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땅에 세워진 부곡 철도관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급격하게 세계 열강들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대립에 휘말리게 되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을 시작으로 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몰려왔다. 그러한 와중인 194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는 군포역과 수원역 사이에 새로이 간이 정거장을 설치하고 3월 1일부터 업무 취급을 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부곡역의 시작이다(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수원-부곡 8㎞, 부곡-군포 3.8㎞). 당시 부곡역은 수원역과는 달리 간이 정거장으로써 역원만이 배치되었다. 역에서는 승객 수송 이외에 수하물을 비롯해 각종 가정 화물도 취급했다.
부곡 간이역의 설치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 자료상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몇몇 분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7년 중일전쟁을 지나 1942년 태평양 전쟁기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전쟁은 불 보듯 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용산에 집중되어 있는 철도관련 시설 및 관계자들을 분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중 지금 이곳 부곡역 근처를 철도부지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도관사를 짓고 관계자들을 이주시킴에 따라 이들의 출퇴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정거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간이정거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곡 관사에는 일본인 고등관, 판임관 등이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한편 토지 수용과정에서는 원주민들이 토지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재산상의 많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부곡관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철도관련 산업은 엄청난 팽창이 이뤄졌다. 철도관련 종사원의 수는 급증하였고, 그에 따른 관사의 건립은 매우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최초의 부곡관사 건립 계획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의 재단법인 선교회(鮮交會)에서 1986년에 발행한 조선교통사朝鮮交通史에 따르면, 부곡 철도관사의 규모가 관사 1,000호, 독신기숙사 10동(1200명 수용), 교양기관 1동, 병원 1동, 회관 1동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관사 건립에 필요한 예산과 자재난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1943년에 100동에 200세대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부곡의 주택계획은 교통국의 중추인 용산, 경성지구의 배후기지로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대량의 숙사 및 부대시설 외에도, 굉장히 넓은 토지를 수용하여 철도 동부지역 일대를 농장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그 일부 초원지대에 젖소를 방목해서 장차 커다란 목장을 설치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농목계획은 서울의 용산지구에 거주하는 철도종사원 및 그 가족을 주요 대상으로 우선 부족한 야채와 우유 등을 배급할 예정으로써 주택건설계획과 병행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전문가를 촉탁으로 채용하여 밭의 간척을 지도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젖소를 구입해서 1944년 봄 제1기 숙사 완성시에는 겨우 젖 짜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목장의 경영은 경험 미숙으로 당분간은 시행착오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야채와 우유의 수확이 적어 당초의 지급계획대로 이행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수확된 것은 경성철도병원 입원환자의 식용으로 제공하기 위해 매일 트럭으로 배급되었다.
철도관사의 주택구조는 시기마다 다른 유형으로 건축되었다. 임시가건물 또는 전통 일본식 주택 등이 그대로 축조되다가 경부선, 경의선 등이 부설되면서 점차 3등~8등의 관사거 건립되었으며, 서로 다른 회사에 의해 부설됨에 따라 관사 형태도 통일되지 않았다. 이후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이 이뤄지고 철도관리가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통합 이관 되면서 점차 통일된 3등~8등의 등급별 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3년의 부곡 관사는 이전과는 다른 평면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과거의 연립형 관사와는 달리 전면(前面)에 일렬로 3개의 방이 연속되는 횡렬형 쯔즈끼마형으로 건축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후면 출입방식이 주류를 이뤘는데, 부곡 관사는 측면에 현관이 설치되어 있다. 부곡관사 평면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내부 구조를 보면 과거와 같이 근대적 요소를 그대로 이어받은 형태로써, 온돌이 도입된 절충형태와 실내 목욕실, 실내 화장실의 요소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관사의 부족과 예산 및 자재부족으로 인하여 등급별 집단관사 조성이 아니라 관사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7등을 규모의 소규모로 통일되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곡관사의 형태를 살펴보자. 부곡관사는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도록 설계되었다. 총 100동이 지어졌으며 200세대가 살았다. 관사마다 번호가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벽은 질은 떨어지지만 시멘트를 발랐으며 지붕에는 모두 기와를 올렸다. 관사 내부는 현관문을 들어서면 좌 또는 우측으로 작은 방―다다미방―안방(온돌) 등 방 3개가 있으며 작은 방과 안방에는 창문이 있고 다다미방은 여닫이문이 있어 바깥 출입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관 맞은 편 쪽으로 부엌이 있고, 부엌에서는 밖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다. 부엌 옆으로는 화장실도 있었다.
관사에는 몇 집 건너 우물이 있었다. 공동우물의 형태였다. 관사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빨래도 하고 물도 길어 먹곤 했다. 집 앞으로는 작은 도랑을 내어 하수가 빠져나가도록 했으며, 이 하수들은 지금 중앙로 남쪽 상가 바로 뒤편의 개울로 흘러들어가 왕송저수지의 개울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인도와 도로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부곡 관사는 의왕지역의 주택단지 가운데 최초의 근대적인 주택단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무계획적인 상가 및 주택건설로 매우 어수선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6·25 때 관사 3채 정도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관사에 내려와 살던 사람들은 대체로 객화차 사무소 직원, 철도 전기수선공, 선로보수 관계자, 기차역 근무자, 기관사 등이었다. 즉 관리직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현장관리자들이었다. 이들은 생활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먹고살기도 어렵고, 공부도 못시키던” 어려운 시절에 부업으로 돼지나 닭을 키웠다. 당시 각 관사마다 앞에는 돼지우리가 있었으며 일부는 다다미방 안에 닭을 키웠다. 이러한 부업은 생활 경제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관사 지역의 길들은 대단히 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관사 아이들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학교’가 필요했다. 그 무렵 이종하님(이상직 증조부/이상직님은 부곡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은 묘목관리인들이 기거하는 건물을 이용해서 사립학교를 만들고 직접 아이들을 가리켰다. 부곡지역 최초의 학교형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2년 정도 운영하다가 철도공무원과 주민들의 요구로 현재의 자리에 부곡학교를 공식적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현 부곡학교 자리는 원래 조선총독부가 철도청 독신자 관사 자리로 기초해 두었던 곳으로 14평짜리 교실 5개를 지었다. 처음에는 반월초등학교 분교로 인가되었다가 학생수가 증가하면서 부곡국민학교로 승격되었고, 현재 의왕부곡초등학교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財團法人 鮮交會, 朝鮮交通史, 1986.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계획은 최초로 전쟁 후 대도시 교외의 전원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신선도를 좋게 하는 것은 환자에게도 기쁨을 주고 감사의 생각으로 먹게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고문헌>
의왕문화원ㆍ의왕시사편찬위원회ㆍ의왕시, 의왕시사(1~7), 2007
의왕문화원,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유적 이야기, 2009
조명래, 김수현, 강현수 외 지음, 저성장 시대의 도시정책, 한울아카데미, 2011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지역 정체성을 조명하다
내고장 역사 바로 알기 글에서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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