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박철하]1800년 전후 신자들 모였던 의왕 하우현성당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5. 3. 24. 02:03

 

기독교 전래의 역사현장 - 하우현성당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1700년대 후반이다. 200년이 훌쩍 넘었다. 정조 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순조 때에 이르러 금지와 탄압이 강화되었다. 1800년대에 네 차례의 천주교 대탄압으로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희생됐다. 이때 의왕지역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했다.

 

언제부터 의왕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상으로는 충청도 홍주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1751~1801)이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가 광주 의일리(현 백운호수 주변 학의동지역)로 이주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1845년에는 하우현에 살던 신자 김준원이 광주 포교에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는 다는 증언도 전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아 이미 1800년을 전후한 시기 이래 하우현 지역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우현은 주변은 청계산 깊은 골이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인들에게는 숨어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하우현은 인천-시흥-광주-이천-여주를 잇는 도로 상에 동양원(東陽院)이란 역원이 설치될 만큼 비교적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포교를 위해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1865년 프랑스의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1840~1866. 한국이름 서몰례)가 인근 묘론리(현 성남시 운중동)에 와서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며 우리말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다가 그 이듬해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천주교인들이 인근에 땅을 파고 굴속에서 살았다 하여 생겨난 토굴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하우현 성당은 100년이 넘는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1884년에 공소 공동체를 갖추었고, 갓등이본당 알릭스 신부의 도움과 하우현 공소 신자들의 모금으로 18945월 초가 목조 10간의 강당이 건축되었다. 1900년에는 신자가 160명에 달했으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으로 하우현 본당이 되었다. 한강이남 경기지역에서는 세 번째였다. 일제 강점 초기 신자는 200여 명에 달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와 점차 감소현상을 보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치로 일반의 연초재배가 금지되면서 생활수단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신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시골 본당의 교세가 감소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이후 공소와 본당을 거듭하다가 광복 이후 1965년 김영근 신부 재임 시절에 성당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우현성당에서는 1903~1904년경부터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윤예원(尹禮源, 1889~1869) 신부가 하우현으로 오면서 학교의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학교 이름은 경애강습소(敬愛講習所)’라 했으며, 체계를 갖춘 4년제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이전의 학교가 종교교육이 목적이었다면, 윤예원 신부 부임 이후는 선교와 함께 봉사, 애국심 함양 등을 교육의 중점으로 하면서 문맹퇴치와 더불어 근대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윤예원 신부는 부임하기 전 황해도 은율본당에 있을 때 신자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애강습소는 윤예원 신부가 전임한 이후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29~1930년경 폐쇄되었고, 당시 주변 청계지역의 서당들과 모두 합하여 정준모(鄭俊謨, 1893~1958) 선생이 이끄는 성현서당(星峴書堂)으로 이어졌다.

 

하우현성당 우측에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사제관이 자리하고 있다. 부임한 신부가 생활할 수 있도록 1906년에 건축된 것으로, 처음에는 벽체를 거의 벽돌로 쌓고 서양식 지붕틀에 함석지붕을 올리고, 외부에 초석을 갖춘 기둥을 세워 회랑을 마련하였다. 이후 개보수를 거치면서 돌로 만든 벽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렸다. 우리나라와 서양식을 절충한 근대 건축양식의 하나로서, 2001년 사제관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사제관 앞뜰에는 프랑스 볼리외 신부와 김영근 신부의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2004년 사제관 건물을 복원하고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박철하]의왕의 어제와 오늘: 지역 정체성을 조명하다

내고장 역사 바로 알기 글에서

 

편집자주: 박철하 선생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전국 군 이상 지방에서 활동했던 계급의식이 있는 청년들의 반일운동과 사회혁명운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