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심재민]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를 아시나요(2019.07.12)

안양지역얘기/담론

옛길복원, 관광•여가문화 활성화

요즘은 지방자치단체 마다 사라져가는 옛길을 복원하여 관광•여가문화 활성화를 꾀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는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 해운구는 6.25전쟁 과정에서 사라진 “송정 옛길”이 걷기좋은 숲길로 길이 1.8km, 면적 7200㎡을 복원 되었다.

충북 보은군은 “질마재 옛길” 4.7km를 둘레길 형태로 복원하고자 지역균형발전 공모사업비를 통해 복원되었고 인근 속리산 등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프로그램도 개발해 속리산 일원을 관광특화지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또한, 경북 문경 “문경새제 과거길”과 충북 괴산 “산막이 옛길”, 경북 울산 남구 “장생 옛길”등을 복원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시민들의 여가문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악산의 웅장한 산세

예로부터 관악산(632.2m)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전)에 속했던 산으로 전형적인 화산(火山)형태로 돋보이는 산이다.

서울 ,안양, 과천, 시흥 등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다. 주릉, 팔봉능선, 육봉능선 등 관악산이 거느린 산줄기는 예외 없이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부드러운 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애틋한 순정을 가슴 고이 간직한 것처럼 느껴진다.

 

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

무너미 고개는 고개가 낮아서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무’를 물.수(水)의 뜻으로 한정되어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라는 견해도 있다. 무는 곧 뭍(묻)의 간결형으로 육지(땅)를 뜻하는 경우도 많으며 평지에 완만하게 도드라진 고개를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양에도 관악산과 삼성산을 이어주는 곳에 즉 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안양을 이어주는 옛길인 ‘무너미고개’가 있다. 고갯마루를 정점으로 양편 모두 시원한 계곡이 이어져 여름철 산행으로 그만이다. 특히 이 길은 비탈이 거의 없고 안양 쪽으로 서울대 수목원이 자리 잡아 가족 단위 생태 산행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산행 코스는 안양예술공원에 시작하여 관악수목원을 지나 서울대 옆의 관악유원지로 넘어가는 게 정석이다. 안양예술공원 ~ 관악수목원 ~ 무너미고개 ~ 관악유원지 가는 코스로 약 11㎞정도의 거리이다.

하지만 관악수목원은 1967년부터 쭈욱 출입을 통제하다가 2005년부터 탐방을 목적으로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부득이 하게 우회로 무너미고개를 넘어야 하는 불편함을 등산객과 시민들은 호소하고 있다.

 

관악수목원 설문조사

안양시의회의 숲을 사랑하는 연구모임에서 2017년 10월에 조사한 「건강한 숲 조성 및 활용방안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관악산을 이용하는 시민들 1,3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관악산 수목원 출입통제에 대한 인식”에 대해 1,203명( 89.11%)이 “시민들에게 개방하라”는 의견이며, ‘안양예술공원~관악 수목원~ 무너미고개’ 숲길조성 필요하다는 의견은 1,166명(86.37%)으로 나타났다.

 

안양시민들은 바란다.

첫째, 기획재정부는 광양 백운산 남부학술림과 같이 서울대 관악수목원 무상양도 요구를 거부하여 안양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둘째, 비밀화원인 관악수목원 개방을 통한 안양의 자산인 고려백자 도요지와 안양옛길인 “무너미 고개”를 복원하여 시민들이 찾아가는 건강한 도시 숲을 조성해야 한다.

셋째, 도로와 시가지 등에 의해 단절된 관악산•삼성산~수리산 잇는 도심 생태길을 만들어야 한다.

[최병일]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 안양시의회 5분발언(2019.06.25)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시의회 최병일 의원 5분 자유발언문

안양시의회 ​제248회 2차 본회의(2019.06.25)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양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갈산·귀인·범계·평안·평촌 지역구 출신 더불어 민주당 시의원 최병일입니다. 

먼저 저에게 5분발언의 기회를 주신 김선화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님께 감사드리며 ‘스마트 행복도시 안양’을 위해 애쓰시는 최대호 시장님을 비롯한 공직자 여러분, 정론직필에 애쓰시는 언론인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저의 발언에 관심갖고 찾아주신 구교선 새안양회 회장님과 회원여러분, 실버모니터링 박종섭 단장님과 회원여러분, 특히 시정에 관심을 갖고 참석해 주신 안양시민 여러분을 환영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가 그분들의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안양시의 형성과정과 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에 대해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안양 향토애향단체인 ‘새 안양회’가 ‘우리동네 옛날이름 찾아오기’ 캠페인을 벌여 시민들의 의견을 묻고 옛날 이름 다시 찾기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취지라는 생각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시장님을 비롯한 참석하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시민분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문헌상에 등장한 안양은 475년 고구려시대에 율목군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최초입니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 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고려시대에 과주로, 조선시대에 과천 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14년에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이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이면으로 분류되었다가 1941년에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1973년에서야 안양시로 승격되었습니다. 

1979년 시조례 제340호로 안양시는 14개동에서 1994년, 7월 1일에 거쳐 31개동으로 분동이 되었습니다.

지명(땅이름)은 인간 활동의 공간적 배경인 장소의 특성, 즉 장소의 지리 및 역사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온 대표적인 언어 요소입니다. 

지명은 소유성과 개성이 있으며, 풍수적 요인을 고려하거나, 풍토와 특산품, 환경, 기후, 미래를 예견하며 짓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이나 그곳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을 기려 이름을 붙이는 등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지명에 나타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명은 어떤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주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행정편의상 안양동은 1동에서 9동으로, 석수동 1동에서 3동, 비산동 1동에서 3동, 호계동 1동에서 3동 등 숫자로 나열하여 분동을 하였습니다. 

인천, 안산, 파주, 강릉, 도봉구 등 각지에서 옛 지명을 찾는 운동으로 각 지명마다 예쁘고 정겨운 고유이름들을 찾아주고 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아파트 숲이 되면서 옛 모습과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서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행정의 편리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고, 자란 곳의 전통문화의 역사적 유래와 함께 옛날이름을 찾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전통과 정겨움을 이어나가고 나아가서 우리말의 아름다운 고어를 잊지 않고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내 이름이 아닌 숫자로 나를 불러 준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동네도 삭막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닌 고유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 

과거부터 내려오는 우리동네의 정겨운 옛날이름 찾아주기에 대해 주민들의 의견을 담아 재정비해 주실 것을 제안 드립니다. 

시장님께서는 제가 제안한 것을 서면으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혁]과천과 군포에 울려 퍼진 3·1운동(2019.06.18)

안양지역얘기/담론

 

중부일보 기사입력 2019.06.17 22:27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3·1운동은 근·현대 100년 관통한 역사의 큰 물결이었다
글 전문보기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1047


보편·중앙에서 비롯되어 특수·지방으로 확산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국내외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저항운동은 운동의 지향점(이념), 보편과 특수, 중앙이란 명망성과 지방이란 구체성과 특수성,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미친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그 중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에 걸친 1919년 3·1운동은, 일제에 기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모든 지역에서 전 계층과 집단 및 개인이 떨쳐 일어선 거대한 흐름으로 근현대사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과천과 군포는 2019년 현재 경기도에 소속된 별도의 독립시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과천현, 과천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시흥군에 편입되어 각각 과천면(현 과천시), 남면(현 군포시)에 해당하였다. 즉 3·1운동 당시 과천과 군포는 시흥군의 각각 1개 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근대 시기의 공동체 문화(인적·물적 교류, 5일장, 통혼권 등)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흥군은 경기도 21개 부·군 중 하나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3월 하순과 4월 초에 시위운동이 집중적으로 이어져 절정기를 맞았다. 이 기간 중에는 매일 크고 작은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양상도 일본 헌병과 군대와의 충돌 등 폭력투쟁으로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3월 초부터 중순까지의 운동이 경성(서울)이나 개성·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청년 학생의 선도 투쟁이 강했다면, 3월 하순 이후의 운동은 면과 리 단위의 농민의 참여가 확대된 대중 투쟁으로 발전해 간 결과였다.

100년 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일어난 3·1운동이 보편(세계사적 의미, 민족지도자)과 중앙(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비롯되어 특수(일제의 식민통치와 사회경제적 원인, 청년과 농민의 주도)와 지방(모든 군의 면·리, 5일장)으로 확산된 양상, 그리고 그 의미를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재구성해보자. 참고한 자료는 3·1운동 관련 재판기록,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1995), ‘과천시지 1권’(2007), ‘군포시사 별책3/군포 역사신문’(2010) 등이다.

 

과천의 3·1운동

관악산과 청계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농촌 마을인 과천에서 3·1운동이 전개된 것은 3월 말이었다. 현재의 과천지역의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운동은 3월 30일 일어난 과천면 하리(현 과천동) 일대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시위의 중심 인물은 청년지도자인 이복래(李復來, 1894∼1950)로 남태령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과천면 하리에 거주하던 이복래는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남태령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을 미리 돌렸다.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의 동리에서도 시위운동을 하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이복래는 태극기를 사전에 직접 제작하여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8시 경 남태령에는 약 5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군중들은 이복래의 주도 아래 만세를 크게 부르면서 과천읍내로 진출하였다. 이들의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과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현 과천초등학교) 등 관공서와 학교를 차례로 지나면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복래는 만세운동 이후 체포되어 징역 1년을 구형받았고, 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그대로 1년을 복역했다.

과천의 3·1운동이 남태령 시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과천의 걸어 다니는 향토사전이었던 이용진(李龍鎭, 1917∼2013)의 생전 인터뷰에서 이복래 이외에도 갈현리의 이형필과 박철영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맹흥섭의 경우는 과천에 거주하면서 인근 의왕의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렇듯 과천 지역 주민들이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던 안양·의왕 등 인접 지역과 잦은 왕래가 있었던 관계로, 만세운동이 당시 시흥군 관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군포의 3·1운동

3·1운동의 불길은 전국 주요 도시와 중소 도시로, 읍·면·리 단위의 농촌 지역으로 번져갔다. 시흥군 남면에 속한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3월 31일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이 날은 시흥군의 군포장이 서는 날이었다. 군포장은 당시 남면·서이면·의왕면, 즉 현 군포·안양·의왕 지역의 경계 지점이며 상업적 중심지였던 까닭에, 인근 주민들끼리 왕래와 교류가 빈번한 곳에 해당하였다.

군포장(軍浦場, 현 안양시 호계동)에 모인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규모 인원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구장(현 이장)을 중심으로 장날을 기화로 긴밀히 연락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인 시위대는 같은 생활문화권에 속했던 군포, 안양, 의왕 지역의 주민들로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약 1.8㎞ 떨어진 군포장역(현재 전철 1호선인 군포역, 1938년 개칭) 앞 경찰관주재소(현 군포1동)까지 시위 행렬을 유지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군 보병과 협력 출동하여 총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편 같은 날 군포장과 인접한 의왕면 고천리에서도 주민 8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반월면(현 안산시) 일대 주민 수 천명이 장날을 기하여 시위를 전개하면서 군포장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듯 군포장에서 시작되어 경찰관주재소로 향한 군포 지역과 인접한 지역의 3·1운동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각 면별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대대적인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운동의 의미와 평가, 그리고 100주년

이상 과천과 군포의 3·1운동은 대중투쟁의 양상으로 전환되어 가던 3월 하순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과 농촌의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과천과 군포의 지역적 특징으로 경성을 비롯한 안양, 의왕 등 주변 지역의 만세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근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과천과 군포 지역이 경성과 경기 남부를 이어주는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주민들의 생활권이 넓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과천과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구장을 비롯하여 농민, 청년 학생 등의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과천과 군포 지역 3·1운동은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성격을 더 한층 강하게 지닐 수 있었다. 이와 같은 3·1운동의 경험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직접적 결과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초석이자 디딤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제 타임머신을 돌려 오늘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에 초점을 돌려보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앙의 기념식을 비롯하여 전국 모든 시와 군, 그리고 면 단위에서도 기념식과 각종 행사 열풍이 이어졌다.

2019년 3월 1일 과천시 중앙공원 야외공연장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유족대표의 3·1운동 경과보고와 기념공연, 그리고 3·1절 노래 제창을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남태령에서는 이복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시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도 있었다. 군포시는 군포 3·1운동을 기리고자 군포역 앞에 ‘군포 항일 독립 만세운동 기념탑’을 2016년 3월에 건립하였다. 특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군포 3.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3월 30일 군포역 앞 특별무대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서 당시 만세운동 재연, 기념식, 그리고 ‘군포에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기념공연이 열렸다. 이외에 100주년을 기념하여 관내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를 조사하여 ‘독립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도 시행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신적 구심점에 해당하는 3·1운동을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다만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민족독립을 향한 독립유공자의 공적과 평가가 편견이나 분단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각을 포함하여 국가가 역사해석을 독점하려는 권위주의 잣대와 비상식이 아직도 우리 현실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헌법 전문에 규정한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계승…… 민주주의공화국이다”는 구절은 지난한 근현대 100년을 관통한 역사적 흐름이자 진리이고 모두가 믿어야 하는 상식이다.

 

주혁 한양대사학과 강의교수

 

[최승원]안양 옛 지명을 회복하자.(2019.02.11)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 옛 지명을 회복하자.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의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지명에 훼손이 시작 된다‘
1905년 안양역 개통시는 安陽역으로 사용하다가 강점후에는 古名이지만 安養역으로 바꾸었다. 이는 일제의 지명 개명의 시작이다. 1890년대의 안양촌이 안양역에 작은 가계가 생기면서 安養里가 되었다. 볕양은 생육에 관계되는 한자어로 밤이나 포도등 생육에 관계되는 것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 안양의 아름다운 이름이 사라진다.
꽃뫼 갈산 (일동). 석길벌 -석길평 (군내동). 금배벌 黙庵坪 (군내동). 꽃창이벌 충坪(안양리) 욧벌 了坪 (박달리) 박뫼주막 博山酒幕(군내동). 범고개주막 虎峴酒幕 (박달리). 한우물 天井 (군내동). 돌팍재 石坡峴(군내동). 옹기 土器. (박달리) 벌말 坪村(一洞). 인덕원평(일동). 벌말 坪村 (봉성리) 벌말 2개소 평1개소합 3개소에 펼처 있다.
일본식 한자지명을 통치수단으로 주임시킨다. 그리고 일본식한자로 작명하고 기록해서 올리라는 지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에는 양지촌이 양지동으로, 군포천은 군포장으로, 호계동은 호계리로 카타카나로 담안이라고 적혀있는 장내촌은 장내동으로 한자이름이 바꾸었으며, 때로는 점촌이 초막동으로, 구리점막이 당정리로, 덕현마을이 (道陽里)로 변경된 사례처럼 언 듯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려대 김종혁교수 과천시지138족)
안양시는 근현대에 와서 군사문화 등으로 마을이름을 1동~9동으로 개명하였는데 1동은 시대동, 2동은 안양동, 안양3동은 양지동, 6동은 수리동,,7동은 덕천동, 안양8동은 명학동(상록동), 석수1동은 삼막동, 석수2동은 신촌동, 석수3동은 충훈동, 박달1동은 필동, 비산1동은 임곡동 등으로 개명해야한다.
옛 지명을 회복하는 것이 마을 재생의 기본이다.

2019.02.11.월

최승원

[최영일]안양의 옛지명은 되돌아와야한다.(2006.06.07)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의 옛지명은 되돌아와야한다.
최영일 | 2006.06.07 
안양광역신문 기고에서( http://anyangnews.net/bbs/bbs.asp?exe=view&group_name=317&section=9&category=3&idx_num=6407&page=1&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strWriter&order_da=asc)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법이나 제도의 개정이 우리나라처럼 심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루어진 법제도의 개정은 어떤 형태의 논리에서인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시행해 왔으며 이런 개정문화에 우리는 상당히 익숙해있다.

법제도가 있으면 정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얇팍한 논리에 의해 쉽게 쉽게 잘도 바꾼다. 이렇게 쉽게 고쳐진 새로운 법제도는 얼마가지 못해 또 다른 개정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주  새롭게 바뀐 틀 속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하기가 쉽다"는 외국인의 지적대로 공무원이 하고 싶은것은 아무 저항없이 실행돼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그렇다보니 전통이란 정말 낯선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통의 상실엔 행정공무원들의 무지는 그렇다치고 전통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의 결여가 근본적인 문제이다.

고급행정 공무원들이 일방통행을 하다 보니 사회전체에 전통이나 관습이 희석되어간다: 정당명의 변경이나 교육제도의 개정 등은 아마 기록이 있다면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제기가 법제도개정의 정당성으로 발전하면서 구제도나 구법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행태는 왜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심할까? 왜 우리는 선진외국에 비하여 법제도가 전통적으로 보존계승 되어지지 않을까? 구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아서? 그렇지가 않다.

우리에게는 정신문화에대한 인식의 부족에 큰 문제점이 있다. 전통문화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전통의식이 사회전반에서 변두리로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전통의식이 희박하니 전통의 중요성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물질적 생활의 만족감이 그들에게 주관심사이지 전통은 귀찮기만 한 구시대의산물로 다가온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서울의 봉천동명칭을 바꾼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유는 단지 동네이름이 "촌스럽다"는 것이다. 아마 동네이름이 촌스러우면 동네 땅값도 안 오르고 이래저래 경제적 손실을 입으니 새로운 세련된 이름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모양이다. 동네의 유래나 전통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또다시 사라지는 순간  인것이다.

이런 단세포적 발상은 우리사회엔 이미 오랜 전 부터 만연돼 있다. 안양이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양지동 장내동 냉천동 주접동 등등 주옥같은 이름들이 숫자로 탈바꿈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내 부모가 지워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를테면 8번으로 불리우는 수모를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안양은 결코 70년대 불도저시절 허허벌판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123456789가 아니란 말이다.

안양은 원래 수리(음)와 관악(양)의 기가 안양천에  흘러 역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져 우리지역을 "편안한"고을로 불렀을 것이다. 즉, 우리 선조들은 동네이름을 지을 때 사건이외에 지형지세의 모양을 보고 역학적으로 해석하여 불러왔다. 어느 동네이름도 아무 생각 없이 지은 것이 없다. 그렇기에 동네이름에 전설이 깃들여있으며 그 전설은 마을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규정짓기도 하였다.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듯이 동네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마을의 겉모습이 떠오르는 이치이다.

이런 정신적 보존가치가 있는 동네이름이 편한 행정의 희생물이 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는다. 뿌리를 잃은 시멘트공간속에서 고향을 상실한 채 이방인으로서 표류하고 있다. 편한 생활을 위해 전통문화를 없앤 자리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그 위에 흙을 덮어 나무를 심고 있는데 정성을 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 문화 운운한다. 시멘트위에 심은 나무는 오래가지 않아 죽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오늘 당장 편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죽어가는 나무를 방치하고 있을 것인가? 

 

 

또 다른 글| 2007.05.13.

다음카페 동덕축구클럽에서( http://cafe.daum.net/ddscay/4OIb/671?q=%EC%95%88%EC%96%91%20%EC%98%9B%EC%A7%80%EB%AA%85 )

 

공무원,정치인들의 특성중의 하나가 사회제도를 바꾸는데 저마다 일가견을 갖고있는 사람들 같다. 바꾸는데대한 신중함과 고민이있는게 아니라 그냥 시대에 안맞는다고 쉽게쉽게 잘도 바꾼다. 그들에게 전통이란 관심도 없는것일까? 우리의 전통문화가 보존이 안된다. 실제로 정당명 변경과 교육제도변경등은 이미 기네스북에 올라와 있다.

얼마전 서울의 봉천동을 다른이름으로 바꿀 계휙이라는 기사를 읽었다.이유는 "촌스럽다"는것이다. 촌스러우면 바꾸어도 되는것인지? 그리고 그 이름이 왜 촌스러운것인지? 이런 전통에대한 의식의 무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고장 역시 이런 공무원들의 단세포적 발상으로 오래전부터 몸살을 앓고있다. 안양이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우리동네의 옛지명들이 123456789숫자로 개칭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장내동 냉천동 주접동 양지동 등등.... 동네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우리의 이름들이 어처구니없는 일부공무원들의 발상에 의하여 사라진것이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조상대대로 내려오던(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이름도 있지만-그렇다고 전통에서 왜곡된 동네이름은 없다고 본다)옛 지명을 없애다니? 우리선조는 지명을 역사적사실을 기리거나 그 고장의 주변지형과 형세의 해석에서 따와 붙여서 그지명을 고을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어떤 지명도 아무렇게나 생겨난것은 없다.그래서 지명속엔 저마다의 전설이 깃들여있으며 이런전설은 두말할것도없이 정신문화의 밑바탕이됐다.

안양은 허허벌판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 12345678이 아니란말이다.오랫동안 우리선조들이 지명에서 나와있듯이 자연을 벗삼아 살아 음양적 조화(수리-관악)가 가장 빼어나서 편안한 고을로 불러왔다.(편안하다라는 의미는 노자에서 조화롭다라는 말로 쓰임) 그 역학적의미가 각 동네이름에 구체적으로 깃들여있는것이다. 이런 정신적 중요성을 내팽겨친체, 1234...로 바꾼것이다. 생각없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싫다. 정신은 사라지고 편리와 슬럼화로 표류하는 안양. 우리에겐 전통을 중시하는 왜 일관된 철학이 없을까? 우울하기만하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제일먼저 다가오는 인상이  도시가 슬럼화되어가는 느낌이다. 왜 안양이 슬럼화 되어가지에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수도권도시의 특성인 인구과밀화 문제 이전에 "전통에대한 무관심"에서 파생되는 "전통건물의 소멸화"가 주 요인이라본다. 지명 변경 역시 이런 차원에서 발상된것이다. 우리에겐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의 안양은 시공무원들의 구호처럼 전국에서 가장살기좋은 도시(뭘갖고 얘기하는지는 몰라도...)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 사라진 도시에 그냥 아파트나 올리고 시세수입만 많이 거치면 시관리하기 편할지 몰라도 문제는 정신이 있어야 할 것을 없애버린곳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무관심하다는것이다. 다가오는 후세대들이 언젠가는 걷어내야 할 뼈아픈 그늘이 길어만 져가는것이다: 전통이 사라진 도시는 정서가 존재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유럽을 보면 알수있다. 왜 갈수록 안양이 범죄화 되어가고  특히 청소년문제가 다른도시에 비하여 유난히 심각해지는지 시공무원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청소년들에게 정조대왕행차를 맞이한다(주접동)는 사실을 가르칠 수없는 이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통을 보존시킬수있단 말인가?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이를테면 부모님이 지어주신 내이름 "영일"대신에 "5번"으로 호칭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싶지않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있다.  

 

[최승원]서이면사무소 이전의 비극(2019.04.07)

안양지역얘기/담론

이전의 비극
서이면사무소 안양리이전 비극의 씨앗이다.
만안교이전 가치하락
안양사터 삼층탑이전 등급하락
적산도 보존시대
중국 일본침약사 지워지지 않는다.
공존을 연구로 항일정신 키우자.
베트남 침략시설보존 참고하자.
일번가 고층화는 일번가 파괴
차가 많이 다니게 되므로
도로확대가 어렵다. 상하수도 투자급증
주차장 없는 도심, 차없는 거리확대
만안은 균형발전이아니라
"만안답게"!!
일번가 상권 유지 필요
서이면사무소 친숙한 갤러리로 용도변경
야간조명강화로
"유일한 한옥" 공존을 모색해야한다.

 

2019.04.07

雲齋건축연구소 소장 최승원

[최승원]안양, 문화유산 위치 변경 가치 하락시켰다 (2019.03.02)

안양지역얘기/담론

문화시설 기존 현대건축과 공존이 필요하다.

독립문이 고가도로 설치로 이전 되고 이미지가 떨어졌다.

안양시는

1) 중초사지 3층석탑 위치변경으로 등급하락.

2) 1914년 호계리에 조형된 서이면사무소 1917~49 년 이전

확대 재건축으로 문화가치 하락.

3) 튼튼하고 아름다운 만안교 이전으로 전문가 평가 하락.

4)만안도서관 옆 원태우조형물 이전 계획 발표.(설치 조각자 반대필요)

이전마다 주민 반대 없이 무의식적으로 지나친다. 위치변경 중병이다.

상황 따라 돌림 빵으로 이리저리 보내는 문화시설이 아니다.

설치되면 미우나 고우나 공존하게 관리하는 것이 필수이다.

고대는 산지로 둘러싸인 盆地적 병폐, 현대는 위성도시 베드타운 병폐

안양의 문화의식의 한계를 벗어나 문화가 높은 도시를 만들자.

 

2019.03.02

雲齋건축연구소 소장 최승원

[최병일]군포장터와 원태우 지사 조형물, 안양시의회 5분 발언(2019.04.26)

안양지역얘기/담론

3․1만세운동 현장인 구 군포장터와 항일독립운동가 원태우 지사 조형물에 대하여

 

○최병일 의원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양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갈산․귀인․범계․평안․평촌 지역구 출신 더불어민주당 시의원 최병일입니다.
    먼저 저에게 5분자유발언의 기회를 주신 김선화 의장님께 감사드리며 의정활동의 동반자인 동료 의원님, ‘스마트 행복도시 안양’을 위해 애쓰시는 최대호 시장님을 비롯한 공직자 여러분, 정론직필에 애쓰시는 언론인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 발언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신 황의형 광복회 회장님과 회원 여러분! 감사의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실버포럼 박종섭 단장님과 회원 여러분! 부흥초등학교 4학년 2반, 4학년 6반 학생들과 김춘화․김재화 선생님, 또 모니터를 통해 방청하시는 안양시민 여러분! 환영하고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100년 전 3․1만세운동 현장인 구 군포장터와 항일독립운동가 원태우 지사 조형물에 대하여 5분발언을 시작하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이십니다. 100년 전 안양에는 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100년 전 3월 31일 호계동 666번지에서 시작되어 일본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군포역까지 독립을 열망하는 인근지역 현재의 안양․군포․의왕 거주민 2천여명이 모여 행진하며 만세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일제는 경찰 외에도 군 병력까지 동원해 폭력으로 군중들을 해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영상자료 제시)
    모니터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군포시는 조국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억하기 위해 2016년 5월 10일 군포역광장에 ‘군포항일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세웠고 독립운동역사의 지도 표지판을 세웠고 만세시위지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의왕시도 만세운동이 전개된 고천동에 표지판을 세우고 매년 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양시는 100년 전 구 군포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에도 이를 알리는 기념탑이나 조형물도 없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활동조차 없었습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에서 표지판을 설치하였으나 시위지가 먼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안양시는 3․1운동의 정신과 그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안양시민들과 함께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는 일에 함께 뜻을 모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념탑이나 표지석을 세울 것을 제안드립니다. 또한 안양에는 여섯 분의 원태우, 한항길, 이재천, 이재현, 이영래, 하영홍의 항일애국지사가 계십니다. 애국지사님들의 헌신으로 독립된 주권국가의 시민으로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는 이분들을 널리 알리고 올바른 기록으로 보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23살의 청년 원태우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로부터 닷새 후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혼자 돌을 던져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유리파편을 박는 일격을 가했습니다. 이 사건이 전보를 통해 알려지자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전에 원태우 지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안양동에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태우 지사의거비’가 만안시립도서관 한쪽에, 안양역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평촌 자유공원에, 돌을 던졌던 의거지 자리에 각각의 조형물과 동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의거 당시 20대의 청년을 5, 60대의 장년으로 옷을 입지 않은 모습으로 의거 이후에 일본에서 발행한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하의 기록화에 그려진 일본인 화가의 그림으로 세워졌습니다.
    PPT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조선 말 특권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의 젊은이가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는 항일항쟁 증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때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면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하루속히 이미지를 수정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제가 제안한 두 가지를 서면으로 답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역사는 미래 새로운 100년의 시작입니다. 애국선열의 피와 땀으로 이룬 숭고한 독립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며 5분발언을 마치겠습니다.

[심재민]국토부는 안양포도공원조성 말살 정책을 철회하고 종합계획 수립하라!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시소상공인연합회 정책연구소 심재민소장 

 

2017년 3월경 필자는 ‘안양 명물포도 이대로 사라지는가?’ 라는 주제로 기고문과 시정질문을 통해 안양 포도의 우수성을 다시 알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면 안양 포도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안양 명품포도를 관광 상품화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안양포도 보존•육성지원조례 제정

2017년 7월 안양시의회와 안양시는 명물포도 도시로서의 안양의 옛 명성을 되찾고, 안양포도의 보존․육성을 위하여 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 ‘안양시 안양포도 보존•육성 및 지원에 관한조례’를 제정 공포한 바가 있다. 

 

매곡공원 內 포도단지 조성

2018년 7월 업무보고에 따르면 「안양포도 보존․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근거로 하여 포도단지 부지확보 및 일몰제 시행으로 2020년 7월 자동 실효됨에 따라 난개발 방지를 위한 공원조성을 통하여 ▲생태놀이터 도입 검토 ▲안양포도 육성 및 지원을 위한 포도단지 등 도시농업시설 조성(포도과원, 포도정원, 체험장, 관리사 등) ▲지역주민들의 소통 및 휴양을 위한 휴게공간 조성( 광장 및 휴게쉼터, 산책로, 주차장 등)을 보상비 69억원 공사비 등 16억원으로 총사업비 85억을 투입할 계획이며, 올 2월에 실시설계계획인가 및 용역을 완료할 계획이었으며, 2019년 예산서에 도시개발사업 특별회계로 매곡공원 조성사업을 위해 보상비 69억원을 편성한 바가 있다. 

 

지역브랜드를 탄압하는 국토부

2018년 12월 국토부는 장기 미집행 공원부지를 활용해 중소규모의 택지를 매곡공원에 900호 정도로 조성하겠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한 바가 있다. 안양시는 이미 주민의 재산권보호 및 난개발 방지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안양지역의 브랜드인 안양포도를 매곡공원에 조성하여 생산, 제조, 가공을 통해 와인 판매와 관광, 체험 및 견학(3차 산업)으로 관광명소화로 변모시키면서 1차, 2차, 3차 산업을 아우르는 6차산업을 통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정책을 국토부에서는 상반되게 안양의 자존심을 짓밟고 탄압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소규모 택지개발의 문제점

매곡공원이 지역여건상 중소규모의 택지개발이 가능한 지역인지 여부를 정확히 국토부에서 직접 확인한 바가 있는지가 궁금하다. 지면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국토부에서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지방정부에서 조례에 근거하여 도시공원을 활용한 고부가가치를 위한 지역브랜드 육성 차원과 난개발 방지 정책이라는 점. 

둘째, 매곡공원은 평촌대로 401번길(2차선)과 411번길(이면도로)에 접한 지역으로 향후 무분별한 택지개발로 발생되는 교통체증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셋째, 국토부는 실적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이 지역은 월판선으로 역세권이 조성이 된다는 된 점을 고려하여 매곡공원과 주변 주택밀집지역, 종합운동장을 포함한 종합적인 개발 정책수립이 필요하다는 점. 

위와 같은 상황을 참고하여 국토부는 좀 더 지역 현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즉각 중소규모 택지개발을 철회하고 ‘안양 명물포도단지’ 조성과 함께 멋진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종합계획 수립을 하여야 하며, 또한, 안양의 공직자, 시의원이라면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시 되어 쾌적하고 살기좋은 극락정토 안양을 만드는 초석이 되어 주시 길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한정규]정조대왕 능행차 참가자에게 정체성 심어야 한다

안양지역얘기/담론

정조대왕 능행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요원'
화성행궁에서 대황교까지…참가자에게 정체성 심어줘야
2018-10-08 16:48:55최종 업데이트 : 2018-10-08 17:06:4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정조대왕 능행차는 1975년 제12회 화홍문화제(현 수원화성문화제) 때 수성고등학교 이홍구 선생에 의해 최초로 복원됐다. 1976년부터 문화제가 열릴 때마다 수성고 한 학년 전체가 동원됐고 1978년에는 인천에서 열린 제59회 전국체전에서 정조대왕 능행차가 펼쳐져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1981년에는 2학년 학생 모두가 능행차 연시를 위해 팔자걸음 걷는 연습을 했었는데 나도 그때 깃발을 드는 역으로 능행차에 참여했다.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송지대에서 만석거를 거쳐 장안문 팔달문까지 행차를 하던 기억이 난다. 기록영화를 만든 주체가 어디인지를 몰라 그때 찍은 기록영화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당시에는 타의에 의해 동원된 불편한 기억만 있지만 세월이 흐르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고 누구보다 정조대왕 능행차에 애착을 갖게 됐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의 효(孝)를 위한 행렬인 2018 정조대왕 능행차가 6일부터 2일간 성대하게 펼쳐졌다.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양력 3월 29일 - 4월 5일)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현륭원을 방문하고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수원으로 대규모 행차한 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정조대왕 능행차는 수원화성문화제 기간에만 펼쳐졌었는데 2016년에는 서울 창덕궁에서 수원까지, 2017년에는 창덕궁에서 수원을 거쳐 화성시 융릉까지 전 구간에서 재현됐다.

1795년 윤2월의 화성원행은 창덕궁을 출발해 배다리를 건너 시흥행궁에 도착해 1박을 하고 다음날 화성행궁까지 꼬박 1박 2일의 여정이었다. 현재 전 구간에서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려면 서울시, 안양시, 의왕시, 수원시, 화성시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구간이 바뀔 때는 '정조대왕 표식기'를 교대하는 방식으로 행차를 이어간다. 한 팀이 전 구간을 1박 2일 재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재현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이번 정조대왕 능행차는 6일 첫째 날은 서울구간인 창덕궁을 출발해 한강 배다리를 건너 시흥행궁까지 21.2km 구간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비바람이 몰아쳐 창덕궁에서 출궁의식만 가졌다. 비가 그친 오후가 되어서야 노들나루공원에서 시흥행궁까지 정조대왕 능행차가 펼쳐졌다.

7일 둘째 날은 수원구간인 금천구청을 출발해 노송지대, 종합운동장, 연무대까지 26.4km 구간과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까지 5.9km 구간, 화성구간은 대황교동에서 융릉까지 7.4km 구간에서 열렸다. 서울 창덕궁에서 시흥행궁, 안양, 의왕, 수원을 거쳐 융릉까지 총 59.2km 구간 중 일부 구간은 취소된 상태로 진행돼 전체 구간에서 재현하지는 못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1795년 윤2월에 있었던 화성원행인 정조대왕 능행차를 전 구간에서 재현하려면 한강에는 배다리 310m가 설치돼야 하지만 제25호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배다리가 설치되지 못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일부 구간이 취소되는 등 어수선했지만 가을날씨 청명한 7일 오전에 수원구간인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까지의 정조대왕 능행차를 동행 취재했다.

7일 아침 9시 화성행궁 광장에는 말을 탄 장용영 군사들, 창과 깃발을 든 군사, 악기를 든 악대들이 정조대왕의 출궁의식을 대기하며 행렬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를 통해 입장하자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축시를 낭송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아아, 만세토록 왕업을 이어 조선이어 무궁하게 번창하소서. 성상께서는 자궁의 회갑 년을 맞이하여 아버지 능에서 수연을 베푸시도다. 그 효심을 보고 백성들은 감복하도다. 능 곁에 높은 성채를 세운 뜻은 능의 고장을 지켜 나라와 백성을 함께 지키려 도모하심이로다...'  

출궁의식은 9시에 예정돼 있었지만 15분에 정조대왕 입장, 18분에 축시 낭송을 했는데 20분에 스피커에서는 "정조대왕 께서는 행렬 위치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무엄한 말이 나왔다. 재현의 진정성이 있으려면 재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소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 인물처럼 존중하고 언행을 삼가야 한다. 이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지점인 대황교동 다리까지 약 5.9km 구간이다. 10시 10분 경 상류천 표석을 통과했고 11시 6분경 대황교동에 도착했다. 다리에서 정조대왕 표식기를 화성시 팀에 인계하고 능행차를 마무리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지난해에는 정조대왕만 행렬에 참가해 단출했었는데 그나마 올해는 혜경궁홍씨,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도 합류해 볼거리가 있었지만 주구장창 걷기만 하는 행렬에 무슨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노송지대부터 종합운동장, 종합운동장부터 연무대까지의 메인 행렬에만 집중해서는 전체적인 정조대왕 능행차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능행차 행렬에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물어보니 스텝이라고 했다. 말을 탄 사람 몇 명에게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모른다며 행렬 순서만 알고 있다. 능행차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증에 충실 하는 게 우선이지만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이 능행차의 정체성을 알고 있어야한다. 스텝도 능행차 행렬의 일원으로 복식을 갖추고 참여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1795년 윤 2월 12일 현륭원 행차시에는 화성행궁에서 새벽 4시 45분경에 출발했다. 행궁을 출발해 팔달문을 경유하고 매교, 상류천, 재간현, 하류천, 황교, 옹봉, 대황교, 능원소화소, 유첨현, 안녕리, 유근교, 만년제, 능원소동구, 능소까지 약 29리(1리는 360m, 약10.44km)의 거리였다. 

왕의 행차길을 필로(蹕路)라고 하는데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까지 길의 경계마다 표석을 세웠고 5리마다 이정표로 장승을 세워 표석은 20곳, 장승은 11곳에 세웠다. 현재 표석은 5개 남아있지만 장승은 모두 사라졌다. 필로에 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1801년), 화성지(1831년), 수원군읍지(1899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화성행궁에서 대황교동 구간 행렬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에는 상당수의 군 장병들이 동원된다. 동원에 앞서 군부대와 사전에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수원화성문화제와 정조대왕 능행차의 정체성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소통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번기회에 능행차에 참여한 군 장병들에게 반드시 설문지를 받아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할 사항은 개선해야 한다.

대충 행사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 운영하는 사람, 참가하는 사람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완성도 높은 행사로 만들 수 있다. 대충 해놓고 '222년만의 완판 재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꿈꾸고 있다면 사고방식부터 바꾸고 더욱 기본에 충실해야 하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