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안양권지도]1976년 안양시(현 만안구 지역) 지도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77년 3월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안양의 현 만안구(안양동.호계동.비산동) 1:5000 지도  

1974년 6월 항공촬영

1976년 편집

 

지도 상단 좌측 끝자략이 안양역이다. 역 뒤로는 1960-70년대 현찰을 가장 많이 보유해 삼성 이벙쳘 회장도 돈을 빌리러 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단사천 회장이 경영하던  한국특수제지 공장(현 안양1동 삼성 레미안 아파트)이 보인다. 당시 이 공장은 광택이 나고 빳빳한 아트제지를 생산하던 곳으로 공장안까지 수송용 철길이 놓여 있었다.  한국툭수제지와 태평방직 공장 사이로는 1940-60년대 안양읍 시절  다운타운이었던 구사장(시대동)이다.  

구시장(시대동)은 1968-9년 당시 안양읍내에서 가장 큰 번화가로 안양역에서  인덕원, 과천, 청계, 서울강남(말죽거리) 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이었으며 1950년대 이전 5일장이 서다 상설시장(1928년 1월28일 개서)이 형성된 곳이다. 당시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또 1929년 안양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며 1930-60년대 지역경제의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땡땡땡 철길(현 진흥육교 자리)을 건너면 안양역과 1번국도, 행정타운(시흥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의용소방대)으로 연결된다. 또 구시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시장을 지나고 안양천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를 건너면 수푸루지 마을(임곡마을)로 능선 사이 개울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산비탈(현재의 대림대학교)에는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구시장과 수푸루지마을의 가가호호 단독주택들이 표시돼있다. .

수푸루지 마을에서 자그마한 능선(이마트앞)을 돌아 언덕(안양운동장 남쪽)을 넘어가면 수촌마을이 나오고 인덕원을 지나 청계와 과천, 말죽거리로 갈 수 있었는데 안양(버스정류장_현 남부시장 문화철물옆)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현재의 진흥육교는 전철이 개통될 무렵인 1975년에 개설되었는데 육교가 놓여지기 이전 땡댕땡 건널목 좌우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건물들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광창라사, 안양 최초의 다방, 이발소, 중국집, 호떡집 등이 있었다.
지금은 전기(전철) 위험 때문에 철길 횡단은 꿈도 못 꾸지만 당시 건널목에서 안양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옆은 주민들이 걸어다니던 통행로였다. 또 아이들은 기차가 오나 레일에 귀를 대고 전해지는 진동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레일에 못을 놓아 기차가 지나간후 납작해지면 이를 갈아 연필깍는 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공작소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다.
구시장에서 한국특수제지 공장으로 가던 골목길이 있었다. 골목길 양쪽으로는 음식점과 술집들이 있었고 막걸리집이 다섯개가 있었다. 먹걸리집들은 한국특수제지 노동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들리는 단골 참새 방앗간이었다.(김귀연 전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장 기억)

안양시장(구시장)은 안양천과 연접한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하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6.25전쟁이후 피난민들이 유입하며 판잣집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면서 상권이 이전하자 60년 중반이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시대동은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시장 주변에는 안양1동 주공뜨란채, 한국특수제지 안양공장 부지에는 안양1동 삼성레미안, 태평방직 자리에는 안양1동 진흥아파트(현재 재건축 추진)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흔적도 사라져 지금은 과거의 엣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는 안양역 앞 도로(현 만안로)가 1번 국도로 지도에도 1번으로 표시돼 있다. 지도속 안양동을 살펴보면 안양역부터 님부시장까지 안양1동과 과거 담안이라 불렀던 안양4동 주변은 주택들이 오밀조밀 밀집돼 있는 반면 안양5동과 6동지역은 밀집도가 약해져 집들이 드문드문 있음을 볼수있다.

안양6동에는 농민기술교. 재건중교가 있었고, 안양시청 북쪽으로는 안양역지하상가를 공사한 정덕한씨가 건추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주택들이 보이고, 안양로 건너편으로는 가축위생연구소(국립수의과학검역원-안양시 메입)내 당시 건물들 배치 현황이 자세하게 표시돼 있다.

가축생연구소(옛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1964년 건립된 안양가축위생연구소가 전신으로 국내.외 축산식품에 대한 위생관리와 검역 실시, 축산농민들을 위한 가축질병의 예방, 퇴치 및 해외 악성 가축 전염병의 유입방지 업무를 수행하는 농림수산부식품부 산하 기관이 있던 곳이다.
역사를 보면 검역원은 1909년 부산에서 수출우검역소와 1911년 우역혈청제조소가 설립돼 가축위생시험소로 통폐합된후 1942년 안양으로 이전해 왔으며 1964년 안양가축연구소, 1998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 2011년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2013년 농림축산검역본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9년에는 이곳에서 국립수의과학검역원 100주년 기념식을 갖기도 했던 농림축산검역본부는 2004년 4월 시행된 국가균형발전특별법과 2005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의해 74년만에 안양을 떠나 경북도 김천으로 이전(2016년 4월 말 안양에서의 업무 종료)했다.

옛 농림축산검역본부 부지는 만안구 안양6동 480번지 일대 주거지역 4만4324㎡, 상업지역 1만1985㎡의 전체부지 5만6309㎡(건물 27개동 2만8천612㎡)에 달하는 규모로 안양 도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간으로 잔디밭, 수목원, 운동장 등이 자리해 평촌중앙공원에 버금가는 공원뿐 아니라 활용 방안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는 노른자위 땅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에 검역원의 역사를 정리해 보면 안양에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축산검역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는 1961년 남부지방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으로 부산에 있던 가축위생시험소가 초토화되자 농업연구기관을 수원을 중심으로 집결시킨다는 정부(농사원)의 벙침에 따라 미국 USOM의 협조자금으로 지소였던 안양(본소이전 1962년)에 1963년 10월 대규모 현대적인 종합시설을 건립하였다.

당시 신축한 가축위생시험소(현재의 검역원 본관 등)는 서울대학교 공대 이강노 교수가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아 완성했다. 특히 본관 건물 전면부의 3층에는 여러 동물들의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진 부조물이 있는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대표적 조각가인 김문기의 작품이다. 오른쪽 위 한 켠에 ‘LABORATORY’라고 씌어 있어 이 건물이 실험시설임을 알려 주고 있다.
먼저 건물을 설계한 이강노 교수는 1949년부터 1987년까지 ‘현역’ 시절 남산 어린이회관, 국회의사당, 서울대 캠퍼스, 삼성빌딩, 서울대학병원, 주한중국대사관, 아산재단 중앙병원 등 170여 점에 달하는 내노라하는 건축물들을 설계한 인물로 1955년 그의 아호를 딴 무애(無涯)건축연구소를 설립해 한국 현대건축을 이끈 한국 건축학계의 원로다.
1928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생한 이광노는 경복중학을 거쳐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이광노는 1949년 21세의 나이에 대구시청사 현상설계를 시작으로, 6·25전쟁 기간 동안 국군충혼탑, 유엔전우탑 등을 설계하는 등 청년건축가로서 촉망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교통부·서울시 연구원, 한미재단 주택건설 실무자로 6·25 직후 건축계의 부흥을 이끌었고, 1954년 도미(渡美)해 세계적 명성의 건축사무소 ‘아이엠페이(I.M.PEI)’에서 세계적 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에게 세계 수준의 건축기법을 전수했다.
28세 때 서울공대 건축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30여 년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건설부 건축위원,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 도시계획위원·건축위원, 대한건축학회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미국 건축가협회(AIA) 명예특별회원을 역임했다.
이 교수는 88올림픽경기장과 선수촌, 법원청사, 코엑스몰,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등의 심사위원장, 국립중앙박물관 건립기획단 위원장, 1999 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60~1970년 대한국건축사의 새 장을 연 무애건축연구소와 서울대 건축과를 축(軸)으로 현대 건축가 양성의 '본산(本山)'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서울시문화상,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건축구조], 역서로는 [한(韓)의 건축문화](후지시마 가이지로 저) 등이 있다.현재도 활동이 왕성해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할동허고 있으며 2015년 11월 18일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협의회 초대 의장으로 추대받았다.
그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현역' 시절 남긴 작품은 170여 점에 달한다.  주요작품을 보면 안양가축위생시험소(1963), 삼성빌딩(1964), 국회의사당(1968),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1968), 서울 한국어린이회관(1969), 서울대부속병원(1970), 서울대 종합계획 및 기본설계(1972), 제주대(1976),영남대(1981), 아산재단 중앙병원 기본설계(1986), 오지호기념미술관(1997), S문화관(2002), 오페라극장(2008) 등이다. 특히 대한극장·크리스천아카데미 등은 근대건축을 충실하게 해석해 한국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중국대사관·서울대 규장각도서관은 전통미를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항생 항습실, 무균작업실 같은 특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립 당시 아직 미개발 상태였던 뒷산을 배경으로 자아내는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이다.
옆으로 긴 2층의 주 건축물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기둥을 벽면 밖으로 돌출시켰으며, 그 사이의 창들이 리듬감을 더해 주고 있다. 중앙 현관의 차양 지붕은 돌출되어 있는데 V자 모양으로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어 더욱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중앙 현관 주변을 외줄 기둥과 경쾌한 지붕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1950∼1960년대 한국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에 모더니즘 경향이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의 바닥과 기둥의 마감은 인조석 테라죠물갈기로 하였으며, 그 바탕을 연분홍, 살구색 등 온화한 계통으로 배색하여 자칫 차가워보일 수 있는 실험실의 내부에 온기를 주고 있다. 또한 현관 내부 중앙 기둥에 1950년대 한미경제원조 조치에 의해 이 건물이 지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식 동판이 붙어 있다.
평면을 살펴보면, 북쪽에 복도를 배치한 평복도형으로 남쪽에 실험실과 사무실을 배치하였다. 서쪽에는 계단실을 두어 높아지는 대지에 맞추어 옥외로 통하는 출구를 두었다. 이 건물은 계단실의 창을 옆으로 길게 내고 열려 있는 공간도 세밀한 창살로 구획하여 르 코르뷔제에를 비롯한 근대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국제주의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전면은 콘크리트 마감으로 하였는데 측면과 배면 등 뒤편의 외벽만은 붉은 벽돌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이어지는 전쟁복구사업의 연장에서 본다면 풍족하지 못한 재료의 생산 및 수급,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당시 상황으로 인해 완벽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전체의 형태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구조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재료는 이에 미치지 못하여 건물의 뒤편에서는 현장의 재료를 활용하여 겉모양을 맞추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로 미끈한 형태를 빚는 요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1960년대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농촌이었던 안양의 교외 현장에서는 재래 재료인 붉은 점토벽돌로 근사한 외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건물에서 또 하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건물 전면부의 3층에 새겨져 있는 부조물인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대표적 조각가인 김문기의 작품이다. 이 부조물에는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에 사용되는 동물들의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 위 한 켠에‘LABORATORY’라고 씌어 있어 이 건물이 실험시설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실험실 건물 뒤편(서쪽)에도 부속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신축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이 검역원은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방침에 따라 경북 김천으로로 이전하며 안양시는 2010년 12월 당시 국토해양부와 1292억3100만원에 매입하기로 계약하고 계약금으로 129억3000만원을 지불한 후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총 891억원을 지불하고, 2016년 5월 말과 2017년에 각각 91억원을, 2018년에 90여억원을 지불하면 안양시 소유가 됐다.

하지만 향후 부지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두세차례 용역은 물론 각계 의견이 제각각으로 현재까지도 뚜렷한 방향을 집지 못하고 있다.

역대 민선 시장들은 이 부지를 공원이나 종합복지시설, 기업지원시설 등으로 활용할 계획을 잠정적으로 모색해 온 반면 지역정가에서는 시청을 이전해 침체된 만안구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도 냈다. 최대호 안양시장도 2010년 7월 첫 시장 취임 당시 어려운 시 재정을 고려해 매입 철회의사를 밝혔다가 그해 9월 다시 매입하기로 번복 결정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지난 4.13총선에서는 구체적으로 도시균형발전과 침체된 만안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동안구에 있는 시청사를 이전해 새로운 성장의 모텐텀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정치인들은 "시청 이전보다는 대기업 이전 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최근 시릿한 21대총 선에서 당선된 강득구 당선자는 만안구 발전을 위해 이곳으로 안양시청을 이전한다는 공약을 내세우기도도 했다. .

더욱이 농림축산검역본부 부지앞 정원 일대가 우리나라 개미중 가장 큰 토종개미(학명 일본왕개미)의 국내 최대 집단서식지로 밝혀져 KBS 등을 통해 보도되고 검역본부 본관 건물이 1950년대 연구소를 상징적으로 특화시켜 지어진 건축물로 문화유산 가치가 높은 것으로 드러나 이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않아 개발계획안에 이같은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다시 지도를 살펴보면 안양8동에서는 현재 성결대학교를 당시 성결교신학대학교로 불렀으며 현재의 명학공원에는 지금은 없어진 경기도임업연구소, 경기도잠사시험소 건물들이 있었고, 경찰서사거리에 성문교회도 표시돼 있다.  

 

 

지도속에 담긴 이야기는 계속 업그레이드 될 예정입니다

 

 

이 지도는 안양의 원로 건축사인 최승원 교수님께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로 엣 안양 시가지 분석을 위해 이미지 파일을 제공해 주셨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안양권지도]군포안양의왕 산수여지도(박찬응. 2919)

타임머신/옛지도읽기

 

지난해 페이스북에 올려진 지도를 보고 완성되면 제공해 줄것을 요청했던 박찬응 관장의 신 안양권역 산수여지도입니다. 안양사람이 지금은 군포에 살다보니 금정을 중심에 둔 도로망과 산본천과 당정천, 수리산 등의 하천과 산은 물론  실개천, 호수, 사찰 지명까지 군포에 중심을 둔 그림으로 그려졌네요.

 

수리산과 관악산과 청계산,백운 줄기에 둘러싸인 군포,안양,의왕지역이 하나의 생활권이며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살아온지 반백년이 지났는데 아직 그중심에 서서 그린 변변한 그림지도가 없어서  한번 시도해보았다. 어줍지않게 선조들의 흉내를 내어보았으나 쉬운일이 아니다. 내놓기가 부끄러웠으나 앞으로 수십장 그리다 보면 통하지않을까 하여 졸작이지만 올려놓고 보기로 한다. 제목 글씨와 낙관은 공제 진영근선생이 쓴 것이다. 2019년 12월5일 군포시 그림책박물관공원 추진단장 박찬응/ 전 안양 스톤앤워터 관장)

 

"관악산, 백운산, 청계산도 좋지만 나는 유난히 겨울 수리산을 좋아한다. 이유가 뭘까?  7년째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수리산자락의 변화를 보아왔다. 주말이면 가끔 수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몸으로 느끼는 수리산의 맛은 폭신폭신하다. 관악산이 바위산이라면 수리산은 흙산으로 몸이 기억한다.
녹음에 우거져 안보이던 수리산의 골격이 초겨울이 되면서 부터 드러난다. 등선이 보이고 계곡이 보이고 군데군데 하얀 바위들이 보인다. 특히 눈이 내리면 더욱 선명해진다. 화선지에 먹으로 선을 그은듯한 눈 내린 겨울 수리산이 좋다.  출근길에 수리산을 보니 잔설이 많이 녹았다. 이시간이 지나면 잔설이 다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점심때 군포시청 옥상에 올라 조그마한 아이폰을 꺼내 8컷으로 나누어 찍었다. 그림판으로 옮겨와 명암조절을 하고 이어붙이기를 했다. 여덟 폭 수리산 병풍 같다.
시간을 내서 화선지로 옮겨 그리고 목판에 칼로 새겨 찍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맘 바뀌기 전에 몸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시간이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 -박찬응-

 

 

[안양권지도]1976년 안양시(현 동안구 지역) 지도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77년 3월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안양의 현 동안구(비산동.호계동.평촌동-평촌) 1:5000 지도  

1974년 6월 항공촬영

1976년 편집

 

지도 상단에 표시된 하천은 청계저수지(현 의왕시 백운호수)에서 발원해 쌍개울(현 안양 중앙초교앞)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학의천으로 직강화된 지금과 달리 그야말로 구비구비 곡선을 그리고 모래사장이 폭넓게 분포돼 있음을 알수 있다.

지도 상단 우측 관양동에는 대한전선 안양공장(현 평촌 스마트스퀘어로 개발)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도 크게 보일만큼 면적이 8만여평에 가까운 260323.2m²에 달한다. 대한전선 우측으로는 태평제지, 신생화학, 태신화학 등 자그마한 규모의 공장들과 밤나무단지의 표기도 보인다.

참고로 안양하면 1950-60년대 안양읍내 전역이 포도밭으로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했지만 그 이전인 1920-30년대에는 밤나무가 참 많아 전국 밥줍기 대회가 열릴 정도로 밤 생산의 명산지로 유명했다.
실제 동아일보 옛 신문을 보면 1933년(10월1일)과 1934년(10월1일) 신가정(여성동아 전신) 주최로 제1회와 제2회 전국 부인 밤 줍기 대회가 안양에서 열렸는데 장소는 안양3.9동 일대인 노적봉 아래(현재의 성원아파트, 프라자아파트 주변)에서 열렸다.
노적봉은 현재의 안양예고가 자리한 나즈막한 산으로 과거 안양9동의 지명은 율목(栗木)마을, 율목동으로 불리울 정도로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또 1939년 10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보면 동아일보 영등포지국 주최 제1회 부인습률대회가 양짓말 밤나무밭 복판 넓은벌에서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1928년(10월 7일)과 1929년(10월 13일)에도 안양에서 조선일보 주최로 제2회와 3회 여자습률대회가 열렸는데 작고하신 변원신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담안(장내동, 안양4동, 중앙성당 주변)에서 열렸다고 한다.
안양4동은 과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墻內洞.澹安)이라 불리웠는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2001아울렛과 중앙성당 주변은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주최의 밤줍기 대회 기록은 안양 연표에도 올라 있다.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역사 기록을 보면 서울교구가 1937년에 밤나무 밭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목조 함석지붕을 건축했으며,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는데 현 중앙성당 건너편 가톨릭회관 뒷 마당에 있다고 중앙성당 안으로 이전한다.
지도 중간 좌측 비산동 표기 아래는 달안마을(현 동안구 홈플러스 주변)로 가구 수는 13호 정도에 불과했다.

참고로 달안마을은 위쪽으로눈 광복 직전인 1944-45년 안양3동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현 대농단지)를 짓고 시제품을 생산하던 일제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박흥식)가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하려던 곳이다. 

지도 중간 우측에는 민백마을(현 내손동)에는 20~25호 정도의 집들과 라이온상사, 부흥산업, 삼성아세치렌, 10여동의 공장들이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지도 아래 우측의 호계동은 경수산업도로(현 1번국도) 계획노선을 따라 위에서 부터 안말(현 호계시외버스정류장 주변), 방축말(현 호계중학교 주변), 신기(현 신기사거리 주변) 등 여러 마을들에 100호 이상의 가구들이 표기되어 있을 만큼 당시 꽤 컸다. 

참고로 호계동은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 시흥대로가 만나는 지점이었으며 지금도 수원시, 과천시, 군포시, 안산시 방면의 교차점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충지다.

특히 옛 지도(1872년 지방지도-규장각)를 보면 호계2동 주변에는 조선시대 사창(社倉- 조선 시대, 각 지방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 대여 기관)이 있었으며 1910년 이전에는 과천군 하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과천군 상서면과 하서면이 서이면으로 통합되면서 서이면사무소가 설치되는 등 1900년대 초반까지 인덕원 남쪽의 민백리, 갈산, 당산미, 도양리, 군포장, 귀인, 신촌, 신기 등의 마을을 아우르는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청감서원(호계서원)과 일제 강점기 초에는 낙영학교 등이 자리해 안양 교육의 기초가 된 곳이다.
지도 아래 중간에는 신촌마을과 귀인마을이 표기되어 있는데 표시된 가구 수가 꽤 많다.  
지도 아래 우측 평촌동 우측에 붉은선으로 표기된 도로는 현재의 흥안대로이다. 도로 우측에 갈산마을(현 의왕 내손아파트 주변)이 표기되어 있으며 그조측으로는 안양남초등학교 자리하고 있다. 학교 좌측에는 당산미마을(현 자유공원 주변)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는 안양의 원로 건축사인 최승원 교수님께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미지 파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안양권지도]1910년 당시 시흥군지도(수기)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10년 당시 시흥군 수기지도

 

명칭:  시흥군
크기:  55.5*79.2(0.04)

재질:  한지

설명: 개정전 면경계(일점쇄선) 및 면명은 검은색, 개정후 면경계 및 면명은 붉은색임.
출처: 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287786

 

시흥군(始興郡)은 1895년부터 1988년까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관악구·동작구·구로구와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일부를 관할하였던 경기도의 행정구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거대 시흥군으로 탄생했다가 해방이후 행정구역 개편 고정을 거치면서 소멸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시흥군청 또한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가 영등포로 그리고 안양으로 소재지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1914년 이전에는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 등이 존재했으나 일제는 과천군, 안산군을 시흥군에 편입시키면서 거대 지자체가 출범한다.

 

※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내용

시흥군 서면 : 구 시흥군 서면 + 남면 + 군내면 박달리 (현 경기도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시흥군 북면 : 구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 구 과천군 하북면 (현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노량진, 흑석동)

시흥군 동면 : 구 시흥군 군내면 (박달리 제외) + 동면 (현 서울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 상도동,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시흥군 신동면 : 구 과천군 상북면 + 동면 (현 서울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시흥군 과천면 : 구 과천군 군내면 (현 경기도 과천시)

시흥군 서이면 : 구 과천군 상서면 + 하서면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

시흥군 남면 : 구 과천군 남면 (현 경기도 군포시, 단 이중 대야미 지역 제외.)

시흥군 군자면, 수암면 : 구 안산군 지역 (현 경기도 안산시, 시흥시 남부)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시흥군은 면적이 하나둘 쪼개지기 시작한다

1936년 - 영등포읍,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반대방리 일부, 도림리 일부, 동면 상도리 등 경성부 편입

1941년 - 서이면,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 동면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 잔여지역(현 신대방동) 서울특별시 편입. 안양면, 안양읍으로 승격. 군청이 영등포에서 안양읍으로 이전

1963년 - 동면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독산리, 시흥리, 신동면 전역(현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서울특별시 편입.  화성군 일왕면 일부, 시흥군으로 이관되어 의왕면 설치.

이같은 분열은 계속된다

1970년 서면 광명출장소(광명, 철산리) 설치
1973년 안양읍 -> 안양시 승격 / 부천군 소래면 -> 시흥군 이관(7면)
1974년 서면 광명출장소 ->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7면 1출장소)
1979년 서면 -> 소하읍 승격 / 남면 -> 군포읍 승격 / 수암면(8개리), 군자면(7개리) 일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경기도 반월출장소 설치 (2읍 5면 1출장소)
1980년 의왕면 -> 의왕읍 승격 / 소래면->소래읍 승격(4읍 3면 1출장소)
1981년 소하읍+광명출장소 -> 광명시 승격(3읍 3면)

1982년 과천면에 경기도 과천출장소 설치(3읍 2면)
1983년 화성군 일부 의왕읍 편입 / 소래읍 옥길리 -> 부천시와 광명시에 분할 편입
1986년 경기도 반월출장소 -> 안산시 승격 / 경기도 과천출장소 -> 과천시 승격(3읍 2면)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시흥군은 점점 축소되고 결국 1989년에 군포읍이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그 외의 남은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결국 시흥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안양권지도]1979년 안양시(군포.의왕) 도시계획 계괄도

타임머신/옛지도읽기

 

2019.10.30/ 1979년 안양시 도시계획 계괄도

 

안양시가 읍에서 시로 승격(1973년)한 이후인 1978년의 도시 계획을 담은 지도로 최승원 건축사께서 소정하고 있는 지도입니다.

1979년 당시의 안양은 경부선 철도 아래로 안양천이 흐르고 지역특산물인 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인구 15만여 명의 작은 도시로 인구 변화를 보면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명, 1949년 8월 15일 안양읍 승격 당시에는 20,021명,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 당시에는 111,075명에 불과했지요.

지도에는 안양시와 당시 시흥군이었던 군포읍과 의왕읍을 포함하고 있네요.

눈에 띄는 것은 안양시 각동 행정지명으로 안양 1,2,3,45,6,7,8,9동 등 새로운 동이름과 함께 옛 동 이름이 함께 표기돼 있네요.

양지동 북부동, 주접동, 능골, 후두미동, 냉천동, 명학동, 골안, 방축말, 내비산동, 마분동, 간촌동, 준촌동, 부림동, 동편동, 삼막동, 벌터, 신촌, 화창, 친목, 호현 등 옛 동 지명과 마을의 이름들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1979년 2월 15일 발행

국립지리원 1978년 지도 참고

 

이 지도는 안양의 원로 건축사인 최승원 교수님께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미지 파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최승원 건축사는 1945년생으로 서울(종로구)에서 태어나 5살때 안양으로 이사를 와 시대동(현 안양1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초교와 삼성초교(5회), 안양중학교(12회)를 다녔다. 교육부 실업계 교과서 심의위원, 국립중앙박물관회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분과위원장, 앙가주망건축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최승원 건축도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본백화점 갤러리에서 최승원건축전을 개최했으며, 1998년 아카시아arcasia건축상 골든메달(천안티센쿠루프)수상했다. 건축 현장에 돌아다니는 나무조각을 수집하여 조형물을 만들던 취미가 이제는 제2의 인생 작업이 되어 부인인 신영옥 섬유공예작가와 부부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했다.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서는 최승원 건축사로 부터 옛 안양에 대한 기억구술자리를 가진바 있는데 세밀한 기억력으로 담아낼 양이 많아 세차례 가진바 있는데 유년시절, 한국전쟁 피난시절, 기차통학생 시절, 전쟁이후 안양의 거리모습, 교회,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한 기억과 비롯 광복직전인 일제강점기 비행기공장과 비행장 건설, 안양지역의 건축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술 내용은 2018년 자료집으로 발행하였다.

 

[안양권지도]1910년 10월 발행 조선교통전도 속 안양권

타임머신/옛지도읽기

 

<조선교통전도(1:1,000,000)>는 일본 오사카 대판매일신보사(大阪每日新報社)에서 신문9736호의 부록으로1910년 10월 1일 발행한 것으로 1899년 개통된 경인선, 1905년 개통된 경부선, 1906년 개통된 경의선 등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를 붉은선으로 그려지고 도로와 해로 등도 표기되는 등 조선 전체의 교통망과 조선 주요도시, 항구의 시가지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1910년은 경술년이고 융희(隆熙)4년으로 이 해 8월 22일 한일 합방조약이 조인(調印)되었고, 8월 29일 공포(公布)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설치되고, 9월 29일 통감부와 이사청을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로 하는 관제(官制)가 발표되었으며, 10월 1일부터 신임 총독이 임명되면서 식민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이 지도는 조선을 병합한 기념으로 신문사에서 급하게 발행한 것으로 분석된다.

제도자(製圖者는) 후등칠랑우위문(後藤七郞右衛門)이며, 인쇄소는 일본정판인쇄합자회사(日本精版印刷合資會社)이다. 지도의 중앙에 전도를 놓고 좌우에 주요 도시의 시가지도들이 배치하고 있는데, 우측에는 원산진·목포·군산·진해포·대구·부산·마산을, 좌측에는 평양·경성용산·인천이 있다.

조선교통전도 속 안양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의 도시 규모를 알 수 있는데 果川(과천), 始興(시흥), 安山(안산)이 규모가 컸으며 붉은 점이 그려진 곳에 행정 관청이 있었던 듯 싶다.

안양 주변의 교통망을 보면 마을, 도로, 철도 등이 표기돼 있는데 경성에서 수원으로 가는 도로망의 경우 果川(과천), 可微(가미/갈미), 全主義(전주의/???), 표기돼 있어 이도로가 果川(과천)에서 인덕원-호계동-의왕을 거쳐 水原(수원)으로 가던 옛 삼남길로 당시 통행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정조대왕의 능 행차길이자 시흥대로라 불리웠던 경성-노량진-시흥(현 서울 금천구)-만안교-안양-호계동-의왕-지지대고개-수원으로 가는 신작로는 표시조차 되지 않아 당시만 해도 삼남길보다는 통행이 적지 않았나 싶다.

경부선 철길은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1번 국도인 시흥대로를 따라 놓여져 있다. 역 명도 붉은색 글씨로 표기돼 있는데 永登浦(영등포), 始興(시흥), 安養(안양), 軍浦場(군포장) 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양권의 표기를 보면 博達里(박달리), 安陽村(안양촌), 軍浦川(군포천)으로 표기돼 이 지역에 동네.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안양 지명 표기에 있어 마을에는 安陽村(안양촌)으로 기를양을 썼으며 역명에는 安養(안양)으로 볕양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교통전도 이미지 자세히 보기: 국립고궁박물관 웹사이트 http://www.gogung.go.kr/imgView.do?title=%EC%A1%B0%EC%84%A0%EA%B5%90%ED%86%B5%EC%A0%84%EB%8F%84&cultureSeq=00016831LZ&imgSeq=11045

[안양권지도]19세기 초 제작된 여지도 속 안양권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 등장하는 수리산 지명 표기. 당시 안양 주변의 행정구역 명칭은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이다.

 

금천은 조선시대 관아와 행궁이 자리했을 만큼 규모가 컷던 고을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시흥현과 시흥군의 행정 명칭을 시작한 곳으로 1960-70년대 시흥이라 통칭하고(지금은 행정구역과 전혀 상관없는 시흥시가 사용함) 시흥역(금천구청역 바뀜)이 있었을 만큼 행정구역이 오래된 곳으로 안양은 고거 금천의 변방이자 때로는 과천의 변방이기도 했다. 

금천은 원래 백제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에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 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757년(경덕왕 16) 곡양현으로 고쳐 율진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금주(衿州)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414년(태종 14)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고 금천의 ‘금(衿)’자와 과천의 ‘과(果)’자를 따서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여 다시 금천현과 과천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금천현과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 1416년(태종 16) 금천과 양천을 다시 나누어 금천에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과천과 병합했다가 곧 복구하였다.

1795년(정조 19) 2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인 8도제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명칭을 모두 군으로 통합함에 따라 시흥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 경기도의 한 군이 되었다. 이때에는 읍내와 안양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이 있었다. 서울의 외곽지역으로 교통상 중요한 몫을 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도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변화를 겪다가 현재는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의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금천이라는 지명은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다가 199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로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금천구로 독립하면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옛 금천현의 행정구역을 보면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서울특별시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조선 전기 과천현과 분리될 당시 금천현은 동쪽으로 과천현, 남쪽으로 안산군, 서쪽으로 부평부, 북쪽으로 양천현과 이웃하고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와 안양시 일부,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구로구 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과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곳이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동사힐현(冬斯肹縣)·율목군 등 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율진군으로 바꾸어 한주에 속하였다. 이때 곡양현(穀壤縣:시흥)·공암현(孔巖縣:양천)·소성현(邵城縣:인천)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 과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광주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으로 바뀌어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금천에 병합되어 금과현으로 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복구되었고, 세조대에도 금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나 곧 분리되었다. 별호는 부안·부림이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안산군·시흥군·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어 과천군의 관할구역 중 노량진동·본동·흑석동·동작동은 북면에, 우안리·양재리 등 8개리는 신동면에, 안양리 등 4개리는 서이면에, 관문리·문원리·갈현리·하계리·막계리 등은 과천면으로 개편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과거 과천의 변방이었으나 정조대왕 능행차길인 시흥대로(국도1호선) 개통, 1905년 경부선 철길과 안양역이 생기면서 도시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안양과 달리 농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과천은 1978년 과천신도시계획이 확정·공고되어 계획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는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 출장소가 설치되어 행정을 관장하다가 1986년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정부제2종합청사·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국사관·경마장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행정기능을 분담하는 전원적인 위성도시로 자리잡았다.

 

지도 전체보기: 서울역사 아카이브 (
http://www.museum.seoul.kr/archive/archiveView.do?currentPage=5&type=C&type2=&arcvGroupNo=3121&lowerArcvGroupNo=&arcvMetaSeq=24799&arcvNo=73639&realArcvGroupNo=3121&searchVal= )

 

여지도(경기도)
아카이브번호 73639

유물번호 서13183

자료출처 『(이찬 기증)우리 옛지도』(2006), 29쪽 

내용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목판본 지도책. 〈함경도〉에 1787년에 신설된 ‘장진부(長津府)’가 있고, 1800년에 개칭된 충청도의 ‘노성(魯城)’이 표시되어 있으나, 1822년에 설치된 함경도의 ‘후주부(厚州府)’가 반영되지 않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지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미 18세기에 개칭된 평안도의 ‘이산(理山)’과 경기도의 ‘금천(衿川)’ 등이 여전히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지명 표기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장책의 순서가 독특한데, 중국도, 일본국도, 유구국도,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에 이어, 팔도의 도별지도, 마지막에 세계지도인 ‘천하도’가 수록되어 있다. 팔도의 도별지도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배치해, 함경도 지도가 가장 앞에 수록되고, 전라도가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서울이 위치한 경기도부터 시작되던 일반적인 도별 배치의 순서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음각으로 인쇄되어 잘 눈에 띄지는 않으나 각 면의 바다 부분에는 쪽수에 해당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 지도의 순서를 알려 준다.
지도의 전체적 윤곽 및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조선전도인 〈팔도총도 八道總圖〉와 도별도 즉 ‘동람도(東覽圖)’와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전도인 〈동국팔도대총〉은 〈팔도총도〉에는 없던 묘향산(妙香山)을 크게 그리고, 각 도의 도명 우측에 소속 군현수(郡縣數)와 경지면적을, 좌측에 민호수(民戶數)를 기록해 더 많은 정보를 담은 점이 다르다.
또 ‘동람도’의 도별지도에서는 각 군현과 하천·진산(鎭山)만을 표시하고 있으나 이 지도에는 각 군현의 위계(位階)와 서울까지의 시간거리인 일정(日程)이 군현명 옆에 적혀 있다. 해안에는 포구(浦口)·진보(鎭堡) 등도 수록되어 있다. 우역제(郵驛制)의 역도(驛道)를 직사각형으로 표시해 ‘동람도’보다 훨씬 더 자세하다. ‘동람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17세기 이후에 설치된 군현인 칠곡(漆谷)·영양(英陽)·순흥(順興)·자인(慈仁) 등의 군현이 표시되어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도별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28수의 별자리로 구분하여 영역의 경계를 선으로 표시하고 별자리의 이름을 기록한 점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 사상인 분야(分野)의 관념을 적용한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와 땅의 나누어진 일정한 지역이 서로 대응해 짝을 이룬다고 보는 생각인 분야설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는 천지상관적(天地相關的) 사고를 보여주는 점에서 동양 사상의 특징을 반영한다. 

 

[안양권지도]1951년 군사지도에 표기된 안양의 동네 옛 지명

타임머신/옛지도읽기

 

1951년 군사지도상의 안양. 당시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으로 안양역을 중심하는 하는 읍내 시가지가 빨간색으로 표기돼 있다. 장내동(안양4동), 주점리-주접리(안양6.7.8동), 후두미(안양9동), 바우골(안양9동 담배촌 공군부대입구), 능골(안양9동/새마을), 양산말-양짓말(안양3동),수풀재=임곡마을(비산동), 오산, 석수동, 충훈부, 박달리, 붓골(박달동 범고계 호현마을), 벌터=평촌(석수1동) 등 정겨운 옛 지명들이 표기돼 있다.

화창이라 표기되어야 할 곳이 벌터(평촌)라 표기되는 등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지명도 있지만 안양1.2.3..... 석수 1.2...동 등 삭막하기 짝이 없는 아라비아 숫자 동네 이름으로 바뀐 엣 지명이 담겨 있는 동네와 마을이 어디인지 살펴 볼 수 있다./ 지도 사진 제공: 권순일 동안구청장

[안양권지도]1936년 영등포 지도와 시흥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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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시흥군 #영등포구 #안양 #금천 #시흥/ 시흥군청이 영등포에 있을 당시인 1936년의 옛 지도로 당시 영등포의 중요시설들이 상세하게 표기돼 있다. 자료를 보면 시흥군청은 1949년까지 지금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경인국도 언덕배기에 있었다. 일제 때에는 현 영등포구의 절반과 대림동 일대까지 시흥군에 속했을 정도였다.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하는 등 시흥대로를 건설하고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와 거주민들 늘어나게 된다. 1905년 1월에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점차 도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의 중심은 호계동 일대였다. 이는 삼남대로, 시흥대로, 남양길 등 사통팔달 도로가 교차하는 군포사거리 인근에 군포장이 있었고 행정관청인 서이면사무소도 현 호계도서관 인근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4월 1일 과천군 상서면(동안구 일원)과 하서면(만안구 일원)이 통합되면서 축조된 행정관청으로 1905년 안양역이 개통되고 안양역일대가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가 늘어나자 1917년 7월 6일 안양의 중심지인 안양리(현 안양일번가)로 옮긴다.

서이면서무소는 1941년 10월 1일부터 안양면서무소로 개칭되고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된다.

앞서 1947년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이 안양면으로 이전되면서 안양은 시흥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시흥군청(1946년7월 준공)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안양일번가 삼원프라자호텔과 그 주변이다. 이곳이 안양의 중심지로 번창하게 된 계기는 조선조 22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 수원화산 능행시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인 삼성천에 만안교를 건설한 후 안양에 안양행궁을 짓자 민가가 늘어났고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생기면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시흥이라는 지명의 기원이자 시흥의 뿌리는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으로 과거 시흥현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다. 시흥은 경기 서부에 있는 군현으로 고구려때는 잉벌노현, 통일신라때는 곡양현, 고려때는 금주, 조선때(정조 이전)는 금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 금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쪽, 관악구 일부, 동작구 일부와 경기 광명시 일대, 안양시 석수동, 박달동 일대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1910년 시흥동에 있던 시흥군청(始興郡廳)은 지금은 영등포동이 된 영등포리(永登浦里)로 이전한다.

1914년에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되는데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을 합쳐 거대 규모의 통합 시흥군을 만든다. 이때 과천현에 속하던 서울 동작구, 서울 관악구 사당동, 남현동, 서초구와 과천시, 군포시랑 안양시 대부분과 안산이었던 정왕, 군자지구가 시흥군에 편입(통합)된다.
1946년에 서울 영등포역 주변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은 다시 안양읍으로 옮겨지게 된다.
1960년대 산업화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등으로 안양읍이 서울의 주거, 공업기능 위성도시로 성장하며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1973년에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하고 같은 시기에 서면(현 광명시) 지역 중 철산리와 광명리가 광명출장소로 승격한다.
1973년 안양시 승격에 대한 보상(?)으로 부천군 소래읍(지금의 시흥시 북부)을 시흥으로 편입시키고 1979년 산업신도시인 현 안산시 일대에 반월출장소가 설치된다.
1981년에 서면(소하읍+광명출장소)는 서울편입 대신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고 1982년 과천면을 과천출장소로 승격시키고, 1983년에 화성군(조선시대 수원부) 의왕면을 시흥군 의왕면으로 편입시킨다.
1986년에 반월출장소, 과천출장소가 각각 안산시, 과천시로 승격된다.
1989년에 군포읍과 의왕읍이 각각 군포시와 의왕시로, 소래면(옛 인천도호부 지역)과 군자면, 수암면(옛 안산군 지역)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의 행정구역에서 폐지됨과 동시에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현재 시흥시가 100년 시흥군의 역사를 이어간다고 하지만 사실 시흥시는 옛 시흥군과 별 관계가 없다. 시흥군이 행정구역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과 수도권의 도시화 과정에서 여러 신도시들이 분리, 독립하는 등 아주 난해하고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옛 시흥군이 엉뚱하게도 행정구역상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행정구역에서 시흥이란 명칭을 잇고 있는데에는 필연 어떤 사연이 있을터 이리저리 추적을 해보니 당시 행자부의 총무과장이 역할(?)이 컷음을 확인할수 있어 당시 행정 집행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였는지를 가늠케한다.

 

관련글: [경인매일 사설] 시흥시사 발간에 바란다 http://www.k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7601

관련글: [디시인사이드] 시흥시가 향토사에서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게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iheung&no=15645

관련글: [타논의 세상이야기]1930년대의 영등포를 거닐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s89225&logNo=220615986577

관련글: 시흥100년을 앞 둔 거대한 시흥시의 역사 https://shoasis.tistory.com/508

[안양권지도]19세기 광여도(古4790-58)-금천현 지도속 안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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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 지도집인 『광여도』 경기도-금천현 지도속에 등장하는 안양권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금천현은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천구청 근처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한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한강가에는 강을 넘나들던 楊花津(양화진)과 方下串津(방하관진) 등의 나루가 표시되어 있다.

그 오른쪽에 보이는 仙遊峯(선유봉)은 지금의 양평동 인공폭포 부근에 있다.

읍치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이고, 아래쪽의 하천이 지금의 도림천이다.

안양천 주위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활한 평지인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진산) 三聖山(삼성산) 아래쪽에 있으며,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였다.

지도 위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로 연결되는 安養橋(안양교)가 보이고 있고,

삼성산 아래쪽의 北紫霞洞(북자하동)이 지금의 서울대 자리이다.

읍치 오른쪽에 보이는 愍懷墓(민회묘)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의 부인인 姜氏(강씨)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