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190903]안양 비봉산 자락에 자리한 망해암입니다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2019.09.01/ #안양 #망해암 #비봉산/ 안양2동 양명여고 운동장에서 본 모습./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끝자락인 비봉산 동남기슭에 자리한 조계종 사찰로 현재의 모습은 절벽위에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작은 면적의 대지위에 목조 골조에 기와를 얹은 아담한 건물들이 오밀조밀 자리를 잡았었다.

근래 들어 적지않은 절들이 대규모 불사를 하고난후 OO암을 OO사로 부르기도 하는데 안양시내에서 보였던 과거의 망해암은 커다란 암벽위에 아담한 건물이 올라앉아 새벽녘 예불시 종소리가 안양읍내에 전해지고 밤이되면 은은한 불빛이 절을 밝혔던 그야말로 고즈녁했던 모습이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 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내 <안양망해암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해 암벽위에 콘크리트 건물로 대형 건물을 지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망해암은 1950-70년초 놀러갈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당시에 안양사람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산보 코스로 구시장에서 안양천 가운데 삼각주으의 미루나무숲길을 지나 또는 안양역에서 철길을 넘고 안양천을 건너(줄배 또는 나무다리) 지금의 양명여고 뒷쪽으로 해서 매점에서 과자, 사이다 등 간식을 구입해 올라갔는데 이 코스는 현재 산업도로옆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또 다른 코스는 비산사거리에서 임곡마을 지나 아스팔트가 깔린 1차선 길을 오르면 되는데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안양원도심과(만안구) 서을 금천구와 더불어 예전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가 보였는데 요즈음에는 인천 송도 신도시의 초고층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인다.

[20181107]천년역사공원 삼층석탑 보물 제5호에서 강등된 사연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2018.11.05/ #파노라마 #둥근원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천년역사공원 #삼층석탑 #문화재/ 가을색으로 물들어가는 안양사지이자 안양박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이른바 천년역사공원 정문옆에서 만나는 석탑. 2.3층의 탑신이 없어 한눈에 보아도 무언가 균형이 맞질 않는 모양새이지요. 이 석탑은 현재 이 탑이 서 있는 곳에서 동북쪽 80미터 지점(안양박물관 건물 동쪽 끝자락) 에 도굴된 채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랍니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가 맨처음으로 조선의 보물 153건과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할 때 ‘보물 제7호’의 지위를 얻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요.
광복후 우리 정부는 1963년 문화재 등급제도를 정비하면서 보물 제5호로 재조정함에 따라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위를 누렸으나 1997년 문화재관리국은 일제강점기 지정한 문화재 503건을 대상으로 명칭·등급·종별 등을 재검토했는데 이때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검토대상에 올랐지요.
당시 재평가에서 삼층석탑은 연대가 훨씬 떨어지는 고려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했지요. 게다가 탑신 일부가 없어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보물급’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결국 삼층석탑은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로 격하되었지요. 이에 현재 국가문화제 보물 제5호는 영구 결번으로 비어 있답니다.

[20181107]천년역사공원 보물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2018.11.05/ #파노라마 #360도 #안양 #안양예술공원 #중초사 #안양사 #중초사지당간지주 #보물4호/

가을색으로 물들어가는 안양사지이자 안양박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정문옆에서 만나는 돌기둥 2개. 국가보물 제4호로 1200년이란 시간의 깃든 중초사지 당간지주(통일신라)이지요. 당간지주라 불리는 이 돌기둥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竿]를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라 흥덕왕 1년(826년)에 만들어진 이 당간지주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바로 두 개의 지주 가운데 서쪽 지주의 서쪽 면에 123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 삼성산의 신라 때 이름으로 추정)에서 돌 하나를 나누어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시작하여, 9월 1일에 함께 이곳에 이르고,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절주통(節州統: 승려의 최고 직인 국통 다음의 지위)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이 명문을 통해 이 당간지주가 세워진 연대, 중초사라는 이 절의 이름, 경주 황룡사와의 관계,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라는 당대 신라의 유명한 승려를 알 수 있다. 덧붙여 당간기에는 신라식 속한문을 혼용한 곳이 있어 고대국어사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가 맨처음으로 조선의 보물 153건과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할 때 ‘보물 제6호’의 지위를 얻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요.

광복후 우리 정부는 1963년 문화재 등급제도를 정비하면서 보물 제4호(1963.01.21 지정)로 재조정해 국가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했으며 1997년 문화재관리국이 일제강점기 지정한 문화재 503건을 대상으로 명칭·등급·종별 등을 재검토했는데 이때도 당간지주로서는 아주 드물게 통일신라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국가 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된 것이랍니다.
한편 중초사지 당간지주 옆에는 고려 때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2.3층의 탑신이 없어 한눈에 보아도 균형이 맞질 않는 모양새이지요. 이 석탑은 현재 이 탑이 서 있는 곳에서 동북쪽 80미터 지점(안양박물관 건물 동쪽 끝자락) 에 도굴된 채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랍니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가 맨처음으로 조선의 보물 153건과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할 때 ‘보물 제7호’의 지위를 얻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요.
광복후 우리 정부는 1963년 문화재 등급제도를 정비하면서 보물 제5호로 재조정함에 따라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위를 누렸으나 1997년 문화재관리국은 일제강점기 지정한 문화재 503건을 대상으로 명칭·등급·종별 등을 재검토했는데 이때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검토대상에 올랐지요.
당시 재평가에서 삼층석탑은 연대가 훨씬 떨어지는 고려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했지요. 게다가 탑신 일부가 없어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보물급’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결국 삼층석탑은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로 격하되었지요. 이에 현재 국가문화제 보물 제5호는 영구 결번으로 비어 있답니다.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8.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514400

경기일보(2018.08.30)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46> 중초사지 당간지주

https://news.v.daum.net/v/20100817210311961?f=o

한국일보(2018.08.17)

 

[탐방]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 삼층석탑 의 안양사지  

http://www.seoulpost.co.kr/news/28827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10/11 23:09:45)

[20170420]비봉산의 망해암과 비행기등대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사진에 보이는 산은 안양8경중 제1경으로 망해암 일몰이 아름다운 비봉산으로 중턱 암벽위에는 망해암, 산 꼭대기에는 비행기 등대가 있다.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로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내 <안양망해암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해 암벽위에 콘크리트 건물로 대형 건물을 지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망해암은 1960-70년대 안양사람들의 데이트코스이자 산보 코스로 안양천을 건너(줄배 또는 나무다리) 지금의 양명여고 뒷쪽으로 올라갔는데 현재 산업도로옆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또다른 코스는 비산사거리에서 임곡마을 지나 아스팔트가 깔린 1차선 길을 오르면 되는데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서는 안양원도심(만안구)과 멀리는 인천 송도 신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망해암 꼭대기에는 비행기등대가 있다.
망해암을 둘러본 후 1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산 정상부에 콘크리트로 축조한 시설물이 있는데 많은 이들이 비상용 군용헬기장으로 말하고 있으나 사실 시설물 중앙에는 흰색의 안테나 시설이 우뚝 서 있어 헬기가 착륙하지 못하는 시설물로 '안양항공무선표지국'이라 불리우는 비행기 등대이다.

항공무선표지국은 'VOR(뷔오알)'이라 부르는데 VOR이란 VHF Omni-directional Range 라는 뜻으로 VOR 지상국은 360도 전 방향으로 전파를 방사하여 항행하는 항공기에 방위정보를 알려 주는 장비로 육지에 길이 있고 각종 안내표시판이 있듯이 하늘의 길목에도 이를 가리키고 유도하는 등대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무선국'으로 등대는 불빛을 보내는데 비해 VOR은 전파를 발사하는 등대로 인근을 항행 중인 항공기에서는 이 전파신호를 받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 공항의 방향과 남은 거리 등 필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안양무선표지국이 있는 관악산 상공은 지도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고 여러 항로가 만나고 갈라지고 있어 가장 붐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 항로의 간선 교차로가 되는데 도로로 치자면 광화문 사거리 정도에 해당한다. 관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가면 인천공항이나 중국으로, 동쪽으로 가면 강릉, 일본, 미주로 가는 항로가 되고 남쪽으로는 제주, 광주, 동남아, 호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가 된다. 즉 관악산 상공은 가장 혼잡한 비행기 교차로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안양]안양 8경중 제1경 망해암에 대한 이야기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의왕]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알아본다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알아본다

고려 충렬왕의 문신으로 청계사 중창주인 정숙공(貞肅公) 조인규(1237-1308)와 청계사와의 관련을 기록한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종중 신청/ 청계사 동의)가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경기도는 2014년 5월 9일 1899년 봉은사(서울)로 옮겨졌다가 100여년이 지난 2013년 5월 원래 자리인 장경사로 돌아온 남한산성 장경사 동종 등 13점을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했다.
경기도는 경기도문화재위원회 유형분과에서 장경사 동종(강희 21년명 장경사 동종), 의왕 청계사 사적기비,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등 13점을 경기도 지정문화재로 의결하고, 수원시 화성박물관 소장 홍재전서 등 7점을 예비 지정했다고 밝혔다.
경기도가 이번에 지정한 도 문화재는 ▲강희 21년명 장경사 동종 ▲파주 검단사 검단조사진영 ▲가평 현등사 지장시왕도 ▲이상의 영정 ▲부계팔경도 ▲부계전도 ▲고양 원각사 신중도 ▲의왕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남양주 흥국사 영산전 등 13점이다.
'조정숙공사당기비'는 고려 충혜왕 복위2년(134년)에 청계사에 세워진 오래된 구비(舊碑)로 청계사 중창주 조정숙공과 사찰과의 깊은 인연과 행적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정숙공은 고려문신으로 문하시중이던 조인규(1237-1308)의 시호다. 그는 몽고어에 정통해서 당시 세자 신분이었던 충렬왕이 원나라를 방문할때 수행했고, 1290년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를 되찾는 대원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또 그의 여식이 충선왕의 왕비가 되었다.
한편 청계사는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에 있는 전통사찰인 청계사는 청계산 남쪽 태봉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경기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된 사찰로 극락보전과 종각, 삼성각, 산신각, 수각 등 3동의 요사를 비롯해 10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봉은본말지>에 의하면 청계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 되었으며, 1284년(고려 충렬왕 10) 평양부원군 조인규가 사재를 들여 중창하였고, 이후 조인규 가문의 원찰로써 후손들이 약 500년간 중창을 거듭하였다.
조선 연산군 때 도성 안의 사찰을 폐하고 관청을 세우자 불교 쪽에서 이 절을 선종의 본산으로 정했던 것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이색, 변계량 등 당대 문인들이 즐겨 찾으며 절을 주제로 시를 지었으며, 조윤, 정송산 등은 이 곳에서 출가하게 되거나 칩거했다.
사찰 경내에는 여러점의 비석이 있다. 중앙에는 1689년에 세운 청계사 사적비, 왼쪽에 1341년에 세운 조정숙공사당기비, 1991년에 세운 청계사 선원 및 도량정리 불사비가 연이어 있다. 또 오른쪽에는 1979년에 세운 봉향각, 산신각, 범종이전, 전기 등의 불사비와 1996년에 평양조씨대종회가 주선해서 조정숙공사당기비의 마모된 글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새로 세운 비석이 연이어 있고 청계사 야외 석탁 옆에는 1994년에 세운 사천왕, 팔부신장, 12지상, 석탁, 도로, 차량 등의 불사비가 있다
문화재로는 동종(경기유형문화재 96호)과 목판(경기유형문화재 135호) 등이 있다.

[20161116]안양의 숨은 매력, 병목안시민공원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안양9동에 있는 병목안시민공원(만안구 안양9동 산81-1번지 일원)은 안양의 숨은 명소다. 평지가 아닌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데다 수리산자락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뤄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함이 감돈다.‘병목안’이란 명칭이 정해진 배경도 흥미롭다. 공공예술의 메카이자 안양을 대표하는 안양예술공원과는 또 다른 매력덩어리르 살펴볼까요?


□ 지형이 호리병 내부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병목안
 병목안시민공원은 안양시가 사업비 260억원을 들여 공사 착공(2004. 6. 7) 약 2년만인 지난 2006년 5월 24일 개장했다.‘병목안’이란 명칭은 좁은 마을초입을 지나면 골이 깊고 넓게 나타나는 이 일대 지형이 마치 호리병내부를 연상케 해 붙여졌다고 한다. 101,238㎡면적에 조성된 병목안시민공원은 인공폭포를 비롯해 3개소에 이르는 드넓은 잔디광장, 웰빙 체력단련장과 어린이놀이터, 사계절 정원, 파고라, 원두막,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 여기가 흙먼지 날리던 채석장이었다니!
 이 부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부터 1980년대까지 경부선과 수인선철도 자갈 채취를 위한 채석장이었다. 이후 자갈채취가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당시 생겨난 대규모 절개면이 도시미관을 저해하고 낙석 등의 재해 우려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시가 친환경적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해 현재의 병목안시민공원이 탄생했다.
□ 국내 최대규모 인공폭포 장관
 병목안시민공원의 압권이라면 국내 최대 규모인 인공폭포다. 높이가 65m이고 폭이 95m에 이르는 이 폭포는 칼로 자른 듯 절벽을 따라 쏟아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뤄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밤중에는 오색의 경관조명과 어우러지면서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폭포수 뒤쪽으로 가면 마치 동굴을 탐험하는 듯한 묘미도 체험하게 된다.
□ 녹슨 철로길 화물열차 두량이 의미하는 것!
 또 어린이놀이터쪽으로 가다보면 바로 옆 녹슨 철로길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두량의 화물열차를 목격하게 된다. 채석장 시절 자갈을 실어 나르던 화물열차와 기찻길 일부를 복원해 놓은 것인데 공원으로 탈바꿈하기 이전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상상해 보게 한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환경적 학습효과도 기대된다. 어린이놀이터 역시 평범하지 않게 모험심을 길러줄 수 있는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 계절에 어울리는 꽃물결 이뤄
 3,300㎡넓이의 사계절정원에는 37종 5만3천여 그루에 이르는 화원이 수놓아져 있으며, 160종 가까운 조경수목 33만여 그루가 공원일대 곳곳을 장식하고 있어 홀로 사색은 물론 가족이나 연인과의 힐링공간으로 훌륭하다. 기온이 올라가는 여름철과 봄·가을 주말 오후시간대 이곳에서는 시가 주관하는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병목안시민공원은 이와 같이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데다 산 중턱에 위치해 훤히 트인 시야 또한 장점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장(병목안캠핑장)이 인근에 새로 조성되면서 친환경명소로서의 이미지를 더한다.
□ 이필운 시장, 볼거리 즐길거리 풍성한 프로그램 개발할 것
 이필운 안양시장은 병목안시민공원은 안양예술공원과 안양천에 뒤지지 않는 지역명소라며 볼거리 즐길거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민들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한단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병목안 시민공원(BYUNGMOKAN CITIZENS PARK)

▣ 위    치 :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산81-1번지일원
▣ 면    적 : 101,238㎡(30,624평)
▣ 공사기간 : ‘04. 6. 7 ~ ’06. 5. 23
▣ 사 업 비 : 260억
▣ 개 장 일 ; ‘06. 5. 24
▣ 주요조성내역
  ○ 기반시설
    ▷ 인공폭포 : H65m × L95m
    ▷ 진입광장, 중앙광장, 잔디광장(6,940㎡),
           사계절정원(3,300㎡), 기찻길(철로,침목,화차2량)등
  ○ 운동시설
    ▷ 웰빙 체력단련장 및 유희시설 : 8종 16개, 어린이놀이터
  ○ 전기조명 : 481등(경관조명 423등, 공원등 58 등)
  ○ 사계절정원 : 야생화 37종 53,000본(3,300㎡-1,000여평)
  ○ 주차장면수 : 182면
  ○ 녹지대 조성
     ▷ 조경수목 : 배롱나무 등 78종 168,200본
        ⇒ 교목류 : 배롱나무 등 25종  1,200본
        ⇒ 관목류 : 산철쭉 등 16종 114,000본
        ⇒ 초화류 : 백합 등  37종  53,000본
        ⇒ 잔디면적 : 27,709㎡
     ▷ 시설물
        ⇒ 편의시설물 : 파고라 10동, 의자 130개 원두막 4동
                        피크닉테이블 30개
        ⇒ 기타시설 : 관리동 1개소, 화장실 2개소, 매점 1개소

 

○ 병목안 시민공원 유래
병목안이라는 지명은 마을초입이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고 하여 불렸으며, 수리산 뒤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후두미동)라고도 불렸습니다.
병목안 시민공원 조성부지는 1930년부터 1980년대까지 철도자갈을 채취하는 채석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자갈은 경부선 복선 및 수인선 철도를 부설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채석장 사용으로 인한 대규모 절개면이 생겨 도시미관을 저해 할 뿐 아니라, 낙석 등 재해의 우려가 있어 이곳을 환경친화적인 산림복구와 다목적 잔디광장, 어린이 놀이시설, 체력단련장, 사계절 정원을 조성하고 특히 대규모 사면을 이용한 인공폭포 등을 설치하여 시민여가선용의 장소 및 시민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전시된 화물열차는 이곳에서 생산된 철도자갈을 실어 나르던 자갈차량이며, 철도는 안양역에서 이곳까지 연결되었던 선로 일부를 복원하여 상징적인 공간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안양]전설-뱃사람의 목숨을 구한 망해암 스님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안양시 안양2동에 있는 망해암은 탁 트인 조망으로 안양 시민들의 많은 사람을 받고 있는 안양 8경 중 하나다.

망해암에는 옛날부터 내려오 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그 전설의 내용이 뱃사람과 관련되어 있어 더 재밌다.
바다와 인접하지 않은 안양에서 뱃사람과 관련된 전설 이라니? 어떤 전설이 망해암을 따라 흐르는지 옛 이야기 속으로 들 어가보자.

안양 전설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
 다양한 전설들이 많이 전해 져 오지만 제일 큰 특징을 보자면 산과 우물에 대한 전설이 많다는 것이다 . 그 이유는 안양의 주변에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영산 이라고 할 수 있는 산들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고 ,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기 에 많은 도인들이 기거했기에 생겨난 것이라고도 한다 .
망해암에 전해져오는 뱃사람과 관련된 전설은 안양 전설의 큰 줄 기인 산과 암자의 이야기이면서 안양과는 관계가 없는 바다의 이 야기가 포함되어 있어 더 특색있고 재미있다 .
신라시대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망해암은 안양 시가지는 물론 멀리 서해 바다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곳 에 위치한 절이라고 해서 ‘ 망해암 (望海庵 )’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는 삼남 지방에서 조세를 받아 해로를 통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 각 지역의 특산품은 물론 곡물 , 과일 등 다양한 조세가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이동했던 것이다 . 이런 배들은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
이렇게 조세가 운반되던 어느 날 곡물을 실은 여러 척의 배들이 인천 앞바다를 지날 무렵 몹시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에 선원들은 당 황할 수 밖에 없었고 ,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당황 하여 놀란 뱃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정신을 못차리 고 날뛰고 있었다 .
그런 와중 뱃머리에 함게 배를 타고 다니던 뱃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스님이 나타났다. 놀란 뱃사람들은 스님에게 물었다 .
"누구십니까 ?”
스님은 거센 파도속에서도 뱃머리에 흔들림없이 서서 뱃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
'그대들은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을 들으라 . 잠시 기다리면 이 모든 풍랑이 멈출 것이니 잠시 진정하고 있거라 ’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풍랑이 잠잠해지며 하늘이 맑아졌다 . 어찌된 연유인지 신기하기만 한 뱃사람들은 스님에게 물었다 .
"대사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어찌되었든 저희를 풍랑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뱃사람들의 질문에 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뱃사람들은 다시 물었다 .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 ?”
스님은 “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한다.
뱃사람 일행이 한강까지 무사히 닿은 뒤 생명의 은인이요 , 신통 했던 그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가 보았지만 그런 스님은 계시지 않았으며 , 그 스님과 용모가 흡사한 모습의 부처님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음을 보았다 .
그들은 부처님의 중생 구원의 자비신력 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 이를 임금님께 아뢰니 이를 가상히 여기신 세종대왕은 그 후로부터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분부하였는데 , 이러한 공양미는 그 후 400 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

 

망해암에 대한 소개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안양 상공은 비행기 항로의 광화문 사거리

망해암에서 50여 미터 더 올라간 비봉산 정상에는 1950년대 설치된 관악산 무선표지국이 있다. 이곳은 지상항법 유도장비인 ANYANG VOR(VORTAC)가 있어 비행기들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지상으로 자동차, 사람이 다니기 위해서는 길이 있듯이 하늘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지정된 길(항로)이 정해져 있다. 특히 안양은 비행기 항로의 심장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안양상공을 오가는 비행기가 많아 꽤 복잡한 지점이다.
VOR이란 VHF Omni-directional Range 라는 뜻으로 VOR 지상국은 360도 전 방향으로 전파를 방사하여 항행하는 항공기에 방위정보를 알려 주는 장비로 하늘의 길목에도 이를 가리키고 유도하는 등대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무선국"이다.
VOR의 주 임무는 항공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공항의 방위각정보, 즉 방향을 제공하는 시설로 선박으로 치면 항해지도에 해당하는 엔루트챠트(En-route Chart)에 군데군데 VOR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주파수 108∼118MHz, 출력 50∼100W의 정현파(正弦波)로 변조한 9,960Hz 전파를 전 방향으로 쉴 사이 없이 발사하고 있어 항공기는 이 신호를 받아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 공항의 방향과 남은 거리 등 정보를 얻게된다. 
안양 관악산 상공은 지도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고 여러 항로가 만나고 갈라지고 있어 가장 붐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 항로의 간선 교차로가 되는데 도로로 치자면 광화문 사거리 정도에 해당한다.
관악산 정상의 안양 VOR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가면 인천공항이나 중국으로, 동쪽으로 가면 강릉, 일본, 미주로 가는 항로가 되고 남쪽으로는 제주, 광주, 동남아, 호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가 된다.
항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항로란 사전에서 보면 항공기가 다니는 비행경로로 공중에 설정된 일정한 폭(이를 보호공역이라 한다)을 지닌 통로로 항공로라고도 한다. 중심선 좌우 폭이 최소 4nm(7.4km)씩 이므로 8nm(14.8km)의 띠 모양의 공간이다.
이들 항로에는 군데군데 VOR이 있어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즉 비행기는 VOR 상호간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날게되는데 이를 VOR의 첫 글자를 따서 빅터항로(victor airway)라고 부르며 국내 항공로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행기는 항로의 중앙선을 따라 비행하며 동일방향 동일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와는 서로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향, 다른 고도의 항공기끼리는 29,000피트 이하에서는 2,000피트 차이를 두어 분리하고 29,000피트 이상에서는 4,000피트 씩 간격차이를 두고 있다.

 

안양출신 시인, 이성환(李星煥) 시비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안양출신 시인, 이성환(李星煥) 시비


안양출신 시인, 이성환(李星煥) 시비

'모닥불'직각 형태의 이성환 시비에 '모닥불'이 새겨져 있다.

시인 이성환(李星煥, 1936-1966)은 안양시 박달동 348에서 출생했다. 중학 시절에 시집 <황혼선>(1951)을, 그리고 고교 재학시에 제2시집 <별과 나>(1954)를 상재한 천부적인 시인이다.

서라벌예대 문창과, 동국대국문과, 경희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현대문학」을 통해등단했다(1956). 그의 시편들은 판화와 같은 간결한 논리로 일관되
어, 단단한 구성과 참신한 시어로 앞날이 크게 촉망되었으나, 졸업후 동대문 상고교사, 제주대 조교수로 있다가 31세에 요절했다. 제3시집 <구름은 울지도 못한다>(1971)이 있다.

이성환 시비

<황혼선>등 3권의 시집을 내고 31세에 요절한 이성환과 동명의 시학도가 숨지자 동료들의 시비를 세워주었다. 여기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이성환과 같은 이름을 가진 시학도 하나가역시 더 어린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동료들이 시비를 세워 준 것이 그것이다.

1970년대를 전후해서 안양에는 고등학교 재학생 중심의 문학 서클인 「조약돌」이라는 동인회가 있었고, 동명의 이성환도 그 회원이었는데, 그가 1973년12월 27일에 뇌먹염으로 사망하자 윤고성, 장호수, 김광선 등회원들이 그들의 회관 옆에 시비를 세웠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앞서 말서 말한 이성환 시인의 시비로 오인하곤 한다.

어쨌거나 두 사람 다 시재를 모두 불사르지 못하고 요절 했기에 뒷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겼고, 전국의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순수한 시심을 불러일으킬 성싶다.

☞ 교통편
이성환 시비: 지하철이나 버스로 관악역에서 하차하여 삼막사 행길을 가다가 느티 나무 위 오른쪽 길을 접어들면 마지막 가옥에서 30m 거리에 시비가 있다.

2003-05-31 16:42:14

역사의 숨결을 찾아 의왕 안자묘(安子廟)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정보통]역사의 숨결을 찾아 의왕 안자묘(安子廟)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철도대학 뒤편에는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을 처음 전한 고려시대 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년) 선생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은 원래 순흥(順興) 안씨 후손들에 의해 황해도 장산군 신서면 늘목리 대덕산에 설치됐으나 해방과 함께 국토가 남과 북으로 갈리자 선생의 24대 종손 안재찬(安在燦.84)씨가 1947년 남으로 내려오면서 신주를 서울로 모셨다.

안씨는 이어 1977년 의왕시 월암동에 터전을 잡고 현재의 위치에 사당을 지었다.

사당이 들어선 전체 부지 면적은 1천500평으로 입구에 비석이 있고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팔각지붕에 붉은 단청을 한 3칸 한옥이 나타난다.

사당 가운데 처마밑에는 '안자묘(安子廟)'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공자의 76대 후손인 연성공 공영이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공영이 선생은 1917년 공자의 고향인 중국 궐리를 방문한 우리나라 유림들로부터 안향 선생의 신도비명을 요청받고는 "성인의 도를 밝혀 600여년 동안 빛나게 한 사람은 회헌 안자(安子)다"라며 최고의 자(子)자 호칭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유학사상을 들여와 정립하고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던 안향선생은 고려 고종 30년(1243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18세 되던 원종 원년(1260년) 과거시험에 급제, 교서랑이란 관직을 얻어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고려는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된 60여년간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오랜 전쟁관계에 있던 원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시기로 전래의 미신과 샤머니즘이 성행하고 있었다.

헛된 미신과 괴력에 의지해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안향은 미신타파에 앞장서게 된다.

선생은 상주 판관에 부임했을 당시 무당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중을 교란하고 일부 지방수령 가운데 이를 동조하는 세력까지 나타나자 무당에게 곤장을 때려 족계(足械:발을 매는 형틀)를 채웠다.

무당이 신을 빙자해가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해 주민들마저 두려워했지만 안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벌을 내려 상주지방의 미신을 타파했다.

선생이 조선조 500년 통치이념인 주자학을 도입한 것은 충렬왕 15년(1289년)으로 당시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다.

그 곳에서 안향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크게 감명받아 책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돌아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전래된 최초의 일이다.

그는 단순히 주자학을 들여온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가르쳐 주자학의 착근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 백이정, 이제현과 같은 학자들을 원나라로 보내 주자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게 했다.

1303년에 국학부흥운동을 일으키고 김문정 등을 원나라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초상화,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및 서적 등을 구해오게 했다.

특히 왕에게 건의, 관리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킨 뒤 인재양성에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같은 것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안향은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충렬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문성공(文成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은 안향의 고향인 죽계 백운동에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이 서원은 1549년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명종(明宗)의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는데 이는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안향 선생의 신주가 모셔진 의왕 안자묘에서는 매년 음력 9월12일 선생 탄신을 기념하는 제사가 후손들에 의해 거행된다.

선생의 24대 종손으로 안자묘를 관리하는 안재찬씨는 "선생께서 주자학을 도입했을 당시 고려는 무신집권에 따른 정치적 불안과 불교의 부패,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 안팎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며 "이런 때에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보급함으로써 민생을 구제하고 조선조 500년의 통치이념을 제시한 분"이라고 말했다.


2003-05-31 16: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