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최승원]안양 석수3동 충훈부 이야기(2020.06.06)

이야기보따리/기억


삼막천 삼성천이 안양천을 만나 U자(역수천)로 흘러 좋은 양분의 흙이 충훈부에 쌓이는(퇴적) 지형이기에 농사가 잘되어 부농이 되는 지역이다. 이 좋은 땅이 국유지가 된 것이 당연하다. 북측에 아름다운 꽃뫼가 있고 산세가 등대같이 곶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는 안양천 뚝방 위 벚꽃축제로 지명의 이미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에센스 국어사전 (이희승 감수)에 곳<옛>꽃. 곶<옛>꽃. 곶(串)[곧] 명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부분이라고 되어있다.

고대 미추홀은 주변이나 안양지역 낮은 곳은 바다 이었다고 본다. 청일전쟁시에도 배가 군포까지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근현대도 중국은 큰개울(한천 한내) 로 배가 다닌다. 바닥이 걸리면 로프로 양편에서 끈다. 유럽에서는 말이 끈다고 배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하천으로 친입하는 적을 곶에서 관측하고, 박달 군용지를 보호할 수도 있다고본다. 6.25전쟁초기에도 충훈부에 면한 안양천은 좋은 방어라인 이었다. 소래포구로 들어온 소정방도 소래산지희소에서 이 지역을 교두보로(공략)攻略하였을 것이다.

‘70년대 초 곶 후면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미 군정(軍政)시 축산 교육은 안양이 중심이었다. ‘47년 초 당시4H사업은 농촌교육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농업시험소는 ‘4H농장학교’로 바뀌었다. 이곳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농장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좋은 장비를 가추고 있었다. 면적이12에이커인 이곳에는 포도농장과 배 과수원, 곡물 그리고 한국의 온갖 채소가 있다. 순혈종의 젓소와 버크셔산 흑돼지는 현재농장에서 주된 관심을 받고 있다. 경기도 전역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농장으로 견학을 온 가장 총망 되는 4H클럽 소년들은 실직적인 체험을 통해 가장 최신의 농업기술과 가축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서울지역관할 미군정문서 서울역사편찬원 88p


1987년 안양중학교가 들어왔고 2004년 충훈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주차장의무규정이 없을 때 다세대주택이 들어와 안정감은 있으나 주차장이 없어 불편하다.

2004년 4월1일 KTX광명역이 보통역으로 영업하므로 충훈고에서 1km 도보15거리로 남서울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62년 건축법개정당시 지하층의 천장높이의 1/3 지하에 있을 경우 지하층으로 인정

1972년에 지하 천장높이의 2/3가 지하에 있는 경우

1984년엔 단독과 다세대주택의 경우엔 지하 층고의 1/2이 지하에 있는 경우

1999년엔 모든 건축물의 지하층고가 1/2이하에 있는 경우 지하층으로 인정

#안양시만안구 #안양천 #충훈부 #석수3동

사진:1965년경 충훈부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안양1동 구시장 (시대동)이야기(2020.05.18)

이야기보따리/기억

 

안양1동 구시장 (시대동)이야기
1905년 안양역이 생기기고 1917년 서이면사무소가 이사온, 시대동은 1925년 을축 대홍수시 많은 인명이 사망하고 집이 침수붕괴 되자 군포시장을 안양리로 옮기고 안양천지류에 대대적인 제방공사를 하였다. 이로 인해 구시장과 도로가 안양면의 중심이 된다.
1945년 해방후 도시기획에 따라 ‘47년 영등포에서 군청이 내려오고 ’47.10.25년 안양경찰서가 준공 49년 읍사무소가 생기면서 신읍거리가 구성되었다, 시흥군청 뒤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일본강점기에 건축되고 운영되던 방직공장은 한국인이 인수하여 전후 태평방직으로 운영한다.
나는 49년초 모친이 시장남측 태평방직에 경비로 취직하게 되어, 서울서 세발자전거를 가지고이사하여 구시장 도로 북측상가 가계 뒷방에 거주하였다. 경비는 모방을 몸에 숨겨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 엄무 이었다. 북측으로 시장이 격자형으로 구성되고 동측에는 커다란 우시장과 공터가 있었다, 이어서 커다란 안치과 안종호집 이 있고 적산인 농장과 단지무 창고가 있었다.
6.25가 터지자 철길에는 하얀 옷을 입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난민이 가득히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친이 철길에 들어서자 넘어져 스플리지 공장관사로 들어갔다. 전쟁 중에는 유지들도 시장에서 꿀꿀이죽(부대찌개)을 사먹었다 . 그리고 밀기을로 만든 개떡이 유일한 시장음식이었다. 1.4후퇴 시는 탄약열차가 안양역에 와 고장이나 출발이 불가능하자, 헌병은 지붕위에 피난민에게 하차를 하게하여 도보로 걸어가게 하고 폭팔 시켜 이리폭파사고 같이 주변을 강타하여 시대동 일대와 군청 읍사무소 등 모든 읍내가 쑥밭이 되었다. 일부 피난민은 거짓말인 줄 알고 숨어 있다가 피해를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
안양도시계획에는 안양에서 과천 서울 가는 철도계획이 있었다.
전후에는 안양천변에 사격장이 있어 매년 사격대회가 열였다. 타겥은 대림대학 북측아래 있었다. 시장북측에는 함경도에서 피난와 포목점을 하던 구읍의원을 지낸 박주안님 내외가 가게뒷방에서 살았다. 안양역 동편에 ‘60년 단사천이 만든 한국특수제지가 들어오고 67년에는 인접 구적산토지를 인수하여 초지2호기를 운전하는 바람에 안영천은 치명적인 종이 찌거기 폐수에 시달렸다.
’74년11월10일 불이난 삼광점미소는 지금 진흥아파트자리 초입에 있었다. 이상윤의 둘째 큰아버지인 이광순이 운영했고, 이상윤은 초대읍장출신으로 안양6동에서 주유소를 했고 안양시 자문회의시 건축박물관을 동의하여 주었다.
태평방직자리에 들어온 진흥아파트는 ‘83.10월 입주 1940세대 4.7억~7.5억 33개동 5~12층 매매 707만원 전세196만원(1m2기준) 2020.05.16. 철거 준비 중이다. 사진은1965년경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최승원]삼성산자락 삼성국민학교 재학 시절(2020.05.11)

이야기보따리/기억

 


1957년 9월초 집에서 북서로 1,2km 20분 거리 삼성초등학교 5학년2학기 편입하였다. 교사는 목조木造단층으로 가운데 현관을 두고 좌우 각 3개 교실을 배치하였다. 저학년은 오전오후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5학년은남36명 여29명 합 65 명이었다. 하순용등 하 씨들이 학교뒷동네 집성촌이라 똘똘한 학생들이 다녔다. 수영특기학교 이고, 광명초교에서 열리는 시흥군 체육대회준비로 축구 등 종일 운동만하고 있었다, 단체로 트럭을 타고 가서 나는 축구선수로 라이트하프를 맡아서 뛰었다. 가을소풍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사이 고개를 도보로 넘어 낙성대 강감찬 장군 유적지에 다녀왔다. 산에는 아주 큰 노송老松들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목에 미군부대(83병기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밖으로 천연색 서부영화를 잠시 볼 수 있었고, 인근 미군부대 쓰레기통에는 포르노사진, 잡지, 건축과도시사진, 아주 두꺼운 상품소개 책, 깡기리 등을 보았다. 일본은 캔 따는 깡그리 에 U,S,A 대신 USA로 표시 모방한다고 어린이들이 흉을 보았다.미국은 TV안테나가 잠자리 떼만큼 많다고 이야기를 하였고,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위해 먹는냐?’ 논쟁을 초등생들이 하였는데 지금은 건강식이지만 나는 보리밥(보리7:쌀3)이 먹기 실어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였다. 미술대회에 나가는 학생은 일제크레파스가 공급 되었다. 당시는 국산연필이 조악하여 운크라원조, 미국의 원조로 공급되는 노트와 미제연필을 사용하였다.가을견학에는 학교 동편으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건축가 강명구 설계의 동양최대 안양영화촬영소에 견학 가서 ‘성웅 이순신’ 특수촬영 수조장치를 보고 설명도 들었다.6학년 봄 비가 많이 오자 농번기 지원하라고 집으로 보낸다. 동급생 조씨는 안양유원지에서 수영하다가 물막이 물살이 세어 틈새에 붙어 사망하였고, 여동생 조씨는 성장후 국제선수가 되었다.어느날 안양사가는 중턱 김창룡 장군 장례행사에서 우울하게 서있는 이승만대통령을 근거리에서 보았다. 강명구가 설계한 안양영화촬영소 기공식 정초식에 2번을 합하면 50년대 이승만대통령은 석수동에 3번 방문한 것이다.가을에는 주산대회가 있기에 담임은 군내경진대회에서 일등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야간까지 열심히 하여 일등을 하였다. 상금을 기다렸지만 단임 선생님은 졸업시 상금대신 콘사이스 한권을 주었다. 변경이 되어 아쉬웠다. 4개의 초등학교 2년2학기~3학년 1년 반의 공백 1년 휴학을 거쳐 간신이 초교를 졸업했다.#시흥군 #안양읍 #삼성산

 

 

옛 기억을 끄집어낸 최승원님은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김종우]안양시내 경양식집 이야기(2020.05.06)

이야기보따리/기억


안양 시내의 수많았던 음악 다방...

음악 다방과 함께 젊은이들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 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경양식 집 이라고 불리웠던 RESTAURANT 입니다.


 

오늘은 RESTAURANT 이야기 입니다.

아... RESTAURANT 이라는 표현 보다는 

경양식 집 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 할 듯 합니다.

왜냐하면...

30년 전 에는 경양식 집 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기 때문 입니다.


 


30년전의 이야기 입니다.

아직도 먹거리가 귀하던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삼시 세끼 밥만 먹어도 다행 이었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輕 洋 食 ...


경양식 이라는 표현은 일본식 표현 방법 입니다.

말 그대로 가볍게 먹을수 있는 서양식 음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표현 처럼 경양식은 이래 저래 가볍게 

먹을수 만 은 없는 고급 음식 중에 하나 였습니다.

  


돈가스... PORK CUTLET...

돼지 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경양식 집의 대표적인 MENU 였습니다.

지금이야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저 그런 음식 이지만 예전 에는 누구나,

아무때나 먹을수 있는 그런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

당시 120원 하던 커피 값의 20여배가 되는 돈가스의 가격은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 들 에게는 그림의 떡이 었기 때문 입니다.



칼질 하러 간다...

이 의미는 경양식 집에 식사를 하러 간다는 표현 입니다.

누군가가 거들먹 거리며 으시대고 경양식 집 에 간다고 하면 

그 친구는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돈가스는 우리 세대 들 이라면 그 당시 

처음 으로 맛 보았던 음식 중 하나 입니다.

아마 어떤 친구 들은 주 MENU 가 나오기 전의 SOUP 만 먹고는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경양식 집을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뭐 이따위 음식이 다있어?"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그래도... 

경양식 집 은 가면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기에

또 다시 찾게 되는 그런 곳 이었습니다.

경양식 집의 분위기는 음악 다방 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단 조용한 분위기에 정숙 해집니다.

음악 다방 같이 시끄럽지도 않고 

음악 또한 분위기 있는 MOOD MUSIC 입니다.

매장 가득히 풍기는 음식 냄새 또한 

찌든 담배 냄새가 풍기는 

음악 다방 과는 비교가 안되며 

기름지고 향긋한 음식 냄새는

식욕을 돋구며 우리의 코를 자극 하기도 합니다.

된장 찌개, 김치 찌개 냄새에 길들여진 

우리의 허기진 배가 호사를 누릴 순간 입니다.



경양식 집 에 가면 변하는 것 이 있습니다.

숟가락은 SPOON 이 되고

삼지창 처럼 생긴 꼬챙이는 FORK 가 되고

칼은 KNIFE 가 되고...

밥은 RICE 가 되고

접시는 DISH 가 되고

휴지는 NEPKIN 이 됩니다.

그리고 종업원 남자 에게는 아저씨 라는 호칭을 쓰면 안됩니다.

웨이러... WAITER... 가 제대로 된 호칭 입니다.

이 정도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 다면 촌스럽다고 했던 시절 이지요...

  

나무 젖가락 으로 먹는 짜장면 과는 

비교가 안되는 호사를 누릴수 있는 곳 이

바로 경양식 집 이었습니다.

 


그 당시 경양식 집 들은 좌석 마다 모두 

칸막이 시설을 하였는데 청춘 남녀가 DATE 하기에는

최고의 장소가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문 까지 달아놓은 은밀 하고 으슥한 곳 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네 분식집 에서도 흔하게 먹을수 있는 돈가스...

호프 집 에서도 술안주로 먹을수 있는 돈가스...

집에서도 간단히 조리 해서 먹을수 있는 돈가스...

짜장면 처럼 흔해지고 아무나 먹을수 있는 돈가스...

격세지감 이라는 표현이 돈가스 에게도 적용이 된 세상 입니다.



안양 1번가 에는 유명한 경양식 집 이 하나 있었습니다.

들판 이라고 하는 업소 였는데

우리 세대 라면 누구나 한 두번은 찾아 갔었던 곳 입니다.

아마 내가 아는 친구들 중 에는 이 곳 에서

첫 KISS 를 시도 했거나 당했던 친구들도 있을 겁니다.^^

1970년대 말 부터 영업을 해왔던 곳 인데

5, 6년전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수많은 먹거리가 생겨 나면서

경양식 집도 사양길로 접어 들더니 이제는...

안양 1번가 에서 예전 같은 경양식 집 은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PIZZA, HAMBERGER, SPAGHETTI 등 색다른

외식 사업에 밀려 났기 때문 입니다.



지금은 더이상 경양식 집 이라는 

표현을 쓰는 촌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예전 그 분위기의 경양식 집도 이제는 없습니다.

이제는 대중화 되어진 OUTBACK STYLE 의

RESTAURANT 이 성업 중 인데

탁 트인 공간과 자유로워진 분위기는  

예전의 경양식 집 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 입니다.

우리 세대가 찾기 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곳 이지요...

30년 전의 다방과 경양식 집의 추억...

절대로 잊을수 없는 우리들 젊은 시절 초상의 한 부분 입니다.


  

편집자주: 글쓴이는 안양시내에 있던 다방. 경양식집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안양초등학교 41회 졸업생 김종우씨다. 그는 안양시내 음악다방에서 직접 DJ로 일했으며 안양 다방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데 그가모은 300여개의 안야시내 다방, 음식점, 술집 성냥갑에는 1970-80년 안양에서 살았던 이들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안양 남부시장 육덕찌개 2층에 자리한 그의 아지트 자그마한 공간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모았다는 수천장의 클래식.팝 LP판을 비롯 앰프와 스피카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김종우]안양 음악다방 이야기(2020.05.06)

이야기보따리/기억


나는 지금도 그 예전 30여년 전의 다방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설레고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과 추억이 떠올라서

잠시나마 옛 생각에 잠기고 그 시절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1978년 년말 부터 1979년 년초의 한 겨울...

19,20살 시절 철없이 마냥 신나고 즐거웠던 기억의 중심 에는

 그 이름도 정겨운 다방이 있었습니다.

 


다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빼놓고선 그 시절을 기억 하거나

추억 할수 없을 정도로 다방에 관련된 이야기 라면

나에게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수다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기억 하는 안양의 다방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안양에서 음악 다방 이라고 지칭 되던 다방의 시작은

중앙 시장 입구의 중앙 다방과 신신 다방 그리고

약속 다방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 되는데

우리 모두가 기억 하는 다방 이름들 입니다.

 

 


 

茶房...

다방 하면 떠오르는 냄새가 있습니다.

특히 지하실 이라면 축축하고 습한 곰팡이 냄새...

마대 라고 하는 커다란 걸레로 바닥을 청소한 후의 물먼지 냄새...

싸구려 천으로 만든 의자 에서 솔솔 풍기는

 표현 하기 힘든 정체불명의 냄새...

싸구려 원두커피 끓이는 냄새...

환기 시설이 안좋아서 다방 가득히 뱅뱅 도는

찌든 담배 냄새...

아... 나에게는 정겨운 냄새가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예전의 다방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위에 열거한 수없이 많이 맡았던

다방 특유의 냄새 때문 일 것 입니다.

 

1978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시절 부터 본격적으로

다방 출입을 했었던 나는 한동안 다방 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하루의 대부분을 다방 에서 보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음반 보다

다방에 더 많은 음반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커피값 120원 만 있으면 하루 종일 음악을 들을수 있었던 다방...

나에게는 다방 보다도 더 좋은 놀이터는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 세대 이전 부터 성업 중 이던 다방 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크게 두가지 유형 으로

나뉘어 지는데 음악 다방 이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다방이 생기 면서 한복 차림을 한

여주인이 운영 하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드나 들었던

속칭 노땅 다방은 시내 에서는 찾아 보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보리수 다방 이야기 입니다.

중앙 시장 입구 버스정거장 앞 3층 건물 지하에 있었던

보리수 다방은 그 당시 주인 아줌마 때문에

기억이 더욱 각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우리 나이 쯤 되어보이는 아줌마의 서늘한 눈빛은

지금도 잊을수 없는 기억 인데...

하루 종일 자리를 차지 하고 앉아 있었던 시절 입니다.

여친과 함께 앉아 있으면 한심 하다는 듯

이제는 그만 나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주며

나와 여친을 번갈아 쳐다 보며 연신 혀를 차던 그 아줌마...

지금 까지도 잊을수 없는 차갑고 서늘한 기억의 시선 입니다.

 

 


 

안양 에는 중앙 시장 입구 쪽과 길 건너편 안양 1번가

중심 상가 쪽에 많은 다방 들이 밀집 되어 있었는데

중앙 시장 쪽에는 신신 다방, 중앙 다방, 약속 다방,

삼원 다방, 보리수 다방이 있었다면

길 건너편 에는 동굴 다방, 신도 다방,

금성 다방, 동산 다방, 전원 다방,

원 다방, 태양 다방, 심지 다방, 까치 다방 등 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방 이름 들이 모두 한글 이름 입니다.


 


 


 

그런데...

1980년 이후 다방 업계는 커다란 지각 변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상아탑 다방의 개업이

지각 변동의 시작을 알렸는데

안양 1번가 입구 쪽 건물 2층에 새로운 시설을 갖추고 개업 한

상아탑 다방은 넓은 실내와 최신 실내 장식, 기존의 다방 들 과는

차별화 된 깨끗한 분위기로 칙칙한 다방 분위기에 식상 했던

젊은이 들을 하나 둘 씩 불러 모으기 시작 하더니

언젠가 부터는 안양 다방의 대명사로 등극 하게 됩니다.

그러더니...

그 후 로는 다방의 상권이 안양 1번가  쪽 으로 몰리게 됩니다.

 

 


 

개업 초기 에는 음악실 에서 강석 이라는 DJ가

최고의 인기 DJ로 많은 손님 들을 몰고 다녔는데

지금은 MBC방송국의 유명한 MC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 벙글 SHOW라고 하지요...^^

비슷한 시기 에는 상아탑 다방 건너편 건물 2층 에도

다방이 개업을 하는데 현대 다방 이라고 합니다.

 

 


 

지금 생각 하면 개업을 한 상아탑 다방 이나 현대 다방의

시설 이나 분위기가 그다지 썩 훌륭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나 그때나 새로운 것 에 열광 하는 젊은이들의 욕구는

누가 뭐래도 막을수 없는 현실 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설의 다방 분위기는 나에겐 웬지 어색 했습니다.

중앙 다방, 신신 다방, 보리수 다방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최근 개업 다방 에는 그다지 출입을 하지 않았는데

웬지 정이 안가다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아탑 다방과 현대 다방이 개업 한 후에도 계속 해서

분수 다방, 참피온 다방, 크로바 다방이 개업을 하는데

다방 상권이 완전히 1번가 쪽으로 넘어 오면서

중앙 시장 쪽의 다방 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됩니다.

 

이후에도 안양의 다방 전성기는 4, 5년간 계속 되는데

1985년 이후 에는 그토록 번성 했었던 다방 사업도

사양길로 접어 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름도 고상한 COFFEE SHOP이 하나 둘 씩 생기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곳 을 찾는 손님들이 생겨 나고

손님 들이 몰리기 시작 하더니 시내의 다방 들도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 하거나 COFFEE SHOP이라는

간판 으로 상호를 바꾸기 시작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

다방 에서는 DJ를 채용 하여 음악실을 관리 했는데

이 당시 안양 에도 유선 방송국이 생기면서

 약간의 유선비를 지불 하면 하루 종일 음악을 지원 받을수 있었기에

고임금의 DJ들은 더이상 설자리가 없어 지고 맙니다.

 


내가 기억 하는 안양의 마지막 음악 다방은 안양 1번가

중심가에 위치 했던 CLOVER 다방 입니다.

1988년 폐업 한 것 으로 기억 하는데

이후에는 음악 다방 이라는 단어도 듣기가 힘들어지고

다방은 동네 변두리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물론 시내 중심가에 다방이 있었지만 그 예전의

그런 다방의 모습은 더이상 아니었습니다.

 

다방의 사양길은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 이 아닐수 없습니다.

한시대 젊은이 들의 해방구 역활과 사랑방 역활을 톡톡히 해내며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아도 되었을 만한 시기에

COFFEE SHOP이라는 복병에 덜미를 잡히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후에 COFFEE SHOP은 성공을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COFFEE SHOP 또한 오래 가지 못합니다.

HAMBERGER에 밀리고 PIZZA에 치이고 빵집에 꼬집히고

수많은 FAST FOOD에 두들겨 맞더니 현재는

온갖 먹거리를 다파는 MULTI SHOP으로 변신 하고

더 나아가 수입 BRAND COFFEE SHOP까지 생겼났습니다.

별 다방, 콩 다방이 좋은 예 입니다.

 

 30년전의 아련한 다방의 기억과 추억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합니다.

칙칙한 다방의 익숙한 그 분위기... 그 냄새...

둘러 앉아 쓸데 없는 잡담을 나누던 친구들...

하루에도 몇번씩 들을수 있었던 똑같은 음악들...

점심은,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하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 하던 시절...

 

30년전 친구 여러분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셨습니까?

 
편집자주: 글쓴이는 안양 다방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안양초등학교 41회 졸업생 김종우씨다. 그는 안양시내 음악다방에서 직접 DJ로 일했으며 안양 다방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데 그가모은 300여개의 안야시내 다방, 음식점, 술집 성냥갑에는 1970-80년 안양에서 살았던 이들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안양 남부시장 육덕찌개 2층에 자리한 그의 아지트 자그마한 공간에는 중학교 시절부터 모았다는 수천장의 클래식.팝 LP판을 비롯 앰프와 스피카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용구]안양 병목안 채석장의 기억(2010.05.20)

이야기보따리/기억

병목안시민공원 탐방기

 

지난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자 우리 안양 토박이들의 모임(서이회)이
 있어 점심을 하고 처음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있는 병목안
 시민공원을 가 보기로 했다


 이곳은 벌써 4년전인 2006년 5월 24일에 완공을 보았고 이에대한
 찬사(讚詞)가 자자해 한번 꼭 가 보려 했으나  나는 가까이 살고 있다
 하여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껏 가 보지 않았다가 오늘 시간도 있고 
날씨도 좋은 기회라 하여 나섰다


 말에 의하면 여기에 10만1.238m2 부지에 약 260억이란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안양 시민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시내 창박골행 버스로 
삼거리 수퍼앞에 내리니 바로 올려다 보였다  공원입구 광장 안에는
 자연석에 가로 새긴 "병목안시민공원"이라 쓴 돌 비석이 있었다 


여기에는 주차장이 있고 각종 식물원과 잔디공원을 지나 가파른 언덕
 근 백개의 돌 계단을 올라가니  5개의 크고 작은 인공폭포
(높이65m 폭95m)가 있는데 그 위용(偉容) 이 장관이었다


 폭포 앞에 넓은 광장에는 각종 파라솔과 벤취에는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한가롭게 휴식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정자와 팔각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발 지압장을 비롯하여 체력단련장(8종14개의 운동시설) 어린이
 놀이터 시설 그리고 모형 화물열차가 있고 그 옆에 화장실과 매점이 있다
 그 외 만남의광장 야생화정원 사계절정원 중앙광장 산책로등이 있었다


 특히 전시용 화물열차에는 돌이 실어져 있었고 당시 자갈을 운반하던
 소형의 자갈차였다 또한 눈을 감으니 내가 어려서 본 채석장 암석을
 폭파하는 폭음이 귀에 들리는듯 하고  큰 돌을 분쇄하는 기계(碎石機)
소리와 뿌연 돌 먼지등 자갈을 운반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또한 이곳은 내가 어려서 뛰고 놀던 범위의 고향 마을이다 내가 어려서는
 한낱 채석장(採石場)이고 여기서 더 가면 속칭(俗稱) 담배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구한말 당시 천주교 탄앞으로 교인들이 이곳 산속으로 피신하여
 담배와 참 숯을 구어 생계를 이었다 한다


 그래서 담배촌이라 했고 이곳에는 천주교 순교자 신부의 묘소도 있으며
 수리산 북측 수암천(秀岩川)의 발원지(發源地)로 봄철에는 고사리
 싸리버섯등 각종 산 나물의 생산지 이기도 했으며 여기 까지도 안양시
 관내로 안양시 유원지에 속해 있다  


이 채석장은 내가 유년시절 자갈을 운반하기 위해 우선 (1935년경)
안양역에서 부터 현 안양 3동사무소 앞까지 자갈 차 길이 생겼으나
 그후 이에 약 2배나 멀리 산속으로 (오지) 대폭 연장 하여 이곳
(안양9동) 시민공원 앞까지 차 길을 깔아 당시 1940년경 경부선
 복선공사(複線工事)와 수인선 기타 신설등 철도 기차 선로
 보강보수용 자갈을 생산해 실어 날랐다


 그후 오래전 부터 자갈이 그리 많이 필요치 않아 채석장은 자연
 폐쇄(廢鎖)되는 바람에 방치 되었고 기차길 마저 철거 되어 폐석장
 절개사면을 그냥 두쟈니 미관(美觀)도 나쁘고 낙석(落石)등 위험도
 있다 하여 안양시에서 착안하여 과감히 시민공원으로 발전
 조성된 것이다


 딩시 자갈차는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빈 납작한 자갈차 여러대를
 연결하여 기적을 울리며 기관차가 밀고 들어 왔다가 자갈을 싫은 차를
 끌고 나갔다 우리 꼬마 들은 느리게 밀고 들어오고 나가는 자갈차를
 뛰어 잡아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차장과 기관사는 위험 하다 하며
 못 타게  크게 소리소리  질으며 제지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미 나게 타고 내리던 옛 추억도
 떠 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위험한 짓이었다 그후 철거 되기 까지
 여러가지 문제와 사상(死傷) 사고등 사건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자리에
 생략 하기로 한다


 또한 옛날 내가 자랄 때는 이곳은 산간 벽지로 그 앞 냇가 변두리에
 산 딸기가 많아 따 먹기에 바빴고 숲이 울창하여 혼자서는 가기가
 서먹 했던 이곳이 그후 70 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를 중심으로 이런
 오지에 이르기 까지 아파트. 일반주택. 학교. 한증막(찜질방) 음식점.
오락시설 기업체 등이 꽉 들어차 있다


 내 고향이 이렇게 눈 부시게 발전을 하다니 세월에 감사 하며 더욱
 애향심(愛鄕心)을 느끼는 동시에 더욱 발전 되어 살기좋은 안양시가
 되길 기원 하였으며 오히려 내가 늙었음을 실감 했다


 또한 이곳은 수리산 입구로 겨울을 제외 하고는 수리산 등산 객으로
 분볐으며 오다 가다 쉼터가 되고 있으며 매점으로 통하는 등산로로
 조금 더 가면 2개의 석탑(石塔)이 있다


 계속 올라 가면 몇개의 약수터와 황토길 체력단련장 충혼탑(忠魂塔)
등이 있고 안양 5~8동으로 통하는 안양 유일의 수리산(修理山) 산책은
 물론 공기 맑은 삼림욕장(森林浴場)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안양9동-3동-2동으로 시내로 흐르는 수암천(秀岩川)은 비교적
 건천(乾川)에 가까워 진 겨울은 물이 흐르지 않으나 여름철 장마 때는
 홍수(洪水)로 물이 넘치는 지라 수시로 준설과 대비를 하고 있으며 매년
 장마(홍수)가 지나가면 많은 돌이 솟았기 때문에 이곳을 자갈
 채취장으로 선정 된 것이었다 


내려 오는 길목  마침 매점 앞에 안양 신일교회에서 베푸는 커피 한잔을
 대접 받고 걸어 오며 옛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아래 내가 살던
 옛 집과 이웃을 찾아 보니 벌써 돌아 가신 분도 계시고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려오며 삼덕공원(三德公園)을 들러 보고
 집에 돌아왔다.

 

이 글을 쓰신 이용구(李瑢求) 선생은 1926년 10월생으로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9살 나던 1934년에 안양공립보통학교를 7회로 입학해서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선생은 졸업한 이듬해인 1945년 1월부터 40년간 근속으로 철도청에서 근무한 후 1984년 정년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학창시절 작문시간이면 고역을 치르곤 했던 선생은 철도청에서 발간하는 ‘교통’이란 잡지를 보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 ‘여행의 유혹’이란 제목으로 투고했더니 이후 3회에 걸쳐 게재가 되고, 원고료도 받고 동료들의 칭찬과 격려까지 들어 몹시 즐거웠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후 기쁜 마음에 여기저기 투고 하게 되었고, 투고하는 것 마다 게재가 되어 30년간의 문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유년 시절인 일제 강점기부터 8·15해방 이후 안양의 산업화·도시화 과정과 생활상, 풍속 등을 담은 자전적 수필집 '양지마을의 까치소리’(1991)를 펴냈는데 안양의 엣 사회상을 담고 있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자 주-

[기억-조동범]안양 태창목재소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기억

태창목재소 / 조동범

<시와정신> 2003 가을호 시인이 쓴 산문

 

 며칠 전인가 퇴역 군함을 수장시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사진 속의 군함은 제 생명을 다하고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뱃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군함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일생을 바다에서 보내고 바다로 돌아가는 군함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 없이 많은 전투와 항해를 겪었을 군함의 최후는 장엄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다이버들의 훈련용으로 쓰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고철로 분해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즐겁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군함은 천천히 녹이 슬어가며 아주 오래도록, 바다에서 보낸 일생을 추억할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몇 달 전에 문을 닫은 태창목재소를 떠올렸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던,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창목재소. 태창목재소는 1976년에 문을 열고 올 봄에 문을 닫은, 말 그대로 나무를 파는 상점이다. 태창목재소는 27년의 세월을 견디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아이의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2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27년 전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만큼 자란 나는 그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엘 다녀오고 결혼을 하였다. 언제나 나무 향 가득하던 목재소는 그렇게 세월을 남겨두고 문을 닫고 말았다.

  목재소 가득 퍼지던 나무의 향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배어 나온 그 향은 마치 깊은 숲에서 나는 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무에서는 언제나 그런 기분 좋은 선선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목재 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부모님께 인사를 했고 친구들과 그 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으며 나무가 가득 쌓인 통로를 지나 변소엘 갔다. 그 곳에는 언제나 나무의 향이 가득했다.

  한번은 목재소가 있던 안양에 대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목재소가 문을 연 다음 해였던 1977년의 일이었다. 물은 천장까지 차올랐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밀려들었는지 삽 한 자루를 들고 물을 막아보려던 아버지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물은 삽시간에 나무가 쌓여 있던 마당과 창고까지 차올랐다. 밤 새, 물 위로 떠오른 나무와 그 향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혹시 나무가 홍수에 모두 휩쓸려 먼바다를 떠도는 꿈을 꾸신 것은 아닐까? 참담한 여름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늘에서 아주 오래도록 나무를 말렸다. 물에 젖은 나무의 향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마르자 허옇게 일어난 톱밥이 우수수 떨어졌다. 톱밥은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공중에 흩뿌리던 톱밥은 아마도 부모님의 눈에 박혀 눈물과 함께 나무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을 것이다.


태창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나무를 들어내자 세월을 뒤집어 쓴 톱밥이 뿌옇게 드러났다. 나는 그날, 톱밥에 섞인 뿌연 먼지와 함께 폐부로 들어오는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바다 너머 낯선 이국의 밀림과 밀림의 푸른 나무를 떠올렸다. 태창목재소는 한 번도 푸른 나무를 들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선선한 나무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지난 27년 동안 나는 목재 창고 안에 배어 있던 나무 냄새를 맡으며 언제나 밀림을 눈앞에 그리곤 했다.

  톱밥은 곱고 부드러웠다. 손끝에 올려놓은 톱밥을 지그시 누르자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왔다. 지금이야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당시만 해도 톱밥은 매우 유용한 보온재였다. 톱밥 위에 누우면 전해지는,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톱밥에 누워 손끝에 전해지는, 푹신하면서도 까칠한 느낌을 주먹에 가득 쥐고는 잠이 들곤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 태창목재소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님은 목재소를 차리기 위해 살던 집을 팔았는데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살던 집에서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목재소를 찾지 못해 무척 당황했었다. 우리 식구는 그 후로 오랫동안 목재소 귀퉁이의 무허가 집에서 나무와 함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목재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커다란 트럭이 들어와 내 키보다 높게 나무를 부려 놓았다. 부모님은 내 키보다 높은, 아득한 곳에 차곡차곡 나무를 쌓았다. 밀림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을 나무는 언제나 나이테를 드러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팔려나가 집이 되고 가구가 되고 기둥이 되었으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 소년을 키웠다. 나무의 뿌리는 바다 너머 아득히 먼 이국에 남았지만 목재소의 나무는 내게 언제나 단단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거대한 푸른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 식구는 그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언제나 행복했다. 목재소는 몇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빈 공터에 허술한 나무 담장을 두르고 있던 목재소는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상호도 태창목재소에서 태창종합목재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번 없이 네 자리였던 전화번호도 한 자리 국번과 두 자리 국번을 거쳐 세 자리 국번을 갖춘 전화번호로 바뀌었다.

  수장되는 군함의 사진을 보며 나는 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켜켜이 쌓인 톱밥을 쓸어내며 느꼈던 아련함을 보았다.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세월을 간직한 채 깊은 바다에 수장되는 군함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목재소의 추억을 떠올렸다. 군함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지만 바다에 잠겨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바다 속 깊은 곳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제 몸 곳곳에 바다를 담고 바다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목재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바다가 되어 가는 군함처럼 내 마음 속에 담겨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고 나무의 향을 뿜어 27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재소를 그만두게 되어 편하다고 하시는 부모님 역시 꿈 속에서 나무 향기 가득한 추억을 건져 올릴 것이다.


지금은 피아노 상점이 들어선, 목재소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정리된 피아노 상점 바닥의 귀퉁이에 아직도 치우지 못한 톱밥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의 향은 거의 잃었지만 톱밥 부스러기는 아직도 목재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목재소와 나무 그리고 나무의 향을 아직까지 가슴 속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일까? 목재소에 관한 시 한 편 변변히 써보지 못하고 시인이 되었는데 이제 목재소는 그 자리에 없다. 수장된 군함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담긴 목재소를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나무의 향기 내 마음 속에 가득한데 어쩐 일인지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려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1동 557-34번지.

  아직도 목재소가 있었던 그 자리를 지날 때면 나무의 향이 나는 것만 같다.

  그 곳에, 나를 키운 목재소가 있었다.

  나무의 향 가득한, 태창목재소가 있었다.

 

 

[기억-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1) [한직골-인덕원]

 

도시 벌레가 농촌 풀잎을 야금야금 잠식(蠶食)하듯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거센 파도 아래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homeless)가 된 느낌이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어디 변화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지금 어딜 가나 어리벙벙해질 뿐이다. 옛날 산골 촌놈 서울 구경의 충격이 도처에 있게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길가에 동네가 있게 마련이다. 한직골과 안양 사이에는 ‘한직골-양지편-벌모루-성고개-진터-인덕원-(동편)-부림말-간뎃말-(샛말)-말무데미-뺌말-(안날뫼)-구리고개-(운곡)-수푸르지-안양’이 굵은 동아줄에 큰 매듭들로 맺혀있듯이 있었다. 마을마다 아이디(ID)가 붙어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자타에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들은 장소(場所, place)로서의 역사문화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든 것이 이제는 장소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장소 자체가 사라져서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은 무장소(無場所, placelessness)가 되어 버렸다. 아나로그 동네가 디지털 번지로 박제화 되었다.  

지금 판교에서 청계산 하우고개를, 지금 용인 수지에서 광교산 고분재를 넘거나 해서 내려오면 한직골이란 동네가 있었다. 안양에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해서 하루 두세 번 왕래할 때 터미널이 한직골이었다. 덕장초등학교가 북쪽 언덕으로 올려다 보이고, 사이에 청계 개울이 있어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맑은 물이면 이름을 청계(淸溪)라 했을까? 지금은 서울외곽도로, 과천-의왕간 도로 등이 얼기설기 고가로 지나는 곳이 되어서 보기에도 어지럽기 그지없다.

청계 개울이 구렁굴 앞에서 넓게 퍼져 흐르는 여울을 징검다리로 건너면 양지편 앞길이 된다. 남향받이 동네여서 양지편이라고 했을 것이다.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촌이었으며, 마을 가운데 꽤 큰 규모의 기와집과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 한참 후에 양지편 언덕 마루에 덕장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 포일리 이장 댁이 있어서 6ㆍ25 전쟁 후에 구호물자를 나눠주거나,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거나 하게 되면 이 동네를 가야만 했었다.

양지편에서 느린 산비탈 끝을 돌아서면 벌모루 동네가 보인다. 네다섯 채의 집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정자는 없었지만 그 나무를 정자나무라 불렀다. 거기서 북쪽으로 오솔길을 한참 올라가면 덕장골이었는데, 지금은 서울구치소가 들어와 동네가 흔적조차 없이 되어버렸다. 무재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와 덕장골을 거쳐 흐르는 실개천이 벌머루에서 학의천에 합류한다. 그곳을 우리들은 벌머루 개울이라 하였고, 여름철이면 그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았었다.

한직골에서 떠난 버스가 양지편에 서고, 다음 정류장은 벌머루 끝 초가집 대문 앞이었다. 그 집 울 안에 거무죽죽한 큰 나무를 넘겨다보면서 수수깡울을 돌아 조금 나가면 성고개 앞이 된다. 옛날 무슨 성(城)이 있었기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리라. 이 마을은 길에서 조금 떨어져 언덕 숲속에 숨어있듯이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속에 어떤 집들이 있는지 궁금해 한 적도 있었다. 성고개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면 안쪽으로 임이 마을이 건너다보였다.      

성고개 앞을 지나서 약간 오르막길을 가면서 오른쪽 언덕을 진터라고 하였다. 옛날에 진을 쳤던 곳이란 뜻이리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 주인집인지, 큰 집과 그것에 딸린 작은 집이 있었다. 진터 앞을 지나면서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오른쪽 남향받이로 꽤 넓은 포도밭이 있었고, 그 반대편 길 건너로는 참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후에 신성중ㆍ고등학교가 세워졌고, 나중에 그 학교는 안양시내로 이전했으며, 지금 그곳은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는 데서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 내 할아버지께서는 가을철 모과를 따서 마차에 싣고, 과천-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가서 팔고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옛날 과천은 한양 남쪽 강남의 유명 고을이었다. 문화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지였다. 일찍이 1912년 과천보통학교가 세워져서 내 선친과 숙부님들이 모두 그 학교를 졸업했으며, 숙부 한 분은 과천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화성군(지금의 의왕시, 화성시)에서 초등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렇던 과천이 지금처럼 정부 부처가 들어오고,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골 읍내의 초라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라기보다는 안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 퇴보해서 지방의 한촌(閑村)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관악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안온한 동네였다. 지금 과천에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본래 ‘베레이’인데, 볕이 잘 드는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과천이 신도시 안양에 눌려서 한적한 시골 동네로 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양이 이른바 ‘경부발전축’의 서울 근교 거점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토를 종단한 1번국도(목포-신의주)가 안양을 지나가게 되고, 철도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서 안양은 졸지에 과천을 누르고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과천은 이미 늙어버린 구읍이었고, 안양은 청년기에 든 신흥도시였었다.

관악산 남태령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면 왼쪽 우면산 밑으로 뒷골이란 동네가 있었고, 삼거리에서 지금의 양재동(말죽거리)으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길가에 선바위(입암) 마을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관악산 기슭에 향교말이 있고, 길가에 새술막이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이 된 지역에는 과천저수지가 있어서,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두고 있었다. 청계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그런지 그 산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특별히 맑았었던 것 같다. 청계산 서쪽 과천저수지 일대를 막계동(莫溪洞)이라 부르는데, ‘막계’는 ‘맑(은)내’의 어색한 한역일 것이다.  

길가 새술막 안쪽으로 남양 홍씨 집거촌이라는 홍촌(洪村)이 있었고, 조금 내려와 길 건너쪽으로 구리안 마을이 있었다. 조금 남쪽으로 찬우물이란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안양에도 냉천동이 있는데, 같은 뜻의 지명이다. 그 동네 길가에 큰 배밭이 있었고, 배밭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면 가루개(갈현리) 마을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비울, 가는골(세곡) 마을, 그 사이에 샛말이 있었다.

지금 과천-의왕간 도로 변에 세워진 제비울미술관이 그 제비울 마을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찬우물 아래로 가일이란 마을이 있었고, 서편으로 벌말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벌에 있는 동네였다. 지금 무슨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찬우물에서 가일을 거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부림말이었다.   


 

한직골에서 안양까지(2) [인덕원-말무데미] 
 
인덕원은 옛날에도 사거리였다. 길섶에는 망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질경이가 발에 밟혀 납작하게 눌어붙어 있었던 소박한 시골 사거리였다. 남쪽 개울 건너 쪽으로는 벌말이란 동네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동네를 포함해서 안양까지 이어진 벌 전체는 넓은 논 지대였는데, 나중에 평촌지구로 개발되어 지금 평촌신도시가 되었다. 인덕원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서 조금 나가면 과천에서 나오는 길을 만나게 되고, 그 삼거리 안쪽에 만들어진 동네가 부림말이었다. 

부림말은 안양이라는 도시로 나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안양-과천 선에서 한직골 선이 분기하는 당시 교통의 요지가 부림말이었던 것이다. 전에는 버스가 안양-과천 사이만 왕래했기 때문에 부림말까지 걸어 나와서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버스정류소는 부림말 길가에 있는 대장간이 붙어있는 집 앞이었다. 겨울철이면 그 대장간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 대장간의 녹슨 양철 칸막이의 틈새로 과천 쪽 찬우물에서 올라오는 버스 불빛을 기다리곤 했었다. 가끔 그곳에서 낫이고, 호미를 단김에 쇠망치로 쳐서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괴탄과 화덕과 모루, 풀무 등이 참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 대장간 뒷길로 들어가면 부림교회가 있었다. 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했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동은교회로 개명하고, 길 건너 안양 쪽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부림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나무 종루에서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가 멀리 덕장골까지 들렸었는데, 이제 어디서고 교회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요절을 외우는 일, 하기학교가 시작되면 교회 앞마당에 큰 물통을 놓고, 감미료(사카린, 아니면 당원이란 것)만을 탄 물을 한 컵씩 나눠주곤 했었는데, 그것이 무슨 별식이라도 되는 양 뙤약볕에 장사진으로 기다리곤 했었다.

성탄절 준비였던지 어느 날 밤 교회 앞 작은 사택에서 헌 오르간으로 찬양 연습을 할 때 미국 간 누님, 옆집의 누님 등이 찬양대원이었고, 찬양대 지휘자는 키가 크고, 말처럼 얼굴이 길게 생긴 분이었는데, 지금 얼마나 큰 음악가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 동네는 간뎃말(가운데말, 中村)이었다. 부림말과 말무데미 사이 가운데에 끼어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약간 언덕 위로 들어서 있는 이 동네는 규모가 작았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간이역 같은 동네, 과문불입(過門不入)해도 괜찮을 만한 곳이란 뜻인가.

동네 앞을 지나다 보면 어느 동네이건 동네가 풍기는 나름대로의 바람결이 있고, 바람결에 묻어오는 냄새가 있었다. 덕장골에서 안양에 이르는 한길 가에는 군데군데 마을들이 한 줄에 꿰이듯이 늘어서 있었으며, 제각기 독특한 사랑방 머슴 냄새와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연기도 모양이 다르고, 냄새가 서로 달랐었다. 저녁 밥 누른 내나 괴꼴 태우는 냄새도 동네마다 달랐다. 가을걷이를 태우는 냄새는 더욱 다양하였다. 별다른 냄새가 없이도 그 동네의 분위기가 냄새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니어스 로우사이(genius loci)의 몸내였다. 

간뎃말을 언뜻 지나치면 말무데미(말무덤)였다.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한자로 마분동(馬墳洞)이라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말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하필이면 왜 거친 뜻의 말로 동네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작명 의도가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좋게 여겨지기도 했다. 동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앞은 지나다니기가 망설여지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 동네마다 짓궂은 놈들이 있어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텃세를 부리면서 괴롭히곤 했었다. ‘왜 쳐다보느냐?’는 것이 시비의 실마리가 되었던 동네 골목대장들의 최전선이 말무데미 한길 가였던 것이다. 근처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관양초등학교가 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기억-정진원]남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님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는 데서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 내 할아버지께서는 가을철 모과를 따서 마차에 싣고, 과천-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가서 팔고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옛날 과천은 한양 남쪽 강남의 유명 고을이었다. 문화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지였다. 일찍이 1912년 과천보통학교가 세워져서 내 선친과 숙부님들이 모두 그 학교를 졸업했으며, 숙부 한 분은 과천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화성군(지금의 의왕시, 화성시)에서 초등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렇던 과천이 지금처럼 정부 부처가 들어오고,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골 읍내의 초라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라기보다는 안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 퇴보해서 지방의 한촌(閑村)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관악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안온한 동네였다. 지금 과천에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본래 ‘베레이’인데, 볕이 잘 드는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과천이 신도시 안양에 눌려서 한적한 시골 동네로 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양이 이른바 ‘경부발전축’의 서울 근교 거점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토를 종단한 1번국도(목포-신의주)가 안양을 지나가게 되고, 철도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서 안양은 졸지에 과천을 누르고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과천은 이미 늙어버린 구읍이었고, 안양은 청년기에 든 신흥도시였었다.

관악산 남태령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면 왼쪽 우면산 밑으로 뒷골이란 동네가 있었고, 삼거리에서 지금의 양재동(말죽거리)으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길가에 선바위(입암) 마을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관악산 기슭에 향교말이 있고, 길가에 새술막이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이 된 지역에는 과천저수지가 있어서,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두고 있었다. 청계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그런지 그 산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특별히 맑았었던 것 같다. 청계산 서쪽 과천저수지 일대를 막계동(莫溪洞)이라 부르는데, ‘막계’는 ‘맑(은)내’의 어색한 한역일 것이다.  

길가 새술막 안쪽으로 남양 홍씨 집거촌이라는 홍촌(洪村)이 있었고, 조금 내려와 길 건너쪽으로 구리안 마을이 있었다. 조금 남쪽으로 찬우물이란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안양에도 냉천동이 있는데, 같은 뜻의 지명이다. 그 동네 길가에 큰 배밭이 있었고, 배밭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면 가루개(갈현리) 마을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비울, 가는골(세곡) 마을, 그 사이에 샛말이 있었다.

지금 과천-의왕간 도로 변에 세워진 제비울미술관이 그 제비울 마을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찬우물 아래로 가일이란 마을이 있었고, 서편으로 벌말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벌에 있는 동네였다. 지금 무슨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찬우물에서 가일을 거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부림말이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기억-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 동재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    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춘향전」의 한 대목이란다.

 

  ‘동작진(洞雀津)-승방평(僧房坪)-남태령(南太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    店)-사근평(肆覲坪)-지지대(遲遲臺)-수원(水原)’ 김정호의「대동지지」가운데 일부분이다.

  ‘중화(中火)’한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점심을 한다는 뜻이므로 한양을 바삐 떠나 한강을 건너고, 세네 시간 걸려서 점심때쯤 인덕원에 당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몽룡이 인덕원에서 어떤 점심을 먹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학의천이 흐른다. 그 개울을 건너면 벌말(평촌)인데, 마을 규모가 비교적 큰 편으로 길가를 따라 기다랗게 된 동네였다. 일종의 노촌(路村)이었다. 그러나 마을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옛 문헌이나 지도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은 동네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동네 이름 ‘벌말’에서 한자 지명 ‘평촌(坪村)’이 나오게 되었고, 그 일대가 전에는  전부 논이었으나,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변화되어 평촌신도시가 형성되었다.

  벌말을 지나 조금 나가면 민백이란 동네였다. 지명의 연유를 찾지 못했다. 벌모루 개울을 건너서 들판을 걸어 나가면 벌말 남쪽 끝부분에서 민백이 마을 뒤쪽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 내손리 능안에서도 모락산 중턱을 넘어오게 되면 그곳에 갈 수 있었다. 민백이에서 오른쪽으로 한참 떨어져 귀인이란 동네가 보였고, 거기서 더 나가면 갈미 마을이었다. 

 갈미는 한자로 ‘갈산(葛山)’이라 하여 ‘갈미, 갈뫼, 갈산, 갈현’ 모두 칡(葛)이 많은 산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어디에나 많은 지명이다. 모락산 서편 기슭의 동네여서 오뉴월 모락산 칡덩굴이 이 동네까지 뻗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생각해 본다. 갈미에서부터는 제법 긴 한길이 뻗어있고, 오른편 멀리로는 범계(범내, 虎溪) 마을이 보였다.  

  군포장이 멀지않은 언덕배기 길을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덕현마을이 있었다. 당시 올라가고 있는 언덕길 밖에는 큰 고개란 없었는데, 마을 이름은 ‘큰고개’라는 뜻의 ‘덕현(德峴)’이었다. 안양에 대해서 수푸르지 마을 같은 것이 군포에 대해서 덕현 마을이었다. 여기서 조금 내려가면 군포였다. 안양쪽에서 수원으로 가는 국도를 만나는 사거리 동네였다.

  군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 마장쯤 가면 사그내였다. 정조의 수원 화산 원행의 행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그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모래가 많은 개천이란 뜻의 사근(沙斤)내>사그내? 그런데 이곳 한자 지명이 나중에 ‘고천(古川)’으로 된 것을 보면 사그내>삭은내>고천? 으로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 예전 의왕면 사무소가 있었고, 지금은 의왕시청의 소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지금의 의왕시청 뒷산인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완만한 경사의 백운산 자락을 오르면 지지대 고개가 된다. 그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면 수원 분지에 접어들게 되고, 수원성 북문에 당도하게 된다. 조선 정조의 원행로였다.

정조는 초기에는 ‘남태령-과천-인덕원-사그내행궁-지지대’를 거쳐서 아버지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융릉에 참배했으나, 후기에는 ‘시흥행궁-안양-사그내행궁’ 노선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영의정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 찬우물 마을에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가기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는 이 고개를 오르면 멀리 융릉이 있는 화산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서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돌아갈 때에는 이 고개를 넘게 되면 수원 화산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고개 위에서 어가를 멈추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고 해서 고개 이름을 ‘지지대(遲遲臺)’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