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1123]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지역역사탐방(의왕.과천)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2019 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지역역사탐방

** 의왕-과천코스 **

2019.11.23/ #의왕 #과천 #역사탐방 #동네 #골목 /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독립.민주.인권을 만나는 2019 역사탐방 2차-의왕과천지역/ 13:00 고천초교 집결-(도보)-만세길-의왕면사무소&사근행궁터-(차량이동)-오매기마을-임영대군묘-(차량이동)-도깨비도로-하우현성당-(차량이동)-온온사-(차량이동)-종료-뒷풀이(호계동 한패-구군포사거리)

자료 정리 및 안내 해설(박철하 의왕문화원 前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1. 고천초등학교


의왕 최초의 공립학교. 1930년대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는 ‘일면일교제(一面一校制)’ 정책을 펼쳤다. 의왕면 주민들은 1935년부터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하고자 보통학교기성회를 조직하고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조선총독부(경기도)는 1936년 10월 30일자로 고천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인가했다. 1936년 11월 15일 개교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2월 1일 개교되었다. 일제강점기 의왕지역 초등교육기관 가운데 유일한 정규학교였다. 처음에는 4년제로 출발하여 1939년에 제1회 졸업, 1942년 6년제로 변경되어 1944년에 제5회 졸업생(6년제 1회)을 배출한 이후 2019년 현재 80회가 졸업했다. 고천공립보통학교(1936)→고천공립심상(尋常)소학교(1938)→고천공립국민학교(1941)→고천국민학교(1945.9)→고천초등학교(1996.3.1)로 명칭 변경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고천경찰관주재소터


1917년 2월 8일자로 수원군 의왕면 고천리에 수원경찰서 관할의 고천순사주재소(古川巡査駐在所)가 설치되었다. 고천약국 앞 10m 지점으로 경수산업도로에 편입되었다. 1919년 3월 31일 독립만세운동 당시 일제의 정보기록과 󰡔매일신보󰡕에는 ‘고천경찰관주재소(古川警察官駐在所)’로 표기되어 있다. 의왕면사무소에서 출발한 만세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조선인 순사는 시위대에게 “저는 (총독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공인이므로 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는 없으나 마음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외치세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사람의 헌병[or보병]이 갑자기 나타나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 두 사람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도망가던 시위대 가운데 일부가 쓰러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가 46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위협 속에 모두 손을 묶인 채 수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이틀을 경찰서에서 지내며 조사와 신문을 받았고, 4월 1일 60~90대의 매[태형]를 맞고 풀려났다. 부상자 두 명도 이때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복영[=이봉근]은 4월 4일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았다. 해방 후에는 파출소라 불렀고, 6.25전쟁 때에 인민군이 장악하면서 내무서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고천파출소는 위치를 현재의 왕곡로1번지(고천동 259-1) 청소년경찰학교 자리로 이전되었다.

3. 의왕면사무소터


1914년 4월 1일부로 경기도 수원군 의왕면[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통폐합]이 새로 설치되었다. 면사무소가 정식 출범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고종황제 시기까지 현륭원을 방문할 때 머물렀던 사근행궁[사근평 응란헌]을 의왕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내부를 2층으로 구조 변경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면 주민 800여 명이 의왕면사무소 앞에 모여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면장도 독립만세 시위대에 참여했으며 100여 미터 떨어진 고천경찰관주재소까지 나아갔다.

1936년 10월 1일 수원군 의왕면과 수원군 일형면이 통합되어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면사무소의 기능이 멈췄다. 고천공립보통학교가 1936년 10월 30일자로 설립인가 되고 12월 1일 개교하였는데 교사(校舍) 완공되지 않아 1,2학년 입학생들이 한동안 의왕면사무소 일부를 교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3월 10일 일왕면협의회에서 의왕면사무소 건물에 대한 부동산매각처분이 만장일치로 통과됨에 따라 이후 철거되었다. 매각 철거이유는 건물 유지관리가 곤란하고 일왕면사무소를 새로 신축함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뒤에도 수원군 일왕면이었다가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 분리됨에 따라 화성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으로 편입되면서 옛 의왕면사무소 자리에 다시 면사무소를 신축하였다. 이때 사근행궁 옛 기단으로 쓰였던 돌들이 많이 나왔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80년 의왕읍사무소, 1989년 의왕시청 청사로 쓰이다가 1993년 시청이 현재의 자리로 신축이전되면서 고천동사무소[고천동주민센터]로 이용되었다. 2016년 7월 고천동주민센터가 신축 이전되면서 현재는 의왕시청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4. 사근행궁터


사근천주정소는 삼남로에 속하는 길에 연해 있는 곳으로 광주부 소속이었다. 사근천 지역은 중요한 도로에 해당되는 곳으로 둔전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이 이뤄지기도 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인조가 궁궐을 떠나 피해 수원부를 지나 공주로 향할 때 사근현에 잠시 쉬어간 적도 있다.

사근천주정소(沙斤川晝停所)와 관련하여 1665년(현종6) 현종이 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으로 가던 중 과천을 출발하여 사근천주정소에 머물렀다는 󰡔현종실록󰡕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숙종이 사근천주정소에 머문 기록도 확인된다.

사근천주정소를 가장 많이 찾은 임금은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의 현륭원에 모시면서 모두 13차례 행차를 했는데, 오갈 때마다 사근천주정소에 들러 쉬어갔다. 이때 정조는 사근행궁(肆覲行宮)으로 명명하고 한자 표기도 변경했다. 1795년 을묘원행 때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사근행궁에 머물러 점심수라를 들기도 했다. 특히 을묘원행을 준비하면서 사근행궁을 보수하고 규모를 확대하였다. 정당 건물에는 응난헌(凝鑾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근행궁은 응난헌의 정당 외에도 별당이 있었고, 좌우에 창고가 하나씩 있었으며, 입구는 삼문(三門)으로 문 좌우에는 문지기들이 기거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헌종과 철종에 이어 고종 집권시기인 1870년까지 현륭원을 방문하기 위해 오갈 때 ‘사근평 응란헌’에 머문 기록이 󰡔승정원일기󰡕를 통해서 확인된다. 이후 고종과 순종이 사근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14년 이후 사근행궁은 의왕면사무소로 이용되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이 되었고, 1937년 3월 이후 철거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963년 의왕면사무소가 다시 설치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청사가 축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1919년 3월 31일)


1919년 3월 31일 저녁 의왕면 주민 800여 명이 의왕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에는 일반 주민들은 물론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도 다수 참가했다. 시위대는 횃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왕면장도 시위대열에 함께 했으며, 100여 미터 떨어진 고천경찰관주재소 앞에까지 나아가 만세를 불렀다.

수원에서 무장한 보병 2~3명이 출병,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2~3명이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시위대 46명이 체포되어 수원경찰서로 붙잡혀 갔다. 이틀간의 조사와 신문을 받고 이튿날 60~90대의 태형을 받고 41명은 풀려났으나, 5명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독립만세 현장에는 「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현재 이곳은 재개발지역으로 확정되어 도로개설로 3.1운동 역사현장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 고천경찰관주재소터, 의왕면사무소터, 이봉근, 성주복 참조 *



6. 오전리마을회관터


오전리마을회관터는 오매기 가운데말 입구에 위치해 있다. 1961년 12월 4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총무처와 화성군 일왕면 오전1리의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당시 기념식장에는 “모범농촌 건설” “일하자, 재건이다”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이때 오전1리사무소와 부녀회관으로 이용될 재건회관 현판식도 함께 거행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중심의 중심세력은 쿠데타 당시의 군사혁명위원회를 1961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하여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정부의 실질적인 최고통치의결기구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검찰부, 혁명재판소를 직속으로 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억압하는 한편, 부정축재처리, 정치활동정화, 헌법심의원회 등 특별위원회와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제3공화국의 출범과 군사쿠데타 주체세력의 민간정부 집권을 위한 모든 정치적 조치와 법적, 제도적 절차를 마련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하루 전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존속되었다. 



7. 오전리교회터


오매기마을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는 ‘문화류씨 가정에 외롭게 숨어 핀’ 전도부인 홍길순(洪吉淳) 여사가 그 중심에 있다. 홍길순 여사는 마을에서 20여리나 떨어진 수원읍성결교회까지 걸어다녔다. 오전리교회 기독교 역사에서 홍길순 여사는 여성 전도사로서 “오전리교회의 첫 번째 믿음의 꽃”이었다. 신도수가 늘어나면서 1937년 6월 10일 유근풍(柳根風)의 집에 예배소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오전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938년 유창희의 헌금을 기반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하여 4개월 만에 신축을 마치고 1939년 6월 5일 오전리교회 헌당식을 가지면서 독립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교회의 정식 명칭은 “조선(朝鮮) 야소교(耶蘇敎)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오전리교회(五全里敎會)”였다. 신도는 여성들이 많았으며, 오매기 마을의 류씨 문중 사람들을 비롯한 오전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인근의 고천리와 학의리 사람들도 있었다. 신도수가 너무 많아 첫 교회 바로 위에 교회를 새로 짓고 원 교회는 목사의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첫 교회 건물은 개인주택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새로 확장한 교회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1941년 부임한 유택윤(兪澤潤) 목사는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따른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같은 해 5월 24일 수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유목사가 구류되었던 중에도 류춘희(柳春羲) 집사가 중심이 되어 가정예배를 16개월간 지속하였고, 신도들은 목사가족의 생활을 돌보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이 해체됨에 따라 1943년 11월 19일 경성구세단에서 신경산 목사가 부임하였는데, 해방이 되자 성결교단이 부활하면서 1946년 3월 성결교회로 회복되었다.

이후 오전리교회는 1962년 7월 오전리 391번지로 이전하였고, 1974년 고천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1978년 고천리 305-10번지로 다시 이전하면서 고천성결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 임영대군 묘와 사당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 1418~1469)는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양대군, 곧 세조가 그의 둘째 형이다. 임영대군은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며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갖추었음에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영대군은 형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그의 통치를 보좌했다. 세종과 문종 시기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한 경험을 살려 세조의 명을 받아 군기감의 잘못을 바로잡고 신기전을 개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신숙주와 함께 효령대군을 위한 원각사 창건에 힘쓰기도 했다.

  임영대군은 비록 궁중에서 자라고 생활하였지만 민간의 생활을 잘 알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군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 먹고 입는 것도 힘든 군사들에게 갑옷까지 만들어 입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세조에게 건의했다. 당시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면서 백성들은 농경에 중요한 소를 잡아서 갑옷 비용으로 다 써버리게 됨으로써 원망이 많다는 사실을 임영대군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임영대군은 세조를 도와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정에 전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영대군이 세조를 적극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우애회복에 노력하며 여러 조카들 가운데 인재를 찾아내어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영대군은 예종이 즉위한 직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5일 동안 조정에서 하는 회의를 폐지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제공했다. 

  후손들에게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자 임영대군은 이곳 능안마을에 내려와 숨어지냈다고 한다. 이때 세조가 함께 조정을 돌보자고 찾아왔지만 눈 뜬 장님[청맹과니] 행세를 하며 끝내 거절하였으며, 모락산 큰 바위에 올라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면서 한양을 걱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영대군 묘역은 모락산 동편 자락 백운호수를 만나는 지점인 내손동 능안마을 초입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손 집을 중심으로 우측에 임영대군묘역, 집 뒤에 제안부부인 최씨묘역, 좌측에 사당이 있다. 임영대군 묘역은 일반 묘와 달리 상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구분하여 조선전기 왕릉 묘역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상계에는 묘비, 중계에는 상석과 장명등 및 망주석, 하계에는 문인석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과 문인석은 조선시기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고, 묘비는 1924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1981년 묘역을 새로 정비하면서 봉분을 비롯해 상석과 망주석 등도 새로이 만들었다. 임영대군 묘역은 광해군과 인조, 현종 때에 거듭 왕릉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임영대군 사당은 원래 종가 뒤편에 있었으나 몇 차례 이전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한 가운데에 임영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현재의 사당은 2000년에 기존 사당을 완전히 해체한 뒤 쓸 만한 재목을 간추려 다시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사당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방풍널을 달았다. 사당 정면에는 1칸 규모의 삼문이 세워져 있고, 좌우로 기와지붕을 얹은 담장이 빙 둘러서 사당을 보호하고 있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21일에 전국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임영대군 기신제를 올린다. 모락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임영대군을 기리는 불당이 있었다. 경일암(擎日庵)이라 불린 이 암자는 한국전쟁 때 모락산전투 중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은 2000년 3월 24일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모락산의 지명유래. 임영대군의 후손들에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고 형인 안평대군과 동생 금성대군마저 참형을 당하자 임영대군은 모락산 자락에 내려와 숨어지냈다고 한다. 특히 「정간공자손보행장(貞簡公子孫譜行狀)」(1769년)에 따르면, 산 아래 초막을 짓고 매일 높은 산봉우리 큰 바위에 올라 한양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망궐례를 올렸다 하여 ‘慕洛山(모락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후 임영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임영대군의 묘역은 후대 조선 왕의 능 후보지에 오르곤 했는데, 특히 현종 때는 효종의 능 후보지로 적극 검토되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은 이 마을이 임금의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陵內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 하우현성당과 사제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1700년대 후반이다. 200년이 훌쩍 넘었다. 정조 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순조 때에 이르러 금지와 탄압이 강화되었다. 1800년대에 네 차례의 천주교 대탄압으로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희생됐다. 이때 의왕지역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했다.

  언제부터 의왕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상으로는 충청도 홍주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1751~1801)이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가 광주 의일리(현 백운호수 주변 학의동지역)로 이주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1845년에는 하우현에 살던 신자 김준원이 광주 포교에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는 다는 증언도 전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아 이미 1800년을 전후한 시기 이래 하우현 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우현은 주변은 청계산 깊은 골이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인들에게는 숨어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하우현은 인천-시흥-광주-이천-여주를 잇는 도로 상에 동양원(東陽院)이란 역원이 설치될 만큼 비교적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포교를 위해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1865년 프랑스의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1840~1866. 한국이름 서몰례)가 인근 묘론리(현 성남시 운중동)에 와서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며 우리말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다가 그 이듬해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천주교인들이 인근에 땅을 파고 굴속에서 살았다 하여 생겨난 토굴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하우현 성당은 100년이 넘는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1884년에 공소 공동체를 갖추었고, 갓등이본당 알릭스 신부의 도움과 하우현 공소 신자들의 모금으로 1894년 5월 초가 목조 10간의 강당이 건축되었다. 1900년에는 신자가 160명에 달했으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으로 하우현 본당이 되었다. 한강이남 경기지역에서는 세 번째였다. 일제 강점 초기 신자는 200여 명에 달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와 점차 감소현상을 보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치로 일반의 연초재배가 금지되면서 생활수단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신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시골 본당의 교세가 감소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이후 공소와 본당을 거듭하다가 광복 이후 1965년 김영근 신부 재임 시절에 성당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우현성당에서는 1903~1904년경부터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윤예원(尹禮源, 1889~1869) 신부가 하우현으로 오면서 학교의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학교 이름은 ‘경애강습소(敬愛講習所)’라 했으며, 체계를 갖춘 4년제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이전의 학교가 종교교육이 목적이었다면, 윤예원 신부 부임 이후는 선교와 함께 봉사, 애국심 함양 등을 교육의 중점으로 하면서 문맹퇴치와 더불어 근대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윤예원 신부는 부임하기 전 황해도 은율본당에 있을 때 신자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애강습소는 윤예원 신부가 전임한 이후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29~1930년 경 폐쇄되었고, 당시 주변 청계지역의 서당들과 모두 합하여 정준모(鄭俊謨, 1893~1958) 선생이 이끄는 성현서당(星峴書堂)으로 이어졌다. 

  하우현성당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제관이 자리하고 있다. 부임한 신부가 생활할 수 있도록 1906년에 건축된 것으로, 처음에는 벽체를 거의 벽돌로 쌓고 서양식 지붕틀에 함석지붕을 올리고, 외부에 초석을 갖춘 기둥을 세워 회랑을 마련하였다. 이후 개보수를 거치면서 돌로 만든 벽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렸다. 우리나라와 서양식을 절충한 근대 건축양식의 하나로서, 2001년 사제관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사제관 앞뜰에는 프랑스 볼리외 신부와 김영근 신부의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2004년 사제관 건물을 복원하고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10. 동양원터


의왕지역에는 두 개의 원(院)이 있다. 동양원(東陽院)은 인덕원 및 광주로 연결되고, 사근내원(沙斤乃院)은 수원부지역과 연결되었다. 역제가 완전한 관용(官用)으로 운용되었던 것과 달리 원(院)은 토지만을 관에서 지급하고 가옥의 시설이나 사무는 민간에서 담당했는데, 해당 지방의 유지를 원주(院主)로 정하고 원의 관리를 일임했다. 이러한 원은 대체로 도로에 30리마다 설치하였고, 인가가 희박하여 교통이 불편한 곳에도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원은 거의 폐허화 되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개설한 점(店)을 이용하게 되었다. 점은 대개 원터에 설치되어 원(院)에서 점(店)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 많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점차 주막(酒幕)으로 발전하였다.


11.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 지도자 이봉근(이복영) 집터


이봉근(李鳳根, 1893~1938).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청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총명하고 그 성격이 활달하여 주위에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15세를 전후하여 사서삼경을 이해하였으며, 한학은 물론 신학문을 습득하는데도 남다른 노력을 보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문맹을 퇴치해야 한다고 믿고 야학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친구 성주복이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소식을 접하고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봉근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전에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먼저 청계지역을 중심으로 4개 리의 책임자를 결정하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하여 숲밖에 집결하도록 했다. 만세시위 때 태극기를 사용하기로 하고, 7일간에 걸쳐 매일 밤마다 태극기를 제작하고 각 리에 배포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통문(通文)으로 각 마을의 이장에게 전달하고, 이장의 책임 아래 각 호당 한 사람은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했다. 만약 이 기밀을 누설하거나 불참하는 가정에 대해서는 만세시위 후 방화하겠다고 경고도 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31일 저녁 무렵 청계지역 4개리의 주민들은 숲밖에 집결, 시위대를 형성하고 오매기고개를 넘어 의왕면사무소로 향했다. 의왕면사무소 앞에는 800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면사무소 앞 시위대열에는 의왕면장도 함께 했다고 한다. 시위대는 횃불을 밝히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고천경찰관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이봉근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당시 고천경찰관주재소에 근무하던 조선인 순사는 시위대에게 ‘자신도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 자신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계속 만세를 불러 독립을 쟁취하기 바란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독립만세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수원에서 무장한 보병 4~5명이 파견되었다. 일본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이봉근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수원경찰서에서 조사와 신문을 받았는데 함께 잡혀간 46명 가운데 41명은 태형 60~9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봉근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후 민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배우는 것이 나라를 찾는 것이다”라면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개설하였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성주복과 함께 고향에서 계명강습소[계명야학원]를 설립하여 글을 가르키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하우현성당 아래 가족과 거주하면서 집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편 성당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였다. 부상으로 지팡이를 집고 다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봉근 선생을 가리켜 ‘만세나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12. 독립운동가 성주복 묘역


성주복(成周復, 1894~1971). 경기도 수원군 의왕면 청계리 361번지 출생.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뒤 1915년경 서울의 청년학관에 있는 학교에 입학, 1917년 동교가 폐교되자 그 이듬해에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19년 3월 5일 서울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朝鮮獨立)’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대와 함께 남대문에서 종로 보신각 방향으로 진출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당했다. 성주복은 3월 10일과 6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조서와 예심조서를 받았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6월(미결구류 90일 통산)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징역은 1919년 11월 10일 시작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1920년 2월 10일 풀려났다.

석방 이후 상청계 지역에서 계명강습소를 개소하여 신교육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고 전한다. 유족에 의하면 출감 이후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쳤으며, 학교 이름 “근화(槿花)”는 애국 동지들과 함께 성주복 선생이 주도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근화여학교는 1938년 이후 교명이 “덕성(德成)”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이후 해방 때까지 직접 양봉사업을 하면서 󰡔동아일보󰡕에 양봉 보급 글을 연재하는 등 양봉기술 보급에 노력하였다.

우니나라 정부에서는 선생의 3.1운동에서의 공훈을 기려 200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역은 의왕시 청계동에 위치해 있다. 유족들은 2011년 12월 10일 선생의 행적을 새겨놓은 기념비를 세우고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의왕문화원 의왕향토문화연구소에서는 성주복 선생의 3.1정신을 기리고 의왕시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2012년 1월 18일 [3.1독립만세운동 독립유공자 성주복선생 기념비 제막식]을 주최한 바 있다.

13.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은 온온사(穩穩舍) 입구에 위치해 있다. 비석군은 관문리 홍천말 249-5의 도로변[비석거리]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병자호란 때인 1636년 12월 관악산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청나라 군대와 싸운 과천현감 김염조(金念祖)의 비, 정조6년(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鄭東浚)의 비,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민치록)의 비 등 과천현감을 비롯하여 1928년 변성환(邊星煥) 구장의 비석까지 15명의 선정비를 모아 놓은 것이다.

비석의 명칭은 다양한데 그 중 7기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 해당한다.

2009년 11월 9일 과천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비석군 바로 옆에는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5명이 손잡고 에워쌀 수 있는데, 둘레가 6.5미터라고 한다.


14. 온온사


온온사(穩穩舍)는 과천현의 객사이다. 과천현의 치소(治所)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조선초기이다. 이 객사는 1649년(인조27)에 건립되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은 곳으로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이 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공무로 벼슬아치들이 이 고을에 들렀을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온온(穩穩)’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90년(정조14)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 머물러 과천 동헌을 ‘부림헌(富林軒)’이라 하고, 객사를 ‘온온사(穩穩舍)’라 이름짓고 두 편액을 썼다. 정청(政廳) 3칸이 중앙에 있고, 좌오 동.서헌이 각각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청부분 지붕이 동.서헌보다 약간 높아 전형적인 객사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건물 내부 중앙은 마루로 되어있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일제강점기에 온온사를 과천면 청사로 사용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을 헐고 원형을 변형하여 새로 지었다. 원래는 현재의 중앙동사무소 자리에 있었는데 1986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 객사의 형태를 참고하여 완전히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15. 과천향교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7)에 성현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407년(태종7), 1601년(선조34), 1639년(인조17)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정면2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된 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오성(五聖, 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송조이현(宋朝二賢, 정호.주이),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 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 스물다섯 분의 성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말기까지 지역 유림의 대표적인 교육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과천향교의 명륜당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조선 태조7년(1398)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아 등과 유생이 없다는 이유로 숙종16년(1690)에 과천 서이면에서 현재의 터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1944년에 시흥향교.안산향교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 다시 1959년에 시흥향교로 개창되었다가 1996년 과천향교로 복원되었다. 현재까지도 과천시, 광명시, 군포시, 안산시, 안양시, 의왕시, 시흥시 등 7개시 유림들이 모여 성현을 추모하고 학문의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과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교 앞으로는 관악산 자하동 계곡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자하동 계곡에는 마애명문들이 있는데 ‘단하시경(丹霞詩境)’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자하동의 빼어난 경치’를 뜻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와 유사한 필체로 평가된다. 이 외에도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의 글씨인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과 ‘자하동문(紫霞洞門)’, 그리고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지은 것을 송시열이 새겼다는 ‘광분첩석(狂奔疊石)’ 등 모두 4기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단하시경’만이 유일하게 과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탐사75-2]의왕 성라자로마을 앞 동네 오전동(2015.08.0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5-2]성라자로마을 앞 오전동
2015.08. 0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5차 #의왕 #오전나구역/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70년대 흔적이 남아 있는 동네. 1970년대 주한미군이 묻은 송유관이 동네 한복판으로 통과하는 지역이다.

 

의왕시 고유지명 유래 [오전동]

 

오전동(五全洞)
●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오마동(五馬洞), 전주동(全朱洞)·등곡동(藤谷洞)의 여러지역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오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오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오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오마동(五馬洞)의 '오'(五)자와 전주동(全朱洞)의 '전'(전)자를 따서 '오전동'이라 불렀으며, 오전동에는 가운데말·뒷골·등칙골·목배미·백운동·사나골·성라자로원마을·오매기·옻우물·용머리·전주남이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 가운데말
사나골과 뒷골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오매기의 여러취락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운데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백운동 주민들은 이 마을을 '건너말'이라 부른다.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오매기의 자연취락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용머리·뒷골·사나골·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뒷골(後谷)
백운동과 가운데말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後谷)이라 부르고 있으며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사나골·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등칙골(藤谷洞)
의왕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이다. 이곳 뒷산에 등나무가 많으므로 '등칙골'(藤谷洞)이라 부르고 있다. 등칙골은 전주이씨 근령군파(全州李氏 謹寧君派)후손인 이 용(李容 1565.10. 12∼1616. 1. 4, 자는 季偉, 通德郞을 역임)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아들 이정집이 묘하에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 옻우물·전주남이 주민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1·2·3일 중에서 길일을 택해 이곳 뒤에 있는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목배미
용머리 남쪽 길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왕곡동 홍치골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위치하고 있다.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앞의 논이 기름진 문전옥답(문전옥답)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길을 통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곤 했다.

 

- 백운동(白雲洞)
오전저수지(五全貯水池)밑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백운동'이라 부른다. 경주 김씨와 광주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사나골·건너말(가운데말)·용머리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사나골(山岳谷)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1600년대 초에 문화류씨 하정공파 후손인 유 항(절충장군을 역임)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오매기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산악(山岳)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산악골'이라 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나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성라자로원 마을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광복 이전만 해도 이곳은 산야(山野)이었다가, 광복후 서울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소진탁(蘇鎭卓)박사에 의해 폐결핵 요양소가 설치되었다. 그후 1952년 6월 2일 죠지캐롤 안주교에 의해 성라자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복음〉(16, 19-31)을 보면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배를 채우며 살다가 얼마뒤에 죽어서 부활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성라자로 마을'이라 명명한 것이다.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포도원 입구에서 수원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동편으로 보면 '새삶의 예수'석고상이 있고 그 뒤로 십자가가 세워진 아치에는 성라자로원 마을 안내판이 있다. 성라자로원은 나환자의 조기치료와 보호 및 불구 그리고 노령환자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불구환자의 요양과 진료를 실시하고 라자로원 돕기 후원회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은 이경재(李庚宰)신부로, 그는 1926년 2월 9일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여 1951년 4월 3일 서울카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1951)신부가 된 후 해군 종군신부로서 임무를 끝내고 모두 다 외면하는 성라자로원을 자원하여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빈곤과 병고와 한숨만이 맞아주는 라자로원을 위해 헌신봉사한 공로로 1979년 12월 28일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성라자로원은 처음에는 1950년 광명시에 설립되었다가 1951년 7월 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후 1971년 4월 3일 라자로 돕기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0년 후인 1981년 11월 15일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도 아론의 집(1984. 5. 8)과 불구노약자의 집(1986. 7. 14)등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 오매기(五馬洞. 五募洞)
삼태기처럼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국가의 전란등이 일어나면 피난의 최적지였다. 본래는 전주남이 동쪽으로 용머리·사나골·윗골·가운데말·백운동·목배미 등을 통털어 오매기라 불러왔다. 이 마을은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문씨(文氏)·진씨(陳氏)·광주노씨(廣州盧氏)·마씨(馬氏)등이 각기 1막(一幕)씩을 짓고 살아 '오막동'(五幕洞)이라고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오매기(五馬洞)'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백운동·용머리·가운데말·사나골등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통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옻우물
유한양행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까지만 해도 전주이씨 근령군파후손 2가구와 김씨등 모두 3가구가 살아오다 그후 성라자로원 관계자들이 거주하면서 6,7세대로 불어 났으나, 1969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엽, 이마을에 사는 이생원의 아들이 피부병을 앓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더니 고맙다는 뜻으로 오전동 133번지에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런데 사시사철 물이 잘 나와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옻으로 인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옻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옻우물'로 했다고 한다. 이우물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변에 주택이 늘어서자 폐정되었으며, 현재는 삼창양행(三昌洋行)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전주남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용머리(龍頭洞)
오매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하천의 물 흐르는 형태가 이곳에 이르러 용의 머리처럼 휘돌아 가므로 '용머리'(龍頭洞)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머리부분은 일제 말엽에 도로를 개설할 때 파손되었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해도 인동 장씨등 불과 서너 가구밖에 안되었다가 1960년대초부터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나골·건너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전주남이(全朱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전주동이라 불렀다. 등칙골과 오매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중엽에 전주동이란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을 부자가 박절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앙심을 품고 마을 뒷산에 혈(穴)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자 이 말을 사실로 안 전주동은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었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전주동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전주남이'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옻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강산(姜山)
오매기 마을 남쪽에 있는 산으로, 진주 강씨의 선대 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 오매기의 사나골·건너말·백운동·용머리·목배미·뒷골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고래들
옻우물에 속했던 들로 나븐들 서쪽에 있었다. 고래처럼 큰 들이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나븐들
옻우물 마을회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여m쯤 있었던 들이다. 지금의 성일통상과 현대주유소등이 들어선 곳으로 197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넓은 들이었다.

●되링게들
용머리좌우에 있는 들로 예전에 이곳 개울가에 도롱룡이 많았다고 한다. ※ 도롱룡은 도롱룡과에 속하는 양서류의 하나로 몸이 길이가 15㎝가량인데, 숲·밭 등의 낙엽 밑이나 땅속에 살고 밤에 나와 곤충 등을 잡아먹는다.

● 된박골
성라자로원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골짜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 두껍바위
되링게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 마당바위
큰 보식골에서 성라자로원 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음지쪽에 있다. 마당처럼 큰 바위이다.

● 미륵재
성라자로원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다 과천가는 구도로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장하고 이곳에 미륵(彌勒)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은 1952년 11월 경 의왕시 내손동 출신인 고금동(高金童 1911년생)씨가 내손동 오리나무골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 범바위
사나골 뒤 모락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병풍바위
백운산 중봉에서 서북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병풍처럼 생겼다.

● 병풍산
전주남이 뒤에 있는 산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등칙골·전주남이·옻우물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삼형제바위
전주남이 병풍산에 있다. 바위가 3개 층층이 있어 '삼형제바위'라 부른다.

● 어내들(御川坪)
의왕농협 오전분소 주변으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 행차때 이곳 개울가에 머물렀다 하여 '어내갈'또는 '어내들(御川坪)'이라 부른다.

● 용바위
용머리와 오매기 사이에 있는 다리옆에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용머리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갔다 놓을 만큼 신성시 하는 바위이다. 속설에는 이 바위가 깨지면 용머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 원골(院谷)
성라자로원 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이 있었다고 한다.

● 작은고개(小峴)
오매기 뒷골과 학의동 의일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길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는 교통로였다.

● 작은보식골(小甫食谷)
송파원(松派園) 뒤(북쪽)에 있으며 큰 보식골보다 작은 골짜기이다.

● 장고개(場峴)
성라자로원 마을과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오매기 사람들이 군포장으로 장(場)을 보러 갈때면 이고개를 이용하였다.

● 장승거리(長丞巨里)
유한양행 입구 인근에 예전에 장승(長丞·長牲)이 있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찬우물(冷井)
등칙골 입구 오전초등학교 못미쳐 사거리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매우 차다.

● 큰고개(大峴)
오매기 공동묘지에서 학의동 의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의일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큰보식골(大甫食谷)
성라자로원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기름진 옥토여서 인근 주민들의 주식원이었는데, 현재는 성라자로원 마을이 들어서 있다.

● 큰자리들
오매기 뒷골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으므로 '큰자리들'이라 부른다.

● 퉁소바위(퉁수바위)
큰보식골 양달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조선중엽에 어느 현인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한다.

● 평강골(平岡谷)
장 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평하고 오목하게 생겼다. 함방들(一田坪)제일모직 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하나의 밭으로 되어 있어서 '한밭들'(一田坪)이라 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부터 '함방들'로 불리우고 있다.

 

 

 

 

 

 

 

 

[탐사75-1]의왕 성라자로마을에 가다(2015.08.0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5-1]성라자로마을에 가다
2015.08. 0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5차 #의왕 #성라자로마을 #오전동 #가구단지/
한센병 환우들이 살고 있고, 기도하는 공간이라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쉽지 않은 성라자로마을을 마을 관계자의 협조로 이곳 저곳을 탐방했습니다 .
라자로 마을은 지난 반세기동안 나환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현장 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나환자와 일반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는 라자로 마을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 그림같은 집과 주변 경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한센병 환우의 치료와 사회 자립을 위해 지어진 숙소와 병원 등 외적인 미를 살려 건립한 여러 건물들은 울창한 나무와 잘 다듬어진 조경 등 주변의 경관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흔히 생각하기 쉬운 복지시설과는 다른 모습이지요. 1970년대 지어진 건물임에도 미적, 예술적 조형미를 감안한 설계뿐 아니라 나무와 숲에 파묻힌 듯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이는 2008년 의왕시가 선정한 도시경관 8경에 이름을 올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의왕시는 건축물, 공원, 도로 등 시설물 위주의 도시경관 8경을 선정했는데 자연학습공원, 중앙도서관, 도깨비도로, 철도박물관 등이 성 라자로 마을과 함께 선정됐지요.

라자로마을은 쉼게 들어갈 수 곳이 아닙니다. 정문 수위실에 도착하면 “어떻게 오셨나요?”하는 질문을 거친 후에 통과할 수 있지요. 간혹 있을지 모를 엉뚱한 외부인들로부터 마을 주민을 보호해야 하고, 일반인에게 스스로를 보이기 꺼려하는 주민들의 심리 등등 여러 민감한 사안들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을의 공간 구조는 크게 주민들의 주거 공간, 치료 공간, 신부와 수녀들을 위한 공간, 성당과 사무실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의 정문과 수위실을 지나면 마을 사무실, 모세의 집(통나무집), 라자로마을 설립 50주년 기념관, 라자로마을 설립 50주년 홍보관, 라자로의 집(교육관), 아록의 집(불구 노약자 환우 숙소), 엘리아의 집(여환우 숙소), 반석의 집(남환우 숙소), 삼손의 집(부부환우 숙소, 식당), 마리안 수녀의 집(수녀원), 치유의 집(마을 병원), 아론의 집(피정의 집), 마을 성당, 정결의 집(이발, 목욕시설), 기쁨의 집(세탁소), 고마움의 집(간호사 숙소), 라자로의 무덤(납골당), 요셉의 집(직원 숙소), 우리의 집(봉사자 휴게실), 사제 마을(7개 동의 건물 포함), 차고 및 창고 등이 넓게 포진하여 있지요. 그리고 곳곳에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예수, 십자가, 천주교의 성인들, 캐롤 신부, 노기남 대주교, 이경재 신부 등의 석조상이 서 있습니다.
사제마을은 은퇴한 사제들과 요양이 필요한 사제들이 머무는 곳으로 5채의 단독주택, 성당, 식당, 그리고 엘리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통나무성당은 예수님의 집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5채의 단독주택은 한국 순교성인의 본명을 따서 범세형(라우렌시오)의 집, 김대건(안드레아)의 집, 이승훈(베드로)의 집, 최양업(토마스)의 집, 주문모(야고보)의 집으로 불리고, 사제마을 공동식당의 이름은 강완숙(골롬바)의 집입니다. 납골당인 라자로의 무덤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최초로 화장 후 유골을 안치해두는 납골당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1987년 준공하였답니다.
마을병원인 치유의 집에는 책임 간호수녀 1명, 간호사 2명이 상주하며 환자들의 건강상태를 돌보고, 각과의 의사진료는 무료봉사자들의 도움을 얻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가톨릭의대 교수가 한센병주치의로 월 1회, 아주대학병원 의사가 정형외과의로 월 2회, 세란치과 의사와 송산보건소 치위생사가 주 1회, 이오스안과 의사가 안과의로 필요할 때 간호사가 월 1회 창상치료, 한의과 월 1회, 수지침 봉사자가 주 2회 자원봉사하고 있다. 이외에 보조기, 이용사, 미용사, 주방봉사, 세탁 및 재봉, 환우목욕, 가재접기, 청소봉사 등의 일에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에 따라 봉사가 이루어지며, 연세대동문회가 생일잔치 봉사를, 가톨릭 기사사도회(騎士使徒會)가 환우들의 단체외출 봉사를 하고 있다.
이날 찾아간 라자로마을은 찌는듯한 무더위속에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벤치, 은은한 성가가 흘러나올 것 같은 성당, 예쁘게 채색된 유리창...하늘도 구름도 나무도 묵상에 잠긴 듯 이곳에 오면 누구나 조금은 경건해집니다.
언덕길을 따라 멋지고 이름답게 지어진 건물과 조형물을 보면서 햇빛과 그늘의 경계를 따라 걷다보면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연치유의 내면적 가능성, '사색'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성 라자로 마을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가톨릭 사회사업시설인 라자로마을은 한국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일에 메리놀회 소속으로 당시 가톨릭구제회(NCWC)와 미국 종교단체구제사업협회(LARA)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던 조지 캐롤 안(George Carroll, 安) 주교가 설립해 광명시에서 시작한 구라사업기관인 성라자로원이 모태라 할수 있다.
안 주교는 1945년 광복 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나환자들을 보고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수십여 명의 한센병 환우를 이끌고 광명리 신기촌에 정착촌을 마련했다. 새 보금자리의 이름은 ‘성라자로요양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다 끝내 아브라함 품에 안긴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업치락 뒷치락 파던 전쟁의 와중에 성라자로요양원은 경기도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 모락산 기슭 20만평의 임야 및 대지를 구입하여 1951년 7월 5일 새 정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성라자로마을의 제2의 창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있으며 땔나무가 많고 골짜기에 흐르는 물과 지하수가 있어 용수 해결이 용이했다. 민가와도 떨어져 있어 한센인들의 요양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1955년에는 가톨릭의대 부속 성나자로의원을 개원하고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이동진료에 따른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으며 1969년에는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성 나자로마을이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라자로마을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했던 이경재 신부가 1970년 12월 제7대 원장으로 다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일본, 미국, 구라파 등지를 돌며 나환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려 모금한 돈으로 나환자들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투자했고 라자로 돕기회도 발족해 나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발판과 라자로마을내 각종 시설들을 마련하는 등 발전하는 초석을 마련한다.
현재는 무의탁 한센병 환자 치료와 치료된 환자의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만들어져 정착촌과 함께 병동, 진료소, 교육관, 수녀원 등이 있으며 라자로 돕기회는 현재 2만여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특히 나환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에는 나환자들의 보금자리에 피정의 집인 아론의 집과 은퇴사제들을 위한 사제마을도 건립해 일반 사람들이 나환자 마을을 손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한 점도 라자로 마을이 일군 성과의 하나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납골당 제도도 도입해 1987년 납골당 라자로의 무덤 을 준공하기도 했다.
성 라자로마을은 자선음악회, 벚꽃축제, 나환자 공동 생일 및 회갑·고희 잔치, 라자로의 날 행사 등을 열어 나환자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도 큰 몫을 했다. 특히 매년 여는 자선음악회 '그대 있음에'는 어려웠던 시절에 도움을 받아온 것에 감사와 보답하는 마음으로 91년부터 수익금을 모두 국내 나환자 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 해외 나환자를 돕는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
이 음악회는 1975년 12월 20일 처음으로 열렸고, 열리지 못한 해도 있었으나 꾸준히 게속되어 오면서 올해로 28회째 맞았으며 음악회의 수익금은 한센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성 라자로 마을의 운영에도 작은 도움을 주고 세계보건기구(WHO) 에서도 알고있다.
성 라자로마을이 정착하고 국내외에 알려지는데 있어 초대 원장이자 7대 원장으로 재임하셨던 고 이경재 신부님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신부님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몽골, 루마니아, 러시아 등 한센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든지 달려가고, 나환자 요양원과 정착촌, 나병 연구기관을 직접 방문하여 구라사업 기금이나 약품, 의료기기 및 미감아들의 교육 장학금을 지원했다.
"사랑이 없는 나눔은 있어도 나눔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던 8대 원장 김화태 신부도 이경재 신부의 뜻을 이어 아시아 각국은 물론 2001년에는 독일 푸랑크푸르트에서 유럽 라자로 돕기회 법인을 설립하는 등 세계 한센인들을 돕기위해 나섰다.
9대 원장으로 부임한 조욱현 신부는 미국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여 후원금과 자금의 운용을 수월하게 하였으며,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세금공제 혜택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대 있음에' 음악회는 국내뿐 아니라 유럽 라자로돕기회에 의해 독일에서도 열리고 있다. 유럽의 '그대 있음에'는 지난 2003년부터 격년제로 독일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독일의 주교회의 의장인 칼레만 추기경께서 총재로 후원하며 세계 보건기구(WHO)와 독일연방 정부는 물론 헤센 주정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 있는 음악회로 자리 잡았다.
성 라자로마을은 이제 60여년의 시간이 지나며 전 세계적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한센인들에게,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과거 우리가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갚고 나아가 보다 넓은 사랑의 뜻을 실천하고 있어 그 위상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 미래를 지향하는 마을을 위해 2014년에는 수목원 '화수원'을 개원했으며, 지형적 조건에 의해 활성화 되지 못했지만 실버 홈을 만드는 등 마을 전체를 복지단지화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성 라자로마을내 성당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대다수 건축물들이 마치 에술작품을 연상케 한다. 특히 마을내 건물들은 조선시대의 건물양식과 비슷하게 최대한 자연경관을 살려 마치 숲속에 잠긴 건물처럼 보인다. 때로는 모락산자락의 커다란 바위도 그대로 조경에 이용했다.
성 라자로마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도 톡특하다. 한센환우들을 위해 마련된 곳인 만큼 색의 상징과 작가가 의도한 내용이 조화를 이루며 담겨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주를 이루며 강렬한 느낌을 전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 사이에서 푸른색과 노랑 계열의 색들이 어우러져 있는 이 작품은 여느 작품들과는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2015.07.1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
2015.07.1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4차 #호계3동 #안양교도소 #포도원 #가구단지/ 74차 탐사는 안양교도소에서 안양(호계3동)과 의왕(오전동)의 경계인 포도원과 가구단지 일대로 1960년대 포도나무들이 재배했다가 70년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들이 있었던 야산자락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대규모 고층아파트단지들이 우뚝 서 있다. 그래도 과거의 옛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63년에 세워져 국내 교정시설중 가장 오래된 안양교도소는 최근 의왕 교정타운과 함께 이전 여부를 놓고 논쟁이 치열하다.
1960-70년대 포도나무가 즐비해 포도원이라 불렀던 곳은 과거 성나자로마을과 주변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또는 나홀로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과거의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1977년 지어진 남강주택단지는 시행,시공사를 찾지 못해 재건죽을 하지 못하고 있는 표류 상태로 60가구 대다수 집들은 언제 무너질까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롭기까지 한 상태로 6가구 정도는 이미 빈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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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군포(舊軍浦) <호계3동>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천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 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구군포(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군포(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란 지명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원행정례(1789) 도로교량조道路橋梁條에 군포<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군포(軍浦)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국역을 말하기도 하고, 정병을 돕는 조정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유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군포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군포로 되었으며, 군포(軍飽)가 군포(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 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사무소, 호계파출소,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파출소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에서 군웅제(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파출소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포도원

호계삼거리와 구군포사거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포도원이 변하여 마을이 되었다. 1950년대에 옛 경향포도협동조합 창업자인 황인웅(黃仁雄)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면서 이 일대가 포도단지로 조성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성자나로마을 입구 쪽으로 가구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후 1980년대 택지로 탈바꿈하기 전까지 안양의 포도밭은 약 27만평에 달하는 규모를 보였고, 가장 당도 높고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였으며, 포도주 산업을 주도하였다. 포도가 익는 8월이 되면, 서울을 비롯하여 인근 각지에서 안양의 맛있는 포도를 맛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왔는데, 이는 안양의 독특한 풍속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도시화 물결에 밀려 포도밭이 택지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이후 도시회 개발사업으로 현재는 대단지 아파트가 속속 세워지고 있다.

 

■안양교도소

안양교도소는 1963년 호계3동 38만9천여㎡ 부지에 건립된 건축물(개소 1963년 9월3일)로 지어진지 50년이 넘어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정시설이다.
특히 교도소 정문에서 교정아파트에 이르는 200m의 교정로에는 1963년 교도소 신축 당시 심은 왕벚꽃나무 50여그루의 고목나무들이 봄이 되면 탐스럽고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분홍빛 벚꽃터널을 만드는 명소다.
안양교도소의 역사를 보면 1912년 9월 경성감옥이 1946년 4월 마포형무소와 1961년 12월 마포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3년 9월3일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신군포사거리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안양교도소는 주거지역 1만2700평, 자연녹지 5만9243평, 개발제한구역 4만8614평 등 12만584평 부지에 연면적 9815평의 2층 교도소와 1개동의 교정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안양교도소 이전 요구와 논의는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양시와 시민들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안양권 외곽에 위치했던 교도소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호계 신사거리가 생기면서 인근지역주민들의 민원 대상 1호로 제기되면서 1999년에는 6000여명의 안양시민들이 이전 민원을 내는 등 안양교도소 관외 이전을 법무부 등 정부당국에 꾸준히 요구해 왔다.
또한 법무부가 1995년과 1999년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전체 89동 가운데 44동에서 중대 결점이 나타나 안전에 문제가 있고 시설의 노후화에 따른 문제점도 컸다.
이에 법무부가 지난 1999년 안양교도소를 인근 지역으로 이전을 추진한 바 있으나 시흥시, 안산시, 의왕시, 군포시 등 인근 지자체의 해당 주민들은 물론 해당 시와 시의회까지 나서 반발하는 등 집단행동이 거세지자 이전계획 자체가 전면 백지화됐다.
당시 법무부는 서울 영등포 구치소 및 교도소와 안양교도소의 이전을 위해 반경 20㎞이내 17개 후보지를 선정, 검토해온 가운데 모 건설업체가 제시한 시흥시 물왕리저수지 인근인 조남동 일대 7만여평의 지역에 대해 가계약한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을 샀다.
또 2000년 8월에는 법무부가 안양교도소 이전장소로 안양시 석수동 석산부지(현 경인교대 캠퍼스)를 검토하고 일부 도의원이 이에 가세해 찬성 홍보전까지 펼쳤으나 이번에는 해당지역 주민둘의 반대로 2001년 9월 법무부는 이전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같은 안양교도소 이전 계획은 교도소 시설이 노후화되고 지역주민들의 이전 요구로 지난 1999년부터 양여 사업자 공모 등 이전이 추진된 바 있으나 이전후보지 자치단체의 반대와 안양시의 저밀도 지구단위계획수립 후 용도지역 변경으로 이전이 무산됐다.
2003년 11월에는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을 비롯 안양시, 도교육청, 안양교육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계3동 지역 및 안양교도소 학교부지 활용을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법무부 소유 임야의 학교.공원 활용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참석자들은 "학교와 공원 등의 기반시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안양교도소 부지 활용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며 "교도소의 현대화를 통해 토지이용을 높이고 남은 부지는 안양시가 양여받아 기반시설 부지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전 후보지 주민들의 반대로 이전 자체가 어렵자 이전계획을 접고 2006년부터 재건축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지역국회의원인 심재철의원의 역할도 한몫 한다.
결국 안양시는 지난 2009년 법무부와의 협의를 통해 기존 건물을 헐고 사업비 1,259억원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22개동을 건축(건축면적 2만5383㎡, 연면적 6만212㎡)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27억5천만원을 집행해 실시설계를 완료했다. 주목할 점은 교도소 전체 부지중에서 7만2983㎡(30.8%)를 주민편의시설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2010년 7월 새로 취임한 현 최대호 안양시장이 주민들의 반발을 이유로 재건축 반대와 안양교도소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교도소를 재건축하겠다며 2010년 2012년까지 안양시에 재건축 협의를 3차례 신청하지만 안양시는 잇따라 반려하자 2012년 7월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안양시가 모두 패소하자 시는 지난해 7월 대법원 상고했으나 또 패소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반전하는 사건이 생기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법무부, 국방부가 의왕시에 교정타운을 지어 안양교도소, 서울구치소, 서울소년원 등을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찬반으로 양분돼 대립과 불신으로 치닫으며 반대 주민들은 자녀들의 등교거부, 1인시위 등에 나서면서 교정타운(법무타운) 유치 반대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반면 의왕시는 주민의견수렴, 시의회 의견 청취 등으로 교정타운 유치를 위한 행보를 계속하는등 양측의 갈등은 정점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의왕가구단지가 있기까지 배경

안양과 의왕 경계에 있는 의왕가구단지가 있기 까지는 지난 역사를 보면 천주교 성나라자로마을과 떼어 놓을수 없다.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의 성나자로마을은 무의탁 한센병(나) 환우 등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복귀 및 자활을 마련하고자 1950년 6월에 설립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求癩事業)기관이다.
미국메리올리 소속 죠지케롤 안주교에 의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광명시 신 기슭에 창설하였으나 1951년 7월 현 장소인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소재한 땅을 매입하여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마을로 성장하기 까지 고 이경재 신부님의 노력이 컸다.
1962년 3월 성라자로마을에서 치료 중이던 환자 중 음성으로 판명된 45세대 82명이 인근 국유지와 라자로 원장인 윤을수 신부가 임야 약 33,000㎡를 구입 희사함으로써 자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축사를 지어 양계 양돈을 하며 어려움을 딛고 모든 사람들이 자립해야 된다는 생각릏 심어줘 땀 흘려온 동안. 당국의 보조와, 함께 자체 적립금으로 농장사무실, 경로당 등을 신축하며 보람도 맛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추세와 축산업계의 불황 등으로 축사는 차츰 비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축산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축사는 텅 비고 말았다.
이와 함께 사람들은 서울근교에서 이전해온 가구제조 회사와 서로 협력하여 오늘날 주된 생활로 이르게 되었다한다.
이렇게 시작한 가구제작업자들은 서울 근교 변두리 지역에서 도시 근대화 물결로 이전 및 새 사업장을 찾던 중 축산업 불황으로 생계유지가 막막했던 이 지역의 축사를 개조하여 여기서 가구 제작 및 목공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및 맞춤가구를 만들며 원목장, 티크가구, 자개, 나전칠기 등 우리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생활가구를 제작하며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가구공장단지에서 가구전문 백화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탐사73]안양 호계3동 삼신6차아파트 주변(2015.07.1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3]호계3동 삼신6차아파트 주변
2015.07.1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3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재건축을 추진하다 시공사 선정을 둘러싸고 난항을 겪고 있는 삼신6차아파트. 그리고 재개발이 추진중인 구군포사거리지역은 1970-80년대 풍경을 보여주는 아파트와 빌라 등 주거지와 주택가 한복판 그린슈퍼를 중심으로 육거리가 생길 정도의 오밀조밀한 골목이 있는데 지난 71차 탐사에 이어 다시 찾았습니다.
[탐사71차]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 사진첩 보기 https://www.facebook.com/coreachoi/media_set?
set=a.949356121775772.1073742207.100001041789694&type=3

 

과거 시흥군 시절의 땅이 이리저리 쪼개지면서 지금도 호계3동이지만 토박이들과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는 아직도 구군포사거리라 부르고 있을 정도로 군포와 안양의 경계지역이기도 한 이 곳 인근에는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이기도 했지요. 당시 안양에서 방석집 하면 안양역 뒷쪽의 철길변과 구군포사거리 언덕골목길 두곳밖에 없었고, 성인나이트콜럽하면 이곳 군포사거리로 택시들이 새벽까지 줄지어 섰으니까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대로변 상업지역에는 고층의 오피스텔과 생활형고층주택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고,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단 2곳 만이 맥주집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지 마는지 할 정도로 변모했지요.
그래도 최근 이 일대에 다소마나 활기가 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저녁 무렵 술집과 움식점에 손님들이 몰리면서 활기가 있네요. 또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이었던 곳은 콜라텍이란 곳으로 바뀌었는데 춤추러 어는 중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네요. 실제로 지난 72차 탐사시 뒷 골목에서 보니 직업이 뭔지 모르지만 벤츠, 아우디 차량을 몰고 오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네요. 하지만 상업지역 뒷곯목과 삼신아파트 주변 안양천변 골목 주택가의 풍경은 마치 회색빛처럼 음울한 모습입니다.

 

 

 

 

 

 

[탐사72]안양 호계3동 한성병원 남서쪽 동네(2015.07.04)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2]호계3동 한성병원 남서쪽 동네
2015.07.04/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2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한성병원 / 잠시 쉬었던 안양탐사대가 다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72차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지난 71차에서 큰 걸음으로 둘러보았던 안양 호계3동 호계사거리에서 남쪽으로 군퐁하의 경계 끝..서쪽으로는 군포사거리까지의 한성병원 남서쪽 주변입니다. 구 군포서거리 인근은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였지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지금 단 3곳 만이 간판을 내걸고 있고, 삭막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은 뒷 골목쪽으로 입구를 내고 콜라텍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대낮부터 춤 추러오는 중년들로 호황입니다.

 

 

 

 

 

 

 

 

 

 

 

 

[탐사71]안양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2015.04.25)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1]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
2015.04.25/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1차 #호계3동 #호계삼거리 #구군포사거리 / 2015년 4월 25일 71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주변으로 조선시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군포장이 있었고, 근대에 들아와서도 평촌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인 1970-80년대 안양 일번가 다음으로 잘 나가던 유흥의 중심지였지요.
이 지역은 한양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삼남길(해남대로)이자 정조대왕이 능행차로 길이 넓어진 시흥로(한양-노량진-시흥-안양-수원)로 만나는 교통 요충지로 예로부터 길손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군포장(軍浦場)이 섰던 것이지요. 군포장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막걸리 주전자와 장터 국밥, 무쇠 소리가 오가는 군포장의 얘기는 당시 서울에 낙향해 궁촌마을(현 군포1동)에 살던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를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기도 했지요.
군포장은 1905년 구군포사거리에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시흥군 남면 당리에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역사가 생기고 그 이름을 <군포장역>이라고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920년대 안양천의 범람으로 시장이 피해를 입은 이후 안양역 뒷편 안양1동(구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군포장역이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군포장의 화려했던 명성은 빛을 잃지요,
이후 구군포사거리는 1960-70년대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제2의 부흥기를 맞지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구군포에는 나이트클럽에 니나노 방석집, 다양한 술집과 여관, 모텔 등 불야성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수십개 방석집이 자리했던 골목에는 지금 단 3곳 만이 간판을 내걸고 있고, 삭막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과거 대형 나이트콜럽은 뒷 골목쪽으로 입구를 내고 콜라텍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대낮부터 춤 추러오는 중년들로 호황입니다.

 

 

 

 

 

 

 

 

 

 

 

 

[탐사70]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동네(2015.04.1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0]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동네


2015.04.1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0차 #호계1동 #호계사거리/ 2015년 4월 18일 70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쪽 부터 호계사거리 까지 이어지는 동네입니다.

탐사코스: -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탐사69]안양 호계동성당 주변 동네(2015.04.11)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9]호계동성당 주변 동네
2015.04.11/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69차 #호계1동 #호계동성당 #호계1동소공원/ 2015년 4월 11일 69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1동 호계동성당 남동쪽 동네로 1층 단독주택 또는 2층 양옥집에 담장이 낮은 집들이 80년대 초대 지어진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과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공원앞 골목 등 정감있는 골목이 비교적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탐사코스: 금성마을버스정류장(경수대로)-경수대로569번길-흥안대로109번길-경수대로555번길-호계동성당-호계1동소공원-흥안대로81번길-경수대로623번길-호원공원-경수대로595번길-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탐사68]안양 호계1동 LG연구소 아랫동네(2015.03.2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68]호계1동 LG연구소 아랫동네

2015.03.2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68차 #호계2동 #호계1동 #호원초교 #호원공원 #호원경로당 #제나유치원 #LG연구소 #강남5차아파트 #강남4차아파트 #동성빌라 #강박사만물수리 #은하수분식 #한옥(경수대로569번길39-5)

2015년 3월 28일 68차 여정으로 찾아간 탐사 지역은 안양 호계2동 서울외곽순환도로 남쪽 동네로 호원초교, 호원공원과 호원경로당을 지나 호계1동에 접어들어 강남5차아파트을 비롯 안양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장 넓은 면적이지 않을까 싶은 제나유치원, 꼭 보존했으면 싶은 높은 굴뚝이 있는 LG제1연구단지 후문앞 길을 지나 오밀조밀 예쁜 골목과 목련과 매화 꽃 등이 피면서 봄내음을 물씬 풍기는 동네다.
특히 경수대로623번길 105호에 있는 제나유치원은 시골 초등학교 같은 교사 건물에 수영장, 야외놀이터, 텃밭 등이 있는데 안양에 유치원중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이 동네 골목길은 비교적 넓고 집들도 깨끗하다. 앞서 돌아본 호계2동처럼 재개발반대 현수막 등이 내걸려 있지는 않지만 이곳 또한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주민간 갈등과 진통의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탐사코스: 무궁화태영아파트버스정류장(경수산업도로)-경수대로609번길-경수대로623번길-호원공원(지하는 호원공영주차장)-경수대로599번길(골목주택들)-강남아파트5차-경수대로623번길-호원초교-LG연구소후문-호원경로당-제나유치원-흥안대로109번길-세빌라-동성빌라-강남아파트4차-경수대로535번길-강박사만물수리-흥안대로109번길-끝

 

호계동 지명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성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한때 관가의 중심지였으며 안양최초의교육시설로 청감서원(호계서원)과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및 일제시대 초 낙영학교 등은 안양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덕고개 -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흥안주유소 일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군포장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인데 우물을 여러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 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아래'라 부르고 있다. 동쪽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말이라 각각 불렀다.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소머리를 놓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이 끊긴 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되는 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죽말 -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숙종 때(1699)발간된 <<과천면지>>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 -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을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