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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9]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

이야기보따리/기사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을까
뉴스워커(http://www.newsworker.co.kr)

신대성 기자 승인 2011.08.22 12:16 
 
의왕시민은 89년 市로 승격한데는 대우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 믿는다
대우사원아파트 37개동 1138세대, 4~인 기준 5~6천명 인구 유입효과

※글에 도움주신 분들
신창현 전 민선1기 의왕시장(대우건설 OB),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대우건설 OB),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대우건설 OB), 김주민 내손라재개발구역 이사, 임신택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대우건설 홍보실 외 다수

의왕시 정비사업현황을 취재(52페이지 참조)하던 중 가장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이 포일대우사원아파트이었다. 이곳은 현재 대림산업이 재건축을 수주해 현재 의왕 내손 대림e편한세상이 들어선 곳이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원아파트는 도심지에 건립한다. 출퇴근이 용이하여 업무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아파트는 지금 대림산업에 의해 리모델링되어 ‘압구정 아크로빌’이라는 고급아파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대우건설은 의왕면 포일리에 사원아파트를 지었다.(대우사원아파트가 건립된 때는 84년 4월이며, 의왕이 시로 승격한 때는 89년 1월이었다.) 그것도 1138세대라는 당시로는 메머드급 대형아파트였다. 일개 읍 따위에 이렇게 대단지 아파트를 짓게 된 것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우건설 그들은 왜 의왕읍에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했는가

이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기 위해서는 대우건설 출신들을 만나봐야 했다. 이 때 연락이 가능했던 분들이 신창현 전 의왕시장(민선1기)이었으며, 김태희 송도복합단지개발(주)부사장 그리고 김동화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등이었다. 이들 중 신창현 전 시장과 김동화 대표는 의왕대우사원아파트에 직접 살고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건네 오는 답은 간단했다. “땅값이 쌌으니까 그곳에 아파트를 지었지” 신창현 전 시장의 말이다. 김동화 대표는 당시 신입사원 시절이어서 잘 모른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내손 라구역의 김주민 이사가 알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포일택지개발지구로 1978년부터 개발계획이 나오고 택지개발공사가 이뤄졌다.

당시 포일동·내손동 일대는 배나무 밭이었다. 이곳에 땅을 깎고 평평하고 반듯하게 구획을 정리하는 사업이 이뤄졌다.

포일택지개발사업에 선두에 선 곳이 대우건설이었다. 대우건설은 1차 포일주공 터(지금의 포일자이)를 구획정리하고 2차로 대우사원아파트(지금의 포일 e-편한세상)터를 정리했다. 그 이후 대우건설 계열회사가 지금의 내손 가·나·다·라 지역의 구획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건설이 의왕 포일동에 대우사원아파트를 짓게 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앞서 신창현 전 의왕시장이 말했던 것처럼 땅 값이 쌌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당시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되고 주택건립사업을 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선 곳이 없었다. 주택공사에 1차부지인 포일주공은 짓게 했지만, 2차 부지까지 떠넘기기에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에 택지구획정리를 맡은 대우건설이 총대를 메고 아파트를 이곳에 건립하게 됐다.

대우건설이 아파트를 건립하게 된 시기는 81년부터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최초의 주택건립사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81년 12월에 착공하여 83년 4월에 준공을 마친 개포고층아파트(대우라는 이름을 당시에는 쓰지 않았다.)가 최초였다.(자료, 대우건설 홍보실) 그 이후 세 번째로 준공한 아파트가 바로 이곳 포일대우사원아파트다.

사원아파트 개념으로 초대형 단지를 조성한 것은 대우건설이 최초였다. 압구정현대사원아파트는 1개동에 33㎡(10평 남짓) 정도로 800세대를 지은 것이었으니 대규모라 보기 어렵다. 또한 분양이 아닌 임대 형태였으니 이 또한 대우사원아파트와 다르다.

대우건설 직원 대우사원아파트로 이주하다

 

다음으로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한 일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임·직원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신창현 전 시장이 의왕시와 인연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김동화 대표도 이 때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고 한다.

신 전 시장이 이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는 자연경관이 풍부해 살기 좋았다는 것과 서울역(당시 대우건설 사옥은 서울역에 있었다.)에서 사원아파트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녁 회식이 있는 날이면 총알택시를 잡아타고 포일리 가자고 해야 한 적도 많았다 한다.)

또 하나는 대우건설이 사원아파트에 들어오는 임·직원들에게는 저리로 융자를 해줘 적은 돈으로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동화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는 당시의 아파트가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랬을 것이 아직 젊은 나이에 부동산 가격에 민감해 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는 것이 입사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아 둔 돈이 많지 않았을 것인데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을 보니 김우중 회장이 많은 혜택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저리 융자에 매달 월급받아 갚아가면 됐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그들은 회상했다.

이런 연유로 대우건설은 의왕과 특별한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의왕시가 시로 승격하기 위한 필수요건인 인구수도 대우건설이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의왕시민들은 보고 있다.

1980년 통계청 자료 가족당 구성원 기준을 보면 1가족 당 자녀수는 3~7명까지로 평균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포일대우사원아파트에 거주하는 대우건설 직원 또한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원아파트는 포일주공과 달리 큰 평형의 아파트가 건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최소 5천에서 6천~7천명의 대우건설 가족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의견이다. 신창현 전 시장이 민선1기로 당선된 것도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 대우건설은 경영난으로 워크아웃을 겪게 되고 그 사이 2003년에 있은 포일대우사원아파트는 재건축사업의 동반자로 대림산업을 시공자로 선정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2006년~2008년까지 3회 연속 시공능력평가 1위를 달성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대우건설 정창두 남부사업소 지사장).

건설회사가 가지는 일반적인 통념이 본사 주변에서 발생하는 공사수주는 반드시 해야 하며, 회사명이 걸린 건물을 재수주할 때 또한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림산업은 대림아파트 리모델링공사에서 반드시 수주해야 한다는 각오였으며(2006년 대림산업 리모델링 팀장의 말), 코오롱건설은 과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로 과천본사 인근의 주공아파트 재건축은 기필코 수주해야 한다는 암묵적 목표를 잡고 있다.(코오롱건설 수주기획팀 부장의 말) 대우건설 또한 김우중 전 회장의 혼이 담겨있는 대우사원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하지 못했으니 얼마만큼의 자존심은 깎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우건설은 내손동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대우사원아파트가 있었던 그곳, 그리고 포일택지개발지구의 구획정리 또한 대우건설이 한 이곳에 대우건설의 브랜드 ‘푸르지오’를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대우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이 의왕시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것만큼 이번 내손동 재개발구역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대우건설의 자존심이 이곳 의왕에 있기 때문에 2003년 잃은 자존심을 이번에 기필코 되찾겠다는 각오다.

대우건설 그들은 ‘대우맨’이라는 자존심을 가슴에 담고 있다. 우리에게 대우맨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인식된다. 리비아의 악조건에서도 성공적으로 건설을 마무리했던 불굴의 의지처럼 그들 가슴에 ‘대우맨’을 담고 오늘도 현장을 누빈다.

 

출처 : http://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

 

 

[기사] 당장 떠나야 할 안양의 숨겨진 매력

이야기보따리/기사


더 추워지기 전에 지금 당장 떠나야 할 안양의 숨겨진 매력 소문을 소개합니다.


경기도뉴스포털  |  2016.11.10 16:43

글 보기: https://gnews.gg.go.kr/news/story_news_view.asp?BS_CODE=S043&sel=B027&number=973

낙엽이 지는 완연한 가을.
지난 주말에는 겨울의 문턱인 입동을 앞두고 많은 여행객들이 저무는 가을을 즐기기 위해
전국 유명 산과 유원지 등으로 여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만약, 아직 늦가을을 즐기지 못한 분들 계시다면 여기를 주목해 주세요.

가을 여행철이라지만,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주변 가까이에서도 가을 정취는 물론!
예술작품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경기도 매력소문 따라 떠나는 여행~
안양의 도심 속 자연, 그리고 경관으로의 여행지를 소개합니다.

[기사]아름다운 자연과 이야기가 숨어있는 군포

이야기보따리/기사

아름다운 자연과 이야기가 숨어있는 군포로 떠나보세요!


경기도뉴스포털  |  2016.12.14 13:30

글 보기 : https://gnews.gg.go.kr/news/story_news_view.asp?BS_CODE=S043&sel=B027&number=1014

 

이 곳에는 자연이 있습니다.

철쭉으로 봄을 만끽하고,
수리산과 덕고개당숲에서 숲의 향기를 마시며,
갈치저수지에서 고즈넉이 낚시를 즐기고,
반월호수에서 오늘의 태양이 지는 걸 지켜볼 수 있는 곳.


이 곳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중건된 천년고찰 수리사와
조선중기에 건축된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등
잠들지 않은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곳.

경기도 매력소문 따라 떠나는 여행~
이번에는 군포에서 만날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합니다.

 

[기사]정조 임금 어가 행차하듯 가는 '통영별로' 첫걸음

이야기보따리/기사

정조 임금 어가 행차하듯 가는 '통영별로' 첫걸음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5)통영별로(統營別路) 다시 출발선에 서다
출처: 2013.01.17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626)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앞선 호에서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통영로가 숭례문에 도착함으로써 긴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도착은 새로운 출발을 전제하는 것이니, 방향을 바꾸면 들머리가 날머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계사년 1월, 이제 통영으로 향하는 다른 길(통영별로, 통영일로)을 잡아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통영별로(統營別路)는 서울과 삼도수군통제영을 오가던 통영로(統營路)의 다른 길입니다. 그 경로는 숭례문을 출발,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남행하다가 전주 삼례역(參禮驛)에서 갈라져 임실 남원 함양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이릅니다. 이 길은 정조의 화성 행차로,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암행로가 겹치고, 공주에서 전주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루트와도 부분적으로 겹치는 역사적인 길입니다. 독자 여러분,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저희와 길벗이 되어 길 위의 역사를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숭례문을 나서다
우리가 걷는 통영별로의 서울∼수원 구간은 대체로 정조 임금이 화성 행차를 위해 오간 길과 겹치게 되어, 이 노정을 따라 옛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남대문을 출발한 길은 통영로와 달리 곧바로 남쪽으로 이르지 않고 남서쪽으로 길을 잡아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따릅니다. 〈대동지지〉에는 예서 동작나루까지 20리라 했습니다.
남대문을 나서서 얼마 걷지 않으면 옛 남지(南池)가 있던 자리에 이릅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화기(火氣)가 강해 그것을 막기 위해 동대문 안쪽에 동지(東池), 서대문 북쪽에 서지(西池)와 이곳에 남지를 두었습니다. 뒤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에도 광화문 바깥에 물에 사는 상상 속 신수(神獸)인 해태를 새긴 석상을 세운 것도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이렇듯 도성의 여러 곳에 못을 둔 것은 지방의 읍성 내에 연못을 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평소에는 풍치를 돋우는 수변공원의 구실을 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한 방화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곳의 옛 경관을 살필 수 있는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는 연못 안의 연꽃과 어우러진 버들이 그려져 있어 남지의 그런 쓰임을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기려 세운 남지-터 표석에는 '서울 도성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을 새겨 두었습니다. 이제 시한을 다해 가는 MB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지 않아 불에 타버린 숭례문을 바라보며, 처음 이곳에 못을 두었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청파 배다리를 향하다
숭례문을 나선 정조 임금의 어가는 남지를 지나 지금의 서울역 부근에 있던 도제골(도저동:桃楮洞) 앞길을 지나 청파 새다리가 있던 청파동 1가를 향하게 되는데, 우리는 옛길을 덮어쓴 세종대로를 따라 걷다가 이문동에서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건넙니다. 육교를 통해 서울역을 가로질러 건너면 머잖아 옛 청파역(靑坡驛)이 있던 청파동을 지나게 됩니다. 이 역은 고려시대 청교도(靑郊道)에 속한 청파역(靑波驛)이었다가 조선시대까지 그 쓰임이 이어져 왔습니다. 청파역은 동대문 밖 4리에 있던 노원역(盧原驛)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성부 관할(도성에서 10리) 안에 있던 두 역 가운데 하나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역원에는 '숭례문 밖 3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곳은 남태령을 넘어 통영별로와 삼남대로를 오가는 길과 노량진을 거쳐 시흥을 오가는 길의 갈림길로 그려져 있습니다. 숙대 앞에서 옛 밥전거리(밥을 팔던 곳)가 있던 삼각지로 이어지는 지금의 청파로가 대체로 옛길이 지나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용산 언덕 앞길을 지난 어가는 석우(石隅:돌모루) 만천주교(蔓川舟橋)를 거쳐 한강 배다리에 이릅니다. 지금 옛 돌모루 자리에는 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만천주교는 지금의 남영역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청파배다리터' 표석을 세우고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터'라 새겼습니다. 바로 이 청파배다리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에 남대문 바깥에 있었다고 전하는 청파신교(靑坡新橋)입니다. 이 다리는 처음에 만초천(蔓草川)에 배로 다리를 놓아 배다리 또는 선교(船橋)라 했다가 뒤에 돌다리로 고쳐 쌓았는데, 그 즈음에 청파 새다리라 한 듯합니다. 정조 임금의 능행길은 예서 노량진으로 길을 잡아 그곳에 미리 설치해 둔 배다리로 한강을 건넜는데 그 자리는 대체로 지금의 한강철교가 놓인 곳이랍니다. 한강을 건넌 어가 행렬은 시흥과 안양을 거쳐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에 이르기까지 통영별로와 헤어지게 됩니다.어가가 용산 언덕 앞길에 나오자 관광민인(觀光民人:구경꾼)이 모여들었는데 왕은 이를 막지 말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때 어가가 당도한 곳은 청파동 1가에 있던 밤동산(율동산:栗東山)에서 이어지는 율원현(栗原峴)으로 불리던 방울재 부근으로 지금의 효창공원 동쪽입니다.
한강을 건너다
통영별로는 청파배다리에서 지금의 용산역 부근을 지나 동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게 됩니다. 배다리를 지나는 옛길은 옛 밥전거리가 있던 삼각지를 지나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러 남대문을 나선 길손들이 허기를 달래며 발품을 쉬어갔을 듯 싶습니다. 삼각지에서 곧장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이 바로 옛 통영별로인데, 얼마 가지 않아 군부대에 막혀서 돌아갑니다. 옛길은 예서 와현(瓦峴)을 넘었는데 바로 근처에 있던 와서(瓦署)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와현을 내려선 길은 국립중앙박물관 앞을 지나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넙니다. 우리는 지독한 강바람과 맞서며 동작대교를 걸어서 한강을 건넜습니다. 동작나루를 지난 길은 4리를 더 걸어 우면산 자락의 승방평(僧房坪)에 들게 되는데, 이즈음에 이르렀을 때 짧은 겨울해가 어둑해지기 시작합니다.
옛 동작나루가 있던 한강 둔치. /최헌섭
남태령(南泰嶺)을 넘다
승방평에서 남태령까지는 7리 길입니다. 고개 들머리의 사당역 부근에 닿으니 벌써 해가 져서 남태령을 오르기 위해 이곳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며 힘을 돋웁니다.
과천과 서울의 지경고개인 남태령 고갯마루에는 새로 세운 표지석이 우뚝하고 최근 확장한 8차로 도로 위로 두 지역을 오가는 자동차 행렬이 맹렬하게 치닫고 있습니다. 과천의 진산인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잘록이에 열린 이 고개는 삼남으로 오가던 옛길이 지나던 곳입니다.
남태령
이 고개는 여우고개(호현: 狐峴) 또는 여시고개(엽시현:葉屍峴)라거나 도적고개로도 불렸는데, 앞 이름에는 근처 낙성대역 출신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고개가 남태령이 된 데는 정조의 능행 때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고개에서 쉬어가던 정조가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어느 시골 늙은이(일설에는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南泰嶺)이라 아뢴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합니다.
과천에서 본 남태령. /최헌섭
당시 정조를 수행하던 관리 가운데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을 알고 있던 이가 있어 거짓 아뢴 것을 꾸짖었습니다. 임금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감히 거짓으로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도적고개 또는 여우고개라 하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상스런 이름을 알려 올릴 수 없었사옵니다. 이 고개가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맨 처음 큰 고개인지라 남태령이라 아뢰었나이다'라고 하자, 정조가 촌로의 마음 씀씀이를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라는 벼슬을 내리고 앞으로 남태령이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그러나 〈춘향전〉 어사출두 부분에 '청파역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이를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라 한 구절에 이미 그런 이름이 나오므로 남태령은 정조 이전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고개가 자리한 곳이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인 점도 이 고개를 한양의 남쪽 고개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사]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이야기보따리/기사

나그네 쌈짓돈 뜯던 사또 민담 뒤로하고 사근행궁으로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6) 통영별로(統營別路) 2일차
출처: 2013.01.31일자 경남도민일보에서(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003)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 webmaster@idomin.com
 
오늘은 과천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에서 길을 잡습니다. 이곳이 지경(地境) 고개임을 알 수 있는 현대적 증거는 고개의 서쪽에 자리한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부대가 이곳에 있음은 이 고개가 지경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정을 〈과천시지〉에는 남태령(南泰嶺)-과천현행궁(果川縣行宮)-읍내전천교(邑內前川橋)-냉정점(冷井店)-은행정(銀杏亭)-인덕원점후천교(仁德院店後川橋)-인덕원천교(仁德院川橋)-독박지(禿朴只)-갈산점(葛山店)-독동현(禿洞峴)-군보천점-자잔동(自棧洞)-원동점-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과천, 교통의 요충
남태령 옛길의 자취는 고개 동쪽에 살려두었고, 고갯마루 한 가운데에는 남태령(南泰嶺)이라 새긴 큰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태령을 내려서면 관문동(官門洞)인데, 과천관아의 문이 있어서 그런 지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전 이곳 속담에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 '(서울이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이 있는데, 당시 과천현감 중에는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남태령을 무사히 넘도록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내기도 했나 봅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과천과 남태령이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임을 풍자적으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과천현 옛터의 은행나무와 송덕비.
과천현 옛터
옛길은 관문사거리에서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난 지금의 중앙로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걷습니다. 과천 신도시 들머리에서 옛 과천현의 치소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로 앞 식당 돌계단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가니 바로 의구심이 풀립니다. 곁에 있었던 과천현 관아에서 가져다 쓴 돌로 만든 계단이었던 것이지요.
왕의 거둥 때 행궁(行宮)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과천현 옛터는 중앙동 주민센터와 과천초등학교 일원입니다. 지금 그곳에는 주민센터 자리에서 1986년에 옮겨온 온온사(穩穩舍)가 복원되어 있고,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과천현감을 지낸 이들의 선정비 15기를 옮겨 두었습니다. 온온사는 인조 임금 27년(1649)에 여인홍 현감이 과천현의 객사로 건립한 것인데, 1790년에 정조 임금이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곳에 들러 경치가 쉬어가기에 편안하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 친필을 내렸다고 합니다. 건물은 중앙의 정청과 양쪽의 동·서헌이 각각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패를 모신 정청은 원주(圓柱)를 쓰고 지붕을 높여 격을 달리했습니다.
이곳 온온사 들머리에는 수세가 예사롭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니 버티어 서 있습니다. 밑동의 둘레가 6.5m이고, 높이가 25m에 이르는 거목으로 나이가 600살을 헤아리니 조선 개국 무렵부터 자리를 지켜 온 셈입니다. 그 아래에 모아져 있는 송덕비는 홍천말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정조 6년(1782)에 세운 정동준 현감의 것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과천현감 송덕비에 얽힌 이야기
옛적 어느 때 과천 현감을 지낸 이가 고을을 떠나면서 미리 만들어 종이로 덮어 둔 송덕비를 벗겨 보았더니, 빗돌에 '금일차송도(今日此送盜: 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현감은 그 비문 곁에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 내일 다른 도둑이 오려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 이 도둑은 끊임없이 올진저)'라 써 두고 고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부패한 공직자상을 풍자한 이야기이지만, 과천이 처한 장소성과 연동하여 이해하자면 위의 과천현감 통행세 뜯는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선정비 15기를 다 살펴봐도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 빗돌은 없습니다.
원행길을 바꾼 사연
과천현 옛터를 나서 정부 제2청사를 뒤로하면, 지금은 옛 자리를 헤아리기 어려운 읍내앞다리를 건너 냉정점(冷井店)이 있던 찬우물에 이릅니다. 아마도 이곳에 점이 두어진 것은 갈현삼거리 서쪽에 있는 이 우물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할 때, 이곳의 물을 마시고 가자(加資:정3품 이상의 품계 또는 그것을 올리는 일) 우물이라 불렀을 만큼 물맛이 좋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머잖아 수원 거둥길을 과천로에서 시흥을 지나는 길로 바꾸게 되는데, 일설에는 이 우물 가까이에 있는 김약로의 무덤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닭인즉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상로의 형이 바로 그이니, 효심 지극한 정조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이리로 지나기가 편치 않았을 겁니다.
갈재 넘어 안양으로
이곳을 지나 나지막한 갈재(가루개·갈현:葛峴)를 넘으면 안양시에 듭니다. 갈재는 과천의 남쪽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갈현동은 지금도 과천신도시의 남쪽 경계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지명유래를 살피기 위해 과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찾으니 그 변천을 갈고개-갈오개-가로개-가루개로 해두고 있더군요. 또한 갈을 갈림을 뜻한다고 보고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어느 고개가 분수령 아닌 게 있던가요. 남태령도 지지대고개도 모두 분수령이니 저로서는 갈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의 갈재 가루개 갈현은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 갈과 고개가 합쳐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칡이 많아 갈현이라 했다는 설도 역시 갈을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일 뿐입니다. 이 고개를 경계로 과천과 안양 사이에는 아직 미개발지가 많이 남아 있어 찬우물 가루개 옥탑골 등 정감어린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덕원
이 고개를 넘어 옛 자리를 잃은 은행정(銀杏亭)과 인덕원점(仁德院店) 뒷다리를 지나면 머잖아 인덕원에 듭니다. 다리의 이름이 그리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원의 기능을 점이 대신하면서 인덕원점으로 불리게 된 듯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과천현 역원에 인덕원(仁德院)은 부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에서의 위치와 이수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인덕원(仁德院)이 과천에서 8리라 했으니 이 이수가 실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지금 안양시에서는 인덕원을 지나는 옛길이 남아 있는 구간에 '인덕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습니다. 47번 국도가 지나는 대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들어선 주막1길과 2길이 만나는 즈음인데, 지금은 상업지역으로 변해 옛 정취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빗돌에는 인덕원이란 이름이 한양에서 내려 온 환관들이 어진 덕을 베푼 데서 비롯한 것이라 했고, 1597년 5월 초사흘에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한편,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행할 때 이곳에서 점심을 들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이곳이 원으로서 점으로서 여전한 교통의 요충임을 알게 해 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인덕원 옛길.
사근행궁 가는 길
인덕원에서 지금은 없어진 인덕원천(지금 학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벌말인 독박지(禿朴只, 민배기)를 지나면 원에서 3리 거리의 갈산점(葛山店)이 있던 평촌동 갈뫼마을입니다. 예서 모락산 자락을 돌아 독동현(禿洞峴:의왕에서 독박지로 가는 고개)을 넘으면 안양교도소 뒤의 모락산 기스락을 따라 난 옛길이 잘 남아 있습니다. 이즈음이 군보천점(軍堡川店)을 지나던 길인데, 조금 더 가면 원동점(遠東店)이 있던 성라자로마을 입구를 지납니다. 옛 원동점을 지나면서 지방도를 버리고 1번 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수원으로 길을 잡아가면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던 고촌동 주민센터에 이릅니다. 옛 이름이 사근평(肆覲坪/沙近坪)인 것은 오래되어 바탕이 변한 것을 이르는 '삭은'의 음차로 보입니다. 지금 이름이 고촌(古村)인 것은 사근을 예스러운 마을을 훈차한 것으로 보이니 더욱 그렇게 볼 수 있다 여겨집니다.
/글·사진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안양광역]안양7동 덕천마을의 옛 지명은 ‘벌터(坪村)’

이야기보따리/기사

 

안양7동 덕천마을의 옛 지명은 ‘벌터(坪村)’

2015-04-13 오후 5:32:00  12
 
‘벌터’자연마을 지명석 이전설치 행사에 참석한 안양7동 박창배 동장, 정하길 주민자치위원장, 민정기 (사)대한노인회 안양7동 경로당 회장(통친회장) 및 경로당회원 등 지역주민들이 마을의 발전을 염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고 대부분 농경지였던 지역에 일제강점기 초 시흥시 정왕동에 살던 원정상(元貞常)씨가 분가하면서 정착 이래 자연마을이 형성되면서 ‘벌터’라 불리었다. 1978년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 ‘덕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5월 1일 안양 6동에서 분리되어 안양7동으로 분동(分洞)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인문적 특성을 간직한 자연마을 지명은 지역의 특색이 반영되어 있는 고유명사로 지명만 보아도 지역의 특성을 알 수 있는 전통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오늘날 피할 수 없는 도시화 속에서 자연마을들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고, 변화 속에 옛 지명은 점차 잊혀져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안양7동 덕천마을의 옛 지명인 ‘벌터(坪村)’지명 표지석 이전 설치행사가 2015년 4월 8일 (수) 오전 11시 주접지하차도 초입 쌈지공원에서 열렸다.
원래 본 지명석(地名石)은 2012년 6월 12일 안양7동 경로당 앞에 건립하여 임시로 존치한 이래, 길일을 택해 널리 ‘벌터’지명유래의 정체성을 알리고자 금번 덕천(德泉)마을 초입 주접지하차도 입구로 이전행사를 가진 것. 행사에는 안양7동 박창배 동장, 정하길 주민자치위원장, 민정기 (사)대한노인회 안양7동 경로당 회장(통친회장), 남기황 7동 새마을협의회 회장 및 주민자치위원, 원종면 前,안양문화원장, 경로당 회원 등 지역주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열렸다.
오늘의 뜻 깊은 행사를 갖기까지에는 덕천마을에 대규모 아파트 주거단지 택지개발을 앞두고, 일전에 안양 7동 경로당 회원을 중심으로 뜻있는 지역인사들이 모여 옛 동네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마을비 건립이 논의된바 있었고, 안양7동 경로당회원 등의 중지를 모아 마을비(지명비)는 제작 되었다.
지명석의 전면글씨는 송재(松齋) 우동호(寓東鎬) 화백(前 안양향토문화연구소 소장)의 글씨를 음각하여 새겼고, 마을 표지석 후면은 안양시지명유래집(1996, 새안양회발간)을 참조하여 ‘벌터’마을의 유래를 새겨 넣었다. 지명석 후면에 새겨 넣은 글씨에 따르면,「일제 강점기 초 원정상(元貞常, 1868~1948)씨가 처음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고, 이씨(李氏), 성씨(成氏), 김씨(金氏)등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넓은 벌판에 있는 촌락이라 하여 ‘벌터(坪村)’라 칭하게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어, 예전에는 주거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허허벌판임을 알 수 있다.
금번 ‘벌터’ 지명 표지석이 제자리에 자리 잡기까지는 안양 7동 주민센터에 안양 7동 경로당 앞에 있던 마을 표지석을 쌈지공원으로 이전요구를 발의한 경로당 회원, 박창배 안양7동 동장 및 정하길 주민자치위원장의 적극적인 주민의견 수렴을 거쳐 오늘 행사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옛날 ‘벌터’라 불리던 시절부터 살아온 지역원로인 홍명의(洪明義) 선생(안양초 19회 졸업, 1936생)은 “벼, 포도, 보리, 수수 등을 경작하며 논·밭농사를 짓던 넓은 벌판이었던 마을이 오늘날 도시화로 논·밭농사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밝히며, ‘벌터’표지석 설치를 반기며, 그 옛날 회상하고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은 오늘 행사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말고, ‘벌터’지명석 표석을 설치한 날을 기점으로 매년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정례적으로 열려 주민소통과 화합을 다지길 희망했다.
안양7동 ‘벌터’지명비(地名碑石) 설치의 의미는 택지개발사업 등에 따른 도시화, 산업화 속에 점차 잊혀져가는 마을지명 유래의 역사를 알리고, 지역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아가는 의미 있는 사업이란 평이다.
선조들이 남긴 무형문화유산인 자연마을 지명은 시·공간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지명만으로도 그 마을의 역사적, 지리적, 인문적 특성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금번 안양7동 ‘벌터’지명석 설치 행사가 안양의 자연마을 지명을 찾아가는 단초가 되길 기대해 본다. 안양광역신문 조성현 기자

 

[기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이야기보따리/기사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국제구호 손길 닿은 논밭의 젖줄
본오뜰 포함 안산 지역 가뭄해갈
6·25 전쟁후 '유엔한국재건단' 맹활약
농업용저수지등 경제기반시설 투자도

안산 반월지역에는 개교한 지 90년이 넘는 반월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남산 뜰이 나오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호수같이 넓고 예쁘게 단장이 된 반월저수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넓은 저수지와 함께 어울려 우뚝 솟은 터미산성은 예전에 쌓았던 작은 산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인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저수지 제방 동쪽 끝에 가면 돌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半月水利組合 운크라 韓美合同事業地區 竣功 4290年 12月 15日'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것은 반월저수지가 1957년 12월 15일 운크라의 지원으로 농업 기반시설 조성용 저수지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월저수지 조성 이후 남산 뜰을 비롯해 오늘날의 본오 뜰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 중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해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젖줄이 됐습니다.

이 저수지를 지은 운크라는 어떤 기관일까요? 1950년 6·25 전쟁 이후 유엔이 전 세계 회원국 정부뿐만 아니라 세계 민간 기구들에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자 구호의 손길이 한국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 해 12월 1일 유엔 총회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을 창설했죠. 이후 한동안 활동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2년 말 비로소 유엔의 지원을 받아 운크라가 한국 경제 개건을 위한 대규모 부흥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운크라의 활동은 한국에 대한 구호 차원을 넘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경제를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시켜 한국 경제 재건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를 했습니다.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한 운크라의 지원은 원자재 도입하고 시설투자를 했으며, 이러한 지원은 한국 사회의 교육, 문화적 기반을 확충하는 데도 사용됐습니다.

또 한국의 농업 및 자연자원 개발을 위한 기반 시설투자도 이뤄졌습니다. 한편 연탄, 판유리, 제지, 농기구, 시멘트 공장들이 설립돼 한국의 공업 부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고, 공업발전의 기초가 되는 송·배전 시설의 확충과 전력 개발에도 기금이 투입됐습니다.

나아가 교통 운수, 보건위생분야에도 운크라의 지원금이 할당됐는데, 특히 전후 폐허가 된 학교시설·병원을 복구하고 수많은 고아를 보살피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60년이 지난 빛바랜 돌판을 바라보며 어려웠던 시절 어르신들의 힘겨웠던 삶을 되짚어 봅니다. 그분들이 흘리신 땀방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풍요로운 결실이 됐음에 감사드리며,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나라가 있음을 보며.

/신대광 원일중 수석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인일보 발행일 2016-09-06 제18면

[기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의 근대교육1- 둔대리

이야기보따리/기사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의 근대교육1- 둔대리

 

지역유지 손주사랑이 낳은 '교육의 산실'
배재학당 출신 황삼봉 가정교사로 초빙
마을학생 가르칠수 있는 둔대교회 설립

안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반월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반월'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군 소속이었던 3개 면이 수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불리게 됐다. 그러니 올해는 '반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 102년이 된다.

반월은 본디 광주군 소속의 성곶면·북방면·월곡면이 1906년 안산군으로 이속됐다가 1914년에 반월면으로 통합돼 수원군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3개 면은 1906년까지는 광주군에, 이후 1914년까지는 안산군에,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원군에 속하게 됐고, 시기마다 군 경계와 면 경계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반월면은 수원이 시로 승격한 1949년 이후 화성군에 속해 있다가 1979년 일리·이리·사리·본오리·팔곡2리가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로 편입됐고, 1986년 시로 승격됨에 따라 안산에 속했다. 1994년 다시 화성군 반월면의 건건리·사사리·팔곡일리 등이 안산시로 편입됐다.

나머지 반월지역 가운데 당수리·입북리 일대는 수원시로, 둔대리·대야미리·속달리·도마교리 일대는 군포시로 편입됐다. 그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성곶면은 오늘날 안산시 상록구 일동·이동·사동·본오동, 북방면은 건건동·팔곡동과 군포시 대야동, 월곡면은 상록구 사사동과 수원시 권선구 당수동·입북동, 의왕시 초평동·월암동이 해당한다.

이러한 반월지역에서의 근대교육이 어떻게 시작됐고 발전했으며, 오늘날까지 길게 이어지는 그 교육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군포시 둔대로 11번길 13번지에는 한눈에 보아도 고풍스러운 한옥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수원에 있는 화성의 팔달문 축조 당시 사용한 같은 목재를 사용해 지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 집안이 당시 반월지역 최고의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집안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 바로 박영식(朴英植)인데, 그 손자가 바로 박용덕(朴容德)이다. 박영식은 손자 교육을 위해 서울 배재학당 출신 황삼봉을 가정교사로 모셔왔다.

그런데 황 선생은 가정교사로 머무르지 않고 지역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열심히 했다. 그러자 박 씨 집안에서는 그의 활동에 감동했는지 집 옆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둔대 교회다.

둔대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1902년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903년 토담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교회에 나오는 지역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는데, 대표적인 일이 바로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또한 지역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 둔대 교회에서 글을 배워 깨우쳤다고 한다. 즉 1931년 샘골 교회의 장명덕 전도사의 증언, 1934년 수원지방 감리사보에 실린 둔대 교회 야학 관련 기사, 1935년 감리회보의 보도에 나타나는 야학 학생 50명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당시 야학 교장이던 박인기는 반월의 지주 박용덕의 동생이며 관립경성공업학교 출신으로 교회 지붕을 함석으로 다시 짓는 등 교회와 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반월초등학교가 피폭돼 교사 건물이 없어지자 둔대 교회당을 임시교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반월지역에서 100년이 넘은 오래된 교회로는 둔대 교회와 샘골 교회가 있다. 둔대 교회는 1902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샘골 교회는 1907년 세워졌다. 그런데 두 교회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교단이 같은 감리교단이며 둔대지역에서는 샘골 교회를 '고개 넘어 교회'라고 부를 정도로 지역적으로 가까웠다. 그리고 샘골 교회에 최용신 선생이 강습소를 세울 당시 그를 후원하던 염석주가 후원회장을 맡아 강습소 건축을 위해 당시 반월의 지주였던 박용덕을 찾아가 땅을 기부받았다.

결국, 최용신 선생이 훗날 샘골 강습소를 세우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이 바로 둔대 교회를 세운 박용덕 덕분이었다.

 /신대광 원일중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인일보 발행일 2016-09-27 제18면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이야기보따리/기사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2015.10.07]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조선시대 영등포까지 거느린 거대도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땅 일부 서울 편입

김범수 기자
발행일 2015-10-07 제37면

광명·안산 등 독립으로 해체 위기도
현재 42만 산업도시 제2 중흥기 맞아

‘서울의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 어느 지역이 먼저일까’.

서울을 오가는 경기도민은 한 번씩 의문이 생기는 지역이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다. 심지어 한자어 역시 시흥(始興)으로 같다. 이처럼 다른 지자체에서 같은 지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쪼개지고 축소된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에 있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경기도 시흥군은 오늘날의 서울 영등포·금천·관악·동작구와 경기도 안양·안산·과천·의왕시 등을 포함한 거대한 지자체였다. 시흥이라는 이름은 광활한 곡창과 물줄기로 ‘뻗어나가는 땅’에서 출발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지금의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관아가 있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영등포읍으로 청사를 옮겼다. 하지만 1936년 영등포읍이 서울(당시 경성부)로 편입되고 광복 이후 지금의 안양으로 다시 군청을 옮겼다.

이에 맞춰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63년 시흥군의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시흥리가 서울의 동(洞)으로 편입되면서 시흥이라는 명칭을 중복사용하게 됐다. 서울시의 입장에선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시흥동을 고수했고, 시흥군 역시 전통적인 지역 명칭을 버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두 개의 시흥(始興)은 이 때 시작됐다.

시흥의 수난(?)의 역사는 끝이 아니었다.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고, 1981년 광명시가 독립하면서 시흥군의 모습은 동서로 나눈 기형적인 모습이 됐다. 게다가 5년 뒤 시흥군의 서부지역이 오늘날 안산시로 독립하고, 동부지역의 과천면은 시로 승격되면서 행정구역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또 1989년에 시흥군 군포읍과 의왕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시흥군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모여 오늘날 시흥시를 이룬 것이다.

한 때는 해체 직전까지 갔지만 서울과 경기 지자체의 어머니 역할을 한 시흥시는 인구 42만여명의 산업도시로 제 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김범수기자 faith@kyeongin.com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이야기보따리/기사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경인일보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애민정신 다져진 능행 안양상권 '탄탄대로'
정조, 사도세자 6차 원행부터 시흥로 이용 조선시대 교육·과학·예술 '통신사 역할'
1930년대 섬유관련 공업지역 자리매김 행정구역·경계 변경 거듭 교통요충지로

▲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돌로 만안교를 건립하면서 이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는 역대 누구보다도 궁궐 밖 행차가 많은 임금이었다. 이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참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했다. 정조의 능행 거둥길(임금이 나들이 가는 길)은 초기에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안양의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1795년 6차 원행부터는 시흥과 안양의 석수동을 거쳐 구 군포사거리를 지나는 시흥로(현 만안로)를 이용했다.

정조의 시흥로 개설은 과천길에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있는 김약로의 무덤이 있어 노정을 바꿨다는 야사도 전해지나 근본적으로는 남태령이라는 높은 고개와 과천로에 비해 길이 편한 새로운 거둥길의 개설이었다.

# 정조의 정신이 깃든 시흥로

정조는 조선의 27대 왕 중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시대적 사상, 배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국왕과 신하가 한 몸이 돼 정국을 쇄신하고 국가를 안정화하는 데 있어 일체적인 국정 체제를 갖췄다면, 정조는 탕평책과 같은 균등정책, 적극적인 애민사상의 백성관 등의 철학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 환어행렬도

이 같은 정조의 철학은 현 안양의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안양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됐으나 한자의 뜻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시흥로의 개설과 만안교 건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흥로는 단순한 원행길이 아닌 조선시대의 교육과 경제·과학·예술 등을 안양에 전파하는 통신사의 역할을 했고, 만안교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보호시설이다.

정조는 만안교 건립 당시 안양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걱정해 다리의 재료를 나무가 아닌 돌을 사용했다.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만안교를 건립하며 이 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한 것이다. 이후 만안교는 1980년 국도 확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석수동 삼성천에서 만안천으로 옮겨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시흥로의 명칭도 만안로로 변경됐다.

만안로는 만안교에서 시작해 안양역을 경유하고 명학역에 이르는 총 5㎞ 구간의 국도다.

# 안양 발전의 가교 역할을 한 시흥로

조선 후기 당시 시흥현에 속하던 안양은 시흥로 개설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시흥로가 개설되면서 안양지역의 상업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새로운 신작로 개설에 따라 교통로가 대폭 확대되면서 보부상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때문에 그동안 별다른 상업중심지가 없던 안양지역에도 드디어 상업 중심지(현 안양동)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에서 안양면으로 개칭되기 이전까지 시흥로는 시흥과 과천의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1871년 고종 즉위 8년에 만들어진 경기읍지 시흥현도에도 시흥로에 설치된 만안교가 과천의 경계(果川界)라고 기록돼 있다.

▲ 경기읍지 시흥현도

이후 시흥로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안양을 비롯 경기도의 발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경부철도와 국도 1호선이 인접해 있다 보니 상거래 활동이 타 지역보다 활발해지면서 안양지역에서 파급된 경제효과가 인근 도시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인 1930년에 들어서는 시흥로가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시흥로 일대에는 발달된 교통을 이용한 조선직물, 조선견직, 금성방직 등 섬유관련 기업들이 잇따라 입주해 지역경제를 이끄는 중심공업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흥로는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는다. 당시 행정기관인 안양읍은 대지의 활용도를 높이고 공용시설의 정비를 위해 시흥로를 중심으로 제2차, 3차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한다.

▲ 만안로 전경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마무리된 1970년대 이후부터 시흥로 일대는 서서히 섬유산업 중심지역에서 상업중심지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초에 접어들어 안양의 대표적인 중심상권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시흥로 일대는 행정구역 일부 변경과 법정·행정동 경계변경 등 변화를 거듭해 현재에 이르러서는 중심상권지역에서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의 명학역과 관악역을 잇는 교통요충지로 변화했다.

# 정조, 시흥로를 통해 애민정신을 실천하다

정조는 즉위 20년을 맞는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시흥로를 통해 제6차 원행을 떠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정조의 행차길에 동행한 사람은 1천807명이고 말이 796필이다. 또 행차의 전 과정에 동원된 사람은 5천661명, 말이 1천417필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행차는 정조 즉위 기간에 12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때마다 '화산 능행차' 행렬을 위해 지나는 길목마다 나무를 심고 다리를 놨으며 왕의 숙박을 위해 '행궁'을 지었다.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안양행궁과 만안교 역시 정조의 행차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들 건축물은 현재 안양을 대표하는 유·무형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정조는 시흥로 개설과 만안교 완공 후 안양 사람들의 민정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된다.

옛 문헌을 보면 정조는 능행차시 행렬이 지나는 지역민들 중 착실하고 위엄이 있는 자를 임시 군병으로 뽑아 횃불을 들고 서는 보폭등으로 고용했으며, 안양지역에서만 300명의 주민이 보폭등으로 기용돼 높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경기읍지 시흥현도

또한 정조는 1797년 제8차 원행을 다녀오다 안양행궁에 잠시 머물며 지방관으로부터 안양에 사는 백성들의 노역은 물론 지역 현안들을 보고받고 즉시 해결토록 했다.

이처럼 정조는 시흥로를 통해 철저한 민정 파악과 더불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상명하복의 통치력을 보이며 민생안정에 노력했다.

자료제공/안양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