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옛지도]1951년 군사지도에 표기된 안양의 동네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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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군사지도상의 안양. 당시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으로 안양역을 중심하는 하는 읍내 시가지가 빨간색으로 표기돼 있다. 장내동(안양4동), 주점리-주접리(안양6.7.8동), 후두미(안양9동), 바우골(안양9동 담배촌 공군부대입구), 능골(안양9동/새마을), 양산말-양짓말(안양3동),수풀재=임곡마을(비산동), 오산, 석수동, 충훈부, 박달리, 붓골(박달동 범고계 호현마을), 벌터=평촌(석수1동) 등 정겨운 옛 지명들이 표기돼 있다.

화창이라 표기되어야 할 곳이 벌터(평촌)라 표기되는 등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지명도 있지만 안양1.2.3..... 석수 1.2...동 등 삭막하기 짝이 없는 아라비아 숫자 동네 이름으로 바뀐 엣 지명이 담겨 있는 동네와 마을이 어디인지 살펴 볼 수 있다./ 지도 사진 제공: 권순일 동안구청장

[옛지도]1936년 영등포 지도와 시흥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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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시흥군 #영등포구 #안양 #금천 #시흥/ 시흥군청이 영등포에 있을 당시인 1936년의 옛 지도로 당시 영등포의 중요시설들이 상세하게 표기돼 있다. 자료를 보면 시흥군청은 1949년까지 지금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경인국도 언덕배기에 있었다. 일제 때에는 현 영등포구의 절반과 대림동 일대까지 시흥군에 속했을 정도였다.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하는 등 시흥대로를 건설하고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와 거주민들 늘어나게 된다. 1905년 1월에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점차 도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의 중심은 호계동 일대였다. 이는 삼남대로, 시흥대로, 남양길 등 사통팔달 도로가 교차하는 군포사거리 인근에 군포장이 있었고 행정관청인 서이면사무소도 현 호계도서관 인근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4월 1일 과천군 상서면(동안구 일원)과 하서면(만안구 일원)이 통합되면서 축조된 행정관청으로 1905년 안양역이 개통되고 안양역일대가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가 늘어나자 1917년 7월 6일 안양의 중심지인 안양리(현 안양일번가)로 옮긴다.

서이면서무소는 1941년 10월 1일부터 안양면서무소로 개칭되고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된다.

앞서 1947년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이 안양면으로 이전되면서 안양은 시흥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시흥군청(1946년7월 준공)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안양일번가 삼원프라자호텔과 그 주변이다. 이곳이 안양의 중심지로 번창하게 된 계기는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한 후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가 늘어났고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시흥이라는 지명의 기원이자 시흥의 뿌리는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으로 과거 시흥현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다. 시흥은 경기 서부에 있는 군현으로 고구려때는 잉벌노현, 통일신라때는 곡양현, 고려때는 금주, 조선때(정조 이전)는 금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 금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쪽, 관악구 일부, 동작구 일부와 경기 광명시 일대, 안양시 석수동, 박달동 일대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1910년 시흥동에 있던 시흥군청(始興郡廳)은 지금은 영등포동이 된 영등포리(永登浦里)로 이전한다.

1914년에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되는데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을 합쳐 거대 규모의 통합 시흥군을 만든다. 이때 과천현에 속하던 서울 동작구, 서울 관악구 사당동, 남현동, 서초구와 과천시, 군포시랑 안양시 대부분과 안산이었던 정왕, 군자지구가 시흥군에 편입(통합)된다.
1946년에 서울 영등포역 주변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은 다시 안양읍으로 옮겨지게 된다.
1960년대 산업화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등으로 안양읍이 서울의 주거, 공업기능 위성도시로 성장하며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1973년에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하고 같은 시기에 서면(현 광명시) 지역 중 철산리와 광명리가 광명출장소로 승격한다.
1973년 안양시 승격에 대한 보상(?)으로 부천군 소래읍(지금의 시흥시 북부)을 시흥으로 편입시키고 1979년 산업신도시인 현 안산시 일대에 반월출장소가 설치된다.
1981년에 서면(소하읍+광명출장소)는 서울편입 대신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고 1982년 과천면을 과천출장소로 승격시키고, 1983년에 화성군(조선시대 수원부) 의왕면을 시흥군 의왕면으로 편입시킨다.
1986년에 반월출장소, 과천출장소가 각각 안산시, 과천시로 승격된다.
1989년에 군포읍과 의왕읍이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로, 소래면(옛 인천도호부 지역)과 군자면, 수암면(옛 안산군 지역)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의 행정구역에서 폐지됨과 동시에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현재 시흥시가 100년 시흥군의 역사를 이어간다고 하지만 사실 시흥시는 옛 시흥군과 별 관계가 없다. 시흥군이 행정구역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과 수도권의 도시화 과정에서 여러 신도시들이 분리, 독립하는 등 아주 난해하고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옛 시흥군이 엉뚱하게도 행정구역상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행정구역에서 시흥이란 명칭을 잇고 있는데에는 필연 어떤 사연이 있을터 이리저리 추적을 해보니 당시 행자부의 총무과장이 역할(?)이 컷음을 확인할수 있어 당시 행정 집행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였는지를 가늠케한다.

 

관련글: [경인매일 사설] 시흥시사 발간에 바란다 http://www.k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7601

관련글: [디시인사이드] 시흥시가 향토사에서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게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iheung&no=15645

관련글: [타논의 세상이야기]1930년대의 영등포를 거닐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s89225&logNo=220615986577

관련글: 시흥100년을 앞 둔 거대한 시흥시의 역사 https://shoasis.tistory.com/508

[안양권지도]19세기 광여도(古4790-58)-금천현 지도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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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 지도집인 『광여도』 경기도-금천현 지도속에 등장하는 안양권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금천현은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한강가에는 강을 넘나들던 楊花津(양화진)과 方下串津(방하관진)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仙遊峯(선유봉)은 지금의 양평동 인공폭포 부근에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도림천이다.

안양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인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진산) 三聖山(삼성산) 아래쪽에 있으며,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지도 위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로 연결되는 安養橋(안양교)가 보이고 있고,

삼성산 아래쪽의 北紫霞洞(북자하동)이 지금의 서울대 자리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愍懷墓(민회묘)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의 부인인 姜氏(강씨)의 무덤이다.

[안양권지도]19세기 광여도(古4790-58)-과천현 지도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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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 지도집인 『광여도』 경기도-과천현 지도속에 등장하는 안양권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안양권지도]1861년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속 안양권과 한자(安養)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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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의 《대동여지도》와 내용이나 구성이 거의 동일한 채색필사본 지도로 지도첩에 안양 인근 지명표기가 이채롭다. 북쪽의 관악산과 남태봉(현 남태령), 동쪽의 청계산, 남쪽의 오봉산, 서쪽의 수리산과 함께 안양, 과천, 시흥, 인덕원, 갈산(현 평촌갈산동), 부곡, 사근 표기와 함께 지명표기는 없지만 안양천과 학의천의 물줄기도 보이고 당시의 길도 선으로 표기돼 있다. 특이한 점은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安養으로 양자를 기를양 자로 표기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 중반 이전에 安陽으로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안양(安養과 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도 등장하는데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인접한 과천현 하서면과 시흥현 군내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이 모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안양시의 중심이 된다.

[안양권지도]1750-1768년 제작 조선지도(奎 16030)속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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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176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奎 16030) 경기도편의 과천현지도.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23장)·평안도(42장)·강원도(27장)·황해도(23장)·경기도(33장)·충청도(54장)·경상도(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모든 지도는 4.2cm의 방안(方案)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안은 축척(縮尺)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 모든 고을이 동일한 축척 아래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지도책이다. 따라서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재의 면적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해설)현재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금천구, 동작구 일부지역과 경기도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산, 과천, 양천, 인천과 경계를 이룬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있었다. 동쪽에 三聖山(삼성산)이 鎭山(진산)이다. 읍치를 지나는 대로는 내륙으로 안산과 과천으로 연결되고, 한강을 넘나드는 해로로 楊花津(양화진)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역과 교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으로 盤遊驛(반유역), 남쪽으로 安陽驛(안양역)이 표시되어 있고,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주변에 岐灘橋(기탄교)가 표시되어 있다. (김지영)

 

이 지도 제작 당시인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관악구와 안양천 동쪽의 구로구 및 동작구의 대방동•상도동, 경기도 광명시의 대부분과 안양시의 박달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의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三聖山(478m)이었다. 지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서 지금의 안양천이 합류된다.

안양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大川(대천)이라고 나오며, 현재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는 ‘오목내’라고 불렀다.

지도에는 안양천이 과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한 듯이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과천의 경계를 넘어 훨씬 더 먼 곳에서 발원한다.

안양천변에 적혀 있는 歧溪橋(기계교)는 歧灘橋(기탄교)의 誤記(오기)이며, 이 다리는 보기 드문 石橋(석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천 상류에는 오늘날 안양시 이름과 동일한 安陽驛(안양역)이 보이고 있다. 조선 시대 지도에 왜 역이라 표기했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安陽橋(안양교)의 誤記(오기)이다. 참고로 과천 지도에서는 안양이라 표기한 반면 금천 지도에서는 안양역이라 표기했다. 

다른 기록에는 萬安橋(만안교)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역시 보기 드문 石橋(석교)였다고 나온다.

長柱峴(장주현)도 長栍峴(장생현)의 誤記(오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도가 현지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 위쪽으로는 楊花津(양화진)이 큰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의 위치는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참고로 안양의 한자 표기에 있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安陽(볕양)으로 표기했다고 하나 安養(기를양)과 安陽(볕양)이 혼재하며 표기되었다. 실제 1861년 대동여지도에 安養으로 표기되는 등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 표기되고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안양권지도]1750-1768년 제작 조선지도(奎 16030)속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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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1768년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奎 16030) 경기도편의 과천현지도.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23장)·평안도(42장)·강원도(27장)·황해도(23장)·경기도(33장)·충청도(54장)·경상도(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이 지도에는 관악산, 수리산, 청계산, 태을산과 함께 현재의 학의천은 인덕천으로 표기되었다. 특히 갈산참(현재의 갈산동)이 등장해 당시 이 지역이 숙박과 식사를 할수 있는 주막들이 자리하였던 주요 교통로의 한 지점임을 알수 있으며 안양(安陽) 한자 지명은 볕양으로 표기되었다. 

참고로 안양의 한자 표기에 있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安陽(볕양)으로 표기했다고 하나 安養(기를양)과 安陽(볕양)이 혼재하며 표기되었다. 실제 1861년 대동여지도에 安養으로 표기되는 등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 표기되고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해설)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특별시 동작구·서초구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읍치 남쪽으로 仁德川이 흐른다. 읍치의 북서쪽에 위치한 관악산이 진산이다. 변계량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고, 물은 청계로 내려간다는 것으로 과천의 형국을 표현하였다. 동쪽에 보이는 良才는 驛으로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북쪽에 露梁은 한강 하류의 나루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노량진이고, 銅雀 역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는 나루였다. 이 지역에는 愍節書院(숙종때 세워진 서원으로 死六臣이라 칭하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가 누명을 벗고 벼슬과 시호를 받음), 鷺江書院, 四忠書院 등 다수의 서원이 있다. (김지영)

[안양권지도]1861년 대동여지도 속 안양권과 한자(安養)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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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동여도」 의 지명을 추가한 지도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奎 10333)」 22첩 중 제13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1861년(철종 12) 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첩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에 안양 인근 지명표기가 이채롭다. 북쪽의 관악산, 동쪽의 청계산과 백운산, 남쪽의 오봉산, 서쪽의 수리산과 함께 안양, 과천, 인덕원, 갈산(현 평촌갈산동), 사대부, 부곡, 사근 표기와 함께 지명표기는 없지만 안양천과 학의천도 표기돼 있다. 특이한 점은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安養으로 양자를 기를양 자로 표기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 중반 이전에 安陽으로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안양(安養과 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도 등장하는데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인접한 과천현 하서면과 시흥현 군내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이 모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안양시의 중심이 된다.

[안양권지도]1918년 군포장 지도속 안양역과 군포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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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제작한 '군포장'지도로 당시의 안양.군포.의왕 일대 모습을 볼수 있는 근대 지도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통치차원에서 일본군 육지측량부대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조선인 측부를 고용하여 조선 땅을 측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강제 합방 전까지 약도 형태의 축척 5만분의 1 신속측도(迅速測圖)가 제작되었고, 합방이후 약도를 수정 보완하여 제2차 5만분의 1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후 6년간에 걸쳐 본격적으로 삼각측량과 지형측량을 실시하여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조선반도 전역의 1:50,000지형도 722매를 완성하였다. 대동여지도 등 지도 제작에 있어 일가견이 있던 우리나라가 우리 땅에 대한 최초의 실측지도를 일제에 의해 제작되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으로 후퇴했다.
지도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또는 종로도서관 고문헌 원문검색서비스( http://jnliboldbook.sen.go.kr/web.do)에서 원본 이미지를 다운 받을 수 있다.

1918년 朝鮮五万分一地形圖. [14-2-4] : 軍浦場(京城四號) - 군포장
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jnl_map_017_0020_0040

 

 

 

[안양권지도]1908년 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 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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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1908년 펴낸 『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新訂分道 大韓帝國地)의 경기도(京畿道)편의 안양지역 부분을 확대한 것으로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여진 이후의 철도 체계와 도로 교통망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서 볼때 당시는 경성과 더불어 수원을 크게 표기해 인구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인천, 과천, 시흥, 안산, 용인, 부평, 양천, 광주, 이천, 양지, 김포 등을 비교적 크게 표기하고 있다.
안양 주변을 보면 경부선에 안양역과 군포장역(군포) 및 부곡(의왕)역을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양역 지명 표기에 있어 安陽으로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한자 지명을 지금과 달리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양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도 등장하는데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대부분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또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인접한 과천현 하서면과 시흥현 군내면에 안양리라는 지명이 모두 있었으며, 이들 지역이 안양시의 중심이 된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를 공포하고 총독부령 제8호“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말단 지방행정기구로서 면의 지위를 확정하고 1913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이에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로 처음 등장하면서 안양촌(安陽村)으로 불리웠던 동네 한자 지명이 安養里로 명기된다. 이는 1941년 행정구역이 시흥군 안양면(安養面)이 되면서 자리잡았다.

<경기도京畿道>는 1908년에 간행된 《신정분도대한제국지도新訂分道大韓帝國地圖》중 경기도 지도의 좌측 상단에 실려 있는 지도이다. 《신정분도대한제국지도》는 1908년에 발행된 지도로서 지도는 모두 10면인데, 아세아전도.대한전국지도와 함께 팔도지도가 실려 있다. 이 지도는 형태상 <한양경성도漢陽京城圖>(서281)와 큰 차이가 없으며, 축척과 범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경부철도京釜鐵道와 경의철도京義鐵道가 놓여 있으며, 서대문근처에 ‘경성정거장京城停車場’이 서울역 자리에 ‘남대문정거장南大門停車場’이 표기되어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종로와 남대문로를 비롯하여 남대문-서대문사거리까지 전차선로가 그려져 있다. 또한 종각 맞은편에 ‘전기회사電氣會社’가 표기되어 있다. 1906년에 완공된 경의철도는 실제 노선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고 현 태평로가 개설되어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남산 북록 아래에는 큰 글씨로 ‘일본거류지日本居留地’라고 쓰고, ‘일본학교日本學校’.‘일본공원지日本公園地’.‘일본육군병원日本陸軍病院’.‘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 등이 표기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 거주지의 주소는 황성皇城, 남서南署, 대광통교大廣通橋 등으로, 일본인 거주지는 경성京城, 명치정明治町으로 표기한 점이다. 본 지도책은 1908년 5월에 인쇄.발행되었고, 편집 및 발행자는 현공렴玄公廉이며, 발행자는 주한영朱翰榮 . 고유상高裕相 . 김기현金基鉉이고, 인쇄소는 일한인쇄주식회사日韓印刷株式會社이다.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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