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인규의 청계사 중창
조인규(1237~1308)의 가문은 본래 유이민의 후예로 양인 농민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려의 재상이자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아들들과 사위들은 장군과 재상과 같은 고위직에 오르는 등 고려에서 권세가 대단했다.
1231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30년에 걸친 대몽항쟁 기간을 거친 뒤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충렬왕을 시작으로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국가의 주권을 침해당했다. 이와 같은 고려와 원의 관계로 몽골어 통역관의 수요가 급증하던 때, 조인규는 몽골어 양성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몽골어에 통달하여 명성을 얻었다.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갈 때 그를 수행하여 왕과 친분을 쌓았고, 충렬왕이 몽골 공주와 결혼해 돌아온 뒤에는 장군에 임명되었다.
조인규는 탁월한 몽고어 통역 실력으로 원나라 세조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고려에 있으면서 원나라의 관직인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에 임명되어 정치적 지위가 높아졌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고려의 사정을 잘 보고한 공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고 그 자손들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려의 풍속을 바꾸려는 일을 막고, 충렬왕이 동녕부를 되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딸이 충선왕의 비가 된 뒤에는 고려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조인규는 정치적 출세와 더불어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5남 4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후일 아들들은 승려와 재상이 되었다. 그는 자식들을 위해 1284년(충렬왕 10) 청계사를 원당으로 삼아 그들의 세력 근거지로 만들고, 수원 만의사도 원당화 하였다. 청계사를 중창할 때 임금을 위한 복을 축원하기 위하여 금을 사용하여 불경을 만들고 많은 불상을 그릴만큼 청계사에 큰 애정을 가졌다. 그러나 원의 간섭기에 고려의 불교는 승려들에 의해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 군역 도피의 소굴이 되는 등 그 부패가 심해서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
○ 청계사
청계사는 천년고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원(元)의 간섭기인 1284년 고려 승지이자 동시에 원 나라의 관직을 가지고 있던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청계사를 다시 세우고 평양 조씨 문중의 원당으로 삼았다.
천태종 계열의 청계사는 1407년(태종 7) 조선의 자복사(資福寺)가 되었으며, 세종 때에는 왕자들이 내려와 불경을 외우기도 했다. 연산군이 도성 안의 모든 사찰을 폐쇄했을 때 봉은사를 대신하여 잠시 선종 본찰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광해군 때 폐세자가 절을 차지하고, 전답과 노비를 관이나 세도가들이 빼앗아 크게 쇠락하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 산불로 전각이 거의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그해에 성희를 중심으로 한 불제자들이 곧바로 중건하였다. 이때 조인규의 후손 조운이 비문을 짓고 생원 윤창적이 써서 <청계사사적비>를 세웠다. 세손 시절의 정조는 1761년 청계사에 행차하여 원당을 세우고 밤나무 3천 그루를 심도록 했다. 1776년 영조가 사망했을 때 백일재를 지냈고, 사도세자(장헌세자)를 현륭원으로 옮길 때 제각을 세우고, 매년 탄신일과 기일 등 두 차례씩 제향을 올리도록 했다. 조인규의 후손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던 조심태는 문중의 시주를 받아 중창하였으나 1876년(고종 13) 다시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기도 했다.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지역 정체성을 조명하다
내고장 역사 바로 알기 글에서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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