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0717]봇짐장수 넘던 옛길 관악산 무너미 고개

이야기보따리/자료


[여계봉의 산정천리] 관악산 무너미 고개
색시처럼 다소곳이 숨어서 산객을 반기는 무너미 고개
 

입력시간 :  2018-11-19 18:03:54 , 최종수정 :  2018-11-27 00:22:53, 편집부 기자  

http://www.bukgunews.com/news/10873


​서울의 조산(朝山)인 관악산(632m)은 전형적인 골산(骨山)으로, 송악산, 화악산, 감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의 하나다. 악(岳)의 명칭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져, 바위의 강한 기운 때문에 예로부터 화산(火山)으로 불려온 산이다. 역사의 격변기마다 구설에 오르내리는데 기자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바위산으로만 여겨진다. 산자락은 넉넉하며 맑고 깨끗한 계곡이 7부 능선까지 이어지는데 이렇게 수기(水氣)가 넘치는 산에 화기(火氣) 운운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관악산이 거느린 주능선, 팔봉능선, 육봉능선의 산줄기 때문에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부드러운 언덕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조용하고 은밀한 이곳에 예쁘고 얌전한 색시를 감추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고개 같지 않은 고개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곳이어서 만추에 물들어가는 오늘도 관악산 자락을 찾는다.

 

서울대 입구에 있는 관악산 공원 시계탑에서 산꾼들을 만나 ‘관악산 공원’ 현판이 붙은 커다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여기서 널찍한 도로를 따라 가면 호수공원 입구에서 길이 갈린다. 삼성산은 직진, 왼쪽으로 가면 무너미 고개 방향이다. 호수공원을 지나면 왼쪽으로 시원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제법 수량이 많은 완만한 계곡 옆에 난 산길을 따라가면 아카시아 동산을 지나 널찍한 공터인 제4야영장에 닿는다.

 

​만추에 젖어가는 관악산 자락길. 무심히 단풍잎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결에 솔향이 묻어 있다.

 

여기서 길이 갈리는데, 왼쪽은 관악산 정상 연주대 방향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곳으로 간다. 인적이 드문 무너미 고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이윽고 삼막사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숲길 옆 개울 물소리와 단풍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이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내는 소리는 마음을 일깨워 머릿속을 비어주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약수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한 자태로 산객을 기다리는 무너미 고갯마루에 이른다. 관악산 공원 입구에서 여기까지는 가파른 길 하나 없이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듯 고갯마루에 오른 것이다.

 

​제4야영장에서 무너미 고개로 가는 이 길은 인적도 뚝 끊겨 호젓하기 그지없다.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관악산 산길이다.

고개 정상은 참으로 볼품없다. 지형 상으로 보면 옛날 관악과 안양의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이 짐을 바리바리 메거나 머리에 이고 넘어간 고개다. 무수히 많은 옛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며 흘렸을 땀과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산길일진대, 오가며 쌓아놓은 돌무더기도, 잠시 숨을 돌릴 작은 공터도 없다.


이 조그마한 고개를 통해 관악산과 삼성산이 연결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두 산이 만나면서 서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무너미'라는 땅이름에는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의 예스러움과 멋스러움이 담겨져 있다. '무너미'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논에 물이 알맞게 고이고 남은 물이 흘러넘쳐 빠질 수 있도록 만든 둑을 말한다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물넘이'로 해석할 수 있고, 지금도 물을 넘치게 하는 시설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지명에서의 무너미는 지형적으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물이 넘어간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그 어원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수유(水踰)리'는 '무너미'의 '무'를 '물(水)'로 보았고, 음성 평곡리의 '무너미'는 한자로 '군월티(群越峙)'로 표기하여 '무'를 '무리', '뭇'의 의미로 보았다. 또한 산(山)의 고유어로 '미, 뫼, 메, 매' 등이 있는데, 단양 대강 금곡의 '매나미재'의 예처럼 '무'의 어원은 '뫼(山)'로서 '뫼너미〉매너미〉무너미'의 변화 과정으로 유추해 볼 때 '산을 넘어가는 고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기자가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다보면 세 설이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숲은 가을이 장관이다. 온갖 수목이 오색으로 물들고 특히나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햇살에 빛날 때 왜 단풍의 상징성을 단풍나무가 가져갔는지 알게 된다. 고개 정상에서 학바위 능선쪽으로 길을 잡고 산길을 따라 가면 저 아래 계곡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관악산 팔봉능선에서 출발한 물이 삼성천으로 흐르며 내는 소리다.

 
팔봉능선에서 삼성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곡물. 삼성천은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시흥계곡을 따라 흘러 안양천으로 합수된다.

삼성천을 따라 울창한 숲속으로 평탄한 하산길이 이어진다. 신발을 벗고 맑디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면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던가.

 

막걸리 마시는 공터 위로 한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본래 내 것이 있었던가. 한 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놓아 버리는 연습을 익혀 두어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는데 이게 참 힘들다.

 

하산하는 숲길 도란도란 길섶에 웅크린 풋풋한 풀들이 얼굴을 내민다.

​나무 그림자 내린 맨흙바닥은 푹신하고 맑은 한지처럼 순수하다.

​산길이 해맑아 온몸으로 산과 섞인다. 여기에 그 어떤 욕심도, 고뇌도, 번민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무구하고 아름답다. 길이 도(道)이고 도가 길인 이유가 이와 같다.

 

계곡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온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을 한참 내려오면 서울대 수목원 후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대 수목원은 2017년 2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단, 뒷문만 개방하기 때문에 관악산을 하산하는 경우에만 수목원을 지나서 안양예술공원으로 나갈 수 있다. 수목원이 막혔을 때는 후문 오른쪽에 난 우회 등산로를 자주 이용했는데, 삼성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이기에 수목원 길을 포기하고 발품을 조금 팔면 이제까지의 평탄한 코스와 달리 제법 가파른 오르막과 아기자기한 암릉을 즐길 수 있고, 관악산 주능선의 장엄한 암봉도 조망할 수 있다.


수목원 안의 저수지에 떨어진 늦가을의 나뭇잎새. 기약 없이 떠나는 운수(雲水) 신세다.

수목원을 지나 이 길이 끝나는 안양예술공원에는 트레킹을 마친 산꾼들을 위한 보너스로 전통 유물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예술공원 입구 주차장 한쪽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수동 마애종(石水洞磨崖鐘)이다. 마애종이란 암벽에 종을 새긴 것으로, 석수동 마애종은 남서향의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와 그 안의 종을 새겨 넣고 스님이 그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했다.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작품으로 가치가 높으며, 종의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수동 마애종은 인근의 중초사지(中初寺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볼 때 고려시대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을 지나 삼성천을 따라 관악역으로 가는 도중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가교리에 있는 무너미 고개 전설 하나가 떠오른다.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이 정해지면 금강 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논산시 노성면의 초포(草浦)를 지나 논산천과 합하여 강경포(江景浦)로 들어가서 초포에 배가 드나들게 된다고 한다. 이는 정감록 부류의 이야기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세상이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곧 카오스(CHAOS) 상태이다. 이것은 코스모스(COSMOS)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언도 결국은 혼란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질서가 바로 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초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무너미 고개의 전설들은 서사구조가 단순하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관악산 무너미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도 이런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지 모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최승원]안양 석수2동(石水洞)의 변천과 건축&도시이야기(2019.07.05)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군포(軍浦), 당동(堂洞)과 건축이야기(2019.07.05)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안양1번가 건축물 이야기(2019.06.27)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안양 귀인(貴人)동 변천과 건축물 이야기(2019.06.26)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안양 2동 변천과 건축물 이야기(2019.06.14)

이야기보따리/자료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자료]의왕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

이야기보따리/자료

의왕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있으며 면적은 53,986㎢(경기도의 0.5%) 인구 15만 6,763명(2016년 12월)의 아담한 전원도시이다.

시의 경계는 6개 시군과 접하고 있어, 동쪽은 성남시 용인시, 서쪽으로 안양시 군포시, 남쪽으로는 수원시 안산시, 북쪽으로는 과천시와 접하고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고천동에 있다.
의왕시는 인구밀집 지역인 아파트나 주택지역이 청계산 줄기의 백운산과 모락산, 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산 자락에 휘돌아 감겨있어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산은 청계산, 백운산(567m), 바라산(428m), 모락산(385m), 오봉산(205m)으로 이어져, 작고 아담한 산들로 이우러져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안양천(安養川)과 학의천(鶴儀川) 청계천 학현천(鶴峴川) 등이 있고, 백운호수와 왕송호수 등은 관광휴양지로서 유명하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모락산에는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와 사당이 있으며,청계산에는 고려 충신인 조견이 송동를 바라보면서 애통해 했다는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가문인 왕곡동(旺谷洞) 청풍김씨(淸風金氏) 재실에는 검재 김유 선생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17, 현재 경기도박물관 위탁)이 있고, 청계사에는 청계사소장목판(淸溪寺所藏木板, 경기도 유형문화재 135)이 있으며, 청계산에서 백운호수에 이르는 길은 과천 서울대공원과 연결되는 전국순례자연경관도보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 의왕 역사

· 1895년 광주목에서 광주군으로 개칭
· 1914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 수원군 의왕면으로 변경
   왕륜면(旺倫面)
   내왕륜(內旺倫), 오마동(五馬洞), 오주동(全朱洞), 내곡동(藤谷洞), 평사천(坪沙川), 통산동(通山洞), 곡사천(谷沙川), 고정동(古井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징계동(澄溪洞), 교동(校洞), 가동(柯洞), 묘동(墓洞), 신촌(新村), 궁촌(宮村), 창촌(倉村), 신기촌(新基村), 괴동(槐洞), 상장의(上莊義), 하장의(下莊義)
   의곡동(儀谷面)
   학현동(鶴峴洞), 의일외동(義逸外洞), 의일내동(義逸內洞), 손동(蓀洞), 포일동(浦一洞), 포이동(浦二洞), 상청계동(上淸溪洞), 하청계동(下淸溪洞)


참고

월암리와 초평리는 안산군(安山郡)의 월곡동(月谷面)에 속하였으며, 지명은 월암리(月岩里)와 상초평(上草坪)과 하초평(下草坪)이었다.
1912년 현재 안산군(安山郡) 월곡면(月谷面) 월암리(月岩里)에는 월암동(月岩洞), 일이동(一里洞), 대대동(大垈洞)이 있었다. 초평리(草坪里)는 상초평과 하초평이 있었다.


· 1915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학의리(鶴儀里 : 학현동, 의일외동), 포일리(浦一里 : 포일동, 포이동, 갈산동), 내손리(內蓀里 : 갈산동, 손동, 의일내동), 청계리(淸溪里 : 상청계동, 하청계동),
   오전리(五全里 : 오마동, 전주동, 등곡동), 이리(二里 : 창촌, 징계동, 교동, 가동, 묘동, 신촌, 궁촌, 신기촌), 왕곡리(旺谷里 : 내왕륜, 곡사천, 통산동), 삼리(三里 : 상장의, 하장의, 괴동),
   고천리(古川里 : 고정동, 평사천, 고고리, 내곡리)
· 1924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왕곡리(旺谷里), 오전리(五全里), 고천리(古川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학의리(鶴儀里), 내손리(內蓀里), 포일리(浦一里), 청계리(淸溪里)


참고

초평리(草坪里)와 월암리(月岩里)는 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에 속함


· 1936년 수원군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을 합하여 일왕면(日旺面)으로 개칭
· 1949년 화성군(華城郡) 일왕면으로 변경
· 1963년 시흥군(始興郡) 의왕면(儀旺面)으로 변경
· 1980년 시흥군 의왕읍(儀旺邑)으로 승격
· 1983년 초평리와 월암리가 시흥군 의왕읍으로 편입, 의왕읍 동부출장소 설치
· 1989년 의왕시(儀旺市)로 승격
· 1993년 시청소재지 변경
· 2003년 12월 행정동고천동(고천동, 왕곡동) 부곡동(이동, 삼동, 월암동, 초평동) 오전동(오전동) 내손1동(내손1동) 내손2동(내손2동, 포일동) 청계동(학의동, 청계동)
· 2007년 의왕시 한자명칭 변경 (儀旺市 ⇒ 義王市, 법률제8244호)

 

의왕의 지명유래

의왕시의 유래는 광주목에 속했을때 의곡면의 의자와 왕륜면의 왕자를 따서 의왕면이라 하였습니다.

 

● 청계동

<여지도서>의 광주 의곡면은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고 더 이상 세분된 마을명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후 광주 의곡면은 손동, 갈산동, 포우동, 청계동, 학현, 어일리로 되어 있어 '청계동'이 등장된다. 이 청계는 아마도 현재 청계산을 옛날에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등 문헌이나 청계사사적기비의 기록에서 보듯 '일명 청계산'이라 하여 과천 관악산을 '우백호'라 칭한다면 '우청룡산'에 해당하므로 이 청룡산 계곡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 靑溪 또는 淸溪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농골

청계마을의 '농골'은 봉담→의왕→과천고속도로 중 과천터널 바로 옆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을 말한다. 고속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려 마을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으나 서쪽보다는 동쪽 남은 집들이 훨씬 많다. 이곳은 조선초기 음성박씨 후손인 박연 (진안 현감 역임)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하던 곳으로 아호가 노은이므로 '노은골'로 칭했던 점차 음운탈락과 변동으로 '농골'로 변한 땅이름으로 여겨진다.


● 옥박골

'옥박골'은 한직골에서 청계사로 가는 초입길 왼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마을 이름이다.<始興郡誌>下(p. 986) 지명유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었으므로 '옥박골'이라 했는데, 그후 옥이 철거되면서 그 주변 일대를 '옥터밭'이라 부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직골

일석 선생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한직골'은 '한적골'이 변한 이름이라 하였다. 이곳이 옛날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으로 인덕원에서 광주쪽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로 '한적골'이었는데, 발음의 편의상 '한직골'로 부른다는 것이 다. 현재 청계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의 동남쪽 부근 망르이 바로 이 마을로 이곳에 전해지는 지명유래는 이곳은 예로부터 지대가 높아 논은 별로없고 들판이 사질토(沙質土)이므로 어떤 곡식도 잘되지 않고 가물면 이내 작물이 旱災를 입어 시들고 말라죽어 '한재골(旱災洞)'이라 흔히 불리어 왔는데 현재는 '한직골'로 통칭한다고 밝혀 있다.


● 하우개(원터마을)

'하오개'는 이 고개가 '학고개' 였으나 '학고개>하오개>하우개'로 음운변천에 따라 '하오개'또는 '하우개'개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성당이 있는 마을(청계13통)을 흔히 '하우개'마을로 지칭되기도 한다.


● 벌모루

넓은 들판 모퉁이 마을이란 뜻에서 한자지명으로 '포우리(浦隅理)', 고유어로는 '벌모루'라 칭한다.


● 성고개

벌모루와 이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주위가 마치 성을 에워싼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어 '성고개'라고 불렀을 듯하다. 이미 이 마을은 서울구치소와 성고개 마을 동북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이 말을에 큰 나무(느티나무) 두그루가 있어 마치 숲을 이룬 것과 같으므로 '임이(林二)'라 칭했다는 것이다.


● 학의동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하기 전에는 두 개의 큰 자연부락명인 학현동과 의일외동이 있었는데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두 지명의 첫글자를 각각 취하여 '학의리'로 개칭하게 되었다. 학현동은 크게 샛터말(미나리 골), 학현(웃말), 점말(아랫말)의 자연마을이 있고 학의2리에 해당하는 의일동은 '오른계, 속말, 북골, 양지말'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 의일

현 의왕시 학의2동을 지칭하는 전통적 명칭은 '의일'이다. '의'를 발음할 때 단모음화시킨 발음을 대충 한자 '어'자로 취음 하여 표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능안마을(내손1리)

능안은 백운호수 서남쪽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묘지가 있는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임영대군 묘자리가 묘지 후보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효종과 임영대군은 같은 왕족인 관계로 효종의 묘소를 여주로 다시 정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일컬어 오게 되었다.


● 내손동

조선시대 광주군 의곡면의 의일내동, 손동, 가산동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군면동 통폐합시 '의일내동'의 '내'와 '손동'의 '손'자를 따서 '내손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내손리가 되었다. 그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내손리, 다시 1949년 8월 5일 화성군 일왕면 내손리,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내손리, 1980년 12월 1일 의왕면 내손리, 1990년 1월 1일 의왕시 내손동으로 되었다. 현대 내손동은 청계동 관내의 능안마을과는 다른 내손동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 내손동은 과거의 '손골'과 '갈미'는 물론 '민백이'마을 및 포일, 대우아파트 단지를 관할하는 큰 취락을 관장하게 되어 행정동도 둘로 갈라 '내손1, 2동'으로 분동하고 있다.


● 오전동

오전동은 '오마동'의 '오'와 '전주동'의 '전'을 따서 1914년 지명 통폐합시 '오전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로 된후 현재의 '오전동'에 이르기까지 수원군 일왕면, 화성군 일왕면, 시흥군 의왕면, 시흥군, 의왕읍 등의 오전리로 되었다가 의왕시 오전동으로 발전해 왔다.

오전동은 선시대에 광주군 왕륜면의 오마동(五馬洞), 전주동(全朱洞)·등곡동(藤谷洞)의 여러지역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오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오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오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오마동(五馬洞)의 '오'(五)자와 전주동(全朱洞)의 '전'(전)자를 따서 '오전동'이라 불렀으며, 오전동에는 가운데말·뒷골·등칙골·목배미·백운동·사나골·성라자로원마을·오매기·옻우물·용머리·전주남이 등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가운데말

사나골과 뒷골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오매기의 여러취락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운데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백운동 주민들은 이 마을을 '건너말'이라 부른다.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오매기의 자연취락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용머리·뒷골·사나골·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뒷골(後谷)

백운동과 가운데말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後谷)이라 부르고 있으며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사나골·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등칙골(藤谷洞)

의왕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이다. 이곳 뒷산에 등나무가 많으므로 '등칙골'(藤谷洞)이라 부르고 있다. 등칙골은 전주이씨 근령군파(全州李氏 謹寧君派)후손인 이 용(李容 1565.10. 12∼1616. 1. 4, 자는 季偉, 通德郞을 역임)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아들 이정집이 묘하에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 옻우물·전주남이 주민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1·2·3일 중에서 길일을 택해 이곳 뒤에 있는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목배미

용머리 남쪽 길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왕곡동 홍치골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위치하고 있다.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앞의 논이 기름진 문전옥답(문전옥답)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길을 통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곤 했다.

 

백운동(白雲洞)

오전저수지(五全貯水池)밑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백운동'이라 부른다. 경주 김씨와 광주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사나골·건너말(가운데말)·용머리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사나골(山岳谷)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1600년대 초에 문화류씨 하정공파 후손인 유 항(절충장군을 역임)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오매기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산악(山岳)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산악골'이라 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나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라자로원 마을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광복 이전만 해도 이곳은 산야(山野)이었다가, 광복후 서울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소진탁(蘇鎭卓)박사에 의해 폐결핵 요양소가 설치되었다. 그후 1952년 6월 2일 죠지캐롤 안주교에 의해 성라자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복음〉(16, 19-31)을 보면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배를 채우며 살다가 얼마뒤에 죽어서 부활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성라자로 마을'이라 명명한 것이다.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포도원 입구에서 수원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동편으로 보면 '새삶의 예수'석고상이 있고 그 뒤로 십자가가 세워진 아치에는 성라자로원 마을 안내판이 있다. 성라자로원은 나환자의 조기치료와 보호 및 불구 그리고 노령환자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불구환자의 요양과 진료를 실시하고 라자로원 돕기 후원회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은 이경재(李庚宰)신부로, 그는 1926년 2월 9일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여 1951년 4월 3일 서울카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1951)신부가 된 후 해군 종군신부로서 임무를 끝내고 모두 다 외면하는 성라자로원을 자원하여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빈곤과 병고와 한숨만이 맞아주는 라자로원을 위해 헌신봉사한 공로로 1979년 12월 28일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성라자로원은 처음에는 1950년 광명시에 설립되었다가 1951년 7월 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후 1971년 4월 3일 라자로 돕기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0년 후인 1981년 11월 15일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도 아론의 집(1984. 5. 8)과 불구노약자의 집(1986. 7. 14)등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옻우물

유한양행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까지만 해도 전주이씨 근령군파후손 2가구와 김씨등 모두 3가구가 살아오다 그후 성라자로원 관계자들이 거주하면서 6,7세대로 불어 났으나, 1969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엽, 이마을에 사는 이생원의 아들이 피부병을 앓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더니 고맙다는 뜻으로 오전동 133번지에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런데 사시사철 물이 잘 나와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옻으로 인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옻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옻우물'로 했다고 한다. 이우물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변에 주택이 늘어서자 폐정되었으며, 현재는 삼창양행(三昌洋行)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전주남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용머리(龍頭洞)

오매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하천의 물 흐르는 형태가 이곳에 이르러 용의 머리처럼 휘돌아 가므로 '용머리'(龍頭洞)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머리부분은 일제 말엽에 도로를 개설할 때 파손되었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해도 인동 장씨등 불과 서너 가구밖에 안되었다가 1960년대초부터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나골·건너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전주남이(全朱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전주동이라 불렀다. 등칙골과 오매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중엽에 전주동이란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을 부자가 박절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앙심을 품고 마을 뒷산에 혈(穴)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자 이 말을 사실로 안 전주동은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었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전주동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전주남이'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옻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오매기(五馬洞. 五募洞)

오매기는 삼태기처럼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국가의 전란등이 일어나면 피난의 최적지였다. <구한명람> 및 <신구조명람>에는 '오전동'으로 기록.  본래는 전주남이 동쪽으로 고천에서 학의동이나 능안마을로 갈 때, 용머리, 산악골, 윗골, 가운뎃말, 백운동, 목배미, 뒷골, 배운산(백운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 마을은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문씨(文氏)·진씨(陳氏)·광주노씨(廣州盧氏)·마씨(馬氏)등이 각기 1막(一幕)씩을 짓고 살아 '오막동'(五幕洞)이라고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오매기(五馬洞)'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백운동·용머리·가운데말·사나골등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통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산악골

'산악골'은 오매기 마을 입구에서 장고개로 넘어가는 어귀 마을이다. 이 마을 이름은 이제까지 올바르게 알려져 있지 않다. 때로는 '산악골', '사낙골'로 기록하고 있다.


● 고천동

조선시대 광주군 왕륜면 평사면(벌사근네), 고정동(골우물), 고고리(고고리), 내곡동(안골)등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통폐합할 때 '고정동, 고고리'의 '고'자와 '평사천'의 '천'자를 따서 '고천'으로 통폐합하였다.


● 고고리

이 마을은 통미 건너편 현 과천-봉담 고속도로가 경수 산업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의 서편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자로 '고고리' 로 표기하느 자체가 이 마을의 유래를 얼른 알 수 없게 한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이 '에서 연유된 이름임이 거의 확실시 된다.


● 고우물

이 마을은 현 의왕시 남쪽 마을로 이 마을명의 유래는 실제 제보자의 제보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전에는 이 마을이 위치한 오봉산 동남 골짜기에 우물이 있어 '골우물'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이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의왕시에 대한 이름 고찰

'의왕시'는 조선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광주군 의곡면과 광주군 왕륜면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 역시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의해 각각 머리 한자씩 취하여 지명이 완성되었는데 '義王'이 아닌 '儀旺'으로 둔갑되어 등장하였다.


● 백운산

백운산은 높이가 564m인 산으로 광수산에서 북서로 이어진 첫봉우리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와 의왕시 왕곡, 학의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모락산

모락산은 일명 '갈산(葛山)'이라고도 하면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능안과 갈미 및 오전동의 성나자로원과 오매기가 둘러 싸고 있는 높이 385m의 산이다.


● 고분재

고분재는 학의동(청계2통) 속말에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지지대 고개

'지지대'고개는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네)에서 수원시 파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정조 임금이 수원 현륭원 원행에 취해진 거둥이 11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로 3차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1월 26일 환궁하는 길에 잠시 쉬었다. 이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발을 멈춰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환궁하는 자기의 발걸음이 차마 발을 속히 뗄수 없는 심정 이므로 더디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라고 애틋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곳을 '지지대'라 명명하게 되었다.


● 강산(姜山)

의왕시 오전동 오매기 마을 앞 남쪽에 동그랗고 볼록하게 생긴 산이다. 전주 강씨의 선대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고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지며 실은 예부터 '동그란산'으로 불러 왔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오매기의 사나골·건너말·백운동·용머리·목배미·뒷골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고래들

옻우물에 속했던 들로 나븐들 서쪽에 있었다. 고래처럼 큰 들이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나븐들

옻우물 마을회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여m쯤 있었던 들이다. 지금의 성일통상과 현대주유소등이 들어선 곳으로 197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넓은 들이었다.

 

● 되링게들

용머리좌우에 있는 들로 예전에 이곳 개울가에 도롱룡이 많았다고 한다. ※ 도롱룡은 도롱룡과에 속하는 양서류의 하나로 몸이 길이가 15㎝가량인데, 숲·밭 등의 낙엽 밑이나 땅속에 살고 밤에 나와 곤충 등을 잡아먹는다.

 

● 된박골

성라자로원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골짜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 두껍바위

되링게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 마당바위

큰 보식골에서 성라자로원 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음지쪽에 있다. 마당처럼 큰 바위이다.

 

● 미륵재

성라자로원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다 과천가는 구도로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장하고 이곳에 미륵(彌勒)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은 1952년 11월 경 의왕시 내손동 출신인 고금동(高金童 1911년생)씨가 내손동 오리나무골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 범바위

사나골 뒤 모락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병풍바위

백운산 중봉에서 서북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병풍처럼 생겼다.

 

● 병풍산

전주남이 뒤에 있는 산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등칙골·전주남이·옻우물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삼형제바위

전주남이 병풍산에 있다. 바위가 3개 층층이 있어 '삼형제바위'라 부른다.

 

● 어내들(御川坪)

의왕농협 오전분소 주변으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 행차때 이곳 개울가에 머물렀다 하여 '어내갈'또는 '어내들(御川坪)'이라 부른다.

 

● 용바위

용머리와 오매기 사이에 있는 다리옆에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용머리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갔다 놓을 만큼 신성시 하는 바위이다. 속설에는 이 바위가 깨지면 용머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 원골(院谷)

성라자로원 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이 있었다고 한다.

 

● 작은고개(小峴)

오매기 뒷골과 학의동 의일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길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는 교통로였다.

 

● 작은보식골(小甫食谷)

송파원(松派園) 뒤(북쪽)에 있으며 큰 보식골보다 작은 골짜기이다.

 

● 장고개(場峴)

성라자로원 마을과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오매기 사람들이 군포장으로 장(場)을 보러 갈때면 이고개를 이용하였다.

 

● 장승거리(長丞巨里)

유한양행 입구 인근에 예전에 장승(長丞·長牲)이 있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찬우물(冷井)

등칙골 입구 오전초등학교 못미쳐 사거리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매우 차다.

 

● 큰고개(大峴)

오매기 공동묘지에서 학의동 의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의일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큰보식골(大甫食谷)

성라자로원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기름진 옥토여서 인근 주민들의 주식원이었는데, 현재는 성라자로원 마을이 들어서 있다.

 

● 큰자리들

오매기 뒷골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으므로 '큰자리들'이라 부른다.

 

● 퉁소바위(퉁수바위) 큰보식골 양달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조선중엽에 어느 현인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한다.

 

● 평강골(平岡谷)

장 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평하고 오목하게 생겼다.

 

● 함방들(一田坪)

제일모직 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하나의 밭으로 되어 있어서 '한밭들'(一田坪)이라 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부터 '함방들'로 불리우고 있다.

[20190518]5.18민주화운동 39주년, 다시 꺼내 보는 옛 기록

이야기보따리/자료

 

2019.05.18/ #광주 #민주화 #39주년 #자료 #기록 #기억/ 광주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책장에서 꺼내본 5.18 자료들. 기억은 기록을 만들고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광주 자료들을 잘 보관해 줄 만 한 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몇가지가 더 있네요.
1985년 광주교구 정의평화원회가 발간한 <광주의거자료집>, 1988년 광주의거자료집1.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8년 발간한 광주의거자료집2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 대한가톨릭학생전국연합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이 펴낸 연도 미상의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빛바랜 책자에는 역사의 진실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기억합니다...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5.18. 삼가 5.18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승원]안양 6.8동 근현대 건축물 여행 자료(2019.04.13)

이야기보따리/자료

 

 

 

[ 최승원 건축사의 안양6동 소개글 ]

 

< 우리 동네에는 무엇이 인나요? > 修理山 東便동편 마을
安養市 萬安區 안양8동 안양6동 답사

안양지역은 서남부 중심도시로 풍광이 좋은 도시입니다.
시흥군의 군청소재지 안양읍을 거치면서 근현대 공도(工都)로 형성 되면서 좋은 건축이 여럿 존재합니다. 건축사(建築史)에 나오는 김중업 나상기등 유명건축가들이 여러 명 설계 시공 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방치되고 철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3.1 운동100주년기념을 기하여 건축문화를 지속적 답사문화로 이어나가 마을을 재생하고 풍성한 아트시티로 유토피아를 조영(造營)하고자 3.1독립만세 100주년을 기하여 안양 근 현대건축중심으로 ‘건축과 문화’ 답사를 시작합니다.

1차로 수리산 동편자락 안양6동 8동을 갑니다.
수리산은 명당이 많아 7080시 최고의 국내현금 갑부 단사천, 윤필노(안양양조장), 안치상(부흥산업사사장)등이 거주하였고, 안양시청(나상기설계), 시흥군청, 성결대학교, 국립수위과학검역원(이광노설계)등이 근접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이용한 경민식당 설농탕을 냄비에 사다가 집에서 먹기도 한 음식입니다. 90년대는 엄마와 애기 형태의 신병원에 제원컬렉션이 있었습니다.이 지역은 1890년대 지도에 집이 3채 있다가 강점기시 경부선공사용 철도와 공소(公所)가 먼저 생기고, 1.4후퇴시 박수근화백의 가족등 피난민움집이 100여 세대 충혼탑남측아래 자리를 잡습니다. 근 현대는 구 국립가축위생연구소 설치로 안양최초의 석 박사들이 근무하며 주변에 살던 터이다. (5060 오긍선박사 거주) 동덕개발 정덕한사장이 지은 만수원 주택단지가 2개소 있었습니다. 또한 임업시험장이 있어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수위과학농림수산검역원정원-만안구청 녹지 명학공원이 있어 우람한 나무와 더불어 녹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군포에 대한 조사(2019.04.16)

이야기보따리/자료

군포 이야기(건축사 최승원)

 

군포 軍浦
포浦는 강변 해안마을의 뜻이고 (예:永登浦읍)
(서울시 지명사전에서)

당동堂洞 옛날산제를 지내던 당堂(집당)이 있던 데서 이름이 유래
堂山 新黨 舍堂 등은 무속과 관계되는 동리명
경부선 계획시 군포장역 계획이 현위치로 노선변경으로 군포역 형성.
1885년 대원군은 밤새 군포장경유 마산포(화성시 송산면 고포리)로 끌려가 하루를 묵고 청군군함 등영주 1258t 9.1 텐진 도착
수리 산의 위치는 동경 126°50″∼126°55″, 북위 37°20″∼37°24″이고
37도~38도 사이가 전쟁 시 공방이 치열한곳 터키군 수리 산 공격 높이는 469m이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의 명산으로 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며 산곡이 깊었다. 전체 면적 36.155㎢ 중 안양시가 19.5㎢,(54%) 군포시가 10.475㎢,(29%) 안산시가 6.18㎢(17%)를 점유하고 있다.
수리산은 광주산맥을 구성하는 산지 중의 하나로 군포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太乙봉(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슬기 봉(451.5m), 북서쪽으로 관모봉(426m), 남서쪽으로 수암봉(395m) 등이 있다.

 

*군포역 주변 군포 초등학교 이전
*군포장 서편야산에 옹기가마가 있었다, *군포장 북측에 김영림 검정벽돌공장있었다.(7080시)
*군포장 남측에 그릇점. 봉성鳳城리

 

숲은 2002년에는 생명의 숲 및 산림청에서 주최한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수리산유원지와 수리산 삼림욕장이 있는 수리산은 2009년 7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관모봉-여자가 관을 쓰다 김 연하 안양의 양궁 기 보배 배출
동기(冬期)에는 청계산 에서 장작을 해 서울에 팔아 카메라 악기 등 구입- 군포현재부농 농부 김 주호 조부
원주민유지(7080)- 이해천소아과의사 부친은 치과의사.

 

최 승원 건축 작품 (Destruction)
1985년 3대를 위한 L씨 주택 군포원주민 이 해천 의사 댁, 사망후 얼마 있다가 철거되다.- 우리은행 한 불럭 뒤 서 북측
1986년 Lee 소아과의원(군포)1987년 준공 군포제일의원 (의사 이 해천) 산본로 개설시 철거되다. 이 해천 많이 상심하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