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81015]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안양지역얘기/사람

 


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안양시민신문]2007. 7. 26

손병학기자 블로그 http://upstart.blog.me/50020167892 

 

“90년의 세월도 나그네길일 뿐 아니겠나”

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전쟁 뒤 손목시계 하나로 재기에 성공해
“나에게 남은 여생은 교회일 돕고 싶어”

 

“일본군으로 갔던 남양군도에서 1년9개월 만에 돌아오던 날이었어. 도쿄에서 하루를 묵고 요코하마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데 구명조끼를 하나씩 나눠주는 거야. 어쩐지 ‘여기까지 와서 죽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일본군으로 끌려가 2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던 스무 살이 갓 넘은 이 앳된 청년은 다행히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안양에서는 귀향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안 나오지만, 너무 기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야.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 쏟아지는 눈물이 내 눈으로 보이더라구”


1928년 개교한 안양초등학교(당시 안양공립보통학교)는 안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초등학교다. 이 학교 1회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경수 옹(1918년 3월17일 생)을 만나게 된 것은 스톤앤워터(관장 박찬응)의 ‘기억프로젝트’ 덕분이기도 했다. 이윤진 큐레이터는 친절하게 섭외까지 도와주었지만, 막상 이경수 옹을 만나려니 덜컥 겁이 났다. ‘90년 동안 살아온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감히 어떻게 써 낼 수 있을까’


안양공립보통학교가 생겼을 때 전교생은 45명에 불과했다. 11살 이상은 2학년으로 그 미만은 1학년으로 편입됐다. 시설이나 교사수도 부족했기 때문에 4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자 긴 나뭇가지에 가마니를 묶어서 흙이나 돌 퍼 나르는 일을 했어. 운동장 만드는 일도 학생들 일이었거든. 온통 빨간 진흙이 묻어서 옷이니 몸새니 형편없었지 모야”


4학년을 마치고 교장의 추천서로 군포초등학교로 옮기면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안양에 통학생이 나밖에 없었어. 전교생 돈을 모아 안양우체국으로 저금하는 일을 맡으면서 풀 깎고 퇴비 만드는 잡일은 면제가 됐어. 허허” 군포초등학교 14회로 졸업한 이경수 옹은 수리산 끝자락 양짓말에 있는 한글서당에 2년을 더 다니게 됐다. “그때 왜 중학교로 가지 않았나 모르겠어. 아무튼 서당을 나온 뒤로 장사를 하고 싶더라구”


당시 이경수 옹의 아버지는 과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안양역 철길 조금 위에 다리가 있었어. 지금은 복개해놔서 모르지. 다리 못미처 둘째 집 과자공장이 우리 집이었어” 설탕배급을 맡기도 한 그의 집에서는 눈깔사탕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걸 받으려 늘어선 줄이 안양역 로터리까지 이어질 정도로 꽤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6.25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니 그 공장은 폭격을 맞아 다 없어져 버린거야” 모든 가족들의 실의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경수 옹은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를 팔아 자전거부터 샀다고 한다.

 

“영등포에 큰 과자도매상에 가서 조금씩 물건을 떼다가 우시장 인근에서 과자를 팔았어. 근데 그 도매상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돈 걱정은 말고 많이 가져다 팔라’고 말하는 거야. 우리 가게를 본적도 없으면서 말이야. 그때부터 조금씩 가세가 일어나기 시작했지” 이후 이경수 옹은 과자도매점 3곳을 가진 것은 물론 롯데라면(현 농심) 대리점까지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게 됐다.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그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됐다. “남부시장에 누가 중국음식점을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됐지. 근데 영 술을 같이 판다는 일이 마음에 걸렸어. 교회에 몸담은 장로가 할 일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 했어” 그는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 등에 개척교회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중국을 비롯해 사이판에도 교회 설립을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나그네 같은 인생 마치면 영원한 나라로 가는 것 아니겠나”


안양제일교회 임칠호 장로는 장학기금명감에서 “이경수 원로장로의 발자취를 찾기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크고 확실해서 한정된 지면에 옮겨 쓰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고 말할 정도다.
안양초 1~8회 졸업생은 35년 전 동창회를 만들어 지금도 2달에 한 번씩 모이고 있다. 2005년에는 효행상을 만들어 100만원의 금액을 시상할 만큼 활동이 활발하다.


“(기억프로젝트)전시회를 하는데 안양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면서 말을 하라고 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나. 다만 새로운 문화 때문에 가정문화가 허물어져 가는데 효행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20181015]군포공립보통학교(現 군포초) 설립자 故 조중완옹

안양지역얘기/사람

 

교육부가 2017년 8월 28일 군포공립보통학교(現 군포초등학교) 설립자인 故 조중완(1879~1942)옹에게 국민교육 발전 유공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고인은 경기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 면장, 군포우체국장, 경기도 평의회원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교육 분야에 이바지했으며, 특히 교육 불모지였던 시흥군 남면에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세워 지역 및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이 인정됐다.

고인은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무관학교를 거쳐 조선육군연성학교 교관(참령)을 역임하던 중 일본군에 편입하라는 강권을 거부하고 경기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로 이주했다.

당시 초등학교조차 없어 교육 불모지와도 같았던 모습에 개탄하여 50% 이상의 사재를 출연하여 7개 교실, 11개 학급의 군포공립보통학교를 1920년 건립했고, 現 군포역사 옆에 사설 우체국을 설립해 지역주민들에게 정보문화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

또한, 시흥시 남면 진흥회장을 거쳐 1916년 남면 면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소득원이 빈약한 지역사회 현실을 개선하고자 농촌 생활환경 개선사업 및 소득 증대사업을 추진하는 등 지속적인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이외에도 남면 농촌개량연합회를 창립하여 조혼·미신 등의 폐풍을 일소하는 대신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위생 향상을 위해 경진회 등 시상제를 도입해 농민들의 의식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태화]군포의 숨은 역사와 일꾼을 소개합니다

2015.01.06]군포신문/ 군포신문 자문위원장

                                                                            

군포의 숨은 역사와 일꾼을 소개합니다

군포시가 시 승격이 되기 전 전신은 시흥군이었다. 경기도 시흥군이 현재의 안양시, 과천시, 광명시, 안산시, 시흥시, 의왕시 그리고 군포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역사에서 없어져 버렸다.
군포시민으로 생활하고 있던 중 우연히 국가상훈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현대사의 주역들을 접하게 되었다. 동위원회 3034호 국가사회유공인 사편에 조중완(趙重完)옹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중완 선생은 본관(本貫)이 경기도 양주이고 출생지는 서울, 생년월일은 1879년 8월 20일이고 대한제국무관학교졸업 조선육군연성학교 참경(오늘의 군 계급으로 소령에 해당) 군포초등학교를 설립, 군포사설 우체국장, 시흥군 남면장, 시흥군 남면진흥회장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조중완 옹은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여 자주독립의 실현을 위해 전 생애를 불사른 인사로 특히 농촌의 생활 환경개선 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통해 개화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화합을 이끌었던 이 땅의 참 애국자이자 숨은 선각자라고 기록됨을 알게 되었다.
조중완 옹께서는 조선의 군인으로 부국강병이 곧 조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신념아래 정예 강군육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 1910년 한일합병을 맞아 일본군에 편입하라는 강권을 거부하고 서울 종로구 가희방(지금의 계동)에서 사시다가 군포시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대한민국의 국민의 뜻에 반하는 침략행위를 강행한 일본이 우리의 성(姓)과 이름까지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잔학무도한 일들을 마구 휘두를 때 조옹께서는 일본군 편입에 동의하지 않고 군포로 낙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포에 배움의 터가 없음을 깨닫고 사재를 출연하여 6개 학급과 교무실을 갖춘 6년제 초등학교를 건립하였다. 또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서신왕래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지역주민을 위하여 사설 우체국을 현 군포역 주변에 설립했다.
한편 시흥군 남면진흥회를 설립해 소득원이 빈약한 현실을 파악하고 농촌 환경 개선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했다. 농기구인 삽, 호미, 쇠스랑, 갈퀴 등을 지원했으며 지속적으로 계몽사업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남면 농촌개량연합회를 창립해 조흔, 미신, 간식, 치주, 연초 등의 폐품을 일소하고 우리민족의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발전 시켰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위생의 향상을 위해 경진대회를 개최하여 시상제를 도입, 농민들의 생활의식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셨다.
평생을 지역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1942.3.12.서거하시니 당시 시흥군 남면장인 양재호(지금의 대야동 거주 양덕부의 아버님)의 제안으로 남면민장(南面民葬)위원회를 구성, 양면장이 장례위원장이 되어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포시의 적은 행정구역의 면적에서 조옹과 같은 지역인사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의 군포시민의 긍지와 군포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런데 1995년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면서 초대 군포민선시장을 역임한 조원극 전 시장이 조옹의 친손자임을 알게 됐다.
조옹의 개화 운동과 지역에 헌신한 그 군포에서 그 손자가 초대 민선시장이라는 역사가 만들어 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80327]文鄕 김대규 시인(1942-2018)

안양지역얘기/사람

 

文鄕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20일 안양시 양지동 946번지에서 태어나 2018년 3월 24일 타계하여 26일 화장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시흥시 논곡동 선영에 묻히기 전까지 살아 생전 70여 평생을 태어나신 곳 안양 양지마을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아왔다.

시인의 아호인 “文鄕(문향)”은 삶과 문학의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하면 ‘김대규 시인’을 말하고, 김대규 시인하면 ‘안양’을 생각나게 할 만큼 文鄕 김대규 시인은 詩와 함께 안양사랑의 한길을 평생 걸어왔다.

김대규 시인은 1960년 첫 시집인 「靈의 流刑」을 상재하여 등단했으며, 1976년에 저술한 「흙의 사상」과 1985년에 발간한 「흙의 시법」을 통해 많은 독자들로부터 “흙의 시인” 이라 불리웠다.

1977년 평생의 스승이신 고 조병화 시인과 함께 출간한 「시인의 편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진솔한 편지글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1989년 한겨레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사랑의 팡세」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한 유명세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중앙문단의 다양한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안양에 남아 여러 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지역 문학 역량들을 모아 안양문인협회와 안양문화원, 안양예총 창립을 주도 하는 등 후진양성과 안양지역 문학의 토대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안양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언론, 상공기업 시정발전 등 다양한 부문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등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김대규 시인이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문안 작품들은 안양시 곳곳에 퍼져 있다. 먼저 안양시청에 설치된 “안양시민헌장비”를 비롯 안양5동 현충탑에 새겨진 “현충탑 진혼시”,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기념탑 헌시”, 평촌도서관 옆 공원에 설치된 “6·25 참전공적비 헌시“, 석수동 ”만안각기“, 안양예술공원 ”안양정기“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품들이 있다.

또 ”안양시민의 노래“와 ”안양시 로고송“ 그리고 애향 동요인 ”여기가 안양이다“와 ”새처럼 별처럼“을 작사했으며 호성초를 비롯 안양시 초, 중, 고, 대학 등의 교가는 물론, 캐피코(주)를 비롯한 안양시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사가(社歌)들도 작사했다. 또 김대규 시인의 대표시인 ”엽서“, ”가을의 노래“, ”사랑 잠언“등 다수의 작품들은 노래로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文鄕 김대규 시인 약력

○ 학력 및 경력

ㆍ경기도 안양 출생(1942. 4.20)

ㆍ1954. 2. 안양초등학교 졸업

ㆍ1957. 2. 안양중학교 졸업

ㆍ1960. 2. 안양공업고등학교 졸업

ㆍ1964. 2. 연세대학교 국문과 졸업

ㆍ1971. 2.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ㆍ시집 『靈의 流刑』으로 등단(1960. 3)

ㆍ안양여고 교사(1964∼1972)

ㆍ10대 시인에 선정(1972. 문학사상)

ㆍ연세대ㆍ덕성여대 강사(1972∼1976)

ㆍ안양상공회의소 사무국장(1976∼1993)

ㆍ(사)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 지부장(1971∼2008)

ㆍ예총안양시지부장(1990∼2000)

ㆍ중부일보 논설위원(1994∼1995)

ㆍ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장(1995∼1997)

ㆍ경기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강사(1996)

ㆍ경기문화재단 자문위원(1998∼2005)

ㆍ안양대학교 겸임교수(1998∼2001)

ㆍ안양예총·안양문인협회 명예회장(2008, 2009)

ㆍ안양시민신문 회장(2002∼2010)

ㆍ안양문화예술재단 이사(2008∼2014)

ㆍ(사)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2010∼ )

ㆍ안양예총 고문

 

○ 저서

 

시집

ㆍ『靈의 流刑』, 흑인사,1960. 3

ㆍ『이 어둠 속에서의 指向』,문예수첩사, 1966. 12

ㆍ『陽智洞 946番地』,문예수첩사, 1967. 7

ㆍ『見者에의 길』, 시인사, 1970. 12

ㆍ『흙의 思想』, 동서문화사, 1976. 5

ㆍ『흙의 詩法』, 문학세계사, 1985. 10

ㆍ『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 해냄출판사, 1986. 5

ㆍ『별이 별에게』, 영언문화사, 1990. 8

ㆍ『작은 사랑의 노래』, 한겨레, 1990. 9

ㆍ『하느님의 출석부』, 한겨레, 1991. 4

ㆍ『짧은 만남 오랜 이별』, 문학수첩, 1993. 7

ㆍ『누가 지상에 집이 있다 하랴』, 술래, 1994. 12

ㆍ『어찌 젖는 것이 풀잎뿐이랴』, 시와 시학사, 1995. 3

ㆍ『흙의 노래』, 해냄, 1995. 4

ㆍ『사랑의 노래』, 해냄, 1995. 4

ㆍ『가을 小作人』, 우인스, 2001. 5

ㆍ『외로움이 그리움에게』, 도서출판 시인, 2010. 9

ㆍ『나는 가을공부 중이다』, 도서출판 시인, 2010. 10

ㆍ『시인열전』, 토담미디어, 2016. 11

 

산문집

ㆍ『詩人의 편지』(공저), 청조사, 1977. 10

ㆍ『詩人의 에세이』, 안양출판사, 1979. 9

ㆍ『젊은이여, 사랑을 이야기하자』, 중앙일보사, 1986. 12

ㆍ『사랑의 팡세』전 4권, 한겨레, 1989. 6

ㆍ『살고 쓰고 사랑했다』, 시인사, 1990. 9

ㆍ『나의 인생, 팡세』, 문학수첩, 1992. 5

ㆍ『사랑의 비밀구좌』, 술래, 1994. 1

ㆍ『사랑과 인생의 아포리즘 999』, 해냄, 1997. 9

ㆍ『늙은 시인으로부터의 편지』, 한강, 2012. 7

ㆍ『시는 내게 과분한 축복이었노라』, 도서출판 시인, 2016. 12

 

평론집

ㆍ『無意識의 修辭學』, 해냄, 1992. 12

ㆍ『안양문학사』, 우인스, 2005. 12

ㆍ『해설은 발견이다』, 종려나무, 2010. 7

 

○ 수상

ㆍ연세문학상(1963)

ㆍ흙의 문예상(1985)

ㆍ경기도 문학상(1987)

ㆍ안양시민대상(1988)

ㆍ경기도 예술대상(1988)

ㆍ경기도문화상(1990)

ㆍ경기도민대상(1992)

ㆍ편운문학상(1994)

ㆍ한글문학상(1996)

ㆍ후광문학상(1998)

ㆍ한국시인 정신상(2001)

 

文鄕 김대규 시인 안양지역 문예활동 내용
 

Ⅰ. 총괄

 

1941년(호적상 1942년) 안양에서 출생한 文鄕 김대규 시인은 고교(안양공고) 졸업기념 첫 시집인 『靈의 流刑』 (1960)을 간행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래, 안양지역에서 다음과 같은 활동을 펼침.

 

「시와 시론」 동인회 주간 (1966~1972)

안양문인협회 창립, 회장 (1971~2009)

관악백일장주관, 주최 (1971~2009)

안양여성백일장 심사, 주관 (1978~2009)

안양여성문인회 창설, 지도 (1978~ )

글길문학회(구·근로문학) 창설, 지도 (1980~ )

안양문화원 이사 및 자문위원 (1980~ )

안양예총 창립, 회장 (1990~2000)

문향동인회 창설, 지도 (1996~ )

안양시민축제 집행위원장 (2001~2004)

「안양문학사」 집필 발간 (2005)

안양문화예술재단 이사 (2008~ )

안양예총, 안양문인협회 명예회장 (2008, 2009~ )

 

Ⅱ. 조형물 문안 부문

 

안양시민헌장비 (안양시청)

현충탑진혼시 (현충탑)

독립유공자 기념탑헌시 (자유공원)

고 윤국노의원 묘비추모시 (청계산)

6·25 참전공적비 헌시 (평촌도서관 옆 공원)

베트남참전용사 기념탑헌시 (운곡공원)

안양정기 (예술공원)

만안각기 (석수동)

노동교육원 준공 기념탑시 (여주)

 

Ⅲ. 작사 부문

 

1. 안양시민의 노래(김동진 작곡)

2. 안양시 로고송

3. 안양시 시승격 40주년기념 합창곡「안양판타지」작사(김준범 작곡)

4. 애향동요 ·여기가 안양이다

·새처럼 별처럼

 

5. 교가 ·안양과학대학교

·호성초등학교

·제일실업고등학교

·호암초등학교

·전진상좀머스쿨

 

6. 사가(社歌) ·풍강금속공업(주)

·캐피코(주)

·삼아약품공업(주)

·대영모방(주)

·광성기업(주)

·삼아알미늄(주)

·한진화학공업(주)

·협동화학(주)

·중앙제지(주)

 

7. 시노래 · ‘엽서’ (노용문 작곡)

· ‘가을의 노래’, ‘사랑잠언’ (최창남 작곡)

· ‘사랑의 무인도’ (조운파 작곡)

· ‘사랑잠언’ (이현섭 작곡)

· ‘구름에 바람에’ (이현섭 작곡)

· ‘사랑이란’ (이현섭 작곡)

· ‘나무’ (최창남 작곡)

· ‘두개의 짐’ (국현 작곡)

 

8. 기타 ·새안양회 회가

·대동문고의 노래

·신영순병원의 노래

[20171227]제68대 안양동안경찰서장에 강대일 총경 취임

안양지역얘기/사람

제68대 안양동안경찰서장에 강대일 총경이 취임했다.

강대일 신임 안양동안경찰서장은 1964년생으로 경문고교, 경찰대학(3기) 법학과를 졸업 후 지난 1987년 경찰에 입문했으며 경찰청 형사국·생활안전국, 제주청 서귀포서장, 주상파울루대한민국총영사, 경찰대 학생과장, 서울청 서대문경찰서장, 경찰청 장비담당관 등을 지냈다.  

 

[20171227]제7대 안양만안경찰서장에 권기섭 총경 취임

안양지역얘기/사람

제7대 안양시 안양만안경찰서장으로 임명받은 권기섭 총경이 12월 27일 만안경찰서 5층 누리마루 강당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권기섭 신임 안양만안서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경안고교와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경기 기획예산계장 △충남청 홍보담당관 △경기 양주경찰서장 △인천 생활안전과장 △경기 의왕경찰서장 △경기 112종합상황실장 △경기 3부 정보과장을 거쳐 등을 거쳤다. 

[20171223]안양소방서 제25대 정요안 서장 취임

안양지역얘기/사람

안양소방서 제25대 소방서장으로 정요안 前 화성소방서장이 취임했다.

 정요안 서장은 1964년 서울특별시 중구 출신으로 1989년 소방공무원 공채로 입문하여 광명소방서 119구조대장, 소방방재청 총무과, 남양주소방서 소방행정과장, 소방재난본부 소방혁신담당 ․ 기획담당, 구리소방서장, 화성소방서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안양소방서장에 부임했다.

 정요안 서장은 한성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소방행정에 대한 조예가 깊으며, 매사 긍정적인 마인드와 남다른 통찰력으로 예방행정뿐 아니라 현장실무에도 뛰어난 지휘역량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70625]안양을 사랑한 '사랑의 팡세' 김대규 시인

안양지역얘기/사람

 

2017.06.25/ #안양 #김대규 #시인 #문인/ 2017 안양문인협회 시화전이 열리고 있는 대동서점에 들렸더니 향토시인 김대규 선생님이 계시네요. 오랫만에 뵙는 선생님을 사진 틀속에 담아 똑딱이로 찰깍했지요.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 오렴."-김대규 시인의 엽서-
이 시를 읽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고향'은 안양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김대규 시인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나 고향인 안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다양한 문학 작품 활동을 왜 온 한국문단의 중견시인이다.
그는 1960년 '영의 유형'이라는 시집으로 문단에 등단해 '양지동 946번지', '흙의 사상', '흙의 노래', '흙의 시법' 등의 시를 발표하는 등 물질화 되어가는 현대문명에 경종을 울리고, 오염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양심선언적인 시들을 발표해 흙의 문학의 상징적인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아호인 '문향(文鄕)'은 삶과 문학의 어머니인 고향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을 의미할 정도로 결코 중앙에 휩쓸리지 않고 평생을 안양 사랑을 주창하며 지방 문단을 벗어나지 않고 올곧 지역에서만 활동해 왔다.
그러한 마음은 책뿐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에 담겨 '안양시민의 노래' 작사, 안양시청의 '안양시민 헌장비', '현충탑 진혼시', 자유공원 '독립유공자 기념탑 헌시', 평촌공원 '6.25 참전 공적비 헌시', 운곡공원 '베트남참전용사 기념탐 헌시' 등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김대규 시인은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문향(文鄕)' 이라는 아호를 만들었는데 이런 나에 대해 안양은 그동안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준 것 같다"고 말한바 있다.
약력
1942년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시집 『영靈의 유형流刑』으로 등단(1960)
연세대 강사, 안양대 겸임교수 역임
한국문인협회 경기도 지회장 역임
중부일보 논설위원, 안양시민신문 회장
흙의 문예상, 경기도문학상, 경기도예술대상, 편운문학상, 한글문학상, 후광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외 다수 수상
시집으로 『흙의 사상』, 『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 『하느님의 출석부』, 『외로움이 그리움에게』 외 다수
산문집으로 『시인의 편지』(공저), 『사랑의 팡세』, 『당신의 묘비명에 뭐라고 쓸까요』 외 다수
평론집으로 『무의식의 수사학』, 『해설은 발견이다』 외 다수

[20170330]제11대 의왕시 노인회 지회장에 윤우태씨

안양지역얘기/사람

임시총회서 48% 지지로 당선 "회원 지위향상과 의왕시 지회 발전에 솔선수범" 약속

 

제11대 대한노인회 의왕시 지회장에 윤우태(72) 전 의왕시 노인회 이사가 선출됐다.
윤 신임 지회장은 지난 23일 의왕시노인회 강당에서 열린 지회장 선출을 위한 임시총회에서 3명의 후보와 경합을 벌여 대의원 108명 중 52명(48%)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윤 지회장은 의왕시 포일숲속마을 1단지 초대 경로당 회장과 지회 이사를 거쳤고 현재는 대한노인복지진흥회 고문을 맡아 활동하며 의왕시의 노인 자원봉사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각 경로당의 회장들과 교감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관내 노인들의 사정에도 밝다는 평이다.
그는 투표 과정에서 “능력 있고 준비된 일꾼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신바람 나는 지회 운영을 펼치겠다.”는 공약으로 대의원들의 호응을 받았다.
윤 회장은 “회원 복지향상과 의왕시지회 발전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직무를 다할 것”이라며 “낮은 자세로 경로당 회장님들을 섬기고, 임기 내에 의왕시 지회를 전국의 244개 지회 및 경기도 내 44개 지회 중 최우수 지회가 되도록 애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70323]50년전 안양을 기록으로 남긴 '닐 미샬로프'

안양지역얘기/사람

 

50년 전 경기도 안양의 풍물과 당시 한국사회의 생활상을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컬러슬라이드와 흑백필림에 담아 이제는 시공을 초월해 매우 귀중한 역사 기록을 남긴 한 이방인이 있다. 그는 '닐 미샬로프'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거주하는 닐 미샬로프씨(Neil Mishalov. 71세)는 1968년 3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주한미군으로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대대)에 우편물 수송담당(전령)으로 근무하며 안양뿐 아니라 서울 광화문, 용산 거리, 한강의 풍경과 인천, 오산 시가지의 모습을 컬러슬라이드와 흑백필림 1천여 장에 담았다.
1969년 한국에서의 근무를 끝으로 전역한 미샬로프씨는 한국에서 촬영했던 사진들을 2002년 개설한 자신의 홈페이지홈페이지(www.mishalov.com)에 올린 것을 웹 서핑을 하던 누리꾼 단호섭씨에 발견되고, 저자가 이를 확인해 언론(당시 인천일보 홍성수 기자)을 통해 처음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그가 필림에 담은 기록들을 보면 까까머리 코흘리개들과 흰 저고리 차림의 동네 아낙, 찧은 쌀을 자루에 담는 한 농부, 남루한 옷차림의 상인들, 하드통(빙과)을 든 소년 등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아내고 있다. 또 거리의 모습, 헬기를 타고 찍은 항공사진까지 매우 다양하다.
당시 안양읍 곳곳의 모습을 가장 많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양유원지 풀장, 안양 시내에 있던 영화관인 읍민관(안양극장), 안양역과 거리뿐 아니라 당시 주민들의 일상 생활상을 사진에 담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게 하고 있다.
특히 읍민관에는 당시 상영했던 영화 "에밀레종"의 대형홍보판이 만국기와 함께 매달려있으며 안양4동 중앙시장(당시 새시장)입구인 신작로에는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파는 리어커장수의 모습과 수리산중턱에 세워진 근명여상의 초창기 건물도 담겨져 있다.
또한 Suck-su Dong village 제목의 갤러리 웹페이지에는 당시 마을 풍경과 함께 노인,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담겨있으며 모심기, 물대기, 쟁이갈기 등 농사짓는 생활상뿐 아니라 안양지역의 주변 농촌과 미군부대 인근의 생활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또 안양 1번국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모습, 여름철 물놀이를 즐겼던 안양유원지의 모습들도 담겨있는 가운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1풀장에서의 물놀이 장면뿐 아니라 대형풀, 풍선장수, 아이스크림을 사려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옛추억을 생각케 한다.
특히 헬기를 타고 찍은 1968년도 항공사진 역시 컬러슬라이드로 기록으로 남겨 당시의 안양 시가지의 전경과 도로, 건물의 모습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농촌의 촌로(村老)나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서정성 짙게 담고 있다.
이후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며 많은 국내 네티즌들의 그의 홈페이지를 찾으면서 한때 그의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미군사전문지 성조지가 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닐 미샬로프는 한국을 떠난지 34년만인 2003년 10월에 안양시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당시 안양시는 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안양시민축제에서 안양의 역사와 과거를 담은 '닐 미샬로프 특별전'을 열었으며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했다.
닐 미샬로프씨는 "한국인과 한국땅에 대한 기록을 담고 싶었다. 한국에 근무할 당시 찍었던 사진과 슬라이드를 3개의 박스에 34년간 보관해 오다 2002년 홈페이지를 만들어 인터넷에 공개한 것인데 영광스럽고 기쁘다. 내 사진이 한미 양국민의 우호의 상징으로 안양시민축제에서 전시된 것이 더욱 뜻깊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에도 국내 사진작가들의 도움으로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곳이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 변모한 모습을 사진을 그의 홈페이지에 올려 비교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허스름한 건물이었던 안양역사는 최신식 역사로, 허허벌판이던 안양시내 도심 한복판은 고층빌딩이 들어선 번화가로 변했음을 한장의 사진이 지난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록의 소중함마져 전한다.

[20170322]안양 담배촌에 사셨던 복자 이성례 마리아

안양지역얘기/사람

복자품에 오른 이성례 마리아의 삶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박해와 순교의 땅, 한반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한 시복식에서 복자(福者)로 선포한 순교자 124위 중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해박해 당시 수리산 담배촌, 일명 뒷뜸이에 살던 한 여성이 포함돼 있다.
 
그는 충청도 홍주 출생의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로 우리나라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어머니이자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최경환(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으로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용산 당고개 성지에서 순교하면서 자식들에 대한 순수한 모성과 신앙을 함께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복된 삶을 누리고 있을 순교자들을 세상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지상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복자와 성인으로 선포하는데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1925년에 7월5일 교황 성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성인(聖人) 반열에 오른데 이어 부인 이성례 마리아가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선포된 것이다.<p> </p>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 집안 출신으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 최경환과 혼인한 뒤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1821년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이후 서울로 이주했으나 이때부터 박해 속에서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으로 전전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자식들 손을 잡고 이리저리 떠도는 고단한 삶이었다.<p> </p>그런데도 그는 고난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과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p> </p>최양업 신부는 그가 남긴 서한에서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셨다”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회고했다.<p> </p>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고난은 조선조 헌종 2년인 1936년 천주교 사제로 봉헌하기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을 마카오로 떠나 보낸데 이어 1837년 7월 외부와 단절된 피난처를 찾아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 '뒷뜸이'로 들어가 일가족이 함께 은거하면서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을 일구면서 잠시 멈춘다.<p> </p>조선시대 과천지방에 속해 있던 '뒷뜸이'는 산수가 화려하고 아늑하면서 깊은 골짜기로 박해를 피하기 좋은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 이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농사를 짓고 숯을 만들어 팔며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p> </p>이성례는 남편을 정성으로 공양하고 열심히 수계했다. 40일 봉재(封齋; 사순절) 때면 재를 지키면서 남긴 식량과 돈을 모았다가 남편과 의논한 뒤 가난한 교우에게 나누었다. 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는 등 교우들을 돌봤다.<p> </p>그러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사건이 터진다. 그를 쫓던 발길은 깊은 산속에도 미쳐, 1839년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돼 일곱 식구 모두 압송되면서 파란만장한 최경환 이성례 부부 가족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된다.<p> </p>남편 최경환은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포졸들에게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식사를 해서 기운을 돋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으며 이성례는 포졸들의 식사를 준비했다.<p> </p>식사가 끝나자 최경환은 오랏줄에 묶여 서울로 압송됐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해 아이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갔다. 남녀 교우 3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p> </p>최양업 신부의 3째 동생 최우정(바시리오)의 장남 최상종(빈첸시오)이 1939년에 기록한 최경환과 이성례의 순교 기록을 보면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남편인 최경환 성인은 1839년 9월 12일 볼기매(곤장) 110대를 맞은 후휴증으로 그렇게 옥에서 장렬히 순교한다. 그의 나이 34세 였다.<p> </p>남편과 함께 붙잡혀 온 이성례에게 포장(鋪裝)은 “너는 여인으로서 흉악한 남편 인도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 뉘우치면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p> </p>하지만 이성례는 “죄인은 남편의 인도를 받습니다. 본래 천주는 만유(萬有)의 대군대부이시니 충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목숨은 바칠지언정 진주(眞主)는 배반하지 못하겠나이다.”<p> </p>이성례는 몸이 헤어질 정도로 매를 맞았다. 수십명의 신도들이 매 한 대를 맞기도 전에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으나 그는 수개월 동안 문초를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다.<p> </p>하지만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아이들이었다. 이성례는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사이에 19세 된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학생과 12세의 야고보 등 6형제를 두고 있었다. 큰아들 양업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고 그 밑으로 의정(14)ㆍ선정(9)ㆍ우정(7)ㆍ신정(5) 등 어린 자식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돼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p> </p>더욱이 체포될 때 업고 들어간 젖먹이에 대한 모정이었다. 굶주림과 고문 탓에 젖이 나오지 않자 젖먹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옥중의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아사(餓死)하자 이성례는 차마 모정을 못 이긴 채 “나, 천주(天主)를 모르오”라고 외쳤다. 어머니로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 살배기 막내가 굶어 죽은 뒤 남은 아이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는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난 것이다.<p> </p>기해박해 때는 신유박해 때와는 다르게 부부순교자 혹은 가족순교자가 많은 반면 비교적 다른 박해 때보다 배교자가 속출했다. 특히 여성신자들 경우에는 모성애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성례 마리아이다.<p> </p>그러나 이성례는 큰 아들 최양업이 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됐다. 그는 그곳에 갇혀 있는 용감한 신자들의 격려에 힘을 얻어 배교를 취소했다. 그는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회개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결심했다.<p> </p>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옥사장이 눈을 감아줘 감옥에 가끔 드나들었다. 구걸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 어머니께 갖다 드렸는데 관노의 자식들이 이를 중간에서 가로채기까지 했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외롭게 버려질 것을 생각하자 모성애로 다시 쓰린 가슴을 안고 몸을 떨었다.<p> </p>아이들은 감옥에 찾아와 “어머니, 어머니!”하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는 다들 가거라.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절대 잊지 말아라. 하느님 계명을 잘 지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거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고 하면서 야고보를 불러 타일렀다. 또 다시 모정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미리 유언을 남기고 자신도 굳은 다짐을 한 것이다.<p> </p>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머니로부터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야보고는 옥에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릴까봐 더 이상 아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p> </p>“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p> </p>순교자 이성례의 아이들이 어머니 이성례의 목을 벨 망나니에게 한 말이다. 거지나 다름없는 네 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이렇게 부탁했다. 어린 자식들의 눈물겨운 부탁에 망나니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p> </p>1840년 1월 31일, 이성례 마리아는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순교에 방해가 될까봐 아이들을 떼어 보내고 다시 옥에 갇힌 지 9개월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이다. 그때 나이가 39세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끊을 수 없는 모정마저도 신앙심으로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네 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발치서 바라봤다.<p> </p>최경환ㆍ이성례 후손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첫째 동생 야고보는 둘째를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 댁에, 셋째를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댁에 나눠 의탁했다. 그리고 넷째 동생은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겼다. 신부가 돼 돌아온 맏형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셋째ㆍ넷째 동생을 신심이 깊은 송구현(도미니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와 결혼시켰다.<p> </p>순교자 최경환 최성인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으며,<p> </p>성인 최경환과 부인인 복자 이성례 가족이 교우촌을 만들어 살았던 안양9동의 수리산 담배촌에는 1963년 5월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에서 복자였던 최경환 묘지(福者墓地)에 순교기념비를 건립했으며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십자가 14처, 성모동굴 등을 설치하고 2000년 수리산성당을 건축하여 순례사목을 위한 성지로 운영하고 있다.<p> </p>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2000년 은총 대희년과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전대사 은혜를 받는 순례지로 지정해 전국에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p> </p>헌재 이 곳에는 수리산성당, 최경환 성인의 유해(팔뼈)를 모신 고택성당, 성인이 안장됐던 진토가 포함된 무덤인 가묘가 있다. 또 묘소 주변에는 야외미사터, 동굴성모상, 순례자들이 묵상하며 예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조형물들이 산자락에 있다<p> </p>안양시도 이곳을 안양8경중 제5경으로 지정했다.

 

한편 당시 구성됐던 교황방한준비위원회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과 어머니 이성례의 신앙 본보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로 이들 가족들이 걸어간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창작오페라 '뒤뜸이골 무지개' 를 준비했었는데 제대로 추진되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아버지 최경환 성인의 묘소를 찾아가는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으로 시작된다. 또한 당시 시대적 배경과 평온한 수리산 교우촌 등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3막부터는 최경환 성인이 포도청으로 압송되는 과정, 고문과 회유에도 신앙을 지킨 성인과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된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의 한많은 모성이 펼쳐진다.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리카르도 죠반니니 교수가 작곡한 뒤뜸이골 무지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전통적인 클래식 기법과 한국적인 색채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