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435

[자료]안양유원지 역사와 유원지 개발 계획의 현주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 하루 약 2만명의 행락객이 찾아와 유원지 입구에 간이기차역이 설치되고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던 안양유원지에는 길목의 넓다란 안양포도밭과 함께 제1.2풀로 불리우던 자연풀장과 상류쪽에 인공형태의 대형풀장, 만안각수영장, 맘모스수영장, 안양관광호텔 수영장들이 자리한 가운데 안양을 대표하는 수도권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특히 안양학연구소(소장 문원식. 성결대 교수)에 따르면 안양유원지는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가 계곡에서 열리는 등 오랜 역사성뿐 아니라 1930년대이후 70년대까지 안양지역 초등학교들의 소풍지로 안양사람의 휴식처이며 서울이나 수원 등 ..

[안양사]안양시의사회 창립당시와 80년대 초반

[안양시의사회 25년사에서] 안양시의사회 창립당시 의료계 상황과 80년대 초반까지의 주요 사항들 전문의 자격시험이 1973년부터 의료계 주관단체인 의협으로 이관돼 실시되었다. 1951년 9월 25일 제정 공포된 국민의료법에 따라 1952년부터 전문의제도가 도입된 이후 1958년초까지 초창기 7년 동안은 전문의자격 중앙심사위원회를 두어 서류심사만으로 전문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당시 전문의심사자격규정은 '보건사회부장관이 인정하는 종합병원에서 만5년 이상 수련한 자'에 한하여 전문의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많은 개원의사들의 자격취득이 어렵게 되자 의협은 '1952년 12월 25일 이전에 개원한 사람 중에서 동일과목 개원 년한을 배수로 환산하여 인정한다'는 편법을 마련하여 당국의 승인을 받아..

[안양사]시흥군의사회 시절과 안양시 의사회 창립

[안양시의사회 25년사에서] 1974년 창립된 안양시의사회의 모태는 1949년 설립된 시흥군의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흥군의사회는 사회복지증진 및 국민건강 향상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이형래(李衡來), 이쌍용(李雙龍), 김원필(金源必) 등 5-6명의 회원에 의해 결성된 후 존속돼 왔다. 행정구역상 시흥군으로 편입돼 있었던 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흥군의사회는 1973년 7월 1일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따라 안양시의사회는 1974년 7월 22일 시흥군의사회에서 분리, 회원 29명(개원의 16명, 봉직의 12명, 휴직의 1명)으로 정식 출범하게 된다. 해방후 초대 시흥군의사회 회장을 맡았..

안양 상공에서 숨진 이근석 장군

고 이근석 장군은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 청산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 공군 독립 당시 공군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고, 공군 창설 7인 간부 중 한 사람이며 6·25 한국 전쟁 당시 초대 공군 비행단장이었다. F-51 편대를 직접 지휘하여 맹활약 이근석 대령은 전쟁 초기 우리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L-형 및 T-6 경항공기로는 남하하는 적 전차(T-34)를 파괴할 수 없다고 판단, 미 극동공군사령부로부터 F-51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 이다쯔게 기지에서 F-51 기종 전환 훈련을 받고서 동년 7월 2일 이다쯔게 기지에서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 직접 지휘하에 현해탄을 건너 대구 기지까지 공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구 기지에 도착한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F-51 전투기 조종사들은 ..

[임부성]수리산의 불쌍한 문둥바위 (3)

[07/16]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안양시는 116억 7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병목안 삼거리(버스 가는 창박골길과 담배촌길이 갈라지는 곳;요즘 우회도로 공사를 시작하여 교량공사중인 지점의 삼거리)에서 수리산 깊은 산속(큰골), 공군부대 입구까지 길을 넓힌단다.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길 넓힌다는 얘기가 나온 건 아마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도로개설 3.1km, 폭 10~12m, 이번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밝혀졌으니 하긴 할 모양이다. 이제까지 담배촌 다니던 길은 정식(?) 지적도상에는 마차길도 안되는 오솔길 정도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길도 없는데 어떻게 다녔을까 하는 의문이 말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차가 아주 잘 다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임부성]수리산의 불쌍한 문둥바위 (1-2)

[03/07/08]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바위이름이 "문둥바위"였다. 무지 무서웠다. 그 바위가 문둥바위여서가 아니라, 도로가 급하게 우로 굽어짐을 준비하는 곳이고, 바위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놓인 엄청 큰 바위 밑에서 식구끼리 잘 살고 있던 자라 몇 마리 잡아 몸보신하겠다고 어느 어른이 자신이 붙인 남포불(Dynamite;니트로글리세린 75%를 규조토 25%에 흡수시켜 만든 폭발약) 에 맞아 죽어자빠진 자리 앞이라서 더 무서웠을까?? 더우기 문둥바위 바로 옆에는 산소가 한 기 턱 버티고 있다. 문둥이는 못보았다. 적어도 거기에선 말이다. 훗날, 무슨 취재차 간 "나자로마을'에선 보았지만, 어린 시절, 적어도 우리 꼬마 녀석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위- 바로 문둥바위였다. 아직도 얼굴에 라고 써..

[임부성]어디까지가 수리산 '병목안'인가? (2)

[03/04/25]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1)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두 개의 다리가 있던 곳부터 시작되는 병목안은 언제 생겼을까? 이땅을 강점한 왜놈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며 대륙쪽을 넘보고자 할 때 눈여겨본 곳이 바로 이곳, 수리산 자락의 엄청난 석산이었다. 철도공사에는 수많은 자갈이 쓰이는데 경부선 철길에 깔 자갈을 생산 공급하던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전국각지의 슬프고 고단한 사람들이 부평초처럼 떠돌다 모여들면서 이루어진 동네가 바로 병목안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장비(크락샤, 함마드릴, 덤프트럭 등)가 없었으므로 망치 하나로 바위를 깨고 또 깨서 먹고 살던 사람들. 면장갑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가진 거라고는 망치 하나, 자갈 걸르는 쇠로 된 얼개미 하나가 전재산인 사람들! 망치 하..

[임부성]어디까지가 수리산 "병목안"인가? (1)

[03/04/25]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서울 사람 둘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어제 말야.. 개고기 잘 먹고 왔어." "어디서?" "거 있잖아. 병목안이라구. 안양에서 유명한 보신탕 골짜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그리고, 등록도 안하고 그냥 읽으시는 "손님"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병목안에는 보신탕집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 多할 것임을 잘 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병목안의 알파와 오메가를 논해보기로 하자! 안양9동(전에는 3동,더 전에는 안양3리) 프라자아파트 끝부터 창박골 갈라지는 삼거리(시에선 이곳을 병목안 삼거리라고 한다.)까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수리산 골짜기 전체를 병속에 담아두는 우를 범한다. 안양시는 물론..

[임부성]수리산 문둥바위와 독구(dog)

[03/04/16]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독구(dog)" 천지였다. 당시 개이름 랭킹을 보면, 독구-메리-쫑-베스-캐리-워리 순이었다. 길을 가다가 어떤 개가 사납게 덤벼들 때, 우린 이렇게 불렀다. "독구, 메리, 쫑, 베스, 캐리, 워리~" 그러면 십중 팔구는 꼬리 내렸다. 왜? 자기 이름 불러주니까... 왜? 자기를 아는 척하니까... 왜? 혹시 주인집 아드네미 친구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이 발음을 그대로 쓴다면 무지 웃기겠다! "핫.독.구".. 우리 집 멍멍이가 "독구"였다. 크기는 엄청 큰 놈이 몸 전체가 윤기나는 검은 색을 뒤집어썼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인지 나랑 비슷한지 암튼 "독구"는 우리집에서 몇 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얘..

[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Ⅲ)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6.25사변은 안양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기업가로서 순탄한 길을 가던 선생의 인생에 또 한번의 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시흥군의 민보단장(民保團長)겸 군촉탁(軍囑託)이었던 선생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호계리 본가 뒤꼍에 땅굴을 파고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땅굴생활로 얻은 더부룩한 수염을 구태여 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계속해서 기르게 되는데, 이 수염이 이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에 선생은 수염과 관련하여 “부산 피란시절 기자로 재직할 때나 혹은 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때도 수염 때문에 한결같이 남의 이해를 받은 바 있고, 또한 외형이 두드러져 나쁜 일을 하다가는 남의 눈에 잘 띄게 되므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근신하게 되어 후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