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이용구]안양 병목안 채석장의 기억(2010.05.20)

이야기보따리/기억

병목안시민공원 탐방기

 

지난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자 우리 안양 토박이들의 모임(서이회)이
 있어 점심을 하고 처음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있는 병목안
 시민공원을 가 보기로 했다


 이곳은 벌써 4년전인 2006년 5월 24일에 완공을 보았고 이에대한
 찬사(讚詞)가 자자해 한번 꼭 가 보려 했으나  나는 가까이 살고 있다
 하여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껏 가 보지 않았다가 오늘 시간도 있고 
날씨도 좋은 기회라 하여 나섰다


 말에 의하면 여기에 10만1.238m2 부지에 약 260억이란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안양 시민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시내 창박골행 버스로 
삼거리 수퍼앞에 내리니 바로 올려다 보였다  공원입구 광장 안에는
 자연석에 가로 새긴 "병목안시민공원"이라 쓴 돌 비석이 있었다 


여기에는 주차장이 있고 각종 식물원과 잔디공원을 지나 가파른 언덕
 근 백개의 돌 계단을 올라가니  5개의 크고 작은 인공폭포
(높이65m 폭95m)가 있는데 그 위용(偉容) 이 장관이었다


 폭포 앞에 넓은 광장에는 각종 파라솔과 벤취에는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한가롭게 휴식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정자와 팔각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발 지압장을 비롯하여 체력단련장(8종14개의 운동시설) 어린이
 놀이터 시설 그리고 모형 화물열차가 있고 그 옆에 화장실과 매점이 있다
 그 외 만남의광장 야생화정원 사계절정원 중앙광장 산책로등이 있었다


 특히 전시용 화물열차에는 돌이 실어져 있었고 당시 자갈을 운반하던
 소형의 자갈차였다 또한 눈을 감으니 내가 어려서 본 채석장 암석을
 폭파하는 폭음이 귀에 들리는듯 하고  큰 돌을 분쇄하는 기계(碎石機)
소리와 뿌연 돌 먼지등 자갈을 운반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또한 이곳은 내가 어려서 뛰고 놀던 범위의 고향 마을이다 내가 어려서는
 한낱 채석장(採石場)이고 여기서 더 가면 속칭(俗稱) 담배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구한말 당시 천주교 탄앞으로 교인들이 이곳 산속으로 피신하여
 담배와 참 숯을 구어 생계를 이었다 한다


 그래서 담배촌이라 했고 이곳에는 천주교 순교자 신부의 묘소도 있으며
 수리산 북측 수암천(秀岩川)의 발원지(發源地)로 봄철에는 고사리
 싸리버섯등 각종 산 나물의 생산지 이기도 했으며 여기 까지도 안양시
 관내로 안양시 유원지에 속해 있다  


이 채석장은 내가 유년시절 자갈을 운반하기 위해 우선 (1935년경)
안양역에서 부터 현 안양 3동사무소 앞까지 자갈 차 길이 생겼으나
 그후 이에 약 2배나 멀리 산속으로 (오지) 대폭 연장 하여 이곳
(안양9동) 시민공원 앞까지 차 길을 깔아 당시 1940년경 경부선
 복선공사(複線工事)와 수인선 기타 신설등 철도 기차 선로
 보강보수용 자갈을 생산해 실어 날랐다


 그후 오래전 부터 자갈이 그리 많이 필요치 않아 채석장은 자연
 폐쇄(廢鎖)되는 바람에 방치 되었고 기차길 마저 철거 되어 폐석장
 절개사면을 그냥 두쟈니 미관(美觀)도 나쁘고 낙석(落石)등 위험도
 있다 하여 안양시에서 착안하여 과감히 시민공원으로 발전
 조성된 것이다


 딩시 자갈차는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빈 납작한 자갈차 여러대를
 연결하여 기적을 울리며 기관차가 밀고 들어 왔다가 자갈을 싫은 차를
 끌고 나갔다 우리 꼬마 들은 느리게 밀고 들어오고 나가는 자갈차를
 뛰어 잡아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차장과 기관사는 위험 하다 하며
 못 타게  크게 소리소리  질으며 제지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미 나게 타고 내리던 옛 추억도
 떠 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위험한 짓이었다 그후 철거 되기 까지
 여러가지 문제와 사상(死傷) 사고등 사건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자리에
 생략 하기로 한다


 또한 옛날 내가 자랄 때는 이곳은 산간 벽지로 그 앞 냇가 변두리에
 산 딸기가 많아 따 먹기에 바빴고 숲이 울창하여 혼자서는 가기가
 서먹 했던 이곳이 그후 70 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를 중심으로 이런
 오지에 이르기 까지 아파트. 일반주택. 학교. 한증막(찜질방) 음식점.
오락시설 기업체 등이 꽉 들어차 있다


 내 고향이 이렇게 눈 부시게 발전을 하다니 세월에 감사 하며 더욱
 애향심(愛鄕心)을 느끼는 동시에 더욱 발전 되어 살기좋은 안양시가
 되길 기원 하였으며 오히려 내가 늙었음을 실감 했다


 또한 이곳은 수리산 입구로 겨울을 제외 하고는 수리산 등산 객으로
 분볐으며 오다 가다 쉼터가 되고 있으며 매점으로 통하는 등산로로
 조금 더 가면 2개의 석탑(石塔)이 있다


 계속 올라 가면 몇개의 약수터와 황토길 체력단련장 충혼탑(忠魂塔)
등이 있고 안양 5~8동으로 통하는 안양 유일의 수리산(修理山) 산책은
 물론 공기 맑은 삼림욕장(森林浴場)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안양9동-3동-2동으로 시내로 흐르는 수암천(秀岩川)은 비교적
 건천(乾川)에 가까워 진 겨울은 물이 흐르지 않으나 여름철 장마 때는
 홍수(洪水)로 물이 넘치는 지라 수시로 준설과 대비를 하고 있으며 매년
 장마(홍수)가 지나가면 많은 돌이 솟았기 때문에 이곳을 자갈
 채취장으로 선정 된 것이었다 


내려 오는 길목  마침 매점 앞에 안양 신일교회에서 베푸는 커피 한잔을
 대접 받고 걸어 오며 옛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아래 내가 살던
 옛 집과 이웃을 찾아 보니 벌써 돌아 가신 분도 계시고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려오며 삼덕공원(三德公園)을 들러 보고
 집에 돌아왔다.

 

이 글을 쓰신 이용구(李瑢求) 선생은 1926년 10월생으로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9살 나던 1934년에 안양공립보통학교를 7회로 입학해서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선생은 졸업한 이듬해인 1945년 1월부터 40년간 근속으로 철도청에서 근무한 후 1984년 정년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학창시절 작문시간이면 고역을 치르곤 했던 선생은 철도청에서 발간하는 ‘교통’이란 잡지를 보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 ‘여행의 유혹’이란 제목으로 투고했더니 이후 3회에 걸쳐 게재가 되고, 원고료도 받고 동료들의 칭찬과 격려까지 들어 몹시 즐거웠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후 기쁜 마음에 여기저기 투고 하게 되었고, 투고하는 것 마다 게재가 되어 30년간의 문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유년 시절인 일제 강점기부터 8·15해방 이후 안양의 산업화·도시화 과정과 생활상, 풍속 등을 담은 자전적 수필집 '양지마을의 까치소리’(1991)를 펴냈는데 안양의 엣 사회상을 담고 있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자 주-

[기억-조동범]안양 태창목재소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기억

태창목재소 / 조동범

<시와정신> 2003 가을호 시인이 쓴 산문

 

 며칠 전인가 퇴역 군함을 수장시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사진 속의 군함은 제 생명을 다하고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뱃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군함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일생을 바다에서 보내고 바다로 돌아가는 군함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 없이 많은 전투와 항해를 겪었을 군함의 최후는 장엄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다이버들의 훈련용으로 쓰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고철로 분해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즐겁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군함은 천천히 녹이 슬어가며 아주 오래도록, 바다에서 보낸 일생을 추억할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몇 달 전에 문을 닫은 태창목재소를 떠올렸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던,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창목재소. 태창목재소는 1976년에 문을 열고 올 봄에 문을 닫은, 말 그대로 나무를 파는 상점이다. 태창목재소는 27년의 세월을 견디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아이의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2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27년 전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만큼 자란 나는 그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엘 다녀오고 결혼을 하였다. 언제나 나무 향 가득하던 목재소는 그렇게 세월을 남겨두고 문을 닫고 말았다.

  목재소 가득 퍼지던 나무의 향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배어 나온 그 향은 마치 깊은 숲에서 나는 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무에서는 언제나 그런 기분 좋은 선선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목재 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부모님께 인사를 했고 친구들과 그 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으며 나무가 가득 쌓인 통로를 지나 변소엘 갔다. 그 곳에는 언제나 나무의 향이 가득했다.

  한번은 목재소가 있던 안양에 대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목재소가 문을 연 다음 해였던 1977년의 일이었다. 물은 천장까지 차올랐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밀려들었는지 삽 한 자루를 들고 물을 막아보려던 아버지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물은 삽시간에 나무가 쌓여 있던 마당과 창고까지 차올랐다. 밤 새, 물 위로 떠오른 나무와 그 향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혹시 나무가 홍수에 모두 휩쓸려 먼바다를 떠도는 꿈을 꾸신 것은 아닐까? 참담한 여름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늘에서 아주 오래도록 나무를 말렸다. 물에 젖은 나무의 향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마르자 허옇게 일어난 톱밥이 우수수 떨어졌다. 톱밥은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공중에 흩뿌리던 톱밥은 아마도 부모님의 눈에 박혀 눈물과 함께 나무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을 것이다.


태창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나무를 들어내자 세월을 뒤집어 쓴 톱밥이 뿌옇게 드러났다. 나는 그날, 톱밥에 섞인 뿌연 먼지와 함께 폐부로 들어오는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바다 너머 낯선 이국의 밀림과 밀림의 푸른 나무를 떠올렸다. 태창목재소는 한 번도 푸른 나무를 들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선선한 나무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지난 27년 동안 나는 목재 창고 안에 배어 있던 나무 냄새를 맡으며 언제나 밀림을 눈앞에 그리곤 했다.

  톱밥은 곱고 부드러웠다. 손끝에 올려놓은 톱밥을 지그시 누르자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왔다. 지금이야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당시만 해도 톱밥은 매우 유용한 보온재였다. 톱밥 위에 누우면 전해지는,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톱밥에 누워 손끝에 전해지는, 푹신하면서도 까칠한 느낌을 주먹에 가득 쥐고는 잠이 들곤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 태창목재소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님은 목재소를 차리기 위해 살던 집을 팔았는데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살던 집에서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목재소를 찾지 못해 무척 당황했었다. 우리 식구는 그 후로 오랫동안 목재소 귀퉁이의 무허가 집에서 나무와 함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목재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커다란 트럭이 들어와 내 키보다 높게 나무를 부려 놓았다. 부모님은 내 키보다 높은, 아득한 곳에 차곡차곡 나무를 쌓았다. 밀림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을 나무는 언제나 나이테를 드러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팔려나가 집이 되고 가구가 되고 기둥이 되었으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 소년을 키웠다. 나무의 뿌리는 바다 너머 아득히 먼 이국에 남았지만 목재소의 나무는 내게 언제나 단단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거대한 푸른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 식구는 그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언제나 행복했다. 목재소는 몇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빈 공터에 허술한 나무 담장을 두르고 있던 목재소는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상호도 태창목재소에서 태창종합목재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번 없이 네 자리였던 전화번호도 한 자리 국번과 두 자리 국번을 거쳐 세 자리 국번을 갖춘 전화번호로 바뀌었다.

  수장되는 군함의 사진을 보며 나는 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켜켜이 쌓인 톱밥을 쓸어내며 느꼈던 아련함을 보았다.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세월을 간직한 채 깊은 바다에 수장되는 군함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목재소의 추억을 떠올렸다. 군함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지만 바다에 잠겨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바다 속 깊은 곳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제 몸 곳곳에 바다를 담고 바다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목재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바다가 되어 가는 군함처럼 내 마음 속에 담겨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고 나무의 향을 뿜어 27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재소를 그만두게 되어 편하다고 하시는 부모님 역시 꿈 속에서 나무 향기 가득한 추억을 건져 올릴 것이다.


지금은 피아노 상점이 들어선, 목재소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정리된 피아노 상점 바닥의 귀퉁이에 아직도 치우지 못한 톱밥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의 향은 거의 잃었지만 톱밥 부스러기는 아직도 목재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목재소와 나무 그리고 나무의 향을 아직까지 가슴 속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일까? 목재소에 관한 시 한 편 변변히 써보지 못하고 시인이 되었는데 이제 목재소는 그 자리에 없다. 수장된 군함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담긴 목재소를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나무의 향기 내 마음 속에 가득한데 어쩐 일인지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려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1동 557-34번지.

  아직도 목재소가 있었던 그 자리를 지날 때면 나무의 향이 나는 것만 같다.

  그 곳에, 나를 키운 목재소가 있었다.

  나무의 향 가득한, 태창목재소가 있었다.

 

 

[기억-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1) [한직골-인덕원]

 

도시 벌레가 농촌 풀잎을 야금야금 잠식(蠶食)하듯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거센 파도 아래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homeless)가 된 느낌이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어디 변화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지금 어딜 가나 어리벙벙해질 뿐이다. 옛날 산골 촌놈 서울 구경의 충격이 도처에 있게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길가에 동네가 있게 마련이다. 한직골과 안양 사이에는 ‘한직골-양지편-벌모루-성고개-진터-인덕원-(동편)-부림말-간뎃말-(샛말)-말무데미-뺌말-(안날뫼)-구리고개-(운곡)-수푸르지-안양’이 굵은 동아줄에 큰 매듭들로 맺혀있듯이 있었다. 마을마다 아이디(ID)가 붙어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자타에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들은 장소(場所, place)로서의 역사문화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든 것이 이제는 장소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장소 자체가 사라져서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은 무장소(無場所, placelessness)가 되어 버렸다. 아나로그 동네가 디지털 번지로 박제화 되었다.  

지금 판교에서 청계산 하우고개를, 지금 용인 수지에서 광교산 고분재를 넘거나 해서 내려오면 한직골이란 동네가 있었다. 안양에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해서 하루 두세 번 왕래할 때 터미널이 한직골이었다. 덕장초등학교가 북쪽 언덕으로 올려다 보이고, 사이에 청계 개울이 있어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맑은 물이면 이름을 청계(淸溪)라 했을까? 지금은 서울외곽도로, 과천-의왕간 도로 등이 얼기설기 고가로 지나는 곳이 되어서 보기에도 어지럽기 그지없다.

청계 개울이 구렁굴 앞에서 넓게 퍼져 흐르는 여울을 징검다리로 건너면 양지편 앞길이 된다. 남향받이 동네여서 양지편이라고 했을 것이다.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촌이었으며, 마을 가운데 꽤 큰 규모의 기와집과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 한참 후에 양지편 언덕 마루에 덕장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 포일리 이장 댁이 있어서 6ㆍ25 전쟁 후에 구호물자를 나눠주거나,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거나 하게 되면 이 동네를 가야만 했었다.

양지편에서 느린 산비탈 끝을 돌아서면 벌모루 동네가 보인다. 네다섯 채의 집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정자는 없었지만 그 나무를 정자나무라 불렀다. 거기서 북쪽으로 오솔길을 한참 올라가면 덕장골이었는데, 지금은 서울구치소가 들어와 동네가 흔적조차 없이 되어버렸다. 무재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와 덕장골을 거쳐 흐르는 실개천이 벌머루에서 학의천에 합류한다. 그곳을 우리들은 벌머루 개울이라 하였고, 여름철이면 그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았었다.

한직골에서 떠난 버스가 양지편에 서고, 다음 정류장은 벌머루 끝 초가집 대문 앞이었다. 그 집 울 안에 거무죽죽한 큰 나무를 넘겨다보면서 수수깡울을 돌아 조금 나가면 성고개 앞이 된다. 옛날 무슨 성(城)이 있었기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리라. 이 마을은 길에서 조금 떨어져 언덕 숲속에 숨어있듯이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속에 어떤 집들이 있는지 궁금해 한 적도 있었다. 성고개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면 안쪽으로 임이 마을이 건너다보였다.      

성고개 앞을 지나서 약간 오르막길을 가면서 오른쪽 언덕을 진터라고 하였다. 옛날에 진을 쳤던 곳이란 뜻이리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 주인집인지, 큰 집과 그것에 딸린 작은 집이 있었다. 진터 앞을 지나면서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오른쪽 남향받이로 꽤 넓은 포도밭이 있었고, 그 반대편 길 건너로는 참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후에 신성중ㆍ고등학교가 세워졌고, 나중에 그 학교는 안양시내로 이전했으며, 지금 그곳은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는 데서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 내 할아버지께서는 가을철 모과를 따서 마차에 싣고, 과천-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가서 팔고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옛날 과천은 한양 남쪽 강남의 유명 고을이었다. 문화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지였다. 일찍이 1912년 과천보통학교가 세워져서 내 선친과 숙부님들이 모두 그 학교를 졸업했으며, 숙부 한 분은 과천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화성군(지금의 의왕시, 화성시)에서 초등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렇던 과천이 지금처럼 정부 부처가 들어오고,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골 읍내의 초라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라기보다는 안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 퇴보해서 지방의 한촌(閑村)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관악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안온한 동네였다. 지금 과천에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본래 ‘베레이’인데, 볕이 잘 드는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과천이 신도시 안양에 눌려서 한적한 시골 동네로 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양이 이른바 ‘경부발전축’의 서울 근교 거점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토를 종단한 1번국도(목포-신의주)가 안양을 지나가게 되고, 철도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서 안양은 졸지에 과천을 누르고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과천은 이미 늙어버린 구읍이었고, 안양은 청년기에 든 신흥도시였었다.

관악산 남태령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면 왼쪽 우면산 밑으로 뒷골이란 동네가 있었고, 삼거리에서 지금의 양재동(말죽거리)으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길가에 선바위(입암) 마을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관악산 기슭에 향교말이 있고, 길가에 새술막이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이 된 지역에는 과천저수지가 있어서,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두고 있었다. 청계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그런지 그 산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특별히 맑았었던 것 같다. 청계산 서쪽 과천저수지 일대를 막계동(莫溪洞)이라 부르는데, ‘막계’는 ‘맑(은)내’의 어색한 한역일 것이다.  

길가 새술막 안쪽으로 남양 홍씨 집거촌이라는 홍촌(洪村)이 있었고, 조금 내려와 길 건너쪽으로 구리안 마을이 있었다. 조금 남쪽으로 찬우물이란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안양에도 냉천동이 있는데, 같은 뜻의 지명이다. 그 동네 길가에 큰 배밭이 있었고, 배밭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면 가루개(갈현리) 마을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비울, 가는골(세곡) 마을, 그 사이에 샛말이 있었다.

지금 과천-의왕간 도로 변에 세워진 제비울미술관이 그 제비울 마을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찬우물 아래로 가일이란 마을이 있었고, 서편으로 벌말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벌에 있는 동네였다. 지금 무슨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찬우물에서 가일을 거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부림말이었다.   


 

한직골에서 안양까지(2) [인덕원-말무데미] 
 
인덕원은 옛날에도 사거리였다. 길섶에는 망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질경이가 발에 밟혀 납작하게 눌어붙어 있었던 소박한 시골 사거리였다. 남쪽 개울 건너 쪽으로는 벌말이란 동네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동네를 포함해서 안양까지 이어진 벌 전체는 넓은 논 지대였는데, 나중에 평촌지구로 개발되어 지금 평촌신도시가 되었다. 인덕원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서 조금 나가면 과천에서 나오는 길을 만나게 되고, 그 삼거리 안쪽에 만들어진 동네가 부림말이었다. 

부림말은 안양이라는 도시로 나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안양-과천 선에서 한직골 선이 분기하는 당시 교통의 요지가 부림말이었던 것이다. 전에는 버스가 안양-과천 사이만 왕래했기 때문에 부림말까지 걸어 나와서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버스정류소는 부림말 길가에 있는 대장간이 붙어있는 집 앞이었다. 겨울철이면 그 대장간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 대장간의 녹슨 양철 칸막이의 틈새로 과천 쪽 찬우물에서 올라오는 버스 불빛을 기다리곤 했었다. 가끔 그곳에서 낫이고, 호미를 단김에 쇠망치로 쳐서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괴탄과 화덕과 모루, 풀무 등이 참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 대장간 뒷길로 들어가면 부림교회가 있었다. 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했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동은교회로 개명하고, 길 건너 안양 쪽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부림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나무 종루에서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가 멀리 덕장골까지 들렸었는데, 이제 어디서고 교회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요절을 외우는 일, 하기학교가 시작되면 교회 앞마당에 큰 물통을 놓고, 감미료(사카린, 아니면 당원이란 것)만을 탄 물을 한 컵씩 나눠주곤 했었는데, 그것이 무슨 별식이라도 되는 양 뙤약볕에 장사진으로 기다리곤 했었다.

성탄절 준비였던지 어느 날 밤 교회 앞 작은 사택에서 헌 오르간으로 찬양 연습을 할 때 미국 간 누님, 옆집의 누님 등이 찬양대원이었고, 찬양대 지휘자는 키가 크고, 말처럼 얼굴이 길게 생긴 분이었는데, 지금 얼마나 큰 음악가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 동네는 간뎃말(가운데말, 中村)이었다. 부림말과 말무데미 사이 가운데에 끼어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약간 언덕 위로 들어서 있는 이 동네는 규모가 작았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간이역 같은 동네, 과문불입(過門不入)해도 괜찮을 만한 곳이란 뜻인가.

동네 앞을 지나다 보면 어느 동네이건 동네가 풍기는 나름대로의 바람결이 있고, 바람결에 묻어오는 냄새가 있었다. 덕장골에서 안양에 이르는 한길 가에는 군데군데 마을들이 한 줄에 꿰이듯이 늘어서 있었으며, 제각기 독특한 사랑방 머슴 냄새와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연기도 모양이 다르고, 냄새가 서로 달랐었다. 저녁 밥 누른 내나 괴꼴 태우는 냄새도 동네마다 달랐다. 가을걷이를 태우는 냄새는 더욱 다양하였다. 별다른 냄새가 없이도 그 동네의 분위기가 냄새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니어스 로우사이(genius loci)의 몸내였다. 

간뎃말을 언뜻 지나치면 말무데미(말무덤)였다.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한자로 마분동(馬墳洞)이라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말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하필이면 왜 거친 뜻의 말로 동네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작명 의도가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좋게 여겨지기도 했다. 동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앞은 지나다니기가 망설여지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 동네마다 짓궂은 놈들이 있어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텃세를 부리면서 괴롭히곤 했었다. ‘왜 쳐다보느냐?’는 것이 시비의 실마리가 되었던 동네 골목대장들의 최전선이 말무데미 한길 가였던 것이다. 근처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관양초등학교가 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기억-정진원]남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님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는 데서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 내 할아버지께서는 가을철 모과를 따서 마차에 싣고, 과천-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가서 팔고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옛날 과천은 한양 남쪽 강남의 유명 고을이었다. 문화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지였다. 일찍이 1912년 과천보통학교가 세워져서 내 선친과 숙부님들이 모두 그 학교를 졸업했으며, 숙부 한 분은 과천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화성군(지금의 의왕시, 화성시)에서 초등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렇던 과천이 지금처럼 정부 부처가 들어오고,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골 읍내의 초라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라기보다는 안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 퇴보해서 지방의 한촌(閑村)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관악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안온한 동네였다. 지금 과천에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본래 ‘베레이’인데, 볕이 잘 드는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과천이 신도시 안양에 눌려서 한적한 시골 동네로 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양이 이른바 ‘경부발전축’의 서울 근교 거점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토를 종단한 1번국도(목포-신의주)가 안양을 지나가게 되고, 철도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서 안양은 졸지에 과천을 누르고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과천은 이미 늙어버린 구읍이었고, 안양은 청년기에 든 신흥도시였었다.

관악산 남태령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면 왼쪽 우면산 밑으로 뒷골이란 동네가 있었고, 삼거리에서 지금의 양재동(말죽거리)으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길가에 선바위(입암) 마을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관악산 기슭에 향교말이 있고, 길가에 새술막이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이 된 지역에는 과천저수지가 있어서,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두고 있었다. 청계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그런지 그 산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특별히 맑았었던 것 같다. 청계산 서쪽 과천저수지 일대를 막계동(莫溪洞)이라 부르는데, ‘막계’는 ‘맑(은)내’의 어색한 한역일 것이다.  

길가 새술막 안쪽으로 남양 홍씨 집거촌이라는 홍촌(洪村)이 있었고, 조금 내려와 길 건너쪽으로 구리안 마을이 있었다. 조금 남쪽으로 찬우물이란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안양에도 냉천동이 있는데, 같은 뜻의 지명이다. 그 동네 길가에 큰 배밭이 있었고, 배밭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면 가루개(갈현리) 마을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비울, 가는골(세곡) 마을, 그 사이에 샛말이 있었다.

지금 과천-의왕간 도로 변에 세워진 제비울미술관이 그 제비울 마을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찬우물 아래로 가일이란 마을이 있었고, 서편으로 벌말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벌에 있는 동네였다. 지금 무슨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찬우물에서 가일을 거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부림말이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기억-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 동재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    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춘향전」의 한 대목이란다.

 

  ‘동작진(洞雀津)-승방평(僧房坪)-남태령(南太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    店)-사근평(肆覲坪)-지지대(遲遲臺)-수원(水原)’ 김정호의「대동지지」가운데 일부분이다.

  ‘중화(中火)’한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점심을 한다는 뜻이므로 한양을 바삐 떠나 한강을 건너고, 세네 시간 걸려서 점심때쯤 인덕원에 당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몽룡이 인덕원에서 어떤 점심을 먹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학의천이 흐른다. 그 개울을 건너면 벌말(평촌)인데, 마을 규모가 비교적 큰 편으로 길가를 따라 기다랗게 된 동네였다. 일종의 노촌(路村)이었다. 그러나 마을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옛 문헌이나 지도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은 동네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동네 이름 ‘벌말’에서 한자 지명 ‘평촌(坪村)’이 나오게 되었고, 그 일대가 전에는  전부 논이었으나,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변화되어 평촌신도시가 형성되었다.

  벌말을 지나 조금 나가면 민백이란 동네였다. 지명의 연유를 찾지 못했다. 벌모루 개울을 건너서 들판을 걸어 나가면 벌말 남쪽 끝부분에서 민백이 마을 뒤쪽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 내손리 능안에서도 모락산 중턱을 넘어오게 되면 그곳에 갈 수 있었다. 민백이에서 오른쪽으로 한참 떨어져 귀인이란 동네가 보였고, 거기서 더 나가면 갈미 마을이었다. 

 갈미는 한자로 ‘갈산(葛山)’이라 하여 ‘갈미, 갈뫼, 갈산, 갈현’ 모두 칡(葛)이 많은 산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어디에나 많은 지명이다. 모락산 서편 기슭의 동네여서 오뉴월 모락산 칡덩굴이 이 동네까지 뻗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생각해 본다. 갈미에서부터는 제법 긴 한길이 뻗어있고, 오른편 멀리로는 범계(범내, 虎溪) 마을이 보였다.  

  군포장이 멀지않은 언덕배기 길을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덕현마을이 있었다. 당시 올라가고 있는 언덕길 밖에는 큰 고개란 없었는데, 마을 이름은 ‘큰고개’라는 뜻의 ‘덕현(德峴)’이었다. 안양에 대해서 수푸르지 마을 같은 것이 군포에 대해서 덕현 마을이었다. 여기서 조금 내려가면 군포였다. 안양쪽에서 수원으로 가는 국도를 만나는 사거리 동네였다.

  군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 마장쯤 가면 사그내였다. 정조의 수원 화산 원행의 행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그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모래가 많은 개천이란 뜻의 사근(沙斤)내>사그내? 그런데 이곳 한자 지명이 나중에 ‘고천(古川)’으로 된 것을 보면 사그내>삭은내>고천? 으로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 예전 의왕면 사무소가 있었고, 지금은 의왕시청의 소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지금의 의왕시청 뒷산인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완만한 경사의 백운산 자락을 오르면 지지대 고개가 된다. 그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면 수원 분지에 접어들게 되고, 수원성 북문에 당도하게 된다. 조선 정조의 원행로였다.

정조는 초기에는 ‘남태령-과천-인덕원-사그내행궁-지지대’를 거쳐서 아버지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융릉에 참배했으나, 후기에는 ‘시흥행궁-안양-사그내행궁’ 노선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영의정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과천 찬우물 마을에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가기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는 이 고개를 오르면 멀리 융릉이 있는 화산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서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돌아갈 때에는 이 고개를 넘게 되면 수원 화산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고개 위에서 어가를 멈추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고 해서 고개 이름을 ‘지지대(遲遲臺)’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초등학교의 봄소풍

이야기보따리/기억

봄소풍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상큼한 이 노랫말을 들으면 지금도 나는 풀 향기 그윽한 푸르른 아이가 된다. 환경미화 기간이 지나면 어느 새 산천은 온통 짙게 푸르렀다. 흡사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아다지오의 선율로 시작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흐름으로 펴져 경쾌한 알레그레토 교향곡으로 변한 왕연한 산천초목의 느낌이다.

시와 때를 구분하는 질서와 정렬 그리고도 분수껏 품위를 스스로 낮추는 봄의 꽃 마음을 읽는다. 그 시절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빛나는 청춘의 계절을 음미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순진한 꿈은 마냥 부풀었다. 5월은 어버이날에 스승의 날 그리고 우리의 날이 있어 늘 분주하였으며 더욱이 5월 초는 반드시 봄 소풍을 갔기 때문이다.

우리의 봄 소풍은 늘 안양유원지였다. 못을 기찻길에 놓아 칼을 만들던 기찻길을 넘어 태평방직의 벚꽃 길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 화사한 유원지를 향하였다. 긴 행렬에는 뽑기 장사도 솜사탕 장사도 열을 만들었다. 잠은 설쳤지만 니꾸사꾸(룩색) 안에 든 캬라멜, 생과자, 서울사이다, 양갱, 삶은 달걀을 일어나자마자 다시 확인했다. 엄마는 선생님 드릴 찬합에 비싼 마호병을 따로 챙겨두셨다.

소풍이라고도 하고 원적을 간다고도 하던 그 시절. 선생님은 소풍도 실습시간의 연장이라고 말하였지만 선생님도 그리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보물찾기를 하고 장기자랑을 하고서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돌아갈 시간쯤엔 아이들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모여라 소리를 수없이 하던 때 아이들은 그쯤 유원지의 놀이 풍경에 빠져 정신들이 없었다. 해마다 진기한 볼거리가 늘어나던 그 유원지.

처녀도사 철학관, 꽁보리밥, 순대 집, 닭발 집, 뻥튀기, 파전 집, 번데기, 소라, 솜사탕, 리어카에 실린 곰 인형, 고무풍선, 엿장수, 다리 잘린 몸으로 노래하는 카수, 하모니카 부는 장님, 조준 안 된 간이사격장, 3꼴 꼴인 하면 선물 주는 농구 대, 뺑뺑이판, 전기구이 통닭, 망이 쳐진 야구장, 무조건 십 원 하는 옷핀, 떡판, 튀김 집, 노상을 뒤뚱대며 걷는 오리 장난감, 싸구려 총.......

소풍을 다녀오면 동생들을 주기 위해 맛있는 음식은 고스란히 남겨왔다. 돈도 아껴 그 다음날부터 학교 뒤편 가게들은 아이들로 불이 났다. 아이들 관심은 단연 달고나 뽑기였다. 소다 때문 뒷맛이 개운치 않은 달고나. 연탄불위에 검게 그을린 국자에다가 흰 설탕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타지 않게 젓다보면 설탕물이 되고 소다를 한 량 툭 집어넣으면 금세 똥색의 달고나가 된다. 이를 철판으로 쿡 눌러 모양을 만들었다.

소풍이 새뜻한 출구이었던 그 어린 때를 지나서 6학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간 곳이 온양온천으로 그 해 처음으로 고속도로가 천안까지 개통이 되어 다들 들뜬 마음이었는데 아쉽게도 가정형편 때문에 반에 열 명 넘는 아이들이 같이 가지를 못하였다. 졸업여행도 졸업앨범도 못 챙긴 그로 못이 박힌 아이들은 훗날 두고두고 그 아픔을 말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못 입고 못 먹었기 때문 더욱 더 챙겨주려 한 그 시절이다.

뭐든 흔한 요즘은 간단한 복장에 돈만 들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달랑 김밥 한 줄이라 해도 이에 마음을 따로 두지는 않는다. 아쉬움과 서글픔은 간절한 소망이 되고 애틋함도 된다. 그로 더욱 소중하였던 그 시절의 소풍이기도 하다. 푸르른 오월은 지금도 여전히 청춘의 봄이다.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

[기억-이용구]안양에 비친 당시 제일교회의 모습

이야기보따리/기억

이 글을 쓰신 이용구 선생은 1926년생으로 제일교회가 창립된 1930년도에는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였지만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생활과 안양의 당시 모습들은 눈썰미 있게 보아 두었다가 그의 책 '양지마을의 까치소리'  등을 통해 안양지역 사회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편집자 주-
 
내가 나가는 안양제일교회 80년사(1930년~2010년)가 발간 되었습니다 여기에 투고한 글이 등재 되었기에 전기 하오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030.5.17 창립)
 
1930년 당시 안양은 서울역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안양역을 중심으로 밀집된 곳에만 겨우 전깃불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밤이면 희미한 석유 등잔불만이 가물거리는 고장… 하루에 기차가 수회 지나며(단선운행) 서울~수원간 경수(京水)버스가 몇 대 지나던 촌락이었다.
 
행정 명칭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였다. 안양역 건물은 까만 기와지붕에 몇평 안 되는 성냥곽 만한 역사(驛舍)에 대합실과 개찰구와 집찰구뿐이었다.
 
역 앞 국도 건너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고, 그 주위에 수백 년 된 노향목(老香木 ) 두 그루가 안양의 내력(來歷)을 다 아는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및에 두 개의 목로주점이 있었고, 역광장 구석에는 일본인 담배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철길과 평행하여 자갈길 비포장 국도가 남북으로 나 있었다.
 
역 앞 도로변에는 경찰관 주재소, 화물운송부(전 대한통운자리), 경수버스 정류장, 서이면사무소, 안양우체국이 인접해 있었고 좀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안양공립보통학교(현 안양초등학교), 북쪽으로 좀 떨어져서 안양철교 옆 *경성기독보육원(구 해관보육원→현 좋은집)과 그 반대편 안양천변에 일본인 오끼이(沖井) 농장과 야스에(安江) 농장이 있었다.
 
그리고 국도(國道)를 따라 좌우로 연이은 여러 상점과 몇몇 제법 큰 상점도 있었으나 그 외에는 평범한 초가와 그 사이 사이에 포도밭이 많았다. 5일과 10일에 서는 장날에는 촌사람 들이 모여들어 사고 파느라 들끓어 시끄럽고 매우 혼잡했다. 잡화와 우시장이 기찻길 건너~비산동으로 가는 안양천 다리 사이에 있었다.
 
또한 서이면사무소는 구조선 기와지붕을 가진 옛 *안양옥 자리이며 향나무와 버찌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조한구(趙漢九) 면장이 호계동 자택에서 출퇴근시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가 늘 벚나무에 매여 있는 것도 눈에 선하다.
 
늦은 봄에는 학교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 오다가 이곳에 들러 입이 검도록 버찌(벚나무 열매)를 따 먹느라 아이들이 모여 들었었다.
 
또한 춘추로 시행되는 우두(牛痘)를 맞느라 부모님을 따라간 일과 그때 겁에 질린 어린 아기들의 울음 소리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그 앞에 윤경섭(尹慶燮)씨가 운영하는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나려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기고 코에 확 들어 오곤 했다. 그 옆 대흥관(大興館)에서는 장고 소리와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주민들은 대체로 유·불교 사상이 농후하고 미신을 섬겼다. 즉, 병이 나거나 복(福)을 빌 때에는 으레 무당굿, 푸닥거리, 무꾸리 등 미신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리가 먼 안양 땅에 천주교는 이조 말 대원군의 쇄국 정치와 천주교도 박해로 수리산 산속 깊숙이(현 안양9동 : 속칭 담배촌) 피신하여 집단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고 담배 재배와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안양에는 아직 천주교당이 없어 인근 영등포와 수원지구 교당에서 년 2회 심방 전도로써 촌가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들었다.
 
안양의 최초 성당인 안양4동 625-75에 있는 중앙성당은 1954년에 설립되었다. 흔히들 천주교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말하길 ‘천작쟁이’니 ‘예수쟁이’라 부르며 마치 유교와 불교가 으뜸 가는 종교인양 비웃음과 천시(賤視)등 배타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이야기와 교회(당시 예배당)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니까 내 나이 5~6세 때였다. 우리집 마당에서 놀다 보면 어느 노파가 구름같이 나타나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발에다 흰옷을 입고 얼굴은 환하며 번듯하고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고 점잖게 말도 없이 하늘만 쳐다 보며 걸어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꼭 하나님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후 좀 커서 알고 보니 안양교회에 나가는 건너마을 정씨 댁 할머니 였으며 가끔씩 우리 집 앞을 지나 작은 아들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하여간 그때 나는 하나님을 자세히 몰랐지만 스스로 생각 하길 점잖고 정직하고 위엄이 있으며, 본능적으로 성인(聖人)으로 알고 섬기며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하면 죽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여 천당과 지옥으로 구별하여 보낸다고 들었기에, 기왕이면 천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어려서의 공통적인 우리 세대들의 순박한 마음이었다.
 
또한 내가 7~8세 때였다. 멀리서 ‘땡그랑 땡’ ‘땡그랑 땡’하고 예배당 종소리가 일요일과 수요일은 물론 매일 새벽 4시경과 저녁에 들려왔다. 예배당은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국도변(國道邊)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 남부시장 내에 있던 예배당은 학교 교실의 절반 만한 일자형(一字型) 집에 양철 지붕 이라고 기억된다.
 
예배당 옆에는 목재 종탑(鐘塔)이 있었고 가로수가 나지막하게 있었는데 도로변이라 항상 뿌연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 이 예배당이 지금부터 80년 전에 세워진 안양리교회이고 현 안양제일교회의 모체이다.
 
그리고 내가 다섯 살 때 교회는 안양에 하나뿐 이고 안양보통학교가 4년제 여서 5~6학년 과정의 학생들은 이 교회를 강습소(講習所)란 이름으로 2~3년 사용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은바 있다.
 
*안양공립보통학교
1929.12.20 개교(4년제)/
1938.4.1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명칭 변경
1934.3 - 현 안양제일교회 이경수 원로장로 졸업(1회). 2010년도 93세
1940.3.2 - 6년제로 승격
 
*경성기독보육원
1919. 선교사요 의사인 오긍선 박사(1878~1963 / 충남 공주 태생) 설립
1949. 이승만 대통령 시설 3개동 기증/ 1950.6.25사변으로 가덕도로 피난
1952. 미8군단 45공병단 지원복구/ 1998. 해관보육원으로 개칭
2007. 좋은집으로 개칭(원장: 정어진 장로-덕장교회,평강교회 개척에 기여)
*안양옥
안양리 674-271번지, 현 경기도 문화재 제100호 기념물-안양시 소유,
1917.7.6~1949.8.14 면사무소로 사용
 
*조한구
일제 초부터 해방 전까지 서이면장, 안양면장 직을 밭아 안양 발전에 공이 컸음,
1952년 민선읍장 선거에도 당선
 
우리 동네 양지마을(현 안양3동)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가와 품팔이를 하는 비농가였다. 그중 기독교 신자는 徐씨와 李씨 두 집안 사람 들이었다. 당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통속적인 개념 이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부유층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핍박받던 민족의 서러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래 보려는 사람들 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앞집에 사는 서병두(1933. 5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네 여섯 식구는 수리산(修理山) 에서 나무 장사와 철로 보수용 자갈 캐기, 혹은 품팔이 등의 생업으로 그날 그날을 가난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으나 늘 희망과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웃음으로 꽃피우며 단란하게 사는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또한 그 집은 밤낮으로 찬송가 소리가 그칠 날이 없이 울려 나왔고 남보다 더욱 근면해 보였다. 어느해 늦은 가을 그 집 장남이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따라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생후 처음 보는 교회 예식 이었다. 한복 차림의 신랑신부가 가슴에 만든 꽃을 달고 풍금 소리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고 주례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있었다. 종전에 많이 보던 재래식 혼인잔치 초례(初禮)상에 기러기 안고 올리는 혼례식 보다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또한 그 집에서 우리 집 까지는 좀 거리가 있으나 들려 오는 찬송가 중에서 똑똑히 들리는 구절이 “예수권세 많도다.”와 “날 사랑하심”이었다. 지금 찬송가를 찾아 보니 563장 찬송이 그 가정의 주제가 였다고 보아진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듣거나 부를 때면 75년 전 내가 성장하던 아득한 옛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마을의 산과 들이 생생 하게 떠 오르고 이웃들과 정다웠던 옛 추억이 그립다. 또한 서씨댁 누님 서정희「60년사」.p 89. (1938년 11월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는 나의 두 누님과 연배 인지라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며 은연중 하나님 이야기와 찬송으로 완고한 우리 집에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유·불교 신봉자인 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누님들은 점점 감화(感化) 되어 아버지 몰래 찬송가를 같이 불렀다. 나도 어깨 너머 공부로 누님 따라 뜻도 모른채 불렀다.
 
어느 해 여름밤 이었다. 두 누님이 서씨 누님을 따라 북을 치며 동네에 들어온 밤 부흥 집회에 간 것이다. 눈치를 채신 아버지는 그날 따라 누님들을 찾으셨다. 그날 밤 늦게 귀가 하다가 그만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호된 꾸지람 으로 다시는 부흥회에 가지 못했으며 찬송가도 부르지 못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당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봉건적 사상으로 혹시나 남녀간 불미(不美) 스러운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였다. 그 일로 그후 서씨 누님은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고 그후 서씨 누님은 가정 형편상 식구 모두 이사를 가게 되어 서운한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동네 기독교 신자인 이흠팽 씨댁 장례식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장지인 우리 마을 뒷산까지 따라 가서 장사 지내는 절차를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발인 때와 하관 할 때 목사님의 간곡한 기도와 위로의 말과 교인들의 적극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보았다. 상여로 운구 하였으며 상제들은 굴건제복을 하였다.
 
이것 또한 생후 처음 보는 기독교식 장례식 이었으며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 하였던가…… 지금도 생생하다. 종전에 보던 것에 비해 다른 것은 찬송가와 목사님의 기도가 특색이었다. 그때 통합 찬송가 291장 “날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의 곡조와 뜻이 어찌나 애절하고 슬픈지 마음에 파고드는 듯 느꼈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감격의 8.15광복을 맞이 하였고 공산당의 남침인 6.25사변을 겪었다. 처참한 골육상잔의 쓰라림을 몸소 겪음 우리 대소가(大小家)와 동네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만세 전에 택 하심으로 우리 형제자매 중 4명이 교회에 나가 주님을 믿게 되었으니 아마도 서정희 누님이 뿌린 씨앗으로 싹이 아닌가 생각 되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끝)

[최병렬]안양지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이야기보따리/기억

향토사는 지역사·국사·민족사의 모체요 뿌리로, 곧 모든 역사의 콘텐츠라 할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지역향토사를 연구, 탐구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고, 문화원들도 이같은 연구를 소홀히 하고 있어 과거사의 연구는 커녕 현존하는 사실들 조차 제대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채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안양지역의 향토사에 대해 박식하거나 자료를 수집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분들이 여러분 있지요. 안양지역 변천과 행정사에 박식한 변원신 선생, 안양사 발굴을 안양청원할 정도로 안양시 연구에 몰두해 온 지역원로인 정덕한선생, 안양시 홍보실에 근무하며 70년대 부터 안양지역을 사진 기록에 담은 이정범 선생, 1968-69년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애 근무하며 안양지역의 풍물을 컬러슬라이드와 흑백필림에 담아낸 닐 미샬로프씨, 국어교과서 소장가로 유명한 김운기 안양시검도회장,  잡지 수집가로 알려진 안정웅 전 안양시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안양학연구소를 통해 안양과거사를 연구해 온 문원식 성결대 교수, 어렷을적 뛰어놀던 수리산 등 만안구의 지역변천과정을 잘 기억하는 임부성씨, 안양 문화사와 건축사에 식견이 높은 건축사 최승원 교수, 김지석 안양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과거의 기록을 예술작품화하는 기획사업을 자주 했던 박찬응 전 스톤앤워터 관장, 국내외 콜렉션 수집가로 유명했던 고 김민석 솔로몬 대표, 중국명품 도자기 등 수집가로 입소문만 이원균 전 원박물관 관장 등 (가물가물...또 생각나는 인물이 있으면 추가 올리겠습니다... 혹여 아시는 분 추천해 주세요) 

[기억-최병렬]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기억

 

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안양지역에 음식점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아마도 한양가는 길목인 인덕원 사거리 일대 자리했던 주막에서 당시 오가던 길손에게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정일뿐 기록은 없다. 안양시는 2006년 안양시민축제 당시 음식문화축제를 준비하면서 안양의 대표음식으로 설렁탕을 선정해 과거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다.
자료를 조사한 안양문화원 최태술 위원은 “지금 동안구 평촌에 귀인동이 있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 하신 귀인(貴人)들이 살든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또 수촌마을에는 내시촌이 있어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궁중에서 하던 선농제 행사에서 끓이던 설렁탕 기술을 알았을 것이다”며 이를 통해 설렁탕이 일반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어느 지역 설렁탕보다 안양 설렁탕이 진짜 중 진짜가 아닐까.
1926년생으로 안양3동에서 태어난 이용구 옹은 어린시절의 풍경을 눈썰미있게 기록한 [양지마을의 까치소리]에서 1930년 당시 안양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밀집된 곳에만 겨우 전깃불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밤이면 희미한 석유 등잔불만이 가물거리는 고장으로 하루에 기차가 수회 지나며(단선) 서울~수원간 경수(京水)버스가 몇 대 지나던 촌락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안양역 건물은 까만 기와지붕에 몇평 안 되는 성냥곽 만한 역사(驛舍)에 대합실과 개찰구와 집찰구뿐이었으며, 역 앞 국도 건너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고, 그 주위에 수백 년 된 노향목(老香木 ) 두 그루가 안양의 내력(來歷)을 다 아는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및에 두 개의 목로주점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 옹이 말하는 목로주점은 한 장 사진 기록을 통해 시간을 넘어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1943년 2월 20일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가 안양역을 지나가다 촬영했던 사진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촬영하고자 했던 안양역 광장이 존재했던 미륵당이었다. 그가 남긴 3장의 흑백사진중 1장의 사진에는 한자로 쓰여진 안양음식점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 기억으로는 안양역 주변과 구시장, 새 상권이 형성된 새시장(중앙시장) 일대에 본격적으로 다방, 양화점, 병원, 양복점들과 함께 음식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일제 강점기부터 피서지로 유명했던 안양유원지에도 음식점들이 성업했었다.
 
1968년 개업한 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의 봉암식당
 
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들이 계곡을 막아 천연풀장을 만들며 시작된 여름철 피서지로 50-60년에 한강 이남에서는 유일한 물놀이 시설이었다.
안양유원지가 유명했던 것은 이곳만큼 숲이 울창하면서 계곡의 수량이 풍부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락철에는 유원지 입구에 '안양 풀장' 간이역이 생겨 경부선을 달리던 기차가 섰고, 역에서 풀장까지 임시 버스가 운행되는 등 60년대 여름철엔 하루이용객 2만여명을 헤아리던 곳이다.
안양예술공원상가연합회 부회장 남창림(71)씨는 계곡 주변으로 자연스레 음식점들이 하나둘 들어섰어요“라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안양유원지에는 영남여관, 백운여관 등 숙박시설도 있었다. 특히 안양 최초의 카바레도 이곳에 있었는데 왕궁 카바레였다. 지금의 카페 ‘데이지아’ 건물이 이전 카바레 건물인데 지금도 악사들이 연주하던 반원형의 무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안양토박이인 안양시의회 김성수 사무국장은 안양유원지안에 유명했던 식당으로 1969년 문을 연 봉암식당과 고바우식당, 우정식당 등을 기억한다. 두 식당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어 아마 안양에서 현존하는 식당으로 가장 오래된 식당이 아닐까 싶다.
봉암식당(031-471-7428)은 1968년에 문을 연 대형식으로 염불암 올라가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좋아 예전부터 친목모임이, 회식장소로 유명했다. 필자가 근로자회관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일했던 독일수녀님 서말가리다 선생님은 이집에서 60년대부터 불고기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고 말한바 있다.
 
안양역과 구시장 일대에 있던 식당
 
1920년대 개장한 안양 구시장은 1970년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안양역 인근 일번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안양 최고의 번화가이다. 안양역 좌우 구도로변과 길 건너 현재 일번가 골목길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시간과 세월이 흘러도 추억으로 기억될 만큼 대표적 음식점은 어느 집이 있을까.
1950-60년대에는 안양역 구도로변에는 가마솥에 설렁탕을 끓이던 경민식당이 있었으며, 안양역 앞에는 고향식당이 유명했었다.
중국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이 찾았던 음식점이다. 화교 학교에 다니던 주인장 딸이 너무나 예뻐 당시 남학생들이 얼굴 한번 보기위해 짜장면을 먹으러 자주 드나다녔던 순흥루와 동춘관 등은 1950-70년대 안양시내 중국집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역 건너편에는 아이스케키와 하드를 만들어 팔던 태극당 제과점이 있었고, 미승당, 풍미당 빵집이 있었다. 제과점은 1990년대 안양 중앙시장 입구 옆에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였던 폼비제과점으로 이어지다가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일번가 골목에는 동그랑땡이 맛있던 느티나무집이 있었고, 안양우체국앞에는 술꾼들로 봄볐던 양일해장국이 있었다. 또 안양역에서 대동서점 골목을 지나 안양9동 채석장까지 연결됐던 철길옆에는 구름다리가 유명했다.
안양 일범가 골목길에는 화진정, 유래정, 진고개 식당 등 불고기와 갈비, 냉면, 육개장, 설탕탕 등을 팔던 한식당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안양아구탕 원조 남촌아구탕, 학생들 데이트장소였던 폼비제과점도 추억 명소였다.
안양토박이로 현재 안양4동에서 흑산도 홍어집을 경영하는 정효진씨를 만나 그가 기억하는 6-70년대 음식점과 먹꺼리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씨는 젊었을 때 안양지역을 주름잡던 주먹(?)이었기에 그가 기억하는 식당과 술집들의 얘기는 추억이자 역사다.
안양역앞에는 1960년 제일 유명했던 식당은 고향식당이다. 역전파출소옆에 있었는데 해장국 한그릇에 1200원이었다. 진짜 좋았다. 70년대 중반에 없어졌다.
술질으로는 구시장에 변무일씨가 하던 빠가 있었다. 안양에 빠로서는 처음 생겼는데 맥주병에 먹거리를 넣어서 팔았었다. 구시장 입구 오른쪽 2층에는 다방이 있었고, 비산동 진흥아파트 앞에 술집으로는 개성집, 안양에게 제일 나가던 음식점은 장춘옥으로 최고였다.
남부시장에는 금천옥과 경남옥이 있었고, 동춘관은 47년인가 50년인가 생겼다. 안양역앞에 복어집이 있었는데 아주 유명했다. 현재의 일번가 청사초롱앞에 있었다. 동춘관과 쌍벽을 이루었던 순흥루의 딸 이름이 후에미나 였는데 현재 대만에 살고 있다. 아직도 소식을 주고 받는 이들이 제법 있다.
경민식당은 성결대앞으로 이전했다가 90년대 초인가 폐업했으며 주인은 미국 LA가서 살고 있다. 경민식당은 절대 다데기를 주지 않았다. 국물 맛이 변하면 안된다고 철칙으로 고수했다.
60년대 말 구시장 넘어가는 철길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고, 안양 삼원극장옆 철길의 구름다리는 70년대 중반에 생겼다. 구름다리의 닭 내장탕과 닭 곱창은 정말 끝내주었다.
60년대에 근로자회관에서 운영하던 급식소에서 미군부대에서 지원받은 밀가루로 국수를 3원인가 5원인가 팔았는데 배고팠던 시절이었기에 줄 지어서 먹었다.
안양 일번가 동서연결지하차도 옆에 있던 남촌식당 자리에는 64-65년도인가 기름에 튀기는 빵을 팔던 집이 있었는데 당시 김두한씨가 안양 왔다가 맛을 보기도 했다. 건너편에는 계란을 넣어서 하는 이태리빵집이 우와 먹고 싶었지 마음대로 사먹지 못했지, 죽였다.
구시장 넘어가는 땡땡 철길옆에는 광창라사가 있었고 중국집 강성각의 호떡도 유명했다.
안양에서 70년대 후반 80년대 해장국집으로 유명했던 양일식당은 안양우체국 아래 큰 길에가 있다가 안양병원 옆 골목으로 옮겨졌으나 장사가 안돼 끝내 없어졌다.

[기억-최병렬]안양 병목안 기찻길옆 2층 ‘길모퉁이까페’

이야기보따리/기억

 

안양에서 처음 카페 명칭 붙였던 ‘길모퉁이까페’

1970년대 안양에서 카페란 명칭을 사용한 곳은 안양1동 CGV옆 기찻길 골목 2층에 있던 길모퉁이카페가 아닐까 싶다. K연구소에 다니는 남편을 둔 서른 살을 갓 넘은 예쁜 누나가 커피와 함께 진토닉 등 칵테일과 위스키 등을 팔던 가게였다.
지금은 50대 중반이 된 친구들이 겨울에는 난로 불을 쬐며 노닥거리며 암울했던 현실을 고민하고 LP음반을 뒤적거리며 ‘까라마드르 조르쥬(길모퉁이 카페의 작가)’를 이야기했다.
당시 청년들의 주머니가 허전하던 때여서 주인 누나가 공짜로 주는 따끈한 커피와 술 한잔에 고마워하고 풋풋하고 넉넉한 쓰임새에 감동하며 간혹 안양9동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한 화물열차가 지나치기라도 하면 도로에 멈춰 기나긴 차량들을 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