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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군포의왕과천의 선사(先史)·고대(古代)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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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와 원과천


 

과사모 추천 0 조회 24 06.02.26 16: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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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선사(先史)·고대(古代)와 원과천(元果川)

 

현 과천시 지역에 관련된 선사나 고대의 유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과천 신도시를 개발하는 데에 있어 고고학적 조사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택지를 개발하거나 댐 등을 건설하는 데 반드시 그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사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후의 처리에 대하여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천의 경우는 이러한 조사 및 보고서의 작성이 없이 신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신도시지역 내의 선사나 고대의 유적들이 개발과정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산본이나 평촌에서 신도시를 개발할 때 나온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 지역에 적지 않은 문화 유적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 과천 지역에서도 선사나 고대의 문화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주】1) 다만, 원과천이었던 현 서초구 원지동과 양재동 일대 및 안양시 평촌 지역, 그리고 군포시 산본 지역의 경우에 비추어 과천 지역의 선사와 고대 유적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원과천으로 분류된 지역들은 삼국시대의 율목(栗木)·율진군(栗津郡)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고려시대의 과주(果州)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과천현(果川縣)의 관할에 속하고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도 과천군 상서·하서면(안양시 평촌)·남면(군포시)·동면(서울시 양재동·우면동·신원동)이 있었던 이 곳들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에서 분리되어 각각 시흥군 하서면(평촌)과 남면(산본), 그리고 신동면(원지동·양재동·우면동)으로 관할되게 된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에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우리 역사로 볼 때 그 시기는 매우 적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해도 큰 지나침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불행히도 현 과천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선사 및 고대 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은 위의 지역 사이에 위치했던 현재의 과천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제1절 평촌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2절 산본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3절 기타 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

 

▣ 제1절 평촌지역(坪村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주】4)

○ 1. 개관
○ 2. 평촌마을 지석묘군
○ 3. 신촌마을 지석묘군
○ 4. 기타 지석묘
○ 5. 귀인마을 백제 주거지

 

▣ 1. 개관

현재 안양시에 편입되어 있는 평촌 신도시 개발지구는 1914년 과천이 시흥군에 폐합되기 이전까지는 삼국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과천의 일부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의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과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의 협소한 지형인데 비해 비교적 넓은 개활지로 선사시대인들이 주거지로 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평촌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부터 5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주】2) 두 차례의 조사는 평촌지구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지표의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어 실시된 것으로, 주택단지 조성에 앞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그나마 원과천 지역의 선사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모두 13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은 평촌산(坪村山) 동북쪽 논에서 발견된 6기, 신촌(新村)마을 입구의 구릉 정상부의 5기, 평촌산 남서쪽 기슭의 1기, 귀인(貴仁)마을 안쪽 구릉의 1기이다. 그리고 귀인마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住居址) 유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신도시의 택지개발을 위해 실시된 조사였으므로 조사 후에 유적들을 현장에 복원하여 보호하지 못하고, 지석묘 중 일부는 경기도에서 건립중인 도립박물관의 전시용 유물로 옮겨 가고, 귀인마을 지석묘는 명지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신촌마을 지석묘는 평촌신도시내의 중앙공원에 복원되도록 결정되어 지석묘와 그 유구(遺構)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산본 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山本里)로 불리웠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서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그 시기는 매우 짧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다. 불행히도 현 과천 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으나 원과천 지역에 선사 및 고대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현재의 과천 지역에도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2. 평촌(坪村)마을 지석묘군

이곳의 지석묘는 인덕원(仁德院) 4거리에서 군포(軍浦) 방향으로 약 1㎞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의왕시(儀旺市) 포일(浦一) 주공아파트단지 서쪽 약 200m 지점에 6개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해발 약 80m의 구릉지가 있다.
【지도】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1) 제1호 지석묘

  화강암인 덮개돌(蓋石)의 크기는 150×85×30∼40㎝이고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3개의 성혈(性穴)이 있으며, 사방에는 매끈하게 다듬어 치석(治石)을 한 흔적이 있고, 남동쪽 모서리는 정(釘)으로 깨뜨린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의 유구(遺構)는 할석(割石)들이 결실되는 등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형을 찾아 복원한 결과 유구의 길이는 약 230㎝이며, 폭은 40∼50㎝의 규모로 성인(成人)을 신전장(伸展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하부에 토광(土壙)의 흔적은 없었다.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북쪽 2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그 크기는 220×150×30∼40㎝의 규모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2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의 유구는 석관(石棺)으로 55∼80㎝의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판석(板石) 6매(枚)를 깔아 놓았다.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생토(生土) 위에 판석으로 된 석관을 구축한 후 덮개돌을 덮은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평촌마을 제2호 지석묘 하부구조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북쪽 약 2.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6개의 지석묘 중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덮개돌 위에 170×110×25∼40㎝의 석괴가 얹혀 있었는데, 이 석괴는 제5호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 지석묘의 덮개돌은 440×210×40∼50㎝의 대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하나의 성혈이 있었으며, 하부 유구로 3개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주석곽(主石槨)으로 보이는 제1호 석곽은 덮개돌을 받치는 4개의 지석(支石) 사이에 있었는데 할석을 연결시켜 벽석을 만들고 내부를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크기는 250×60㎝ 정도로 성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곽의 남쪽에 있는 제2호 석곽은 크기가 135×55㎝ 정도로 판석을 장축 방향으로 양쪽 벽석에 걸쳤으며, 양쪽 끝은 판석 2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석곽은 크기로 보아 아동용이었거나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특수한 매장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첫번째 사례이다. 덮개돌의 동북쪽에 있는 제3호 석곽은 크기가 140×45㎝이며, 할석이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제2호 석곽과 같이 세골장용이었거나 아동용 석곽으로 보이며,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간 할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과 민무늬토기[無紋土器] 파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사진】평촌마을 제3호 지석묘 하부구조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370×290×40∼50㎝ 규모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매장터가 발견되었다.
  제1호 유구는 덮개돌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100×40×50㎝의 규모로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로 보아 세골장을 했던 유구로 추정된다. 제2호 유구는 제1호 유구의 동쪽에 있는데, 토광을 판 후 그 위에 할석을 얹은 모습으로 토광의 크기는 길이가 120×50∼70㎝, 폭이 40∼50㎝의 규모이다. 제3호 유구는 제2호 유구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모양이나 덮개돌에 눌려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제4호 유구도 토광의 규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제4호 지석묘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유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서 가족들이 사망한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한 세골장식 가족묘로 추정된다.

  5) 제5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75×50×15∼20㎝ 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4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을 들어낸 후 할석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덮개돌도 그 규모로 보아 유구 위의 덮개돌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제3호 지석묘 덮개돌에 올라가 있던 석괴가 여기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6) 제6호 지석묘

  제1호부터 5호까지의 지석묘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00m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하여 송유관 등 시설물이 있어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7) 출토 유물

  평촌마을 지석묘군에서는 몇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형토제품(原形土製品)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직경 4.4∼5㎝, 두께 1.4∼1.5㎝의 크기로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나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민무늬토기 조각들은 제3호와 4호 지석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이 곳에 있는 지석묘의 연대 추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간돌화살촉도 제3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6㎝, 폭 1.2㎝의 크기이다. 날의 한쪽은 떨어져 나갔으며, 가운데가 도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제6호 지석묘의 덮개돌 하단에서 발견된 숫돌은 길이 12.1㎝, 폭 7.2∼4.1㎝ 크기로 땅에 박아 놓고 사용하던 숫돌로 추정된다. 돌도끼는 제6호 지석묘에서 2개가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길이가 11.1㎝, 폭 5.5∼8.5㎝, 두께 0.6∼1.4㎝의 크기이며 몸체의 중앙부에 자루를 고정시키는 홈이 있다. 같이 발견된 돌도끼 조각은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 3. 신촌(新村)마을 지석묘군

  신촌마을은 안양남국민학교에서 평촌 신도시 건설지구 쪽으로 약 500m 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발굴·조사 후 평촌단지내에 들어설 중앙공원에 이전·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모두 4개의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도】신촌마을 지석묘군

  1) 제1호 지석묘

  신촌마을 지석묘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340×250×30∼40㎝ 정도이며, 성혈이 하나 발견되었다. 지석묘가 위치한 구릉은 지표밑 10∼15㎝ 아래에 부식 암반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에 하부 구조가 시설되어 있다. 덮개돌 밑의 주 유구 외에도 덮개돌 주위에서 유구가 2개 더 발견되었는데, 서쪽의 석관유구는 형태가 완전하였으나, 석관 남쪽의 유구는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석관의 규모는 80×60㎝에 깊이가 30㎝정도로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덮개돌 아래의 유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나, 덮개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의 바닥조각과 간돌화살촉, 숫돌이 발견되었다.
 【사진】신촌마을 지석묘 유적 개석 노출 상태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서남쪽 약 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174×110×30∼40㎝로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5°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할석을 이용해 석곽(石槨)을 만들었던 것 같으나 훼손되었다.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남동쪽 약 3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언덕 정상부에 덮개돌이 거의 노출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185×155×20∼30㎝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위에 3개의 성혈이 있었으며, 사방에는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에는 90×30㎝정도 크기의 반월형(半月形) 판석 2매가 놓여 있는데, 이외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매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약 6m쯤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90×25㎝이고 장축은 동-서에서 북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산의 경사에 의해 덮개돌이 미끌어지면서 하부구조는 훼손된 듯 하며 30㎝ 정도 크기의 할석 2개만이 남아 있었다.

  5) 출토 유물

  간돌화살촉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약 7.7㎝로 날과 날개 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숫돌은 역시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5.7㎝, 폭 3㎝, 두께 1.5㎝의 규모이며 사용으로 인한 마모흔적이 뚜렷하다. 민무늬토기의 바닥 조각은 민무늬토기 제작양식상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닥에서 그릇의 배쪽에 연결되는 부분이다.

 

  ▣ 4. 기타 지석묘

  평촌마을 및 신촌마을의 지석묘균 외에 평촌지구 발굴조사에서는 2기의 지석묘가 더 발굴되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인(貴仁)마을 지석묘

  평촌동 365-3번지 뒷산의 정상부에 있는데 주민들에 의해 ‘신선바위’라고 불리웠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75×110×20∼30㎝ 규모이고 7개의 성혈이 있었다. 지석묘는 산 정상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덮개돌 밑에서 아무런 시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석묘는 현재 명지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갈산(葛山)마을 지석묘

  경수산업도로에서 군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안(大安)여중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여 m쯤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지석묘가 있다. 이 곳은 신도시 중앙공원의 끝자락 일부이기도 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05×20∼25㎝로 장축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에서 유구 등 하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 5. 귀인(貴仁)마을 백제 주거지

  평촌 신도시 개발을 위한 명지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지석묘들과 함께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주】3) 이 주거지는 귀인마을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쯤 떨어진 산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표조사시 타제(打製)석기가 흩어진 채 여러 점 발견된 곳이었으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조사과정에서 백제주거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백제시대 주거지는 온돌구조를 하고 있는데, 온돌은 할석들이 4줄의 석렬(石列)을 형성하고 있다. 석렬 사이의 골에는 숯가루가 깔려 있고 돌에는 불을 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솥을 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북쪽으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백제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토기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시 집을 세웠던 기둥자리와 함께 저장고(貯藏庫)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귀인마을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지표면으로부터 30∼50㎝ 정도 깊이의 움을 판 후 온돌시설·부엌·저장고 등을 갖춘 것이었다. 바깥 기둥내의 집은 지름 4.5m 정도의 원형이며, 면적은 25.25평방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3점으로 초기 백제시대의 토기로 보이는 승석문토기의 파편 1점과 곁면을 마연한 흑색토기 파편 1점, 그리고 돌도끼 1점이다.
 【사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지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평면도

 

  ▣ 제2절 산본지역(山本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

  산본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써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 1. 산본지구 지석묘
     ○ 2. 산본지구 삼국시대 고분군


  ▣ 1) 골안 지석묘군

  골안은 군포의 산본 주공아파트 1단지 우측으로 당성사(堂成寺)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의 구간이다. 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논이 보이는데, 논의 중간 쯤 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골안[內谷]이란 말에서처럼 수리산에서 뻗어 내린 2개의 작은 능선 사이에 있다. 현재에는 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리산의 밑부분이 파괴되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줄기가 없어졌다. 또한 산본 신도시 개발로 인해 그 지역에 10m 쯤 땅을 돋우어 우성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사진】골안 지석묘군 근경

  (1) 1호 지석묘
  해발 45m의 계단식 논에 위치하는데, 덮개돌은 장축이 남-북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5㎝, 너비 140㎝로 약간 긴 타원형이고 두께는 50㎝ 내외이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 점토층이었으며, 덮개돌 하부의 중앙과 남쪽 부분에서 할석들이 노출되었다. 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자연적인 유실로 유구가 상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검출된 유물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4m쯤 떨어진 논두렁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길이 180㎝, 너비 85㎝, 두께 30∼50㎝의 규모로 부정형이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석질은 화강암이고 둘레를 치석하였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의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교란층이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 2) 광정(光亭)마을 지석묘군

  광정마을 지석묘군은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능선의 하단부에 있는 계곡의 삼각지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 2동 345번지의 밭에 위치한다. 유적 뒤편으로 산본중학교가 있으며, 옆쪽으로는 옐림복지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방향 약 70m 사이에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기가 조사되었다.

  (1) 1호 지석묘
  유적의 가장 서편에 위치하는데, 광정마을 지석묘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265㎝, 너비 140㎝, 두께 50∼55㎝의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약 40°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은 지반의 경사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온 듯 한데, 덮개돌의 동북쪽에서 하부 구조로 보이는 할석이 노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훼손 상실되고, ‘U’자 모양의 석곽 형태만 확인되었다. 복원된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폭 80㎝ 내외로 추정된다.
 【사진】제1호 지석묘 석관 노출상태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동북으로 약 40m 떨어져 위치한다. 길이 100∼200㎝, 폭 50∼100㎝ 내외의 석괴 5개가 모여 있는데, 중앙의 돌은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3호 지석묘와 합쳐 모두 7개의 석괴가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5개의 석괴 중 남쪽에 있는 장축방향 동-서인 장방형의 석괴가 주석괴로 추정된다. 이 주 석괴의 규모는 길이 196㎝, 폭 93㎝, 두께 37㎝였다. 5개의 석괴를 모두 옮긴 결과 2개의 석곽이 노출되었다. 이 지석묘는 별개의 2개 지석묘 유구가 있었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석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약 3m 지점에 2개의 석괴가 마주 고인 듯이 서 있는데, 큰 것은 길이 210㎝, 폭 151㎝의 크기이며, 작은 것은 148㎝, 90㎝의 규모이다.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6°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교란되었고, 덮개돌의 동편 바닥에 100×70㎝ 규모의 판상할석이 노출되었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5m 쯤 떨어져 위치한다. 덮개돌은 4쪽으로 쪼개져 있는데, 규모는 길이 154㎝, 폭 100㎝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가량 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5) 5호 지석묘
  4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19m 떨어져 있다. 광정의 지석묘군 중 가장 평평한 덮개돌로 이루어졌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66㎝, 폭 145㎝의 크기로 타원형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하부구조는 발견되지 않았고, 덮개돌 밑에는 홍수의 영향으로 보이는 토사층이 있으며,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지석묘도 홍수 등의 영향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된다.

 

  ▣ 3) 문화촌(文化村) 지석묘군

  문화촌 지석묘군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에서 다시 남으로 뻗은 중간 지맥의 해발 55m 지점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동 산1∼2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전주 이씨 묘역이 서쪽에 위치하며, 지표면은 남쪽으로 경사진 사면을 이루고 있다. 주위에 지석묘의 덮개돌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럿 분포하는데, 이 중에서 지석의 흔적이 뚜렷한 4기가 되었다.

  (1) 1호 지석묘
  구릉 사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80㎝, 두께 20㎝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고, 타원형이다. 둘레에는 치석이 되었던 흔적이 완연하였으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m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폭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사진】문화촌 제2호 지석묘 개석 노출상태

  (3) 3·4호 지석묘
  2호에서 북쪽으로 5∼10m 떨어져 위치한다. 3호는 크기 120×80㎝ 규모의 돌 위에 210×150㎝ 크기의 석괴가 겹쳐 있는 모습이고, 4호는 210×130㎝의 크기이다. 석질은 모두 편마암이며, 치석에 의해 깨어진 모습이 확연히 구별되었다. 3호 지석묘의 하단에서 지석으로 보이는 판석이 발견되었으나 하부 구조는 교란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 2. 산본지구(山本地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군(古墳群)

  산본 지역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고분군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기 신라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된 산본 지역의 고분은 모두 9기였으며, 그 구조는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혼재해 있었고, 당시에 사용된 토기 등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의 위치는 군포시 산본동 산 1∼2번지이며, 안양과 군포의 시계를 지나는 34번 국도의 우측에 있는 해발 60∼90m의 구릉지대의 동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밑으로는 전경부대가 있다. 고분군의 앞면에는 산본천과 안양천이 흐르며 그 주위에 분지형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분 조성 당시에는 이 곳이 매장된 이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전경

  1) 제1호 고분

  조사지점의 구릉 정상부에 노출되었는데,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구조이며 분구(墳丘)는 유실되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석곽 북쪽 분구 기저부에 반원형의 호석(護石)시설이 남아 있는데 남쪽의 호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길이 80∼90㎝의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장축은 남-북향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 있다. 석곽의 바닥에는 길이 80㎝, 너비 60㎝, 두께 15㎝의 판석 2장을 깐 시상대(屍床臺)가 설치되었다. 유물로는 북벽과 시상대 사이에 놓인 판석 위에서 인화문유개합(印花文有蓋盒)과 점열타인문완(點列打印文碗) 뿐만 아니라 청동제의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출토유물

  2) 제2호 고분

  1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13m정도 떨어진 구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는 거의 유실되어 지표 하 15∼20㎝에서 호석과 석실 4벽의 상단부가 발견되었다. 석실은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는데, 현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연도는 왼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횡혈식석실이다. 호석은 길이 50∼60㎝ 정도의 비교적 면이 고른 돌을 이용하여 서로 겹치게 쌓았다. 이로써 보면 분구의 밑면이 직경 6.4m인 원형분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토기병(土器甁)이 동쪽 시상대의 북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입둘레는 6.7㎝이고 둘레는 8.5㎝이며 밑의 둘레는 8.5㎝, 높이 15.5㎝의 작은 병이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2호 고분 전경

  3) 제3호 고분

  구릉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 5∼10㎝ 아래에서 석곽의 4벽 상단부가 나타나 있으며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으로서 석곽의 평면은 남북 방면으로 긴 축을 둔 장방형이다. 길이 220㎝, 너비 87㎝이고 남아있는 벽면인 북벽의 높이는 80㎝이다. 석곽은 80∼90㎝의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들을 쌓아 구축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인화문병(土器印花文甁)이 출토되었는데, 시상대에 접하여 석곽 북벽과 서벽의 모서리 부분에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크기는 입둘레 10.2㎝, 둘레 17㎝, 밑바닥의 둘레는 10.8㎝이고 높이는 18㎝로 2호 고분의 것보다 약간 크다.

  4) 제4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동편으로 10m 떨어진 동쪽의 경사면에 있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인데, 봉토는 유실되고 석곽의 상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석곽의 경우 지표에서 100㎝ 정도의 장방형 토광을 조성하고 그 안을 막돌과 포갠돌 등으로 쌓았다. 석곽은 폭이 82∼92㎝, 길이 220㎝ 정도, 높이 88㎝의 대형이고 잔존 형태도 양호하며, 주축방향은 남-북으로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지도】산본동 삼국시대 고분군 지형도

  5) 제5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8m정도 떨어진 구릉의 비탈에 있다.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석곽의 남쪽 상단부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곽으로 장방형의 토광 안에 만들어졌다. 남쪽 부분은 파괴되어 소실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로는 서북의 시상대 위에서 토기단지 1점과 왼쪽 어깨부분에서 청동제 허리띠 장식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토기단지는 입구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상했을 뿐 거의 완제품에 가깝다. 검은 회색을 띠고 있고 형태와 바탕흙의 성격으로 보아 백제 계통의 것으로 여겨진다. 입둘레 11.4㎝, 둘레 17.4㎝, 밑둘레 11.8㎝, 높이 16㎝이다.

  6) 제6호 고분

  구릉 남쪽 비탈의 제2호 석실분에서 13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분구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된 상태이다. 석곽 바닥의 전면에는 포갠돌을 한 겹으로 깔아 시상대를 설치하고 있으며, 남쪽 시상대의 경우는 1/3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시상대에서 깨진 점열문토기와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석곽의 평면 구조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약 15도 편제되어 있다. 관뚜껑으로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무뚜껑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60㎝, 폭 110㎝, 높이 106㎝이다.

  7) 제7호 고분

  구릉 사면의 남단에 위치하며, 단애에 걸쳐 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파괴되어 남벽과 서벽을 상실한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150㎝ 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벽을 축조하였다. 북벽과 동벽은 각각 크기 60×25㎝의 돌을 가로로 눕혀서 7∼8단의 높이로 축조하였다. 비교적 면이 고른 석재를 이용하여 벽면이 정연한 편이다. 석곽의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북벽으로부터 43㎝ 떨어져 소형 판석이 있어 시상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제8호 고분

  발굴지의 서편 구릉에 위치하며,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상단 일부가 노출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60㎝ 정도로 낮은 토광을 파고 축조되었다. 4벽은 모두 50∼30㎝ 정도의 큰돌을 포개 눕히고 그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형태로 4∼5단을 구축하였다. 석곽의 바닥에는 남벽 쪽으로 20×15㎝의 판석이 놓여 있을 뿐 시상대는 별도로 축조되지 않았다. 생토를 깍아 만든 바닥에 고운 흙을 깔았으며, 석판은 매장자의 신발 등 유물을 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너비 73㎝, 길이 212㎝, 높이 64㎝이다.

  산본동의 고분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을 이루고 있는 해발 65m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릉지대의 고분군은 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군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나 중부지역에서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찾아질 뿐이다. 고분의 축조형태는 수혈식석곽분(8기)과 횡혈식석실분(1기)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수혈식고분은 지표에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토광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고, 석곽 바닥에 시상대를 조영한 것이다. 그리고 덮개는 나무덮개 형식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횡혈식석실분은 수혈식과 같이 토광을 파고 남벽에 연도를 마련한 평면방식에 가까운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로 2개의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3점의 토기 등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말경에서 신라통일기에 이르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제3절 기타 지역(地域)에서 조사된 지석묘(支石墓)

     ○ 1. 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 2. 원지동 지석묘군

  ▣ 1. 서초구(瑞草區) 양재동(良才洞) 지석묘(支石墓)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양재동·우면동 일대는 원과천의 동면 지역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해 있었다. 이 곳에서 1958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이를 당시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정리해 보기로 한다.【주】5)
 【지도】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위치도

  1) 양재동 지석묘

  양재천 남방 약 100m 지점의 넓은 공터에서 매몰된 채 6기가 발견되었는데, 북방식 지석묘로 추정되었다. 지석묘가 조사된 곳은 현재의 양재동에 속한 거여(巨餘)마을로 지금의 양재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 마을은 ‘게리’라고도 불리웠는데, 조사 당시 이 동네에서는 지석묘를 ‘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고인바위의 준말이며, 동네에서는 년 1회 도장제(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고 전한다.

  2) 우면동 지석묘

  양재동 지석묘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남서쪽 산록에 위치하였는데,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조사 보고되었다. 조사 당시 그 일대에서 ‘고름장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지석 바로 위에 병풍같은 바위가 둘러 쳐져 있었다고 한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00㎝, 폭 300㎝, 두께 50㎝이며, 지상으로 약 70㎝ 높이의 두 개의 지석 위에 놓여 있었다. 지석 밑에는 길이 170㎝, 넓이 130㎝의 석실이 있었음이 조사되었다.

 

  ▣ 2. 원지동(院趾洞) 지석묘군(支石墓群)【주】6)

  원지동의 지석묘군은 현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한강 하류의 양재천 남쪽 지류인 염곡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지동은 조선시대 말기의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하였다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신원동과 분리되어 바람굴·양수리·원터마을의 3개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서 4지구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위치는 한강 하류 양재천의 남쪽 지류인 염곡천을 끼고 청계산의 지봉인 옥녀봉(玉女峰)의 지맥을 따라 해발 40∼60m 능선의 끝부분인 밭 가운데 동북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지형상 광주평원의 서쪽 병풍산이 청계산 기슭에서 동북 방향으로 광주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비옥한 농경지대로 적합하다.
 【지도】원지동 지석묘 위치도

  1) A지구 지석묘군

  원지동의 원터마을 미륵당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지하통로를 건너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0m 쯤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 원지동 350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 3기의 지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1호 지석묘는 고속도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5°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길이 258㎝, 너비 154㎝, 두께 77㎝이다. 주위에서 무공반월형 석도 1점과 긁게 1점이 발견되었다.
  제2호 지석묘는 1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하고 받침돌은 없었으며,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148㎝, 너비 108㎝, 두께 84㎝로 사면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제3호 지석묘는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장축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4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245㎝, 너비 148㎝, 두께 88㎝ 로 비교적 큰 편이다.

  2) B지구 지석묘군

  A지구 지석묘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원지동 336∼7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에 7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7기 중 제6호 지석묘가 제일 규모가 크며, 나머지 중에 5기는 동서로 나열한 모습으로 6호 지석묘를 호위하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4호 지석묘는 제3호 지석묘에서 동북 방향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덮개돌의 북쪽 부분이 묻혀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길이 325㎝, 너비 146㎝ 두께 58㎝로 굉장히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놓여져 있고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30°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그 위에 길이 100㎝, 너비 43㎝의 판석이 있다.
  제5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의 동쪽 끝부분과 맞닿아 있는 상당히 큰 것으로 덮개돌의 밑이 들려 있기 때문에 하부 구조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조그마한 잡석들만 남아 있다. 제6호 지석묘는 제5호 지석묘와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크기도 크고 두껍다. 길이 440㎝, 너비 245㎝, 두께 50∼70㎝로 원지동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크다. 제4, 5호 지석묘와 같이 덮개돌이 들려 있으며 주변에서 석기 몇 점이 출토되었다.
  제7호 지석묘는 제6호 지석묘와 붙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북 방향으로 길이 220㎝, 너비 180㎝, 두께 60㎝로, 다른 것과 비교해 덮개돌 위에 잡석이 많이 쌓여 있어 정확한 외형을 파악할 수 없다.
  제8호 지석묘는 제7호 지석묘의 동쪽으로 2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246㎝, 너비 148㎝, 두께 43㎝로 괴석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5° 정도 기울어져 있으며 지형에 의해 남쪽으로 약 1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제9호 지석묘는 제8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에서 서쪽으로 약 15° 정도 기울어져 있다. 길이 328㎝, 너비 174㎝, 두께 6㎝로 동쪽이 서쪽보다 얇다. 제1호와 같이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제10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23㎝, 너비 134㎝, 두께 25㎝로 불규칙하고 마름모꼴이다. 그 밑에는 10∼30㎝ 정도의 할석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3) C지구 지석묘

  원터부락 미륵당으로부터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고속도로로부터 약 10m 떨어져 동서 450㎝, 남북 500㎝, 높이 150㎝의 괴석이 있는데, 바닥이 비교적 평탄하여 받침돌이 없는 무지석식 지석묘이다.

  4) D지구 지석묘

  경부고속도로의 구 서울톨게이트의 남쪽 1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동서 방향으로 1기가 매몰된 채 발견되었다. 덮개돌은 길이 230㎝, 너비 180㎝, 두께 50㎝로 대부분이 묻혀 있고 동쪽면만 드러나 있다.

  원지동 지석묘군의 특징은 제1, 9, 10호와 같이 외형이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기들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매우 원시적인 모습으로 타제수법에 의해 거칠게 다듬어졌으며, 석질도 석기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날부분이 모두 마멸되어 있었다. 또한 돌칼류는 수확도구로서 손잡이용 끈을 묶기 위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에 주로 사용된 장주형(長柱形)과 즐형(櫛形)의 구멍없는 반월형 석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청동제의 도끼를 모방한 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조사된 지석묘의 형태와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형태와 보아 원지동의 지석묘들은 초기 단계의 남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또한 B지구의 제4, 5, 6, 7, 8호의 지석묘군이 동서로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제6호 지석묘를 가운데에 두고 나머지의 지석묘가 이를 호위하듯이 붙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제6호 지석묘가 신분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묘였을 가능성이 있다.

 【집필자】 編輯部

[조성현]안양의 독립운동가(2020.05.29)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의 독립운동가

 

이 글은 안양문화원 해설사들의 자료 공유 공간인 다음카페 마애종사랑(dhttp://cafe.daum.net/maejongsarang)에 올려진글로 조성현 해설사가 안양시 사이버향토사박물관에 있는 자료를 재수정한 내용입니다.

 

  1. 원태우(元泰祐) (고종19(1882)∼1950) 독립운동가.

본관은 원주(原州). 원태성과 이호순 사이에서 2남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1동 642(현 농협중앙회 안양시지부 부근)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라 원태근; 김시근;.김태근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로 되어 있다.

그의 형이 원영우인 것으로 보아 「우(祐)」가 항열로 보여진다.

그는 본래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에 의기가 높고 바른 일에 앞장을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그가 23세 되던 해(1905)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광무8년(1904) 러일전쟁의 승리로 이끈 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 박탈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광무9년(1905) 10월에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를 비롯하여, 주한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쯔라등이 조약을 체결 할 모의를 하고, 그해 11월 9일에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히로부미를 황제 위문 특파대사라는 구실로 한국에 파견, 한일협상안을 정부에 제출 토록하고,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는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봉정(奉呈)하고,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의 반대가 심하였다.

16일에는 정동에 있는 손택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여덟 대신을 위협하여 헙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우리 정부의 전 각료를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 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 사이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는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시위하였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 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 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한편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히로부미는 즉시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병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반대 하였을 따름이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조약이 체결 되어 외교권이 탈취 당하였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동 조약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통곡과 격분속에서 한때 나마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한 채 통곡하는가 하며, 각급 학교는 문을 닫고 스승과 제자가 손을 맞잡고 개탄과 비분에 빠졌다.

3일 후에는 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 선생이 자신이 사장겸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 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480여 자(字)의 논설을 실어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 해서 풀어준 결과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2천만 한국민을 항쟁의 대열로 끌어 들이기에 족 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5일 후인 11월 22일에는 조약체결의 장본인이자 우리민족의 不共戴天之怨讐인 이토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의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 하고 이날 오전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 수원에서 안양까지 사냥을 하며 안양에 도착,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 행 열차를 탔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 한다는 소식을 접한 지사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그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이때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 사건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던 열차가 1시간이나 지체해 8시에 도착했다.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해서 였고, 일본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날부터 신문에 보도되었다.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에는 원태근이란 이름으로 안양시장「22통1호」라는 주소와 함께 보도했고, 도쿄에서 발행하는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는 「이토 히로부미 조난 전말」의 기사로 사건상황을 설명했으며, 일본 박물관 발행의《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보도했다.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것으로 명기된 이 그림은,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을 앞둔 궁중의 고뇌에 찬 어전회의 장면 등도 함께 담겨 있는데, 동 화보에 의하면 이토히로부미는 그해 11월 25일 낮 12시 30분부터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군사령부 정원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 입구에는 화려한 아취를 세우고 세계 각국의 만국기가 휘날렸으며 또 10개소의 음식 테이블을 설치하고 일본과 한국기생들을 동원, 내빈들을 접대하고 여흥으로 일본씨름 스모와 줄타기 등을 했다.

한편 원 지사는 사건 직후 사이토 일본 헌병대장이 수명의 헌병과 경찰들을 이끌고 현장에 내려와 철도 공부 다니노와 야마사키의 도움으로 원 지사를 포함한 4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그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 지사는 철도 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영등포 감옥에서 풀려난 원 지사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에 흉측 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더욱이 생계를 꾸려 나가기 여의치 못해 원 지사 형(영우)의 삼남인 계복(1910∼)씨가 원 지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쓸쓸히 타계해 안양시 만안구 안양 4동 709∼16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뤘는데, 그후 1982년 이곳에 화영아파트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원 지사의 유품으로는 원 지사가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고, 또 한 개와 맷돌 1개는 원 지사의 양자인 계복씨가 소장하고 있다. 의거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1990년 8월15일에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11월 22일에는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참고문헌]《기려수필》,《속음청사》,《대한계년사》,《독립운동사》,《안양문헌》, 시흥군지》,《경기인 물지》,《일로전쟁화보》,《대한매일신보》

 

 

   2. 한흥이(韓興履. 恒吉) (광무 1(1897)∼1979)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몽당(夢當). 본관은 청주(淸州). 용익(用翼)의 아들로 부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시절 안양으로 이전하여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에서 성장하였다.

아명은 정봉(丁鳳)인데 8살 때(1904) 민적법(民籍法)이 실행되자 조부가 「한 나라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으로 「흥이」로 이름을 지었다.

10살(1906)까지는 조부로부터 천자문·소학 등을 배웠고, 13살(1909)부터는 호계동 소재 낙영학교(樂英學校) 2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 해 폐교되자 수원군 반월면 4리(현 안산시 4동)소재 장화의숙(長華義塾)에 편입하여 맹자·수학·일어 등을 수학하고, 이어 1915년에 시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교 전신)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학비문제와 집안내의 반대의견에 부딪히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조부의 시국관인 일제가 운영하는 관립교육에 대한 반감의식과 정면으로 대립 되었던 것이다.

즉 조부의 뜻은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관립학교로서 일제가 주관하는 학교인데 어찌 한국인으로서 그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겠느냐? 는 지론이었으나 그는 신지식을 습득하여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의 불행을 막아보자는 어린 마음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부모가 아들에 대한 뜻을 표명하여 끝내는 조부를 설득시켜 입학을 허락받자 서울 만리동 소재 김달환 댁에 기숙하며 통학하였다.

입학 후 학생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특히 2학년 때(1919) 일어난 3·5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1919년 3월 3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초로 반일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11살 되던 해(1907)년 밭에서 김매고 있던 한국인 농부를 왜병이 구타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때였다.

그 후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한 것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경기고보 재학중에 기차 통학생의 임무로 독립선언서를 분배받아 시흥·안양·군포역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연 성을 역설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일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있은 후 3월 5일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항일독립운동이 경성역(현 서울역) 광장을 기점으로 계획되어 오전 9시경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고종의 인산(因山)을 마치고 귀성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일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다.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시위군중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남대문에 이르렀다.

이날 남대문에 모인 전체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둘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학생시위대들과 왜경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도 이때 경기고보 학생신분으로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게 구금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잘못했다」 한마디만 했으면 학생의 신분이므로 훈방으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부친은 영등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송된 두루마기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졸도 하였다가 그 후 병을 얻기 까지 하였다.

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 하자 요시찰인물이라는 낙인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이때 국권의 회복과 구국(救國)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보통학교 교원 양성소를 지원, 1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전과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 당국자로서는 불합격시키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후일의 책임문제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등포경찰서에 전화로 조회한 결과 당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학생들은 모두 복권되었으니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받고서야 입학을 허가하였다. 재학중에는 반장을 맡아 학과목 담임이 공무상 출장으로 수업이 결강되면 으레 대강(代講)을 하였다.

1923년 3월 수료식을 앞두고 전과 사실로 또 한 차례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급기야는 수료식을 1주일 동안 연기 하고 야간회의까지 거듭한 결과 졸업은 시키고 우등상을 주나 상장 문안(文案)에 「품행방정」이라는 말을 빼기로 하고, 학교 배치는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 3년 의무 복무로 한다는 등의 결정을 보았다.

그 후 서울 수창동에 소재한 경성보인학교(현 보인상고 전신)에 부임하여 졸업반 담임에 학생감·교무주임의 중책을 맡았다.

1927년 경성부에서는 학교 행정의 효율화와 모범교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학사 시찰단을 구성하였는데, 그는 사학(私學)의 대표격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여러 곳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낙후성과 현재의 우리 학교 교육이란 결국 일인양성정책의 일환이란 느낌이 들어 귀국하는 길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일본 시찰 중에 절감했던 또 한가지 사실은 법률 지식에 대한 부족이었다.

그래서 경성법정학교 야간부에 입학, 3개년의 과정을 이수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동년 4월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기사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신문사에서 알게 된 한 상사의 추천으로 경기도 포천의 연초판매소의 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 하였는데, 일본 식민통치의 「눈에 가시」 같은 요주의 인물이라 하여 일반인들로부터 철저히 격리 시키기 위하여 함남 영흥을 거쳐 삼수갑산, 강원도 양구 등 춥고 외진 벽촌에서만 근무케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에 정착, 그해 11월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안양시 안양동 603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하였다.

안양직물의 제품은 질 위주로 튼튼하고 건실하게 만들어져 「쇠가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이 제품에 외제상표를 붙여 판매 한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있었다.

당시 공장 내의 근로자들의 학력수준이 매우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장 내에 공민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이때 시흥군면보단장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94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효자상을 받았고 이 해에 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항길(恒吉)」 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장문을 닫고 5리 밖에 있는 호계동 본가로 가있다가 그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이듬 해 일자리를 찾던 중 부산 시내에 소재한 <국제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서울의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경 했던 길에 안양직물공장이 완파된 것을 목격했다.

공장은 전쟁이 나자 도보로 남하하는 인민군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략상 대형폭탄을 투하하여 완전 파괴시킨 것이다. 전쟁으로 공장이 완파되자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부천시 중구 심곡동 424)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 안양에서 기계 부품들을 뜯어와 닦고 손질하기 수 개월 만에 제품을 생산하였다.

회사명은 안양에서의 전직원이 다시 모였으므로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여 1953년 5월에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에는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를 육성해야 되고, 한 산업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를 양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학교 설립을 신청, 인가를 받아 공장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3년 후(1961)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문부가 각각 증설되었다.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이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1979)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후 이해 5월 8일,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8월15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에 있다.

 [참고문헌]

《몽당한한길선생유고집》,《독립운동사》,《현대사자료》, 《시흥군지>,<동아일보>,<경기신문>,<경기교육신보>,<중앙일보>,<안양신문>

 

  3. 하영홍(河永泓) (고종 16(1879)∼1915)

기독교인. 항일투사. 본관은 진주(晋州). 일명 주명(周明). 진찬(鎭瓚)의 아들.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연(演)의 15대손이며 조선 중기에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우청(遇淸)의 10대손이다.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안양시 석수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한 후, 삼막골 마을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도하였다.

이어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이 교회의 속장이 되어 광무 5년(1901) 8월 6일 스웨어러(미국인) 선교사와 존스 장로사(현 감리사와 비슷한 직 책)와 각회 교회 형제·자매 70여명이 봉헌예배를 올렸다.

그 후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활하던 중 25세가 되던 광무 8년(1904)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시흥읍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 시흥농민들이 봉기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견은 일본이 동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을사조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원활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사역키 위하여 동년 8월 청국 안동현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건설에 노동자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다.

이에 농민들은 과대한 역부의 모집과 시흥군수 박우량이 역부들의 노임을 한푼도 주지 않고 착복하는가 하면 역부 모집에 있어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자 시흥의 6개면 농민 수 천명(혹은 1만명)이 항쟁을 한 것이다.

그는 성우경(광명시 가학동 출신)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곧바로 순검에게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가 그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 3동 병목안(?)에 있었는데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하여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시흥직산안핵사주본》,《일한외교사료》,《수원지방교회자료집》,《향기》,《시흥군지》, 《한말시흥농민운동에 관한 연구》,<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신학월보>, <감리교회 연회록>, <안양시지>

 

  4. 이영래(李永來) (고종 10년 (1873)∼1949)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태순(泰純)의 장남으로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27일 광목 행상도중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백기화(白基和) 집에 들러 그 집에 모여 있던 이종교(李種敎)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 날 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옥에서 석방된 후에는 광명시 일직동 220번지에 이주해 살다가 1949년 2월 17일 상오 11시 사망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쟁골에 있었는데 군부대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자료집》, 《시흥군지》

 

   5. 이재현(李在賢) (1917. 2. 2 ∼1997. 2. 24)

경기도 시흥 동면 사람이다.

이명(異名)으로 이해평(李海平), 이재두(李在斗) 로 사용.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지에 나가 대일 항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공작대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공작대는 서안(西安)으로 이주 하였으며, 그는 김동수(金東洙), 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서성(山西省) 등지로 파견 되어 중국 호종남(胡宗南) 직속의 산서지구(山西地區) 유격대와 합류, 정보 수집, 적정탐색, 초모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 소동구(小東口)를 본거지로 하여 노안성(路安省) 및 하남성(河南省)의 초작( 炸)등지로 진출하여 과감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 됨에 따라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월환(羅月煥)은 지대장으로 임명 되었으며, 그는 이하유(李河有), 박기성(朴基成), 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5 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 하면서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정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광복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5지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 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 하던 중 광복을 맞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7년 2월 24일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며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가족으로 부인 김숙 여사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한국독립사(김승학), 무장독립운동비사, 일제침략하36년사,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6. 이재천(李在天) ((1913. 5. 10 ∼ ?)

경기 시흥 동면 사람이다.

호(號)는 우봉(牛峰). 상해 망명 독립지사 이용환(李龍煥)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상해에 있는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뜻을 계승할 것을 결심하고 1929년 2월에 화랑제도를 본 따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조직된 화랑사(花郞士)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의 연락업무, 임시정부 요인 등의 송영(送迎)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임정(臨政) 국무위원 조소앙 선생의 지도 아래 '화랑보(花郞報)' 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상해(上海) 교포들에게 배포 하였다.

1931년 백범 김구(白帆 金九)선생 지도하에, 상해 한국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하여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 하였으며(단원 약 200명), 월간지 '새싹'을 발행하여 상해는 물론 조선내(朝鮮內) 각지로 발송하고, 3·1절 기념일(紀念日)에는 '3·1 기념일(紀念日)을 경축(慶祝)함' 이란 격문 700∼800매를 인쇄하여 살포하고 조선내로도 발송하였다.

1932년 8년 29일 기념식을 상해 중국가(中國街) 침례예배당에서 거행 하였는데 등단(登壇)하여 연설을 하였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임시 정부의 밀명(密命)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김구(金九) 일파로써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감옥(大田監獄)과 에서 복역하였는데 1940년 8월 18일 석방된 기록이 있다.

이후 행발불명되었으나 일본이 자료 공개를 거부하여 자세한 내막을 모르며, 고문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어 석방 하였을 것으로 추정함(4년 5개월 21일 복역).

일본 경시청의 자료 공개 거부로 사망 일자 확인이 불가능하고 시신도 없어 순국선열(殉國先烈) 위패(位牌)조차 모실 수 없었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을, 1991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11월 7일 보훈처에서 그의 후손이 없으므로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기로 결정.

2000년 12월 10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충렬대(忠烈臺)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재 직계가족은 없으며 동생 이재현의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안양의 근원지와 시 명칭의 유래(2020.05.09)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의 근원지와 시 명칭의 유래

제l절 안빨! 근원지
l. 안양의 근원지에 대한 제셜
안양(安養)의 근원지(根願地)에 대하여는 이승언(李承彦)이 『안양문화a 저13후 「맹 정구역변전사」에서 처음으로 언급했으며 이어 동 저114호 「안양의 유래」와 동 제5호 「안양시 지명유래」에서 각종 문헌과 증언을 토대로 소상히 밝힌 바 있는데 동 논문에 따르면 안양시의 31개 행정동 중 석수123동과 박달1 2동은 금전현(衿川縣 -> 시홍현 -> 시흥군)지역이었으며 그 외 전 지역은 과전현(果川縣 -> 과천군-> 지역D,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발간된 각종 자료가 대부분 안양의 근원지는 금천현이었고 금천현의 중심지는 안양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러한 오류는 안양와 역사가 일전하기 때문에 향토사에 대한 연구가 없어 어느 한 책자가 그 사실을 기록하면 그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전재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열거한 자료들은 안양의 근원지가 금천현(衿川縣 -> 시흥현)이라고 기술된 논저(論著)안데 금천현은 고구려 때(475) 잉벌노현(仍t.k:ft總) 신라때(757) 곡양현(鍵縣) 고려 때(940) 금주(금川 금천)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정조 19년(1795)까지 금천현(衿川縣)이었고 1795년 부터 시홍현(始興縣) 1895년에 이르러 시흥군(始興都)으로 개칭되었다
• 내고장 전통가꾸기(안양시 1981 2쪽)
934년(고려 태조) 챔川로 개칭되면서 챔川縣으로 청함 1895년(고종 32년) 챔川那에 속하였음
• 겸기도사(京鐵휠史).1 Q) (경기도 1979 1268쪽)
시홍군이란 명칭은 『東與J r與固』에 보여지 않는다 이 명청은 현재의 안양시를 중심으로 한 앨대거 챔川야었고 • Iì시흩의 전통문화;n (시흥군 1983) 『경기도사』의 내용과 강음 톨 『효벅지^I(韓固地誌)(지방펀).1 (국립지리원 1982 574 ,.._, 575쪽) 고려시대 • 대조 23년(940) 금주(함川 또는 웹nD로 고치고 별정 해~~이라함 • r^1방행정지명사(행方行政地名史}.Jl (내무부 1982 188쪽)
저'1장 • 26
안양은 고구려 시대어l 仍比쨌縣에 속했다가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17년(934)에 햄}II로
• fJI호풍물자리지(짧뺑風物빼理志).1 (경민일보 1983 12 13) 야지역 죄고의 기록은 고구려 시대의 仍ft姬縣에 속해 있었다 고려 태조 17년(934)때는 함川이라 칭했다 • r안양문화(安養文化).1 (안양문화원. 1982 25쪽) 오늘의 금천{챔JlI) 시흥군(始興那)엘대는 원래 금전(챔JlI) 안산(安山) 과전(果 JII)의 3군ól 청렴되어 있었는데 얀양을 중심으로 한 얼대가 챔川야였다 • f'ÁI정안내(市政案內).1 (만양시 1981 15쪽) • 고구려 영별노환에 속함 • 757(신라 경덕왕) 곡%판 고져 율진군의 영현야 되었음 • 934(고려 태조) 금주로 개갱되면서 금전으로 장함 • r서울시 위성도시 개발에 관한 연구 , 안양시를 중심으로J (金東찮 학위논문 1976 54쪽) • 고구려 본군은 웬래 쫓鬼과 安山 맞 果川의 삼군이 갱렵하였음 • 742-764 곡양현요로 율진군에 영속시컴 • 940 全川로 개칭 • r경기연감(京鍵年鍵).1 (경민일보사 1985 430쪽) 안양의 연혁을 찰펴보면 고구려 시대에는 仍t\:;빠縣에 속했다가 서기 757년 (신라) 곡양으로 고쳐 934년(고려 태조) 챔까를 개칭되면서 챔川으로 불리다가 • r안양지역의 산업폐가물처리 및활용방안메 대한 연구'J (앉양상의 1982 15쪽) 고구려 시대에는 앙벨노현에 속했다가 서기 757년 곡양 934(고려 태조) 챔川로 개칭되연서 챔JII으로 청하다가 1879년 또다시 챔川縣으로 개청했다가 1895년 션川휩ß에 속했다가 • r자랑스런 내고장J (경기도 교육위원회 1985 89쪽) 고려 대조 때에 금주로 고져 부르면서 금천으로 불라워졌고 고종 16년 (1879)에 금전현으로 바뀌고 고종 32년(1895)에 금천군에 속했다가 • r신풍토가(新風土記)J (효말일보 1982 7 30) 고구려 때엔 잉밸노현 산라 때엔 곡양 고려 초가엔 함)(1
처”절 • 27
• r써l계백과대사전(世界百科大事典}J (@ (서문당 1975 118쪽) 본래 챔川 安山 果川의 3군여 합군된 것으후 • r행정구역연혁 및 지방관란사려L. (내무부 1987 122쪽) • 삼국시 대 仍t.k:때縣(고구려) • 통일신라시대 흉렀塞〔경덕왕 16년(757) ) • 교려시대 ftJII(태조 17년(934)) - 樹시| • 조선시대 쯤果縣〔태종 14년(1414)) - 쯤陽縣 - 함川縣 • 1914년 始與휩ßf암’11面 • i'안앙시 통계연보.J (안양시 1988 38쪽) • 꼬구려 仍~!lX縣어| 츄함 • 934년 (고려 태조) 해) 11로 개칭확면서 천川으로 갱함 • 1879년 (이조 고종 16년) 함J Illrf으로 징함 • 1895년 (이조 고종 32년) 참川돼얘 속하였융 • 1914 3 함山 강山 始興 3군。l 始與없으로 개갱 • 1914 3 1 빡川01 西二많으로 개갱
이상 열거한 논저 이외에도 안양의 연혁은 거의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가지 부언할 것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술펀 자호i가 없다는 것여다 ‘ 한 지방의 연혁이 이령게 다를 수가 있 단 발언가 연대와 지명표기는 말할 것 도 없고 요J}(誤字)를 오자인 줄도 모르 고 계속해서 사용하는 웃지 못할 사례까 ι 지 있다 (예 꺾JlI • 쯤山 함JII • 쯤J 11) 대동여지도외 과전의 위지 다음에 열거한 자료들은 안양의 근원지가 과천렐(果川縣 • 과천군)이라고 기술된 논져들언더l 파천은 고구려 때 (475) 율목군(寒木짧) 신라 때 (757) 율진군(뽑轉ß) 고려 때(940) 과주(果셔1) 조선 태종13년(1413) 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과천현 (果JJI縣)야었고 1895년 부터 과천군(果JII那)으로 개칭되었다
• r안양읍 통계연보(安養둠 統計年讀).1 (안양읍 1963 9쪽)
Jtll ,장 • 28
본 안양읍은 원래 과천군에 속하였으나 서기 1914년 2월 10일 군 겨l향으로 • r경기도사(京聽훌史)J(Î) (경기도 1982 386쪽) 과천군의 내력을 고찰혜 보면 %L국시대에는 棄林 등£로 불리웠으나 고종 32 년(1895)에 과천군야 되였는 바 치역은 현내면 남면 안양 등이었다고 하며 • r지명유래집(地名由來集).1 (경기도 1987 81쪽) 안양서는 고구려 시대에는 융목군(뽕木那) 신라시대(757)는 율진군(菜별웹) 고려시대(940)에는 과주꾼(果)11那) 조선 태종 13년(1413)에 과전현{果111縣) 톨 『안양시통계연감(安養市純計年讀).1 (안양시 1995 28 ,.._. 29쪽) •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년) 果木那에 속함 (박탈동 석수동은 쐐械쁨에 속함) •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票{활휩ß(좋렀뚫n) • 940년(고려 대조 23년) 果川(함)I[縣) • 991년(고려 성종 9년) 좁林 또는 富安(果)11의 별호롤 좁林 또는 숨安으루 정하다 ) • 1413년 (조선 태종 13년) 果川縣(챔川縣)
。l상과 갇이 안양의 근원지가 금천{챔}l1)과 파전(폈)11 )의 두 칼리l로 혼란을 볼러 일오키고 았는데 그 원언은 첫째 한 행정구역(시홍군)내에 안양려란 행정지명。l 둘 이나 였였고 풀째는 금전현 안양리(현 얀양시 석수동으로 시흥군 통면 안양랴였다 가 1963년에 안양읍 선안양리로 개칭)와 과천현 안양려(현 안양시 안양동)가 삼성천 을 경계로 서로 접경자대에 위치해 있였오며 셋째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지리지 읍 지 등의 옛 문헌이 양현(금천 과전)의 안양리(安養里)가 안양리(安陽里) 안양리(安 養里)로 기술되어 았역 더욱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넷째는 전술한 바와 같。l 향토샤 (안양사)에 대한 전문척이고 처l계척인 연구가 전혀 없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 안양의근원지
안양의 큰원지 즉 뿌리를 밥히려면 무엇보다 금전 안양리와 과전 안양랴에 관한 옛 기록들을 살펴 보아야 동F는데 주지동}는 바와 갇이 안양0] 삼국시대 이푸 고려 조 선을 거치는 동안 독렴된 지방행정(府 救 용ß 縣)야 아닌 소읍(小련)에 불과란 관계로 이렇다할 분헌이냐 지도 등이 없었기 때문에 양현의 읍져나 지려지 등을 흉한 사실
차'1정 • 2(/
규명이 산행해야 할 것으후 생각된다 과천현 안양리에 관한 가록은 영조조의 『여지도서』 이래 조선 말기에 발간된 읍지 나 지려지 중 1871년에 편찬되어 일채강점기 때 별사한 『과천읍지J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와 『호구총수J(규장각 소장) 등 불과 몇몇 문헌 외에는 안양려애 관한 행정지명 이 기술되어 있지 않으묘로 옛 과전의 치소(治所 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 자리)에서 현 안양시의 영역언 만안구Cf西面)와 동안구(上西面}에 해당되는 경계에 판해 기재 된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 Ii며지도서(與地圖홈),n 염조 35년(1759) • 상서면은 과전환 차소에서 서쪽 15라 가점에 었다 (上西面 표縣西十五멸) • 하서면은 과전현 치소에서 서쪽 25려 지점에 었다 (下西面 在縣西二十五里) • Ii[H동7\IÃI(大東i{g펀、)J 고종 원년(1864) • 상서면은 저음이 10ç_J이고 끝이 20라이다 (上西체十원二十) • 하서면은 서남쪽。-로 끝。1 25랴이다 (下西면南終一十五) 톨 『과천읍지(果)11물誌)~ 1871 1910 ~ 1944년메 필사 • 하서면 一써 二洞 道I場里 虎{쫓뿔 石手村 安陽里 後頭尾洞 撥舍洞 a Ii자방행정구역명칭 일합(地方行政區域名稱-훨)J 조선총독부, 1912 • 하서면 一洞 二{폐 道陽里 虎&里 石手t폐 安F졌里 徵쳐尾1떼 t휩內I河 협종舍{펴 톨 『조선전도부문면리동명첨 일람(朝廳全道府뿜面里I템名稱-훨) .. 중앙시장, 1917 • 과천군 하서면의 撥舍里 石f없里 f짧흉尾里 t휩內里 安陽뿔7} 安養里로 통칭 되면서 시흥군 서여면 안양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됨
금천현 안양리는 치소와 인접혜 았을 뿐만 아니라 치소 내에 소재해 있어 행정상 중요시 되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 금전 안양리(현 석수123동)에 관한 자료를 열거 하딴 다음과같다
• r여지도서(짧地圖書).1 영조 35년(1759) • 현내면에서 10랴 거리에 安養里가 있고 5리 거려에 博山里(서울 시흥동 박미)와上뚜里가었다 • r시흥군읍7\1(始興那둠誌).1 광무 3년(1899)
제 l장 • 3(}
• 군내면에서 3려 거리에 박산려가 있고 10리 거리에 安養里(현 석수동)가 었으며 17리 거리에 博達里(현 박달동)가 있다 (都內面博山里츠里安養뿔十里博達里十七里) • r,경기지(京廳誌)J 편자마상 고종조머l 편년 • 위와강은내용엄 • f71전릅지(짧빼돕誌)J 의정부 고종조때 편년 • 위와 같은 내용이나 安養里를 安陽里로 기술함 • f지방행정구역명청 일람(地方行政區域名稱-寶)J 조선총독부 1912 • 시풍군 군내면 합ß內짜 安養里 博達里 • r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 알람(朝蘇全道府짧面里洞名稱-寶)J 중앙시장 1917 • 시풍군 군내면 安陽멸가 安養뿔로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됩

이상과 같이 양현(시흥,금천)에 안양리가 있었기 때문에 혀 계를 정확히 논증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어서 수치에 걸친 답사와 읍지, 지리지, 지도 등을 토대로 안양의 원로들의 증언과 지리학자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종합 분석한 결과 현계(경계)는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안양유유원지로 흘러내리는 안양천(삼성천 옛 명칭은 安陽J[J 또는 安養J11)을 따라 그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 과전현 안양리(현 안양시 안양1동-9동)이다 말하자면 현 안양시의 지역 (i하域)중 석수동과 박달동은 금천현에 속했고 그 외 전역은 과천현에 속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자면 얀양와 근원지 즉 뿌리논 상성산에서 발원한 삼성전을 현계로 했고 뒤에서 언급하자만 안양의 명칭 유래가 삼성산 소재 안양사(安養좋)에서 유래되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는 금천현이 안양의 근원지라는 섣이 옳다고 보나 현 안양시의 인구 및 면적은 물론 시청사 등 행정의 중심지가 삼성전 이남의 지역으로 과거 과천현의 치역이였으므로 안양역 큰원지는 과전현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산에서 발원하여 안0륨원지로 흘러내리는 안양 천(삼성천 옛명챙은 安陽J[J 또는 安養J11)을 따라 그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 과전현 안양려(현 안양 시 안양1동-9동)이다 말하자면 현 안양시의 치 역 (i하域)중 석수동과 박달동은 금천현에 속했고 그 외 전역은 과천현에 속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자면 얀양와 근원지 즉 뿌리논 상성산에서 반원한 삼성전을 현계로 했고 뒤에서 언급하자만 안양의 명칭유 래가 삼성산 소재 안양사(安養좋)에서 퓨래되었으니 엄말한 의미에서는 금천현이 안 양의 근원지라는 섣이 옳다고 보나 현 안양시의 인구 맞 면적은 물론 시청사 등 행정 의 중심지가 삼성전 이남의 지역으로 과거 과천현의 치역이였으므로 안양약 큰원지는 과전현야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체12절 안양시 명칭의 유~H
I λl명칭에 대한제설
안양시 명갱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운 안양의 전통문화를 상칭하는 만안 교에샤 유래되었다는 설과 삼성산에 있었던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으로 대 별되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갇다
1) 만얀교 원용설(萬安橋 援用說)
~

~‘
끊N ‘ *짧
• Ii'효단국져지(韓國地誌).n CD 건설부 1983 575쪽 안양은 조선의 정조 임금이 父主인 사도 얘 세자의 수원 화산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안 양에 r만안교I를 놓았는데 요도의 다리로
알혀진 이 다리 이름에서 ’安r자를 취하고 또 그 정성을 길이 일깨워 잘련다는 뜻에서 r찮r차를 취하여 ’安養’여 되었다고 함
• r효택지방행정지명사(韓國地方行政地名 史).1 내부부 1982 188쪽 만안교비 (1990년대) 정부기관등의 문한틀이 대부분은 안앙의 시명의 유래를 안안쿄원용이라고 밝01고 있다 조선 정조 19년(1795) 9월 표성이 극진
한 청조가 父君 莊敵世子(사도세자)의 수원 화산능 輩路를 위하여 놓은 /만안교r 에서 l安/지흘 사용댔을 것으로 풀이되며 정조가 父君에 대하여 身命을 바쳤던 바 와 강이 인륜의 근본인 부모엑게 표도하는 돗을 더욱 살리고 얼깨우며 그 뜻을 걸 。1 천하기 위하여 /養f~}를 사용하여 r安養r으로 칭하채 되였음 톨 『댐정구역 연혁 및 지명관련 사려b 내무부 1987 122쪽 f安r자는 조선 정조 19년(1794) 9웰 표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인 莊敵世子 (사도세자)의 수완 화산능 養路를 위하여 놓은 r만안교/에서 따온 것이며 정조가 父君에 대하여 선명을 바쳤던 바와 같이 언륜의 근본인 부모에게 표도하는 뭇을 더욱 살리고 일깨우며 그 뭇을 걸이 전하기 위하여 ’養’자플 사용하여 r安찮’으로 칭하게 되었음
처1I장 • 32
2) 얀양샤 원용설(安養좋 援用說)
• r신팔도기(新八道記)J 동아일보 1978 12 1 안양의 유래는 생어안주(生F安住 편히 사는 곳에서 따온 것 금주 과천 금천 안산으로 불려지던 시홍군의 한 둠애서 벌어져 나온 이곳을 安養이라 이름 젓기까지엔 손한 사연01 깃들어 있다 시내 한 복판에서 서울쪽으로 우뚝 솟은 상 성산에포 ’安íí'와 관련된 사연이 많다 • rJI호풍물지리지(鍵l행風物繼활좀、)J 감대규 겸언밀보 1983 12 13 안양야란 말은 원래 붕교어lλ.~ ,마음을 팬하게 지니고 폼을 쉬채 동}는 극락정토 (極樂폐土)플 딴컨는 말이다 안양계(安養界) 얀양보국(安월월며) 안양세채(安 養世界} 등이 모두 갇은 뜻을 가진 말들이니 시명(市名)이야 말로 더 말한 냐위 없이 빼어난 자랑거려가 아니겠는가? • r고향때 살다」 김대규 동아일보 1984 9 18 원래 불교에서 r마음을 편하게 지니고 몸융 쉬게 하는’ 극락청토(極樂f爭土}를 안양계(安효:뿜) 안양보국(安養寶國) 안양세계(安義世界)라 부르눈 바 안양이 바 로 그 佛界어] 통하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빼어난 여름인가? • r신풍토기(新風土記}J 정진규 효백일보 1982 7 30 얀양이란 지명이 1941년에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갱되면서부터 쓰여 진 것으로 연혁에 나타냐 있어 그 명장을 고찰할 셈으로 찾은 안양사(安養좋) 석 수동 산27) 경내 법당 앞에 남아 있는 궈부(龜많)정도에서 그 옛 사찰의 향훈을 느껴 볼 수 았을 따름여다 육당(六堂)의 『대동지명(大東地名)J사전에 의하면 안 양에 대한 지명풀이는 따로01 없고 안양λ}(安養좋) 제하에 재금전상성산(在챔’I[ 三뿔山 금천은 고려초기의 이 지역 명칭)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칭할 때 야 사찰의 。l륨윤 원용(援用)한 켓으로 짐작펀다
2 안양시명칭의논거
전술한 안양시 명칭유래 중 1)의 반안교 원용젤은 『통국여자송람'J r여자도셔』 동 만얀교 가설 여전의 문헨에 r안양’이란 지명여 기채되어 있요므로 절득력이 부족하 다 특히 1)의 설은 억지 춘향식의 인조어 (A造語)인상이 걷게 풍긴다 안양여란 지명 은 김대규가 지적했듯이 불계의 극략정토(極樂{爭土)에서 나온 말로 그 기원은 선라
제2첼 • 33
효공왕 4년(900)에 고려 돼조 왕건이 금주( 챔川 시홍) 과주{果川 과천)) 등의 제 지역을 청별하기 위하여 상성산을 지나다가 능정(能正}이란 스닝을 만난 인연으로 그 자리에 안양사(安養춤)를 창사한 것으후부터 시작원다 안양사의 원용절을 주장하는 논거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삼성산 안양사 인근에 있는 상막사{三幕춤) 장막전(三幕)1 [) 삼성천(三聖
J 1 [) 안양천( 安義川 현 상성전) 삼막동(三幕洞) 얀양교(安養橋) 얀양전석교(安 養川石橋) 안흥사(安興좋 염불암) 호압셔(虎뺑춤) 불성사(佛l生츄) 망해암(望{홉 魔) 염불암(;웅佛魔)등의 사명 (좋名) 저명 등이 모두 불교와 깊은 관련0] 있고 툴째 상성산 안양사와 위치가 금전현 안양라(현 석수동)에 속해 있오며 셋해 안양유원지 일대의 떳 져형야 안양동 또는 칸양골oì라 칭댔다는 안양 원로 들의 증언과 옛 문헌둡。l 이률 뒷받침하고 있는데다가 넷째 안양사 0]전에는 안양이란 문헌이 없으며 다섯째 삼성천(안양전)을 경계로 하여 현계플 구획댔다는 사설과 서로 다플 행정 구역(금선현 과천현}이면서 안양려(安養里)란 지명을 택댔ri-는 것은 우연0] 아닌 펀 연야었던 것으로 추청되며 그 주변 일대를 불심(佛JL、)으로 안양색계(安養世界)플 여 룩하려고 댔던 선조들의 깊은 뭇이 내도되어 있었읍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 이다
3. 안양시 멍청와 유래
안양이란 시명이 단생된 것윤 통일 신라 말기였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18세 때 (895) 아벼지 왕융 (王隆)을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23 세 때 (900) 금주(챔)11 • 금전 • 시 흉) 과주(果) 11 • 과전) 등의 지역을 정 별하기 위하여 안양시 석수1동 소재 암 성산을 지나다가 삼성산에 구름0] 5가지 빚으로 채색을 이루어 이상하게 여겨 사 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나 능정(能正) 이란 늙은 스념을 만나 자세한 이야거를
제l 장 • 34
고려 태조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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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야 보니 왕건의 못과 참으므로 이곳(석수동 산27 일대)에 안양사란 사찰을 건립하 였는더] 이 연양사로 인하여 I안양(安養)'이란 시명이 탄생되었다
1) 안양(安劃의 뜻
안양01란 서방극락국{西方極樂國)의 。1명 (異名)으로 『무량수경 (뾰量壽햄}J 下어l 의하면 ”제붕(諸佛)이 보삼에게 말하여 안%뽑(安짧해)을 찾아보거l 하였다”고 기술되 어 있으며 의적소(義寂就}에는 /마음을 편히 하고 몸을 양(養)합윤 안양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좀 더 설명을 붙이면 안양은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불을 지나간 곳 에 있다는 아마다뿔(阿鋼댄佛의 정토로 아미따불의 전신인 볍장구니(앞歲ltiÍ)의 이 상을 설현한 국토인데 지금도 겨l시어 향상 설법하시여 모든 일이 원만구족하여 즐거 움만 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줍고 안락한 이상향(理想鋼야다 그 밖에 안양은 얀양계(安養界) 안양교주(安養¥εt) 안양락(安짧뽕) 얀양세계 (安養世界) 극락세계 (極樂世界) 안양정 업 (安養{爭業) 안。&청 찰(安養l爭중IJ) 안양정 토(安養{爭士) 안양즉척광(安觀願光) 안양지족(安짧H足)이란 뜻£로도 풀야된다 • 참고문헌 세계성전간맹협화 『망월불교대사전J 1954 한국불교편잔위원회 『한국불쿄 대사전.! 1982 이숭언 「안양의 유래」 안양문화 4-1985 이송언 「안양시 지명퓨래」 안양문화 5-1986
2) 얀양(安養)의 장엄(莊嚴)
톨 안양은 망이 칠보(七寶)로 되어 광~H7} 빚냐고 기묘하여 청정하기가 시방세계 야l 뛰어냐고 국토의 넓이가 한량없오며 땅이 평딴하여 산 구령 골짜기 바다 강야 없다 톨 안양은 바와 눈아 없고 혜와 달이 없£냐 항상 밝고 어둡지 아니하여 밤과 낮이 없거니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꽂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기후가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향상 봉파 갇이 온화하고 밝으며 상쾌하다 I 안양은 땅위에서 허공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는 여러가지 보배와 백천 종류악 향(香)오로 되였으며 장엄한 것이기 묘하고 절송하며 광채가 휘황하가 그지없다

l 안양은 여러가지 보배로 된 보망(寶網)이 그 냐라를 덮었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보배나무도위에는보망이 덮히었고 그주위에는보배 난깐(爛千)이 풀려져 교묘하게 꾸미고 광채가찬란하다 또 바람야 약간 불면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법읍(å2룹)이나며 꽃다운 향겨가 퍼지고 나무에샤 나는 소리가 백장 종류의 음악소리와 같다 l 안양은 바람。l 불면 꽃이 흩어져서 전국에 가득차고 하늘에서도 꽃비가 오는데 쩌l각가 그 빚을 따라 쌓이고 섞이지 않 o 며 부드럽고 고와 찬란한 광채와 꽂다운 향71가난다 • 안양은 칠보로 된 연목에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갔는데 목욕할 때는 물이 럽고 잔 켓과 늘고 주는 마웅대로 된다 l 안양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각색 보배그릇01 마음대로 앞에 오는데 그 가운 데어l 백마(百味)가 구존(具存)한 음식여 잠겨져 있고 먹은 뒤에는 자연히 녹아 흘러서 남는 찌꺼가가 없다 • 안양온 모든 사람들이 지혜가 있고 마음오로 생각하는 것이 도덕 아닌 것이 없으며 업으혹 말하는 것이 바른 얼 아닌 것이 없고 서로 사광하며 공겸하고 마워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오며 제각기 질서를 지키고 에긋나는 일이 없어서 움직야는 것이 예의(禮橫)에 맞고 화목하기가 형제 칼으며 말야 진실하고 서로 가르져주면 기뿌게 받아 어검이 없오며 신7l(懶)가 고르고 고요하며 처l질이 가볍고 맑다 l 안양은 락(樂)만 있고 쟁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없나니 태어날 때는 고통이 있으니 성화(花生)하는 떼는 연화에 확생하므로 생고(生苦)가 없으며 4계철이 없고 절가가 바뀌지 아니하며 기후가 항상 온화하여 노고(老苦)가 없으며 화생한 몸。1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을 앓아 고생동}는 일이 없고 수명야 한량이 없으므로 사고(死苦)가 없다 •

참고문헌 홍인표 『연종집요.1 1970 세제성전간행협펴 『망월불쿄대사전J 1954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펴 r한국불교대사전J 1982


 

 

[최승원]안양 비산동(飛山洞)의 변천과 건축&도시이야기(2019.09.25)

이야기보따리/자료






[좋은집]창립 100년 맞이한 안양 좋은집(20190916)

이야기보따리/자료

 

북쪽으로는 관악산과 삼성산, 서쪽으로는 수리산, 남쪽으로는 청계산과 백운산 그리고 모락산과 오봉산이 둘러싸고 산자락 샘터에서 떠난 물줄기가 흐르는 산본천과 당정천, 왕곡천과 오전천 그리고 갈현천과 청계천이 합쳐진 학의천(옛 인덕원천), 삼성천과 삼막천, 수암천과 삼봉천 등의 여러 지천들이 모인 커다란 물줄기 안양천(갈천-사근천-기탄-대천)이 흐르던 옛 잉벌노현(금천현.과천현->시흥군->과천.군포.안양.군포.의왕시)은 사람 살기에 아늑하고 아기 키우기에 좋았던 곳이었나 봅니다. 편안할 안(安)자와 기를 양(養)자를 지명으로 쓰는 안양에 3개의 보육시설(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이, 의왕에도 1개의 보육시설(명륜보육원)이 둥지를 틀었으니 말입니다.

그중 1936년 안양2동에 안양천변에 둥지를 튼 좋은집이 지난해(2018년 5월 25일) 10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입니다.

안양의 역사를 볼때 좋은집의 100년은 매우 중차대한 사건인데 정작 지역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뒤늦었지만 좋은집에서 100년을 맞아 발행한 소식지 DBF파일(좋은소리 2018 -100주년 기념호)을 입수했습니다. 소식지에는 창설자 오긍선박사의 이야기가 주로 실려있지만 1930-50년대 옛 사진들도 담겨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좋은집의 주요 연혁을 보면
1918.12. 25 창설자 오긍선박사가 남대문시장에서 혹한과 기아에 허덕이는 고아 7명을 자택에서 수용 구호(1대원장 / 1대 이사장)
1919.01. 일제에 항거하는 혁명투사의 자녀도 함께 구호함을 목적으로 경성고아구제회 조직
1919.03 경성보육원 설립
1936.09 현 위치인 안양으로 이전(안양 기독보육원으로 시설명칭 변경)
1981.07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으로 명의 변경
1998.03 해관보육원으로 시설명칭 변경
2007. 05. 10. 좋은집으로 명칭 변경
등인데 일부 주요 시건들이 빠졌네요 
#보육원 부지 일부를 해송재단(양명고.양명여고)에 매각한 기록이 없네요.
#수익 사업을 위해 1980년대 안양예술로 지하차도 인근에 수영장, 골프장을 조성한 기록도 없음  

 

 

 

 

 

 


100년의 사랑을 품은 ‘좋은집’(소식지 발췌)


창립 100주년을 맞은 좋은집, 2018년 예술공원로 52번길 언덕 위에 벽돌색 지붕의 하얀 건물이 성곽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면서 또한 ‘좋은집’의 사무공간이지요. 아이들을 돕기위한 모든 행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너머, 울타리 안에는 푸른 잔디밭과 놀이터, 운동장, 컴퓨터실, 도서실, 예배실, 미용실 등 편의시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뜰 안엔 사계절 꽃들이 피어나고, 하얀집 지붕에서는 동화속 그림처럼 천사가 나팔을 분답니다.
2018년, 올해도 ‘좋은집’ 마당엔 벚꽃이 하얗게 꽃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소년들은 운동장에 나가 힘껏 공을 차고,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바이올린을 켜고, 빨간 미끄럼틀에는 어린아이들의 웃음과 행복한 지껄임이 새들의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 좋은집에는 현재 69명의 대가족이 모여 삽니다. 장난꾸러기 유치원생들부터 대학 진학과 취업을 걱정하는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 함께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입니다. 더불어 사회복지사, 간호사, 영양사, 임상심리상담원 등 전문인 38명이 그들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좋은집에서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한 가족은 약 3천여 명 정도입니다.
설립자인 오긍선 할아버지는 자립 후 혼자서 살아가게 될 아이들에게 직업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도 ‘자립지원프로그램’에 역점을 두고 연령별, 영역별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내심리치료실을 운영, 외부전문기관과 연계하여 정서 안정과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심리정서 지원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인성교육, 아동개별 맞춤형 학습지도 및 예·체능 활동도 적극 지원합니다. 또, 지역사회교류프로그램 활성화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안전교육도 실시합니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다양한 체험을 위해 여러 캠프에도 참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립 후에 건강, 마음, 시간, 경제 등을 잘 관리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회복지시설평가 결과 6개영역 전체 “A” 등급을 받아서 최우수 시설로 선정, 운영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집의 제일 큰 힘은 후원자,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분들 덕분에 성탄절 해피트리에도 풍성한 열매가 열립니다. 좋은집 가족들은 그분들을 통해 사랑을 주는 법과 받는 법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100년 동안 그 사랑을 견고하게 품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발간사]오경인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좋은집 원장


한 세기를 이어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동복지시설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는 5월 25일은 우리 좋은집이 설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1918년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어 전쟁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 사회복지계에서는 처음으로 한 세기를 이어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동복지시설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각자로서 미국에서 서양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한국인 최초의 양의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였던 창립자 해관 오긍선 박사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그 밑거름이 되었고 정부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은 물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속적으로 우리 아동들을 후원하고 도와주신 수많은 후원자 및 봉사자들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박봉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랑과 소명의식으로 우리 아동들을 위해 헌신해 온 좋은집 임직원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좋은집은 경성보육원으로 시작하여 안양기독보육원(1936년 안양 이주 후), 해관보육원, 좋은집으로 비록 그 이름은 바뀌어 왔습니다만 100년의 역사 속에 기독교 사랑의 정신은 변함없이 면히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좋은집 임직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양육시설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사랑하는 아동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올곧고 아름답게 자라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 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사회에 되돌려 줄 수 있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그동안 저희 좋은집을 믿고 아낌없는 노고와 성원을 보내주신 후원자 및 자원봉사자 등 여러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해관보육원-좋은집의 100년 발자취

1918. 12. 25
추운 겨울, 갈 곳이 없어 떠돌던 아이들

남대문교회 김병찬 장로가 그가 소유한 집에 고아들을 데려다가 보살펴 주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긍선은 김병찬, 윤치호, 김일선, 송덕수와 뜻을 모아 정
식으로 사회사업을 벌이기로 하였다. 공익과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고아원을 공익법인화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데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여 우선 경성고아구제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3.1 만세운동(1919년) 이후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은 더 많아져서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할 만큼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1920년 2월 경성고아구제회가 조직되었으며, 1922년 5월에 김병찬, 김일선,오긍선, 윤치호 등이 임원으로 참여한 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좋은집》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첫 이사장직은 윤치호가 맡았으나 항일활동으로 보육원 사업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그는 1933년 12월 13일 일기에 “나는 이름뿐인 이사장(onlythe nominal president of the Bd. of Directors)이고 실제로는 오긍선이 대부분의 일을 다 하였다.”라고 썼다. 그의 말처럼 경성보육원의 실질적인 경영은 오긍선이 도맡다시피 했으며, 2대 이사장이 되었다.
경성보육원은 처음에 11명으로 시작했는데, 찾아드는 아이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서대문 밖 옥천동에 있는 언더우드 소유의 대지 3천여 평과 가옥을 좋은 조건으로 매입, 이주하였다. 시세의 절반에 10년간 분납하는 조건으로 보육원을 마련하게 된 데에는 오긍선의 노력이 주효하였다.
1927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오긍선은, 남대문교회 김병찬장로가 추운 겨울에도 갈 곳이 없어 남대문 시장 주변을 떠도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돌봐주었는데 경성보육원
은 이를 모체로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다.
김병찬 장로는 6.25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1936. 09.
안양으로 이전,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꾸다

경성보육원의 규정은 원아들이 15세가 넘으면 보육원을 나가 자립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오긍선 이사장은 보육원 설립 당시부터 강당, 숙소, 진찰실, 병실, 목욕탕 등을 갖춘 시설을 짓고 원아들에게 농사, 양돈, 양토, 원예 등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36년, 안양에 8만여 평 부지를 구입하였다.
1936년 9월, 현재의 자리(예술공원로 52번길 46)로 이전,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원아들이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도록 하기 위해 단독주택을 여러 채 짓고, 보모(현 생활지도원) 중심으로 가족을 이루어 자유롭게 커 가도록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시설운영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때로는 원을 폐쇄해야 할 정도의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제는 식량과 세금을 터무니없이 요구했다.
1949년 CCF (Christian Children's Fund, 기독교 아동복리회, 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서 잠시 형편이 호전되었다. 2번에 걸쳐 공로표창(1949년 5월:사회부장관, 1949년 10월:보건사회부장관)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2. 09.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터전으로 돌아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피난을 가지 못했으나 1.4후퇴때는 거제도 근처 가덕도로 피난했다. 그때 보육원에는 70여 명의 아동들과 직원 등 모두 1백여명의 식구가 있어 한꺼번에 피난할 수 없었다. 아동과 직원들을 3개조로 나누어 부산까지 가도록 일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온 1진 40여 명을 남해안 가덕도에 수용하고 2진, 3진을 기다리던 중 2진은 구걸행각을 하며 뒤늦게 찾아왔지만 3진은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길이 막혀 미처 보육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3진은 폭격을 당해 20여 명의 아동들 모두가 희생되었다. 어린 아동들의 희생에 대해 오긍선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자책했다.

“평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1.4 후퇴 때 안양에 남아 있던 30명 아이들 가운데 20여 명을 폭격에 잃은 일이다. 그 당시 70여 명 아동의 후송길이 끊겨 조바심치고 있는데 세 패로 갈린 원아들은 걸어서 부산까지 오기도 했고 중간에서 자리잡기도 했으며 안양에 발이 묶인 한 패는 폭격을 당해 20여명이나 되는 친구를 잃어 애처로웠다. 이다음 나도 죽으면 그 원한의 고혼들이 묻힌 보육원 뒷산에 묻히고 싶다.(1962년도 소파상 받은 후 기자 회견담)”

휴전 회담이 진행되면서 서울로의 복귀가 허가되자 1952년 9월, 오긍선 이사장은 60여 명의 아동들을 데리고 안양으로 돌아왔다. 1.4 후퇴 때 데려가지 못해 희생당한 20여 명의 어린 유골을 찾아 묻어주었다.

보육원은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좋은 땅이 남아 있었다. 그는 즉시 계절에 알맞는 농작물 재배를 계획했다. 양배추, 보리, 무우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재배되었다.
서둘러 복구작업도 시작했다.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 있는 지인들과 인근 미군부대에 도움을 청하였다. 손수 타자기를 이용하여 일일이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간곡한 부탁을 담은 영문 편지가 하루에 수십 통씩 후원자들에게 보내졌고, 외국의 구호기관과 미군부대에서는 구호물자와 금품을 보내왔다.
1952년 말에 보육원 건물 일부를 완공하였으며, 1953년 8월에 생활관 5동, 사무실 1동, 양계장 2동을 신축했다. 주한 미군 8군단 45공병단(단장 ‘죠지 엔 커블러’)에서도 건물 1동을
신축해 주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의무실을 신축했다.
도움을 준 외국기관과 국내외 인사들에게 아동들이 편지를 쓰면 오긍선 이사장이 직접 번역하여 타이프를 쳐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지어진 건물들엔 후원, 기증해 주신 분들
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그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지졌지만 〈 클락크사〉, 〈미세스 클락스사〉는 현존한다. 2010년, 2012년에 증 개축을 해서 예절관, 자립관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교회 건물 공사를 끝마친 다음, 1명의 보모 아래 14~15명의 아동들이 한 집에서 가족적인 형태로 생활할 수 있는 제도를 다시 채택하였다. 한국 최초였다. 이 제도는 아동들이 시설
에서 집단적으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아닌, 가정에서 생활한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오긍선 이사장은 제6회 소파상을 수상하였는데, 상장의 기록을 보면 1962년, 안양기독보육원에는 남자 81명, 여자 71명, 합해서 152명의 아동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 120명이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생 60명, 중학생 35명, 고등학생 25명이었다.
1977년 이후부터는 좋은 양육환경 조성을 위한 신축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강당과 사무실 99평, 1978년 8월에 아동 숙사에 연탄보일러를 설치했다.
한편 1981년에 정관 변경으로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기독보육원으로 개칭했다.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며 온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오긍선 설립자의 호이기도 하다.
1982년 7월에는 식당·목욕탕·이발소, 1986년 5월에 빌라식 아동숙사 268.65평을 신축하고 급수장도 2.1평 증설했다.
1996년에는 생활관 2동(8개 숙사), 교육관(사무실 및 강당) 1동을, 2003년 5월에는 미용실을, 2005년에는 본관을 신축했다. 2010년에는 예절관(구, 클락크사), 2012년에는 자립체험관(구, 미세스 클락크사)을 증 · 개축했다. 2011년에는 심리치료실을, 2014년과 2017년에는 실외와 실내에 체력 단련장을 각각 설치했다.
1998년에 해관보육원, 2007년에는 좋은집으로 시설명칭을 변경했다. 〈좋은집〉은 아동들의 투표로 결정된 이름이다.
설립 후의 임원 개선은 설립자 오긍선 박사의 타계로 인한 오진영 씨의 이사장 취임(1963년), 오진영 이사장의 타계로 인한 오장근 씨의 이사장 취임(1981년)이 있었다.
2002년 4대 이사장으로 구혜경, 2010년 7대 원장으로 오경인이 취임, 2018년 현재까지 그 직을 수행하고 있다.

 

100년의 시작 오긍선 박사의 삶

오긍선은 제6회 소파상을 수상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오긍선은 소파상 수상 소감을 ‘고마와요 고마워……’라는 말로 대신하고 그의 아들로 자라난 수많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떳떳이 일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정성을 들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소박한 수상 소감이었다.

설립자 오긍선 박사는 명예와 사리사욕을 초월한 사회사업가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천애의 고아들을 위해 노후의 모든 정열을 쏟은 봉사자였다. 그런 그에게 1962년 11월 15일, 소파상이 주어졌다. 소파상은 한국에서 어린이 보호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소파(小波) 방정환을 기념하여 새싹회에서 1957년에 제정한 상이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던 오긍선은 제6회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그 상을 받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오긍선은 ‘고마와요 고마워……’라는 말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면서, 그의 아들로 자라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떳떳이 일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날을 위해 정성을 들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소박한 수상 소감이었다.

오긍선에게 소파상이 주어지자 각 매스컴에서는 ‘고아와 울고 웃은 반평생—돈과 권세도 끝내 외면하고’(조선일보), ‘62년도 소파상—고아의 아버지 오긍선 박사’(한국일보), ‘고아들의 산타클로스 오긍선 박사’(서울신문)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해 그의 수상을 축하하였다. 어느 신문에서는 사설을 통해 「오긍선 박사는 진실한 자선가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애국의 표본이다」라고 까지 극찬하였다.

독립협회에 가입 협성회보 창간위원으로 활약

오긍선은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 사곡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10세부터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으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면서도 동양고전을 읽고 또 옛 성현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다.
1896년 초, 관직에 나가게 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 이후 아관파천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의 앞날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배재학당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 주시경 등과 함께 협성회보 창간위원으로 활약하여 두 차례 서기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인사들과의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독립협회는 온갖 시련을 겪었고 1898년 12월 25일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흥우, 안창호, 오긍선 등 신진청년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독립협회의 부활과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민공동회 집회를 계속해서 개최했다. 고종황제는 이러한 활동을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 집회를 주동한 자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오긍선은 체포령을 피해 충남 공주에 있는 스테드만(Frederick W. Steadman)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때 이미 오긍선은 아펜젤러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처럼 남을 도우며 살고 싶어서…

사태가 잠잠해지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당에서 학업을 마쳤다. 서울의 좋은 일자리를 얻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지만 선교사들처럼 남을 도우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그때, 오긍선의 뛰어난 자질과 책임감을 높이 평가한 알렉산더(A. J. A. Alexander) 선교사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를 따라 1903년 2월 초 미국유학을 떠났다.
선교사들과 생활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으로 곧바로 켄터키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 of Kentucky, Danville, KY.)에 진학할 수 있었다.
켄터키 센트럴대학에 입학하여 첫 학기에 아카데미과정을 이수하고 두 번째 학기, 정확히 말하면 1903년 12월 8일부터 루이빌 캠퍼스(Hospital College of Medicine, Louisville, KY.)로 가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유학하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신문 배달, 식당에서 접시 닦기, 담배공장 종업원 등으로 일을 하였다. 동양인이 많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는 그를 중국인으로 오인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친친 차이나’라고 불렀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라 흑인같은 취급을 받은 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 주일 교회에 나가는 것을 쉬지 않았으며, 부모님께도 매주 한 차례씩 안부편지를 썼다.
2학년이 되어 임상실습 직전에 면담을 통해 피부과를 선택하였다. 피부과학의 권위자인 헤이(John Edwin Hays)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두 학기 동안 루이빌 시립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하였다.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파견 의료선교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오긍선은 스물다섯에 시작한 유학을 서른에 마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1907년 11월, 미국남장로회의 한국 파견 의료선교사가 되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귀국은 공주와 군산 일대의 환영과 축하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순종황제는 황실의 전의로 입궁할 것을 요청했고, 일제통감부는 관립 대한의원에서 근무해 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모두 거절하고 군산 ‘야소병원’의 다니엘의 조수로 일했다. 그렇게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약 80여명의 의료선교사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야소병원은 미국 남장로회가 첫 번째로 세운 병원인데, 군산사람들은 궁멀병원, 구암병원이라 했고 선교사들은 ‘앳킨슨 기념병원’이라 불렀다. 한옥건물 안에 진료소와 수술실, 그리고 2개의 병동에 18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다니엘, 케슬러와 힘을 합하여 의사가 되고 싶은 3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또한 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군산항 근처에 진료소를 열고 오전과 오후로 나눠 진료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구암교회당에서 실시하고 있는 일요학교를 확대하여 소학교 과정을 개설하였다. 학교의 이름은 자신의 유학을 주선하여 준 알렉산더를 기념하기 위해 “안락학교”로 정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목포 야소병원 책임자로 부임했다.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일 외에도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순방하며 진료하는 일을 겸
해야 하므로 무척 고된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특히 영흥학교를 중심으로 자주독립과 신학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9년 5월, 목포에서 군산으로 다시 복귀한 오긍선은 중학교 과정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장으로서 학교의 기틀을 세우고 교육과정을 새 학교령에 맞춰 정규 학교가 되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인 3역, 4역을 하며 안락학교와 영명학교에서 봉사하였다. 특히, 영명학교에서는 교장직 수행은 물론 직접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귀국 직후부터 5년여 동안 군산, 목포 등지에서 전개한 그의 의료사업은 선교본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의료사업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의료선교사 중 한국인은 그가 유일했다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그가 가진 순박한 봉사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의료선교사들과는 달리 청소년을 위한 교육 사업을 함께했다는 것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세브란스에 부임한 첫 번째 한국인 교수

한창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전념하던 오긍선에게 미국 남장로교 의료진을 대표하여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로 옮기라는 선교부의 결정이 내려졌다.
1913년 5월 12일 세브란스에 부임한 그는 해부학 강의를 맡았다. 한국인으로 정식 교수로 임용된 첫번째 인물이다.
당시 세브란스에는 에비슨 교장을 비롯하여 필드(Eva Field), 웰스(James H. Wells, 우월시), 샤록스(Alfred M.사락수), 밀스(Ralph G. Mills, 마일서), 허스트(Jesse W. Hirst, 허시태) 등이 강의와 외래 진료를 맡고 있었고, 그와 같은 시기에 들어간 반버스커크, 커렐, 맥라렌, 다니엘 등이 강의와 부서의 일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습 이해력을 높이는 데는 단연 오긍선이 최고였다. 그는 피부과학 교수로 부임하였지만,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 미국인 임상교수들이 분담하여 가르
치던 것을 도맡아 가르쳤으며, 내과학, 외과학, 임상학의 보충 강의까지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부임 첫해에 ‘세브란스의 백과사전’이란 별명을 얻었다.

동경제국대학에서 유학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국권침탈에 성공한 후 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지화를 추진하였는데 1차로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대해서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일본 문부성이 인정하는 학위를 가진 교수만 사립 전문학교 교수로 임용할 수 있도록 해서 고등교육기관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인정하는 학위에 미국 학위는 포함되지 않았다. 오긍선은 개정된 법령 적용의 제1차 대상자로 지목될 형편에 놓였다.
에비슨에게 동경유학 의사를 밝혀 동의를 구한 후 그는 1916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갔고, 동경제국대학 도히(土肥) 교수의 연구실에서 피부비뇨기학을 연구하였다. 비록 외부적 요인에 의해 시작한 연구였지만 동경제국대학에서의 1년은 그의 학문적 성숙과 새로운 의학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동경 체류 기간에도 일본 관헌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항상 미행을 당하였다. 정치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그를 요시찰 대상으로 올려놓고 감시를 한 것은 당대의 지성인인 그의 영향
력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로 피부비뇨기과 교실을 시작

1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1917년 5월에 귀국,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학과장 겸 주임교수가 되었고, 한국에서 최초로 피부비뇨기과 교실을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 의학의 교육사적 의미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세기 전인 1900년대 초 국내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역사적 의미가 더해진다.
1917년 당시는 기미독립운동이 발발한 1919년 직전으로 사회가 극도로 큰 소용돌이에 휩싸여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도 피부과학교실의 기초를 다지고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차원의 나라 사랑을 뜨겁게 느낄 수 있다. 이는 당시 나라 걱정을 하던 우국지사들이 교육만이 이 나라를 다
시 찾는 길이라고 믿고 묵묵히 육영사업에 전력한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연세’의 초석을 놓은 첫 한국인 교장

1920년 3월, 에비슨 교장은 오긍선 박사를 학감에 임명하고 학사행정 대부분을 맡겼다. 1929년 8월에는 의료선진국을 시찰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때 그는 구미 의학계 시찰 및 연구 여행으로 의학자로서의 권위를 높였을 뿐 아니라 서유럽 의학계에 관하여 생소하였던 한국 의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4년 4월 17일, 오긍선 박사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2대 교장이 되었다. 당시 교장을 맡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면서 세브란스병원의학전문학교는 학교의 존립마저 위협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교수를 임용하도록 강요, 세브란스에서 기독교 정신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였다. 오긍선 박사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자격 있는 한국인 교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각 과 주임 자리에 한국인 교수를 앉히려고 공을 들였다. 연구시설의 확충 및 도서실을 완비함으로써 세브란스를 교육 및 연구 중심 의학교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오긍선 박사의 노력으로 세브란스는,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훼방과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미국인 교수 전원이 강제추방 당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미국계 교수들이 전원 본국으로 돌아간 1940년 말엽에는 우리나라 교수들이 학교와 병원을 석권했다.
그는 재임하는 동안 각계 인사들로 세브란스의전 후원회를 결성, 모금한 기금으로 기초학 교실을 신축해서 향후 대학의 발전을 예비하는 기초를 놓았다. 또한 부지 2만여 평을 구입해둠으로써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을 병합하여 연세대학교를 발족시키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가 당시 연희전문학교 인근에 21,000평의 의과대학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세브란스 병원 설립기금 기증자인 세브란스의 2세 세브란스(John L. Severance)가 1936년에 33만 달러를 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병학(趙炳學)으로부터 경기도에 있는 토지 60만평을 재단기금으로 희사 받는(1941년) 등 다른 독지가들이 세브란스의전에 제1회 세브란스의전 동창 의학강습회(1936.2.8.) 기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의전 교장 말년(1942) 일제에 의해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로 바뀐 교명 간판을 정문에 걸고, 그해 8월(65세) 자신이 정한 정년퇴임 규정을 실천하여 교장직을 이영준에게 인계하고 물러났다.

의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개인의 영리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오긍선은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고 했고, 한때 장남 오한영이 개업의 뜻을 비치자, “서양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항차 우리나라 청년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며 크게 책망한 일도 있다 한다. 이러한 조부의 가르침에 따라 손자 중근과 장근도 공직을 은퇴한 후 개업을 하지 않았다.

경성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

세브란스 의전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오긍선은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청년들과 함께 한 토요구락부, 고아들을 돌보는 보육원 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배재학당
시절 체험하였던 토론회를 떠올리며 만든 토요구락부는 모임에 함께 하는 청년들의 정체성과 세계관 형성에 자극을 주었다.
남대문교회 김병찬 장로가 그가 소유한 집에 고아들을 데려다가 보살펴 주는 것을 보고 동참, 경성보육원을 설립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경성보육원은 초기에 거의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운영하였으나 법인 설립 이후부터 후원 참여는 사회각계각층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36년 9월에 경기도 안양으로 이전하였다. 규정상 15세가 되어 퇴소한 원생들이 사회 부적응 또는 불량소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15세 이후에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사회에서 안양 이전을 추진하였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에서 퇴임한 오긍선 박사는 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 전신으로 현, 안양 ‘좋은집’) 이사장직을 맡아 수행하며 그 일에 전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보낸 특사로부터 미군정청 민정장관 제의를 받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입각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정치는 정치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라며 사양했다.
그는 정치에 일절 관여 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과 사회사업연합회 회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 종교계와 사회사업 분야의 명예직만을 역임하면서 고아 양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자신의 의술로 아이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한편 부모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부시키는 데 들어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손수 타자를 쳐서 작성한 편지를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단
체에 보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이 남침하였다는 소식이 있은 후 줄곧 정부당국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 북방에서 북한 공산군을 격퇴시킬 수 있으니 국민 모두는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라고 시간마다 특별방송을 했다.
대다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 동안 안양에 있으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과 그들의 인해전술로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00여 명의 식구가 한꺼번에 피난할 수 없어서 뒤늦게 출발한 20여 명의 아동들은 폭격을 당해 희생되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커다란 슬픔이었다.
오긍선 박사는 14세 되던 해에 다섯 살 위인 박현진과 결혼,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영을 부산 피난 시절에 잃었다. 당시 장남 한영은 보건부장관직에 올라 격무를 견디
지 못하고 취임한 지 1년 3개월만에 사임하고, 그 두 달 후인 1952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달리한 것이다.
1952년 9월, 오긍선 박사는 가덕도에서 돌보던 60여 명의 보육원 아동들을 데리고 안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복구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53년 8월에 어린이 숙사 5동과 교회당 건물 공사가 끝났다. 차츰 모든 것이 6.25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면서 그도 마음 놓고 보육사업에 정성을 쏟을 수가 있었다. 전문 재봉사를 두어 구호 의류들을 일일이 개조해서 아이들을 입히고, 타이프 앞에 앉아서 우방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보육원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타이프를 치고 있는 이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국내 최대의 보육원을 이룩한 이후에도 사무직원 한 사람 제대로 두지 않고 생애를 마칠 때까지 손수 업무를 처리하고 타자수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긍선 박사는 1963년 5월 18일 낮 10시 둘째 아들의 집에서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이 권하는 입원가료를 거절하고 며칠 동안 정신이 흐릿한 채 지내던 중 당일 아침에 “내 이 여관에 와서 오래 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 나는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소” 하며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삶과 죽음을 달관한 듯 웃는 모습으로 가
족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처럼 강인하고 선하게 오긍선은 자신의 공적에 대한 찬양이나 포상을 무척 꺼려하는 성격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공로 표창과 세 개의 명예박사 학위가 주어졌다.
1955년 11월 19일, 서울의대에서 해방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협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때 오긍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학계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의학 교육 공로상을 받았고, 심호섭은 국민보건 공로상, 윤일선은 학술연구공로상을 받았다. 일제 때 세브란스를 이끌었던 3인의 주역들이 함께 표창을 받아 더욱 감격스러웠고 참석자들도 흐뭇해 하였다. 1962년 11월 15일에는 제6회 소파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이 소파상이 그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수여된 상이었다. 그가 떠나고 석 달 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공로상이 주어졌다. 1963년 8월 10일 정부는 우리나라 교육문화 창달에 공적이 많은 인사들에게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국민장, 문화포장을 수여하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고 오긍선 등 7명에게 최고상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긍선은 그해 8월 15일 광복 18주년 기념식에서 영광의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77년, 연세대학교에서는 해관 오긍선 선생 탄생 1백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피부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들을 초청해 〈해관 오긍선 선생 기념 학술강연회〉를 시작했다. 1985년 10월 5일엔 연세대 교정에 오긍선 박사 동상이 제막되었다. 1998년 2월 27일, 망우리 공원묘지에 애국지사와 유명인사들의 연대기와 좌우명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는데, 독립운동가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서광조, 오재영, 유상규, 박인환 선생 등과 함께 오긍선 박사의 이름도 새겨졌다.
그는 수난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이름처럼 강인한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지혜롭게 처신하며(兢), 항상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善). 이와 같은 삶은 일찍이 신학문에 눈을 뜨고, 또 의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세워 미국 유학에 나섬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개화기의 선구자로 기억될 만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의학의 대중화를 꾀하여 사람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는 한편 사회사업을 통하여 고아와 무의탁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에 진력하였다.

[최병렬]안양 근명학교와 박순천 여사(2019.08.01)

이야기보따리/자료

근명학교의 역사
근명고등학교는 1967년 10월 5일 학교 설립인가(1학급)를 받아 학교법인 '근명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사태현 선생, 초대 교장으로 이종범 선생이 취임한다.
근명고등학교에 개교에 앞서 근명중학교가 먼저 개교하는데 1962년 3월 14일 재단법인 '근명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후 1962년 3월 14일 초대 이사장 사태현 선생 취임과 1962년 3월 17일 근명중학교 설립인가(각 학년 2학급)에 이어 1963년 03월 10일 초대 교장으로 이종범 선생이 취임한다.
학교 연혁 등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근명학교는 개교 당시 학교가 안양시 석수동 안양보육원내에 있었다.
이는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안양시건축사회와 공동으로 지난 2018년 10월 6일 140차 탐사로 안양예술공원 일대 근대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안양보육원 강당 건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또 근명중학교는 개교 당시 남녀가 입학했던 남녀공학으로 1회부터 9회 졸업생까지 남녀가 학교를 다녔는데 10회 부터 여학생만 입학하면서 1973년 3월 근명여자중학교로 개명됐다가 2009년 3월부터 다시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다시 근명중학교로 게명되었다.  

근명중학교가 오랜기간 여자중학교로 인식되면서 초기 졸업생들, 특히 남학생들은 근명중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였지만 이들 기수는 그 어느 기수보다 우애가 두텁고 동창모임도 활동적으로 60대가 넘는 지금도 모임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근명학교는 1969년 들어 안양5동 현재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하는데 1971년 11월 11일 제 2대 설립자로 이영주 선생이 취임한다.
근명학교는 1972년 2월 12일 해암 박순천 이사장과 3대 교장으로 이말영 선생이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한다. 박순천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 1야당 여성 당수를 역임한 원로 정치인으로 박순천 여사가 은퇴 후에 재단 이사장을 맡아 육영사업을 시작하자 학교 명성이 전국에 빨리 퍼진 것이다.
근명학교는 1973년 3월 1일 근명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한다. 당시는 은행은 물론 기업에서 회계를 담당하려며 주산, 부기, 타자 등이 필수적인 시절로 서울에서는 서울여상이, 경기도에 근명여상이 대표할 정도였다.
이후 업무환경이 컴퓨터 처리로 바뀌면서 상업고등학교는 학교이름을 정보(산업)고등학교로 바꾸게 되면서 근명여자정보고등학교로 개명했다가 남녀 공학이 되면서 2019년 근명고등학교로 다시 개명된 것이다.

 

근명학교와 박순천여사
근명학교 이사장을 지낸 박순천 여사는 한국 정치사에서 남성정치인도 하기 어려운 제1야당 당수까지 지낸 정계의 거목으로 최고의 ‘여걸’이자 ‘박 할머니’로 불렸던 인물로 정치 분야뿐만 아니라 농촌계몽과 여성인권운동도 활발히 펼쳐 여성사에도 족적을 남겼으며 1983년 1월 9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8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박순천 여사는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는데 마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인 1919년에는 3·1 운동과 연루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과 연대하여 마산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된 것이다.
박순천 여사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50년 제2대 국회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 당선되면서 부터다. 제3대 때는 낙선했으나, 4·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제6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으로 서울 마포에서 당선된다. 제7대 국회에서는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전국구를 포함해 5선 의원으로 우리의 정치사에서 여성정치인으로는 첫 손에 꼽히는 박순천 여사는 20년 가까운 정치인 생활을 민주당 총재, 민중당 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등을 지내면서 독재권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도 대화정치를 지향해 제6대 국회 때 한·일협정과 월남파병문제로 정국이 경색되자 소속의원들의 의원직사퇴서를 들고 국회의장과 담판을 벌이고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으로 정국을 정상화시키는 등 강인함과 함께유연함을 보여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의 유세장에서 자유당을 향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국회의원을 한다는데 당신들은 고작 거수기(擧手機) 밖에 못한단 말인가”라며 나무랐다고 한다.
박 여사는 1965년 5월 당시 제1야당인 민정당(民政黨)과 제2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이 합쳐 창당한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가 됐으며 같은 해 6월에 열린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초대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69년 정계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박 여사를 ‘누님’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일화는 친화력을 갖춘 정치인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최승원]안양 호계동(虎溪洞)의 변천과 건축&도시이야기(2019.07.22)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여계봉]봇짐장수 넘던 옛길 관악산 무너미 고개(20190917)

이야기보따리/자료


[여계봉의 산정천리] 관악산 무너미 고개
색시처럼 다소곳이 숨어서 산객을 반기는 무너미 고개
 

입력시간 :  2018-11-19 18:03:54 , 최종수정 :  2018-11-27 00:22:53, 편집부 기자  

http://www.bukgunews.com/news/10873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632m)은 전형적인 골산(骨山)으로, 송악산, 화악산, 감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의 하나다. 악(岳)의 명칭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져, 바위의 강한 기운 때문에 예로부터 화산(火山)으로 불려온 산이다. 역사의 격변기마다 구설에 오르내리는데 기자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바위산으로만 여겨진다. 산자락은 넉넉하며 맑고 깨끗한 계곡이 7부 능선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수기(水氣)가 넘치는 산에 화기(火氣) 운운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관악산이 거느린 주능선, 팔봉능선, 육봉능선의 산줄기 때문에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부드러운 언덕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조용하고 은밀한 이곳에 예쁘고 얌전한 색시를 감추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고개 같지 않은 고개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곳이어서 만추에 물들어가는 오늘도 관악산 자락을 찾는다.

 

서울대 입구에 있는 관악산 공원 시계탑에서 산꾼들을 만나 ‘관악산 공원’ 현판이 붙은 커다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여기서 널찍한 도로를 따라 가면 호수공원 입구에서 길이 갈린다. 삼성산은 직진, 왼쪽으로 가면 무너미 고개 방향이다. 호수공원을 지나면 왼쪽으로 시원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제법 수량이 많은 완만한 계곡 옆에 난 산길을 따라가면 아카시아 동산을 지나 널찍한 공터인 제4야영장에 닿는다.

 

​만추에 젖어가는 관악산 자락길. 무심히 단풍잎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결에 솔향이 묻어 있다.

 

여기서 길이 갈리는데, 왼쪽은 관악산 정상 연주대 방향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으로 간다. 인적이 드문 무너미 고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이윽고 삼막사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숲길 옆 개울 물소리와 단풍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내는 소리는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어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약수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한 자태로 산객을 기다리는 무너미 고갯마루에 이른다. 관악산 공원 입구에서 여기까지는 가파른 길 하나 없이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듯 고갯마루에 오른 것이다.

 

​제4야영장에서 무너미 고개로 가는 이 길은 인적도 뚝 끊겨 호젓하기 그지없다.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관악산 산길이다.

고개 정상은 참으로 볼품없다. 지형 상으로 보면 옛날 관악과 안양의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짐을 바리바리 메거나 머리에 이고 넘어간 고개다. 무수히 많은 옛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며 흘렸을 땀과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산길일진대, 오가며 쌓아놓은 돌무더기도, 잠시 숨을 돌릴 작은 공터도 없다.


이 조그마한 고개를 통해 관악산과 삼성산이 연결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두 산이 만나면서 서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무너미'라는 땅이름에는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의 예스러움과 멋스러움이 담겨져 있다. '무너미'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논에 물이 알맞게 고이고 남은 물이 흘러넘쳐 빠질 수 있도록 만든 둑을 말한다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물넘이'로 해석할 수 있고, 지금도 물을 넘치게 하는 시설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지명에서의 무너미는 지형적으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물이 넘어간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그 어원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수유(水踰)리'는 '무너미'의 '무'를 '물(水)'로 보았고, 음성 평곡리의 '무너미'는 한자로 '군월티(群越峙)'로 표기하여 '무'를 '무리', '뭇'의 의미로 보았다. 또한 산(山)의 고유어로 '미, 뫼, 메, 매' 등이 있는데, 단양 대강 금곡의 '매나미재'의 예처럼 '무'의 어원은 '뫼(山)'로서 '뫼너미〉매너미〉무너미'의 변화 과정으로 유추해 볼 때 '산을 넘어가는 고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기자가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다보면 세 설이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숲은 가을이 장관이다. 온갖 수목이 오색으로 물들고 특히나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햇살에 빛날 때 왜 단풍의 상징성을 단풍나무가 가져갔는지 알게 된다. 고개 정상에서 학바위 능선쪽으로 길을 잡고 산길을 따라 가면 저 아래 계곡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관악산 팔봉능선에서 출발한 물이 삼성천으로 흐르며 내는 소리다.

 
팔봉능선에서 삼성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곡물. 삼성천은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시흥계곡을 따라 흘러 안양천으로 합수된다.

삼성천을 따라 울창한 숲속으로 평탄한 하산길이 이어진다. 신발을 벗고 맑디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면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던가.

 

막걸리 마시는 공터 위로 한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본래 내 것이 있었던가. 한 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놓아 버리는 연습을 익혀 두어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는데 이게 참 힘들다.

 

하산하는 숲길 도란도란 길섶에 웅크린 풋풋한 풀들이 얼굴을 내민다.

​나무 그림자 내린 맨흙바닥은 푹신하고 맑은 한지처럼 순수하다.

​산길이 해맑아 온몸으로 산과 섞인다. 여기에 그 어떤 욕심도, 고뇌도, 번민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무구하고 아름답다. 길이 도(道)이고 도가 길인 이유가 이와 같다.

 

계곡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온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을 한참 내려오면 서울대 수목원 후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대 수목원은 2017년 2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단, 뒷문만 개방하기 때문에 관악산을 하산하는 경우에만 수목원을 지나서 안양예술공원으로 나갈 수 있다. 수목원이 막혔을 때는 후문 오른쪽에 난 우회 등산로를 자주 이용했는데, 삼성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이기에 수목원 길을 포기하고 발품을 조금 팔면 이제까지의 평탄한 코스와 달리 제법 가파른 오르막과 아기자기한 암릉을 즐길 수 있고, 관악산 주능선의 장엄한 암봉도 조망할 수 있다.


수목원 안의 저수지에 떨어진 늦가을의 나뭇잎새. 기약 없이 떠나는 운수(雲水) 신세다.

수목원을 지나 이 길이 끝나는 안양예술공원에는 트레킹을 마친 산꾼들을 위한 보너스로 전통 유물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예술공원 입구 주차장 한쪽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수동 마애종(石水洞磨崖鐘)이다. 마애종이란 암벽에 종을 새긴 것으로, 석수동 마애종은 남서향의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와 그 안의 종을 새겨 넣고 스님이 그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했다.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작품으로 가치가 높으며, 종의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수동 마애종은 인근의 중초사지(中初寺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볼 때 고려시대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을 지나 삼성천을 따라 관악역으로 가는 도중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가교리에 있는 무너미 고개 전설 하나가 떠오른다.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이 정해지면 금강 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논산시 노성면의 초포(草浦)를 지나 논산천과 합하여 강경포(江景浦)로 들어가서 초포에 배가 드나들게 된다고 한다. 이는 정감록 부류의 이야기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세상이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곧 카오스(CHAOS) 상태이다. 이것은 코스모스(COSMOS)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언도 결국은 혼란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질서가 바로 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초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무너미 고개의 전설들은 서사구조가 단순하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도 이런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지 모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최승원]안양 석수2동(石水洞)의 변천과 건축&도시이야기(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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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군포(軍浦), 당동(堂洞)과 건축이야기(2019.07.05)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