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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고려시대 창건한 안양사(安養寺)와 현존하는 안양사 관계

안양지역얘기/담론

 

고려시대 창건한 안양사(安養寺)와 현존하는 안양사 관계

고운 전만수 글 전문 http://blog.daum.net/mindle49/18313718

 

원안양사 터에서 동쪽으로 200m를 가서 다시 북쪽으로 200m 쯤에 이르면

‘안양사’라는 돌기둥 하나가 맞이한다. 또 조금 오르면 일주문이나 금강문은 없고 다이야몬드형으로

생긴 바위에 안양사라고 새긴 표지석이 우둑 서 있다. 이 표지석은 현 주지스님의 글이다.

 

이 안양사는 염불암(현재 염불사) 주지스님이셨던 박기석 스님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분은 당시

염불암과 함께 두 개의 절을 사유(私有)하고 있었다.

 

이를 1955년도에 성인(成人, 비구니)스님께서 인수 받았다. 인수 받을 당시에는 현 요사 채와

종무소 자리에 작은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있었으며, 현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다.

 

성인스님은 각고 끝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천불전을 신축하였으며 1983년에는 심검당을 지었다.

성인스님이 1983년 입적하자 영심스님(현 안양사 주지)이 뒤를 이었다.

 

영심스님은 1945년생으로 6살에 성인스님의 인도로 불문에 들어 와 10살에 이곳 안양사에 성인스님과

함께 들어왔다.

 

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시고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셨으며 종전 대웅전

자리에는 명부전을 모시고, 천불전을 16나한전으로 개축하면서 산신각, 범종루, 대형 미륵부처님상을

2004년까지 완성하였다.

 

안양사 입구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안심당은 경기도청 직원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5급 사무관 시

험준비를 하던 곳인데 안양사에서 매입하여 안심당을 세웠다.

 

안양사 대웅전 앞에는 승탑과 탑비의 귀부(龜趺)가 남아있다. 승탑은 탑신과 기단중석도 없고 하대석은

2단의 8각 지대석으로 복연으로 장식하고 상대석은 앙연으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으로 추녀가

있고 3단의 옥개 받침위에 올려 있다. 양식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규모나 정교함, 그리고 비문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큰스님의 탑으로 생각된다.

 

승탑 옆에는 경기도지방문화재 제93호인 귀부가 남아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있는데

몇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이루고 굄대와 귀부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전체적인 모양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이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이다. 승탑주인공의 행적 등을 담을

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승탑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탑이나 비의 제작연대가 원 안양사가 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고승이셨을 것이다.


원 안양사와 현 안양사의 관계는?

 

통일신라시대인 827년경에 창건된 중추사 터 위에 왕건이 900년에 안양사를 세웠으며, 이

사찰은 조선 15세기 중엽까지 존재하였음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안양사와 현재의

안양사와는 어떤 관계일까? 즉 어떻게 계승되어 왔을까?

 

중초사지에 안양사를 창건한 것은 세운지 80여 년이 된 중초사가 천재지변, 화재 등 알 수

없는 사유로 폐사되고 그 곳에서 노스님이 소규모의 사찰을 운영하던 때 왕건과 인연이 되어

중창 내지는 창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양사는 조선의 억불에 눌려 태종, 세종 때에 유생들에 의하여 완전히 폐사되었는데

뜻있는

스님들의 원력으로 중건하였으나, 문종 때 다시 시련을 겪는다. 이 때 사찰은 폐사를 맞이

하였으나 현재의 안양예술공원 일대가 모두 안양사의 경지였을 것이며 현 안양사 자리에는

안양사의 창건자인 능정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있었거나, 아니면 큰 스님의 거처인 암자가 있었는데 그 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곳에 승탑과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1899년에 작성된 경기도 시흥군읍지나 이전의 해동지도, 금천현지도 등 조선말의 기록에

호압사와 삼막사, 망월사, 염불암 등은 보이나 안양사는 안 보인다.

 

아마도 현재의 안양사는 일본제국주의 때 요사 채와 두 간 정도의 전(殿)에 부처님, 또는

지장보살 정도를 모신 소규모 사찰로 운영되던 것을 1955년 성인스님이 인수한 후 현

주지스님이신 영신스님이 오늘과 같이 사격을 갖춘 사찰로 일으켜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 안양사는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사이며, 비구니스님의 사찰이다. (031- 471 - 4848)

[조성현]‘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2018.07.11)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문화논단 <안양의 인물과 교육문화>

‘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

독암조종경, 창강조속을 배향한 호계서원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 목 차 -

 

□들어가는 말

□서원(書院)의 개요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한구(趙漢九, 1833~1965)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호계(창강)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참고문헌

 

 

 

□들어가는 말

 

호계서원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지역 교육기관으로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문헌 속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안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호계서원의 현위치는 ㈜효성 안양공장의 동쪽으로 서울의 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하부공간의 구,신진자동차학원(안양장례식장 인근)의 북쪽 나지막한 야산지역으로 추정되며 1990년 중반까지도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호계서원은 인재육성과 정신적 구심역할을 하였던 안양선비들의 최초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잊혀져가는 안양의 역사(교육사)를 바로 세우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가치 있는 일은 우리의 몫이며 사명이다. 호계서원과 관련된 구술을 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둘씩 떠나가고 호계서원과 관련된 주춧돌, 초석, 와편류 등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호계(창강)서원지의 흔적도 사라지고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점 여간 아쉽다. 관련 문헌 및 사료가 있더라도 전문적인 식견으로 자료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의 안양시민은 호계서원에 대해 관심조차 없고, 알 필요성과 가치를 못 느끼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인근 안산시는 잊혀져가는 인물인 일제강점기 최용신 선생을 발굴하여 ‘최용신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녀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장을 마련하여 무한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생은 꽃다운 나이 지병으로 돌아 가셨지만 농촌계몽운동가의 모델로서 육성한 안산시의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인접 과천시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살려 ‘추사기념관’을 설립하여 교육 및 문화관광자원 콘텐츠로 적극 육성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시도 타도시 사례와 같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상가, 계몽가, 교육가 등 역사적 인물 및 관련 유적지 등을 발굴하여 묻혀 사장되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향토자원으로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에 배향된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이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섬긴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년에 자기가 거주했던 ‘호계리, 호계촌사’를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시어로 ‘호계’를 찬미하며 노래했던 지역을 사랑했던 선비이다. 조종경의 선비정신, 지역사랑 정신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철저한 수양과 도덕으로 무장한 조선유생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덕목과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화에서 잊혀져가는 유교문화를 복원하여 유교의 가치와 덕목 등 장점을 살려서 지역에 계몽함은 가치 있는 일이며 우리사회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 논고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문헌검토, 인터넷검색 등을 통해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안양교육 발상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 위치에서 짚어보고 미래 발전방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또한 독암선생이 남긴 유고집 속의 시어를 분석 및 가공하여 그 당시의 호계일원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종경이 독암유고집에서 말하는 ‘호계’이외에 더 나아가 ‘호계동의 지명유래’, ‘호계동(안양)의 호랑이’를 포괄적으로 문헌 고찰하여 호계동을 실감 있게 그리고자 하였다.

단 부족한 실력 탓에 안양문화원발간 안양문화11호(3부,‘호계서원’파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요약수준으로 알기 쉽게 발췌 및 재가공하여 정리했음을 밝힌다. 덧붙여 본 노고를 수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도해주신 경기향토문화연구소 김정석 연구위원(문학박사, 수일재연구소 소장)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본 논고가 자료공유를 통한 기억 속에서 멀리 잊혀져가는 지역교육의 발상지와 뿌리를 찾아가는 단초를 마련하고 더불어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사회의 활발한 연구와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 부족하지만 본 논고가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어 지역에서 점차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미래발전방안을 고민하는 장(場)으로 연결되는 가교(브릿지)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서원(書院)의 개요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사림이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이다.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38)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안향을 봉사(奉祀)대상으로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에는 도동서원(대구광역시소재, 보물 제350호), 옥산서원(경북 경주시소재, 사적 제54호), 소수서원(경북영주시소재, 사적 제55호), 도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170호), 필암서원(전남 장성군소재, 사적 제242호), 병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260호)등이 있다.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호계서원 창건 문헌기록:

여지도서(영조 1757년 이후), 서원지(1799), 과천현읍지(1899), 증보문헌비고(1908), 연려실기술(1912), 전고대방(1926), 경기도서원총람(2007)
 

 


 

서원은 학문의 연구와 선대의 명현(선현)을 추모하며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설립한 인재양성기관으로 향사 및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다. 서원은 국립지방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달리 사설적인 교육기관이다.

호계서원은 ‘여지도서’ 등 여러 문헌 속에 등장하는 데 기록 속에는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한 숙종 42(병신, 1716)년 창건했으나 현판을 내려 받지 못했다.

김계명(金啓明) 등의 상소에 의해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호계서원의 제향인물은 조종경과 조속이다. 기록에 따라 창건연대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년(병신, 1716)이 등장하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계서원은 설립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98년 전(또는 333년 전)창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창강은 조종경의 증손자인 조속의 호이다(창강 조속의 증조부는 조종경이다).

서원의 옛 위치는 안양장례식장 부근(구, 신진자동차학원) 동쪽 약 100미터(호계 2동 산 43번지)지점으로 추정된다. 안양시의 지표조사결과 당시 초석(礎石)과 와편(瓦片)이 수습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7년(1870) 봄의 어느 날 폐원(훼철)되었다.

호계서원에 배향되었던 조종경과 조속의 후손들은 호계서원보다는 창강서원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조종경 보다는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조속을 더 존경하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로부터 받은 조종경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조종경의 올곧은 성격을 중시하기보다는 증손자 조속에 대한 평가가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창강은 호계서원(과천), 수곡서원(광주), 건암서원(서천), 백석사(白石祠, 김제) 등 여러 곳에 제향 된 점으로 볼 때 당시 덕망과 실력을 갖춘 유명 선비로 보인다. 한편 조선 숙종 42년인 1716년 창강서원과 비슷한 시기 과천군내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 사충서원(思忠書院)과 함께 지방교육기관으로 과천향교(果川鄕校)가 지방교육의 역할을 분담하며 지역 인재양성을 선도했다.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은 풍양인으로 아호가 독암(獨庵)이다.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의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1530년(중종25) 이임(李任) 등이 동궁(東宮, 세자궁)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론(士論)을 일으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중요하려하자 조종경은 반대하다가 중종26년(1531) 심정(沈貞)의 일당이라는 죄목으로 파직 당했다.

조종경은 김안로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조선시대 전한(典翰) 등 관직을 두루 엮임 한 바 있는 인물이다. 김안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 제2 繼妃 尹氏)를 폐하려다 실각하여 1537년(중종32) 진도로 유배된 이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조종경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과천현 호계서원에 제향 된다.

독암유고 속 옛시문을 분석해보면 그는 자기가 이미 일찍이 보유했던 대지(부지)가 호계동에 있었지만 관직을 따라 여기저기 각처로 이동하면서 그간 호계동에 터전을 잡지 못했다. 그는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36세 관직에서 파직된 이래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안양시 호계일원에 머물며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일반적으로 ‘촌사’는 풍류나 자연을 즐기고자 조성한 공간을 말하며 오늘날 별장에 해당된다. 그는 집 뒤 작은 언덕에 정자(별장)를 짓고 집의 편액을 ‘독암(정)’이라고 했다.

그는 호계촌사 별장에 묻혀 살며 술(酒)과 시(詩)로 시름을 달래며 세상일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한 가운데 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글(유고집)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안양 호계촌에 묻혀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애틋한 마음과 심정을 담은 주옥같은 한시를 다수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그의 생각을 담은 한시집인 독암유고(獨庵遺稿)저술을 통해 전해온다. 독암유고는 독암 조종경이 은둔하면서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말한다. 독암유고는 선조20년(1587) 아들 온양군수 조정추(趙廷樞)가 유고를 활자로 초간 이래 후대 후손들에 의해 3간 된다. 독암유고 속에는 당대 호계지역의 정서와 풍경, 시대상 등을 살필 수 있는 서정시들이 다수 있어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사견)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속(선조28~현종9)은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중기의 서화가(문인화가)이다.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의 호(號)는 창강(滄江)·창추(滄醜)이다. 본관 풍양(壤)이며, 저술로는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륜)의 셋째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부친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했으며 효종때 효행으로 발탁되어 진선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장령(掌令)·진선(進善)을 지낸 적이 있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른다. 창강 조속(선조28~현종9)은 사후 숙종21년(1695) 청백리에 녹권 되고 조선 인조때 장령과 이조참판(이참, 吏參)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조선 숙종 42년(1716)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서원을 세우고 제의를 올렸다. 창강은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배향되었다.

경학(經學)과 문예·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영모(翎毛)·매죽(梅竹)·산수(山水)를 잘 그렸는데, 특히 영모는 중국풍의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는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사군자와 수묵화조(水墨花鳥)에 능했다. 그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金櫃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남종화풍의 깃든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등을 남겼고, 대표작으로는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매작도(梅鵲圖, 간송미술관소장)’, ‘흑매도(黑梅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등이 남아있다. 글씨로는 ‘조회양은렴비(趙淮陽恩廉碑, 扶餘)’ ‘좌찬성이계맹비(左贊成李繼孟碑,金堤)’등이 전한다. 역대 명필들의 서체에도 관심을 보여 금석문(金石文)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방면의 선구자로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다. 조선 인조 때 화가인 창강 조속은 미술사학, 특히 미술사 회화사분야의 유명인사이다.

 

□조한구(趙漢九, 1833~1965)

조선총독부 서이면장을 지낸 조한구(고종20년~1965)는 독암 조종경의의 후손으로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조동순(趙東舜)의 셋째아들로 호계동(방죽말 27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행정가로 자는 장일(章日)이요 호는 금운(錦雲)이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의 초대 면장부임 이래 1927년 1월 서이면(안양면의 전신) 발전을 위해 시가지확장, 안양의 교육시책을 위해 모범사구(私塾, 사설서당, 글방)설치, 농촌진흥을 위해 양잠·축산·임업 등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보통농사를 보급하였다.

1932년 안양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고뢰 정태랑으로부터 1만평의 토지를 기부 받아 조선직물(주)를 현,대농단지에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는 등 안양의 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안양이 삼성산과 관악산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점에 착안하여 1932년 삼성천변(구,고바우식당앞)에 석수동수영장(안양풀)을 설치해 우리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지만,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등을 설득해 삼성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안양풀)을 조성하고 1933년 수영장을 개장한 되서 비롯되며, 안양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단초가 된다.

안양예술공원 구,고바우식당인근 옛날 삼성천 수영장초입에는 당시 일본어로 ‘(안양 풀 pool)'이라고 세운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된 암반의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조한구서이면장 등 행정가들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끌어 올리는 등 지역발전에 기여한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군포초등학교와 안양초등학교 설립에도 힘써 지역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안양금융조합장에 재직하면서 안양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또한 1936년 4월 1일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상도리와 영등포읍(영등포리, 당산리, 양산리)가 서울시 확장책에 의거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자 당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 청사를 안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시흥군청사이전군민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광복이후 시흥군 청사가 안양(현,뉴코리아호텔자리)으로 이전케 함으로서 안양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시흥군 청사가 오면서 경찰서 등 각종 행정기관이 입주하면서 안양1번가는 행정타운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현재 안양1번가에는 당시의 옛,서이면사무소가 복원되어 안양시 행정사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한구 초대면장이 부임했던 구,서이면사무소(경기도문화재자료 100호)에는 당시 사용하던 행정소품 및 일제강점기관련 안양지역 항일운동사료, 안양지역 독립투사들의 유품,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망라하여 전시·진열되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직후 서이면을 우량 면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면서 황무지인 안양발전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는 국민회시흥군지부 감찰부장과 시흥군보승회 조사부장 등을 거쳐 1949년에는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하여 격동기 안양건설을 견인하였다. 하지만 1930년 1월 28일 조선총독부 공훈자 명단에 올라가 있고 서이면이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로부터 1933년 6월 30일 한차례 더 훈장을 받아 친일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란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의 묘지는 호계동 방죽말(일제강점기 방앗간자리 옆 큰 느티나무 부근)에 있었는데 도시화 건설로 1977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지라 친일파 논란이 다소 있지만 그는 행정가로서 안양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지역 발전을 견인한 지역의 선배이다. 친일논란은 다소 있지만 안양의 지역선배로서 안양의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려해볼 때, 그에 대한 재평가도 조심스럽게 필요해 보인다. 한편 일제강점기 뼈아픈 역사이지만 독암의 후손인 행정가로서 안양발전을 견인하며 근대 안양발전의 기틀을 다진 조한구 서이면장을 안양의 역사 속 인물로 다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고,

병신년(丙申年) 창건되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창건: 숙종7년(1681)창건,

제향인물: 조종경, 조속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말(마을), 샛터(新基)말,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가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이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칭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 속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바, 당시 기록 속 ‘과천현 호계리’라는 공식지명이 오늘날까지 자연지명(또는 행정지명)으로 계승됨을 알 수 있고, 오늘날 ‘호계’라는 자연지명이 지역의 호랑이서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은퇴 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에 거주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그가 남긴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안양과 관련된 지명에 호랑관련 지명이 흔한 편이지만 문헌 속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안양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반가웠다. 그는 36세 관직에서 파직이후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독암조종경(1495~1535)의 생몰연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에는 지역에 호랑이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가 많다(원어: 日出籬邊多虎跡)”는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호계촌사(별장) 주변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호계동’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당시 조종경이 거주하던 지역에 호랑이가 많았고, 또한 그가 안양지역(호계동) 거주이전부터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1757년이후) 등 여러 문헌에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이 있다’라고 기술한 문헌상 정황으로 보아 영조 1757년경에도 지역의 호랑이가 유독 많은 지역만의 특성을 감안한 ‘호계’라는 지명은 사용되었으며 또한 조종경은 자기가 세운 정자의 이름도 호계리의 이름을 차용하여 그의 사저를 ‘호계촌사’라고 부른 연유가 된 것 같다. 문헌 등 사료를 통해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인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당시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호랑이가 지역에 많이 있었고 오늘날 ‘호계’라는 마을지명도 호랑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독암 조종경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금의 안양시 호계동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며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독암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호계가(원어, 虎溪邊)에 머물며 말년의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은일(隱逸)적 삶을 누렸다.

그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머문 별장인 호계촌사 앞에는 하천이 있고 뒤에 야산이 있었다. 부지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

한편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이 저술한 ‘과천호계농장잡기(果川虎溪農庄雜記)’를 통해 호계촌사의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다.

집은 서면 호계리에 있고 과천 관문에서 15~16리 떨어져 있다. 동남은 청계산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큰길에 임하여 있다. 독암정은 집 뒤 작은 언덕위에 있는데 언덕위에 서쪽으로 안양평과 금천을 경계로 바라보며 서남으로 수리산, 장항, 명악암 등지를 바라본다.
 

 


 

독암 조종경이 남긴 옛 시문(독암유고) 속에 등장하는 시어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 및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조종경은 독암유고에서 남긴 한시 209편 중 약 40여편이 호계일원에서 은거하며 읊조린 작품이다. 조종경은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40여편의 한시작품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 특히 그가 거주하던 당시 조선시대 과천현 호계리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의 시풍은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경향이 보이며 자신의 마음을 담아 풍류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그의 옛 시문 속에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촌사(村舍)’, ‘호계(虎溪)’라는 자구가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와 연관된 연관단어(溪邊, 山亭 등)들이 많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호계 및 연관단어가 실린 한시는 약 40여 편에 이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계촌사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 집 ‘독암유고‘의 고찰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짚어본다. 독암은 ‘호계(현, 안양시 호계동)’를 사랑했고 이러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한시가 ‘독암유고’집을 통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시어 속에서 독암이 그려낸 당시 ‘호계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원문참조).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등에서 발췌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산촌에는 기이한 일 많도다.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다.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 계속되는 쌀 구걸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리 떨어져 있다.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창강서원은 210평 정도에 민가가가 6호가 있었으나 관가와 거리가 멀고 또한 산속이라 도둑의 출몰이 극심했다고 한다.
 

 


 

▲독암유고 29쪽 중 일부(‘卽事’편, 즉사, 문득일이 생각나서)

계변인적녹초과(溪邊印迹鹿初過),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고

잠녀촌촌수죽롱(蠶女村村收竹籠),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농부처처편춘전(農夫處處遍春田),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독암유고 30~31쪽 중

문외이심연독비(門外泥深燕獨飛),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

토박민빈고소전(土薄民貧古所傳),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초황교외소인연(草荒郊外少人烟),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미인촌맹걸미련(미忍村氓乞米連),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의 쌀 구걸

▲독암유고 34~35쪽 중(‘新居’, 신거, 새시골집)

석전하처차우경(石田何處借牛耕)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독암유고 37쪽, 정거삼수 중(靜居三首, 조용히 살며)

춘심청두견(春深聽杜鵑),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상지제협로(桑枝齊夾路),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견폐소리외(犬吠疎籬外),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독암유고 38쪽 제호계신거 중(題虎溪新居, 호계의 새집에서)

계변인산어연정(谿邊人散漁烟靜),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청계산재동근수리(淸溪山在東僅數里)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 리 떨어졌다.

▲독암유고 57쪽 야중풍우우서(夜中風雨偶書, 비바람치는 한밤 중 우연히 쓰다)

한계하사강명신(寒鷄何事强鳴晨),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청계백악개산명(淸溪白岳皆山名),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독암유고 75쪽 山亭日暮(산정일모, 해 저무는 정자에서)

낙일어초속속환(落日漁樵續續還),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독암유고 79쪽 산촌(山村)에서

산촌기사다(山村奇事多)라, 산촌에는 기이한 일이 많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계서원(창강서원) 옛 문헌을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학술연구 작업이 뒤따라야 하겠다. 안양문화원간행(2012년 12월 발간) ‘안양문화 11호(53~66쪽 참조)’를 열람하면 번역되지 않은 ‘창강서원중수통문(滄江書院重修通文)’, ‘상량문(上樑文)’등 많은 미번역 문헌자료들이 있다. 조종경이 남긴 ‘독암유고’ 옛시문도 다수 번역되지 않아 누군가 전문가의 손길로 한시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독암유고’와 ‘호계(창강)서원’관련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논의기구가 있으면 좋겠다.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지역 관악산과 삼성산 및 호계동에는 호랑이가 있었다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과 시흥 등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쪽에도 험준한 고개에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시 관양동 수촌마을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안양 및 안양 권에는 호랑이(범)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고 호환을 방지하고자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도당제 제례의식이 아직까지 계승되어 내려오는 정황 등으로 볼 때 안양지역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다(원문,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안양지역에는 호랑이가 여간 많았음을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虎患)와 관련된 민속신앙 – 수촌마을 도당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도당제(都堂祭)가 매년 추수 후 늦가을 관양동 현대아파트 뒤 관악산중턱 제당에서 열린다.

도당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으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얀 제례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은 단앞에 자리를 깔고 산위 웃당(당집)과 제단석이 있는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 신목)인 느티나무(수령 540년, 보호수)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도당제은 호환(虎患)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으로, 도당은 마을사람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을 돕는 존재로 여겨진다.

 

△범고개이야기 전설

범고개는 박달2동에서 시흥시 목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예전에는 고개가 험하고 으슥하여 강도나 도둑들이 득실거려 ‘도둑놈 고개’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고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조선조 중엽 범고개 마을의 윤씨성을 가진 한 부자의 시종(하인)을 호랑이가 물고 고개를 넘어 간데서 전래됐다는 설과 고개 중턱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 길을 보고 있는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고갯길이 험하고 나무가 울창해서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 고개를 넘어가려면 어른 5명 이상이 모여야 지나갔습니다.

이 고개는 1976년 안양에서 수원, 인천 간 도로 포장공사 때 아스팔트가 깔렸으며, 1991년에 박달로 확장공사로 4차선이 되었습니다.

 

△남태령과 호랑이

 

남태령은 서울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 가는 고개 길이다.옛날 관악산 호랑이가 나오는 고갯길로 유명한 곳. 옛날 한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여서 넘었다는 험한 고갯길이다

(출처: blog.naver.com/55072381/22000668619)
 

 


 

남태령 호랑이의 전설(동네방네이야기)

불과 수 십년 전만해도 남태령 고개는 비포장도로에 차들도 많지 않던 시절...

그 이전부터 동네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으니 남태령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다.

호랑이는 민첩하기로 유명하고 몇 미터씩 뛰어넘는 재주가 있으며 주로 밤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란다. 남태령 인근에는 범바위, 호랑이굴(관악산쪽) 등 호랑이에 대한 이름이 유독 많았었는데 그 흔적은 호랑이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철에 남태령 고개 주변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많이 발견되었었다. 호랑이의 발자국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난히 크다.

옛날에 사냥꾼이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산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데 한쪽은 관악산과 이어져 있고, 또 한쪽은 우면산을 지나 청계산에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참을 따라가 보면 발자국이 끊겨져 있어서 허당을 치기 일수 였다. 생각해 보건데 멀리 넓이뛰기를 하거나 뒷걸음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무꾼이 간혹 깊은 산속에서 나무하다가 호랑이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관악산 쪽에서 암놈이 서식하고, 청계산에서 숫놈이 서식하여 남태령에서 조우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호랑이가 급격한 산업화로 차량이 많아지고 포장도로가 생기고 군부대의 철책이 들어서는 등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동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호랑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이 멸종해 가고 말았다. 남태령 고개 도로 근방은 과거 야생동물의 시체가 엄청 많았었지만 이마저도 요즘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출처: blog.daum.net/lineme/10596936 남태령 전원농장 블로그 내 검색

농부의 지혜 2007.02.05 23:32

 

△지명 속에서 호랑이 관련성을 보이는 지명

▲안양시 -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동), 호암초교

▲금천구(시흥동) - 호암산(湖巖山), 호압사(虎壓寺), 호암로

호암산성(虎巖山城, 사적 제343호, 통일신라6~7세기, 문무왕 12년경 추정)

범계는 호계(虎溪)의 호(虎,호랑이)를 순 한글 말로 표기한 것이고 계(溪.골짜기)는 골짜기를 의미하므로 호랑이가 많은 골짜기를 ‘범계’로 풀이할 수 있다.

 

△문헌(독암유고) 속 등장하는 호랑이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지명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호계 1동- 덕고개(德峴), 덕현마을

군포신사거리에서 과천방면 약 400미터지점 흥안주유소 일원으로 예전에는 큰 고개가 있어 이 일대를 덕고개(德峴)라 불렀다. 오늘날 주변에 덕현초등학교가 있는데, 이는 덕고개(덕현)에서 따온 학교이름이다. 이 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라 현,호계시장 북쪽 100미터지점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 데, 지금도 이 지역 자연마을 지명을‘수풀아래’라 부르는 연유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2일 마을의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정제(德峴井祭, 덕고개우물제, 마을제, 민속신앙)를 지내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한그리스인회보’에 다르면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추정된다.

 

△호계 2동- 방축말(방죽마을, 房築洞)

방축말은 안말과 새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 과천군 하서면의 관가가 있었고 그후 1914~1917까지 시흥군서이면사무소가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조선시대 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둑(제방)을 쌓았는데, 그 주변이 취락지이므로 방축말(제방이 있던 마을)이라 부른 연유가 되었다. 숙종때 발간된 이천읍지(異川邑誌) 제언조(堤堰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堰在縣西南門十八里)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지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연대는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고,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 제언조(堤壙條)에 호게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고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 길일을 택해 방축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오다가, 1970년대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효성안양공장외곽 도로(호계도서관 방면)에 도로명으로 ‘방죽로’, ‘방축사거리’가 있는데 이는 자연마을지명인 방축말(방축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 안양의문화재, 자료제공 안양시, 참고:안양시지 )

 

△호계 3동- 포도원

구,군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 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경향포도협동조합’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자 주변일대가 포도단지로 변모되어 한때 안양포도산업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도시화 바람이 불어 주택지로 변모했다.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호계서원(虎溪書院), 경북 안동시소재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다가 광해군 12년(1620)에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2분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평면상으로는 一자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은 방이다.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 칭 호계서원 (虎溪書院)

경상북도유형문화재제35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73.08.3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번지 , 84-4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호계서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문화예술과 054-840-5230

자료제공 문화재청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서원.

 

도봉서원터는 서울(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으로 꼽힌다. 도봉서원터는 1573년에 창건, 조광조의 위패를 모셨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도봉서원의 모습은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봉산 등산로 계곡 한편에 사당만 남아 있다. 건국대박물관 소장, 도봉서원도 그림을 통하여 창건초기의 도봉서원 모습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道峯(도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송시열은 1723년(경종3) 중앙의 정치세력 변화로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배향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이 설치되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6·25사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700여평 등이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도봉서원 [道峯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전기

성격 교육기관, 서원

건립시기·연도 1573년(선조 6)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282-329

자료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고서원(臨皐書院), 경북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据) 등의 사람들이 칭송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 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 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齎), 서재는 함육재(涵育齎),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및 경외에는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출처: 포털 바로가기 임고서원 http://imgo.yc.go.kr)

 

△물계서원(勿溪書院), 경북 창녕군 소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 성삼문, 성담수, 성수침, 성운, 성제원, 성혼, 성윤해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성삼문(成三問)·성담수(成聃壽)·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成汝完)·성희(成熺)·성수경(成守慶)·성문준(成文濬)·성람(成灠)·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후기

성격 서원

건립시기·연도 1712년(숙종 38)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물계서원 [勿溪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출처: 디지털광명문화대전

[정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조선후기 서원 터.

[개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에 역대 명현을 모시고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함께 지닌 지방의 사설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는 전학 후묘의 배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재 양성과 유교적 향촌질서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원은 붕당의 정치적 이해를 지닌 역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1865년(고종2)부터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서원의 강제 철폐령을 내렸고, 이에 47개의 대표적인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충현서원 역시 이 시기에 함께 철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오리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퇴해 살면서, 처음에는 이곳 금천현의 촌로들과 상의하여 강감찬과 서견을 기리는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 이 고장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면서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여, 삼현사(三賢祠)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1676년(숙종2) 왕이 사액(賜額)을 하였다 이후 정조 때 사액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1856년(철종7)에 개축되었다. 현재 서원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 있다. 충현서원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원익의 구택이 있던 곳으로, 서원 터 아래에는 ‘탄금암(彈琴岩)’이라는 글씨가 있는 바위가 있으며, 이전에는 관감정(觀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현재 민가 형식으로 지어놓은 기와집 건물 바깥채에는 관감당(觀感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세기경에 건립되었다는 오리영우(梧里影宇) 1동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서원 터에는 예전에 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함께 초석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복원 사업을 하면서 위쪽으로 삼상대(三相臺)와 풍욕대(風浴臺)를 건립하였다. 충현서원지는 1985년 6월 28일에 경기도기념물(제8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왔으나, 2010년 경기도기념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을 배향했던 서원지이다. 주변에는 이원익의 유품과 정신을 기리는 전시관이 함께 있어 이원익의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잘 간직한 장소라 할 수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80호

문화재 지정일 1985년 7월 29일

소재지 주소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4 [오리로347번길 5-6]

이칭/별칭 삼현사(三賢祠),충현사(忠賢祠)

유형 유적/터(지정면적 450㎡)

시대 조선/조선 후기

건물 건립시기/일시 1658년

소유자 충현문화재단

집필자 김지석 안양시문화재전문위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사진제공(자료제공): 안양시

 

선현의 배향과 교육을 담당하던 호계서원의 터전은 호계동 ㈜효성안양공장 뒷산에 있는 호계근린공원 매봉광장 아래쪽 고가도로 하부지역이다. 구,신진자동차학원 동향 1백여 미터 지점에 자리했던 안양지역 유일한 서원인 호계서원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생기면서 공사로 인한 추가적인 멸실로 서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정이다. (소재 :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산43번지)

 

□호계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최갑환(崔甲煥, 2014년 94세)옹- 지역원로(안양원로회 회원)

안양시 호계동 방죽마을에 거주하면서 호계서원 주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갑환원로는 “호계서원터에 안양교육의 발상지로서 상징을 담은 표석(팻말)이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에 널린 와편과 주춧돌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매우 안타깝다고 토로하면서, 호계서원터에 넓은 공간과 밤나무 5~6그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수일제연구소장)

(문학박사, 다음카페 ‘수일제’ 운영자)

퇴색되는 도덕과 숭조사상(崇祖思想)을 가르치는 안양유교문화교육의 장이 필요하다. 체계적 사료의 정리와 함께 안양유일의 서원인 호계서원을 옛터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올곧은 선비의 정신 및 유교사상을 계승 및 육성하는 요람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지에 담긴 일화를 구술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 둘씩 떠나감으로서 그 문화적, 역사적 발자취도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최소한 서원지를 알 수 있는 표지석(表石)과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표석과 안내판이라도 최소한 설치하고 향토문화자원 컨텐츠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관련 사료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이 필요하고, 노출된 자료 중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사료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사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점 있다. 안양 유일의 서원지에 있었던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오늘날 혼탁한 시대에 있어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며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성현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

서원은 명현의 제사와 교육기능을 지닌 지방사립교육기관이다.

독암 조종경과 창강 조속을 배향했던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은 안양지역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말년 안양에 살았던 독암 조종경은 ‘호계’와 관련된 글을 다수 남긴 분으로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과 관련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점 여간 아쉽고 유감이다.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이 사라지면서 지역에 호계서원의 실존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와편과 주춧돌 등 서원유적 관련 유구가 발굴 조사되긴 했지만, 이후 아무런 후속대책 없이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에 있던 서원이지만 체계적인 자료정리와 연 구성과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아쉽다. 호계서원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이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논의기구인 ‘(가칭)호계서원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여 창강(호계)서원관련 옛 문헌자료를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한시번역 등)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연구위원회 설립이 어렵다면 안양향토문화연구소, 안양학연구소 등 지역사회 연구단체에서 이 분야에 대한 추가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안동에 있는 한자동명의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비롯하여 다수의 지방서원이 향토관광자원 및 시민 유교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부 시군구에는 폐서원지에 버젓한 서원을 복원하여 시민교육 및 역사관광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안양의 호계서원은 초라한 수준이다. 선비의 정신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안양시청 홈피 등에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게재하여 시민들과 더불어 함께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안양의 호계서원 관련 추가적인 연구 성과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 한편 호계근린공원과 연계 창강서원지(호계서원지)를 지역의 사랑받는 유적지(또는 문화공간)로 가꿀 필요가 있다. 향후 기회가 되면 서울특별시 도봉서원 복원사례(1972 복원) 등 타시군구의 서원복원사례를 벤치마킹하고 민관이 함께하는 ‘(가칭)호계서원 재건위원회’기구를 발족하여 안양의 잊혀진 서원교육의 역사복원을 추진하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고려해 볼 수 있다.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이며 발전방안에 대한 지역사회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참고문헌

1.안양문화(安養文化) 통권 제11호 2012년 12월

안양문화원발행(편집위원장 김정석)

2. 안양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08.25.인쇄 안양시,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

3. 안양문화사랑, 안양문화원 (1998.03.31.)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4탄(2020.06.18)

안양지역얘기/담론

 

 

제가 아는 군포의 정치이야기를 총선(군포시장)을 중심으로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번에 나누어 게시 할겁니다.

 

군포시 정치 이야기 NO. 4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는 야당의 실력자인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 1야당이 되면서 통합민주당은 졸지에 제 3당이 되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과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을 포함한 4개의 정당이 한국사회의 주요 정당이었다. 군포시 선거구가 시흥시와 분구되어 단독 선거구가 된 이후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산본 신도시의 표심을 가늠해보는 중요한 선거였다고 평가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95년 초대 민선 시장 선거에서 소각장 이슈가 워낙 강해서 산본 신도시의 정치성향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정치흐름으로는 15대 총선은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선전여부에 따라 차기 대선을 준비 하느냐 못하느냐의 가늠자 선거이기도 했다.

당시 군포시에 출마한 후보 면면을 살펴보면 신한국당의 강창웅씨는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변호사 개업을 한 꽤 유명한 전관 변호사였다.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지역에 전혀 연고가 없는 민변출신 약관의 인권변호사인 유선호씨를 공천했다. 그리고 통합민주당은 오랫동안 재야민주화운동을 했던 여익구씨가 공천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인 심양섭씨가 자민련의 공천을 받았다. 당시 현역인 제정구의원이 분구로 인하여 시흥으로 갔기 때문에 군포 총선는 무주공산으로 현역의원이 없이 정치신인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또한 출마한 유력 후보들이 군포지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특징을 가진 선거였다. 따라서 군포시가 수도권 선거의 전형적인 형태를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선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출신지역에 따른 정당지지 흐름도 있었지만, 15대 군포 총선은 인물, 경쟁이 전면에 부각된 선거라고 평가 할 수 있다. 강창웅, 유선호, 심양섭 후보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서울대 출신이었고 여익구 후보도 불교계와 재야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두고 지역에서 사회사업을 하던 역량이 있는 후보였다.

따라서 선거는 총6명의 후보가 등록하였으나 초반부터 박빙의 4파전으로 전개 되었다. 신한국당의 강창웅 후보는 여당의 힘과 막강한 재력으로 초반선거를 주도 해 나갔다. 약간 뒤처지던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는 지역의 전통 민주당 세력들과 젊은 층이 모여들면서 맹추격을 했다. 여기에서 통합민주당의 여익구 후보는 그간의 민주당 세력들과 호남세력들이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를 지지하면서 경쟁구도에서 약간 밀리는 형세였다. 그러나 자민련의 심양섭 후보는 유일한 30대 후보로 신선함과 패기를 기반으로 지역의 충청지역세를 업고 상당한 지지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구도는 보수 계열 2명 진보계열 2명의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판세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졌다. 선거 막판은 결국은 금전과 지지세력 결집으로 결판이 난 것으로 보였다.
당시 군포시 유권자 161,710명 중 101,215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62,59%로 전국투표율에 1,3% 뒤졌다. 15대 총선 군포시 당선자는 31,869표(31,9%)을 득표하여 1,746표 차이로 신승한 새정치국민회의 유선호 후보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의 강창웅 후보는 간발의 차이인 30,123표(30,15%)로 낙선하였다. 그리고 통합민주당 후보였던 여익구 후보는 진보? 야당 경쟁에서 밀리면서 13,018표(13.03%)을 얻는데 그쳤다. 심양섭 후보는 젊은 패기로 제 4당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며 21,223표(21.24%)을 얻으면서 선전하였다.(심양섭씨가 신한국당 후보였다면 결과 다르게 나왔을 거라는 호사가들의 말들이 있었다.)
당시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시각이 있지만, 군포에서는 정당경쟁보다는 인물 경쟁이 앞섰던 마지막 선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참고 이야기
- 유선호 후보는 기존도시인 산본1동과 금정동에서 큰 표차이로 이긴 것이 승인이었다.
- 신도시 지역은 강창웅 후보와 박빙이거나 큰 평수에서는 열세였다.
- 제정구의원 시절 주력인 민주당 주요당직자(임석순 등~)와 민주당 성향 지방의원들은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 진영으로 대대수가 합류하였다.
- 국민회의 유선호 후보의 선거 기획 총괄은 이후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의 기반을 놓았던 강영추씨가 맡았다.
- 통합민주당으로 초대 민선시장이었던 조원극 시장은 총선 당시 무소속이었다.
- 여전히 재야진영에 머물던 나는 인권변호사 출신의 유선호 후보를 지원해달라는 당시 재야 지도부? 의 부탁을 받고 후보에게 직접 조언과 강영추 기획실장을 통해 측면 지원을 하였다.
- 당시 모 후보는 개인자금 30~40억을 선거에서 사용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파이프에서 줄줄 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 당시에는 각 당의 중앙당에서 중점전략지구에는 선거 자금을 내려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 선거 이후 신한국당의 강창웅씨는 군포에서 정치 활동을 접었다.
- 통합민주당의 여익구씨도 이후 군포에서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사회사업에 힘쓰시다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 자민련의 심양섭씨도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지속하지 않았다.
- 지금은 경상남도 도지사인 김경수 지사가 유선호의원의 비서관으로 15대 국회에서 4년간 활동하였다.

-편집자 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최승원]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과거와 미래-건축(2020.05.18)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
과거와 미래
건축을 중심으로
1. 들어가기
루이스 칸 Louis Isadore Kahn의 제자 나상기교수(1974.안양시청설계자 현만안구청)는 1964년 펜실바니아 미술대학원 건축과졸업, 1969년 대학원 도시계획과 졸업후 귀국하여 미국에는 인디애나주 콜럼버시(Columbus)에 볼만한 건축프로그램이 있다고 한국에 소개하였다.
 1987년 여름 건축가협회 국제분과위원장 김성국교수부부. 유희준교수. 장석웅. 황일인. 최영집. 필자등은 북구라파 스칸디나비아3개국(스웨덴 노르웨이.핀란드) 건축답사중 핀란드 알바알토박물관(Hugo Alvar Henrik Aalto) (1971년설계 1974년 완공)  알바알토스튜디오. 오슬로 바겔란 조각공원을 답사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핀란드 지폐에 건축가 알바알토사진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또한무명작가 작품이지만 관광객이 매년 50만명이 방문한다는 핀란드에서 유명한 암반교회인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교회를 가보고 필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설계에 감명을 받았다.
이어서 한국건축인들은 1990년6월 에는 미국인디아나주 콜럼버스시의 건축프로그램을  보고 한국에서도 이 같은 도시를 꿈꾸게 되었다.
안양시는 수도권 서남부 중심도시로 시흥군 군청소재지. 산업도시 등으로 근현대건축이 있기에 이를 재활용하고 새로운 건축을 추가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필자가 받은 1998년 아시아건축상인 아카시아상(arcasia)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안양시는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시건설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2003년2월  안양시는 교수 시의원 공무원으로 구성된 답사팀이 콜럼버스시를 다녀왔다.
이어서 콜럼버스시도 단체로 안양시를 방문하여  IT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건축사들은 자문을 넘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시의원. 구의원. 도의원. 도의회위원장. 구청장. 시장. 국회의원등으로 활동이 확대되어 건축을 발전시키고 봉사하고 있다.
2. 과천국립현대미술관
한국건축100년 특별기획전
1999년(8.31-10월.28) 한국건축100년 특별기획전이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성대히 전시되면서 관람자들은 더욱 건축에 관심이 높아지고, 전시중    원로건축인들은 한국에 건축박물관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2000년대 초 안양시도 자문위원회에서 ‘건축도시’ ‘써커스도시’ 등이 거론 되고 당시 안양주유소 운영하는 이상윤 전읍장이 “건축도시”에 동의했다. 이에 안양시가 자문위원에서 의견을 받아 건축박물관을 계획해보겠다고 나서게 된다,
안양시 동안구 중앙공원 지하주차장이 많이 비어있어서 여기에 건축박물관을 하고자 안양시는 예산까지 세우고 준비 한 적이 있다.
*2001.4.16 안양문예회관(현아트센타) 운영이 보강되고 고조 된다.
3. 안양시 브라질정책연수단
브라질 꾸리찌바시. 소로까바시
2001.6.10(일)~6.20(수) 10박10일
2001년 늦봄 꿈의 도시 꾸리찌바 (박용남지음.이후)라는 책을 섬유예술가 신영옥이 구입하여 안양시장에게 전달하니 어제도 교통전문가로부터  추천받았다며 신중대시장의 관심이 고조 되었다.
이 도시는  브라질건축가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mer)가 꿈을 가지고 만든 세계적 도시이다.
 1997년말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위기로 모든 시민들이 온통 한파속으로 내몰리게 됨으로 지자체들이 활로를 찾게 되는데, 저예산, 작은 건축으로 유명한 꾸리찌바의 매력이 돋보였다.
자이메 레르네르 (Jaime Lemer)가  3번 시장이 되어 이룩한 업적이며, 이 책은 작은 건축으로 생태를 유지하고 버스를 땅위 지하철같이 운영하는 독창적인 교통망의 개발이 특징이다. 안양시 자매도시 소로까바(포루투칼어Sorocaba)시가 인근에 있어서
안양시는 소로까바시에 시장. 의회의원, 환경단체. 건축가등으로 현지에 답사단을 보냈는데 답사단은 먼저 자매시를 방문후 꾸리찌바 시를 답사하였다.
소로까바시 첫인상은 검소하고 조용히 빛을 내는 아름다운도시 였다. 소로까바시청의 조용한  안뜰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오래동안 기억에 남는다. 램프접근로, 공중정원, 옥탑층회의실 시청주변에 있는 공연장등 매우 일품 이었다. 방직공장을 재활용한 도서관, 공장을 재활용한 슈퍼마켓도 훌륭하였다.
필자는 도시감상기를 써서 시장에게 전달해달라고 가이드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화장품공장을 재활용해 한국기업이운영하는 실내축구장도 답사하였고, 기업은 대규모축구센타를 만들 예정이라고 하였다.
꾸리찌바시는 도시계획연구소, 오페라데 아라메극장, 지혜에 등대, 환경대학, 식물원의 온실, 시민의 거리, 유리원통형 버스정거장등을 답사하였다.
안양시는 이도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작은축구장, 채석장공원, 폐품전시관등을 설치였다.
꾸리찌바시의 교훈
신은 인간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그 뜻과 노력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대원군의 쇄국청치가 조선의 몰락을 가져 왔다.(지금도 이웃국가는 비슷) 국가나 도시는 새로운 것에 탐구력(자존심을 가지면서도)이 필요하다. 자만심을 경계하고 새로운 시스템에 도전하는 힘이 매우중요하다. 꾸리찌바시의 교훈은 한국가 안에서 비슷한 예산과 인력으로 차별화를 한 것은 매우중요하다.
당시 저렴한 교통비 50센트로 신속한 속도는 도심 집중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변두리에서는 노숙자에게 우유를 공급) 시민들은 승용차보유가 많지만 신속히 움직이는 대중교통체제이용은 본받을 만하다. 운전기사 1명당 승객 수송율이 최대 270명은 매우 효율적인 연결형버스이다.  정맥과 동맥이 흐르듯 움직이는 일방통행은 좌회전 없이 신호등도 없이 신속히 흐른다. 도로의 자유로운 사용 자유로운 주차장설치  터미널에서 종합민원해결은 도시의 휴계코너 이다. 
2001.6월 글
*안양시는 예술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예술대학이 없어서 의왕시 소재 계원예술대학의 협력을 받자고 필자는 자문했다.
* 경기도가 예술도시 Project를 경기도가 진행하도록 유도하고, 경기도가 안하면 안양시가 하자고 회의중 건의했다
4. 안양시 미국 인디애나주 콜럼버스
(COLUMBUS)시 방문 2003년2월
콜럽버스시는 지역내 엔진공장이 시에 건축설계비를 기증하고 운영위원회에서 주로미국 건축가를 선정해서 좋은 건축을 진행하고 있다.
콜럼버스시 답사단 안양시방문
 “아트시티 사업과 관련 지난 2월 신 시장 일행이 콜럼버스시를 찾았던 데 따른 답방 형식으로 이뤄졌다. 2003년.3월11일 콜럼버스시(市)의 브루크 터틀(Brooke Tuttle) 콜럼버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 팀 타노우스키(Tim Tarnowski) 콜럼버스시 지역병원 부위원장 겸 IT 전문가 등 5명의 방문으로 이뤄진 이날 설명회는 30여명의 관내 IT업체 대표와 임직원 30명이 참석했다.” 경인일보 2003.3.12
5. Anyang Art City 21
 2002년 추진배경쾌적한 도시환경 조성 및 체계적 도시발전을 위한 「Anyang Art City 21」사업 추진의 일환으로 각종 건축물과 공작물들의 외관형태 등에 예술성을 가미하여 자연환경과 도시 미관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수준 높은 문화적 자산을 만들어 국내, 외적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문화를 가꾸어 나가고자 함.
예술도시의 정책방향AAC21 건축자문을 통하여 각종 건축물과 공작물 등에 대하여 예술성을 가미하여 자연환경과 도시미관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아름답고 품격있는 도시건설 추구. 품격있고 아름다운 예술도시 조성을 위한 Public Art Project의 지속 추진. 미래지향적이고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도시경관 사업추진. 2002 AAC21 건축자문단구성
2002.9.26  아트시티기획단출발
2016       AAC21제11회 건축문화상 Festival예정
“지자체 공무원, `Anyang Art City 21' Project 벤치마킹 방문
벤처마킹을 의뢰한 지자체들은 충청남도 등 광역자치단체를 비롯해 제주시, 금천구, 부천시 등 기초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기호일보 2005.2.27 0면
진행; 아트심의. 우수건축지정패를 부착. 전시. 학생공모등이 있다.
*우수건축의 과잉지정으로 질이 낮아진 것이 문제점이었다.
. 안양유원지 대홍수로 붕괴
1977년.7.10안양대홍수로 사망실종288명, 안양유원지파괴, 이재민 6만 여명이발생했다.
이것은 무모한 도시계획으로 안양천(漢川) 하폭40~100m에서 20m내외로 축소됨으로 피해가 증가되었다. 그리고 오랬 동안 도시자연공원으로 묶이면서 개발이 제한되고, 열악한 시설들로 인해 유원지라는 음성적 이미지만 유지되어 오다가 1999년부터 시에서는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시작이 잘못되고 있었다. 
국가문화재급 안양풀을 복원하지 못하고, 산에 있던 방가로를 모두철거하고, 설악산하단 상가지역식으로 재배치를 못하고 28년만에 주택지형으로 준공되고 있었다.
앞으로 상단지역부터 매년 한채씩 건물을 사들여 자연원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2005.2.24 안양시 시정발전위원회 위원명단 58명중 도시건설분과위원회 최
승원위원장, 위원으로 정일훈 양하백(국토연구,원연구위원) 염형민(국토연구
원, 지역도시선임연구원) 정기호(성대조경학) 조광희(대림대건축과교수) 김경인 한국회 함호석 한무영등이다.
안양소재 국토연구원이 안양시청 앞에 있어서 상 하수도시설등 부족으로 인구억재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며, 안양시가 수위과학검역원을 매입하기위해 저밀도조치를 하기도 하였다.
안양시문화체육과위원회는 9명이며,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박충흠교수(조각)와 오용길교수(동양화)가 포함되었다.
6.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 2005.11월5일~12월15일
자연공원 정비사업과 함께 건축, 미술, 조경, 디자인 등이 결합된 국내 유일의 예술공원으로 관광자원화를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는 물론 안양시의 위상을 높이는 시설로 자리매김을 시작하였다.
“Alvaro Siza의 전시관을 중심으로 (네덜란드3명의건축가그룹)MVRDV, 사미 린탈라, 핼렌 박, 디디에의 건축물. ‘Big3’라고 지칭하는 알바로 시자, MVRDV, 비토 아콘치
‘알바로 시자’의 전시관이 안양 시민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 세계적인 건축가 ‘MVRDV’가 안양시민을 위한 전망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큰 사건임을 강조하였다.
“공공예술프로젝트는 미국 인디아나주 콜럼버스나 일본의 구마모토현과 같이 안양을 아름다운 예술도시로 가꾸겠다는 비전을 갖고 3년 전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아트시티 21의 시책의 일환이다. 당초 진행되어온 조각공원 조성공사를 작년 말 중단시키고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까지는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이겨내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실현되기 힘든 프로젝트이다.”(신중대)
건축문화편집부 (archious@ancbook.com)건축문화 2005년 10월호 [Special issue]페이지
안양이후 알바로시자는 한국에서 미술관 사무소건축등 대표작이나오고  MVRDV도 서울고가도로 디자인에 진출한다.
예술공원현황
1)면적373,377m2 (113,010평)
*삼성천마을 주거환경 개선사업지구 17,686m2(54,355평)중 낙원마을 지역15,890m2(4808평)를 제외한163,791m2(49,547평)*비산도시자연공원(석수1동,안양2동) 209,586m2(63,463평)
2)작품; 알바로 시자 전시관 등 52작품, 198점
*비산도시자연공원(안양2동,석수1동)100점
삼성천 마을 주거 환경개선사업 지구내 96점
*기타(유유산업 아래 하천변, 공원입구주차장)2점
3)시설
*수경시설: 인공폭포 및 벽천 각1개소 (하천분수 작품에 포함)-자연파괴주범
*편의시설: 목재테크 등 16종 67점
(관리부족으로 많은 양이 썩어서 철거되었다.)
*조명시설: 경관조명등 680등
*조경수: 느티나무등 21개 수종 191,350본
사찰반대로 방문객입장료를 징수치 못하고 있다.
화장실건축자리를 (조광희교수설계) 취소하고 알바르씨자홀(안양파빌리온)을 유치
 준공후 많은 광광객이 오기시작 했다. 시장은 과거에 안양유원지 였기에 많다고  설명하였다.
2006.8.11 안양시 재정경제국 청책기획단주관으로 안양예술공원관련 간담회
를 가졌다
2006년 예술도시기획단신설(김성수단장)
2007년 안양공공예술재단 설립
       안양시“간판정비”국내벤치마킹
“2월부터 17개자치단체와 3개관련단체 151명 문화광광부,행자부,부산광역시,대구광역시 충남도청 서울은평구 의왕시,속초시,용인시,연기군,정선군,서천군,경산시,고창군등으로 벤치마킹했다 .전담 상담인력이 필요할 정도였다.”
2007.5.25 안양시민신문
2007.3.8 문광부“공공디자인시범도시”안양시 선정
2011년까지 국비 50억원 지원 만안구 도시디자인 마스터플랜
2002년부터“아트시티21사업추진 국내최초로 국제규모의 공공예술사업 추진(APAP) *도시마다 시각공해인 광고물의 대대적인 정비
7. 유유산업안양공장 매입
2002년부터 매입을 위한 물밑 작업이 시작되고 2004년부터 3년 넘게 논의되었다.
대구국채보상운동을 참고하여 전시의원 변원신등 원로, 최병렬시민연대기자등이 매입에 앞장서다.
2007년5월28일 안양시가 부지를 매입하였다.
 안양시는 (주)유유산업으로부터 공장부지를 매입해 김중업박물관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대지면적 16,243㎡).
2007년 안양시답사단 독일건축박물관. 랑엔 파운데이션 답사
안양시는 유유산업을 꾸미기위해 시담당국장을 포함한 답사단을 유럽에 보냈다.
김중업건축사무소출신 장석웅회장. 한서대 오인완교수. 이용재평론가 안양예술공원식당에서 회의
의제. 김중업박물관 설치
신중대시장은 후일 장석웅회장님이 훌륭한 건축인이라고 하였다.
201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건축전시가 상설로 준비되었다.
2014.3.28 김중업박물관개관. 제4회 APAP개막
8) APAP문제점
양적이고, 배급적 이며, 낭비적이고, 설치밀도가 높다.
관람객은 안양천변 Open School이 계절에 따라  춥고 덥다고 하는데 정자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일부 APAP폐지를 주장했는데, 원인은 주변도시가 따라하기, 일부민원발생도 있으나 조명관리부족이고, 원조는 원조다. 계속해서 소수정예로 유지해야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안
예산을 모아서 미술관을 짓자.(오용길 전이대교수)
*매회 2~3점 작품만 건축
(예, 훈더바서 뉴질랜드 공중화장실)
*작품설치를 시에서 대행하면 작가로부터 인증 받는 작품을 설치
*배치신중,  스페이스사용적절
*여러지역에 배급제 지향
*제작비 적절. 설치기간표시
*전문적 관리 (못질금지. 건축에 프랑카드설치 금지. 정기적방부페인팅)
K-POP 같이 한국의 건축예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참고: 의왕시 성나자로원 건축 (당시 이경재신부님은 대통령상이 사람에게 준상이라고 말씀하셨다.) 민간주도의 안양시 건축전시 필요 (저성장기 참조)
기타; 수위과학검역원 안양시인수 활용?
문화예술관광지역으로 정하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위치, 안양6동 5만6천309m2  1천293억원 4년 분납으로 인수 28개동 (2만8천800m2) 본관설계, 50년대 말 이광노교수의 문화적디자인
안양시립미술관. 시립공예관. 한국근대건축박물관등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글 앙가주망건축사사무소 건축사
최승원
2016년6월18일
연미연 세미나자료
알바르씨자홀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3탄(2020.03.20)

안양지역얘기/담론


군포 정치 이야기 3(초대 민선시장 선거)

15대 총선 이야기하기 전에 1995년 지방선거 시장 선거이야기 먼저 해야 할 듯합니다. (산본 신도시 입주 완료)

이시기는 DJ가 정계은퇴 이후 권토중래를 꿈꾸며 당시 통합민주당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DJ의 정책외곽조직인 ‘내외문제연구소’ 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포시 내외문제연구소 지부장을 조원극 전 수원 부시장이 맡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조원극전 수원시부시장이 통합민주당의 후보가 되었습니다.

이때 한양대 학생운동 출신인 송정열씨가 선거기획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 경기남부연합에 선거연대를 요청하였고 내부 논의를 거쳐 민주 지원 후보로 선정하여 안양군포의왕지부를 중심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원극 민주당 후보 선거 사무실은 신환사거리(당시 조그마한 시장이 있었음)건물 2층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군포시는 쓰레기 소각장 건설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현안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군포시장 선거는 여당인 민자당과 민주당의 경쟁 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각장 반대 대책위 활동으로 수배된 김영재씨가 시민후보? 로 후보로 등록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충청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 이강원, 그리고 초대군포호남향우회장 출신인 백남규 전시의원, 이철두 군포유치원연합회장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나름 상당히 치열하게 선거전이 전개 되었다.


당시는 합동유세가 지지세를 과시하는 선거였기 때문에 지지자 동원에 사활을 걸었다. 한번은 신도시 지역에 위치한 광정초등학교에서 있었던 합동유세에 그 동안 대리 선거운동 만하던 김영재씨가 유세장에 나타나면서 검거하려는 경찰, 저지하려는 시민 등이 뒤엉키면서 격렬했었습니다. 따라서 민주당도, 민자당도 당선을 자신하기 어려운 선거였습니다. 또한 군포 시 인구 분포는 충청, 영남, 호남 출신 비율이 비슷했고 신도시 입주로 원주민 비율은 낮았지만 여론주도층은 원주민들 이었습니다. 민자당 유병직후보와 민주당 조원극후보는 원주민출신으로 유서 깊은 군포초등학교 선후배였기 때문에 차별 점은 정당밖에 없었다. 마지막 합동유세는 기존 도시에 위치한 군포중학교?(금정초?)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투표를 앞둔 마지막 세 과시 이었기 때문에 모등 후보가 총력을 기우렸다. 민주당 조원극후보 역시 민주당 지지자이외에 수대협(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학생 300명이 지지하려 왔었다. 이 때문에 유세장에서 작은 충돌로 인하여 학생 몇몇이 경찰서로 연행 되는 일이 있었다. 합동 유세가 끝나고 학생과 민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조원극 후보지지 거리행진을 약1시30분에 걸쳐 진행하였다.


군포시 초대 민선시장으로 민주당 조원극후보가 당선되었다. 임기는 3년이었다. 조원극시장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을 탈당하였다. DJ의 정계복귀로 통합민주당과 새청치국민회로 분열되었다. 제정구의원은 통합민주당에 잔류하였고 시흥시로 지역구를 정했다.


에피소드: 1. 거리 행진을 마친 수대협 학생들은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군포 경찰서로 몰려가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군포경찰서는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 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결국 경찰서는 연행학생을 훈방하고 학생들의 집회는 종결 되었다.

2. 민자당 유병직 후보의 아들이 서울농대(수원) 개혁적인 학생이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 나온 동료학생들과 갈등이 조금 있었다.

3. 신도시를 중심으로 지지세가 상당하던 김영재 소각장반대 대책위원장은 합동유세장에서 검거되어 옥중선거를 하게 되었다.


선거결과: 95,538명이 투표했고 유병직 민자당후보 23,754표, 조원극민주당 후보 28,274표, 자민련 이강원 후보 7,548표, 김영재후보 16,124표, 백남구호보 6,055표, 이철두후보 12,191표 무효표는 1,592표였다.

*기억에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세요.


글쓴이: 조완기 선생 소개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2탄(2020.03.16)

안양지역얘기/담론

 

군포시 총선이야기 2
 92년 14대 총선은 군포시 단독 선거구가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군포를 중심으로 바라 볼 수 밖 없습니다. 당시 군포시는 89년 市승격은 하였지만 (산본 신도시 입주 안했음) 기존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거구였습니다. 그래서 민주당 제정구 후보의 선거사무실도 지금의 군포1동사무소(당시 시청) 건너편에 있는 농협 2층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민했던 지점은 민중당 박재영후보가 당락에 영향을 줄 것인가? 였습니다.
당시 군포지역의 제정구 후보 선거는 크게 보면 호남향우, 천주교, 경기남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재야·노동계의 연합 선거운동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원단)
 당시 선거는 상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선거 마지막 날 군포중학교 건너에 있던 연립주택에서 벌어졌던 민자당 황철수의원 선본과 민주당 제정구후보 선본, 그리고 당시 지원을 나왔던 재야, 학생들의 각목 대치가 양측의 중재로 저녁 12시경에 아슬아슬하게 끝났습니다. 이후 투표 당일 새벽부터 공정선거감시단이 가동되었습니다. 군포도 밤새도록 감시단이 운영되었는데 밤샘을 하면서 수거한 흑색선전물이 마대자루에 담겨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선거 결과는 군포·시흥(제정구의원 본거지) 두 지역 다 낙승이었습니다.
◆ 에피소드 하나. 당시 저는 금품살포 현장을 갔다가 거꾸로 붙잡히게 될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한 아주머니의 기지로 그 집에 숨어서 문을 닫고 선거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겨우 구조된 적도 있었지요. 또 하나는 양측 진영이 각목 대치할 때 상대측의 청년조직(사실상 주먹들)이 당시 수대협 학생들에게 “야 너희들이 학생이야? 이 깡패 새끼들아” 말해서 폭소가 터졌던 기억입니다.
※ 現천안시 국회의원 이규희, 前시흥시 3선 시장 김윤식 등이 당시 군포시에서 제정구후보 선본에 있었다.
前정의당 국회의원(당시 경기남부연합 공동의장(전교조 경기지부장) 정진후님이 지원단 총괄이었다.
※ 군포시는 48,741명이 투표하여 제정구 21,314표, 황철수 14,167표, 민중당 박재영 1,442표 그 외~
※ 시흥시는 55,327명이 투표하여 제정구 27,092표, 황철수 18,195표, 민중당 박재영 657표 그 외~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조완기]군포의 정치이야기 1탄(2020.03.14)

안양지역얘기/담론

 

제가 아는 군포의 정치이야기를 총선(군포시장)을 중심으로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번에 나누어 게시 할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민주당계열이 서로 당을 달리하던 시흥과 분구된 15대 96년을(민주당 故여익구, 새정치국민회의 유선호) 제외하고는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경선은 처음입니다. 시장 후보도 마찮가지입니다.(초대 민선시장 민주당 조원극)
군포시에서 92년 이후로 현재의 민주당이 아닌 정당이 국회의원이나 시장으로 당선된것은 각 각 단 한번입니다.(16대 김부겸 한나라당, 그렇지만 4기(2006년) 군포시장 노재영 당선 시기는 김부겸 의원은 열린우리당 이었습니다.) 그 많큼 군포시는 민주당의 아성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경기도 군포시는 신도시 산본으로 더?알려져있는 인구 27만의 노태우 시절의 신도시입니다. 저는 군포시에 93년부터 살았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안양군포의왕을 통칭 안앙지역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본격화 되면서 각각의 정체성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시민단체도 지역별로 분리 되었지요. 80년대부터 안양에 살았던 저는 여전히 구별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군포시는 시흥시와 하나의 선거구 였다가 96년 15대 총선부터 단독 선거구가 되었습니다.
13대 당시는 민자당의 황철수씨가 국회의원 이었습니다. 저는 14대 92년에 故제정구님을 민주당이 공천을 하면서 처음으로 선거 아닌 선거를 했습니다.(당시 제정구님은 전국연합과 민주당의 민주연합 후보로 선정되었음)
당시 선거는 조폭들과 재야,학생들과 일대 격전이었습니다. 제정구는 빨갱이라는 유인물이 난무하고 조폭들과 한신대를 주축으로 하는 학생들과 각목을 들고 대치하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사실만 전달하고자 합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소외받는 이들이 없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사회,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의가 따뜻하게 흐르는 사회를 우리 모두가 꿈꾸고 일꾼이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조완기(趙完起.남. 1963/09/14)선생은 서울 갈현초,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후 공군 현역병 제대, 한신대학교 사회학과, 가톨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행정학 석사)했다. 20대 시절 노동현장에서 일하며 안양사랑청년회 회장, 군포의제21 초대 사무국장(2002), 군포시의회 4대 시의원/광정동(2003-2006), 민주당 국회의원 유선호.김근태 보좌관(4급 상당), 군포YMCA 기록 이사, 노무현 대통령후보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상곤경기교육감후보 군포시선대위 공동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으로 활동하면서 2018년 지방의회와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장관 김부겸)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심재민]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를 아시나요(2019.07.12)

안양지역얘기/담론

옛길복원, 관광•여가문화 활성화

요즘은 지방자치단체 마다 사라져가는 옛길을 복원하여 관광•여가문화 활성화를 꾀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는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 해운구는 6.25전쟁 과정에서 사라진 “송정 옛길”이 걷기좋은 숲길로 길이 1.8km, 면적 7200㎡을 복원 되었다.

충북 보은군은 “질마재 옛길” 4.7km를 둘레길 형태로 복원하고자 지역균형발전 공모사업비를 통해 복원되었고 인근 속리산 등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프로그램도 개발해 속리산 일원을 관광특화지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또한, 경북 문경 “문경새제 과거길”과 충북 괴산 “산막이 옛길”, 경북 울산 남구 “장생 옛길”등을 복원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시민들의 여가문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악산의 웅장한 산세

예로부터 관악산(632.2m)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전)에 속했던 산으로 전형적인 화산(火山)형태로 돋보이는 산이다.

서울 ,안양, 과천, 시흥 등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불꽃처럼 펼쳐진 웅장한 산세를 볼 수 있다. 주릉, 팔봉능선, 육봉능선 등 관악산이 거느린 산줄기는 예외 없이 바위가 발달해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지 험한 암릉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관악산은 예상 외로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부드러운 길을 숨기고 있는데, 그곳이 무너미 고개다. 험준한 관악산이 무너미 고개를 품은 모습은 마치 무뚝뚝한 사내가 애틋한 순정을 가슴 고이 간직한 것처럼 느껴진다.

 

안양의 옛길 ‘무너미 고개’

무너미 고개는 고개가 낮아서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무’를 물.수(水)의 뜻으로 한정되어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라는 견해도 있다. 무는 곧 뭍(묻)의 간결형으로 육지(땅)를 뜻하는 경우도 많으며 평지에 완만하게 도드라진 고개를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양에도 관악산과 삼성산을 이어주는 곳에 즉 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안양을 이어주는 옛길인 ‘무너미고개’가 있다. 고갯마루를 정점으로 양편 모두 시원한 계곡이 이어져 여름철 산행으로 그만이다. 특히 이 길은 비탈이 거의 없고 안양 쪽으로 서울대 수목원이 자리 잡아 가족 단위 생태 산행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산행 코스는 안양예술공원에 시작하여 관악수목원을 지나 서울대 옆의 관악유원지로 넘어가는 게 정석이다. 안양예술공원 ~ 관악수목원 ~ 무너미고개 ~ 관악유원지 가는 코스로 약 11㎞정도의 거리이다.

하지만 관악수목원은 1967년부터 쭈욱 출입을 통제하다가 2005년부터 탐방을 목적으로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부득이 하게 우회로 무너미고개를 넘어야 하는 불편함을 등산객과 시민들은 호소하고 있다.

 

관악수목원 설문조사

안양시의회의 숲을 사랑하는 연구모임에서 2017년 10월에 조사한 「건강한 숲 조성 및 활용방안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관악산을 이용하는 시민들 1,3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관악산 수목원 출입통제에 대한 인식”에 대해 1,203명( 89.11%)이 “시민들에게 개방하라”는 의견이며, ‘안양예술공원~관악 수목원~ 무너미고개’ 숲길조성 필요하다는 의견은 1,166명(86.37%)으로 나타났다.

 

안양시민들은 바란다.

첫째, 기획재정부는 광양 백운산 남부학술림과 같이 서울대 관악수목원 무상양도 요구를 거부하여 안양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둘째, 비밀화원인 관악수목원 개방을 통한 안양의 자산인 고려백자 도요지와 안양옛길인 “무너미 고개”를 복원하여 시민들이 찾아가는 건강한 도시 숲을 조성해야 한다.

셋째, 도로와 시가지 등에 의해 단절된 관악산•삼성산~수리산 잇는 도심 생태길을 만들어야 한다.

[최병일]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 안양시의회 5분발언(2019.06.25)

안양지역얘기/담론

 

안양시의회 최병일 의원 5분 자유발언문

안양시의회 ​제248회 2차 본회의(2019.06.25)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양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갈산·귀인·범계·평안·평촌 지역구 출신 더불어 민주당 시의원 최병일입니다. 

먼저 저에게 5분발언의 기회를 주신 김선화의장님과 선배, 동료 의원님께 감사드리며 ‘스마트 행복도시 안양’을 위해 애쓰시는 최대호 시장님을 비롯한 공직자 여러분, 정론직필에 애쓰시는 언론인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저의 발언에 관심갖고 찾아주신 구교선 새안양회 회장님과 회원여러분, 실버모니터링 박종섭 단장님과 회원여러분, 특히 시정에 관심을 갖고 참석해 주신 안양시민 여러분을 환영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가 그분들의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안양시의 형성과정과 우리동네 옛날이름 다시 찾기에 대해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 안양 향토애향단체인 ‘새 안양회’가 ‘우리동네 옛날이름 찾아오기’ 캠페인을 벌여 시민들의 의견을 묻고 옛날 이름 다시 찾기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취지라는 생각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시장님을 비롯한 참석하신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시민분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문헌상에 등장한 안양은 475년 고구려시대에 율목군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최초입니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 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고려시대에 과주로, 조선시대에 과천 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14년에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이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이면으로 분류되었다가 1941년에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1973년에서야 안양시로 승격되었습니다. 

1979년 시조례 제340호로 안양시는 14개동에서 1994년, 7월 1일에 거쳐 31개동으로 분동이 되었습니다.

지명(땅이름)은 인간 활동의 공간적 배경인 장소의 특성, 즉 장소의 지리 및 역사 문화적 특성을 반영해 온 대표적인 언어 요소입니다. 

지명은 소유성과 개성이 있으며, 풍수적 요인을 고려하거나, 풍토와 특산품, 환경, 기후, 미래를 예견하며 짓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이나 그곳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을 기려 이름을 붙이는 등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지명에 나타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명은 어떤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주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양시는 행정편의상 안양동은 1동에서 9동으로, 석수동 1동에서 3동, 비산동 1동에서 3동, 호계동 1동에서 3동 등 숫자로 나열하여 분동을 하였습니다. 

인천, 안산, 파주, 강릉, 도봉구 등 각지에서 옛 지명을 찾는 운동으로 각 지명마다 예쁘고 정겨운 고유이름들을 찾아주고 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아파트 숲이 되면서 옛 모습과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서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행정의 편리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고, 자란 곳의 전통문화의 역사적 유래와 함께 옛날이름을 찾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전통과 정겨움을 이어나가고 나아가서 우리말의 아름다운 고어를 잊지 않고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내 이름이 아닌 숫자로 나를 불러 준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동네도 삭막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닌 고유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 

과거부터 내려오는 우리동네의 정겨운 옛날이름 찾아주기에 대해 주민들의 의견을 담아 재정비해 주실 것을 제안 드립니다. 

시장님께서는 제가 제안한 것을 서면으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혁]과천과 군포에 울려 퍼진 3·1운동(2019.06.18)

안양지역얘기/담론

 

중부일보 기사입력 2019.06.17 22:27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3·1운동은 근·현대 100년 관통한 역사의 큰 물결이었다
글 전문보기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1047


보편·중앙에서 비롯되어 특수·지방으로 확산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국내외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저항운동은 운동의 지향점(이념), 보편과 특수, 중앙이란 명망성과 지방이란 구체성과 특수성,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미친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다. 그 중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에 걸친 1919년 3·1운동은, 일제에 기생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모든 지역에서 전 계층과 집단 및 개인이 떨쳐 일어선 거대한 흐름으로 근현대사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과천과 군포는 2019년 현재 경기도에 소속된 별도의 독립시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과천현, 과천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시흥군에 편입되어 각각 과천면(현 과천시), 남면(현 군포시)에 해당하였다. 즉 3·1운동 당시 과천과 군포는 시흥군의 각각 1개 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근대 시기의 공동체 문화(인적·물적 교류, 5일장, 통혼권 등)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흥군은 경기도 21개 부·군 중 하나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3월 하순과 4월 초에 시위운동이 집중적으로 이어져 절정기를 맞았다. 이 기간 중에는 매일 크고 작은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양상도 일본 헌병과 군대와의 충돌 등 폭력투쟁으로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3월 초부터 중순까지의 운동이 경성(서울)이나 개성·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청년 학생의 선도 투쟁이 강했다면, 3월 하순 이후의 운동은 면과 리 단위의 농민의 참여가 확대된 대중 투쟁으로 발전해 간 결과였다.

100년 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일어난 3·1운동이 보편(세계사적 의미, 민족지도자)과 중앙(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비롯되어 특수(일제의 식민통치와 사회경제적 원인, 청년과 농민의 주도)와 지방(모든 군의 면·리, 5일장)으로 확산된 양상, 그리고 그 의미를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재구성해보자. 참고한 자료는 3·1운동 관련 재판기록,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1995), ‘과천시지 1권’(2007), ‘군포시사 별책3/군포 역사신문’(2010) 등이다.

 

과천의 3·1운동

관악산과 청계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농촌 마을인 과천에서 3·1운동이 전개된 것은 3월 말이었다. 현재의 과천지역의 구체적이고 대표적인 운동은 3월 30일 일어난 과천면 하리(현 과천동) 일대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시위의 중심 인물은 청년지도자인 이복래(李復來, 1894∼1950)로 남태령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과천면 하리에 거주하던 이복래는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남태령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을 미리 돌렸다.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의 동리에서도 시위운동을 하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이복래는 태극기를 사전에 직접 제작하여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8시 경 남태령에는 약 5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군중들은 이복래의 주도 아래 만세를 크게 부르면서 과천읍내로 진출하였다. 이들의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과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현 과천초등학교) 등 관공서와 학교를 차례로 지나면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복래는 만세운동 이후 체포되어 징역 1년을 구형받았고, 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그대로 1년을 복역했다.

과천의 3·1운동이 남태령 시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과천의 걸어 다니는 향토사전이었던 이용진(李龍鎭, 1917∼2013)의 생전 인터뷰에서 이복래 이외에도 갈현리의 이형필과 박철영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맹흥섭의 경우는 과천에 거주하면서 인근 의왕의 3·1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렇듯 과천 지역 주민들이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던 안양·의왕 등 인접 지역과 잦은 왕래가 있었던 관계로, 만세운동이 당시 시흥군 관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군포의 3·1운동

3·1운동의 불길은 전국 주요 도시와 중소 도시로, 읍·면·리 단위의 농촌 지역으로 번져갔다. 시흥군 남면에 속한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3월 31일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이 날은 시흥군의 군포장이 서는 날이었다. 군포장은 당시 남면·서이면·의왕면, 즉 현 군포·안양·의왕 지역의 경계 지점이며 상업적 중심지였던 까닭에, 인근 주민들끼리 왕래와 교류가 빈번한 곳에 해당하였다.

군포장(軍浦場, 현 안양시 호계동)에 모인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규모 인원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구장(현 이장)을 중심으로 장날을 기화로 긴밀히 연락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인 시위대는 같은 생활문화권에 속했던 군포, 안양, 의왕 지역의 주민들로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약 1.8㎞ 떨어진 군포장역(현재 전철 1호선인 군포역, 1938년 개칭) 앞 경찰관주재소(현 군포1동)까지 시위 행렬을 유지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군 보병과 협력 출동하여 총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편 같은 날 군포장과 인접한 의왕면 고천리에서도 주민 8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반월면(현 안산시) 일대 주민 수 천명이 장날을 기하여 시위를 전개하면서 군포장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듯 군포장에서 시작되어 경찰관주재소로 향한 군포 지역과 인접한 지역의 3·1운동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각 면별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대대적인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운동의 의미와 평가, 그리고 100주년

이상 과천과 군포의 3·1운동은 대중투쟁의 양상으로 전환되어 가던 3월 하순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과 농촌의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과천과 군포의 지역적 특징으로 경성을 비롯한 안양, 의왕 등 주변 지역의 만세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근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과천과 군포 지역이 경성과 경기 남부를 이어주는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주민들의 생활권이 넓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과천과 군포 지역의 3·1운동은 구장을 비롯하여 농민, 청년 학생 등의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과천과 군포 지역 3·1운동은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성격을 더 한층 강하게 지닐 수 있었다. 이와 같은 3·1운동의 경험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직접적 결과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초석이자 디딤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제 타임머신을 돌려 오늘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에 초점을 돌려보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앙의 기념식을 비롯하여 전국 모든 시와 군, 그리고 면 단위에서도 기념식과 각종 행사 열풍이 이어졌다.

2019년 3월 1일 과천시 중앙공원 야외공연장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유족대표의 3·1운동 경과보고와 기념공연, 그리고 3·1절 노래 제창을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남태령에서는 이복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시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도 있었다. 군포시는 군포 3·1운동을 기리고자 군포역 앞에 ‘군포 항일 독립 만세운동 기념탑’을 2016년 3월에 건립하였다. 특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군포 3.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3월 30일 군포역 앞 특별무대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서 당시 만세운동 재연, 기념식, 그리고 ‘군포에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기념공연이 열렸다. 이외에 100주년을 기념하여 관내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를 조사하여 ‘독립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도 시행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신적 구심점에 해당하는 3·1운동을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다만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민족독립을 향한 독립유공자의 공적과 평가가 편견이나 분단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각을 포함하여 국가가 역사해석을 독점하려는 권위주의 잣대와 비상식이 아직도 우리 현실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헌법 전문에 규정한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계승…… 민주주의공화국이다”는 구절은 지난한 근현대 100년을 관통한 역사적 흐름이자 진리이고 모두가 믿어야 하는 상식이다.

 

주혁 한양대사학과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