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한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국 문건(인터넷에서 검색)을 보면 1860년대 한국내 '전술핵 저장소' 들이 있었고 그중 한곳이 '안양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박달동 군용지로 지금은 없어진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부대)에서 이곳을 관리했다. 이는 1968-69년 그 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셜로프'가 남긴 글과 사진 기록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하던 군용지는 1970년 후반부터는 우리 군 부대시설들이 줄줄이 자리한다. 이 일대는 평지만 면적이 9만3천여㎡(8만2천평)에 달하는데 기존 군 시설외에 육군의 군 부대시설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예비군 훈련장이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정보사령부도 들어섰으며 최근에는 탄약고를 이전 또는 지하화하고 지상을 개발하려 박달스마트벨리 사업이 추진중이다.

한편 닐 미샬로프는 한국을 떠난지 34년만인 지난 2003년 10월에 안양시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당시 안양시는 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안양시민축제에서 안양의 역사와 과거를 담은 '닐 미샬로프 특별전'을 열었으며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에도 국내 사진작가들의 도움으로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곳이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 변모한 모습을 사진을 그의 홈페이지에 올려 비교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닐 미샬로프는 그가 보관했던 한국 관련 자료들을 2017년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20211014]1995년 안양역과 내고장 담배 구입 홍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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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안양 #옛사진 #기록 #기억 #안양역 #sine1995/ 안양역과 안양시 공무원들의 내고장 담배구입 홍보전/ 1995년의 안양역 풍경으로 안양시 공무원들의 내고장 담배를  구입해 달라는 홍보전이 이색적이다. 이는 담배 판매로 부과되는 ‘담배소비세’가 지방자치단체의 세수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담배소비세는 지방자치제 시행을 앞둔 지난 1989년부터 지방세로 이양됐다. 각 시·군의 ‘알짜’ 재정수입이다. 이 때문에 시·군마다 앞다퉈 내고장 담배사기 운동을 전개했다. ‘내고장에서 담배를 구입하면 시세(市稅) 460원이 내고장 발전을 위해 쓰여진다’는 '내가 산 안양담배 복지안양 꽃피운다' 등 담배소비 권장(?) 현수막까지 버젓이 내걸고 홍보에 나섰다.

 

 

[20211009]1938년 안양소학교(현 안양초교) 1학년 소풍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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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9/ #안양 #기록 #기억 #안양소학교 #안양초둥학교 #sine1938 #사진읽기

일제강점기 당시인 소화 13년(1938년) 4월27일 안양소학교(현 안양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소풍 기념사진.

사진속 돌계단 배경으로 볼때 1933년 개장한 안양풀(현 안양에술공원)로 간것으로 보인다.

사진에 설명 글씨에 안양소학교 1학녀 원적(遠適) 기념 소화 13년 4월27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소풍의 의미인 원족(遠足)을 잘못 표기한 보인다. 이는 SDGS전문가 중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있는 경주대학교 이창언 박사를 통해 일본인 교수의 확인을 거쳐 알아낸 사실로 아마도 사진관에서 사진에 글씨를 기록할때 원족을 원적으로 잘못 기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초등학교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우체국사거리 중화한방원 뒤에 위치한 공립 초등학교로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2018년 86회 졸업생(162명)까지 그동안 38,979명을 배출한 안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처음에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 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변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주접동과 남부동 사이에 있는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한다.
교하동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국 민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양초교보다 더 오래된 학교는 과천초교(1912년 4월1일 개교)와 군포초교(1920년 4월 1일 개교)다. 안양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안양역사 개설 이후 역 주변 주거지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을 형성해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1914년 호계동에 세워진 과천군 서이면면사무소 건물이 1917년 안양1동으로 이전해 안양면사무소 개설되고 관공서들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근대 도시(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군포장이 섰던 군포와 한양 초입인 과천이 더 컸으며 안양에 소학교가 없어 당시 학생들은 군포, 과천, 안산까지 등교했다.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설립인가 7월 4일, 2학급 편성)
1931년 3월 16일 제1회 졸업식
1938년 4월 1일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안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5년 9월 10일 병설유치원 개원 (2학급 80명)
1994년 6월 27일 병설유치원 종일반 1학급 개설 (계 3학급)
1996년 3월 1일 안양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6년 5월 25일 학교 체육관 준공
2017년 9월 1일 제29대 송화순 교장 취임

2018년 2월 13일 제86회 졸업식(162명) / 총 졸업생 누계 38,979명

2018년 3월 1일 36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20210929]안양 동편마을 입구에 있던 4H클럽 표지판(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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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9/ #안양 #동네 #골목 #기록 #기억 #동편마을 #4H클럽 #표지석/ 동편마울이 개발될 무렵인 2014년경 마을입구에서 찍은 4H클럽 표지판 사진이다.
농촌마을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천지개벽을 한 동편마을 입구에 새워져 있던 추억의 지덕노체 4H 클럽 콘크리트 펫말. 2014년부터 관악산 남쪽아래 명당이라 불리우면서 안양에서 유일하게 농사지으며 아늑했던 전원마을이 개발될 당시 함께 사려져 버렸다.
4H클럽은​ 실천을 통해 배운다는 취지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로 189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되어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4H클럽은 19세기말 미국사회가 공업화로 진행되면서 농촌경제가 위출되자 교사와 농촌지도자등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이 일면서 확산되었고, 1902년 알버트 그레이엄이 학생과 공무원을 모아 만든 것이 모태가 된 것이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가 늘어나면서
각국으로 파견된 4H클럽 출신이 고문단에 의해 4H사상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4-H의
H 이니셜은
두뇌(head) · 마음(하트) · 손(hand) · 건강(health)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智), 덕(德), 노(勞), 체(體)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 4H회원으로 활동할 당시 마을회관 느티나무에 걸려있는 스피커에서 새마을운동 노래소리가 흘러나오면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나와 마을길 청소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각 마을 어귀에는 4H라는 표지석이 동네마다 설치되어 4H의 이념을 심어주면서 학문과 농사일을 동시에 일깨우며 농촌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덕노체와 4H영어를 외치며 손으로 머리,가슴,팔,다리등을 가리키는 행동을 동네 선후배들과 열심히도 배웠다.
저녁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4H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농사일과 마을가꾸기 사업, 새마을운동에 관련된 이야기로 토론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인해 표지석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4H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듯 하다.
위 4H표지석은 안양시 동안구의 동편마을 입구에서 촬영한 모습인데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표지석도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진듯 하다.
82년 쌀다수확선도 농가라는 표찰이 시골 대문옆에 부착되어 있듯이
4H운동과 새마을운동등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쌀 자급을 위해
각 시군마다 쌀다수확상을 선발하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쌀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다가 신품종 통일벼를 개량하면서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쌀 수확량을 높여 1977년에는 우리나라 쌀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한다.
1981년 한국4-H중앙연합회가 창립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하면서 조직관리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었으며,
‘4-H구락부’ 명칭도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뀌었습니다. 1983년에는 한국4-H후원회 사업 일부 도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관되어 4-H운동은 새마을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고 100만 회원이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87년에는 ‘한국4-H운동40년사’를 발간하여 그간의 역사를 정리 하였고, 88년에는 ‘4-H회’라는 이름을 되찾는 등 4-H운동이 전반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김정진 시인-전 안양경찰서 정보과 정보관 글중에서) 

 

동편마을의 2014년 무렵 사진들

[20210903]안양 근명중학교는 1962년 안양보육원에서 개교했다

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1.09.02/ #안양 #기록 #역사 #근명학교 #안양보육원/ 안양유원지 안양보육원에서 1962년 개교할 당시의 근명학교. 근명중학교는 1962년 3월 14일 재단법인 '근명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후 1962년 3월 14일 초대 이사장 사태현 선생 취임과 1962년 3월 17일 근명중학교 설립인가(각 학년 2학급)에 이어 1963년 03월 10일 초대 교장으로 이종범 선생이 취임한다.
학교 연혁 등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근명학교는 개교 당시 학교가 안양시 석수동 안양보육원내에 있었다.
이는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안양시건축사회와 공동으로 지난 2018년 10월 6일 140차 탐사로 안양예술공원 일대 근대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안양보육원 강당 건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또 근명중학교는 개교 당시 남녀가 입학했던 남녀공학으로 1회부터 9회 졸업생까지 남녀가 학교를 다녔는데 10회 부터 여학생만 입학하면서 1973년 3월 근명여자중학교로 개명됐다가 2009년 3월부터 다시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다시 근명중학교로 게명되었다.
근명중학교가 오랜기간 여자중학교로 인식되면서 초기 졸업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근명중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였지만 이들 기수는 그 어느 기수보다 우애가 두텁고 동창모임도 활동적으로 60대가 넘는 지금도 모임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근명학교는 1969년 들어 안양5동 현재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하는데 1971년 11월 11일 제 2대 설립자로 이영주 선생이 취임한다.
근명학교는 1972년 2월 12일 해암 박순천 이사장과 3대 교장으로 이말영 선생이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박순천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 1야당 여성 당수를 역임한 원로 정치인으로 박순천 여사가 은퇴 후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육영사업을 시작하자 학교 명성이 전국에 빨리 퍼진 것이다.
근명학교는 1973년 3월 1일 근명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한다. 당시는 은행은 물론 기업에서 회계를 담당하려며 주산, 부기, 타자 등이 필수적인 시절로 서울에서는 서울여상이, 경기도에 근명여상이 대표할 정도였다.
이후 업무환경이 컴퓨터 처리로 바뀌면서 상업고등학교는 학교이름을 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바꾸게 되면서 근명여자정보고등학교로 개명했다가 남녀 공학이 되면서 2019년 근명고등학교로 다시 개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