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4탄(2020.06.18)

안양지역얘기/담론

 

 

제가 아는 군포의 정치이야기를 총선(군포시장)을 중심으로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번에 나누어 게시 할겁니다.

 

군포시 정치 이야기 NO. 4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는 야당의 실력자인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 1야당이 되면서 통합민주당은 졸지에 제 3당이 되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과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을 포함한 4개의 정당이 한국사회의 주요 정당이었다. 군포시 선거구가 시흥시와 분구되어 단독 선거구가 된 이후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산본 신도시의 표심을 가늠해보는 중요한 선거였다고 평가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95년 초대 민선 시장 선거에서 소각장 이슈가 워낙 강해서 산본 신도시의 정치성향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정치흐름으로는 15대 총선은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선전여부에 따라 차기 대선을 준비 하느냐 못하느냐의 가늠자 선거이기도 했다.

당시 군포시에 출마한 후보 면면을 살펴보면 신한국당의 강창웅씨는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 꽤 유명한 전관 변호사였다.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지역에 전혀 연고가 없는 민변출신 약관의 인권변호사인 유선호씨를 공천했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은 오랫동안 재야민주화운동을 했던 여익구씨가 공천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인 심양섭씨가 자민련의 공천을 받았다. 당시 현역인 제정구의원이 분구로 인하여 시흥으로 갔기 때문에 군포 총선는 무주공산으로 현역의원이 없이 정치신인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또한 출마한 유력 후보들이 군포지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특징을 가진 선거였다. 따라서 군포시가 수도권 선거의 전형적인 형태를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선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출신지역에 따른 정당지지 흐름도 있었지만, 15대 군포 총선은 인물, 경쟁이 전면에 부각된 선거라고 평가 할 수 있다. 강창웅, 유선호, 심양섭 후보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서울대 출신이었고 여익구 후보도 불교계와 재야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두고 지역에서 사회사업을 하던 역량이 있는 후보였다.

따라서 선거는 총6명의 후보가 등록하였으나 초반부터 박빙의 4파전으로 전개 되었다. 신한국당의 강창웅 후보는 여당의 힘과 막강한 재력으로 초반선거를 주도 해 나갔다. 약간 뒤처지던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는 지역의 전통 민주당 세력들과 젊은 층이 모여들면서 맹추격을 했다. 여기에서 통합민주당의 여익구 후보는 그간의 민주당 세력들과 호남세력들이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를 지지하면서 경쟁구도에서 약간 밀리는 형세였다. 그러나 자민련의 심양섭 후보는 유일한 30대 후보로 신선함과 패기를 기반으로 지역의 충청지역세를 업고 상당한 지지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구도는 보수 계열 2명 진보계열 2명의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판세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졌다. 선거 막판은 결국은 금전과 지지세력 결집으로 결판이 난 것으로 보였다.
당시 군포시 유권자 161,710명 중 101,215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62,59%로 전국투표율에 1,3% 뒤졌다. 15대 총선 군포시 당선자는 31,869표(31,9%)을 득표하여 1,746표 차이로 신승한 새정치국민회의 유선호 후보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의 강창웅 후보는 간발의 차이인 30,123표(30,15%)로 낙선하였다. 그리고 통합민주당 후보였던 여익구 후보는 진보? 야당 경쟁에서 밀리면서 13,018표(13.03%)을 얻는데 그쳤다. 심양섭 후보는 젊은 패기로 제 4당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21,223표(21.24%)을 얻으면서 선전하였다.(심양섭씨가 신한국당 후보였다면 결과 다르게 나왔을 거라는 호사가들의 말들이 있었다.)
당시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시각이 있지만, 군포에서는 정당경쟁보다는 인물 경쟁이 앞섰던 마지막 선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참고 이야기
- 유선호 후보는 기존도시인 산본1동과 금정동에서 큰 표차이로 이긴 것이 승인이었다.
- 신도시 지역은 강창웅 후보와 박빙이거나 큰 평수에서는 열세였다.
- 제정구의원 시절 주력인 민주당 주요당직자(임석순 등~)와 민주당 성향 지방의원들은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 진영으로 대대수가 합류하였다.
-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의 선거 기획 총괄은 이후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의 기반을 놓았던 강영추씨가 맡았다.
- 통합민주당으로 초대 민선시장이었던 조원극 시장은 총선 당시 무소속이었다.
- 여전히 재야진영에 머물던 나는 인권변호사 출신의 유선호 후보를 지원해달라는 당시 재야 지도부? 의 부탁을 받고 후보에게 직접 조언과 강영추 기획실장을 통해 측면 지원을 하였다.
- 당시 모 후보는 개인자금 30~40억을 선거에서 사용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파이프에서 줄줄 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 당시에는 각 당의 중앙당에서 중점전략지구에는 선거 자금을 내려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 선거 이후 신한국당의 강창웅씨는 군포에서 정치 활동을 접었다.
- 통합민주당의 여익구씨도 이후 군포에서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사회사업에 힘쓰시다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 자민련의 심양섭씨도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지속하지 않았다.
- 지금은 경상남도 도지사인 김경수 지사가 유선호의원의 비서관으로 15대 국회에서 4년간 활동하였다.

-편집자 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최승원]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과거와 미래-건축(2020.05.18)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
과거와 미래
건축을 중심으로
1. 들어가기
루이스 칸 Louis Isadore Kahn의 제자 나상기교수(1974.안양시청설계자 현만안구청)는 1964년 펜실바니아 미술대학원 건축과졸업, 1969년 대학원 도시계획과 졸업후 귀국하여 미국에는 인디애나주 콜럼버시(Columbus)에 볼만한 건축프로그램이 있다고 한국에 소개하였다.
 1987년 여름 건축가협회 국제분과위원장 김성국교수부부. 유희준교수. 장석웅. 황일인. 최영집. 필자등은 북구라파 스칸디나비아3개국(스웨덴 노르웨이.핀란드) 건축답사중 핀란드 알바알토박물관(Hugo Alvar Henrik Aalto) (1971년설계 1974년 완공)  알바알토스튜디오. 오슬로 바겔란 조각공원을 답사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핀란드 지폐에 건축가 알바알토사진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또한무명작가 작품이지만 관광객이 매년 50만명이 방문한다는 핀란드에서 유명한 암반교회인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교회를 가보고 필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설계에 감명을 받았다.
이어서 한국건축인들은 1990년6월 에는 미국인디아나주 콜럼버스시의 건축프로그램을  보고 한국에서도 이 같은 도시를 꿈꾸게 되었다.
안양시는 수도권 서남부 중심도시로 시흥군 군청소재지. 산업도시 등으로 근현대건축이 있기에 이를 재활용하고 새로운 건축을 추가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필자가 받은 1998년 아시아건축상인 아카시아상(arcasia)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안양시는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시건설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2003년2월  안양시는 교수 시의원 공무원으로 구성된 답사팀이 콜럼버스시를 다녀왔다.
이어서 콜럼버스시도 단체로 안양시를 방문하여  IT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건축사들은 자문을 넘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의원. 구의원. 도의원. 도의회위원장. 구청장. 시장. 국회의원등으로 활동이 확대되어 건축을 발전시키고 봉사하고 있다.
2. 과천국립현대미술관
한국건축100년 특별기획전
1999년(8.31-10월.28) 한국건축100년 특별기획전이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성대히 전시되면서 관람자들은 더욱 건축에 관심이 높아지고, 전시중    원로건축인들은 한국에 건축박물관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2000년대 초 안양시도 자문위원회에서 ‘건축도시’ ‘써커스도시’ 등이 거론 되고 당시 안양주유소 운영하는 이상윤 전읍장이 “건축도시”에 동의했다. 이에 안양시가 자문위원에서 의견을 받아 건축박물관을 계획해보겠다고 나서게 된다,
안양시 동안구 중앙공원 지하주차장이 많이 비어있어서 여기에 건축박물관을 하고자 안양시는 예산까지 세우고 준비 한 적이 있다.
*2001.4.16 안양문예회관(현아트센타) 운영이 보강되고 고조 된다.
3. 안양시 브라질정책연수단
브라질 꾸리찌바시. 소로까바시
2001.6.10(일)~6.20(수) 10박10일
2001년 늦봄 꿈의 도시 꾸리찌바 (박용남지음.이후)라는 책을 섬유예술가 신영옥이 구입하여 안양시장에게 전달하니 어제도 교통전문가로부터  추천받았다며 신중대시장의 관심이 고조 되었다.
이 도시는  브라질건축가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mer)가 꿈을 가지고 만든 세계적 도시이다.
 1997년말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위기로 모든 시민들이 온통 한파속으로 내몰리게 됨으로 지자체들이 활로를 찾게 되는데, 저예산, 작은 건축으로 유명한 꾸리찌바의 매력이 돋보였다.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mer)가  3번 시장이 되어 이룩한 업적이며, 이 책은 작은 건축으로 생태를 유지하고 버스를 땅위 지하철같이 운영하는 독창적인 교통망의 개발이 특징이다. 안양시 자매도시 소로까바(포루투칼어Sorocaba)시가 인근에 있어서
안양시는 소로까바시에 시장. 의회의원, 환경단체. 건축가등으로 현지에 답사단을 보냈는데 답사단은 먼저 자매시를 방문후 꾸리찌바 시를 답사하였다.
소로까바시 첫인상은 검소하고 조용히 빛을 내는 아름다운도시 였다. 소로까바시청의 조용한  안뜰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오래동안 기억에 남는다. 램프접근로, 공중정원, 옥탑층회의실 시청주변에 있는 공연장등 매우 일품 이었다. 방직공장을 재활용한 도서관, 공장을 재활용한 슈퍼마켓도 훌륭하였다.
필자는 도시감상기를 써서 시장에게 전달해달라고 가이드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화장품공장을 재활용해 한국기업이운영하는 실내축구장도 답사하였고, 기업은 대규모축구센타를 만들 예정이라고 하였다.
꾸리찌바시는 도시계획연구소, 오페라데 아라메극장, 지혜에 등대, 환경대학, 식물원의 온실, 시민의 거리, 유리원통형 버스정거장등을 답사하였다.
안양시는 이도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작은축구장, 채석장공원, 폐품전시관등을 설치였다.
꾸리찌바시의 교훈
신은 인간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그 뜻과 노력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대원군의 쇄국청치가 조선의 몰락을 가져 왔다.(지금도 이웃국가는 비슷) 국가나 도시는 새로운 것에 탐구력(자존심을 가지면서도)이 필요하다. 자만심을 경계하고 새로운 시스템에 도전하는 힘이 매우중요하다. 꾸리찌바시의 교훈은 한국가 안에서 비슷한 예산과 인력으로 차별화를 한 것은 매우중요하다.
당시 저렴한 교통비 50센트로 신속한 속도는 도심 집중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변두리에서는 노숙자에게 우유를 공급) 시민들은 승용차보유가 많지만 신속히 움직이는 대중교통체제이용은 본받을 만하다. 운전기사 1명당 승객 수송율이 최대 270명은 매우 효율적인 연결형버스이다.  정맥과 동맥이 흐르듯 움직이는 일방통행은 좌회전 없이 신호등도 없이 신속히 흐른다. 도로의 자유로운 사용 자유로운 주차장설치  터미널에서 종합민원해결은 도시의 휴계코너 이다. 
2001.6월 글
*안양시는 예술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예술대학이 없어서 의왕시 소재 계원예술대학의 협력을 받자고 필자는 자문했다.
* 경기도가 예술도시 Project를 경기도가 진행하도록 유도하고, 경기도가 안하면 안양시가 하자고 회의중 건의했다
4. 안양시 미국 인디애나주 콜럼버스
(COLUMBUS)시 방문 2003년2월
콜럽버스시는 지역내 엔진공장이 시에 건축설계비를 기증하고 운영위원회에서 주로미국 건축가를 선정해서 좋은 건축을 진행하고 있다.
콜럼버스시 답사단 안양시방문
 “아트시티 사업과 관련 지난 2월 신 시장 일행이 콜럼버스시를 찾았던 데 따른 답방 형식으로 이뤄졌다. 2003년.3월11일 콜럼버스시(市)의 브루크 터틀(Brooke Tuttle) 콜럼버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 팀 타노우스키(Tim Tarnowski) 콜럼버스시 지역병원 부위원장 겸 IT 전문가 등 5명의 방문으로 이뤄진 이날 설명회는 30여명의 관내 IT업체 대표와 임직원 30명이 참석했다.” 경인일보 2003.3.12
5. Anyang Art City 21
 2002년 추진배경쾌적한 도시환경 조성 및 체계적 도시발전을 위한 「Anyang Art City 21」사업 추진의 일환으로 각종 건축물과 공작물들의 외관형태 등에 예술성을 가미하여 자연환경과 도시 미관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수준 높은 문화적 자산을 만들어 국내, 외적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문화를 가꾸어 나가고자 함.
예술도시의 정책방향AAC21 건축자문을 통하여 각종 건축물과 공작물 등에 대하여 예술성을 가미하여 자연환경과 도시미관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아름답고 품격있는 도시건설 추구. 품격있고 아름다운 예술도시 조성을 위한 Public Art Project의 지속 추진. 미래지향적이고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도시경관 사업추진. 2002 AAC21 건축자문단구성
2002.9.26  아트시티기획단출발
2016       AAC21제11회 건축문화상 Festival예정
“지자체 공무원, `Anyang Art City 21' Project 벤치마킹 방문
벤처마킹을 의뢰한 지자체들은 충청남도 등 광역자치단체를 비롯해 제주시, 금천구, 부천시 등 기초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기호일보 2005.2.27 0면
진행; 아트심의. 우수건축지정패를 부착. 전시. 학생공모등이 있다.
*우수건축의 과잉지정으로 질이 낮아진 것이 문제점이었다.
. 안양유원지 대홍수로 붕괴
1977년.7.10안양대홍수로 사망실종288명, 안양유원지파괴, 이재민 6만 여명이발생했다.
이것은 무모한 도시계획으로 안양천(漢川) 하폭40~100m에서 20m내외로 축소됨으로 피해가 증가되었다. 그리고 오랬 동안 도시자연공원으로 묶이면서 개발이 제한되고, 열악한 시설들로 인해 유원지라는 음성적 이미지만 유지되어 오다가 1999년부터 시에서는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시작이 잘못되고 있었다. 
국가문화재급 안양풀을 복원하지 못하고, 산에 있던 방가로를 모두철거하고, 설악산하단 상가지역식으로 재배치를 못하고 28년만에 주택지형으로 준공되고 있었다.
앞으로 상단지역부터 매년 한채씩 건물을 사들여 자연원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2005.2.24 안양시 시정발전위원회 위원명단 58명중 도시건설분과위원회 최
승원위원장, 위원으로 정일훈 양하백(국토연구,원연구위원) 염형민(국토연구
원, 지역도시선임연구원) 정기호(성대조경학) 조광희(대림대건축과교수) 김경인 한국회 함호석 한무영등이다.
안양소재 국토연구원이 안양시청 앞에 있어서 상 하수도시설등 부족으로 인구억재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며, 안양시가 수위과학검역원을 매입하기위해 저밀도조치를 하기도 하였다.
안양시문화체육과위원회는 9명이며,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박충흠교수(조각)와 오용길교수(동양화)가 포함되었다.
6.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 2005.11월5일~12월15일
자연공원 정비사업과 함께 건축, 미술, 조경, 디자인 등이 결합된 국내 유일의 예술공원으로 관광자원화를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는 물론 안양시의 위상을 높이는 시설로 자리매김을 시작하였다.
“Alvaro Siza의 전시관을 중심으로 (네덜란드3명의건축가그룹)MVRDV, 사미 린탈라, 핼렌 박, 디디에의 건축물. ‘Big3’라고 지칭하는 알바로 시자, MVRDV, 비토 아콘치
‘알바로 시자’의 전시관이 안양 시민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 세계적인 건축가 ‘MVRDV’가 안양시민을 위한 전망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큰 사건임을 강조하였다.
“공공예술프로젝트는 미국 인디아나주 콜럼버스나 일본의 구마모토현과 같이 안양을 아름다운 예술도시로 가꾸겠다는 비전을 갖고 3년 전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아트시티 21의 시책의 일환이다. 당초 진행되어온 조각공원 조성공사를 작년 말 중단시키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까지는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이겨내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실현되기 힘든 프로젝트이다.”(신중대)
건축문화편집부 (archious@ancbook.com)건축문화 2005년 10월호 [Special issue]페이지
안양이후 알바로시자는 한국에서 미술관 사무소건축등 대표작이나오고  MVRDV도 서울고가도로 디자인에 진출한다.
예술공원현황
1)면적373,377m2 (113,010평)
*삼성천마을 주거환경 개선사업지구 17,686m2(54,355평)중 낙원마을 지역15,890m2(4808평)를 제외한163,791m2(49,547평)*비산도시자연공원(석수1동,안양2동) 209,586m2(63,463평)
2)작품; 알바로 시자 전시관 등 52작품, 198점
*비산도시자연공원(안양2동,석수1동)100점
삼성천 마을 주거 환경개선사업 지구내 96점
*기타(유유산업 아래 하천변, 공원입구주차장)2점
3)시설
*수경시설: 인공폭포 및 벽천 각1개소 (하천분수 작품에 포함)-자연파괴주범
*편의시설: 목재테크 등 16종 67점
(관리부족으로 많은 양이 썩어서 철거되었다.)
*조명시설: 경관조명등 680등
*조경수: 느티나무등 21개 수종 191,350본
사찰반대로 방문객입장료를 징수치 못하고 있다.
화장실건축자리를 (조광희교수설계) 취소하고 알바르씨자홀(안양파빌리온)을 유치
 준공후 많은 광광객이 오기시작 했다. 시장은 과거에 안양유원지 였기에 많다고  설명하였다.
2006.8.11 안양시 재정경제국 청책기획단주관으로 안양예술공원관련 간담회
를 가졌다
2006년 예술도시기획단신설(김성수단장)
2007년 안양공공예술재단 설립
       안양시“간판정비”국내벤치마킹
“2월부터 17개자치단체와 3개관련단체 151명 문화광광부,행자부,부산광역시,대구광역시 충남도청 서울은평구 의왕시,속초시,용인시,연기군,정선군,서천군,경산시,고창군등으로 벤치마킹했다 .전담 상담인력이 필요할 정도였다.”
2007.5.25 안양시민신문
2007.3.8 문광부“공공디자인시범도시”안양시 선정
2011년까지 국비 50억원 지원 만안구 도시디자인 마스터플랜
2002년부터“아트시티21사업추진 국내최초로 국제규모의 공공예술사업 추진(APAP) *도시마다 시각공해인 광고물의 대대적인 정비
7. 유유산업안양공장 매입
2002년부터 매입을 위한 물밑 작업이 시작되고 2004년부터 3년 넘게 논의되었다.
대구국채보상운동을 참고하여 전시의원 변원신등 원로, 최병렬시민연대기자등이 매입에 앞장서다.
2007년5월28일 안양시가 부지를 매입하였다.
 안양시는 (주)유유산업으로부터 공장부지를 매입해 김중업박물관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대지면적 16,243㎡).
2007년 안양시답사단 독일건축박물관. 랑엔 파운데이션 답사
안양시는 유유산업을 꾸미기위해 시담당국장을 포함한 답사단을 유럽에 보냈다.
김중업건축사무소출신 장석웅회장. 한서대 오인완교수. 이용재평론가 안양예술공원식당에서 회의
의제. 김중업박물관 설치
신중대시장은 후일 장석웅회장님이 훌륭한 건축인이라고 하였다.
201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건축전시가 상설로 준비되었다.
2014.3.28 김중업박물관개관. 제4회 APAP개막
8) APAP문제점
양적이고, 배급적 이며, 낭비적이고, 설치밀도가 높다.
관람객은 안양천변 Open School이 계절에 따라  춥고 덥다고 하는데 정자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일부 APAP폐지를 주장했는데, 원인은 주변도시가 따라하기, 일부민원발생도 있으나 조명관리부족이고, 원조는 원조다. 계속해서 소수정예로 유지해야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안
예산을 모아서 미술관을 짓자.(오용길 전이대교수)
*매회 2~3점 작품만 건축
(예, 훈더바서 뉴질랜드 공중화장실)
*작품설치를 시에서 대행하면 작가로부터 인증 받는 작품을 설치
*배치신중,  스페이스사용적절
*여러지역에 배급제 지향
*제작비 적절. 설치기간표시
*전문적 관리 (못질금지. 건축에 프랑카드설치 금지. 정기적방부페인팅)
K-POP 같이 한국의 건축예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참고: 의왕시 성나자로원 건축 (당시 이경재신부님은 대통령상이 사람에게 준상이라고 말씀하셨다.) 민간주도의 안양시 건축전시 필요 (저성장기 참조)
기타; 수위과학검역원 안양시인수 활용?
문화예술관광지역으로 정하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위치, 안양6동 5만6천309m2  1천293억원 4년 분납으로 인수 28개동 (2만8천800m2) 본관설계, 50년대 말 이광노교수의 문화적디자인
안양시립미술관. 시립공예관. 한국근대건축박물관등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 앙가주망건축사사무소 건축사
최승원
2016년6월18일
연미연 세미나자료
알바르씨자홀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3탄(2020.03.20)

안양지역얘기/담론


군포 정치 이야기 3(초대 민선시장 선거)

15대 총선 이야기하기 전에 1995년 지방선거 시장 선거이야기 먼저 해야 할 듯합니다. (산본 신도시 입주 완료)

이시기는 DJ가 정계은퇴 이후 권토중래를 꿈꾸며 당시 통합민주당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DJ의 정책외곽조직인 ‘내외문제연구소’ 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포시 내외문제연구소 지부장을 조원극 전 수원 부시장이 맡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조원극전 수원시부시장이 통합민주당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이때 한양대 학생운동 출신인 송정열씨가 선거기획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 경기남부연합에 선거연대를 요청하였고 내부 논의를 거쳐 민주 지원 후보로 선정하여 안양군포의왕지부를 중심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원극 민주당 후보 선거 사무실은 신환사거리(당시 조그마한 시장이 있었음)건물 2층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군포시는 쓰레기 소각장 건설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현안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군포시장 선거는 여당인 민자당과 민주당의 경쟁 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각장 반대 대책위 활동으로 수배된 김영재씨가 시민후보? 로 후보로 등록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충청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 이강원, 그리고 초대군포호남향우회장 출신인 백남규 전시의원, 이철두 군포유치원연합회장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나름 상당히 치열하게 선거전이 전개 되었다.


당시는 합동유세가 지지세를 과시하는 선거였기 때문에 지지자 동원에 사활을 걸었다. 한번은 신도시 지역에 위치한 광정초등학교에서 있었던 합동유세에 그 동안 대리 선거운동 만하던 김영재씨가 유세장에 나타나면서 검거하려는 경찰, 저지하려는 시민 등이 뒤엉키면서 격렬했었습니다. 따라서 민주당도, 민자당도 당선을 자신하기 어려운 선거였습니다. 또한 군포 시 인구 분포는 충청, 영남, 호남 출신 비율이 비슷했고 신도시 입주로 원주민 비율은 낮았지만 여론주도층은 원주민들 이었습니다. 민자당 유병직후보와 민주당 조원극후보는 원주민출신으로 유서 깊은 군포초등학교 선후배였기 때문에 차별 점은 정당밖에 없었다. 마지막 합동유세는 기존 도시에 위치한 군포중학교?(금정초?)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투표를 앞둔 마지막 세 과시 이었기 때문에 모등 후보가 총력을 기우렸다. 민주당 조원극후보 역시 민주당 지지자이외에 수대협(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학생 300명이 지지하려 왔었다. 이 때문에 유세장에서 작은 충돌로 인하여 학생 몇몇이 경찰서로 연행 되는 일이 있었다. 합동 유세가 끝나고 학생과 민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조원극 후보지지 거리행진을 약1시30분에 걸쳐 진행하였다.


군포시 초대 민선시장으로 민주당 조원극후보가 당선되었다. 임기는 3년이었다. 조원극시장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을 탈당하였다. DJ의 정계복귀로 통합민주당과 새청치국민회로 분열되었다. 제정구의원은 통합민주당에 잔류하였고 시흥시로 지역구를 정했다.


에피소드: 1. 거리 행진을 마친 수대협 학생들은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군포 경찰서로 몰려가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군포경찰서는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 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결국 경찰서는 연행학생을 훈방하고 학생들의 집회는 종결 되었다.

2. 민자당 유병직 후보의 아들이 서울농대(수원) 개혁적인 학생이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 나온 동료학생들과 갈등이 조금 있었다.

3. 신도시를 중심으로 지지세가 상당하던 김영재 소각장반대 대책위원장은 합동유세장에서 검거되어 옥중선거를 하게 되었다.


선거결과: 95,538명이 투표했고 유병직 민자당후보 23,754표, 조원극민주당 후보 28,274표, 자민련 이강원 후보 7,548표, 김영재후보 16,124표, 백남구호보 6,055표, 이철두후보 12,191표 무효표는 1,592표였다.

*기억에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세요.


글쓴이: 조완기 선생 소개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2탄(2020.03.16)

안양지역얘기/담론

 

군포시 총선이야기 2
 92년 14대 총선은 군포시 단독 선거구가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군포를 중심으로 바라 볼 수 밖 없습니다. 당시 군포시는 89년 市승격은 하였지만 (산본 신도시 입주 안했음) 기존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거구였습니다. 그래서 민주당 제정구 후보의 선거사무실도 지금의 군포1동사무소(당시 시청) 건너편에 있는 농협 2층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민했던 지점은 민중당 박재영후보가 당락에 영향을 줄 것인가? 였습니다.
당시 군포지역의 제정구 후보 선거는 크게 보면 호남향우, 천주교, 경기남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재야·노동계의 연합 선거운동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원단)
 당시 선거는 상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선거 마지막 날 군포중학교 건너에 있던 연립주택에서 벌어졌던 민자당 황철수의원 선본과 민주당 제정구후보 선본, 그리고 당시 지원을 나왔던 재야, 학생들의 각목 대치가 양측의 중재로 저녁 12시경에 아슬아슬하게 끝났습니다. 이후 투표 당일 새벽부터 공정선거감시단이 가동되었습니다. 군포도 밤새도록 감시단이 운영되었는데 밤샘을 하면서 수거한 흑색선전물이 마대자루에 담겨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선거 결과는 군포·시흥(제정구의원 본거지) 두 지역 다 낙승이었습니다.
◆ 에피소드 하나. 당시 저는 금품살포 현장을 갔다가 거꾸로 붙잡히게 될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한 아주머니의 기지로 그 집에 숨어서 문을 닫고 선거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겨우 구조된 적도 있었지요. 또 하나는 양측 진영이 각목 대치할 때 상대측의 청년조직(사실상 주먹들)이 당시 수대협 학생들에게 “야 너희들이 학생이야? 이 깡패 새끼들아” 말해서 폭소가 터졌던 기억입니다.
※ 現천안시 국회의원 이규희, 前시흥시 3선 시장 김윤식 등이 당시 군포시에서 제정구후보 선본에 있었다.
前정의당 국회의원(당시 경기남부연합 공동의장(전교조 경기지부장) 정진후님이 지원단 총괄이었다.
※ 군포시는 48,741명이 투표하여 제정구 21,314표, 황철수 14,167표, 민중당 박재영 1,442표 그 외~
※ 시흥시는 55,327명이 투표하여 제정구 27,092표, 황철수 18,195표, 민중당 박재영 657표 그 외~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1탄(2020.03.14)

안양지역얘기/담론

 

제가 아는 군포의 정치이야기를 총선(군포시장)을 중심으로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번에 나누어 게시 할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민주당계열이 서로 당을 달리하던 시흥과 분구된 15대 96년을(민주당 故여익구, 새정치국민회의 유선호) 제외하고는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경선은 처음입니다. 시장 후보도 마찮가지입니다.(초대 민선시장 민주당 조원극)
군포시에서 92년 이후로 현재의 민주당이 아닌 정당이 국회의원이나 시장으로 당선된것은 각 각 단 한번입니다.(16대 김부겸 한나라당, 그렇지만 4기(2006년) 군포시장 노재영 당선 시기는 김부겸 의원은 열린우리당 이었습니다.) 그 많큼 군포시는 민주당의 아성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경기도 군포시는 신도시 산본으로 더?알려져있는 인구 27만의 노태우 시절의 신도시입니다. 저는 군포시에 93년부터 살았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안양군포의왕을 통칭 안앙지역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본격화 되면서 각각의 정체성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시민단체도 지역별로 분리 되었지요. 80년대부터 안양에 살았던 저는 여전히 구별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군포시는 시흥시와 하나의 선거구 였다가 96년 15대 총선부터 단독 선거구가 되었습니다.
13대 당시는 민자당의 황철수씨가 국회의원 이었습니다. 저는 14대 92년에 故제정구님을 민주당이 공천을 하면서 처음으로 선거 아닌 선거를 했습니다.(당시 제정구님은 전국연합과 민주당의 민주연합 후보로 선정되었음)
당시 선거는 조폭들과 재야,학생들과 일대 격전이었습니다. 제정구는 빨갱이라는 유인물이 난무하고 조폭들과 한신대를 주축으로 하는 학생들과 각목을 들고 대치하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사실만 전달하고자 합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심재민]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를 아시나요(2019.07.12)

안양지역얘기/담론

옛길복원, 관광•여가문화 활성화

요즘은 지방자치단체 마다 사라져가는 옛길을 복원하여 관광•여가문화 활성화를 꾀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는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 해운구는 6.25전쟁 과정에서 사라진 “송정 옛길”이 걷기좋은 숲길로 길이 1.8km, 면적 7200㎡을 복원 되었다.

충북 보은군은 “질마재 옛길” 4.7km를 둘레길 형태로 복원하고자 지역균형발전 공모사업비를 통해 복원되었고 인근 속리산 등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프로그램도 개발해 속리산 일원을 관광특화지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또한, 경북 문경 “문경새제 과거길”과 충북 괴산 “산막이 옛길”, 경북 울산 남구 “장생 옛길”등을 복원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시민들의 여가문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악산의 웅장한 산세

예로부터 관악산(632.2m)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전)에 속했던 산으로 전형적인 화산(火山)형태로 돋보이는 산이다.

서울 ,안양, 과천, 시흥 등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다. 주릉, 팔봉능선, 육봉능선 등 관악산이 거느린 산줄기는 예외 없이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부드러운 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애틋한 순정을 가슴 고이 간직한 것처럼 느껴진다.

 

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

무너미 고개는 고개가 낮아서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무’를 물.수(水)의 뜻으로 한정되어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라는 견해도 있다. 무는 곧 뭍(묻)의 간결형으로 육지(땅)를 뜻하는 경우도 많으며 평지에 완만하게 도드라진 고개를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양에도 관악산과 삼성산을 이어주는 곳에 즉 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안양을 이어주는 옛길인 ‘무너미고개’가 있다. 고갯마루를 정점으로 양편 모두 시원한 계곡이 이어져 여름철 산행으로 그만이다. 특히 이 길은 비탈이 거의 없고 안양 쪽으로 서울대 수목원이 자리 잡아 가족 단위 생태 산행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산행 코스는 안양예술공원에 시작하여 관악수목원을 지나 서울대 옆의 관악유원지로 넘어가는 게 정석이다. 안양예술공원 ~ 관악수목원 ~ 무너미고개 ~ 관악유원지 가는 코스로 약 11㎞정도의 거리이다.

하지만 관악수목원은 1967년부터 쭈욱 출입을 통제하다가 2005년부터 탐방을 목적으로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부득이 하게 우회로 무너미고개를 넘어야 하는 불편함을 등산객과 시민들은 호소하고 있다.

 

관악수목원 설문조사

안양시의회의 숲을 사랑하는 연구모임에서 2017년 10월에 조사한 「건강한 숲 조성 및 활용방안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관악산을 이용하는 시민들 1,3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관악산 수목원 출입통제에 대한 인식”에 대해 1,203명( 89.11%)이 “시민들에게 개방하라”는 의견이며, ‘안양예술공원~관악 수목원~ 무너미고개’ 숲길조성 필요하다는 의견은 1,166명(86.37%)으로 나타났다.

 

안양시민들은 바란다.

첫째, 기획재정부는 광양 백운산 남부학술림과 같이 서울대 관악수목원 무상양도 요구를 거부하여 안양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둘째, 비밀화원인 관악수목원 개방을 통한 안양의 자산인 고려백자 도요지와 안양옛길인 “무너미 고개”를 복원하여 시민들이 찾아가는 건강한 도시 숲을 조성해야 한다.

셋째, 도로와 시가지 등에 의해 단절된 관악산•삼성산~수리산 잇는 도심 생태길을 만들어야 한다.

[최병일]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 안양시의회 5분발언(2019.06.25)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시의회 최병일 의원 5분 자유발언문

안양시의회 ​제248회 2차 본회의(2019.06.25)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양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갈산·귀인·범계·평안·평촌 지역구 출신 더불어 민주당 시의원 최병일입니다. 

먼저 저에게 5분발언의 기회를 주신 김선화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님께 감사드리며 ‘스마트 행복도시 안양’을 위해 애쓰시는 최대호 시장님을 비롯한 공직자 여러분, 정론직필에 애쓰시는 언론인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저의 발언에 관심갖고 찾아주신 구교선 새안양회 회장님과 회원여러분, 실버모니터링 박종섭 단장님과 회원여러분, 특히 시정에 관심을 갖고 참석해 주신 안양시민 여러분을 환영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가 그분들의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안양시의 형성과정과 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에 대해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안양 향토애향단체인 ‘새 안양회’가 ‘우리동네 옛날이름 찾아오기’ 캠페인을 벌여 시민들의 의견을 묻고 옛날 이름 다시 찾기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취지라는 생각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시장님을 비롯한 참석하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시민분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문헌상에 등장한 안양은 475년 고구려시대에 율목군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최초입니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 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고려시대에 과주로, 조선시대에 과천 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14년에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이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이면으로 분류되었다가 1941년에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1973년에서야 안양시로 승격되었습니다. 

1979년 시조례 제340호로 안양시는 14개동에서 1994년, 7월 1일에 거쳐 31개동으로 분동이 되었습니다.

지명(땅이름)은 인간 활동의 공간적 배경인 장소의 특성, 즉 장소의 지리 및 역사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온 대표적인 언어 요소입니다. 

지명은 소유성과 개성이 있으며, 풍수적 요인을 고려하거나, 풍토와 특산품, 환경, 기후, 미래를 예견하며 짓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이나 그곳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을 기려 이름을 붙이는 등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지명에 나타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명은 어떤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주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행정편의상 안양동은 1동에서 9동으로, 석수동 1동에서 3동, 비산동 1동에서 3동, 호계동 1동에서 3동 등 숫자로 나열하여 분동을 하였습니다. 

인천, 안산, 파주, 강릉, 도봉구 등 각지에서 옛 지명을 찾는 운동으로 각 지명마다 예쁘고 정겨운 고유이름들을 찾아주고 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아파트 숲이 되면서 옛 모습과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서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행정의 편리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고, 자란 곳의 전통문화의 역사적 유래와 함께 옛날이름을 찾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전통과 정겨움을 이어나가고 나아가서 우리말의 아름다운 고어를 잊지 않고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내 이름이 아닌 숫자로 나를 불러 준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동네도 삭막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닌 고유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 

과거부터 내려오는 우리동네의 정겨운 옛날이름 찾아주기에 대해 주민들의 의견을 담아 재정비해 주실 것을 제안 드립니다. 

시장님께서는 제가 제안한 것을 서면으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혁]과천과 군포에 울려 퍼진 3·1운동(2019.06.18)

안양지역얘기/담론

 

중부일보 기사입력 2019.06.17 22:27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3·1운동은 근·현대 100년 관통한 역사의 큰 물결이었다
글 전문보기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1047


보편·중앙에서 비롯되어 특수·지방으로 확산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국내외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저항운동은 운동의 지향점(이념), 보편과 특수, 중앙이란 명망성과 지방이란 구체성과 특수성,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미친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그 중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에 걸친 1919년 3·1운동은, 일제에 기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모든 지역에서 전 계층과 집단 및 개인이 떨쳐 일어선 거대한 흐름으로 근현대사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과천과 군포는 2019년 현재 경기도에 소속된 별도의 독립시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과천현, 과천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시흥군에 편입되어 각각 과천면(현 과천시), 남면(현 군포시)에 해당하였다. 즉 3·1운동 당시 과천과 군포는 시흥군의 각각 1개 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근대 시기의 공동체 문화(인적·물적 교류, 5일장, 통혼권 등)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흥군은 경기도 21개 부·군 중 하나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3월 하순과 4월 초에 시위운동이 집중적으로 이어져 절정기를 맞았다. 이 기간 중에는 매일 크고 작은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양상도 일본 헌병과 군대와의 충돌 등 폭력투쟁으로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3월 초부터 중순까지의 운동이 경성(서울)이나 개성·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청년 학생의 선도 투쟁이 강했다면, 3월 하순 이후의 운동은 면과 리 단위의 농민의 참여가 확대된 대중 투쟁으로 발전해 간 결과였다.

100년 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일어난 3·1운동이 보편(세계사적 의미, 민족지도자)과 중앙(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비롯되어 특수(일제의 식민통치와 사회경제적 원인, 청년과 농민의 주도)와 지방(모든 군의 면·리, 5일장)으로 확산된 양상, 그리고 그 의미를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재구성해보자. 참고한 자료는 3·1운동 관련 재판기록,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1995), ‘과천시지 1권’(2007), ‘군포시사 별책3/군포 역사신문’(2010) 등이다.

 

과천의 3·1운동

관악산과 청계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농촌 마을인 과천에서 3·1운동이 전개된 것은 3월 말이었다. 현재의 과천지역의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운동은 3월 30일 일어난 과천면 하리(현 과천동) 일대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시위의 중심 인물은 청년지도자인 이복래(李復來, 1894∼1950)로 남태령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과천면 하리에 거주하던 이복래는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남태령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을 미리 돌렸다.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의 동리에서도 시위운동을 하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이복래는 태극기를 사전에 직접 제작하여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8시 경 남태령에는 약 5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군중들은 이복래의 주도 아래 만세를 크게 부르면서 과천읍내로 진출하였다. 이들의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과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현 과천초등학교) 등 관공서와 학교를 차례로 지나면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복래는 만세운동 이후 체포되어 징역 1년을 구형받았고, 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그대로 1년을 복역했다.

과천의 3·1운동이 남태령 시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과천의 걸어 다니는 향토사전이었던 이용진(李龍鎭, 1917∼2013)의 생전 인터뷰에서 이복래 이외에도 갈현리의 이형필과 박철영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맹흥섭의 경우는 과천에 거주하면서 인근 의왕의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렇듯 과천 지역 주민들이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던 안양·의왕 등 인접 지역과 잦은 왕래가 있었던 관계로, 만세운동이 당시 시흥군 관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군포의 3·1운동

3·1운동의 불길은 전국 주요 도시와 중소 도시로, 읍·면·리 단위의 농촌 지역으로 번져갔다. 시흥군 남면에 속한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3월 31일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이 날은 시흥군의 군포장이 서는 날이었다. 군포장은 당시 남면·서이면·의왕면, 즉 현 군포·안양·의왕 지역의 경계 지점이며 상업적 중심지였던 까닭에, 인근 주민들끼리 왕래와 교류가 빈번한 곳에 해당하였다.

군포장(軍浦場, 현 안양시 호계동)에 모인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규모 인원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구장(현 이장)을 중심으로 장날을 기화로 긴밀히 연락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인 시위대는 같은 생활문화권에 속했던 군포, 안양, 의왕 지역의 주민들로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약 1.8㎞ 떨어진 군포장역(현재 전철 1호선인 군포역, 1938년 개칭) 앞 경찰관주재소(현 군포1동)까지 시위 행렬을 유지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군 보병과 협력 출동하여 총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편 같은 날 군포장과 인접한 의왕면 고천리에서도 주민 8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반월면(현 안산시) 일대 주민 수 천명이 장날을 기하여 시위를 전개하면서 군포장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듯 군포장에서 시작되어 경찰관주재소로 향한 군포 지역과 인접한 지역의 3·1운동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각 면별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대대적인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운동의 의미와 평가, 그리고 100주년

이상 과천과 군포의 3·1운동은 대중투쟁의 양상으로 전환되어 가던 3월 하순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과 농촌의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과천과 군포의 지역적 특징으로 경성을 비롯한 안양, 의왕 등 주변 지역의 만세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근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과천과 군포 지역이 경성과 경기 남부를 이어주는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주민들의 생활권이 넓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과천과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구장을 비롯하여 농민, 청년 학생 등의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과천과 군포 지역 3·1운동은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성격을 더 한층 강하게 지닐 수 있었다. 이와 같은 3·1운동의 경험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직접적 결과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초석이자 디딤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제 타임머신을 돌려 오늘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에 초점을 돌려보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앙의 기념식을 비롯하여 전국 모든 시와 군, 그리고 면 단위에서도 기념식과 각종 행사 열풍이 이어졌다.

2019년 3월 1일 과천시 중앙공원 야외공연장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유족대표의 3·1운동 경과보고와 기념공연, 그리고 3·1절 노래 제창을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남태령에서는 이복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시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도 있었다. 군포시는 군포 3·1운동을 기리고자 군포역 앞에 ‘군포 항일 독립 만세운동 기념탑’을 2016년 3월에 건립하였다. 특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군포 3.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3월 30일 군포역 앞 특별무대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서 당시 만세운동 재연, 기념식, 그리고 ‘군포에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기념공연이 열렸다. 이외에 100주년을 기념하여 관내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를 조사하여 ‘독립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도 시행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신적 구심점에 해당하는 3·1운동을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다만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민족독립을 향한 독립유공자의 공적과 평가가 편견이나 분단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각을 포함하여 국가가 역사해석을 독점하려는 권위주의 잣대와 비상식이 아직도 우리 현실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헌법 전문에 규정한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계승…… 민주주의공화국이다”는 구절은 지난한 근현대 100년을 관통한 역사적 흐름이자 진리이고 모두가 믿어야 하는 상식이다.

 

주혁 한양대사학과 강의교수

 

[최승원]안양 옛 지명을 회복하자.(2019.02.11)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 옛 지명을 회복하자.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의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지명에 훼손이 시작 된다‘
1905년 안양역 개통시는 安陽역으로 사용하다가 강점후에는 古名이지만 安養역으로 바꾸었다. 이는 일제의 지명 개명의 시작이다. 1890년대의 안양촌이 안양역에 작은 가계가 생기면서 安養里가 되었다. 볕양은 생육에 관계되는 한자어로 밤이나 포도등 생육에 관계되는 것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 안양의 아름다운 이름이 사라진다.
꽃뫼 갈산 (일동). 석길벌 -석길평 (군내동). 금배벌 黙庵坪 (군내동). 꽃창이벌 충坪(안양리) 욧벌 了坪 (박달리) 박뫼주막 博山酒幕(군내동). 범고개주막 虎峴酒幕 (박달리). 한우물 天井 (군내동). 돌팍재 石坡峴(군내동). 옹기 土器. (박달리) 벌말 坪村(一洞). 인덕원평(일동). 벌말 坪村 (봉성리) 벌말 2개소 평1개소합 3개소에 펼처 있다.
일본식 한자지명을 통치수단으로 주임시킨다. 그리고 일본식한자로 작명하고 기록해서 올리라는 지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에는 양지촌이 양지동으로, 군포천은 군포장으로, 호계동은 호계리로 카타카나로 담안이라고 적혀있는 장내촌은 장내동으로 한자이름이 바꾸었으며, 때로는 점촌이 초막동으로, 구리점막이 당정리로, 덕현마을이 (道陽里)로 변경된 사례처럼 언 듯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려대 김종혁교수 과천시지138족)
안양시는 근현대에 와서 군사문화 등으로 마을이름을 1동~9동으로 개명하였는데 1동은 시대동, 2동은 안양동, 안양3동은 양지동, 6동은 수리동,,7동은 덕천동, 안양8동은 명학동(상록동), 석수1동은 삼막동, 석수2동은 신촌동, 석수3동은 충훈동, 박달1동은 필동, 비산1동은 임곡동 등으로 개명해야한다.
옛 지명을 회복하는 것이 마을 재생의 기본이다.

2019.02.11.월

최승원

[최영일]안양의 옛지명은 되돌아와야한다.(2006.06.07)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의 옛지명은 되돌아와야한다.
최영일 | 2006.06.07 
안양광역신문 기고에서( http://anyangnews.net/bbs/bbs.asp?exe=view&group_name=317&section=9&category=3&idx_num=6407&page=1&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strWriter&order_da=asc)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법이나 제도의 개정이 우리나라처럼 심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루어진 법제도의 개정은 어떤 형태의 논리에서인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시행해 왔으며 이런 개정문화에 우리는 상당히 익숙해있다.

법제도가 있으면 정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얇팍한 논리에 의해 쉽게 쉽게 잘도 바꾼다. 이렇게 쉽게 고쳐진 새로운 법제도는 얼마가지 못해 또 다른 개정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주  새롭게 바뀐 틀 속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하기가 쉽다"는 외국인의 지적대로 공무원이 하고 싶은것은 아무 저항없이 실행돼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그렇다보니 전통이란 정말 낯선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통의 상실엔 행정공무원들의 무지는 그렇다치고 전통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의 결여가 근본적인 문제이다.

고급행정 공무원들이 일방통행을 하다 보니 사회전체에 전통이나 관습이 희석되어간다: 정당명의 변경이나 교육제도의 개정 등은 아마 기록이 있다면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제기가 법제도개정의 정당성으로 발전하면서 구제도나 구법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행태는 왜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심할까? 왜 우리는 선진외국에 비하여 법제도가 전통적으로 보존계승 되어지지 않을까? 구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아서? 그렇지가 않다.

우리에게는 정신문화에대한 인식의 부족에 큰 문제점이 있다. 전통문화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전통의식이 사회전반에서 변두리로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전통의식이 희박하니 전통의 중요성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물질적 생활의 만족감이 그들에게 주관심사이지 전통은 귀찮기만 한 구시대의산물로 다가온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서울의 봉천동명칭을 바꾼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유는 단지 동네이름이 "촌스럽다"는 것이다. 아마 동네이름이 촌스러우면 동네 땅값도 안 오르고 이래저래 경제적 손실을 입으니 새로운 세련된 이름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모양이다. 동네의 유래나 전통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또다시 사라지는 순간  인것이다.

이런 단세포적 발상은 우리사회엔 이미 오랜 전 부터 만연돼 있다. 안양이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양지동 장내동 냉천동 주접동 등등 주옥같은 이름들이 숫자로 탈바꿈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내 부모가 지워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를테면 8번으로 불리우는 수모를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안양은 결코 70년대 불도저시절 허허벌판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123456789가 아니란 말이다.

안양은 원래 수리(음)와 관악(양)의 기가 안양천에  흘러 역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져 우리지역을 "편안한"고을로 불렀을 것이다. 즉, 우리 선조들은 동네이름을 지을 때 사건이외에 지형지세의 모양을 보고 역학적으로 해석하여 불러왔다. 어느 동네이름도 아무 생각 없이 지은 것이 없다. 그렇기에 동네이름에 전설이 깃들여있으며 그 전설은 마을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규정짓기도 하였다.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듯이 동네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마을의 겉모습이 떠오르는 이치이다.

이런 정신적 보존가치가 있는 동네이름이 편한 행정의 희생물이 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는다. 뿌리를 잃은 시멘트공간속에서 고향을 상실한 채 이방인으로서 표류하고 있다. 편한 생활을 위해 전통문화를 없앤 자리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그 위에 흙을 덮어 나무를 심고 있는데 정성을 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 문화 운운한다. 시멘트위에 심은 나무는 오래가지 않아 죽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오늘 당장 편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죽어가는 나무를 방치하고 있을 것인가? 

 

 

또 다른 글| 2007.05.13.

다음카페 동덕축구클럽에서( http://cafe.daum.net/ddscay/4OIb/671?q=%EC%95%88%EC%96%91%20%EC%98%9B%EC%A7%80%EB%AA%85 )

 

공무원,정치인들의 특성중의 하나가 사회제도를 바꾸는데 저마다 일가견을 갖고있는 사람들 같다. 바꾸는데대한 신중함과 고민이있는게 아니라 그냥 시대에 안맞는다고 쉽게쉽게 잘도 바꾼다. 그들에게 전통이란 관심도 없는것일까? 우리의 전통문화가 보존이 안된다. 실제로 정당명 변경과 교육제도변경등은 이미 기네스북에 올라와 있다.

얼마전 서울의 봉천동을 다른이름으로 바꿀 계휙이라는 기사를 읽었다.이유는 "촌스럽다"는것이다. 촌스러우면 바꾸어도 되는것인지? 그리고 그 이름이 왜 촌스러운것인지? 이런 전통에대한 의식의 무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고장 역시 이런 공무원들의 단세포적 발상으로 오래전부터 몸살을 앓고있다. 안양이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우리동네의 옛지명들이 123456789숫자로 개칭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장내동 냉천동 주접동 양지동 등등.... 동네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우리의 이름들이 어처구니없는 일부공무원들의 발상에 의하여 사라진것이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조상대대로 내려오던(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이름도 있지만-그렇다고 전통에서 왜곡된 동네이름은 없다고 본다)옛 지명을 없애다니? 우리선조는 지명을 역사적사실을 기리거나 그 고장의 주변지형과 형세의 해석에서 따와 붙여서 그지명을 고을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어떤 지명도 아무렇게나 생겨난것은 없다.그래서 지명속엔 저마다의 전설이 깃들여있으며 이런전설은 두말할것도없이 정신문화의 밑바탕이됐다.

안양은 허허벌판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 12345678이 아니란말이다.오랫동안 우리선조들이 지명에서 나와있듯이 자연을 벗삼아 살아 음양적 조화(수리-관악)가 가장 빼어나서 편안한 고을로 불러왔다.(편안하다라는 의미는 노자에서 조화롭다라는 말로 쓰임) 그 역학적의미가 각 동네이름에 구체적으로 깃들여있는것이다. 이런 정신적 중요성을 내팽겨친체, 1234...로 바꾼것이다. 생각없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싫다. 정신은 사라지고 편리와 슬럼화로 표류하는 안양. 우리에겐 전통을 중시하는 왜 일관된 철학이 없을까? 우울하기만하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제일먼저 다가오는 인상이  도시가 슬럼화되어가는 느낌이다. 왜 안양이 슬럼화 되어가지에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수도권도시의 특성인 인구과밀화 문제 이전에 "전통에대한 무관심"에서 파생되는 "전통건물의 소멸화"가 주 요인이라본다. 지명 변경 역시 이런 차원에서 발상된것이다. 우리에겐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의 안양은 시공무원들의 구호처럼 전국에서 가장살기좋은 도시(뭘갖고 얘기하는지는 몰라도...)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 사라진 도시에 그냥 아파트나 올리고 시세수입만 많이 거치면 시관리하기 편할지 몰라도 문제는 정신이 있어야 할 것을 없애버린곳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무관심하다는것이다. 다가오는 후세대들이 언젠가는 걷어내야 할 뼈아픈 그늘이 길어만 져가는것이다: 전통이 사라진 도시는 정서가 존재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유럽을 보면 알수있다. 왜 갈수록 안양이 범죄화 되어가고  특히 청소년문제가 다른도시에 비하여 유난히 심각해지는지 시공무원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청소년들에게 정조대왕행차를 맞이한다(주접동)는 사실을 가르칠 수없는 이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통을 보존시킬수있단 말인가?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이를테면 부모님이 지어주신 내이름 "영일"대신에 "5번"으로 호칭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싶지않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