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탐사75-2]의왕 성라자로마을 앞 동네 오전동(2015.08.0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5-2]성라자로마을 앞 오전동
2015.08. 0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5차 #의왕 #오전나구역/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70년대 흔적이 남아 있는 동네. 1970년대 주한미군이 묻은 송유관이 동네 한복판으로 통과하는 지역이다.

 

의왕시 고유지명 유래 [오전동]

 

오전동(五全洞)
●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오마동(五馬洞), 전주동(全朱洞)·등곡동(藤谷洞)의 여러지역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오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오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오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오마동(五馬洞)의 '오'(五)자와 전주동(全朱洞)의 '전'(전)자를 따서 '오전동'이라 불렀으며, 오전동에는 가운데말·뒷골·등칙골·목배미·백운동·사나골·성라자로원마을·오매기·옻우물·용머리·전주남이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 가운데말
사나골과 뒷골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오매기의 여러취락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운데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백운동 주민들은 이 마을을 '건너말'이라 부른다.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오매기의 자연취락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용머리·뒷골·사나골·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뒷골(後谷)
백운동과 가운데말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後谷)이라 부르고 있으며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사나골·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등칙골(藤谷洞)
의왕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이다. 이곳 뒷산에 등나무가 많으므로 '등칙골'(藤谷洞)이라 부르고 있다. 등칙골은 전주이씨 근령군파(全州李氏 謹寧君派)후손인 이 용(李容 1565.10. 12∼1616. 1. 4, 자는 季偉, 通德郞을 역임)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아들 이정집이 묘하에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 옻우물·전주남이 주민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1·2·3일 중에서 길일을 택해 이곳 뒤에 있는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목배미
용머리 남쪽 길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왕곡동 홍치골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위치하고 있다.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앞의 논이 기름진 문전옥답(문전옥답)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길을 통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곤 했다.

 

- 백운동(白雲洞)
오전저수지(五全貯水池)밑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백운동'이라 부른다. 경주 김씨와 광주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사나골·건너말(가운데말)·용머리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사나골(山岳谷)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1600년대 초에 문화류씨 하정공파 후손인 유 항(절충장군을 역임)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오매기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산악(山岳)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산악골'이라 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나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성라자로원 마을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광복 이전만 해도 이곳은 산야(山野)이었다가, 광복후 서울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소진탁(蘇鎭卓)박사에 의해 폐결핵 요양소가 설치되었다. 그후 1952년 6월 2일 죠지캐롤 안주교에 의해 성라자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복음〉(16, 19-31)을 보면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배를 채우며 살다가 얼마뒤에 죽어서 부활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성라자로 마을'이라 명명한 것이다.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포도원 입구에서 수원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동편으로 보면 '새삶의 예수'석고상이 있고 그 뒤로 십자가가 세워진 아치에는 성라자로원 마을 안내판이 있다. 성라자로원은 나환자의 조기치료와 보호 및 불구 그리고 노령환자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불구환자의 요양과 진료를 실시하고 라자로원 돕기 후원회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은 이경재(李庚宰)신부로, 그는 1926년 2월 9일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여 1951년 4월 3일 서울카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1951)신부가 된 후 해군 종군신부로서 임무를 끝내고 모두 다 외면하는 성라자로원을 자원하여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빈곤과 병고와 한숨만이 맞아주는 라자로원을 위해 헌신봉사한 공로로 1979년 12월 28일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성라자로원은 처음에는 1950년 광명시에 설립되었다가 1951년 7월 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후 1971년 4월 3일 라자로 돕기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0년 후인 1981년 11월 15일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도 아론의 집(1984. 5. 8)과 불구노약자의 집(1986. 7. 14)등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 오매기(五馬洞. 五募洞)
삼태기처럼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국가의 전란등이 일어나면 피난의 최적지였다. 본래는 전주남이 동쪽으로 용머리·사나골·윗골·가운데말·백운동·목배미 등을 통털어 오매기라 불러왔다. 이 마을은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문씨(文氏)·진씨(陳氏)·광주노씨(廣州盧氏)·마씨(馬氏)등이 각기 1막(一幕)씩을 짓고 살아 '오막동'(五幕洞)이라고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오매기(五馬洞)'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백운동·용머리·가운데말·사나골등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통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옻우물
유한양행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까지만 해도 전주이씨 근령군파후손 2가구와 김씨등 모두 3가구가 살아오다 그후 성라자로원 관계자들이 거주하면서 6,7세대로 불어 났으나, 1969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엽, 이마을에 사는 이생원의 아들이 피부병을 앓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더니 고맙다는 뜻으로 오전동 133번지에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런데 사시사철 물이 잘 나와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옻으로 인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옻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옻우물'로 했다고 한다. 이우물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변에 주택이 늘어서자 폐정되었으며, 현재는 삼창양행(三昌洋行)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전주남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용머리(龍頭洞)
오매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하천의 물 흐르는 형태가 이곳에 이르러 용의 머리처럼 휘돌아 가므로 '용머리'(龍頭洞)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머리부분은 일제 말엽에 도로를 개설할 때 파손되었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해도 인동 장씨등 불과 서너 가구밖에 안되었다가 1960년대초부터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나골·건너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전주남이(全朱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전주동이라 불렀다. 등칙골과 오매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중엽에 전주동이란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을 부자가 박절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앙심을 품고 마을 뒷산에 혈(穴)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자 이 말을 사실로 안 전주동은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었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전주동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전주남이'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옻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강산(姜山)
오매기 마을 남쪽에 있는 산으로, 진주 강씨의 선대 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 오매기의 사나골·건너말·백운동·용머리·목배미·뒷골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고래들
옻우물에 속했던 들로 나븐들 서쪽에 있었다. 고래처럼 큰 들이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나븐들
옻우물 마을회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여m쯤 있었던 들이다. 지금의 성일통상과 현대주유소등이 들어선 곳으로 197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넓은 들이었다.

●되링게들
용머리좌우에 있는 들로 예전에 이곳 개울가에 도롱룡이 많았다고 한다. ※ 도롱룡은 도롱룡과에 속하는 양서류의 하나로 몸이 길이가 15㎝가량인데, 숲·밭 등의 낙엽 밑이나 땅속에 살고 밤에 나와 곤충 등을 잡아먹는다.

● 된박골
성라자로원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골짜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 두껍바위
되링게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 마당바위
큰 보식골에서 성라자로원 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음지쪽에 있다. 마당처럼 큰 바위이다.

● 미륵재
성라자로원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다 과천가는 구도로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장하고 이곳에 미륵(彌勒)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은 1952년 11월 경 의왕시 내손동 출신인 고금동(高金童 1911년생)씨가 내손동 오리나무골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 범바위
사나골 뒤 모락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병풍바위
백운산 중봉에서 서북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병풍처럼 생겼다.

● 병풍산
전주남이 뒤에 있는 산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등칙골·전주남이·옻우물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삼형제바위
전주남이 병풍산에 있다. 바위가 3개 층층이 있어 '삼형제바위'라 부른다.

● 어내들(御川坪)
의왕농협 오전분소 주변으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 행차때 이곳 개울가에 머물렀다 하여 '어내갈'또는 '어내들(御川坪)'이라 부른다.

● 용바위
용머리와 오매기 사이에 있는 다리옆에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용머리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갔다 놓을 만큼 신성시 하는 바위이다. 속설에는 이 바위가 깨지면 용머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 원골(院谷)
성라자로원 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이 있었다고 한다.

● 작은고개(小峴)
오매기 뒷골과 학의동 의일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길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는 교통로였다.

● 작은보식골(小甫食谷)
송파원(松派園) 뒤(북쪽)에 있으며 큰 보식골보다 작은 골짜기이다.

● 장고개(場峴)
성라자로원 마을과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오매기 사람들이 군포장으로 장(場)을 보러 갈때면 이고개를 이용하였다.

● 장승거리(長丞巨里)
유한양행 입구 인근에 예전에 장승(長丞·長牲)이 있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찬우물(冷井)
등칙골 입구 오전초등학교 못미쳐 사거리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매우 차다.

● 큰고개(大峴)
오매기 공동묘지에서 학의동 의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의일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큰보식골(大甫食谷)
성라자로원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기름진 옥토여서 인근 주민들의 주식원이었는데, 현재는 성라자로원 마을이 들어서 있다.

● 큰자리들
오매기 뒷골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으므로 '큰자리들'이라 부른다.

● 퉁소바위(퉁수바위)
큰보식골 양달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조선중엽에 어느 현인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한다.

● 평강골(平岡谷)
장 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평하고 오목하게 생겼다. 함방들(一田坪)제일모직 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하나의 밭으로 되어 있어서 '한밭들'(一田坪)이라 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부터 '함방들'로 불리우고 있다.

 

 

 

 

 

 

 

 

[탐사75-1]의왕 성라자로마을에 가다(2015.08.0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5-1]성라자로마을에 가다
2015.08. 0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5차 #의왕 #성라자로마을 #오전동 #가구단지/
한센병 환우들이 살고 있고, 기도하는 공간이라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쉽지 않은 성라자로마을을 마을 관계자의 협조로 이곳 저곳을 탐방했습니다 .
라자로 마을은 지난 반세기동안 나환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현장 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나환자와 일반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는 라자로 마을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 그림같은 집과 주변 경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한센병 환우의 치료와 사회 자립을 위해 지어진 숙소와 병원 등 외적인 미를 살려 건립한 여러 건물들은 울창한 나무와 잘 다듬어진 조경 등 주변의 경관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흔히 생각하기 쉬운 복지시설과는 다른 모습이지요. 1970년대 지어진 건물임에도 미적, 예술적 조형미를 감안한 설계뿐 아니라 나무와 숲에 파묻힌 듯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이는 2008년 의왕시가 선정한 도시경관 8경에 이름을 올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의왕시는 건축물, 공원, 도로 등 시설물 위주의 도시경관 8경을 선정했는데 자연학습공원, 중앙도서관, 도깨비도로, 철도박물관 등이 성 라자로 마을과 함께 선정됐지요.

라자로마을은 쉼게 들어갈 수 곳이 아닙니다. 정문 수위실에 도착하면 “어떻게 오셨나요?”하는 질문을 거친 후에 통과할 수 있지요. 간혹 있을지 모를 엉뚱한 외부인들로부터 마을 주민을 보호해야 하고, 일반인에게 스스로를 보이기 꺼려하는 주민들의 심리 등등 여러 민감한 사안들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을의 공간 구조는 크게 주민들의 주거 공간, 치료 공간, 신부와 수녀들을 위한 공간, 성당과 사무실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의 정문과 수위실을 지나면 마을 사무실, 모세의 집(통나무집), 라자로마을 설립 50주년 기념관, 라자로마을 설립 50주년 홍보관, 라자로의 집(교육관), 아록의 집(불구 노약자 환우 숙소), 엘리아의 집(여환우 숙소), 반석의 집(남환우 숙소), 삼손의 집(부부환우 숙소, 식당), 마리안 수녀의 집(수녀원), 치유의 집(마을 병원), 아론의 집(피정의 집), 마을 성당, 정결의 집(이발, 목욕시설), 기쁨의 집(세탁소), 고마움의 집(간호사 숙소), 라자로의 무덤(납골당), 요셉의 집(직원 숙소), 우리의 집(봉사자 휴게실), 사제 마을(7개 동의 건물 포함), 차고 및 창고 등이 넓게 포진하여 있지요. 그리고 곳곳에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예수, 십자가, 천주교의 성인들, 캐롤 신부, 노기남 대주교, 이경재 신부 등의 석조상이 서 있습니다.
사제마을은 은퇴한 사제들과 요양이 필요한 사제들이 머무는 곳으로 5채의 단독주택, 성당, 식당, 그리고 엘리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통나무성당은 예수님의 집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5채의 단독주택은 한국 순교성인의 본명을 따서 범세형(라우렌시오)의 집, 김대건(안드레아)의 집, 이승훈(베드로)의 집, 최양업(토마스)의 집, 주문모(야고보)의 집으로 불리고, 사제마을 공동식당의 이름은 강완숙(골롬바)의 집입니다. 납골당인 라자로의 무덤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최초로 화장 후 유골을 안치해두는 납골당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1987년 준공하였답니다.
마을병원인 치유의 집에는 책임 간호수녀 1명, 간호사 2명이 상주하며 환자들의 건강상태를 돌보고, 각과의 의사진료는 무료봉사자들의 도움을 얻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가톨릭의대 교수가 한센병주치의로 월 1회, 아주대학병원 의사가 정형외과의로 월 2회, 세란치과 의사와 송산보건소 치위생사가 주 1회, 이오스안과 의사가 안과의로 필요할 때 간호사가 월 1회 창상치료, 한의과 월 1회, 수지침 봉사자가 주 2회 자원봉사하고 있다. 이외에 보조기, 이용사, 미용사, 주방봉사, 세탁 및 재봉, 환우목욕, 가재접기, 청소봉사 등의 일에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에 따라 봉사가 이루어지며, 연세대동문회가 생일잔치 봉사를, 가톨릭 기사사도회(騎士使徒會)가 환우들의 단체외출 봉사를 하고 있다.
이날 찾아간 라자로마을은 찌는듯한 무더위속에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벤치, 은은한 성가가 흘러나올 것 같은 성당, 예쁘게 채색된 유리창...하늘도 구름도 나무도 묵상에 잠긴 듯 이곳에 오면 누구나 조금은 경건해집니다.
언덕길을 따라 멋지고 이름답게 지어진 건물과 조형물을 보면서 햇빛과 그늘의 경계를 따라 걷다보면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연치유의 내면적 가능성, '사색'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성 라자로 마을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가톨릭 사회사업시설인 라자로마을은 한국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일에 메리놀회 소속으로 당시 가톨릭구제회(NCWC)와 미국 종교단체구제사업협회(LARA)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던 조지 캐롤 안(George Carroll, 安) 주교가 설립해 광명시에서 시작한 구라사업기관인 성라자로원이 모태라 할수 있다.
안 주교는 1945년 광복 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나환자들을 보고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수십여 명의 한센병 환우를 이끌고 광명리 신기촌에 정착촌을 마련했다. 새 보금자리의 이름은 ‘성라자로요양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다 끝내 아브라함 품에 안긴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업치락 뒷치락 파던 전쟁의 와중에 성라자로요양원은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 모락산 기슭 20만평의 임야 및 대지를 구입하여 1951년 7월 5일 새 정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성라자로마을의 제2의 창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있으며 땔나무가 많고 골짜기에 흐르는 물과 지하수가 있어 용수 해결이 용이했다. 민가와도 떨어져 있어 한센인들의 요양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1955년에는 가톨릭의대 부속 성나자로의원을 개원하고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이동진료에 따른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으며 1969년에는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성 나자로마을이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라자로마을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했던 이경재 신부가 1970년 12월 제7대 원장으로 다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일본, 미국, 구라파 등지를 돌며 나환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려 모금한 돈으로 나환자들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투자했고 라자로 돕기회도 발족해 나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발판과 라자로마을내 각종 시설들을 마련하는 등 발전하는 초석을 마련한다.
현재는 무의탁 한센병 환자 치료와 치료된 환자의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만들어져 정착촌과 함께 병동, 진료소, 교육관, 수녀원 등이 있으며 라자로 돕기회는 현재 2만여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특히 나환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나환자들의 보금자리에 피정의 집인 아론의 집과 은퇴사제들을 위한 사제마을도 건립해 일반 사람들이 나환자 마을을 손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한 점도 라자로 마을이 일군 성과의 하나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납골당 제도도 도입해 1987년 납골당 라자로의 무덤 을 준공하기도 했다.
성 라자로마을은 자선음악회, 벚꽃축제, 나환자 공동 생일 및 회갑·고희 잔치, 라자로의 날 행사 등을 열어 나환자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도 큰 몫을 했다. 특히 매년 여는 자선음악회 '그대 있음에'는 어려웠던 시절에 도움을 받아온 것에 감사와 보답하는 마음으로 91년부터 수익금을 모두 국내 나환자 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 해외 나환자를 돕는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
이 음악회는 1975년 12월 20일 처음으로 열렸고, 열리지 못한 해도 있었으나 꾸준히 게속되어 오면서 올해로 28회째 맞았으며 음악회의 수익금은 한센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성 라자로 마을의 운영에도 작은 도움을 주고 세계보건기구(WHO) 에서도 알고있다.
성 라자로마을이 정착하고 국내외에 알려지는데 있어 초대 원장이자 7대 원장으로 재임하셨던 고 이경재 신부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신부님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몽골, 루마니아, 러시아 등 한센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든지 달려가고, 나환자 요양원과 정착촌, 나병 연구기관을 직접 방문하여 구라사업 기금이나 약품, 의료기기 및 미감아들의 교육 장학금을 지원했다.
"사랑이 없는 나눔은 있어도 나눔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던 8대 원장 김화태 신부도 이경재 신부의 뜻을 이어 아시아 각국은 물론 2001년에는 독일 푸랑크푸르트에서 유럽 라자로 돕기회 법인을 설립하는 등 세계 한센인들을 돕기위해 나섰다.
9대 원장으로 부임한 조욱현 신부는 미국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여 후원금과 자금의 운용을 수월하게 하였으며,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세금공제 혜택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대 있음에' 음악회는 국내뿐 아니라 유럽 라자로돕기회에 의해 독일에서도 열리고 있다. 유럽의 '그대 있음에'는 지난 2003년부터 격년제로 독일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독일의 주교회의 의장인 칼레만 추기경께서 총재로 후원하며 세계 보건기구(WHO)와 독일연방 정부는 물론 헤센 주정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 있는 음악회로 자리 잡았다.
성 라자로마을은 이제 60여년의 시간이 지나며 전 세계적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한센인들에게,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과거 우리가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갚고 나아가 보다 넓은 사랑의 뜻을 실천하고 있어 그 위상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 미래를 지향하는 마을을 위해 2014년에는 수목원 '화수원'을 개원했으며, 지형적 조건에 의해 활성화 되지 못했지만 실버 홈을 만드는 등 마을 전체를 복지단지화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성 라자로마을내 성당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대다수 건축물들이 마치 에술작품을 연상케 한다. 특히 마을내 건물들은 조선시대의 건물양식과 비슷하게 최대한 자연경관을 살려 마치 숲속에 잠긴 건물처럼 보인다. 때로는 모락산자락의 커다란 바위도 그대로 조경에 이용했다.
성 라자로마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도 톡특하다. 한센환우들을 위해 마련된 곳인 만큼 색의 상징과 작가가 의도한 내용이 조화를 이루며 담겨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주를 이루며 강렬한 느낌을 전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 사이에서 푸른색과 노랑 계열의 색들이 어우러져 있는 이 작품은 여느 작품들과는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2015.07.1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
2015.07.1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4차 #호계3동 #안양교도소 #포도원 #가구단지/ 74차 탐사는 안양교도소에서 안양(호계3동)과 의왕(오전동)의 경계인 포도원과 가구단지 일대로 1960년대 포도나무들이 재배했다가 70년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들이 있었던 야산자락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대규모 고층아파트단지들이 우뚝 서 있다. 그래도 과거의 옛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63년에 세워져 국내 교정시설중 가장 오래된 안양교도소는 최근 의왕 교정타운과 함께 이전 여부를 놓고 논쟁이 치열하다.
1960-70년대 포도나무가 즐비해 포도원이라 불렀던 곳은 과거 성나자로마을과 주변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또는 나홀로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과거의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1977년 지어진 남강주택단지는 시행,시공사를 찾지 못해 재건죽을 하지 못하고 있는 표류 상태로 60가구 대다수 집들은 언제 무너질까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롭기까지 한 상태로 6가구 정도는 이미 빈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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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군포(舊軍浦) <호계3동>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천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 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구군포(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군포(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란 지명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원행정례(1789) 도로교량조道路橋梁條에 군포<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군포(軍浦)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국역을 말하기도 하고, 정병을 돕는 조정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유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군포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군포로 되었으며, 군포(軍飽)가 군포(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 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사무소, 호계파출소,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파출소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에서 군웅제(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파출소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포도원

호계삼거리와 구군포사거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포도원이 변하여 마을이 되었다. 1950년대에 옛 경향포도협동조합 창업자인 황인웅(黃仁雄)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면서 이 일대가 포도단지로 조성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성자나로마을 입구 쪽으로 가구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후 1980년대 택지로 탈바꿈하기 전까지 안양의 포도밭은 약 27만평에 달하는 규모를 보였고, 가장 당도 높고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였으며, 포도주 산업을 주도하였다. 포도가 익는 8월이 되면, 서울을 비롯하여 인근 각지에서 안양의 맛있는 포도를 맛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왔는데, 이는 안양의 독특한 풍속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도시화 물결에 밀려 포도밭이 택지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이후 도시회 개발사업으로 현재는 대단지 아파트가 속속 세워지고 있다.

 

■안양교도소

안양교도소는 1963년 호계3동 38만9천여㎡ 부지에 건립된 건축물(개소 1963년 9월3일)로 지어진지 50년이 넘어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정시설이다.
특히 교도소 정문에서 교정아파트에 이르는 200m의 교정로에는 1963년 교도소 신축 당시 심은 왕벚꽃나무 50여그루의 고목나무들이 봄이 되면 탐스럽고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분홍빛 벚꽃터널을 만드는 명소다.
안양교도소의 역사를 보면 1912년 9월 경성감옥이 1946년 4월 마포형무소와 1961년 12월 마포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3년 9월3일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신군포사거리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안양교도소는 주거지역 1만2700평, 자연녹지 5만9243평, 개발제한구역 4만8614평 등 12만584평 부지에 연면적 9815평의 2층 교도소와 1개동의 교정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안양교도소 이전 요구와 논의는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양시와 시민들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안양권 외곽에 위치했던 교도소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호계 신사거리가 생기면서 인근지역주민들의 민원 대상 1호로 제기되면서 1999년에는 6000여명의 안양시민들이 이전 민원을 내는 등 안양교도소 관외 이전을 법무부 등 정부당국에 꾸준히 요구해 왔다.
또한 법무부가 1995년과 1999년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전체 89동 가운데 44동에서 중대 결점이 나타나 안전에 문제가 있고 시설의 노후화에 따른 문제점도 컸다.
이에 법무부가 지난 1999년 안양교도소를 인근 지역으로 이전을 추진한 바 있으나 시흥시, 안산시, 의왕시, 군포시 등 인근 지자체의 해당 주민들은 물론 해당 시와 시의회까지 나서 반발하는 등 집단행동이 거세지자 이전계획 자체가 전면 백지화됐다.
당시 법무부는 서울 영등포 구치소 및 교도소와 안양교도소의 이전을 위해 반경 20㎞이내 17개 후보지를 선정, 검토해온 가운데 모 건설업체가 제시한 시흥시 물왕리저수지 인근인 조남동 일대 7만여평의 지역에 대해 가계약한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을 샀다.
또 2000년 8월에는 법무부가 안양교도소 이전장소로 안양시 석수동 석산부지(현 경인교대 캠퍼스)를 검토하고 일부 도의원이 이에 가세해 찬성 홍보전까지 펼쳤으나 이번에는 해당지역 주민둘의 반대로 2001년 9월 법무부는 이전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같은 안양교도소 이전 계획은 교도소 시설이 노후화되고 지역주민들의 이전 요구로 지난 1999년부터 양여 사업자 공모 등 이전이 추진된 바 있으나 이전후보지 자치단체의 반대와 안양시의 저밀도 지구단위계획수립 후 용도지역 변경으로 이전이 무산됐다.
2003년 11월에는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을 비롯 안양시, 도교육청, 안양교육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계3동 지역 및 안양교도소 학교부지 활용을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법무부 소유 임야의 학교.공원 활용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참석자들은 "학교와 공원 등의 기반시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안양교도소 부지 활용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며 "교도소의 현대화를 통해 토지이용을 높이고 남은 부지는 안양시가 양여받아 기반시설 부지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전 후보지 주민들의 반대로 이전 자체가 어렵자 이전계획을 접고 2006년부터 재건축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지역국회의원인 심재철의원의 역할도 한몫 한다.
결국 안양시는 지난 2009년 법무부와의 협의를 통해 기존 건물을 헐고 사업비 1,259억원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22개동을 건축(건축면적 2만5383㎡, 연면적 6만212㎡)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27억5천만원을 집행해 실시설계를 완료했다. 주목할 점은 교도소 전체 부지중에서 7만2983㎡(30.8%)를 주민편의시설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2010년 7월 새로 취임한 현 최대호 안양시장이 주민들의 반발을 이유로 재건축 반대와 안양교도소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교도소를 재건축하겠다며 2010년 2012년까지 안양시에 재건축 협의를 3차례 신청하지만 안양시는 잇따라 반려하자 2012년 7월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안양시가 모두 패소하자 시는 지난해 7월 대법원 상고했으나 또 패소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반전하는 사건이 생기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법무부, 국방부가 의왕시에 교정타운을 지어 안양교도소, 서울구치소, 서울소년원 등을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찬반으로 양분돼 대립과 불신으로 치닫으며 반대 주민들은 자녀들의 등교거부, 1인시위 등에 나서면서 교정타운(법무타운) 유치 반대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반면 의왕시는 주민의견수렴, 시의회 의견 청취 등으로 교정타운 유치를 위한 행보를 계속하는등 양측의 갈등은 정점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의왕가구단지가 있기까지 배경

안양과 의왕 경계에 있는 의왕가구단지가 있기 까지는 지난 역사를 보면 천주교 성나라자로마을과 떼어 놓을수 없다.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의 성나자로마을은 무의탁 한센병(나) 환우 등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복귀 및 자활을 마련하고자 1950년 6월에 설립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求癩事業)기관이다.
미국메리올리 소속 죠지케롤 안주교에 의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광명시 신 기슭에 창설하였으나 1951년 7월 현 장소인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소재한 땅을 매입하여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마을로 성장하기 까지 고 이경재 신부님의 노력이 컸다.
1962년 3월 성라자로마을에서 치료 중이던 환자 중 음성으로 판명된 45세대 82명이 인근 국유지와 라자로 원장인 윤을수 신부가 임야 약 33,000㎡를 구입 희사함으로써 자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축사를 지어 양계 양돈을 하며 어려움을 딛고 모든 사람들이 자립해야 된다는 생각릏 심어줘 땀 흘려온 동안. 당국의 보조와, 함께 자체 적립금으로 농장사무실, 경로당 등을 신축하며 보람도 맛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추세와 축산업계의 불황 등으로 축사는 차츰 비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축산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축사는 텅 비고 말았다.
이와 함께 사람들은 서울근교에서 이전해온 가구제조 회사와 서로 협력하여 오늘날 주된 생활로 이르게 되었다한다.
이렇게 시작한 가구제작업자들은 서울 근교 변두리 지역에서 도시 근대화 물결로 이전 및 새 사업장을 찾던 중 축산업 불황으로 생계유지가 막막했던 이 지역의 축사를 개조하여 여기서 가구 제작 및 목공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및 맞춤가구를 만들며 원목장, 티크가구, 자개, 나전칠기 등 우리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생활가구를 제작하며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가구공장단지에서 가구전문 백화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탐사73]안양 호계3동 삼신6차아파트 주변(2015.07.1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3]호계3동 삼신6차아파트 주변
2015.07.1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3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재건축을 추진하다 시공사 선정을 둘러싸고 난항을 겪고 있는 삼신6차아파트. 그리고 재개발이 추진중인 구군포사거리지역은 1970-80년대 풍경을 보여주는 아파트와 빌라 등 주거지와 주택가 한복판 그린슈퍼를 중심으로 육거리가 생길 정도의 오밀조밀한 골목이 있는데 지난 71차 탐사에 이어 다시 찾았습니다.
[탐사71차]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 사진첩 보기 https://www.facebook.com/coreachoi/media_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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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흥군 시절의 땅이 이리저리 쪼개지면서 지금도 호계3동이지만 토박이들과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는 아직도 구군포사거리라 부르고 있을 정도로 군포와 안양의 경계지역이기도 한 이 곳 인근에는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이기도 했지요. 당시 안양에서 방석집 하면 안양역 뒷쪽의 철길변과 구군포사거리 언덕골목길 두곳밖에 없었고, 성인나이트콜럽하면 이곳 군포사거리로 택시들이 새벽까지 줄지어 섰으니까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대로변 상업지역에는 고층의 오피스텔과 생활형고층주택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고,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단 2곳 만이 맥주집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할 정도로 변모했지요.
그래도 최근 이 일대에 다소마나 활기가 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저녁 무렵 술집과 움식점에 손님들이 몰리면서 활기가 있네요. 또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이었던 곳은 콜라텍이란 곳으로 바뀌었는데 춤추러 어는 중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네요. 실제로 지난 72차 탐사시 뒷 골목에서 보니 직업이 뭔지 모르지만 벤츠, 아우디 차량을 몰고 오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네요. 하지만 상업지역 뒷곯목과 삼신아파트 주변 안양천변 골목 주택가의 풍경은 마치 회색빛처럼 음울한 모습입니다.

 

 

 

 

 

 

[탐사72]안양 호계3동 한성병원 남서쪽 동네(2015.07.04)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2]호계3동 한성병원 남서쪽 동네
2015.07.04/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2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한성병원 / 잠시 쉬었던 안양탐사대가 다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72차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지난 71차에서 큰 걸음으로 둘러보았던 안양 호계3동 호계사거리에서 남쪽으로 군퐁하의 경계 끝..서쪽으로는 군포사거리까지의 한성병원 남서쪽 주변입니다. 구 군포서거리 인근은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였지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지금 단 3곳 만이 간판을 내걸고 있고, 삭막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은 뒷 골목쪽으로 입구를 내고 콜라텍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대낮부터 춤 추러오는 중년들로 호황입니다.

 

 

 

 

 

 

 

 

 

 

 

 

[탐사71]안양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2015.04.25)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1]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
2015.04.25/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1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 2015년 4월 25일 71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으로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였지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지금 단 3곳 만이 간판을 내걸고 있고, 삭막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은 뒷 골목쪽으로 입구를 내고 콜라텍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대낮부터 춤 추러오는 중년들로 호황입니다.

 

 

 

 

 

 

 

 

 

 

 

 

[탐사70]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동네(2015.04.1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0]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동네


2015.04.1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0차 #호계1동 #호계사거리/ 2015년 4월 18일 70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부터 호계사거리 까지 이어지는 동네입니다.

탐사코스: -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탐사69]안양 호계동성당 주변 동네(2015.04.1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9]호계동성당 주변 동네
2015.04.1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69차 #호계1동 #호계동성당 #호계1동소공원/ 2015년 4월 11일 69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동쪽 동네로 1층 단독주택 또는 2층 양옥집에 담장이 낮은 집들이 80년대 초대 지어진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과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공원앞 골목 등 정감있는 골목이 비교적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탐사코스: 금성마을버스정류장(경수대로)-경수대로569번길-흥안대로109번길-경수대로555번길-호계동성당-호계1동소공원-흥안대로81번길-경수대로623번길-호원공원-경수대로595번길-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탐사68]안양 호계1동 LG연구소 아랫동네(2015.03.2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8]호계1동 LG연구소 아랫동네

2015.03.2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68차 #호계2동 #호계1동 #호원초교 #호원공원 #호원경로당 #제나유치원 #LG연구소 #강남5차아파트 #강남4차아파트 #동성빌라 #강박사만물수리 #은하수분식 #한옥(경수대로569번길39-5)

2015년 3월 28일 68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2동 서울외곽순환도로 남쪽 동네로 호원초교, 호원공원과 호원경로당을 지나 호계1동에 접어들어 강남5차아파트을 비롯 안양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장 넓은 면적이지 않을까 싶은 제나유치원, 꼭 보존했으면 싶은 높은 굴뚝이 있는 LG제1연구단지 후문앞 길을 지나 오밀조밀 예쁜 골목과 목련과 매화 꽃 등이 피면서 봄내음을 물씬 풍기는 동네다.
특히 경수대로623번길 105호에 있는 제나유치원은 시골 초등학교 같은 교사 건물에 수영장, 야외놀이터, 텃밭 등이 있는데 안양에 유치원중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이 동네 골목길은 비교적 넓고 집들도 깨끗하다. 앞서 돌아본 호계2동처럼 재개발반대 현수막 등이 내걸려 있지는 않지만 이곳 또한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주민간 갈등과 진통의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탐사코스: 무궁화태영아파트버스정류장(경수산업도로)-경수대로609번길-경수대로623번길-호원공원(지하는 호원공영주차장)-경수대로599번길(골목주택들)-강남아파트5차-경수대로623번길-호원초교-LG연구소후문-호원경로당-제나유치원-흥안대로109번길-세빌라-동성빌라-강남아파트4차-경수대로535번길-강박사만물수리-흥안대로109번길-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탐사67]안양 호계2동 외곽순환도로 동네(2015.03.2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7]호계2동 외곽순환도로 동네

 

2015.03.2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67차 #호계2동 #안양시새마을회관 #호계중 #안양시노인복지관 #럭키아파트 #호원초교 /

2015년 첫 탐사 67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2동 신기사거리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지나가는 좌우 동네로 호계중학교와 안양노인복지관 주변, 럭커아파트 주변 동네다.

이 동네는 1970년 말 서울-수원간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도로)가 뚫리면서 개발돼 호계공원 방향 야산에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에는 부분 재개발에 따라 여기저기 고층아파트가 나홀로 들어서면서 호계공원으로 이어지는 언덕길과 골목길에는 노후화되고 허스름한 연립주택과 다세대, 다가구, 단독 주택들이 어수선하게 자리잡고, 관리가 잘 안되는 관계로 노후도는 심각하고 골목길과 집과 집 사이 담벼락밑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어 삶의 여건이 그다지 좋지를 않다.

이 동네 역시 재개발사업이 추진중이다. 골목길 이집저집에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 주민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탐사코스: 신기사거리.호계중버스정류장(경수산업도로)-귀인로80번길-경수대로665번길-안양시게이트볼장-안양시노인복지관-폐가(74-20)-숲속이삭어린이집-경수대로665번길-신미주아파트-경수대로651번길-강남3차아파트-언약감리교회-푸른마을삼성아파트-경수대로665번길-경수대로-육교-경수대로651번길-서울외곽순환도로건너편-경수대로623번길-호계럭키아파트-호원초등학교- 경수대로609번길-카페VEHA(커피나눔)-뒷풀이(평촌학원가/ 도쿄키친스토리)-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