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20210214]경인일보, 기후위기 빙산의 일각

이야기보따리/기사

[좋은 기사를 소개합니다]

 

지구 온난화를 막아주세요
한반도 덮친 북극의 비명

환경위기에 따른 위험도가 커질수록 12시에 가까워지는 '환경위기 시각'은 '오후 9시47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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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경인일보, 코로나가 바꾼 일상 '동네를 다시 보다'

이야기보따리/기사

[좋은 기사를 소개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멀리 있는 대형마트에 가기보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거나 집 근처 가게를 찾았다. 여름 휴가도 가깝고 한적한 곳으로 가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도시에서 눈을 돌려 가까운 곳에 있던 우리 지역 명소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지자체 역할도 실감하게 됐다. 매일같이 울리는 재난문자, 각 자치단체마다 지급하는 재난지원금,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보건소와 공공의료원 등은 우리가 그간 잘 알지 못했던 로컬을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 재난이 닥치니 지원도 진료도 소비도 마을에서 이뤄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로컬의 재발견'이다.

 

 

경인일보 :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1)로컬의 변화]코로나가 바꾼 일상 '동네를 다시 보다' (kyeongin.com)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1)로컬의 변화]코로나가 바꾼 일상 `동네를 다시 보다`

멀리있는 마트대신 근처가게로주거기능 탈피 `생활터전` 주목지역 농산물 `로컬푸드`등 인기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멀리 있는 대형마트에 가기보다 온라인으로 물건..

www.kyeongin.com

 

경인일보 :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2)로컬의 가치]위기때 더 빛났다 '지자체의 존재감' (kyeongin.com)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2)로컬의 가치]위기때 더 빛났다 `지자체의 존재감`

`정부 손길` 안닿는 극저신용 등 틈새지원사는 곳 따라 다른 기본소득 `소속감` 확인코로나 정책 대다수가 `지방정부 손` 거쳐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가 그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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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3·끝)로컬의 미래]텅 빈 인천항크루즈터미널… '지역 인프라'에 주어진 숙제 (kyeongin.com)

 

[코로나19-로컬의 재발견·(3·끝)로컬의 미래]텅 빈 인천항크루즈터미널… `지역 인프라`에 주어

국내 최대 규모 불구 `개점휴업`"시스템 앞세운 위기 극복 관건"체육시설 등 전반적 논의 시급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역 공공인프라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www.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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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2]광주MBC 특집다큐 건축의시간 8부작

이야기보따리/기사

좋은 건축이란 뭘까...
건축의 사회적역할에 대한 질문!
우리시대의 건축을 이야기한다!
광주MBC특집다큐멘터리 8부작
매주 목요일 밤 10시40분 방송

기획 김민호, 연출 이경찬, 촬영 이경섭, 정형배, 이성근, 윤요한, 조승우, 강상우, 심우일, 작가 박연숙, 박진희, 임현희

건축의 시간[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광주MBC가 건축물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건축의 시간'을 방영했는데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시청자들의 반향 또한 뜨겁다.

‘건축의 시간’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건축물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디자인의 구성 요소인 건축물은 그것이 좋은 건축이든 나쁜 건축이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건축의 시간’은 좋은 건축물이 가진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건축물 하나가 멋진 경관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주변의 분위기도 바꿀 뿐 만 아니라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던 삭막한 동네에서 왁자지껄한 모임이 벌어지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버려지고 방치된 작은 마을이 건축물 하나로 인해 지역 명소로 탈바꿈할 수 있다며 건축의 힘에 주목한다. 
팬데믹 시대에 달라진 건축물의 모습도 담았다. 설계 단계부터 동선을 고려해 지어진 건축물부터 언제든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가변형 건축물, 건물 내부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이 갖춰진 건축물 등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건축물에 대한 방향도 제시한다. 
1편인 ‘수직에서 수평으로’ 편은 수직으로 뻗은 랜드마크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2편 ‘동네를 바꾸는 작은 건축’ 편은 크지 않은 건축물이 바꾼 동네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3편 ‘공감이 사람을 움직인다’편은 기존의 딱딱한 공간에서 탈피해 사용자 중심으로 공간혁신을 한 학교, 사무실, 병원을 찾아가 본다. ‘오래된 미래’를 주제로 한 4편은 버려진 건축물을 문화자원으로 되살려 또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재생건축을 통해 건축물의 가치를 얘기한다. 5편인 ‘지루함과 센세이션’은 도시의 모습을 변주하는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소개하며, ‘미래건축’을 주제로 한 6편은 환경을 지키는 동시에 첨단 기능을 충족할 건축물과 경제적이고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안전까지 책임지는 미래형 건축에 대해 탐구한다. 7편 ‘건축이 기억하는 것’은 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건축물과 함께해 온 사람들을 만나며, 8편 ‘사람을 잇다’ 편은 이웃과 함께 하는 공유공간이 있는 집을 찾아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은 MBC 손정은 아나운서와 배우 강신일이 맡았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이경찬 PD는 “코로나로 바뀐 일상에 맞춰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을 담는 건축물도 바뀌어야 한다”며 “이번 ‘건축의 시간’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건축물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 미래에 맞는 건축의 방향도 함께 고민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예고 [건축의 시간]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1부;수직에서 수평으로 [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2부; 동네를 바꾸는 작은 건축 [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3부;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 제4부 오래된 미래 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5부; 건축이 기억하는 것 [광주MBC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6부; 진화하는 건축 [건축의 시간_광주MBC_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7부; 지루함과 센세이션 [건축의 시간_광주MBC_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2) 건축의 시간 제8부; 사람을 잇다 [건축의 시간_광주MBC_ UHD 특집 다큐멘터리 8부작] - YouTube

 

[기사]마라톤 손기정 1933.10.17 경성운동장-안양 코스에서 세계신기록 냈다(20201110)

이야기보따리/기사

 

마라톤 손기정 1933.10.17 경성운동장-안양 코스에서 세계신기록을 냈다. 1933년 10월 17일 제9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처음으로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성운동장을 반 바퀴 돌고 출발해 동대문~종로를 지나 경수가도 안양을 왕복하는 42.195㎞(26과 4분의1마일) 풀코스 마라톤에서 마치 중장거리 주자가 뛰는 것처럼 달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스피드를 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했지만 손기정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2시간29분34초로 1위, 남승룡은 2시간31분36초로 2위. 모두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의 자바라가 수립한 2시간31분36초를 뛰어넘는 세계신기록이었다.

 

[마니아리프트]정태화기자
승인 | 2020-11-10 08:00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46)마라톤이야기⑦권태하 편지받고 중장거리에서 마라톤으로 바꾼 손기정

http://www.maniareport.com/view.php?ud=20201110075445570818e70538d2_19&fbclid=IwAR3K1UGZtVW46_PHj1HWd2b4a-YWUPBEEhfQXFJEScYojXxWrQH3-LslE8M

 

 

[기사]피로 물든 태극기 60여년 보관한 할머니의 감동 사연(20101226)

이야기보따리/기사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6.25전쟁때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 고이 간직


<오마이뉴스>10.12.26 17:28l최종 업데이트 10.12.26 17:28l

최병렬(choipong)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6.25전쟁때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 고이 간직

 

   
맹은순 할머니가 60여년 보관해 온 피로 물든 태극기 
  

6.25 한국전쟁 당시 전쟁에 나가는 남편과 생이별을 하면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팬티 속에 감추어 오던 한 할머니가 반동가족으로 몰려 집단 처형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서 피로 물들었던 태극기를 보관해 왔던 사연이 60여 년만에 알려져 감동을 주고있다.

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에 '추억의 명화 거리'를 조성했다. 박달2동 주민자치센터가 3400여 만원의 예산으로 마련한 이곳은 안양고 앞과 아파트 주변에 흉물로 방치돼 왔던 150여 미터 옹벽 주변을 도시미관 차원에서 조성한 것으로 지난 24일 제막식을 가졌다.

이곳에는 동양화 8점과 세계명화 25점, 추억사진 9점 등 대형그림과 사진 등 42점이 옹벽과 담자락을 따라 '동양화의 거리', '추억의 거리', '명화의 거리' 등으로 구분지어 조성돼 지역주민들은 물론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특히 그림들을 따라 걷다 보면 안양고 정문 앞 옹벽에 내걸린 그림 속에 피로 얼룩지고, 찟겨져 나간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 헐머니의 사진과 글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

 

안양시 박달2동 주민센터가 조성한 추억의 명화거리 
14살 때부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겪은 할머니의 애국심

 

사진 속 주인공은 강원도 철원이 고향으로 현재 박달2동 지역에 거주하는 맹은순(88세)할머니로 그림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의 애국심이 담겨 있다.

할머니의 사연을 보면 1937년 일제 강점기 당시 14세였던 소녀는 한반도 문양의 자수를 몸속에 간직하다 일본 헌병에 발각돼 고초를 겪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모부에 보내져 24살까지 독립운동가들의 편지와 자금이송 등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이후 맹 할머니는 황해도 신천으로 돌아와 25세 되던 해에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결혼 1개월 열이틀만에 6.25 전쟁이 반발했다. 이로 인해 옹진전투때 남편이 속해 있던 국군 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새벽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때 할머니는 남편이 건네준 태극기를 팬티 속에 넣어 보관해 오던 중 어느날 반동가족으로 집단 사살현장으로 끌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당시 죽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총검으로 엉덩이를 찔렀는데 그때 흐른 피가 태극기를 물들인 것이다.

맹 할머니는 38세때 안양 박달동에 정착했는데 아직도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태극기를 펼쳐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안양고교 정문앞 옹벽에 부착된 맹 할머니의 태극기 사연 
 

2010년 당시 박달2동주민자치센터 이엽 동장(51)은 "맹 할머니는 기초수급혜택자로 어렵게 사시면서도 애국심이 투철하시다"며 "주위로부터 태극기를 보관해 오고 있는 사연을 전해 듣고 이를 널리 알리는 방안으로 '추억의 명화 거리' 조성을 계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동장은 "할머니의 사연이 청소년들에게는 나라 사랑 정신을 본받는 산 교육으로 전해지고, 50-60년대 박달동지역 주변의 추억의 사진들과 명화들이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되살리고, 도시 미관을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기사]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20200629)

이야기보따리/기사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
뉴스워커(http://www.newsworker.co.kr)

신대성 기자 승인 2011.08.22 12:16 
 
의왕시민은 89년 市로 승격한데는 대우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 믿는다
대우사원아파트 37개동 1138세대, 4~인 기준 5~6천명 인구 유입효과

※글에 도움주신 분들
신창현 전 민선1기 의왕시장(대우건설 OB),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대우건설 OB),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대우건설 OB), 김주민 내손라재개발구역 이사, 임신택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대우건설 홍보실 외 다수

의왕시 정비사업현황을 취재(52페이지 참조)하던 중 가장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이 포일대우사원아파트이었다. 이곳은 현재 대림산업이 재건축을 수주해 현재 의왕 내손 대림e편한세상이 들어선 곳이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원아파트는 도심지에 건립한다. 출퇴근이 용이하여 업무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아파트는 지금 대림산업에 의해 리모델링되어 ‘압구정 아크로빌’이라는 고급아파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대우건설은 의왕면 포일리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다.(대우사원아파트가 건립된 때는 84년 4월이며, 의왕이 시로 승격한 때는 89년 1월이었다.) 그것도 1138세대라는 당시로는 메머드급 대형아파트였다. 일개 읍 따위에 이렇게 대단지 아파트를 짓게 된 것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읍에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했는가

이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기 위해서는 대우건설 출신들을 만나봐야 했다. 이 때 연락이 가능했던 분들이 신창현 전 의왕시장(민선1기)이었으며,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 그리고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등이었다. 이들 중 신창현 전 시장과 김동화 대표는 의왕대우사원아파트에 직접 살고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건네 오는 답은 간단했다. “땅값이 쌌으니까 그곳에 아파트를 지었지” 신창현 전 시장의 말이다. 김동화 대표는 당시 신입사원 시절이어서 잘 모른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내손 라구역의 김주민 이사가 알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포일택지개발지구로 1978년부터 개발계획이 나오고 택지개발공사가 이뤄졌다.

당시 포일동·내손동 일대는 배나무 밭이었다. 이곳에 땅을 깎고 평평하고 반듯하게 구획을 정리하는 사업이 이뤄졌다.

포일택지개발사업에 선두에 선 곳이 대우건설이었다. 대우건설은 1차 포일주공 터(지금의 포일자이)를 구획정리하고 2차로 대우사원아파트(지금의 포일 e-편한세상)터를 정리했다. 그 이후 대우건설 계열회사가 지금의 내손 가·나·다·라 지역의 구획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건설이 의왕 포일동에 대우사원아파트를 짓게 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앞서 신창현 전 의왕시장이 말했던 것처럼 땅 값이 쌌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당시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되고 주택건립사업을 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선 곳이 없었다. 주택공사에 1차부지인 포일주공은 짓게 했지만, 2차 부지까지 떠넘기기에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에 택지구획정리를 맡은 대우건설이 총대를 메고 아파트를 이곳에 건립하게 됐다.

대우건설이 아파트를 건립하게 된 시기는 81년부터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최초의 주택건립사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81년 12월에 착공하여 83년 4월에 준공을 마친 개포고층아파트(대우라는 이름을 당시에는 쓰지 않았다.)가 최초였다.(자료, 대우건설 홍보실) 그 이후 세 번째로 준공한 아파트가 바로 이곳 포일대우사원아파트다.

사원아파트 개념으로 초대형 단지를 조성한 것은 대우건설이 최초였다. 압구정현대사원아파트는 1개동에 33㎡(10평 남짓) 정도로 800세대를 지은 것이었으니 대규모라 보기 어렵다. 또한 분양이 아닌 임대 형태였으니 이 또한 대우사원아파트와 다르다.

대우건설 직원 대우사원아파트로 이주하다

 

다음으로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한 일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임·직원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신창현 전 시장이 의왕시와 인연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김동화 대표도 이 때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고 한다.

신 전 시장이 이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자연경관이 풍부해 살기 좋았다는 것과 서울역(당시 대우건설 사옥은 서울역에 있었다.)에서 사원아파트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이면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포일리 가자고 해야 한 적도 많았다 한다.)

또 하나는 대우건설이 사원아파트에 들어오는 임·직원들에게는 저리로 융자를 해줘 적은 돈으로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동화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는 당시의 아파트가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랬을 것이 아직 젊은 나이에 부동산 가격에 민감해 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것이 입사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아 둔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인데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을 보니 김우중 회장이 많은 혜택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저리 융자에 매달 월급받아 갚아가면 됐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그들은 회상했다.

이런 연유로 대우건설은 의왕과 특별한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의왕시가 시로 승격하기 위한 필수요건인 인구수도 대우건설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의왕시민들은 보고 있다.

1980년 통계청 자료 가족당 구성원 기준을 보면 1가족 당 자녀수는 3~7명까지로 평균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거주하는 대우건설 직원 또한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원아파트는 포일주공과 달리 큰 평형의 아파트가 건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최소 5천에서 6천~7천명의 대우건설 가족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의견이다. 신창현 전 시장이 민선1기로 당선된 것도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대우건설은 경영난으로 워크아웃을 겪게 되고 그 사이 2003년에 있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는 재건축사업의 동반자로 대림산업을 시공자로 선정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2006년~2008년까지 3회 연속 시공능력평가 1위를 달성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대우건설 정창두 남부사업소 지사장).

건설회사가 가지는 일반적인 통념이 본사 주변에서 발생하는 공사수주는 반드시 해야 하며, 회사명이 걸린 건물을 재수주할 때 또한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림산업은 대림아파트 리모델링공사에서 반드시 수주해야 한다는 각오였으며(2006년 대림산업 리모델링 팀장의 말), 코오롱건설은 과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로 과천본사 인근의 주공아파트 재건축은 기필코 수주해야 한다는 암묵적 목표를 잡고 있다.(코오롱건설 수주기획팀 부장의 말) 대우건설 또한 김우중 전 회장의 혼이 담겨있는 대우사원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하지 못했으니 얼마만큼의 자존심은 깎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우건설은 내손동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있었던 그곳, 그리고 포일택지개발지구의 구획정리 또한 대우건설이 한 이곳에 대우건설의 브랜드 ‘푸르지오’를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대우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이 의왕시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것만큼 이번 내손동 재개발구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대우건설의 자존심이 이곳 의왕에 있기 때문에 2003년 잃은 자존심을 이번에 기필코 되찾겠다는 각오다.

대우건설 그들은 ‘대우맨’이라는 자존심을 가슴에 담고 있다. 우리에게 대우맨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인식된다. 리비아의 악조건에서도 성공적으로 건설을 마무리했던 불굴의 의지처럼 그들 가슴에 ‘대우맨’을 담고 오늘도 현장을 누빈다.

 

출처 : http://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

 

 

[기사] 당장 떠나야 할 안양의 숨겨진 매력

이야기보따리/기사


더 추워지기 전에 지금 당장 떠나야 할 안양의 숨겨진 매력 소문을 소개합니다.


경기도뉴스포털  |  2016.11.10 16:43

글 보기: https://gnews.gg.go.kr/news/story_news_view.asp?BS_CODE=S043&sel=B027&number=973

낙엽이 지는 완연한 가을.
지난 주말에는 겨울의 문턱인 입동을 앞두고 많은 여행객들이 저무는 가을을 즐기기 위해
전국 유명 산과 유원지 등으로 여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만약, 아직 늦가을을 즐기지 못한 분들 계시다면 여기를 주목해 주세요.

가을 여행철이라지만,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주변 가까이에서도 가을 정취는 물론!
예술작품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경기도 매력소문 따라 떠나는 여행~
안양의 도심 속 자연, 그리고 경관으로의 여행지를 소개합니다.

[기사]아름다운 자연과 이야기가 숨어있는 군포

이야기보따리/기사

아름다운 자연과 이야기가 숨어있는 군포로 떠나보세요!


경기도뉴스포털  |  2016.12.14 13:30

글 보기 : https://gnews.gg.go.kr/news/story_news_view.asp?BS_CODE=S043&sel=B027&number=1014

 

이 곳에는 자연이 있습니다.

철쭉으로 봄을 만끽하고,
수리산과 덕고개당숲에서 숲의 향기를 마시며,
갈치저수지에서 고즈넉이 낚시를 즐기고,
반월호수에서 오늘의 태양이 지는 걸 지켜볼 수 있는 곳.


이 곳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중건된 천년고찰 수리사와
조선중기에 건축된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등
잠들지 않은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곳.

경기도 매력소문 따라 떠나는 여행~
이번에는 군포에서 만날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합니다.

 

[기사]정조 임금 어가 행차하듯 가는 '통영별로' 첫걸음

이야기보따리/기사

정조 임금 어가 행차하듯 가는 '통영별로' 첫걸음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5)통영별로(統營別路) 다시 출발선에 서다
출처: 2013.01.17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626)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앞선 호에서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통영로가 숭례문에 도착함으로써 긴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도착은 새로운 출발을 전제하는 것이니, 방향을 바꾸면 들머리가 날머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계사년 1월, 이제 통영으로 향하는 다른 길(통영별로, 통영일로)을 잡아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통영별로(統營別路)는 서울과 삼도수군통제영을 오가던 통영로(統營路)의 다른 길입니다. 그 경로는 숭례문을 출발,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남행하다가 전주 삼례역(參禮驛)에서 갈라져 임실 남원 함양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이릅니다. 이 길은 정조의 화성 행차로,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암행로가 겹치고, 공주에서 전주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루트와도 부분적으로 겹치는 역사적인 길입니다. 독자 여러분,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저희와 길벗이 되어 길 위의 역사를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숭례문을 나서다
우리가 걷는 통영별로의 서울∼수원 구간은 대체로 정조 임금이 화성 행차를 위해 오간 길과 겹치게 되어, 이 노정을 따라 옛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남대문을 출발한 길은 통영로와 달리 곧바로 남쪽으로 이르지 않고 남서쪽으로 길을 잡아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따릅니다. 〈대동지지〉에는 예서 동작나루까지 20리라 했습니다.
남대문을 나서서 얼마 걷지 않으면 옛 남지(南池)가 있던 자리에 이릅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화기(火氣)가 강해 그것을 막기 위해 동대문 안쪽에 동지(東池), 서대문 북쪽에 서지(西池)와 이곳에 남지를 두었습니다. 뒤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에도 광화문 바깥에 물에 사는 상상 속 신수(神獸)인 해태를 새긴 석상을 세운 것도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이렇듯 도성의 여러 곳에 못을 둔 것은 지방의 읍성 내에 연못을 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평소에는 풍치를 돋우는 수변공원의 구실을 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한 방화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곳의 옛 경관을 살필 수 있는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는 연못 안의 연꽃과 어우러진 버들이 그려져 있어 남지의 그런 쓰임을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기려 세운 남지-터 표석에는 '서울 도성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을 새겨 두었습니다. 이제 시한을 다해 가는 MB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지 않아 불에 타버린 숭례문을 바라보며, 처음 이곳에 못을 두었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청파 배다리를 향하다
숭례문을 나선 정조 임금의 어가는 남지를 지나 지금의 서울역 부근에 있던 도제골(도저동:桃楮洞) 앞길을 지나 청파 새다리가 있던 청파동 1가를 향하게 되는데, 우리는 옛길을 덮어쓴 세종대로를 따라 걷다가 이문동에서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건넙니다.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가로질러 건너면 머잖아 옛 청파역(靑坡驛)이 있던 청파동을 지나게 됩니다. 이 역은 고려시대 청교도(靑郊道)에 속한 청파역(靑波驛)이었다가 조선시대까지 그 쓰임이 이어져 왔습니다. 청파역은 동대문 밖 4리에 있던 노원역(盧原驛)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성부 관할(도성에서 10리) 안에 있던 두 역 가운데 하나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역원에는 '숭례문 밖 3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곳은 남태령을 넘어 통영별로와 삼남대로를 오가는 길과 노량진을 거쳐 시흥을 오가는 길의 갈림길로 그려져 있습니다. 숙대 앞에서 옛 밥전거리(밥을 팔던 곳)가 있던 삼각지로 이어지는 지금의 청파로가 대체로 옛길이 지나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용산 언덕 앞길을 지난 어가는 석우(石隅:돌모루) 만천주교(蔓川舟橋)를 거쳐 한강 배다리에 이릅니다. 지금 옛 돌모루 자리에는 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만천주교는 지금의 남영역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청파배다리터' 표석을 세우고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터'라 새겼습니다. 바로 이 청파배다리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에 남대문 바깥에 있었다고 전하는 청파신교(靑坡新橋)입니다. 이 다리는 처음에 만초천(蔓草川)에 배로 다리를 놓아 배다리 또는 선교(船橋)라 했다가 뒤에 돌다리로 고쳐 쌓았는데, 그 즈음에 청파 새다리라 한 듯합니다. 정조 임금의 능행길은 예서 노량진으로 길을 잡아 그곳에 미리 설치해 둔 배다리로 한강을 건넜는데 그 자리는 대체로 지금의 한강철교가 놓인 곳이랍니다. 한강을 건넌 어가 행렬은 시흥과 안양을 거쳐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에 이르기까지 통영별로와 헤어지게 됩니다.어가가 용산 언덕 앞길에 나오자 관광민인(觀光民人:구경꾼)이 모여들었는데 왕은 이를 막지 말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때 어가가 당도한 곳은 청파동 1가에 있던 밤동산(율동산:栗東山)에서 이어지는 율원현(栗原峴)으로 불리던 방울재 부근으로 지금의 효창공원 동쪽입니다.
한강을 건너다
통영별로는 청파배다리에서 지금의 용산역 부근을 지나 동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게 됩니다. 배다리를 지나는 옛길은 옛 밥전거리가 있던 삼각지를 지나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러 남대문을 나선 길손들이 허기를 달래며 발품을 쉬어갔을 듯 싶습니다. 삼각지에서 곧장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이 바로 옛 통영별로인데, 얼마 가지 않아 군부대에 막혀서 돌아갑니다. 옛길은 예서 와현(瓦峴)을 넘었는데 바로 근처에 있던 와서(瓦署)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와현을 내려선 길은 국립중앙박물관 앞을 지나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넙니다. 우리는 지독한 강바람과 맞서며 동작대교를 걸어서 한강을 건넜습니다. 동작나루를 지난 길은 4리를 더 걸어 우면산 자락의 승방평(僧房坪)에 들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렀을 때 짧은 겨울해가 어둑해지기 시작합니다.
옛 동작나루가 있던 한강 둔치. /최헌섭
남태령(南泰嶺)을 넘다
승방평에서 남태령까지는 7리 길입니다. 고개 들머리의 사당역 부근에 닿으니 벌써 해가 져서 남태령을 오르기 위해 이곳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며 힘을 돋웁니다.
과천과 서울의 지경고개인 남태령 고갯마루에는 새로 세운 표지석이 우뚝하고 최근 확장한 8차로 도로 위로 두 지역을 오가는 자동차 행렬이 맹렬하게 치닫고 있습니다. 과천의 진산인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잘록이에 열린 이 고개는 삼남으로 오가던 옛길이 지나던 곳입니다.
남태령
이 고개는 여우고개(호현: 狐峴) 또는 여시고개(엽시현:葉屍峴)라거나 도적고개로도 불렸는데, 앞 이름에는 근처 낙성대역 출신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고개가 남태령이 된 데는 정조의 능행 때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고개에서 쉬어가던 정조가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어느 시골 늙은이(일설에는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南泰嶺)이라 아뢴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합니다.
과천에서 본 남태령. /최헌섭
당시 정조를 수행하던 관리 가운데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을 알고 있던 이가 있어 거짓 아뢴 것을 꾸짖었습니다. 임금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감히 거짓으로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도적고개 또는 여우고개라 하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상스런 이름을 알려 올릴 수 없었사옵니다. 이 고개가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맨 처음 큰 고개인지라 남태령이라 아뢰었나이다'라고 하자, 정조가 촌로의 마음 씀씀이를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라는 벼슬을 내리고 앞으로 남태령이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그러나 〈춘향전〉 어사출두 부분에 '청파역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이를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라 한 구절에 이미 그런 이름이 나오므로 남태령은 정조 이전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고개가 자리한 곳이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인 점도 이 고개를 한양의 남쪽 고개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사]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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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6) 통영별로(統營別路) 2일차
출처: 2013.01.31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003)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오늘은 과천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에서 길을 잡습니다.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임을 알 수 있는 현대적 증거는 고개의 서쪽에 자리한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부대가 이곳에 있음은 이 고개가 지경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정을 〈과천시지〉에는 남태령(南泰嶺)-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냉정점(冷井店)-은행정(銀杏亭)-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독박지(禿朴只)-갈산점(葛山店)-독동현(禿洞峴)-군보천점-자잔동(自棧洞)-원동점-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과천, 교통의 요충
남태령 옛길의 자취는 고개 동쪽에 살려두었고, 고갯마루 한 가운데에는 남태령(南泰嶺)이라 새긴 큰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태령을 내려서면 관문동(官門洞)인데, 과천관아의 문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전 이곳 속담에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 '(서울이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이 있는데, 당시 과천현감 중에는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남태령을 무사히 넘도록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내기도 했나 봅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과천과 남태령이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임을 풍자적으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과천현 옛터의 은행나무와 송덕비.
과천현 옛터
옛길은 관문사거리에서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난 지금의 중앙로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걷습니다. 과천 신도시 들머리에서 옛 과천현의 치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로 앞 식당 돌계단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가니 바로 의구심이 풀립니다. 곁에 있었던 과천현 관아에서 가져다 쓴 돌로 만든 계단이었던 것이지요.
왕의 거둥 때 행궁(行宮)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과천현 옛터는 중앙동 주민센터와 과천초등학교 일원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주민센터 자리에서 1986년에 옮겨온 온온사(穩穩舍)가 복원되어 있고,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과천현감을 지낸 이들의 선정비 15기를 옮겨 두었습니다. 온온사는 인조 임금 27년(1649)에 여인홍 현감이 과천현의 객사로 건립한 것인데, 1790년에 정조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경치가 쉬어가기에 편안하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 친필을 내렸다고 합니다. 건물은 중앙의 정청과 양쪽의 동·서헌이 각각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패를 모신 정청은 원주(圓柱)를 쓰고 지붕을 높여 격을 달리했습니다.
이곳 온온사 들머리에는 수세가 예사롭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니 버티어 서 있습니다. 밑동의 둘레가 6.5m이고, 높이가 25m에 이르는 거목으로 나이가 600살을 헤아리니 조선 개국 무렵부터 자리를 지켜 온 셈입니다. 그 아래에 모아져 있는 송덕비는 홍천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정조 6년(1782)에 세운 정동준 현감의 것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과천현감 송덕비에 얽힌 이야기
옛적 어느 때 과천 현감을 지낸 이가 고을을 떠나면서 미리 만들어 종이로 덮어 둔 송덕비를 벗겨 보았더니, 빗돌에 '금일차송도(今日此送盜: 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현감은 그 비문 곁에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 내일 다른 도둑이 오려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 이 도둑은 끊임없이 올진저)'라 써 두고 고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부패한 공직자상을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과천이 처한 장소성과 연동하여 이해하자면 위의 과천현감 통행세 뜯는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선정비 15기를 다 살펴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 빗돌은 없습니다.
원행길을 바꾼 사연
과천현 옛터를 나서 정부 제2청사를 뒤로하면, 지금은 옛 자리를 헤아리기 어려운 읍내앞다리를 건너 냉정점(冷井店)이 있던 찬우물에 이릅니다. 아마도 이곳에 점이 두어진 것은 갈현삼거리 서쪽에 있는 이 우물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할 때, 이곳의 물을 마시고 가자(加資:정3품 이상의 품계 또는 그것을 올리는 일) 우물이라 불렀을 만큼 물맛이 좋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머잖아 수원 거둥길을 과천로에서 시흥을 지나는 길로 바꾸게 되는데, 일설에는 이 우물 가까이에 있는 김약로의 무덤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닭인즉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상로의 형이 바로 그이니, 효심 지극한 정조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이리로 지나기가 편치 않았을 겁니다.
갈재 넘어 안양으로
이곳을 지나 나지막한 갈재(가루개·갈현:葛峴)를 넘으면 안양시에 듭니다. 갈재는 과천의 남쪽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갈현동은 지금도 과천신도시의 남쪽 경계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지명유래를 살피기 위해 과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찾으니 그 변천을 갈고개-갈오개-가로개-가루개로 해두고 있더군요. 또한 갈을 갈림을 뜻한다고 보고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어느 고개가 분수령 아닌 게 있던가요. 남태령도 지지대고개도 모두 분수령이니 저로서는 갈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의 갈재 가루개 갈현은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 갈과 고개가 합쳐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칡이 많아 갈현이라 했다는 설도 역시 갈을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일 뿐입니다. 이 고개를 경계로 과천과 안양 사이에는 아직 미개발지가 많이 남아 있어 찬우물 가루개 옥탑골 등 정감어린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덕원
이 고개를 넘어 옛 자리를 잃은 은행정(銀杏亭)과 인덕원점(仁德院店) 뒷다리를 지나면 머잖아 인덕원에 듭니다. 다리의 이름이 그리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원의 기능을 점이 대신하면서 인덕원점으로 불리게 된 듯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과천현 역원에 인덕원(仁德院)은 부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에서의 위치와 이수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인덕원(仁德院)이 과천에서 8리라 했으니 이 이수가 실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지금 안양시에서는 인덕원을 지나는 옛길이 남아 있는 구간에 '인덕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습니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대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들어선 주막1길과 2길이 만나는 즈음인데, 지금은 상업지역으로 변해 옛 정취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빗돌에는 인덕원이란 이름이 한양에서 내려 온 환관들이 어진 덕을 베푼 데서 비롯한 것이라 했고, 1597년 5월 초사흘에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한편,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행할 때 이곳에서 점심을 들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이곳이 원으로서 점으로서 여전한 교통의 요충임을 알게 해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인덕원 옛길.
사근행궁 가는 길
인덕원에서 지금은 없어진 인덕원천(지금 학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벌말인 독박지(禿朴只, 민배기)를 지나면 원에서 3리 거리의 갈산점(葛山店)이 있던 평촌동 갈뫼마을입니다. 예서 모락산 자락을 돌아 독동현(禿洞峴:의왕에서 독박지로 가는 고개)을 넘으면 안양교도소 뒤의 모락산 기스락을 따라 난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이즈음이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던 길인데, 조금 더 가면 원동점(遠東店)이 있던 성라자로마을 입구를 지납니다. 옛 원동점을 지나면서 지방도를 버리고 1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수원으로 길을 잡아가면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던 고촌동 주민센터에 이릅니다. 옛 이름이 사근평(肆覲坪/沙近坪)인 것은 오래되어 바탕이 변한 것을 이르는 '삭은'의 음차로 보입니다. 지금 이름이 고촌(古村)인 것은 사근을 예스러운 마을을 훈차한 것으로 보이니 더욱 그렇게 볼 수 있다 여겨집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