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책]마을 아카이브, 이제 안녕 의왕 도룡마을

이야기보따리/자료

2021/ #의왕 #마을 #기록 #아카이브 #도룡마을 #사이다 #더페이퍼/

의왕시 도룡마을 300일간의 기록보고서 '이제 안녕, 도룡마을'이 출간됐다.
의왕시 월암동 도룡마을은 지난 2018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돼 없어진 마을이다. 골목잡지 사이다는 지난 겨울부터 여름 내내 마을을 오가며 주민들이 기억하는 도룡마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제 안녕, 도룡마을'은 우리 삶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도권의 많은 마을이 개발 속에서 사라지는 요즘 기억을 통한 마을 아카이빙 활동은 현재를 기록하는 중요한 실천이다.

이제 안녕, 도룡마을(마을 아카이브 1)
저자 골목잡지 사이다
출판 더페이퍼
2020.12.17. 페이지수352
사이즈 180*260mm
판매가 서적 18,000원

책소개

우리 삶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과 실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수도권의 많은 마을들이 개발 속에 사라지고 있는 지금 기억을 통한 마을아카이빙 활동은 현재를 기록하는 중요한 실천 활동이다.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도룡마을은 2018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되어 사라지게 된 마을이다. 골목잡지 사이다는 지난 겨울부터 여름 내내 마을을 오가며 주민들이 기억하는 도룡마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왔다.
도룡마을은 대부분 주민이 농사를 짓고 살아온 도심 속 농촌마을이다. 서로 아끼고 돌보는 ‘함께’의 가치가 살아있는 마을, 바쁜 농사철에는 품앗이로 고된 농사 일손을 나누고 상을 당하면 함께 상여를 메었던 사람들. 《이제 안녕, 도룡마을》과 함께 마을주민들의 기억을 따라 가다보면 도룡마을의 흙냄새와 꽃이 피고 지는 풍경, 일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만날 골목잡지 사이다

목차

하나. 이제 안녕, 도룡마을
포토에세이
마을의 기억을 만나다
마음에 남긴 풍경

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우리가 도룡마을에서 살았어요
오래된 앨범
오래된 물건이야기

셋. 마지막 농사를 짓다
마지막 농사를 짓다

책 속으로

도룡마을 마을스케치
“여기 저기 산 있었는데 산소도 큰 게 많고 그랬었는데 거기 올라가면 도토리나무, 푸른 나무 하여튼 들꽃이 많았어. 꽃냄새가 아주 팍 나고 아주 그런 곳이 많았었어. 나는 산이 없는데서 시집을 와가지고 거기 올라가면 얼마나 풀냄새가 좋은지 국화 냄새나고. 옛날에 진짜 좋았었어. 이 동네.”- 안종희(79세, 월암 도룡마을 거주)

장승이 지켜주는 마을
의왕시 월암동 도룡마을은 덕성산이 아늑하게 품어주고, 주민에게 풍성한 농작물을 선물처럼 전해주는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덕성산을 지나는 등산객들과 둘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농촌마을의 따뜻함을 보여주는, 도심에서 보기 드문 곳이다.덕영대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면 찾아오는 이를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은 돌장승들이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듬직한 모습으로 세워진 장승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본격적으로 도룡마을로 진입했다.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전해오는 마을, ‘도룡동(道龍洞)’이라 했다는 전설에 기대어 도룡마을이라 불리고 있는 이 마을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과 집을 지키고 살아오는 농부들이 살고 있다.지금은 어린 아이와 젊은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고 60여 채가 안 되는 가구만 남아있어 저무는 노년의 모습 같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에도 청. 장년기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마을 분들을 만나며 그들의 인생이야기 속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2년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당제를 지내고 마을입구에 세워진 장승에게 장승제를 지내는 도룡마을 사람들은 전통을 계승하고 지키는 소박한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농사가 천직인 사람들이 사는 마을
마을에 들어서니 싱그러움을 품은 너른 논과 밭들이 보인다. 과거엔 천수답으로 물이 귀했다던 논에는 어느덧 이삭이 달려 영글기 시작한 벼가 농부의 사랑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밭에는 상추, 참외, 고추, 토마토, 조선오이가 반가운 얼굴로 지나가는 손님에게 말을 건다. 월암오이(조선오이)는 갓이 얇고 아삭아삭 시원해서 인기가 많았다는 소문처럼 인터뷰로 만난 어르신이 정겹게 건네준 오이의 맛은 역시나 소문대로 시원하고 달큰하다.정성껏 키운 밭작물을 인근 부곡도깨비시장부터 수원 영동시장, 안양 남부시장까지 오가며 팔아 자녀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던 어렵던 그 시절의 거룩한 생계이야기, 수원 북중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했던 학창시절 이야기, 당제와 장승제 이야기들 속에서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공동체의 지난 추억이 방울방울 샘솟는다.

이웃사랑의 마음을 담다
마을의 중간인 갈림길에서 덕성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다 보면 월암쉼터가 보인다. 이웃과 나그네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과 휴식을 제공해주는 쉼터는 맞은편에 있는 월암교회에서 마련한 공간이다. 십 여 년 전에는 마을 아이들을 위해 손수 논에 물을 대어 논썰매장을 만들어 주었던 장로님의 사랑 나눔 덕분에 논썰매장에서 신나..

저자 : 골목잡지 사이다
출판사 (주)더페이퍼는 지난 2012년 봄 수원 남수동을 시작으로 동네 문화의 부활과 소통을 위한 '골목잡지 사이다'를 발행하고 있다. 사이다는 골목과 골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그물코다
또 '피난민 이야기', '수여선', '도서관과 나' 경기도 메모리 작업을 진행하는 등 지역 아카이브 활동과 공공예술프로젝트 기획, 공공주택개발지구의 기록화 사업 및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을 통해 사회적 공공서비스 영역을 확장하며 출판을 통한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고 있다..

 

[최병렬]안양문화원 '안양5동 마을지 발간' 모처럼만에 제 역활(2021.03.09)

이야기보따리/자료

021.03.09/ #안양 #책 #도서 #자료집 #안양5동 #안양문화원/ 안양문화원에서 한권의 책이 배송되어왔습니다. 책 제목이 '수리산자락에앉은 냉천.교하마을 안양5동'입니다. 사진제공과 인터뷰 등으로 집필과 자료집 발간에 도움을 주었더니 책을 보내준 것이지요.
재개발로 사라지는 마을 냉천마을과 안양초교 주변 교하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마을자료집인데 안양문화원이 모처럼만에 책다운 책을 발간하고 문화원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책을 받자마자 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마을지발간을 담당했던 학예사에게 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지요.

 

5동마을지를 살펴보니 안양5동의 자연마을인 냉천마을과 교하마을을 중심으로 안양5동 지역의 역사, 마을의 형성과 변화, 주민들의 삶과 문화 등을 문헌 조사, 현지 조사, 구술 조사 등을 바탕으로 역사, 지리, 민속 등 인문사회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집필되었으며, 특히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사라지는 냉천마을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제1부 안양5동의 도시 지리와 도시 공간
제1장 안양5동의 지리적 환경
제2장 도시 지표로 보는 안양5동
제3장 안양5동의 주거 건축
제4장 안양5동의 문화유산
제2부 교하마을의 형성과 변화
제1장 교하마을의 유래와 변화
제2장 교하마을 주민의 생활 문화
제3부 냉천마을의 형성과 변화
제1장 냉천마을의 유래와 변화
제2장 판우물의 쿨(cool)한 기운, 냉천마을 장미아파트
제3장 대형 아파트단지 주민의 생활과 문화
제4장 주거환경개선사업과 사라지는 마을 풍경
제4부 구획화된 공간과 주민 생활
제1장 토지구획정리사업과 1960~90년대 주거지 형성
제2장 안양5동 상업지구와 근린 상권
제5부 안양5동 사람들
제1장 안양5동 토박이 강세일
제2장 안양5동 원로들의 모임 동심회
제3장 안양 유아교욱의 선구자 벧엘유치원

 

즣은 자료집을 내기까지는 기획도 중요하고 휼륭한 집필진의 조사와 연구등이 무엇보다 큰몫을 했다고 봅니다.
아쉬운것은 기록의 중요성을 위해 사라지는 마을의 모습을 지도 또는 일러스트 이미지로 표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안양문화원은 지난 2020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향토사와 지역문화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의 주관 사업으로 마을지 발간 사업을 기획하고 그 첫 대상지로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철거가 시작된 냉천마을이 속한 안양5동을 선정하여 진행하였다네요.
안양문화원이 마을지 발간사업을 이번 한번으로 끝내지말고 재개잘, 재건축으로 사라지고 없어지는 마을과 동네가 많은 안양의 곳곳을 기록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술로 남기는 작업을 우선시하여 계속 이어가는 안양문화원의 활동을 기대합니다....

 

 

[20210216]삼남길, 조선물류의 대동맥

이야기보따리/자료

‘경기도 옛길 역사문화탐방로 사업’(이하 경기옛길)은 제주로(해남로)에 기반하여 조성된 삼남길로부터 시작된다. 경기도가 조선의 간선도로망을 기반으로 하여 옛 조선시대의 길을 자동차가 아닌 두 발로 걸어서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 경기도 옛길이다. 옛 선인의 발자취를 체험한다는 목표 아래 이름도 역사문화탐방로로 정했다. 이번 호에서는 경기옛길사업의 첫 단추인 삼남길을 먼저 소개한다. 참고로 지명에 관련한 이름들은 고유명칭의 혼동이 있을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한자를 병기한다.

1) 경기옛길 삼남길의 기반, 삼남대로(三南大路)의 개념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이후 한양에서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지방으로 통하는 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경기옛길 사업에서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망을 표현할 때 당시의 명칭을 살려 ‘삼남로(三南路)’(또는 삼남대로三南大路)로 표현하며 현재의 도보탐방로를 칭할때는 ‘삼남길’로 부른다. 이 두 노선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삼남로의 원형을 소개한 후 밝히도록 한다. 먼저 삼남길의 기반이 되는 삼남로의 노선을 살펴보자.

도성에서 지방의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숭례문(崇禮門)에서 출발, 이문동(里門洞)-주교(舟橋)-청파역(靑坡驛)-석우참(石隅站)[分岐]-와요현(瓦窯峴)-판전거리(飯廛巨里)-동작진(銅雀津)을 지나 과천방면을 거쳐 수원지역으로 연결되거나 석우참(石隅站)에서 분기(分岐)하여-둔지산(屯之山)-서빙고진(西氷庫津)-6리와 당현(堂峴)-만초천(蔓草川)-습진기(習陣基)-노량진(露梁津)을 통하여 시흥방면을 지나 수원지역에서 합류하여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흥인문(興仁門)을 출발, 동묘(東廟)에서 분기하여 영도교(永渡橋)-왕십리(旺深里)-차현(車峴)-전곶(箭串) 제반교(濟礬橋)를 지나 신천, 송파를 거쳐 충청 일부를 통과하여 동래로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동래로는 또 한강진(漢江津)을 지나 신원점(新院店)-현천점(縣川店)-판교점(板橋店)-험천(險川)과 용인을 거쳐 충청지방 일부를 통과하여 동래로로 연결되는 도로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숭례문을 출발, 동작진, 노량진을 건너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수원방면으로 향하는 해남로나 제주로를 소개한다. 기실 삼남지방으로 가는 모든 대로를 통칭하는 말이 삼남대로였으나 경기옛길 도보탐방로의 첫 노선을 제주로와 호남로로 정하면서 삼남대로의 명칭이 경기옛길 삼남길에 반영되어서 이와 같은 명칭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부산으로 향하는 동래로(또는 영남대로) 기반의 영남길이 별도로 도보탐방로 영남길로 조성되어 영남길은 차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경기옛길 사업에서 삼남길이라고 부르는 삼남대로 기반의 도로는 조선후기 『대동지지(大東地志)』나 『도로고(道路攷)』 등에 의하면 해남로(海南路) 또는 제주로(濟州路)로 불리는 노선 이다.

2) 삼남대로 노선과 길 위의 이야기들

삼남대로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으로 연결된 도로로서 제주로와 해남로가 이에 해당된다. 사실 제주로와 해남로의 노선은 거의 일치하는데 제주도까지 입도(入島)하는 노선은 제주로이며 전라도 해남을 목적지로 하는 경우가 해남로가 된다. 여기서는 삼남로(제주로, 해남로)의 노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길 위에 켜켜히 남아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를 구간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경성-과천 구간 도로이다. 이 구간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을 출발 돈령부敦寧府 전로前路-파자전把子廛 석교石橋-통운석교通雲石橋-종루鐘樓 전로前路-대광동大廣通 석교石橋-소광동小廣通 석교石橋 -동현병문銅峴屛門 전로前路-송현松峴-수각水閣 석교石橋 -숭례문崇禮門-이문동里門洞-청파靑坡 주교舟橋-청파역靑坡驛-석우참石隅站에서 분기하여 와요현瓦窯峴-반전거리飯廛巨里-동작진銅雀津을 건넌 다음 승방평僧房坪과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과천果川에 이르는 길이다.
도성에서 한강을 건너는 방법은 한강의 나루(진도津渡) 설치 이후 여러 갈래였으며 그 중에서 과천 방향(과천로果川路)으로는 동작진(銅雀津)을 건너고, 시흥방면(시흥로始興路)으로는 노량진(露梁津)을 건너게 되었다.

 

이러한 삼남로의 노선은 누가 이용했을까? 평소에는 궁 밖이나 도성 외부로 나갈 일이 많지 않은 것이 조선의 많은 왕들이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도성 밖 행차를 할 때 삼남로의 노선을 이용했다. 선왕들의 능에 참배를 하기 위한 능행차(능행陵行)나 요양을 위한 온천 여행(온행溫行)에 주로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도 특히 도성 밖 행차를 많이 한 인물로는 정조를 꼽을 수 있다. 과천로는 특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인 현륭원顯隆園 조성 이후 화성 능행차 때에 사용된 도로로서 남태령 개척과 더불어 중요한 삼남로의 한 갈래였던 것이다.

삼남로를 이용한 것은 비단 왕실의 행차뿐만이 아니었다. 삼남 대로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오가는 주요 간선도로였기 때문에 양반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해 왔다. 민간 에서 삼남로를 이용한 기록은 판소리 「열녀춘향슈절가」(이하 춘향전) 에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 사랑받는 판소리 작품인 춘향전에는 한양을 나서 삼남로를 이용해 남원까지 도 착하는 경로가 잘 드러난다. 춘향전에 해당 대목은 ‘이몽룡노정기’ 라는 명칭으로 별도로 자주 불리는 주요 대목이다.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집으로 돌아와 부모전에 뵈온 후에 선산에 소분하고 전라도로 내려올 제, 남대문 밖 썩 나서 청파역에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를 얼른 넘어 밥전거리를 지내어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을 바삐 넘어 과천에 숙소하고, 상류천 하류천 대판교 떡전거리 진개울 죽산 자고 천안 김계역 말 갈아타고, 역졸에게 분부하고 금강을 얼른 건너 높은 한길 여기로다. 소개 널 티 무덤이 경천 중화하고 노성 풋개 사다리 닥다리 황화정이 여산 숙소하고 서리 불러 분부하고 전라도 땅이로구나.
- 춘향전 중 이몽룡노정기-

춘향전에는 남대문-청파역-칠패-팔패-배다리-밥전거리-동 작강-남태령으로 남대문부터 현재 서울 지역의 한강 도강(渡江)까지 후 남태령까지의 지명이 상세히 열거된다. 남태령은 도성의 관문으로서 관악산의 영로(嶺路)의 하나이며 새로이 조성된 탐방로인 경기옛길 삼남길 1코스 남태령길의 시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경기도내 삼남대로 노선의 시작점인 남태령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남태령의 유래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언제부터 개척되었는지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한양천도 이후 삼남지방으로 통하기 위해서는 자연지형인 관악산을 넘어 과천방향으로 가는 길목인 남태령이 유력한 교통로로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의하면 남태령은 “高麗稱葉戶峴 轉稱狐峴 通京大路 峴北七里 有牧場古址”라 하여 고려시대에 엽호현(葉戶峴)으로 불리다가 언젠가 호현(狐峴)으로 개칭되었으며 개경으로 통하는 대로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고개로부터 7리 정도에 목장터가 있다고 하였다. 이 목장터는 『경기지(京畿誌)』 3책, 과천(果川) 고적조(古蹟條)에 의하면 “관악산 북쪽 산등성이에 둘레 10리 정도의 토성을 쌓고 여기에 목장을 설치했는데 호환이 자주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고 아랫마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복시 목장을 설치 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남태령은 고려시대부터 개경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간선교통로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복시 목장을 설치할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남태령은 정조시기 현륭원 조성과 화성축성 이후 원행에 따른 연로(輦路)로서 지역주민을 동원하여 길관리(치도治道)에 힘쓰는 등의 중요한 고갯길로서 기능하였다.

다시 삼남대로 노선 이야기로 돌아오면 숭례문에서 남태령까지의 노선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도가 아닌 서울특별시에 속하기 때문에 경기옛길 사업의 대상지는 아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노선이 현 경기도 관내에 위치한 경기옛길 삼남길의 기반이 되는 삼남대로의 노선이 된다. 우선 경기 과천-수원까지의 경로이다.

 

 

경기학광장/

경기문화재단
삼남길, 조선물류의 대동맥 전문보기
경기학광장Vol.1 _ Information & news

ggc.ggcf.kr/p/5f48e5710c724d4130912421

[20201120]가로수에 대한 이야기, 'KBS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

이야기보따리/자료

'KBS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

유튜브 영상보기:

KBS 스페셜 - 서울나무, 파리나무.20190613

https://youtu.be/zU2SDAnAZjM 

 

 

KBS 스페셜 - 너무 차이나는 서울나무, 파리나무.20190613

https://youtu.be/aJsBJyLc16Y

 

KBS 스페셜 - 알렉스 샤이고 박사, 전정의 원칙을 밝히다.20190613
https://youtu.be/gU_OPm_hBj0

 

KBS 스페셜 -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 좁힐 수 있을까.20190613

https://youtu.be/ynuQZml6ULI

 

KBS 스페셜 - 미스터리, 왜 파리나무는 전정 상처가 사라지나.20190613

https://youtu.be/BPS4k5FqRK4

 


사각형 콘크리트 건물로 꽉 들어찬 삭막한 서울의 풍경, 이 도시에 기괴함을 더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도시 곳곳의 나무들이다. 참 볼품없고 측은하다.

반면 파리, 런던 등 선진국의 나무들은 품위 있고 건강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왜 수종이 같은데도, 유독 한국에 서 있는 나무들만 자신의 품위를 잃고 이리도 초라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걸까? 나아가 최고의 도시경쟁력을 꿈꾸는 서울, 그리고 온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망치고 있는 것일까? 이제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나무의 삶과 비밀에 주목한다.

 

“한국에서 양버즘나무 봤을 때는 앙상하고 별로 이쁘단 생각을 못 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이게 같은 나무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이쁘고 자연스럽고 풍성해서 가로수 역할을 잘하는 거 같아요“ -류현심 (런던 거주)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운 양버즘나무와 서울의 양버즘나무.

같은 나무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한반도가 자생지인 벚나무조차 서울보다 파리가 더 건강하고 아름답다.

서울 나무는 자른 자리가 썩어들어 가 고통받고 있지만

놀랍게도 파리나무의 전정 상처는 아물어 새살로 덮여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스터리, 왜 파리나무는 전정 상처가 사라지나

 파리나무와 서울나무의 차이는 서로 다른 ‘전정법’의 당연한 결과다. 잘못된 전정은 나무를 추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반면 올바른 전정은 나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린다. 근대 수목관리학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만들어낸 파리의 전정 비밀을 밝힌다.

 

알렉스 샤이고 박사, 전정의 원칙을 밝히다

근대 수목관리학의 아버지인 알렉스 샤이고(Alex Shigo, 1930-2006) 박사는 30여 년 동안 15,000본 이상의 나무를 절개해보며 올바른 전정법을 연구한 인물이다.

그는 동물의 경우 상처 부위를 치유할 수 있지만, 나무는 상처를 격리하고 살아갈 뿐이라는 CODIT(Compartmentalization Of Decay In Trees , 나무의 부후 구획화) 이론을 발표했다.

샤이고 박사가 이 이론을 통해 밝혀낸 정확한 전정의 위치는 어디일까?

“나무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공부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은 이해를 의미한다.“ -알렉스 샤이고 -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 좁힐 수 있을까

“만약 나무가 올바른 곳에 자연스럽게 원래 모습대로 커간다면 인간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니콜라 쥬브네(아제르리도성 공원 관리자)-

최근, 프랑스는 올바른 전정을 넘어 전정이 필요 없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전문적 아보리스트(수목관리전문가)를 양성하고, 나무의 전생애관리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은 아직도 뒤틀린 수형의 묘목들을 전선주 밑에 생각 없이 심고 있다. 이대로라면 서울나무와 파리나무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KBS 스페셜 <서울나무, 파리나무>는 한국에 심어진 나무들의 절규를 듣고, 수십 년간의 논쟁과 연구 끝에 밝혀진 수목관리학의 과학적 성과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나무의 아름다움과 건강, 품위를 되찾고자 한다.

 

 

 

 

[이진복]100년전 조선지지자료에 산본(山本) 순우리말 지명 '산밋' 확인(20190607)

이야기보따리/자료

 


[군포 역사·문화기행] 산본(山本) 보다 '산밋'으로 
 100년전 조선지지자료에 순우리말 지명 '산밋' 확인 
 군포시민신문/ 이진복 기자  ㅣ   기사입력  2019/06/07 [08:15]  

기사보기 링크: https://www.mediagunpo.co.kr/sub_read.html?uid=8517&section=sc14
 

산본(山本)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1919년 3.1운동과 4.11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100년에서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일제가 만든 지명도 청산하여 고유한 우리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지명(地名)은 특정 지역을 구별하고 인식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붙인 명칭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신앙, 전통과 풍속, 연희와 물산(物産) 등의 실정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지명(地名)은 작게는 우리 삶의 터전인 마을에서 국가까지 걸치는 가장 큰 표상(表象)인 것이다.

1914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명과 지지(地誌) 사항을 조사하여 작성한 지리정보 자료이다. 거기에는 100년 전 사용되던 순우리말 지명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전래의 지명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기 시작하는 1911년 당시의 지리정보 모두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산본(山本)의 순 우리말 명칭은 ‘산밋’으로 되어 있다. 즉 ‘수리산 아래(山底里)’라는 의미이다. ‘산밋’이라는 명칭은 이재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도 ‘山底里 산밋’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총9책) 2책(경기도) 과천현 남면에 “금정리(衿井里), 당리(堂里), 봉성리(鳳城里), 당정리(堂井里), 장간리(章干里), ‘산저리(山底里)’, 부곡리(富谷里) 마을과 함께 호구수 460호, 인구수 1929명(남 807명, 여 1,12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산밋’은 ‘수리산 아래’로 100여 전에 잃어버렸던 순수한 우리 마을의 고유명칭인 것이다. 더구나 수리산은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수리산은 속리산, 칠장산, 청계산, 광교산, 관악산 등 한남정맥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산지 중의 하나로 태을봉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 북쪽으로는 관모봉, 북서쪽으로는 수암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리산은 산자락이 많아서 서울 재상들의 조상 묘소가 많이 있다”고 하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수리산 자락에 있는 군포는 3대 문형(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을 포함 7명의 문형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 집안’인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 묘역과 함께 문익공 정광필(영의정)을 비롯하여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집안’인 동래부원군 정난종(정광필의 아버지), 문익공 정광필(영의정), 동평위 정재륜(효종의 부마)등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20201111]안양의 5-60년대 야사 "희미한기억의편린들"(김정기저)

이야기보따리/자료

 

2020/ #안양 #기록 #기억 #편린 #김정기 #안양초25회 귀중한 책 한권을 선물받았습니다. 제목이 희미한_기억의_편린(片隣)들-"집에 가는길"(발행: 2020.3.1)로 안양초등학교 25회  동창이신 김정기(한양대명예교수) 선생이 동창회 카페( http://cafe.daum.net/anyangkk25)에 올린 글들을 정리해 책자로 낸것인데  6.25 한국전쟁의 기억부터 초등학교시절의 추억,  50-60년이 지난 현재와 과거의 현장 풍경 비교 답사 소감, 한국 과학발전 과정에 대한 소고,  등 다양한 글이 실려있다.  책자를 펴낸 김정기 선생은  이승언의 "안양시 지명 유래집 : 이승언 저(李承彥)"이 안양의 "정사"라면, 내가 여기에 쓴 내용은 "야사"라고나 할까? 우리가 어린세월을 지내온 안양이 어떻게 생겨난지를 잠깐 살펴 보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정기 선생 약력

1944.08 안양에서 출생.
1957.03 안양초등학교 졸업.
1960.03 안양중학교 졸업.
1964.02 안양공업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1969.09 육군 병장 만기 제대.
1971.02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1979.02 연세대하교 대학원 졸업(이학박사).
1979.03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 취임.
2009.08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정년퇴임.

 

 

 

 

 

[최병렬]안양(安養)권역 우체국 연혁(20200923)

이야기보따리/자료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  우체국 연혁 / 사용필    

2018. 11. 30. 8:30


1905년 5월 29일 : 안산(安山)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안산(安山)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16일 : 안산(安山)우편소 설치 (總告133, 1911.5.11) 경기도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1915년 7월 1일 : 안양(安養)우편소로 이전 개칭 (總告148, 1915.6.15) ◈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1941년 2월 1일 : 안양(安養)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1950년 1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개칭

2000년 5월 1일 : 서안양(西安養)우체국 개국 (情通部訓令200, 2000.4.17)

​1995년 9월 1일 : 안양평촌(安養坪村)우체국 개국 (서울廳公1995-111, 1995.8.31) 관인 등록

​2000년 5월 1일 : 안양(安養)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1905년 5월 20일 : 과천(果川)임시우체소 설치(省告442, 1905.8.10)

​1906년 12월 1일 : 과천(果川)우체소 설치 (統告106, 1906.9.26)

​1911년 5월 31일 : 과천(果川)우체소 폐지 (總告157,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과천읍

1911년 6월 1일 : 과천(果川)우편소 설치 (總告156, 1911.5.26) ◈ 경기도 과천군 군내면 관문동

​1941년 2월 1일 : 과천(果川)우편국으로 개칭  (總告109, 1941.1.31) ◈

과천(果川)우체국


​1986년 12월 30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과천문원단지(果川文原團地)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6년 10월 2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과천부림(果川富林)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1997년 11월 10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270708) [과천우면] [KC. U-MYON]

2008년 5월 6일 : 과천우면(果川牛眠)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12월 30일 : 과천중앙(果川中央)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89, 1985.12.18)

                                (171-11) [과천중앙] [KC. CHUNGANG]

1997년 1월 31일 : 과천중앙동(果川中央洞)우편취급소 위탁계약 해지 (서울廳告1997-1, 1997.1.27)

​2009년 4월 6일 : 수원지방법원안양지원(水原地方法院安養支院) 출장소 개소

 


1973년 5월 19일 : 안양4동(安養四洞)우체국 개국

 

1997년 4월 7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소 개국

2008년 5월 6일 : 안양6동(安養六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5년 9월 16일 : 안양관양동(安養冠陽洞)우체국 개국 (서울廳公672, 1985.9.3) 관인 등록

 

1997년 11월 10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소 개국 (서울廳告1997-47, 1997.11.10)

​                                (4310628) [안양새마을] [AY. SAEMAUL]

 

2008년 5월 6일 : 안양(安養)새마을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새마을] [AY. SAEMAEUL]

2020년 8월 3일 : 안양관양2동(安養冠陽二洞)우편취급국으로 국명 변경 (京仁地廳告2020-14, 2020.7.9)

                            [안양관양2] [AY. GWANYANG2]

 

1992년 12월 30일 : 안양귀인동(安養貴仁洞)우체국 개국 (遞告1992-84, 1992.10.1)

                                6급 (4300701) [안양귀인] [AY. KWIIN]

 

 

1992년 11월 10일 :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우편취급소 개소 (遞告1992-94, 1992.10.27)

 

                                (4300839) [안양교도소] [ANYANG CI.]

1996년 11월 1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소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6-83, 1996.10.14)


​                           (4310839)  [안양덕고개] [AY.  TOKKOGAE] 이용자 불쾌감 고려

​2008년 5월 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4년 10월 16일 : 안양덕고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4-16, 2015.9.15)

 

 

2012년 12월 29일 : 안양덕천(安養德泉)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2-10, 2013.1.3)

 


1994년 11월 26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1994-1, 1994.11.26)

 

2015년 6월 1일 : 안양박달동(安養博達洞)우체국 폐국

1992년 3월 30일 : 안양평촌동(安養坪村洞)우체국 (遞告1992-23, 1992.3.30)

 

                              6급 (4300706) [안양평촌] [AY. PYONGCHON]

1995년 9월 11일 : 안양부림동(安養富林洞)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5-113, 1995.9.13)

​                              6급 (4300656) [안양부림] [AY. PULIM]

 


​2001년 8월 20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소 개소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1동(安養飛山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529) [안양비산삼호] [AY. BISAN SAMHO]

2008년 5월 6일 : 안양비산삼호(安養飛山~)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87년 9월 10일 : 안양석수동(安養石水洞)우체국 개국 (安養郵遞局公9, 1987.9.14) 관인 등록

 


1987년 12월 30일 : 안양석수아파트(安養石水-)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석수아파트] [AY. SOKSU APT]

 

 


1986년 10월 2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20, 1986.9.20)

2008년 5월 6일 : 안양양지(安養)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안양우체국 역전(驛前)분국

1971년 1월 4일 : 안양역전(安養驛前)우체국으로 승격 (遞信部令535, 1974.12.28)

 

 

1990년 1월 10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118) [안양진흥] [ANYANG JINHUNG]

2008년 5월 6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진흥(安養進興)우편취급국 재개국 (京仁地廳告2013-1, 2013.1.17)

 

 

​1990년 1월 10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429) [안양충훈부] [AY. CHUNGHUNBU]

2008년 5월 6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충훈부(安養忠勳府)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2011년 12월 21일 : 안양호계동(安養虎溪洞)우체국 개국

 


1983년 12월 27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소 개소 (遞告213, 1983.12.31)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2013년 1월 3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계약해지 (京仁地廳告2012-9, 2012.12.7)

​2013년 2월 1일 : 안양호계1동(安養虎溪一洞)우편취급국 폐국 (京仁地廳告2013-3, 2013.1.22)

 


1987년 12월 30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47, 1988.1.4)

                                (171) [안양호계3] [AY. HOGYE3]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3동(安養虎溪三洞)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90년 1월 10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소 개국 (遞告113, 1989.12.14)

​                              (4300828) [안양호계현대] [AY. HOGYE HYUNDAI]

2008년 5월 6일 : 안양호계현대(安養虎溪現代)우편취급국으로 명칭 변경 (大統領令20601, 2008.2.5)


​1951년 12월 1일 : 중앙청내(中央廳內)우체국 당분간 일반사무취급 중지 (遞公61, 1951.11.24)

                              광화문우체국 승계

중앙청구내(中央廳構內)우체국

1983년 5월 1일 : 과천정부종합청사구내(果川政府綜合廳舍構內)우체국으로 이전 국명 변경

                           (서울廳公502, 1983.4.28) 관인 등록

 


1983년 5월 11일 : 과천정부제2청사(果川政府第二廳舍)우체국 개국

1998년 3월 2일 : 정부과천청사(政府果川廳舍)우체국으로 국명 변경 (情通告1998-17, 1998.2.16)

                            6급 [정부과천청사] [GOVT. KWACHON]

 

 

1977년 7월 1일 : 제132군사우체국 개국 (체기행151.1-20281, 1977.7.15)

2005년 2월 1일 : 안양우체국 제132군사우편출장소로 명칭 변경

[출처] [경인청] 안양(安養)우체국|작성자 강경원  https://blog.naver.com/400251/221409238383 

[최병렬]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2020.08.27)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8경과 안양 자랑거리 49선

각 고장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있다. 안양시에도 8경이 있다. 문화, 역사 등을 아우르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안양8경이다. 수리산과 삼성산, 관악산으로 둘러싸인 안양시에는 도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명소가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안양시는 지난 2003년 안양을 대표하는 명소로 안양8경을 선정한 데 이어 안양시민으로서의 자긍심 고취와 도시경쟁력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 2007년 3월 안양의 자랑거리 49가지 선정에 나서 시민과 공무원 의견을 수렴하고 지역원로, 교수,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6차례 걸친 심사를 거쳐 2008년 1월 28일 개최한 '안양의 자랑거리 심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자연환경 ▲문화유산 ▲문화체육분야 ▲산업경제분야 ▲조형·건축물분야 ▲안양시 우수시책 등 7개 분야에서 49가지를 안양의 자랑거리로 확정했다.

안양 8경중 제1경은 행운이 따르면 멀리 서해낙조도 가능한 관악산 '망해암 일몰', 제2경은 자연 형태의 모습이 이채로운 '삼막사 남녀근석', 제3경은 신도시에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평촌 중앙공원', 제4경은 사도세자 능참배 역사가 담긴 '삼막천 만안교'다.
제5경은 순교 성인의 정신이 담겨있는 수리산 최경환성지, 제6경은 안양유원지에서 예술작품의 보고로 변신한 '안양예술공원', 제7경은 돌을 한켜한켜 쌓아올린 '병목안삼림욕장 석탑', 제8경은 명실공히 안양중심이라는 할 수 있는 번화가인 '안양1번가'다.


제1경 - 망해암 일몰​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에 위치한 망해암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뜻[1]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視界)가 탁 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 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악산의 한 지류인 비봉산 망해암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대림대학교 옆의 관악산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망해암은 대림대학교 입구에서 임곡중학교를 거쳐 망해암까지 약 2km, 걸어서 30분, 자동차로는 7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가 울창하고 길이 좋아 차로 가도, 걸어서 가도 자연과 함께 하는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다. 간혹 내려가는 차와 올라가는 차가 서로 마주칠 때가 있지만 중간 중간 폭이 넓은 공간이 있어 차량 이용에 큰 어려움은 없다.
날 좋은 날 시야가 탁 트인 망해암에 올라 바라보는 시가지와 서해 일몰의 조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망해암은 동안구 비산동에 위치한 전통사찰로 봉은사말사지에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조선 순조3년(1803)에 정조대왕의 모친인 홍대비께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망해암이란 명칭은 암자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 시계가 탁트인 관악산의 망해암에 올라 안양시가지와 서해일몰을 감상하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서해 너머로 붉게 물들어 가고, 갈 길을 재촉하는 도심의 차 소리와 어우러져 회상 속에 빠져들게 하는 곳, 서해의 붉은 바다와 해가 진 후 어둠이 깔린 안양 시내를 바라보는 야경은 망해암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임곡로 245


제2경 - 삼막사 남녀근석​
삼막사 남녀근석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위치해있다. 신기한 자연의 예술품인 남녀근석(男女根石)은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있으며, 1985년 6월 28일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풍화된 2개의 자연 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녀 성기(性器)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근과 여근의 거리는 2m이며 남근의 높이는 1.5m, 여근의 높이는 1.1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는바,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동남아 지역과 일본에도 많이 산재해 있다.
삼막사는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제3경 - 평촌중앙공원​
평촌중앙공원은 각종 조경수와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다목적운동장 등 체육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특히 4계절 테마(봄정원, 여름정원, 가을정원, 겨울정원)를 부여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4계절에 맞게 식재된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여 시민의 정서를 함양시키고 쾌적한 도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도심 공원의 미래상을 조명하며 공원내 수경시설은 207m의 계류와 다양한 형태의 분수 시설(상징분수, 스크린분수, 터널분수, 바닥분수)로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도심 속에 찌들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더 청량하게 해준다.

제4경 - 만안교​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천로211번길 5에 위치해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1795년(정조 19)에 축조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만안교는 길이 약 30m, 폭 약 8m, 높이 약 6m에, 7개의 아치형 홍예문(무지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으며 경기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멀리서 다리 전체를 바라보면 7개의 아치형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시 정조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 시흥 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만안교를 경유하게 되었다.
원래 위치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 쪽 이었으나 1980년 8월 국도 확장을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만안교는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태령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행차로를 닦는데 어려움이 있어, 정조가 평상시에도 백성들이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도록 명을 내려, 영국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만안교 남단에는 건립당시 세운 만안교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만안교비 축조 당시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되었다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큰 공사였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뜻대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굳건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가 된 ‘만안교 다리 밟기’가 해마다 열린다. 

제5경 - 수리산 성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394에 위치한 수리산 성지는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연 성지이다. 수리산 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며, 전국 각지에서 연중 30,000여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양9동 병목안시민공원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담배촌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있다. 이곳은 하동 정씨를 비롯해 금녕 김씨, 원주 변씨, 청주 한씨 등의 거주지로 183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정착한 천주교인들이 담배를 경작하며 살던 곳이다. 1939년 최경환 성인이 옥에서 순교 후 매장된 지역으로 이후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성지성당에는 주일이면 미사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성당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리산성지가 있다. 수리산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연중 3만 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최경환은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의 아버지이다. 이성례 마리아와 담배촌에 정착, 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파하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 온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최경환은 배교하라는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장렬히 순교하였다. 부인 이성례도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으로 천묘 후 다시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25년 교황 성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위치 안양시 안양동 병목안로 394


제6경 -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일대에 위치해있다. 안양예술공원은 안양유원지의 새로운 이름으로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주변의 전통사찰 및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어 과거 수도권의 휴양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안양의 명물로 이름을 떨쳤던 포도가 오가는 이의 미각을 돋우어 주던 곳이다.
안양예술공원은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주변에는 안양사, 염불암 등 고찰과 중초사지 당간지주, 석수동 마애종 등의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고 안양박물관과 김중업박물관, APAP(안양예술공공프로젝트) 예술작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인공폭포, 야외무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물이 맑아 물놀이하기에도 좋고 계곡 옆에는 수영장이 개설되어 있어 여름철 휴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안양예술공원의 중심도로인 예술로를 따라 올라가 산으로 진입하면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진행으로 설치된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다. 스탬프 투어도 가능하며 스탬프 리플렛은 주변에 있는 안양박물관이나 안양파빌리온, 김중업박물관에서 받을 수 있다.
이곳의 대표 예술작품인 전망대는 네덜란드 작가 MVRDV의 작품으로 삼성산의 등고선을 연장하여 산의 높이를 확장한 전망대로, 이곳에 올라가면 안양시를 비롯한 안양예술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다가오는 여름, 주말 나들이로도 제격인 안양예술공원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예술작품 감상하면서 더위도 날리고 이색적인 분위기도 느껴보자.
위치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2


제7경 - 병목안 산림욕장 석탑​
병목안 산림욕장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75에 위치해있다. 이 석탑은 병목안을 상징해 주면서도 수리산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한 병 모양의 석탑! 양쪽에 조화롭게 병모양으로 쌓아 올린 탑은 주변의 쓸모없는 돌무더기들을 이용해서 자연의 조화와 인공의 미를 살린 수리산 산림욕장의 명물이며 이정표이기도 하다. 석탑이 상징하듯 백영약수터 오르막길에는 돌무더기 곳곳마다 정성을 쌓아 올린 돌탑들이 무수히 쌓여있다.

제8경 - 안양1번가​
안양1번가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139번길 7에 위치해있다. 안양1번가는 1996년부터 매년 10월에 젊음의 도시·패션의 거리 안양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시민들에게 볼거리 제공과 함께 자유와 멋과 낭만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안양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안양1번가’는 안양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안양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안양의 금융과 교통, 상권을 태동시키고, 지역 발전을 이끌었다하여 ‘안양1번가’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평촌 신도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안양의 대다수 젊은이가 모이는 번화가 중의 번화가였다. 안양1번가 입구는 약속장소의 대명사였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단연 일순위였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곳은 많은 젊은이들이 쇼핑과 먹거리, 놀이를 위해 찾고 있다. 또, 3~40대 이상에서는 추억을 위해 찾기도 한다.안양1번가는 메인 거리를 중심으로 가지처럼 옆으로 길들이 나있다. 이 길에는 옷가게와 잡화점 등은 물론 다양한 즐길거리와 먹거리 등을 제공하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게들은 한자리에서 몇 십 년째 영업해 온 곳도 있고, 맛집이나 명소로 소문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도 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점들이 자리한 탓에 원스탑 쇼핑을 즐기러 오는 쇼핑족도 많다. 이들의 시선을 끌고자 유행의 변화도 빠른 편이다. 매년 10월에는 ‘일번가 거리 대축제’가 열려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뿐만 아니다. 안양1번가 주변은 재래시장인 중앙시장과 남부시장은 물론 안양역 등이 자리해 있어 쇼핑과 교통의 편리함까지 더해준다. 거기다 안양1번가 아래는 수많은 상점들이 밀집한 지하상가가 조성돼 있어 또 하나의 거대 상권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안양1번가는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안양 최대의 번화가로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위치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일원
시민이 뽑은 안양 자랑거리 49가지

 

'자연환경' 분야로는 안양을 병풍처럼 둘러싼 관악산, 수리산, 삼성산과 생태하천으로 돌아온 학의천, 서울대 관악수목원, 효성공장 진달래 동산, 병목안 시민공원, 석수체육공원, 석수동 염불암 보리수, 석수동 할아버지·할머니나무 등 10가지가 포함됐다.

'문화유산'으로는 경기도 유·무형문화재인 삼막사 삼층석탑, 생칠장, 북메우기, 삼막사 명부전, 안양사 귀부와 부도, 석수동 마애종, 구 서이면사무소와 비지정 기념물인 평촌 지석묘, 관양동 청동기 유적, 만안답교놀이, 안양날미농악, 안양시민의 소리북, 보물 제4호 증초사지 당간지주 등 14가지가 꼽혔다.

'문화체육' 분야는 안양의 대표적 축제인 안양시민축제를 비롯 예절교육의 메카인 안양예절교육관, 공연장인 평촌아트홀, 안양체육관, 세계대회를 훌륭히 치러낸 안양롤러경기장, 안양을 연고로 하는 프로구단인 안양KT&G 카이츠농구단과 안양한라 아이스하키단 그리고 유명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안양예술고등학교 등 8가지가 자랑거리에 합류했다.

'산업경제' 분야에서는 명학역~평촌역~인덕원역으로 연결되는 안양벤처벨리, 대표적 재래시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시장, 각종 산업기자재를 한데 모은 안양국제유통단지(호계3동), 안양 명품 농산물인 안양포도 등 4가지가 자랑거리에 이름을 올렸다.

'조형·건축물' 분야로는 안양예술공원의 대표적 건축물인 알바로시자홀, 안양전망대, 김중업 디자인 건축물 등 3가지와 '우수시책'에는 안양을 명품 예술도시로 디자인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안양아트시티 21과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등 2가지가 각각 선정됐다.

[최승원]의왕 도심속 부곡철도관사촌 조사 자료(20200825)

이야기보따리/자료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도를 까는 일이었다. 경성을 거쳐 평양, 의주를 지나 만주까지 군사와 물자를 보내는데 철도만큼 시급한 일도 없었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는 경원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함북선 등 국토 곳곳에 터널을 뚫고 철로를 깔아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의 지렛대로 삼았다.

철도가 깔릴수록 종사원도 늘 수밖에 없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가장 거대한 기관이었는데, 1906년 6월 통감국 철도국 시절에는 5400명이었으나 해방 직전 1945년까지 10만6000여명으로 급증했다.

거대해진 기관만큼 ‘철도가족’끼리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각종 후생복지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타 기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후생복지는 철도 종사원에게 제공되는 주거시설인 철도관사나 철도병원의 의료혜택이다.

경성의 용산, 청량리, 수색이나 부산 초량, 대전, 순천, 평양, 강계, 해주 등 전국 철도 교통 요충지에는 수백 동의 대규모 관사 단지가 조성됐다. 이뿐만아니라 역사의 규모에 따라 중규모 단지, 작은 역에는 소규모 단지를 이뤘다. 역장 관사는 단독 건물로 역과 인접하여 따로 지었다. 이러한 단독주택 주거단지는 요즘으로 치면 '타운 하우스'인 셈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택 문화였다.

현재 일제강점기 내내 얼마만큼 철도관사가 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오늘날 거의 소멸됐으며 철도관사가 존재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단지는 가로세로 구획을 잘 나눴고 주택들은 정남향이다. 초창기에 지은 철도노동자 숙소는 막사형의 연와조 목조 가건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돌로 벽을 올린 목조단층에 시멘트 기와를 얻은 일본 전통가옥양식의 근대화된 형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의 전통 난방 시설인 온돌을 가미하기도 했다.

[다크 헤리티지를 찾아] 일제강점기의 '타운하우스' 철도 관사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 또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말한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부설되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은 1943년 지금의 의왕시 삼동 192번지 일대를 철도기지화 시킨후 철도국 종사자를 위한 소규모 신도시를 계획하였고 100여동 200세대의 관사단지(官舍團地)를 조성하였다.
용산에 근무하는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부곡관사로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통근편의를 위하여 1944년 수원역과 군포역 사이에 철도역을 신설했는데 이 역이 부곡역(2003년 의왕역으로 명칭변경)이다.

부곡역은 경부선 수원∼군포 사이에 있는 역원이 배치된 간이정차장으로 위치로는 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였고 철도 거리상으로는 수원∼부곡은 8㎞, 부곡∼군포는 3.8㎞로 당시 의왕 철도관사촌이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후 이후 의왕지역에 철도관련 시설들이 대거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부곡역(현 의왕역)은 1964년 11월2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고, 1967년에는 역구내 인접지역에 남영금속주식회사(한국기계, 현 대우중공업)가 설립돼 의왕시가 철도차량 생산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는 시발점이 된다.
1974년에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철도화물기지 준공으로 의왕시 철도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연이어 철도박물관과 한국철도대학(현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철도공사 인재개발원 등 세계적 수준의 집적화된 철도시설이 들어서 그야말로 의왕시가 철도산업의 요충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철도 관사촌이 조성된 당시에는 넓은 대로변에 좌우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었으나 현재는 도로 폭이 좁아지고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현재 약 35동 정도의 건축물에는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고, 3동 정도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택들은 시멘트 몰탈 벽도 깨끗하고 복원도 가능한 상태로 이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대의 철도관사(鐵道官舍)로 문화재 가치가 높아 시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도시와 건축도 생명체처럼 생노병사한다. 의왕시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건축사로 안양지역 문화찾기와 보존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사료 발굴과 알리기에 앞장서온 시흥군 태생의 최승원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겸임)는 "건축의 나이도 60살이 되면 축하해 주자"며 오래전 부터 부곡역 주변의 철도 (구)관사의 보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부곡역 관사촌은 해방동이(1945년)로 태어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야생초처럼 살아 남아 있다며 태어날 때는 넓은 대로변 좌우로 건축 되었는데 도로 폭을 줄이고 난 개발로 인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모습이라고 느낌을 피력했다.
또한 오래된 건축이지만 시멘트 몰탈벽이 깨끗하고 복원이 가능하다며 "건축도 60살이 되면 수리도 해 주고 주변에서 칭찬도 해 주어야 오래 산다"고 철도 박물관이 철도관사의 부분 복원과 연계될 때 철도 관광의 볼거리가 풍부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부곡역 설치 이후 100년이 흘렀지만 도시의 유산(물)이 몇 개나 남아 있는가? 묻고 의왕시는 Celebration of Cities에 속한다고 문화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의왕시사에 기록된 철도관사 이야기

 

의왕역에서 내려 이정표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도와 관련된 많은 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철도대학, 철도박물관 이정표가 보이고, 철도공무원연수원(중앙연수원)이 있고, 일제시대 때 일본인 철도공무원들의 관사였던 집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인근의 (주)로템은 기관차, 전동차 객차를 생산하는 곳이며, 의왕ICD가 생긴 것도 이러한 철도와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기도내 철도용지 비교하면, 의왕시가 네 번째로 많은 철도용지(130만 1,975.3㎡)를 가지고 있다.8) 이것은 의왕시 전체 면적(5,395만 3,257.1㎡)의 2.4% 차지하는 면적이다.
그러나 의왕시가 철도와 깊은 인연을 짚은 것은 이 면적에서 보이는 비중이 아니라 옛 부곡역 외에도 철도관사가 있기 때문이다.9) 100세대 200호를 지었던 이 옛 일본철도공무원 관사는 현재 정확히 몇 채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부곡중앙길을 올라가며 좌우로 드문드문 보이는 지붕을 볼 수 있다. 이들 관사는 현재 음식점이나 주점으로, 월셋방을 놓은 다가구 임대주택으로 개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사는 사라졌으나 그 터에 새로 지은 연립주택들이 많고 이 길 끝에 이르면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만나게 된다. 중앙길을 올라가며 왼쪽은 1~50호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며, 그 끝에서 다시 내려오며 51~100호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이 옛 일본인 관사에 살고 있는 최재희는 이 관사가 “일본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려고 이렇게 지은 거”라고 한다.
1채 지으면 2가구가 살게 된 거, 이렇게 100호를 지어 200세대가 살았어요, 살기는 반반 짤라서 200세대가 살았어. 일본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 나서 서울 살면 위험하니까 피난집이지. 살기 위해서 지은 거야, (전쟁에) 졌으니까 일본으로 간 거고. 그 때 당시 해방돼서 한국사람이 철도에 다닌 사람들이 산거.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한국철도에 다니는 사람이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산거, 배당은 어떻게 된 줄 몰라도 철도의 각 분야 다니는 사람에게 불하를 한 거지. 살지 못한 사람들은 팔아서 나가고, 철도에 개인에게 팔았는데 철도를 관 둔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팔아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고, 팔아서 빌라 짓기도 하고.10)
일본인의 피난집은 지금 여러 형태로 개조하여 사용되고 있는 모습에서 그만큼의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지만, 최재희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앞뒤로 있는 연립들이나 빌라들과 달리 그의 집 대문은 장미덩쿨로 아치를 만들고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한쪽 귀퉁이에는 국화와 장미들이 자라고 우물이 있었던 자리 뒤로는 감나무가 있었다. 또 한쪽에는 배추와 고추들이 자라는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부곡이 공기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연립, 아파트가 들어와서 공기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 울타리 안만큼은 예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정경이 그대로였다. “이 집에 산 것은 약 50년이 되는데, 그것도 철도 전기계통에 근무하여서 지금의 집을 불하를 받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불하 받을 때 필요한 것 중에 입사증이 있었는데, 내가 산 것만 알지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이 없어. 철도에는 운전·전기 계통이 있어서 그 분야에 ‘너는 몇 채 갖고 있어라’ 배당 한 후 나중에 불하한 거고. 6·25가 나서 몇 채 없어지고 그 나머지는 빌라 아파트가 들어오고. 이렇게 관사를 왜놈들이 피난집으로 지은 거예요. 이거 짓기 위해서 간이역을 지은 거고. 철도공무원만 출퇴근 할 수 있게.
최재희에게 피난집으로 각인된 이 관사는 1960년대 후반, 개인에게 불하되었는데 이것을 관장한 곳은 수원세무서였다. 평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1가구가 보통 130~140평이었다. 1946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부곡으로 내려와 관사에 살았던 단창욱도 당시 관사의 내부에 대해, “관사 1가구는 목욕탕이 있었고, 다다미방이랑 온돌방이 두개 있는 19평짜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호가 두 가구로 46년 당시 전기, 목욕시설, 문화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어요. 일본사람 사용하던 거 그대로. 아침 출근시간엔 역사에서 싸이렌을 울려주곤 했어요”라고 하였다. 이 관사가 생김으로써 간이역이 생겼고, 해방 후 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은 부곡이 중심지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때 관사는 철도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목욕시설과 전기, 전화시설을 갖춘 ‘문화시설’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관사가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예를 들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고장을 집집마다 돌리는 게 가능하였고, “몇 호집이냐?”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 가능하였다. 체육대회가 열릴 때에도 관사를 중심으로 귀속의식이 있어서 중앙길을 중심으로 ‘남관사(1~50호)’, ‘북관사(51~100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철도가 생겨 전기·전화가 들어오면서, 부곡은 중심지가 되었고, 부유층은 관사에 살기도 하였다.11)
1943년 건립된 이 철도관사는 당시 교통국의 중추인 용산·경성지구의 배후기지로서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곡관사의 형태는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고 현관이 측면으로 되어 있다.12) 그리고 서너집이 공동우물을 있었고, 집 앞으로는 작은 도랑을 내어 하수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대체로 객화차 사무소 직원, 철도 전기수선공, 선로보수 관계자, 기차역 근무자, 기관사 등이었다.13)
지금은 여러 가게들과 월세방으로 변해버린 철도관사는 그래도 기와를 올린 지붕과 시멘트를 바른 허름한 벽이 옛 모습을 알게 해준다.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실제 60여 년 동안 부곡 주민의 주택으로서 버텨왔으며, 의왕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주택단지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따라서 사라져가는 관사의 옛 모습은 일제의 잔재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민이 겪은 근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로서 근대문화 유산의 의미가 있으며, 한국철도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며 그 시설이 집적되어 있는 의왕시에서 이는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1부) 중앙로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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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2부) 중앙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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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 탐행기(상편) 중앙로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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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철도관사 탐행기(하편) 중앙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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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군포의왕과천의 선사(先史)·고대(古代)시대 이야기

이야기보따리/자료


선사.고대와 원과천


 

과사모 추천 0 조회 24 06.02.26 16: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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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선사(先史)·고대(古代)와 원과천(元果川)

 

현 과천시 지역에 관련된 선사나 고대의 유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과천 신도시를 개발하는 데에 있어 고고학적 조사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택지를 개발하거나 댐 등을 건설하는 데 반드시 그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사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후의 처리에 대하여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천의 경우는 이러한 조사 및 보고서의 작성이 없이 신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신도시지역 내의 선사나 고대의 유적들이 개발과정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산본이나 평촌에서 신도시를 개발할 때 나온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 지역에 적지 않은 문화 유적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 과천 지역에서도 선사나 고대의 문화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주】1) 다만, 원과천이었던 현 서초구 원지동과 양재동 일대 및 안양시 평촌 지역, 그리고 군포시 산본 지역의 경우에 비추어 과천 지역의 선사와 고대 유적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원과천으로 분류된 지역들은 삼국시대의 율목(栗木)·율진군(栗津郡)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고려시대의 과주(果州)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과천현(果川縣)의 관할에 속하고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도 과천군 상서·하서면(안양시 평촌)·남면(군포시)·동면(서울시 양재동·우면동·신원동)이 있었던 이 곳들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에서 분리되어 각각 시흥군 하서면(평촌)과 남면(산본), 그리고 신동면(원지동·양재동·우면동)으로 관할되게 된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에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우리 역사로 볼 때 그 시기는 매우 적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해도 큰 지나침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불행히도 현 과천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선사 및 고대 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은 위의 지역 사이에 위치했던 현재의 과천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제1절 평촌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2절 산본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3절 기타 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

 

▣ 제1절 평촌지역(坪村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주】4)

○ 1. 개관
○ 2. 평촌마을 지석묘군
○ 3. 신촌마을 지석묘군
○ 4. 기타 지석묘
○ 5. 귀인마을 백제 주거지

 

▣ 1. 개관

현재 안양시에 편입되어 있는 평촌 신도시 개발지구는 1914년 과천이 시흥군에 폐합되기 이전까지는 삼국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과천의 일부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의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과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의 협소한 지형인데 비해 비교적 넓은 개활지로 선사시대인들이 주거지로 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평촌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부터 5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주】2) 두 차례의 조사는 평촌지구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지표의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어 실시된 것으로, 주택단지 조성에 앞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그나마 원과천 지역의 선사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모두 13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은 평촌산(坪村山) 동북쪽 논에서 발견된 6기, 신촌(新村)마을 입구의 구릉 정상부의 5기, 평촌산 남서쪽 기슭의 1기, 귀인(貴仁)마을 안쪽 구릉의 1기이다. 그리고 귀인마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住居址) 유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신도시의 택지개발을 위해 실시된 조사였으므로 조사 후에 유적들을 현장에 복원하여 보호하지 못하고, 지석묘 중 일부는 경기도에서 건립중인 도립박물관의 전시용 유물로 옮겨 가고, 귀인마을 지석묘는 명지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신촌마을 지석묘는 평촌신도시내의 중앙공원에 복원되도록 결정되어 지석묘와 그 유구(遺構)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산본 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山本里)로 불리웠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서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그 시기는 매우 짧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다. 불행히도 현 과천 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으나 원과천 지역에 선사 및 고대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현재의 과천 지역에도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2. 평촌(坪村)마을 지석묘군

이곳의 지석묘는 인덕원(仁德院) 4거리에서 군포(軍浦) 방향으로 약 1㎞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의왕시(儀旺市) 포일(浦一) 주공아파트단지 서쪽 약 200m 지점에 6개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해발 약 80m의 구릉지가 있다.
【지도】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1) 제1호 지석묘

  화강암인 덮개돌(蓋石)의 크기는 150×85×30∼40㎝이고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3개의 성혈(性穴)이 있으며, 사방에는 매끈하게 다듬어 치석(治石)을 한 흔적이 있고, 남동쪽 모서리는 정(釘)으로 깨뜨린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의 유구(遺構)는 할석(割石)들이 결실되는 등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형을 찾아 복원한 결과 유구의 길이는 약 230㎝이며, 폭은 40∼50㎝의 규모로 성인(成人)을 신전장(伸展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하부에 토광(土壙)의 흔적은 없었다.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북쪽 2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그 크기는 220×150×30∼40㎝의 규모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2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의 유구는 석관(石棺)으로 55∼80㎝의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판석(板石) 6매(枚)를 깔아 놓았다.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생토(生土) 위에 판석으로 된 석관을 구축한 후 덮개돌을 덮은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평촌마을 제2호 지석묘 하부구조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북쪽 약 2.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6개의 지석묘 중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덮개돌 위에 170×110×25∼40㎝의 석괴가 얹혀 있었는데, 이 석괴는 제5호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 지석묘의 덮개돌은 440×210×40∼50㎝의 대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하나의 성혈이 있었으며, 하부 유구로 3개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주석곽(主石槨)으로 보이는 제1호 석곽은 덮개돌을 받치는 4개의 지석(支石) 사이에 있었는데 할석을 연결시켜 벽석을 만들고 내부를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크기는 250×60㎝ 정도로 성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곽의 남쪽에 있는 제2호 석곽은 크기가 135×55㎝ 정도로 판석을 장축 방향으로 양쪽 벽석에 걸쳤으며, 양쪽 끝은 판석 2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석곽은 크기로 보아 아동용이었거나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특수한 매장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첫번째 사례이다. 덮개돌의 동북쪽에 있는 제3호 석곽은 크기가 140×45㎝이며, 할석이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제2호 석곽과 같이 세골장용이었거나 아동용 석곽으로 보이며,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간 할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과 민무늬토기[無紋土器] 파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사진】평촌마을 제3호 지석묘 하부구조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370×290×40∼50㎝ 규모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매장터가 발견되었다.
  제1호 유구는 덮개돌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100×40×50㎝의 규모로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로 보아 세골장을 했던 유구로 추정된다. 제2호 유구는 제1호 유구의 동쪽에 있는데, 토광을 판 후 그 위에 할석을 얹은 모습으로 토광의 크기는 길이가 120×50∼70㎝, 폭이 40∼50㎝의 규모이다. 제3호 유구는 제2호 유구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모양이나 덮개돌에 눌려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제4호 유구도 토광의 규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제4호 지석묘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유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서 가족들이 사망한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한 세골장식 가족묘로 추정된다.

  5) 제5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75×50×15∼20㎝ 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4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을 들어낸 후 할석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덮개돌도 그 규모로 보아 유구 위의 덮개돌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제3호 지석묘 덮개돌에 올라가 있던 석괴가 여기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6) 제6호 지석묘

  제1호부터 5호까지의 지석묘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00m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하여 송유관 등 시설물이 있어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7) 출토 유물

  평촌마을 지석묘군에서는 몇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형토제품(原形土製品)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직경 4.4∼5㎝, 두께 1.4∼1.5㎝의 크기로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나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민무늬토기 조각들은 제3호와 4호 지석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이 곳에 있는 지석묘의 연대 추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간돌화살촉도 제3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6㎝, 폭 1.2㎝의 크기이다. 날의 한쪽은 떨어져 나갔으며, 가운데가 도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제6호 지석묘의 덮개돌 하단에서 발견된 숫돌은 길이 12.1㎝, 폭 7.2∼4.1㎝ 크기로 땅에 박아 놓고 사용하던 숫돌로 추정된다. 돌도끼는 제6호 지석묘에서 2개가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길이가 11.1㎝, 폭 5.5∼8.5㎝, 두께 0.6∼1.4㎝의 크기이며 몸체의 중앙부에 자루를 고정시키는 홈이 있다. 같이 발견된 돌도끼 조각은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 3. 신촌(新村)마을 지석묘군

  신촌마을은 안양남국민학교에서 평촌 신도시 건설지구 쪽으로 약 500m 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발굴·조사 후 평촌단지내에 들어설 중앙공원에 이전·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모두 4개의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도】신촌마을 지석묘군

  1) 제1호 지석묘

  신촌마을 지석묘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340×250×30∼40㎝ 정도이며, 성혈이 하나 발견되었다. 지석묘가 위치한 구릉은 지표밑 10∼15㎝ 아래에 부식 암반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에 하부 구조가 시설되어 있다. 덮개돌 밑의 주 유구 외에도 덮개돌 주위에서 유구가 2개 더 발견되었는데, 서쪽의 석관유구는 형태가 완전하였으나, 석관 남쪽의 유구는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석관의 규모는 80×60㎝에 깊이가 30㎝정도로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덮개돌 아래의 유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나, 덮개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의 바닥조각과 간돌화살촉, 숫돌이 발견되었다.
 【사진】신촌마을 지석묘 유적 개석 노출 상태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서남쪽 약 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174×110×30∼40㎝로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5°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할석을 이용해 석곽(石槨)을 만들었던 것 같으나 훼손되었다.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남동쪽 약 3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언덕 정상부에 덮개돌이 거의 노출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185×155×20∼30㎝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위에 3개의 성혈이 있었으며, 사방에는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에는 90×30㎝정도 크기의 반월형(半月形) 판석 2매가 놓여 있는데, 이외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매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약 6m쯤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90×25㎝이고 장축은 동-서에서 북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산의 경사에 의해 덮개돌이 미끌어지면서 하부구조는 훼손된 듯 하며 30㎝ 정도 크기의 할석 2개만이 남아 있었다.

  5) 출토 유물

  간돌화살촉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약 7.7㎝로 날과 날개 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숫돌은 역시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5.7㎝, 폭 3㎝, 두께 1.5㎝의 규모이며 사용으로 인한 마모흔적이 뚜렷하다. 민무늬토기의 바닥 조각은 민무늬토기 제작양식상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닥에서 그릇의 배쪽에 연결되는 부분이다.

 

  ▣ 4. 기타 지석묘

  평촌마을 및 신촌마을의 지석묘균 외에 평촌지구 발굴조사에서는 2기의 지석묘가 더 발굴되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인(貴仁)마을 지석묘

  평촌동 365-3번지 뒷산의 정상부에 있는데 주민들에 의해 ‘신선바위’라고 불리웠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75×110×20∼30㎝ 규모이고 7개의 성혈이 있었다. 지석묘는 산 정상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덮개돌 밑에서 아무런 시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석묘는 현재 명지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갈산(葛山)마을 지석묘

  경수산업도로에서 군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안(大安)여중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여 m쯤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지석묘가 있다. 이 곳은 신도시 중앙공원의 끝자락 일부이기도 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05×20∼25㎝로 장축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에서 유구 등 하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 5. 귀인(貴仁)마을 백제 주거지

  평촌 신도시 개발을 위한 명지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지석묘들과 함께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주】3) 이 주거지는 귀인마을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쯤 떨어진 산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표조사시 타제(打製)석기가 흩어진 채 여러 점 발견된 곳이었으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조사과정에서 백제주거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백제시대 주거지는 온돌구조를 하고 있는데, 온돌은 할석들이 4줄의 석렬(石列)을 형성하고 있다. 석렬 사이의 골에는 숯가루가 깔려 있고 돌에는 불을 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솥을 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북쪽으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백제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토기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시 집을 세웠던 기둥자리와 함께 저장고(貯藏庫)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귀인마을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지표면으로부터 30∼50㎝ 정도 깊이의 움을 판 후 온돌시설·부엌·저장고 등을 갖춘 것이었다. 바깥 기둥내의 집은 지름 4.5m 정도의 원형이며, 면적은 25.25평방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3점으로 초기 백제시대의 토기로 보이는 승석문토기의 파편 1점과 곁면을 마연한 흑색토기 파편 1점, 그리고 돌도끼 1점이다.
 【사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지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평면도

 

  ▣ 제2절 산본지역(山本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

  산본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써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 1. 산본지구 지석묘
     ○ 2. 산본지구 삼국시대 고분군


  ▣ 1) 골안 지석묘군

  골안은 군포의 산본 주공아파트 1단지 우측으로 당성사(堂成寺)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의 구간이다. 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논이 보이는데, 논의 중간 쯤 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골안[內谷]이란 말에서처럼 수리산에서 뻗어 내린 2개의 작은 능선 사이에 있다. 현재에는 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리산의 밑부분이 파괴되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줄기가 없어졌다. 또한 산본 신도시 개발로 인해 그 지역에 10m 쯤 땅을 돋우어 우성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사진】골안 지석묘군 근경

  (1) 1호 지석묘
  해발 45m의 계단식 논에 위치하는데, 덮개돌은 장축이 남-북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5㎝, 너비 140㎝로 약간 긴 타원형이고 두께는 50㎝ 내외이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 점토층이었으며, 덮개돌 하부의 중앙과 남쪽 부분에서 할석들이 노출되었다. 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자연적인 유실로 유구가 상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검출된 유물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4m쯤 떨어진 논두렁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길이 180㎝, 너비 85㎝, 두께 30∼50㎝의 규모로 부정형이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석질은 화강암이고 둘레를 치석하였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의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교란층이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 2) 광정(光亭)마을 지석묘군

  광정마을 지석묘군은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능선의 하단부에 있는 계곡의 삼각지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 2동 345번지의 밭에 위치한다. 유적 뒤편으로 산본중학교가 있으며, 옆쪽으로는 옐림복지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방향 약 70m 사이에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기가 조사되었다.

  (1) 1호 지석묘
  유적의 가장 서편에 위치하는데, 광정마을 지석묘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265㎝, 너비 140㎝, 두께 50∼55㎝의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약 40°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은 지반의 경사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온 듯 한데, 덮개돌의 동북쪽에서 하부 구조로 보이는 할석이 노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훼손 상실되고, ‘U’자 모양의 석곽 형태만 확인되었다. 복원된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폭 80㎝ 내외로 추정된다.
 【사진】제1호 지석묘 석관 노출상태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동북으로 약 40m 떨어져 위치한다. 길이 100∼200㎝, 폭 50∼100㎝ 내외의 석괴 5개가 모여 있는데, 중앙의 돌은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3호 지석묘와 합쳐 모두 7개의 석괴가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5개의 석괴 중 남쪽에 있는 장축방향 동-서인 장방형의 석괴가 주석괴로 추정된다. 이 주 석괴의 규모는 길이 196㎝, 폭 93㎝, 두께 37㎝였다. 5개의 석괴를 모두 옮긴 결과 2개의 석곽이 노출되었다. 이 지석묘는 별개의 2개 지석묘 유구가 있었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석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약 3m 지점에 2개의 석괴가 마주 고인 듯이 서 있는데, 큰 것은 길이 210㎝, 폭 151㎝의 크기이며, 작은 것은 148㎝, 90㎝의 규모이다.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6°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교란되었고, 덮개돌의 동편 바닥에 100×70㎝ 규모의 판상할석이 노출되었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5m 쯤 떨어져 위치한다. 덮개돌은 4쪽으로 쪼개져 있는데, 규모는 길이 154㎝, 폭 100㎝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가량 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5) 5호 지석묘
  4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19m 떨어져 있다. 광정의 지석묘군 중 가장 평평한 덮개돌로 이루어졌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66㎝, 폭 145㎝의 크기로 타원형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하부구조는 발견되지 않았고, 덮개돌 밑에는 홍수의 영향으로 보이는 토사층이 있으며,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지석묘도 홍수 등의 영향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된다.

 

  ▣ 3) 문화촌(文化村) 지석묘군

  문화촌 지석묘군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에서 다시 남으로 뻗은 중간 지맥의 해발 55m 지점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동 산1∼2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전주 이씨 묘역이 서쪽에 위치하며, 지표면은 남쪽으로 경사진 사면을 이루고 있다. 주위에 지석묘의 덮개돌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럿 분포하는데, 이 중에서 지석의 흔적이 뚜렷한 4기가 되었다.

  (1) 1호 지석묘
  구릉 사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80㎝, 두께 20㎝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고, 타원형이다. 둘레에는 치석이 되었던 흔적이 완연하였으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m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폭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사진】문화촌 제2호 지석묘 개석 노출상태

  (3) 3·4호 지석묘
  2호에서 북쪽으로 5∼10m 떨어져 위치한다. 3호는 크기 120×80㎝ 규모의 돌 위에 210×150㎝ 크기의 석괴가 겹쳐 있는 모습이고, 4호는 210×130㎝의 크기이다. 석질은 모두 편마암이며, 치석에 의해 깨어진 모습이 확연히 구별되었다. 3호 지석묘의 하단에서 지석으로 보이는 판석이 발견되었으나 하부 구조는 교란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 2. 산본지구(山本地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군(古墳群)

  산본 지역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고분군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기 신라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된 산본 지역의 고분은 모두 9기였으며, 그 구조는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혼재해 있었고, 당시에 사용된 토기 등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의 위치는 군포시 산본동 산 1∼2번지이며, 안양과 군포의 시계를 지나는 34번 국도의 우측에 있는 해발 60∼90m의 구릉지대의 동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밑으로는 전경부대가 있다. 고분군의 앞면에는 산본천과 안양천이 흐르며 그 주위에 분지형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분 조성 당시에는 이 곳이 매장된 이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전경

  1) 제1호 고분

  조사지점의 구릉 정상부에 노출되었는데,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구조이며 분구(墳丘)는 유실되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석곽 북쪽 분구 기저부에 반원형의 호석(護石)시설이 남아 있는데 남쪽의 호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길이 80∼90㎝의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장축은 남-북향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 있다. 석곽의 바닥에는 길이 80㎝, 너비 60㎝, 두께 15㎝의 판석 2장을 깐 시상대(屍床臺)가 설치되었다. 유물로는 북벽과 시상대 사이에 놓인 판석 위에서 인화문유개합(印花文有蓋盒)과 점열타인문완(點列打印文碗) 뿐만 아니라 청동제의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출토유물

  2) 제2호 고분

  1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13m정도 떨어진 구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는 거의 유실되어 지표 하 15∼20㎝에서 호석과 석실 4벽의 상단부가 발견되었다. 석실은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는데, 현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연도는 왼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횡혈식석실이다. 호석은 길이 50∼60㎝ 정도의 비교적 면이 고른 돌을 이용하여 서로 겹치게 쌓았다. 이로써 보면 분구의 밑면이 직경 6.4m인 원형분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토기병(土器甁)이 동쪽 시상대의 북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입둘레는 6.7㎝이고 둘레는 8.5㎝이며 밑의 둘레는 8.5㎝, 높이 15.5㎝의 작은 병이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2호 고분 전경

  3) 제3호 고분

  구릉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 5∼10㎝ 아래에서 석곽의 4벽 상단부가 나타나 있으며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으로서 석곽의 평면은 남북 방면으로 긴 축을 둔 장방형이다. 길이 220㎝, 너비 87㎝이고 남아있는 벽면인 북벽의 높이는 80㎝이다. 석곽은 80∼90㎝의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들을 쌓아 구축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인화문병(土器印花文甁)이 출토되었는데, 시상대에 접하여 석곽 북벽과 서벽의 모서리 부분에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크기는 입둘레 10.2㎝, 둘레 17㎝, 밑바닥의 둘레는 10.8㎝이고 높이는 18㎝로 2호 고분의 것보다 약간 크다.

  4) 제4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동편으로 10m 떨어진 동쪽의 경사면에 있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인데, 봉토는 유실되고 석곽의 상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석곽의 경우 지표에서 100㎝ 정도의 장방형 토광을 조성하고 그 안을 막돌과 포갠돌 등으로 쌓았다. 석곽은 폭이 82∼92㎝, 길이 220㎝ 정도, 높이 88㎝의 대형이고 잔존 형태도 양호하며, 주축방향은 남-북으로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지도】산본동 삼국시대 고분군 지형도

  5) 제5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8m정도 떨어진 구릉의 비탈에 있다.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석곽의 남쪽 상단부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곽으로 장방형의 토광 안에 만들어졌다. 남쪽 부분은 파괴되어 소실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로는 서북의 시상대 위에서 토기단지 1점과 왼쪽 어깨부분에서 청동제 허리띠 장식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토기단지는 입구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상했을 뿐 거의 완제품에 가깝다. 검은 회색을 띠고 있고 형태와 바탕흙의 성격으로 보아 백제 계통의 것으로 여겨진다. 입둘레 11.4㎝, 둘레 17.4㎝, 밑둘레 11.8㎝, 높이 16㎝이다.

  6) 제6호 고분

  구릉 남쪽 비탈의 제2호 석실분에서 13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분구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된 상태이다. 석곽 바닥의 전면에는 포갠돌을 한 겹으로 깔아 시상대를 설치하고 있으며, 남쪽 시상대의 경우는 1/3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시상대에서 깨진 점열문토기와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석곽의 평면 구조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약 15도 편제되어 있다. 관뚜껑으로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무뚜껑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60㎝, 폭 110㎝, 높이 106㎝이다.

  7) 제7호 고분

  구릉 사면의 남단에 위치하며, 단애에 걸쳐 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파괴되어 남벽과 서벽을 상실한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150㎝ 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벽을 축조하였다. 북벽과 동벽은 각각 크기 60×25㎝의 돌을 가로로 눕혀서 7∼8단의 높이로 축조하였다. 비교적 면이 고른 석재를 이용하여 벽면이 정연한 편이다. 석곽의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북벽으로부터 43㎝ 떨어져 소형 판석이 있어 시상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제8호 고분

  발굴지의 서편 구릉에 위치하며,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상단 일부가 노출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60㎝ 정도로 낮은 토광을 파고 축조되었다. 4벽은 모두 50∼30㎝ 정도의 큰돌을 포개 눕히고 그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형태로 4∼5단을 구축하였다. 석곽의 바닥에는 남벽 쪽으로 20×15㎝의 판석이 놓여 있을 뿐 시상대는 별도로 축조되지 않았다. 생토를 깍아 만든 바닥에 고운 흙을 깔았으며, 석판은 매장자의 신발 등 유물을 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너비 73㎝, 길이 212㎝, 높이 64㎝이다.

  산본동의 고분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을 이루고 있는 해발 65m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릉지대의 고분군은 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군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나 중부지역에서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찾아질 뿐이다. 고분의 축조형태는 수혈식석곽분(8기)과 횡혈식석실분(1기)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수혈식고분은 지표에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토광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고, 석곽 바닥에 시상대를 조영한 것이다. 그리고 덮개는 나무덮개 형식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횡혈식석실분은 수혈식과 같이 토광을 파고 남벽에 연도를 마련한 평면방식에 가까운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로 2개의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3점의 토기 등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말경에서 신라통일기에 이르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제3절 기타 지역(地域)에서 조사된 지석묘(支石墓)

     ○ 1. 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 2. 원지동 지석묘군

  ▣ 1. 서초구(瑞草區) 양재동(良才洞) 지석묘(支石墓)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양재동·우면동 일대는 원과천의 동면 지역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해 있었다. 이 곳에서 1958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이를 당시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정리해 보기로 한다.【주】5)
 【지도】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위치도

  1) 양재동 지석묘

  양재천 남방 약 100m 지점의 넓은 공터에서 매몰된 채 6기가 발견되었는데, 북방식 지석묘로 추정되었다. 지석묘가 조사된 곳은 현재의 양재동에 속한 거여(巨餘)마을로 지금의 양재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 마을은 ‘게리’라고도 불리웠는데, 조사 당시 이 동네에서는 지석묘를 ‘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고인바위의 준말이며, 동네에서는 년 1회 도장제(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고 전한다.

  2) 우면동 지석묘

  양재동 지석묘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남서쪽 산록에 위치하였는데,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조사 보고되었다. 조사 당시 그 일대에서 ‘고름장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지석 바로 위에 병풍같은 바위가 둘러 쳐져 있었다고 한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00㎝, 폭 300㎝, 두께 50㎝이며, 지상으로 약 70㎝ 높이의 두 개의 지석 위에 놓여 있었다. 지석 밑에는 길이 170㎝, 넓이 130㎝의 석실이 있었음이 조사되었다.

 

  ▣ 2. 원지동(院趾洞) 지석묘군(支石墓群)【주】6)

  원지동의 지석묘군은 현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한강 하류의 양재천 남쪽 지류인 염곡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지동은 조선시대 말기의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하였다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신원동과 분리되어 바람굴·양수리·원터마을의 3개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서 4지구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위치는 한강 하류 양재천의 남쪽 지류인 염곡천을 끼고 청계산의 지봉인 옥녀봉(玉女峰)의 지맥을 따라 해발 40∼60m 능선의 끝부분인 밭 가운데 동북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지형상 광주평원의 서쪽 병풍산이 청계산 기슭에서 동북 방향으로 광주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비옥한 농경지대로 적합하다.
 【지도】원지동 지석묘 위치도

  1) A지구 지석묘군

  원지동의 원터마을 미륵당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지하통로를 건너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0m 쯤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 원지동 350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 3기의 지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1호 지석묘는 고속도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5°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길이 258㎝, 너비 154㎝, 두께 77㎝이다. 주위에서 무공반월형 석도 1점과 긁게 1점이 발견되었다.
  제2호 지석묘는 1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하고 받침돌은 없었으며,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148㎝, 너비 108㎝, 두께 84㎝로 사면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제3호 지석묘는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장축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4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245㎝, 너비 148㎝, 두께 88㎝ 로 비교적 큰 편이다.

  2) B지구 지석묘군

  A지구 지석묘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원지동 336∼7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에 7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7기 중 제6호 지석묘가 제일 규모가 크며, 나머지 중에 5기는 동서로 나열한 모습으로 6호 지석묘를 호위하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4호 지석묘는 제3호 지석묘에서 동북 방향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덮개돌의 북쪽 부분이 묻혀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길이 325㎝, 너비 146㎝ 두께 58㎝로 굉장히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놓여져 있고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30°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그 위에 길이 100㎝, 너비 43㎝의 판석이 있다.
  제5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의 동쪽 끝부분과 맞닿아 있는 상당히 큰 것으로 덮개돌의 밑이 들려 있기 때문에 하부 구조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조그마한 잡석들만 남아 있다. 제6호 지석묘는 제5호 지석묘와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크기도 크고 두껍다. 길이 440㎝, 너비 245㎝, 두께 50∼70㎝로 원지동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크다. 제4, 5호 지석묘와 같이 덮개돌이 들려 있으며 주변에서 석기 몇 점이 출토되었다.
  제7호 지석묘는 제6호 지석묘와 붙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북 방향으로 길이 220㎝, 너비 180㎝, 두께 60㎝로, 다른 것과 비교해 덮개돌 위에 잡석이 많이 쌓여 있어 정확한 외형을 파악할 수 없다.
  제8호 지석묘는 제7호 지석묘의 동쪽으로 2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246㎝, 너비 148㎝, 두께 43㎝로 괴석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5° 정도 기울어져 있으며 지형에 의해 남쪽으로 약 1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제9호 지석묘는 제8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에서 서쪽으로 약 15° 정도 기울어져 있다. 길이 328㎝, 너비 174㎝, 두께 6㎝로 동쪽이 서쪽보다 얇다. 제1호와 같이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제10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23㎝, 너비 134㎝, 두께 25㎝로 불규칙하고 마름모꼴이다. 그 밑에는 10∼30㎝ 정도의 할석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3) C지구 지석묘

  원터부락 미륵당으로부터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고속도로로부터 약 10m 떨어져 동서 450㎝, 남북 500㎝, 높이 150㎝의 괴석이 있는데, 바닥이 비교적 평탄하여 받침돌이 없는 무지석식 지석묘이다.

  4) D지구 지석묘

  경부고속도로의 구 서울톨게이트의 남쪽 1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동서 방향으로 1기가 매몰된 채 발견되었다. 덮개돌은 길이 230㎝, 너비 180㎝, 두께 50㎝로 대부분이 묻혀 있고 동쪽면만 드러나 있다.

  원지동 지석묘군의 특징은 제1, 9, 10호와 같이 외형이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기들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매우 원시적인 모습으로 타제수법에 의해 거칠게 다듬어졌으며, 석질도 석기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날부분이 모두 마멸되어 있었다. 또한 돌칼류는 수확도구로서 손잡이용 끈을 묶기 위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에 주로 사용된 장주형(長柱形)과 즐형(櫛形)의 구멍없는 반월형 석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청동제의 도끼를 모방한 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조사된 지석묘의 형태와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형태와 보아 원지동의 지석묘들은 초기 단계의 남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또한 B지구의 제4, 5, 6, 7, 8호의 지석묘군이 동서로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제6호 지석묘를 가운데에 두고 나머지의 지석묘가 이를 호위하듯이 붙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제6호 지석묘가 신분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묘였을 가능성이 있다.

 【집필자】 編輯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