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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2. [임부성]안양5동 찬우물에 얽힌 전설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이야기보따리/전설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살고 있는 절집 사람들은 불편할지 모르지만 초창의 망해암은 기암괴석 사이사이에 보일 듯 말듯 건물들이 숨어들어가 자연과 약수가 어우러져 소박하고 멋진 풍경을 만들었을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지금처럼 불사가 된다면 건물에 눌려 자연풍경은 소멸하고 운치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길도 없는 산 정상에 이렇게 큰 사찰을 지어야 하는지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2006-09-24 19:16:10

[임부성]안양5동 찬우물에 얽힌 전설

이야기보따리/전설

[11/15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찬우물"에 얽힌 새로운 전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안양5동=냉천동, 찰冷자, 샘泉자를 써서 냉천동이 된 것은 왜정때 이야깁니다.

당시, 대륙침탈을 위한 교두보로써의 이땅을 강점한 쪽바리들이, 수리산의 정기(병복안 끄트머리, 채석장)를 죄다 퍼다가 부산까지 쫘~ 악, 수리산의 정기를 깔아놓는 한편, 순 한국말로 된 동네 이름을 죄다 한자어로 바꿉니다.

ex)양지쪽 해가 잘드는 마을, 양짓말을 陽地동(안양3동)으로, 토성 안쪽에 있다하여 담안인데,이를 장(담牆)내(內)동(안양4동)으로, ※가끔 이를 담장장자가 아니라, 장미薔자로 쓰리는 어르신 계신데, 죄송합니다만, 담안에는 밤나무와 포도나무만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 갈까요?

찬우물이 있다하여, 찰冷자, 샘泉자 냉천동(안양5동), 주(살住)거지와 가깝다하여 주제비(안양6동)인데, 주(살住) 이을 (접接) 주접동으로,..산모양이 날아갈듯하다 하여 날뫼였는데, 날飛 뫼山자를 써서 비산동으로...기타 동네의 옛지명은 다음 기회를 봅니다.

오늘, 저는 담안(안양4동)에서 태어나, 66년째 안양에 살고 계시는 최인영선생을 만나, 문제의 찬우물에 얽힌 기막힌 전설 한 토막을 듣고 담담한 심경으로 이글을 올립니다.

최인영선생은 현재 동안구 삼호APT에 거주하고 계시며 아주 정정하십니다. 진실확인을 위하여 최인영선생의 손전화를 공개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대담자: 최인영선생(016-292-0474)
○참석자: 보안상 비공개, 장소: 어느 음식점

○내 용:

제목; 안양5동 찬우물의 전설(유래)

이 이야기는 최인영선생께서 조부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늘 그렇지만, "옛날"로 시작한다)

옛날, 찬우물 아래에 오막사리집 한 채가 있었고, 거기에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지금말로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것다! 먹을 거, 입을 거, 덮을 것은 변변치 않았으나, 어느날 이 가난한 집에 아기가 태어난다.

너무 생활이 궁핍한 산모, 출산 후 삼 일째 되는 날인가, 비틀거리며 찬우물을 찾았것다! 그것도, 함박눈이 엄청 쏟아져 내리는 날에--

왜?
물이라도 먹어야 사니까-- 얼마나 힘들고 사경을 헤맨 3일이었던가? 헛깨비가 보였을 터.. 충분히 가슴으로 느껴지는 장면!

내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받아먹으면서도 수리산에 나무하러 간 낭군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믿으면서--진도 난갑니다.

너댓번 함박눈을 입속에 넣었을 즈음, 이때,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닭 한 마리가 갑자기 새댁(우리의 주인공/산모)의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아! 이건 웬 떡이란 말인가! (미확인 증언에 의하면, 새댁 떡 먹어본지 수삼년은 되었을 터..ㅊㅊ)

산모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퍼득대는 닭을 꽉 잡기에는 너무도 쇠진한 기력..아! 이를 어쩔 거나! 순간! 닭은 야속하게 수리산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것다! 이를 어쩌나1

주저 앉은 산모, 하염없이 눈물은 흘러내리고.. 북받치는 설움을 어이 할거나! 여기서,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걸맞는 우리 회원님의 詩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 病身춤 (나무사이)

휘모리 자진모리 혼백푸는 치맛자락
매듭져 얽힌 한(恨) 위무(慰撫)못할 넋이기에

삭신에 소금을 치고 춤 한번 출것이어
타다가 더 못타면 사위어질 목숨인데
풍상(風箱)은 피의 앙금

소매끝에 나부끼고 오열은 곱사등에 숨어 넋을 안아 달랜다
차라리 피를 토해 버짐핀 세상에 유년이 잠든 머릿맡
등불로 걸어놓고 이빠진 막걸리 사발로 속 뎁히는 여인아!

이 허무!
이 허망!
아! 이 절망!

산모는 눈밭에 털썩 주저 앉았다! 주저앚은 산모,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북받치는 설움을 어이 할거나! 북풍한설에 마냥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아! 이건, 과거의 미스테리요, 세기의 수수께끼로 남을 일이 일어났것다!

무신 일! 알아맞춰 보십시오! 정답자에게는 히말라야 무료등반권을 거, 담안에 있는, "히말라야를 정복하라" 카페(주인장 관우님에게 허락도 없이)에서 제공한다고 하면, 우리 안양 선배님, 손전화기 내동댕이 치지는 않으실까?

정답: 찬우물; 왜놈들은 여름에만 이 우물에 기웃거렸나 보다. 그러니까 찰冷자, 샘泉자를 써서 냉천동이라고 억지로 바꾼 것을 보면...

허긴, 게다짝 녀석들, 안양유원지 입구에 임시 정거장(기차)까지 만들어놓고, 여름내내 여름을 즐겼으까.. 겨울엔 안 왔지, 당연히! 왜놈들이 겨울에 와서 이 우물물을 단 한 쪽박이라도 먹었다면, 일은 심각해졌을 터.. 따뜻할 溫, 샘 泉 온천동이라고 해야 옳았지 않았을까?

눈 쌓인 겨울날, 한 번 오셔서 이 우물물 마셔보세요! 정말...정말...따스합니다!

★정답: 그러니까...찬우물은 차다(KICK)에서 나온 우물이 맞다! 닭이 아주 애석하게도 차고(kick)나갔으니까....오! 통재라! 오! 애재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정말 열(?) 받는 백성이 多할 줄 할고, 우리의 현명하신 선조님들은 그 뒷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 하신다!

아싸! 산모 팔에서 닭이 차고(kick-오늘 영어 무지 많이 쓰네..) 나간 그 곳에는 이런..이런..황금빗 금붙이들이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뒷 이야기는 수리산 매니아님들의 몫으로 남김이 이 글을 아주 정확히 옮기는 이의 입장이라고 본다..^^*

수리산 이야기는 끝도 없을 듯 합니다. @{닭이 차고 나간 우물이란 뜻이다!--찬우물}=

이상, 다시 짚어보는 수리산 이야기(1) 끝

2003-11-15 03: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