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584

[최병렬]안양 신말(신촌동)에 천년 넘는 느티나무 있었다

안양 평촌 지역의 자연취락 마을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었던 신말(新村. 현재의 안양 동안구 신촌동)에는 천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과거 한양-남태령고개-인덕원-지지대고개-화성 길이었던 삼남대로가 지나는 귀인마을(귀인동) 남쪽에 위치한 신말(新村) 에는 풍양 조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으며 이 마을 서북쪽인 호계동과 경계 지점에는 안양남국교의 전신인 흥안국교가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다가 1958년 경에 갈미로 이전했다. 신말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되었고 당시 동네 호수는 30여호였다. 평촌들녁이 제1기 신도시 건설로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현재의 평촌 학원가. 안양 평촌대로 서쪽 학원가 뒷쪽(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67-6) 주택가 자그마한 언덕위에는 수령 ..

[최병렬]단학(丹學), 1980년 안양 충혼탑에서 시작됐다

국학기공은 한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인 ‘선도(仙道)’를 현대인에 맞게 체계화한 생활스포츠다. 국학기공은 기공, 기체조, 호흡명상, 배꼽힐링 등 다양한 수련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공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은 우리나라의 ‘선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학기공은 지난 1980년 일지 이승헌 총장이 경기도 안양시의 충현탑공원에서 단학기공보급을 최초로 보급한 데에서 시작된 수련법이다. 그후 본격적으로 심신건강법을 알리기 위하여 1985년 주식회사 형태의 단학선원이 설립되었다. 인류의 전일적(全一的) 건강 증진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설립된 단학선원은 줄곧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인 단학과 인간의식의 무한한 진보를 돕는 뇌호흡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보급해 왔다...

[20240202]해동검도, 1982년 안양에서 시작됐다

해동검도는 대한민국의 창작 무예로 1980년대에 김정호와 배우 겸 무술인 나한일이 각각 체계화시켜 만들었다. 위키트리 기록을 보면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나한일과 김정호는 고등학생 시절인 1970년 무렵에 서울 신당동에 있던 심검도 호법총관에 입관하여 심검도 창시자 김창식 관장에게 심검도를 배웠다. 심검도는 김창식 관장이 창안한 유파이고, 김창식 관장은 당시 화계사 주지 숭산 스님의 제자였다. 김창식 관장이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나한일도 김정호와 떨어지자 심검도 도장을 인수하였지만 경영부진으로 1977년에 폐관하였다. 김정호는 먼저 기천문에 입문하였는데, 나한일은 김정호에게 소개받아 기천문 1대 문주 박대양으로부터 기천문을 배웠다. 나한일은 1980년대 초 현진영화사 김두원 회장의 후원으로 서울 서초동에 ..

[박철하]사근행궁 복원에 대한 필요성(2023.12)

[의왕 자료 소개]_의왕문화 22호(2023년 12월) 사근행궁 복원에 대한 필요성 의왕문화원 부설 의왕지역문화연구소장 박철하 정조의 효(孝)와 애민(愛民) 정신이 깃든, 의왕지역 삼일운동의 현장 사근행궁(肆覲行宮)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합니다 의왕시 사그내길 11. 지번으로는 고천동 272-2번지. 지금 의왕시청 별관이 있는 곳입니다. 별관 입구 왼편에는 라고 쓴 표석이 있고 그 바로 옆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즉 이곳은 조선 시대 임금이 행차 때 쉬어가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이자, 1919년 3.1운동 때에 의왕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임을 의미합니다. 행궁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을 말합니다. 남한산성행궁, 화성행궁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

[박철하]1919년 일제에 대한 저항 의왕 만세운동

한적한 농촌마을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기운이 돋다 의왕시는 대한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효율적으로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의곡면과 왕륜면을 하나로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하고 수원군에 편입시켰다. 당시 의왕지역은 지금의 부곡동(삼동, 이동), 고천동(왕곡동, 고천동), 오전동, 내손1.2동, 청계동(청계동, 학의동, 포일동) 등을 포함하였다. 고천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천)주정소가 있었다. 현종 때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지만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이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설치한 뒤 ..

[장지섭]안양문학의 뿌리 "청포도" 동인지 찾았다(2019.12.16)

안양문학의 뿌리를 찾다 안양문학의 효시“청포도”동인지를 찾아서 장지섭(안양문인협회 부회장) 2019.12.16 안양문학 창간 제30집 특집호 글에서 2019년 4월 21일 늦은 저녁, 벨이 울렸다. 이재철 이사였다. 우리 고장 최초의 동인지 『청포도』찾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지난 수십 년간 김대규 선생님을 모시고 안양문학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발품을 팔았던가. 1947년 박두진 시인이 주관 결성한「안양문학동인회」와 그 동인지 『청포도』는 현재의 안양문학과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하여 2008년 김대규 시인이 주관하여 발간한『안양문학 60년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찾고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안양문학 60년사』에는 그 내용이 간략히 기술될..

[이정진]의왕에는 세종대왕 손녀의 무덤이 있다(2022.01)

초평동에는 세종대왕 손녀 무덤이 있다 이정진 | 부곡향토문화연구회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의왕은 서울과 수원 등 인근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임에도 자연환경이 살아 있는 오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이다. 녹지 비 율이 높으며 산과 호수 등이 지닌 청정함과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는 도시라는 것이 내 가 의왕시에 살아오며 내내 지녀온 느낌이 다. 2006년 의왕에 이사 왔을 때 2년만 머물 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지금껏 부곡동에 정착 해 마을에 맘 붙이고 살게 된 이유도 좋은 자 연환경과 이웃들이 함께하는 따뜻한 정서가 좋아서이다. 부곡동에 있는 다양한 마을 커뮤 니티 중에서 부곡향토문화연구회도 내가 의 왕에 정주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고 말할..

[박철하]일제강점기 모락산에 결핵요양원 있었다(2022.01)

일제강점기 모락산 결핵요양원 박철하 |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서남쪽 기슭 골짜기에 '성라자로마을'이 있다. 우리 가족이 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매달 한 번씩 '치유의 집'에서 봉사를 해왔기에 내겐 아주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성라자로마을은 70년 전 나환자들, 즉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 복귀 및 자활을 마련해 주고자 설립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事業)기관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2일 미국메리놀회 소속 죠지캐롤 안 주교가 광명시 신기촌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구호와 의료사업으로 시작한 '성라자로 요양원'이 그 모태이다. 그런데 설립 23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 7월 5일 전..

[문동원]안양 부림말의 참새와 방앗간(2008.12.12)

우리동네 '부림말' 그 곳의 방앗간((?) 이름은 버드나무 집이다. 동네 초입에 버드나무 아래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인것 같다.조롱내 개울을 건너면 조그마한 집이 나무 아래서 목을 축이고 가라고 사람들을 부른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것 같다. 아버지와 둘이서 어디를 다녀오다 그 앞을 지나는데,내가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으며,하는말.... "아빠!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면 돼?" 아버지는 웃으시며 나를 데리고 버드나무 집으로 들어가셨다.-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내 머리만한 왕대포에 김치 한조각,그리고 걸직한 주인 할머니의 웃음 소리가 귀머리를 돌아 다닌다. 술 한잔에 어린 놈이 맛이 갔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웃겼던지 계속 '허허..

[이용구]안양 제일교회 창립 82주년 경축합니다(2012.05.17)

안양 제일교회는 2012년 5월17일이 창립 82주년이 되는날로 내가 다섯살 때 내고향 당시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에 세워진 교회로 나하고 같이 살아온 동반자와 다름없는 교회로써 언제나 친근감이 있는 교회이다 또한 나는 안양의 토박이로 중년이 훨신 넘은 1984.4.22 늦게서야 세례를 받아 오랜동안 제일교회에 다니다가 그후 같은 안양인 호계동으로 부득이 이사를 하게되어 이사간 집에서 가까운 같은 장로교회에 나가고 있다 교회는 옮겼으나 이렇게 나와 같이 성장한 교회이고 또한 내 나이와 비등한 옛 친구들이 제일교회에 남아있고 하여 가끔씩 또는 교회 야외예배나 친목단체 모임등 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하고 있는 관계로 매월 발행되는 교회신문 월간 "열한시"를 꼭 보내 주어 그나마 교회 소식을 듣고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