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권지도]1910년 10월 발행 조선교통전도 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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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통전도(1:1,000,000)>는 일본 오사카 대판매일신보사(大阪每日新報社)에서 신문9736호의 부록으로1910년 10월 1일 발행한 것으로 1899년 개통된 경인선, 1905년 개통된 경부선, 1906년 개통된 경의선 등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를 붉은선으로 그려지고 도로와 해로 등도 표기되는 등 조선 전체의 교통망과 조선 주요도시, 항구의 시가지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1910년은 경술년이고 융희(隆熙)4년으로 이 해 8월 22일 한일 합방조약이 조인(調印)되었고, 8월 29일 공포(公布)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설치되고, 9월 29일 통감부와 이사청을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로 하는 관제(官制)가 발표되었으며, 10월 1일부터 신임 총독이 임명되면서 식민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이 지도는 조선을 병합한 기념으로 신문사에서 급하게 발행한 것으로 분석된다.

제도자(製圖者는) 후등칠랑우위문(後藤七郞右衛門)이며, 인쇄소는 일본정판인쇄합자회사(日本精版印刷合資會社)이다. 지도의 중앙에 전도를 놓고 좌우에 주요 도시의 시가지도들이 배치하고 있는데, 우측에는 원산진·목포·군산·진해포·대구·부산·마산을, 좌측에는 평양·경성용산·인천이 있다.

조선교통전도 속 안양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도시 규모를 알 수 있는데 果川(과천), 始興(시흥), 安山(안산)이 규모가 컸으며 붉은 점이 그려진 곳에 행정 관청이 있었던 듯 싶다.

안양 주변의 교통망을 보면 마을, 도로, 철도 등이 표기돼 있는데 경성에서 수원으로 가는 도로망의 경우 果川(과천), 可微(가미/갈미), 全主義(전주의/???), 표기돼 있어 이도로가 果川(과천)에서 인덕원-호계동-의왕을 거쳐 水原(수원)으로 가던 옛 삼남길로 당시 통행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정조대왕의 능 행차길이자 시흥대로라 불리웠던 경성-노량진-시흥(현 서울 금천구)-만안교-안양-호계동-의왕-지지대고개-수원으로 가는 신작로는 표시조차 되지 않아 당시만 해도 삼남길보다는 통행이 적지 않았나 싶다.

경부선 철길은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1번 국도인 시흥대로를 따라 놓여져 있다. 역 명도 붉은색 글씨로 표기돼 있는데 永登浦(영등포), 始興(시흥), 安養(안양), 軍浦場(군포장) 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양권의 표기를 보면 博達里(박달리), 安陽村(안양촌), 軍浦川(군포천)으로 표기돼 이 지역에 동네.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안양 지명 표기에 있어 마을에는 安陽村(안양촌)으로 기를양을 썼으며 역명에는 安養(안양)으로 볕양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교통전도 이미지 자세히 보기: 국립고궁박물관 웹사이트 http://www.gogung.go.kr/imgView.do?title=%EC%A1%B0%EC%84%A0%EA%B5%90%ED%86%B5%EC%A0%84%EB%8F%84&cultureSeq=00016831LZ&imgSeq=11045

[안양권지도]19세기 초 제작된 여지도 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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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 등장하는 수리산 지명 표기. 당시 안양 주변의 행정구역 명칭은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이다.

 

금천은 조선시대 관아와 행궁이 자리했을 만큼 규모가 컷던 고을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시흥현과 시흥군의 행정 명칭을 시작한 곳으로 1960-70년대 시흥이라 통칭하고(지금은 행정구역과 전혀 상관없는 시흥시가 사용함) 시흥역(금천구청역 바뀜)이 있었을 만큼 행정구역이 오래된 곳으로 안양은 고거 금천의 변방이자 때로는 과천의 변방이기도 했다. 

금천은 원래 백제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에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 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757년(경덕왕 16) 곡양현으로 고쳐 율진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금주(衿州)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414년(태종 14)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고 금천의 ‘금(衿)’자와 과천의 ‘과(果)’자를 따서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여 다시 금천현과 과천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금천현과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 1416년(태종 16) 금천과 양천을 다시 나누어 금천에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과천과 병합했다가 곧 복구하였다.

1795년(정조 19) 2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인 8도제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명칭을 모두 군으로 통합함에 따라 시흥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 경기도의 한 군이 되었다. 이때에는 읍내와 안양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이 있었다. 서울의 외곽지역으로 교통상 중요한 몫을 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도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변화를 겪다가 현재는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의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금천이라는 지명은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다가 199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로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금천구로 독립하면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옛 금천현의 행정구역을 보면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서울특별시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조선 전기 과천현과 분리될 당시 금천현은 동쪽으로 과천현, 남쪽으로 안산군, 서쪽으로 부평부, 북쪽으로 양천현과 이웃하고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와 안양시 일부,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구로구 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과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곳이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동사힐현(冬斯肹縣)·율목군 등 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율진군으로 바꾸어 한주에 속하였다. 이때 곡양현(穀壤縣:시흥)·공암현(孔巖縣:양천)·소성현(邵城縣:인천)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 과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광주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으로 바뀌어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금천에 병합되어 금과현으로 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복구되었고, 세조대에도 금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나 곧 분리되었다. 별호는 부안·부림이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안산군·시흥군·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어 과천군의 관할구역 중 노량진동·본동·흑석동·동작동은 북면에, 우안리·양재리 등 8개리는 신동면에, 안양리 등 4개리는 서이면에, 관문리·문원리·갈현리·하계리·막계리 등은 과천면으로 개편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과거 과천의 변방이었으나 정조대왕 능행차길인 시흥대로(국도1호선) 개통, 1905년 경부선 철길과 안양역이 생기면서 도시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안양과 달리 농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과천은 1978년 과천신도시계획이 확정·공고되어 계획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는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 출장소가 설치되어 행정을 관장하다가 1986년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정부제2종합청사·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국사관·경마장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행정기능을 분담하는 전원적인 위성도시로 자리잡았다.

 

지도 전체보기: 서울역사 아카이브 (
http://www.museum.seoul.kr/archive/archiveView.do?currentPage=5&type=C&type2=&arcvGroupNo=3121&lowerArcvGroupNo=&arcvMetaSeq=24799&arcvNo=73639&realArcvGroupNo=3121&searchVal= )

 

여지도(경기도)
아카이브번호 73639

유물번호 서13183

자료출처 『(이찬 기증)우리 옛지도』(2006), 29쪽 

내용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목판본 지도책. 〈함경도〉에 1787년에 신설된 ‘장진부(長津府)’가 있고, 1800년에 개칭된 충청도의 ‘노성(魯城)’이 표시되어 있으나, 1822년에 설치된 함경도의 ‘후주부(厚州府)’가 반영되지 않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지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미 18세기에 개칭된 평안도의 ‘이산(理山)’과 경기도의 ‘금천(衿川)’ 등이 여전히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지명 표기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장책의 순서가 독특한데, 중국도, 일본국도, 유구국도,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에 이어, 팔도의 도별지도, 마지막에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수록되어 있다. 팔도의 도별지도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배치해, 함경도 지도가 가장 앞에 수록되고, 전라도가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이 위치한 경기도부터 시작되던 일반적인 도별 배치의 순서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음각으로 인쇄되어 잘 눈에 띄지는 않으나 각 면의 바다 부분에는 쪽수에 해당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 지도의 순서를 알려 준다.
지도의 전체적 윤곽 및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조선전도인 〈팔도총도 八道總圖〉와 도별도 즉 ‘동람도(東覽圖)’와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은 〈팔도총도〉에는 없던 묘향산(妙香山)을 크게 그리고, 각 도의 도명 우측에 소속 군현수(郡縣數)와 경지면적을, 좌측에 민호수(民戶數)를 기록해 더 많은 정보를 담은 점이 다르다.
또 ‘동람도’의 도별지도에서는 각 군현과 하천·진산(鎭山)만을 표시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는 각 군현의 위계(位階)와 서울까지의 시간거리인 일정(日程)이 군현명 옆에 적혀 있다. 해안에는 포구(浦口)·진보(鎭堡) 등도 수록되어 있다. 우역제(郵驛制)의 역도(驛道)를 직사각형으로 표시해 ‘동람도’보다 훨씬 더 자세하다. ‘동람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17세기 이후에 설치된 군현인 칠곡(漆谷)·영양(英陽)·순흥(順興)·자인(慈仁) 등의 군현이 표시되어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도별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28수의 별자리로 구분하여 영역의 경계를 선으로 표시하고 별자리의 이름을 기록한 점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 사상인 분야(分野)의 관념을 적용한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와 땅의 나누어진 일정한 지역이 서로 대응해 짝을 이룬다고 보는 생각인 분야설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는 천지상관적(天地相關的) 사고를 보여주는 점에서 동양 사상의 특징을 반영한다. 

 

[안양권지도]1951년 군사지도에 표기된 안양의 동네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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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군사지도상의 안양. 당시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으로 안양역을 중심하는 하는 읍내 시가지가 빨간색으로 표기돼 있다. 장내동(안양4동), 주점리-주접리(안양6.7.8동), 후두미(안양9동), 바우골(안양9동 담배촌 공군부대입구), 능골(안양9동/새마을), 양산말-양짓말(안양3동),수풀재=임곡마을(비산동), 오산, 석수동, 충훈부, 박달리, 붓골(박달동 범고계 호현마을), 벌터=평촌(석수1동) 등 정겨운 옛 지명들이 표기돼 있다.

화창이라 표기되어야 할 곳이 벌터(평촌)라 표기되는 등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지명도 있지만 안양1.2.3..... 석수 1.2...동 등 삭막하기 짝이 없는 아라비아 숫자 동네 이름으로 바뀐 엣 지명이 담겨 있는 동네와 마을이 어디인지 살펴 볼 수 있다./ 지도 사진 제공: 권순일 동안구청장

[안양권지도]1936년 영등포 지도와 시흥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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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시흥군 #영등포구 #안양 #금천 #시흥/ 시흥군청이 영등포에 있을 당시인 1936년의 옛 지도로 당시 영등포의 중요시설들이 상세하게 표기돼 있다. 자료를 보면 시흥군청은 1949년까지 지금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경인국도 언덕배기에 있었다. 일제 때에는 현 영등포구의 절반과 대림동 일대까지 시흥군에 속했을 정도였다.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하는 등 시흥대로를 건설하고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와 거주민들 늘어나게 된다. 1905년 1월에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점차 도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의 중심은 호계동 일대였다. 이는 삼남대로, 시흥대로, 남양길 등 사통팔달 도로가 교차하는 군포사거리 인근에 군포장이 있었고 행정관청인 서이면사무소도 현 호계도서관 인근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4월 1일 과천군 상서면(동안구 일원)과 하서면(만안구 일원)이 통합되면서 축조된 행정관청으로 1905년 안양역이 개통되고 안양역일대가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가 늘어나자 1917년 7월 6일 안양의 중심지인 안양리(현 안양일번가)로 옮긴다.

서이면서무소는 1941년 10월 1일부터 안양면서무소로 개칭되고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된다.

앞서 1947년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이 안양면으로 이전되면서 안양은 시흥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시흥군청(1946년7월 준공)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안양일번가 삼원프라자호텔과 그 주변이다. 이곳이 안양의 중심지로 번창하게 된 계기는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한 후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가 늘어났고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시흥이라는 지명의 기원이자 시흥의 뿌리는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으로 과거 시흥현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다. 시흥은 경기 서부에 있는 군현으로 고구려때는 잉벌노현, 통일신라때는 곡양현, 고려때는 금주, 조선때(정조 이전)는 금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 금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쪽, 관악구 일부, 동작구 일부와 경기 광명시 일대, 안양시 석수동, 박달동 일대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1910년 시흥동에 있던 시흥군청(始興郡廳)은 지금은 영등포동이 된 영등포리(永登浦里)로 이전한다.

1914년에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되는데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을 합쳐 거대 규모의 통합 시흥군을 만든다. 이때 과천현에 속하던 서울 동작구, 서울 관악구 사당동, 남현동, 서초구와 과천시, 군포시랑 안양시 대부분과 안산이었던 정왕, 군자지구가 시흥군에 편입(통합)된다.
1946년에 서울 영등포역 주변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은 다시 안양읍으로 옮겨지게 된다.
1960년대 산업화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등으로 안양읍이 서울의 주거, 공업기능 위성도시로 성장하며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1973년에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하고 같은 시기에 서면(현 광명시) 지역 중 철산리와 광명리가 광명출장소로 승격한다.
1973년 안양시 승격에 대한 보상(?)으로 부천군 소래읍(지금의 시흥시 북부)을 시흥으로 편입시키고 1979년 산업신도시인 현 안산시 일대에 반월출장소가 설치된다.
1981년에 서면(소하읍+광명출장소)는 서울편입 대신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고 1982년 과천면을 과천출장소로 승격시키고, 1983년에 화성군(조선시대 수원부) 의왕면을 시흥군 의왕면으로 편입시킨다.
1986년에 반월출장소, 과천출장소가 각각 안산시, 과천시로 승격된다.
1989년에 군포읍과 의왕읍이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로, 소래면(옛 인천도호부 지역)과 군자면, 수암면(옛 안산군 지역)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의 행정구역에서 폐지됨과 동시에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현재 시흥시가 100년 시흥군의 역사를 이어간다고 하지만 사실 시흥시는 옛 시흥군과 별 관계가 없다. 시흥군이 행정구역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과 수도권의 도시화 과정에서 여러 신도시들이 분리, 독립하는 등 아주 난해하고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옛 시흥군이 엉뚱하게도 행정구역상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행정구역에서 시흥이란 명칭을 잇고 있는데에는 필연 어떤 사연이 있을터 이리저리 추적을 해보니 당시 행자부의 총무과장이 역할(?)이 컷음을 확인할수 있어 당시 행정 집행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였는지를 가늠케한다.

 

관련글: [경인매일 사설] 시흥시사 발간에 바란다 http://www.k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7601

관련글: [디시인사이드] 시흥시가 향토사에서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게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iheung&no=15645

관련글: [타논의 세상이야기]1930년대의 영등포를 거닐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s89225&logNo=220615986577

관련글: 시흥100년을 앞 둔 거대한 시흥시의 역사 https://shoasis.tistory.com/508

[안양권지도]19세기 광여도(古4790-58)-금천현 지도속 안양권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 지도집인 『광여도』 경기도-금천현 지도속에 등장하는 안양권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금천현은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한강가에는 강을 넘나들던 楊花津(양화진)과 方下串津(방하관진)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仙遊峯(선유봉)은 지금의 양평동 인공폭포 부근에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도림천이다.

안양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인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진산) 三聖山(삼성산) 아래쪽에 있으며,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지도 위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로 연결되는 安養橋(안양교)가 보이고 있고,

삼성산 아래쪽의 北紫霞洞(북자하동)이 지금의 서울대 자리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愍懷墓(민회묘)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의 부인인 姜氏(강씨)의 무덤이다.

[안양권지도]19세기 광여도(古4790-58)-과천현 지도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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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 지도집인 『광여도』 경기도-과천현 지도속에 등장하는 안양권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안양권지도]1861년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속 안양권과 한자(安養)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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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의 《대동여지도》와 내용이나 구성이 거의 동일한 채색필사본 지도로 지도첩에 안양 인근 지명표기가 이채롭다. 북쪽의 관악산과 남태봉(현 남태령), 동쪽의 청계산, 남쪽의 오봉산, 서쪽의 수리산과 함께 안양, 과천, 시흥, 인덕원, 갈산(현 평촌갈산동), 부곡, 사근 표기와 함께 지명표기는 없지만 안양천과 학의천의 물줄기도 보이고 당시의 길도 선으로 표기돼 있다. 특이한 점은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安養으로 양자를 기를양 자로 표기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 중반 이전에 安陽으로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안양(安養과 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도 등장하는데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인접한 과천현 하서면과 시흥현 군내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이 모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안양시의 중심이 된다.

[안양권지도]1750-1768년 제작 조선지도(奎 16030)속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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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176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奎 16030) 경기도편의 과천현지도.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23장)·평안도(42장)·강원도(27장)·황해도(23장)·경기도(33장)·충청도(54장)·경상도(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모든 지도는 4.2cm의 방안(方案)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안은 축척(縮尺)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 모든 고을이 동일한 축척 아래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지도책이다. 따라서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재의 면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해설)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룬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三聖山(삼성산)이 鎭山(진산)이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내륙으로 안산과 과천으로 연결되고, 한강을 넘나드는 해로로 楊花津(양화진)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역과 교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으로 盤遊驛(반유역), 남쪽으로 安陽驛(안양역)이 표시되어 있고,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주변에 岐灘橋(기탄교)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이 지도 제작 당시인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관악구와 안양천 동쪽의 구로구 및 동작구의 대방동•상도동, 경기도 광명시의 대부분과 안양시의 박달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三聖山(478m)이었다. 지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서 지금의 안양천이 합류된다.

안양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大川(대천)이라고 나오며, 현재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는 ‘오목내’라고 불렀다.

지도에는 안양천이 과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한 듯이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과천의 경계를 넘어 훨씬 더 먼 곳에서 발원한다.

안양천변에 적혀 있는 歧溪橋(기계교)는 歧灘橋(기탄교)의 誤記(오기)이며, 이 다리는 보기 드문 石橋(석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천 상류에는 오늘날 안양시 이름과 동일한 安陽驛(안양역)이 보이고 있다. 조선 시대 지도에 왜 역이라 표기했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安陽橋(안양교)의 誤記(오기)이다. 참고로 과천 지도에서는 안양이라 표기한 반면 금천 지도에서는 안양역이라 표기했다. 

다른 기록에는 萬安橋(만안교)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역시 보기 드문 石橋(석교)였다고 나온다.

長柱峴(장주현)도 長栍峴(장생현)의 誤記(오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도가 현지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 위쪽으로는 楊花津(양화진)이 큰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의 위치는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참고로 안양의 한자 표기에 있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安陽(볕양)으로 표기했다고 하나 安養(기를양)과 安陽(볕양)이 혼재하며 표기되었다. 실제 1861년 대동여지도에 安養으로 표기되는 등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 표기되고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안양권지도]1750-1768년 제작 조선지도(奎 16030)속 과천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750-176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奎 16030) 경기도편의 과천현지도.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23장)·평안도(42장)·강원도(27장)·황해도(23장)·경기도(33장)·충청도(54장)·경상도(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이 지도에는 관악산, 수리산, 청계산, 태을산과 함께 현재의 학의천은 인덕천으로 표기되었다. 특히 갈산참(현재의 갈산동)이 등장해 당시 이 지역이 숙박과 식사를 할수 있는 주막들이 자리하였던 주요 교통로의 한 지점임을 알수 있으며 안양(安陽) 한자 지명은 볕양으로 표기되었다. 

참고로 안양의 한자 표기에 있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安陽(볕양)으로 표기했다고 하나 安養(기를양)과 安陽(볕양)이 혼재하며 표기되었다. 실제 1861년 대동여지도에 安養으로 표기되는 등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 표기되고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해설)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서초구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읍치 남쪽으로 仁德川이 흐른다. 읍치의 북서쪽에 위치한 관악산이 진산이다. 변계량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고, 물은 청계로 내려간다는 것으로 과천의 형국을 표현하였다. 동쪽에 보이는 良才는 驛으로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북쪽에 露梁은 한강 하류의 나루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노량진이고, 銅雀 역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나루였다. 이 지역에는 愍節書院(숙종때 세워진 서원으로 死六臣이라 칭하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가 누명을 벗고 벼슬과 시호를 받음), 鷺江書院, 四忠書院 등 다수의 서원이 있다. (김지영)

[안양권지도]1861년 대동여지도 속 안양권과 한자(安養) 표기

타임머신/옛지도읽기

 

「대동여지도」에「동여도」 의 지명을 추가한 지도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奎 10333)」 22첩 중 제13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1861년(철종 12) 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첩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에 안양 인근 지명표기가 이채롭다. 북쪽의 관악산, 동쪽의 청계산과 백운산, 남쪽의 오봉산, 서쪽의 수리산과 함께 안양, 과천, 인덕원, 갈산(현 평촌갈산동), 사대부, 부곡, 사근 표기와 함께 지명표기는 없지만 안양천과 학의천도 표기돼 있다. 특이한 점은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安養으로 양자를 기를양 자로 표기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 중반 이전에 安陽으로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안양(安養과 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도 등장하는데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인접한 과천현 하서면과 시흥현 군내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이 모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안양시의 중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