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군포]수리산의 술 주조하는 가양주작(2019.08.28)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군포 #동네 #마실 #골목 #가양주작 #술 #막걸리 #대야미역 #수리산막걸리 #수암주 #알로이/
가양주작은 우리의 술, 막걸리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직접 주조하는 곳, 그리고 막걸리를 함께 나누는 곳입니다. 막걸리 커뮤니티를 통하여 못다한 이야기를, 못다한 노래를 이곳에서 나눕니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가양주작입니다.
가양주작을 주간 무인까페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15가지의 커피와 에이드 음료를 선택하실 수 있으며 50여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홀과 10여명이 함께 하실 수 있는 모임방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철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면창이 있어 스카이라운지의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또 마을청년들이 운영하는 갤러리도 함께하고 있어 매달 새로운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가양주작은 4호선 대야미역앞에 있습니다.

대표 전화: 070-4117-7755
문자 주문: 010-8411-8958

 

 

가양주작의 출발
가양주작은 마을공동체의 텃밭인 대야미마을협동조합의 성인동아리로 출발해서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를 위한 경제사업의 일환으로 양조장을 열게되었습니다.

01. 술술 풀리는 마을 공동체
가양주작은 마을공동체의 텃밭인 대야미마을협동조합의 성인동아리로 출발해서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를 위한 경제사업의 일환으로 양조장을 열게되었습니다.
- 2014년 마을협동조합(조합원 90명)설립. 반찬사업, 교육나눔, 동아리활동 시작
- 이주민이 주도한 마을공동체 활동은 토착주민의 참여요인과 소통기회가 없었음
- 원주민 참여 없는 ‘마을공동체’에 대한 냉소와 선입견을 해소할 방안으로 마을주막 선택
- 조합 수익사업인 반찬사업 실패 후 우리 마을에 적합한 대안적 경제사업 모색

02. 가양주작 사람들 소개
마을협동조합원 16명과 도시농부학교, 귀농운동본부, 생협활동가, 종이공예, 옷칠장인등 7명, 총23명의 출자에 의해 설립되어 졌습니다.

 

술&안주
가양주작 양조장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는 ’수리산 맑은물쌀’과 우리밀 누룩만으로 빚어냅니다. 7일간 발효하고 손으로 짜낸 술에 절반의 물만 가수하고 일체의 첨가물을 넣지않아도 진하고 풍부한 맛을 냅니다.

 

막걸리주조
가양주작은 2016년 2월 주세법 개정을 통한 ‘하우스막걸리’ 제도화 이후 전국에서 처음 설립된 하우스막걸리 전문점입니다. 현재 탁주와 약주제조에 대한 면허를 취득하였고 리큐즈제품이 2019년중 면허취득을 받아 출시돼 시판되고 있습니다.

 

가양주작 홈페이지
http://가양주작.com/

 

가양주작 너구리쉐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gkatptkd

 

 

 

 

 

[안양]일류 고서적 책방 ‘아단문고’(2017.04.20)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안양 #아단문고 #경향서점 #헌책방 #중고책방 #안양4동/
내일 출간 될 서적을 오늘 예매하고, 다음 날 회사에서 받아 읽을 수 있는 그런 시대이다. 더군다나 실제로 만져지지 않는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다. 신문도 책도 터치로 넘기는 세상. 손가락 하나면 모든 것을 보고 움직이고 공유까지 하는 시대에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나는 곳이 안양에 자리하고 있다.
헌책 마니아들이 선정한 일류 고서적방 경향문고, 지금의 아단문고로 햇수만도 30년이 넘는 연륜을 지닌 곳이다. 안양4동 2001아울렛 옆의 우리은행 뒷 골목(안양로 263번길)에 있는 아단문고는 작고하신 고 한상동 씨가 1984년 안양역 지하상가에서 경향서점이란 상호로 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당시 지하상가에는 여러 중고서점이 있었지만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하나 둘자리를 옮기거나 폐업했고, 경향서점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아단(亞旦)이란 이름은 고 한상동 씨가 새벽에 수리산 태을봉에 올라가 아침 햇살을 보면서 지은 이름으로,‘아시아의 아침’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 아단문고는 40평 규모에 8만여 권의 책을 전시하고 있으며 매장과는 별도로 3개의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의 책을 포함하면 30만권이 소장돼 있다.
주 매장으로 쓰이는 골목안의 허름한 한옥 책방에 들어서면 중고서적 백화점으로 마치 시간이 멈춘듯한 공간으로 불교, 기독교 등 종교서적을 비롯해 문학, 중고등학교 학습물에 이르기까지 분야별로 구분돼 원하는 책들을 찾아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흔하게 볼 수 없는 고서적들이다. 200년전 중국 상해에서 발행됐던 4권짜리 동의보감은 보물 중의 보물로 통한다. 1백년 전 구한말에 쓰여졌던 송사선생문집은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서술한 책으로 매우 희귀한 서적이다. 이 밖에 광복과 6.25전쟁을 전후로 나온 교과서와 당시 정부에서 발행했던 정기발행물, 계몽용 책 등 각 세대의 역사 변천을 한눈에 엿볼수 있는 책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의 많은 종류의 역학 서술집들을소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동양철학인 논어, 맹자, 소학 등 일제시대 단행본들부터 근대에 편찬되었던 것까지 연대별로 다 갖추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간했던 모든 종류의 잡지와 카달로그 등도 구입할 수 있다.
많은 책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아단문고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이곳에는 여느 헌책방처럼 팔리지 않는 책이 꾸역 꾸역 먼지를 쓰고 쌓여 있지 않다. 주인이 책방을 찾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책,사갈 만한 괜찮은 책만 골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을 찾는 애서가들은 주인의 안목에 감탄한다. 사나흘만 지나면 또 어떤 책이 나와 있을까 궁금해 서둘러 책방에 들른다는 후문이다.
요즘은 도서관 시설과 문화가 많이 발달한 데다, 많은 인터넷 서점들로 인해 헌책방들이 타격을 입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헌책방만의 낭만과 그 속에 숨어 있는 매력과 향기를 안다면 헌책방을 다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른들에게는 특유의 오래된 책 냄새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아이들에게는 신비한 경험이 된다. 헌책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새 책 한 권의 값으로 보통 2~3권을 고를 수 있다. 평소에 갖고 싶었던 귀중한 책을 구했을 때 느끼는 희열과 흥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단문고는 오래된 책 속에 배어 있는 누군가의 추억을 사는 기분을 선사한다. 그것이 바로 헌책방의 매력이 아닐까. 현재는 고 한상동 선생님의 자제분이신 한한이, 한한모 남매가 대를 이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면 꼭 한 번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안양시 만안구 안양로 263번길 13 (안양동)
T. 031-445-0972

아단문고가 좋은 이유

1. 책값이 너무너무 싸다.
2. 새책방에는 없는 절판서나 희귀서를 구할 수 있다.
3. ‘보물찾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1초 만에 찾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4. 잘 찾아보면 새책보다 더 상태가 좋은 A급 재고서적을 구할 수 있다.
5. 헌책에서 아련히 풍기는 향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6. 가끔 책갈피에서 책의 전주인이 숨겨 놓은 지폐를 발견할 수 있다. 매우 드문 경우, 더 희한한 물건도 나온다.
7. 협상능력에 따라 책값을 깎을 수 있다.

 

 

 

 

 

 

 

 

 

 

[안양]반세기 넘는 씨앗가게 흥농상회(2017.04.20)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2017.04.18/ #안양 #흥농상회 #종묘 #종자 #씨앗 #중앙로/ 1961년 상설시장으로 문을 연 안양 중앙시장(새시장)과 1972년 개장한 남부시장은 지금도 규모가 크지만 1960-70년대 시흥군 시절에는 안양.군포.의왕.과천은 물론 시화, 안산 등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발걸음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지금의 안양 남부시장앞 중앙로변에는 오래된 씨앗가게(종묘상회)들이 서넛 있다. 그중 1956년에 문을 연 흥농상회는 농사를 짓던 무렵의 시흥군 관내의 마을은 물론 지금은 신도시가 들어선 산본과 평촌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농사에 모판을 대는 등 그야말로 도시가 변화하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지켜본 산 증인이다.

[안양]삼덕도서관(2017.03.30)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58에 위치한 삼덕도서관은 안양시의 10번째 공공도서관으로 시가 총 사업비 69억여만원을 투입, 2015년 4월 착공된지 1년 7개월만인 2016년 10월 31일 개관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삼덕도서관은 연면적 2,688.41㎡ (부지면적 1,050㎡/건축면적 556.82㎡)의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총370석(열람실 144석 포함)의 좌석이 설치돼 있으며, 3만2000여권의 도서를 비롯 정기간행물 50종과 비도서자료 330점이 비치돼있다.
지상 4개층에는 열람실과 노트북실, 종합자료실, 어린이자료실, 시청각실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지하층은 주차장이다.
삼덕도서관은 주변에는 초.중고는 물론 연성대와 안양대 등 학교가 많아 청소년특화도서관이라 할 수 있어 비치된 도서 또한 청소년 관련 책들이 주류를 이룬다.

 

 

 

 

 

 

 

 

 

 

 

 

[의왕]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100년 역사의 흔적이 있는 하우현성당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현 의왕시 청계동, 과거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 자락과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으며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역원이란 과거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사신의 왕래나 관리 부임시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운영 여관 원(院)을 합친 말이다. 하우현은 조선시대에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면서 동양원(洞陽院) 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로 인해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있었던 이 일대는 19세기 초 조선시대 말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교우들은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토굴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림(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설정되자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이 건물이 명동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성당이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다.
하우현은 1900년에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였다.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사제관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종을 기증했다.
1900년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할 만큼 교세 규모가 매우 컸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1954년 안양읍에 장내동성당(현 안양중앙성당)이 설립되자 하우현 본당은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목조성당이 낡아 붕괴 위험에 처하자 1965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은퇴사제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미군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하우현성당은 1975년에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다. 이 과정에서도 레이몬드신부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1980년에 하우현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93년에는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현재의 성당의 외형은 동화책이나 영화 속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하연 외벽에 연한 하늘색 지붕이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경건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성당 내부는 지친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아 편안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좌식이다. 아마도 동양의 정서에 맞춘 점도 있지만 작은 규모인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불편하기 보다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하우현성당 본당 건물 오른쪽에 있는 한옥 건물은 하우현성당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다. 이 곳은 1906년에 신축한 사제관(신부님 숙소)으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몸체는 석조, 지붕은 골기와를 얹은 팔각지붕 형태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양식을 절충했다. 20세기 초반 성당 건물에 한양 절충식을 쓴다는 건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현관 지붕 아래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당 건립후 프랑스 공사였던 골랭드 플랑시가 하우현성당 준공응 기념해 종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1월 22일 경기도 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되엇으며 2005년 보수작업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성당 마당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성당 주변에는 작은 정원들이 조성되어 연초록빛 풀잎 위에 아기자자한 꽃들.이 피어있고 사제관 옆 돌담길에는 하우현성당의 터주대감으로 귀여움을 받고있는 고양이 두마리가 산책을 즐긴다.
성당 왼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서 못박혀 죽을 때까지 중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보통 14가지인데 하우현 성당은 15가지로 표현해놓았다. 데크로 조성된 작은 산책길을 따라가면 하우현성당 카페다.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신자들이 직접 운영하며 수익금은 전액 성지개발에 사용된다. 이곳 역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친구 집같이 정겹다.
사제관 앞에는 주보 신부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신부님의 동상이 서 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활동하던 12명의 선교사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5살에 조선에 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후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하우현성당 인근에는 박해당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은신했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성지를 가려면 성당 옆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국사봉(542)까지 1시간4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이곳에서 이수봉 방향이 아닌 오른쪽 길로 1km 정도를 내려가면 쉼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갈림길)이고 여기서 ‘성 루도비코 은신동굴‘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등산에 자신 없으면 하우현성당 앞에서 분당 반향 버스(303번, 1550-3번)를 타고 운중동먹거리촌 정류장(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하차한 후 연구원 앞을 지나 순두집에서 다시 서울외곽순환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오르면 국사봉 등성이로 1.2km(40분 소요)를 오르면 동굴성지에 도착한다.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 성당 가는길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청계를 지나 성남 판교가는 도로(57번국도)를 10여분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이정표가 보인다. 도로 아래쪽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죄측으로 돌면 성당이 나온다. 성당앞 마당에는 주차공간이 있다.
대중교통도 비교적 편리하다. 인덕원사거리(지하철 4호선 2번 출구쪽) 버스정류장에서 성남행 303, 103, 1303, 1550-3번을 타고 청계원터마을 입구정류장에서 하차해 도로 밑 우회 터널(굴다리)을 건너면 된다. 의왕 마을버스 1-5은 성당입구까지 운행한다.
하우현성당 버스정류장에서 판교방향으로 약 200여미터 지근거리에는 2004년에 발견한 의왕의 도깨비도로가 있다. 도깨비도로란 경사가 낮은 곳이 높게 보이는 시각에 관해 생기는 착각이 주는 착시현상으로 인한 것이다. 이 도로는 판교쪽 방향 고갯길에 있는데 언덕으로 이어지는 판교로 탓일까요? 주변 환경이 만든 착시현상으로 인해 마치 내리막길 처럼 보인다. 도깨비도로 중간쯤 구간 양쪽에 도깨비도로 체험구간이 있다. 동그란 음료수병이나 공을 도로에 놓거나 물을 홀려 놓으면 왜 도깨비도로인지를 알 수 있다.
 
하오고개 또는 학현[鶴峴]
 경기도 성남시의 서남부 분당구 운중동의 서쪽에서 의왕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운중동에서는 하오개 · 하오고개 · 화의고개 등으로 불리고, 의왕시에서는 학고개 · 학현이라 부른다. 학현의 좌우 모두 조선 말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숨어 살았던 곳이다. 고개 너머 청계동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토마스) 등이 붙잡힌 곳이다. 그는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안다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조선 시대 동양원(洞陽院)이라는 역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동지도』에 학현이 기록되어 있다. 『중정남원지』에 "학현은 판교주막에서 서쪽으로 10리쯤에 있다. 서쪽으로 인덕원 · 과천 등지와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현이란 명칭은 이웃한 의왕시 청계동 점말에 있었던 김해김씨 종산이 풍수지리상 학이 거동하는 형국이며, 인근의 안동김씨 묘도 학의 혈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의왕]100년 역사의 하우현성당

 

#의왕 #하우현성당 #100년 #천주교 #한옥사제관/ 작고 소박하지만 100년 역사와 근대건축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하우현성당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현 의왕시 청계동, 과거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 자락과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으며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역원이란 과거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사신의 왕래나 관리 부임시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운영 여관 원(院)을 합친 말이다. 하우현은 조선시대에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면서 동양원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로 인해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있었던 이 일대는 19세기 초 조선시대 말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교우들은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토굴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림(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설정되자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이 건물이 명동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성당이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다.

하우현은 1900년에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독립하였다.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사제관을 신축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종을 기증했다.

1900년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할 만큼 교세 규모가 매우 컸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1954년 안양읍에 장내동성당(현 안양중앙성당)이 설립되자 하우현 본당은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목조성당이 낡아 붕괴 위험에 처하자 1965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은퇴사제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미군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하우현성당은 1975년에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다. 이 과정에서도 레이몬드신부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1980년에 하우현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93년에는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현재의 성당의 외형은 동화책이나 영화 속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하연 외벽에 연한 하늘색 지붕이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경건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성당 내부는 지친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아 편안하게 미사를 볼 수 있는 좌식이다. 아마도 동양의 정서에 맞춘 점도 있지만 작은 규모인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불편하기 보다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하우현성당 본당 건물 오른쪽에 있는 한옥 건물은 하우현성당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다. 이 곳은 1906년에 신축한 사제관(신부님 숙소)으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몸체는 석조, 지붕은 골기와를 얹은 팔각지붕 형태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양식을 절충했다. 20세기 초반 성당 건물에 한양 절충식을 쓴다는 건 당시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현관 지붕 아래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당 건립후 프랑스 공사였던 골랭드 플랑시가 하우현성당 준공응 기념해 종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1월 22일 경기도 기념물 제 176호로 지정되엇으며 2005년 보수작업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성당 마당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성당 주변에는 작은 정원들이 조성되어 연초록빛 풀잎 위에 아기자자한 꽃들.이 피어있고 사제관 옆 돌담길에는 하우현성당의 터주대감으로 귀여움을 받고있는 고양이 두마리가 산책을 즐긴다.

성당 왼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서 못박혀 죽을 때까지 중요 장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보통 14가지인데 하우현 성당은 15가지로 표현해놓았다.

데크로 조성된 작은 산책길을 따라가면 하우현성당 카페다.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신자들이 직접 운영하며 수익금은 전액 성지개발에 사용된다. 이곳 역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친구 집같이 정겹다.

사제관 앞에는 주보 신부인 성 루도비코 볼리외(Beaulieu) 신부님의 동상이 서 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활동하던 12명의 선교사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5살에 조선에 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후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하우현성당 인근에는 박해당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은신했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성지를 가려면 성당 옆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국사봉(542)까지 1시간4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이곳에서 이수봉 방향이 아닌 오른쪽 길로 1km 정도를 내려가면 쉼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갈림길)이고 여기서 ‘성 루도비코 은신동굴‘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등산에 자신 없으면 하우현성당 앞에서 분당 반향 버스(303번, 1550-3번)를 타고 운중동먹거리촌 정류장(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하차한 후 연구원 앞을 지나 순두집에서 다시 서울외곽순환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오르면 국사봉 등성이로 1.2km(40분 소요)를 오르면 동굴성지에 도착한다.

하우현 성당 가는길은 인덕원사거리에서 청계를 지나 성남 판교가는 도로(57번국도)를 10여분 정도 가다 보면 우측으로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이정표가 보인다. 도로 아래쪽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죄측으로 돌면 성당이 나온다. 성당앞 마당에는 주차공간이 있다.

대중교통도 비교적 편리하다. 인덕원사거리(지하철 4호선 2번 출구쪽) 버스정류장에서 성남행 303, 103, 1303, 1550-3번을 타고 청계원터마을 입구정류장에서 하차해 도로 밑 우회 터널(굴다리)을 건너면 된다. 의왕 마을버스 1-5은 성당입구까지 운행한다.

하우현성당 버스정류장에서 판교방향으로 약 200여미터 지근거리에는 2004년에 발견한 의왕의 도깨비도로가 있다. 도깨비도로란 경사가 낮은 곳이 높게 보이는 시각에 관해 생기는 착각이 주는 착시현상으로 인한 것이다. 이 도로는 판교쪽 방향 고갯길에 있는데 언덕으로 이어지는 판교로 탓일까요? 주변 환경이 만든 착시현상으로 인해 마치 내리막길 처럼 보인다. 도깨비도로 중간쯤 구간 양쪽에 도깨비도로 체험구간이 있다. 동그란 음료수병이나 공을 도로에 놓거나 물을 홀려 놓으면 왜 도깨비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사진첩 [풍경]100년 역사 의왕 하우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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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안양을 다녀간 백범 김구선생 기념비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0년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에 선출돼 사실상 초대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인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분으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귀국한 후 1949년 4월 5일 청명일(한식)에 안양을 다녀갔었다.
김구 선생이 안양에 온 이유는 안양 관양1동 329-1에 안동김씨 대종친회 문영공(휘 恂:충렬공 3째 아드님) 산소가 있는데 한식을 맞아 열린 종친회 행사에 참배하러 오신 것이다. 종친회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국 종친 100여 명이 모여 절사(節祀)를 올리고 난후 선생의 귀국 환영을 하는 자리도 열고 기념촬영을 했는데 당시 검은 두루마기에 안경을 쓰고 함께 사진을 찍은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김구 선생이 안양에 왔다는 소식에 관양동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종친들은 이날 선생의 정치활동을 위한 기금도 모았었는데 선생께서는 '이 돈은 받을 수 없다' 하고 만류하여 문영공 종회에서는 회의를 통해 이 기금을 문영공파 종비(宗費)로 이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종친회에서는 김구 선생이 안양 관양동을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2009년 5월에 문영공 묘소 앞에 기념 비석을 세웠다.
찾아가는 길은 관양사거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해 관양현대아파트 앞 도로(관평로)를 따라 관양고에서 우측으로 가면 일동로 129-133 삼거리 도로(동편마을 옆-과천방향)까지 간다. 또 하나는 관양육교 정류장에서 하차해 관악대로 345번길-관악대로 339번길(관양중 옆길)을 따라 끝까지 간후 좌측으로 돌아가면 일동로 129-133 도로와 만난다. 일동로 도로 우측에는 야산이 있는데 삼거리에서 보면 산으로 오르는 샛길이 있다.     
산길을 한 60미터 정도 올라서면 좌측 나무 숲사이로 가족묘지가 보이는데 이는 문영공 후손으로 선산을 문중에 기증한 김정묵(定默)씨의 묘소다. 김씨는 안양시의회의장과 경기도의원을 지냈다. 산소 좌측으로 10여 미터 오르면 울창한 참나무 숲에 들러 싸인 넓찍한 공간에 혼유석과 망석, 망주석과 신도비에 둘러싸인 묘소가 있는데 이 묘소 안동김씨 문영공의 산소다.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비는 산소 초입에 세워져 있다. 
 
 
독립군의 아버지 백범 김구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음)~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월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4월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월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년 3월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년 3월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년 8월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 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양]1975년 안양시청으로 지어진 만안구청 이야기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안양 #만안구청 #안양6동 #공공기관 #1975년 #나상기 #옛안양시청/ 현재의 만안구청은 평촌신도시가 들어서기전 안양시청이 있던 곳으로 건축가 나상기(1927∼1989)씨가 30대 젊은 시절에 설계한 건물이다. 1977년 안양대홍수로 안양시 전역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때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두차례나 안양시를 방문해 이 건물 3층 강당에서 브리핑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의 사진과 현재의 본관 건물 모습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만안구청 터는 과거 밤나무가 무성한 율원이었다. 일제강점기 현 만안구청부터 북쪽으로 국립농산물검사소(현 국립종자관리소)까지는 1937년 문을 연 안양식림묘포장(경기도임업시험장)이 처음 설치되었던 곳으로 1971년 묘포장이 오산으로 이전하기 까지 수리산에 임업시험림을 조성하고 우량묘목을 생산하고 시험하였으며 주변에는 경기도와 중앙정부의 농업 관련 연구와 행정시설들이 속속 세워졌던 곳이었다.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된후 경기도임업시험장 자리에 시청사 신축에 나서 1974년 기공식을 한후 1년후인 1975년 현재 모습의 건물이 완공됐다.
건축가 최승원 교수님 글에 의하면 나상기 선생은 1961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이구(李玖: 英王 李垠의 아들)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미술대학원 건축과에 입학하여 루이스 칸의 지도를 받으며 졸업한 후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1970년 귀국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로 복직해 이 때부터 건축과 도시계획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많은 활동을 했는데 1984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로는 부산타워(1973), 부산구덕총합운동장을 비롯 아주대학교, 하와이대학교에 작품이 있으며 안산시, 서울대공원, 어린이대공원 설계에도 참여했다.
한편 안양시청은 1990년대 평촌벌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부림동에 새 청사를 짓고 1996년 11월11일 안양시청과 시의회 청사를 평촌으로 이전해 11월 15일 준공식을 가졌으며 안양6동에 자리한 옛 안양시청사 건물은 만안구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만안구청 건물 자료-안양시사에서]
이 건물의 설계자는 나상기 건축가였다. 이 건축물의 대지는 남쪽은 도로가 반듯하게 나 있으나 북쪽의 도로가 상당히 급한 예각으로 꺾여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건축가는 이러한 대지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여 ㅅ자형으로 건물을 앉혔다. 서쪽의 정문으로부터 접근하여 주현관 으로 집입하도록 동선을 유도하는 데 중간에 저층의 민원실 출입구를 두어 주현관까지 굳이가지않아도되는민원인들의편의를고려하고있다.
민원실은 층고가 높으며 주건물과 축의 방향이 다름으로 인해 서류접수대의 방향이 꺾이는 등, 다양한 시각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어, 관청의 단조로운 분위기를 덜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주 건물의 동쪽 부분 2층에는 시장실이 있는데 이부분만 돌출되어 있다. 또한 그기둥이1층까지내려가 있어 그아래 1층 부분은 휴게공간으로 사용되고있다. 시장실은 이 부근의 도시 전체 축에 대하여 비스듬한 각을 이루고 있어, 남쪽으로 내다 보이는 전망이 조금은 다른 각도로 펼쳐져 색다른 느낌을 주고있다.
또한 이건물은 ‘ㅅ’자 본체로부터 민원실과 옥외비상계단이 마름모꼴로 돌출되어 있고, 중앙의 계단실과 옥탑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있다. 이러한 배치방법은 이건물이 세워지던 1975년경에는 관공서 건축에서 아직 채용하지 않던 방법이었다.
따라서 건물 외관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수평적인 띠창은 시로 승격되며 새로운 청사를 마련하는 시민들의 희망을 수직적 권위보다 시민사회의 수평적 연대를 표현하다고 볼수있다.
그리고 수평적인 요소만으로는 지루할수 있는 외관을 민원실의 수직기둥과 시장실 부분의 수직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보정하여 형태적으로 완벽함을 만들어 내고있다.
이러한 유추는 설계자가 나상기이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것이다.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루이스 칸을 비롯한 세계적 건축가들이 갓 펼쳐낸 작품의 현장에서 많은 감을 얻었으며, 도시의 문맥과 주변환경을 읽어내고 이것을 설계에 반하는 방법을 터득하던것으로 보인다.

 

 

 

 

 

 

 

 

 

 

 

 

 

 

 

 

 

 

 

 

[안양]34년간 새벽 두시까지 문여는 수암약국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34년간 새벽 두시까지 문여는 약국을 아십니까?"(2015.11.25  약업신문 발췌)
안양 1번가 소재 '수암약국', 인근지역 주민건강 파수꾼 역할

 지난 1982년부터 유흥가인 안양 1번가에서 어느 네온사인보다 밝고 환하게 빛나는 약국 간판이 있다. 그 주인공은 국민의 의약품 구입의 편의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82년 1월 6일 통행금지와 함께 35년 세월동안 새벽까지 문을 열고 있는 수암약국 박동규 약사(71세, 중앙대 약대 13회)이다.
박동규 약사는 지난 2006년까지 새벽 4시까지 문을 열다 그 이후부터는 새벽 2시에 문을 닫고 있다. 수암약국은 안양인근 소도시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한 약국이다. 최근 들어서 주요 지역에 심야약국이 운영되고, 부작용이 경미한 안전상비약을 편의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2-3년전까지만 해도 야간시간대 운영되는 약국은 전무했다.
예를 들어 심야시간대 어린아이가 열이 날 때 가정에 구비해 놓은 해열진통제가 없을 경우 병원 응급실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안양 인근 지역 주민들은 수암약국을 찾아 약사의 복약지도를 받으며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으니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야시간대 응급실 이용료가 부담이 가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1/5도 안되는 비용으로 질환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역 주민들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져 현재는  안양 인근 소도시에서는 유명한 약국이 됐다고 한다.
유흥가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고 해도 수임약국에서 심야시간대 팔리는 제품이 숙취해소 관련 제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숙취해소 관련 제품 구입은 뜸한 반면, 감기약, 해열제, 진통제 등의 일반의약품을 찾는 환자들이 대다수이다. 실제로 기자가 수임약국을 찾았던 11월 어느날 12시를 전후한 한시간동안 약국을 찾은 10여명중 숙취관련 제품을 구입한 사람은 2명에 불과했다.
"1982년 1월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 지역 주민들을 위해 새벽까지 약국을 운영하는 것이 어떠냐는 보건소장의 제안에 따라 늦게까지 문을 연 게 어느덧 35년이 됐다“며 ”가끔은 피곤하고 손님이 없을 경우에는 일찍 문을 닫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심야약국으로 홍보가 되다 보니 사명감 때문에서라도 새벽 두시가 되어야 문을 닫게 된다"고 박동규 약사는 말했다.
박동규 약사에 따르면 새벽 시간 약국 위치를 묻는 전화가 대여섯 통에 이른다고 한다. 119, 1339 등을 통해 심야약국으로 알려졌으며, 114 안내를 통해 약국 위치를 묻는 환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동규 약사는 약사사회 원로이자 심야약국을 운영하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로서 약사들이 사명감과 전문가로서의 책임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한다. 약국이 공공성을 다하고 국민건강 파수꾼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소 불편이 따르더라도 지역주민들을 위해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자기 편의만 앞세우다 보니 약국 문을 빨리 닫고 그로 인해 주민 민원이 커져 국은 안정상비약이라는 명목으로 일반의약품이 편의점에서 판매되게 됐다는 것이다. 매출의 대부분이 일반의약품이 수암약국은 안정상비약이 편의점으로 판매되면서 야간시간대의 매출이 20%이상 감소됐다고 한다.
박동규 약사는 안전상비약의 편의점 판매에 따른 매출 감소는 감내할 수 있지만 약사직능이 점차 축소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한다. 또 한 두품목이 약국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봇물처럼 약국 밖으로 나가는 일이 우려된다며 더 이상 의약품이 약국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약사회와 악사들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칠순을 넘긴 박동규 약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심야약국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겠다"며 주위 약사들에게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약국을 운영하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 전문성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아까지 않았다.

[의왕]1974년 개업한 40년 전통의 오봉막걸리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40년 넘는 오봉막걸리 예전에 안양과 군포, 의왕에는 막걸리를 만드는 술도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의왕에 단 하나가 남아있다. 1974년에 개업한 오봉주조로 그곳에서 만드는 막걸리가 오봉막걸리다. 한 자리에서 술을 빚은 역사가 42년나 되는 전통의 술인데 탁주로써 맛이 순하고 마신뒤에도 머리가 아프지않아 지역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오봉막걸리는 의왕의 오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하여 의왕을 대표하는 산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지만 70년대에는 고천막걸리라 불렀다. 당시 술 맛이 좋아서 안양 중앙시장 상인들이 파주상회 건물(중앙시장 1문 입구 우측) 옥상에서 척사대회를 여는 날이면 말술을 주문해 받아 마실 정도로 안양막걸리 보다도 인기가 좋았다. 오봉주조(대표 홍순현)는 경수산업도로 의왕파출소 골목으로 접어들어 완람마을 가는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도로변 좌측에 있는데 낡은 건물 근처에 가면 술 빚는 은은한 냄새가 납니다. 물 맛이 바뀌면 술 맛이 변하는 사연이 있어 이사도 하지 않고 처음 그 자리에서 수십년 째 거의 가내수공업같은 옛날 방식으로 술을 만들어 내는데 술맛은 예전과 다름없는 명품 막걸리로 입소문나 있다. 의왕 토박이들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의왕 청계쪽으로 모내기를 하러 왔다가 이 오봉막걸리를 맛보았는데 맛있다고 칭찬도 해주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막걸리병이 따라 없었다. 아버지가 막걸리 사오라고 시키면 주전자 들고 술도가를 찾아가던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말통으로 술을 받아다가 항아리를 땅에 묻고 파는 것을 사와야 했다. 오봉막걸리는 750ml, 1200ml,1700ml .통에 담은 3종류로 판매한다. PVC병에 술을 담아 박스 형태로 판매도 하지만 아직도 많은 양을 말통으로 판매한다. 주전자로 술을 파는 의왕 동네 술집 등에서 많이 찾기 때문이다. 오봉막걸리는 주 재료가 소맥분, 쌀은 곁가지인 밀가루 비중이 높다. 하지만 요즘 품질이 떨어진 쌀막걸리보다 맛은 뒤지질 않으며 오히려 단맛이 덜하다. 밀 때문인지 가격이 많이 저렴해서 '생막걸리' 임에도 불구하고 1700ml 짜리 통이 1700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하지만 오봉막걸리가 얼마나 지역적이냐 하면 대형마켓이나 슈퍼에서는 구할 수도 없을뿐 아니라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들이나 알 정도다.(안양.군포.의왕 하나로마트에서 판매) 오봉주조는 2015년 9월 의왕시와 도로명 주소 홍보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는데 2016년 9월 6일까지 1년간 오봉주조에서 생산되는 30만병의 오봉막걸리 제품에 도로명주소 홍보문구가 적힌 라벨을 부착해 유통키로 했다. 중요한 정보. 귀뜸을 하면 사전에 술도가 견학 신청을 하고 찾아가면 금방 만든 막걸리를 시음할 수 있는데 효소는 풍성하지만 숙성이 되지 않아 달착지끈하다. 오봉주조 홈페이지 http://www.obongsan.kr/ 연락처 (031) 452-4108, 452-2165 주소 경기도 의왕시 왕곡로 9 (고천동)

 

 

 

 

 

 

 

 

 

[안양]병목안과 담배촌 경계의 수리산 문둥바위

안양지역명소/숨은공간

 

2017.02/ #안양 #수리산 #담배촌 #병목안 #문둥바위/ 안양9동 새마을을 지나면 병목안 삼거리가 나오지요, 왼쪽으로 병목안시민공원이 있는데 이곳은 일제감점기인 1934년부터 1980년 중반까지 철도 레일 밭에 까는 자갈을 채취했던 채석장입니다. 시민공원과 한증막 앞 도로를 따라가면 왼쪽 골짜기에 병목안 캠핑장이 있는데 안양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이 골짜기는 과거 굿판이 벌어지는 무당골이라 불렀지요. 캠핑장에서 수리산 천주교성지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꺽어지는 지점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답니다. 병목안길이 끝나고 담배촌 시작을 알리는 지점이자 옛 이야기를 지닌 바위이지요. 늘푸른안양21실천협의회(현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 2013년  기획사업으로 진행한 수암천 탐사활동에서  담배촌 토박이 임부성님의 구술을  통해 알게된 것으로 과거 천주교 박해때 담배촌에  숨어살던 천주교인들이 외부인들의 접근을 박기위해 흘린 소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문둔바위는 원래 개울까지 닿을 정도로 아주 커 손수레가 겨우 다닐 정도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수리산 벌목을 위해 바위를 잘라내고, 6.25전쟁 이후에는 수리산 정상에 미군통신부대가 들어오면서 차량 통행을 위해 바위를 잘라내 점점 작아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