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자료]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안양똑딱이 2016. 6. 11. 09:14

 

이 자료는 2003년 안양시민신문과 안양시축구협회가 공동기획으로 정리한 안양축구사다. 현재 늘푸른안양21 사무국장으로 있는 권보형 사무국장이 당시 안양시민신문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지역체육계의 원로들을 만나고 인터뷰하여 10회에 걸쳐 연재를 했던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소중한 자료다. -최병렬-

 

 

[안양시민신문]60년전에도 안양은 축구도시로 명성 높았다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공동기획

안양 사랑하는 지역 유지들의 축구사랑 남달라
축구명문 전통속 축구 최강도시 자부심 갖게 돼

 

안양시축구협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안양시 축구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에 뜻을 모으고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안양지역 축구사에 대한 증언을 통해 안양시민신문사와 공동기획으로 안양지역 축구사를 정리하려 한다. 이에 지난 9일 안양종합운동장내 안양시축구협회 사무실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앞으로 10여회에 걸쳐 축구계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 안양시축구사를 연재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는 변원신, 정봉수, 권일상씨 등 축구협회 원로들과 장석열(축구협회 직전회장), 이채학(축구협회 회장), 김학배(축구협회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 편집자주 >지난 9일 안양종합운동장내 안양시축구협회 사무실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앞으로 10여회에 걸쳐 축구계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 안양시축구사를 연재하기로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였는지는 모르지만 안양은 축구로 유명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선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안양공고 출신이거나 안양중학교 출신이 많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실시한 투표결과 뽑힌 올해 최고의 축구선수 가운데 당당히 2위에 오른 초롱이 이영표를 비롯해 정해원, 조윤환 등이 대표적인 안양공고 출신이며 안양공고를 축구명문으로 끌어올린 일등 공신들이다.

물론 이렇게 안양 하면 축구를 떠올리게 될 때까지는 뛰어난 기량의 이들 선수 이외에도 안양을 사랑하는 지역 유지들의 축구에 대한 후원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실 안양 축구의 역사는 지역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안양 지역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안양초등학교에서 함께 축구를 했거나 응원을 했던 인연으로 축구를 지원하는데 앞장서면서 안양을 축구 명문의 반상 위에 올려 놓았다.

안양은 1973년에 시로 승격됐는데 같은 해 7월1일에 안양시축구협회가 창립한 것을 봐도 안양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5만명에 불과했던 안양시의 인구가 30년이 지난 지금은 60만에 이르고 있으니 그 무수한 세월동안 이곳에서 많은 인물이 명성을 떨치기도 했고, 월드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안양에서 축구붐을 형성하기도 했다.

특히 1970년에 안양공고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이후 15여년간 각종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안양이 축구명문 도시로 이름을 드높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프로 축구 구단 유치에도 많은 힘이 됐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직도 안양 출신의 선수들이 현역으로 혹은 지도자로 안양이나 다른 지역의 축구현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제몫을 단단히 해내고 있다.

안양시축구협회라는 단체로 묶여진 것은 30년이지만 안양 축구의 역사는 그 훨씬 이전인 1940년대부터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저력을 과시할 만한 도시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이 사실은 당시에 선수로 직접 참가했던 안양축구계의 원로 이서구 옹이 증언한 것으로 “아산군 체육회가 주최하고 중선일보가 후원하는 전국 유명팀 초청경기에서 안양팀이 우승했다”는 것을 사진과 함께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서구 옹을 비롯한 많은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크고 작은 축구대회가 많았고 축구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 축구와 인연을 맺게된 이유였다고 말하고 있다. 1950~70년대에 선수로 활약했던 안양축구계의 원로들은 지금도 한 때는 안양이 축구의 최강이었다는 자부심을 잊지 않고 있다.

안양출신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원로 축구인으로 이서구, 이규영, 정봉수, 박노성, 이규신, 심재덕, 정동준, 박성학, 이규남, 이석노, 권일상, 한광석, 이무용, 한재석 등이 현역 선수로 뛰었던 안양 축구계의 원로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밖에도 안양축구협회를 창립한 박유선 씨를 비롯한 원영희, 최구용(작고), 권운상, 장석범, 최경태, 장석열 씨등이 안양축구협회를 이끌며 안양 축구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고 있다.

장석열 축구협회 직전회장은 “70년대만 해도 경기도체육대회가 전국대회 수준이었는데, 대회 나가면 다른 지역에서 우리가 워낙 잘하니까 안양시와는 붙지 않으려고 피해 다닐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70년에 창단해 전국대회를 30여 차례나 우승으로 이끈 축구명문 안양공고를 비롯해 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안양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 그리고 프로 축구단 안양LG치타스를 가지고 있는 축구도시가 안양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근의 다른 경기 지역과의 경기에서도 패하는 등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안양시축구협회는 창립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본지와 공동 기획으로 앞으로 10여회에 걸쳐 축구협회 30년사와 함께 1940년대부터 축구 잘하는 도시로 성장해온 안양의 축구 역사를 당시에 현역이나 임원으로 활동했던 원로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또한 축구 명문으로 지금까지 많은 선수를 배출하고 있는 안양공고를 비롯한 안양중학교, 안양초등학교 등 학교 축구단의 역사를 아울러 점검하며 안양 축구의 현주소와 발전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안양 축구와 관련된 일화나 사진 또는 기타 자료를 갖고 있거나 제보할 내용이 있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제보·문의 안양시민신문사 466-8808 안양시축구협회 388-1856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②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안양축구의 태동기 (1940년대)
‘全鮮축구대회’우승, ‘축구강호’인정받아

 


1940년경 아산군체육회가 주최하고 중선일보가 후원한 전선축구대회에서 안양이 우승했다는 것이 안양 축구사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왼쪽 우승사진은 당시 축구대회에 직접 각각 선수와 임원으로 참가했던 이서구 옹(82세)과 장배순 옹(83세)의 증언과 사진자료를 통해서 알려져 오고 있다. 오른쪽 자료는 현재 파악된 인물들의 이름이다.

안양은 서울 인근이었던 까닭에 서울과 비슷한 시기에 축구가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것같다. 그렇다면 안양이 축구 잘하는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1940년경 아산군체육회가 주최하고 중선일보가 후원한 전선축구대회에서 안양이 우승했다는 것이 안양 축구사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사진 참조)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축구대회에 직접 선수로 활약했던 이서구 옹(82세)과 당시 임원단으로 축구단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했던 장배순 옹(83세)의 증언과 사진자료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장배순 옹은“안양이 축구가 세니까 축구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통보를 받고 이한수 씨와 함께 온양에 하루 먼저 내려가서 참가 신청을 했지. 다음날 이서구, 이규철, 정인호 등으로 구성된 선수단과 조남찬, 박철재, 윤기호 등이 응원단으로 함께 와서 2박3일 동안 경기를 했는데, 결승에서 천안을 누르고 우승까지 했어. 얼마나 기쁘고 좋던지..선수 뿐아니라 응원단, 임원들 모두 혼연일치가 돼서 얻어낸 결과였어. 이기고 돌아오니까 안양역에 이기선 면장이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마중 나와서 ‘안양축구단 만세’를 부르고 그야말로 안양역 광장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해줬지. 참 열광적이었어” 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대회에 급조한 축구단
우승까지 이뤄내 …

직접 선수로 뛰었던 이서구 옹은 “그때 나는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제일고보)이었는데, 정식으로 축구를 배워 본 적도 없었고 그저 동네에서 축구 좀 한다고 했었지.

그때도 중동이나 경신, 배제 이런 사립학교에는 축구단이 있었고 무척 잘했지. 그때는 축구가 왜 그렇게 좋던지 밥 먹는 것보다 축구하는게 더 좋았으니까. 연희전문(연세대)이나 보성전문(고려대)이 그때도 참 잘했을 때였는데, 시합만 있다하면 구경하러 다녔어. 남들 축구하는 것을 보고 축구가 좋아서 당시에 통학하던 학생들끼리 군포나 오산, 시흥 등 역간 축구시합을 많이 했었지.

그러다 보니까 안양이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어. 축구대회에 나갈 때도 안양에는 축구단도 없는데 갑자기 축구대회에 초청을 받고는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하고 중동이나 경신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을 급하게 모아서 대회에 참가한 거지. 연습은 해본 적도 없고 그냥 우리끼리 포지션도 정하고, 그야말로 동네 축구였는데, 투지가 있었는지 우승까지 하게 됐지”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의 근대 축구가 1920년대 이후 사립학교에서 축구단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것처럼 안양의 축구 역시 일반인 보다 좀더 빨리 축구를 접할 수 있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관이나 단체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조직한 자생축구단으로 출발한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1921년에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후원으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는데, 1940년 대회에서 안양이 우승을 했던 것으로 보아 안양은 축구 태동기부터 축구 강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이서구 옹은 “어려서부터 공은 없었지만 공대신 새끼를 공처럼 만들어 마당에서 늘 공차기를 했어. 다른 특별한 놀이가 없었으니 친구들끼리 모이면 고무신이 벗겨지지 않게 새끼줄로 감고는 안양초등학교 운동장이나 오끼네벌판(만안교 뒤뜰, 당시에는 목장)에 가서 공을 차고 놀았던 환경이 자연스럽게 축구를 잘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붙듯이 활활 타오르던 안양축구의 열기는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그에 따르는 일제의 억압이 심해지면서 곧 사그라들고 깊은 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는 드디어 해방을 이룬 이후에야 비로소 안양에서는 이전에 축구를 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본격적으로 축구단을 결성하고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때도 축구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고 서울, 평양, 수원 등 큰도시를 중심으로 대회가 많이 열렸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증언이다. 당시에 수원으로 경기를 하러 갔던 것이 생각나는데 그때도 안양은 강한 팀으로 알려져 있어서 인기가 높았고 안양에서도 지역 유지들의 지원이 많아 당시에 트럭을 타고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 씨와 함께 갔던 것이 기억난다고 한다. 이때에도 안양에서 축구에 대한 인기와 열의가 대단히 높아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도 잠깐, 6.25전쟁으로 인해 또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③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해방 후의 안양축구 (1940년대)지역유지들 적극 지원 ‘축구도시’로 첫발

지난호에서 해방 후 안양은 지역유지들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으며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축구계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안양은 인구가 3천 내지 5천명에 불과한 작은 면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사랑은 ‘광적’이어서 지난해 월드컵 열기에 견줄만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지역유지 뿐 아니라 가난한 축구 애호가들도 달걀 한줄, 사과 몇개를 선수들에게 나눠주며 응원하고 격려를 보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안양이 본격적인 축구도시로 발돋움하는데에는 이렇듯 축구에 애정을 가졌던 안양의 이름모를 선배들의 공이 컸다는 것이 축구계 원로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이번호에서는 안양이 축구도시로 성장하는데 기틀을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는 중요성이 인정되는 이 시기에 안양 축구의 활약상과 당시 축구 열기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안양축구계의 원로로 안양국민학교를 거쳐 동성고에서 활약했던 정봉수 원로(78세·오른쪽 사진)와 안양에서 공식적으로 최초 조직된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47년 처음으로 전국소년축구대회에 출전해 상위 입상하는데 주역이었던 심재덕 원로(73세·오른쪽 사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안양국민학교 5학년때부터 축구를 했다는 정봉수씨는 그때 제일고보에 다니며 축구를 했던 이서구 옹에 대해 “그 때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는데, 제일 잘했던 사람이 이서구 선배(82세·왼쪽 사진)였다. 보통 둘셋을 제치고 공을 모는 모습이 귀신같이 빨랐다”고 회상했다.

연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40년대 후반에 ‘시흥군직역대항 축구대회’라는게 있었는데, 원래는 시흥군에 있는 직업별 지역별 축구대회였다. 당시에 시흥군에 8개면이 있었는데, 다른 지역은 취약해서 축구단을 구성할 형편이 못되고 군포, 시흥, 안양이 출전하고, 조선직물(대농), 삼왕제지(삼덕제지) 등에서 회사별 축구단이 구성되어 7∼8개팀이 출전해 경기를 치렀다.

그때도 단연 안양이 축구인구도 많고 실력도 월등했다. 그때 안양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이 50여명 됐는데, 직장인이 아니라 안된다는 것을 떼를 쓰다시피 해서 통학축구팀을 만들어 그 대회에 출전했다. 시흥군에서 하는 지역대회지만 친목을 위해 매월 열렸는데,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응원도 대단했다고 한다.

매월 축구대회를 열다보니 축구는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 자연 사람들에게 친근한 운동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안양이 축구도시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라는게 정봉수씨의 의견이다.

안양에 축구를 보급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 가운데 생각나는 선배들로, 안양에서 처음으로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던 박경제(現삼원프라자 박정진 회장 부친), 만제 형제분과 이규철, 이서구, 윤기호, 정인호, 이경희 선배 등이 기억난다. 다음 세대인 우리 때에는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축구를 계속했던 친구들로는 박노성(중앙고), 이규영(경신고), 권 위(선린상고), 정택순 등이 기억난다.

당시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회사축구단에서 활동했던 많은 친구와 선후배가 있었을 텐데 잘 알지 못해 안타깝다. 하지만 안양 축구인으로서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당시만해도 3천∼5천명에 불과했던 안양에서 축구에 대한 열의는 가히 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이후에 안양이 축구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안양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조직했던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축구를 했다는 심재덕씨. 해방 후부터 안양에서의 축구 열기는 그야말로 열광 그자체였다. 지역에 유지 뿐아니라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적극 후원에 나서 국민학교 4학년이던 45년부터 6학년때까지 공식적인 합숙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안양 사람들의 축구 사랑은 정말 눈물겨웠다. 정육점하는 사람은 고기를 제공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심지어 남의 돈을 빌려다가 합숙을 지원해주었다. 이런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이 1947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소년축구대회’였다. 안양에서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이 결성되고 처음으로 전국소년축구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서울운동장에서 시합이 열렸는데, 유니폼도 없어서 선배들이 입던 커다란 옷을 그냥 입고 출전했다. “막상 대회에 가서 서울 아이들이랑 축구를 하는데, 나도 2년을 늦게 들어가서 남들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게네들은 우리보다 한참 늙은 형들이더라구. 그래도 어떻게 투지로 밀어 부쳐서 두 학교를 이기고 준결승에서 종암국민학교하고 경기를 하게 됐다. 안그래도 옷도 크고 상대 선수들이 전부 형들 뻘 되는 것 같아 주눅이 드는데, 3천명 되는 전교생이 다 나와서 스탠드를 차지하고 있는거야. 그 악조건에서 우리가 이겼더니 구경하던 선배들이 좋아서 전부 얼싸안고 정말 난리가 났었지. 선수도 선수지만 그때 그렇게 좋아하던 선후배들, 지역유지들, 정말 잊을 수가 없지. 그래서 축구를 계속 하게 되었던 것 같애. 그때 같이 갔던 친구들이 우리동기 중엔 박성학(한양공고), 정동준(한양공고), 김윤묵, 한신욱(중동), 김덕영(배제), 우리 후배(17회) 중엔 변원신, 이규남, 이석노 등이 같이 뛰었지.”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④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1950年代 안양축구 / 전쟁으로 인한 침체기...안양출신선수 개인활약 돋보인 시기
‘김용식 선생·병참축구단’ 축구전문화시대 개막

지난호<1월9일자 제78호>에서 1940년대 후반에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이 전국소년축구대회에서 선전했던 내용을 당시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의 주역이었던 심재덕 원로의 증언과 함께 소개했다. 이번호에서는 그당시 5학년으로 출전했던 변원신, 이규남 원로와 4학년으로 참가했던 권일상 원로를 만나 그 이후 안양 축구가 어떻게 맥을 이어왔는지 들어 보았다. <편집자주>이분들 역시도 일제시대 암울한 시대적 울분을 삼키며 젊은이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축구였으며, 안양에서 축구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오끼농장’(사진·현재 안양2동 안양대교 부근)을 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배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며 축구의 꿈을 키웠던 이들이 후엔 이곳에서 공을 차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하던 제단이 있었던 삼창고무 옆 운동장(현재 장내동 중앙성당과 그 주변)이 또한 당시 젊은이들이 축구의 꿈을 키우는 산실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호에서 언급한 1947년 전국소년축구대회에서의 상위 입상 이후로도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은 지역대회 등에 자주 출전했던 것으로 원로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 우신국민학교와 성남고등학교에서 지역대회가 많았는데 거기에 자주 출전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6·25전쟁이 났고, 194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안양의 축구는 극심한 침체기를 맞는다. 전쟁으로 인한 축구 육성의 단절은 1960년대 말까지 이후 20여년간 거의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는 축구인을 새로 육성하거나 발굴하기는 힘든 시기였기에, 안양국민학교 축구단에서 빛나는 활약을 했던 많은 선수들도 학교 졸업 후에 직업현장으로 뛰어 들거나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쳐 축구를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그나마 안양국민학교 축구단 출신으로 심재덕씨(78세)가 성동고를 거쳐 공군팀에서 주장으로 활약했고, 동기생인 정동준이 한양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박성학이 한양고를 거쳐 제2훈련소, 인천제철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그리고 1년 후배인 이규남과 이석노가 육군병참축구단에서 활약했고, 권일상(안양국 18회)이 국민대에서, 한광석(안양국 21회)이 경희대에서 활약하는 등 활발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안양 축구의 명맥을 유지하며 각 현장에서 개인적인 활약을 보여준 시기였다.

안양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조선직물이었던 금성방직이 재가동되면서 1954년 무렵, 한국 축구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 김용식 선생이 금성방직 김성곤 회장과의 인연으로 금성방직 간부(감사)로 안양에 오게 되는데, 이로써 안양이 축구와 관련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전쟁 직후라 기업에서 축구단을 육성할 여건이 되지 않아 국가에서 군대를 중심으로 축구단을 운영했는데, 육군병참단을 김용식 선생이 맡게 돼 병참축구단이 안양으로 내려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축구인들이 안양을 찾았고, 안양에서 크고 작은 훈련과 시합이 열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축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그야말로 축구의 전문화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당시 축구가 안양이라는 지역적으로 볼 때 엄청난 침체기를 맞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안양축구가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 중심의 자생적인 동호회의 성격이 짙던 것에서 전문적인 축구로 한단계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안양에는 국민학교 축구단도 전쟁으로 단절된 상태였고 중고등학교에도 정식 축구단이 결성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지역대항의 축구대회가 열리곤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축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은 김용식 선생이 병참단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축구에 대한 전문성을 쌓을 수 있었고 정통 축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안양공고 졸업후 병참축구단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규남씨(69세)는 “젊은 시절을 축구로 불태웠는데, 김용식 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것이 일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고, 지금도 그 분의 가르침은 잊을 수가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축구단에 입단해서 제일 처음 한 것이 쉽게 말해서 볼보이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는 그 날 연습에 사용할 공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장비가 허술할 때라서 지금같은 축구공이 아니라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가죽 끈으로 묶는 공이었는데 보통 하루에 2~30개를 만들어 놓아야 했다.

축구화도 징을 하나하나 못으로 박아야 했는데, 선배들이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웬만한 것은 후배가 다 준비해줘야 했다. 그러고 나서 훈련을 받는데, 훈련이 워낙 힘들어서 입단 동기 중에는 먹은 음식을 다 토해내며까지 훈련을 이기는 친구도 있었고, 달밤에 훈련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훈련의 결과 강팀이 될 수 있었고 고된 훈련의 결과가 언제나 시합에서 나타났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⑤
안양지역 축구인 양성 시작...1960年代 안양축구 / 새로 거듭나는 시기
금성방직축구단 전성기, 잔디구장으로 안양 유명세

 


▲ 1960년대 당시 전국에 3개 밖에 없던 잔디구장 중 하나였던 금성방직 축구장 전경. 이 시기에 금성방직 잔디구장에서 열린 축구 시합을 자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주민들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축구인들이 안양을 자주 찾으면서 안양이 축구도시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1960년대 역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고 안양축구 또한 크게 활성화 되지 못한 침체기였다. 그나마 금성방직 축구단이 결성되어 전국을 제패하는 강팀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대가 1960년대였다. 또 전국에서 3개 밖에 없던 잔디구장 중 하나를 금성방직이 갖고 있어서 연습을 위해 전국의 많은 축구인들이 안양을 찾았다.

잔디구장에서 시합하는 모습 보며 축구관심 고조

한국 축구계의 대부인 김용식 선생이 있고 잔디구장이 있었던 까닭에 당시 국가대표팀이었던 양지축구단을 비롯한 많은 축구단이 훈련과 함께 크고 작은 시합을 치르기 위해 안양으로 모여 들었다.

권일상 원로는 당시 외지에서 안양을 찾은 축구단이 가장 많이 묵었던 숙소가 안양역 근처에 있던 창민여관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안양은 금성방직 잔디구장에서 열린 축구 시합이나 연습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민간에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축구인들이 안양을 자주 찾으면서 안양이 축구도시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외적인 축구 열기에도 불구하고 안양지역 내에서는 1940년대부터 뜨거웠던 축구에 대한 열의가 아직까지는 살아나지 못한 침체기였다는 것이 원로들의 증언이다.

오산읍과 친선경기는 계속

변원신 원로나 권일상 원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도 지역 간의 축구 경기는 계속 되었던 것 같다. 60년대 초반까지는 오산읍과 안양읍의 친선축구경기가 몇 차례 열렸고, 응원하러도 많이 갔었는데, 지금도 오산에 가면 당시 축구시합을 했던 곳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친선 경기지만 그때 안양에서 잘하는 선수들과 시흥이나 군포 등 인근에서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서 참가했기 때문에 당시 안양팀은 전국대회에 출전해도 손색없을 정도 수준의 그야말로 정예요원이었고 안양이 항상 월등했기 때문에 안양축구가 세다는 말을 그 때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대한체육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체육회 시흥군지회 즉 시흥군체육회 회장이 안양 축구계의 최고 원로인 이규철이었고 권일상 원로가 총무이사를 맡고 있었다고 하는데 체육회 차원에서의 후원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안양지역 축구인 육성 첫발

1960년대의 안양축구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축구 꿈나무 육성에 대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점이다. 이시기에 꿈나무 육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실제로 학교축구단이 만들어짐으로 인해 안양은 1970년대 이후 축구의 명문도시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은 안양의 축구사에 있어서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으로 50∼60년대를 거치며 안양지역은 김용식이라는 훌륭한 지도자와 잔디구장을 갖춘 최강의 실업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안양 지역의 축구는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정작 지역 간의 시합에서 조차 선수 수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 축구를 자주 접힐 수 있었던 분위기에 편승해 지역 축구 육성의 필요성에 처음으로 눈을 뜬 사람이 故 한준우 선생이다. 금성방직 김성곤 회장과 사촌간 이었던 그는 당시 금성방직 공장장으로 있으면서 금성방직 축구단을 이끌고 있었다. 금성방직 축구단을 맡고 있는 동안 그는 안양 지역에서 선수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축구 선수들을 기업에서 지원케 하는 일에 앞장서, 당시에 기업과 선수를 연결시켜 기업 장학금을 통해 선수를 육성하는 체계를 만들어 많은 축구 꿈나무를 양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안양 지역에서 축구 육성의 물꼬를 트며 안양중학교 축구부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한 바가 큰데, 그 일화를 권일상 원로로부터 들었다.

故 한준우 선생 안양축구 발전에 공헌

“60년대 중반, 전국소년축구대회 결승전이 중대부고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한준우 선생이 금성방직 축구단을 이끌고 갔다. 결승전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없는 시골, 충청도 괴산(이규남 원로는 수안보로 기억하고 있음)에 있는 수해국민학교 학생들이 그야말로 맨발로 공을 차는 어려움 속에서도 우승을 했다.

워낙 가난한 시골 동네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옷이나 신발 등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투지 하나로 우승을 한 거지.

한준우 씨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수해국민학교와 금성방직과 자매결연을 맺고 선수들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그 선수들을 아예 안양으로 데리고 와서 안양중학교 축구부를 만들게 됐는데, 그게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단절되었던 안양 축구를 살리는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1940년대 말에 안양초등학교 축구부가 결성돼서 활동한 이래 끊어졌던 학교축구의 맥을 다시 잇는 의미있는 일이었고 사실상 그때부터가 안양출신의 축구선수를 본격적으로 양성하게 되는 그야말로 안양축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준우 선생이 안양축구발전에 기여한 바가 자못 크다고 생각한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⑥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1970~80年代 / 안양축구의 전성기
전시민 폭발적 사랑속 발전거듭...안양중·안양공고 축구부 막강, 축구도시 명성

▲ 제55회 전국체육대회 우승 (1974년) 사진제공/ 안양시 공보담당관실 이정범

1970년대는 누가 뭐래도 안양이 축구도시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였다. 1967년에 창단된 안양중학교 축구부에 이어 1970년 안양공고 축구부가 만들어지면서 안양이 축구도시로서 발돋움하고 이후 20여년간 안양 축구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의 안양 축구에 대해서는 정봉수, 심재덕, 권일상, 이규남 등 많은 축구 원로들이 축구협회와 심판 등으로 활동하며 선수로 현장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열렬한 후원자로 응원을 보내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박유선, 김진강, 정동준, 박종근, 원영희, 최구용 등이 안양시축구협회를 창립해 꾸준히 후원활동을 하며 버팀목이 돼 주었다.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에서 축구부 담당교사로 재직하며 안양축구부의 붐을 일으킨 김진강씨를 만나 당시 안양의 축구 분위기에 대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안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은사였던 당시 안양중학교 윤석제 교장의 권유로 안양중학교 체육교사를 하게 되었다는 김진강씨는 안양에 와서 안양시민들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 정말 남다른 것을 알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1970년~80년 안양중·안양공고 축구부 담당교사로 재직했던 김진강씨.

“안양중학교 축구부를 맡고 있던 5년동안 스포츠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을 3번했는데, 실적이 좋으니까 인기가 대단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대전에서 열린 제2회 대회였다. 정봉수, 박유선씨 등이 학생들 민박하는 여관까지 와서 많이 도와주었고 우여곡절 끝에 우승했다. 우승하고 돌아오니 환영행사까지 열어주었다. 금성방직에서부터 안양극장까지 선수들 목에 꽃다발을 걸고 고적대까지 동원해 시가행진을 벌였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70년대 초기에는 젊은이들이 다방이나 술집에 모이면 화제가 모두 안양중학교 축구부였다. 안양은 당시만 해도 인구가 몇 만에 불과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시내에만 나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는 물론이고 차를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지만 항상 행동거지에 조심을 해야할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 이틀이면 평균 3통의 편지를 받았다. 전국에서 축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이 안양중학교 축구부에만 들어오면 무조건 훌륭한 선수가 되는 줄 알고 선수로 받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 뿌듯한 시절이었다. 안양 시민들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 지역 유지들의 후원은 물론이고, 학교 자모회를 통한 후원단체가 많았다. 대전이나 부산 등 지방에서 축구대회가 열릴 때도 지역의 후원자들이 사비를 털어 직접 응원을 하러 따라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워낙 어려운 데다가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이 많았고, 선수 수급을 위해 2년간은 서울에 있는 아동보호소 아이들을 데려와 선수로 키우기도 했다. 지난호에도 언급한 바 있는 한준우씨의 도움으로 기업 및 단체와 개인이 매월 5천원씩 10곳에서 지속적인 후원이 있었는데, 사실 많은 선수들이 합숙하며 생활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다. 선수들을 먹이기 위해 성미 모금은 물론이고 김장철이 되면 전교생에게 비닐을 나눠주면서 김치를 가져오라고 해서 땅을 파고 가마니 속에 김치를 묻어 두고는 겨울내내 김치로 반찬을 해결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수들이 많아 이들의 일탈행위를 막아주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가정은 돌아볼 겨를 없이 축구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김진강씨는 그래도 선수들에게 엄하게 가르친 덕에 시합에 나가면 안양 선수들이 경기도 잘하고 매너도 있어서 항상 인기가 높았다.

정봉수, 심재덕 원로도 “1970년대에는 어느 운동장에 가든 안양공고만 나오면 다른 팀은 주눅들어 했다. 시합이 있다 하면 열일 제쳐두고 응원을 다녔고 선수와 응원단이 혼연일체가 돼서 응원했다. 부산이고 광주고 강릉이고 할 것 없이 안양에서 응원단이 항상 200여명 이상씩 참석해서 열광적으로 응원했기 때문에 보는 재미도 있어서 안양공고가 나가는 시합엔 항상 다른 때보다 관객이 많았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도 8·15기념 부락별축구대회 등 지역별축구대회가 해마다 열렸는데, 마을잔치때도 축구는 빠지지 않는 운동종목이었다.

이렇듯 안양에서 1970년대의 축구 열기는 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으며 안양공고 축구부는 이러한 축구 열기를 이어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시기에 전국대회만 20여회가 넘게 우승을 했고 김태환, 기덕서, 조한민, 이재호, 정해원, 조윤환, 김형렬, 김철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국을 대표하는 굵직한 선수들을 배출하면서 축구의 아성을 쌓았다. 이로써 안양 하면 축구가 생각날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안양인의 축구 사랑은 1973년 안양시축구협회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는데, 학교 축구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일반인들에게 축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⑦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안양축구 지원 위한 ‘지역사랑의 결실’

‘안양시축구협회’(상) / 안양축구 발전의 디딤돌
박유선, 원영희, 최구용, 권운상 회장 거치며 탄탄하게 성장

▲ 93년 6월 4일 제26회 대통령금배 전국고교 축구대회 우승

지난 호에서 1970~1980년대는 안양이 축구도시로 명성을 드높힌 전성기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안양이 축구도시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전국에 축구부가 많지 않았던 시기에 안양중학교에서 안양공고로 이어지는 축구부가 전국대회에서 보여준 우승열기 덕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배경에는 안양 사람들이 1940년대부터 오끼농장이라는 잔디밭에서 축구를 즐길만한 환경이 마련된 데다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한국 축구의 대부인 김용식 선생과 금성방직 축구단의 영향으로 축구를 자주 접하며 생활 속에서 축구와 친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그만큼 커져 있었다는 안양의 지역적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안양의 축구부가 안양인들의 열망을 채워주며 전국대회에서 승승가두를 달리자 안양 사람들의 축구사랑은 거의 폭발적으로 드러났고 축구를 사랑하는 안양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안양시축구협회’출범, 안양시민 축구사랑 결실>이렇게 축구를 사랑하는 안양 시민들이 커나가고 있는 안양의 축구 꿈나무들을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만든 것이 1973년 7월 1일에 창립한 ‘안양시축구협회’다. 다시 말해서 축구협회는 안양시민의 축구 사랑의 한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출범한 축구협회는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11대에 걸쳐 8명의 회장을 배출하고 안양 축구 발전을 위해 충실한 디딤돌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축구협회의 창립은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 축구부 창단에도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뿐 아니라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던 박유선을 중심으로 지역 축구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박종근, 김동준, 권일상, 이규남, 송의숙, 성시춘, 김동근, 조복윤, 김진강 등이 참여해 만들었다.

안양이 시로 승격 된 해이기도 한 1973년은 안양축구사에 있어서도 기억 될만한 특별한 해다. 안양 축구 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한 축구협회의 창립도 그렇지만, 그 해 「전국추계 중고 축구연맹전」에서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가 각각 중 고교에서 전국을 제패하며 ‘안양하면 축구’로 기억 될만한 수확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1대 박유선, 2대 원영희, 3대 최구용, 4대 권운상 회장

<기틀 다진 박유선 회장, 얀양축구와 협회 발전>축구협회가 창립되면서 안양 축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협회 차원에서 힘을 모아 부산, 광주, 강릉,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시합 때마다 2백 여명 이상의 응원단이 따라 다니며 응원을 해대는 통에 대회장마다 안양 인기가 많았고 심지어 안양과 시합이 있다고 하면 응원을 보러 오는 관중도 있었다는 것이 축구 원로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안양축구발전에 있어서 일등 공신으로 회자되고 있는 박유선 회장은 1973년부터 1982년까지 3대에 걸쳐 회장으로 재임하며 불우한 처지에 있는 축구 선수와 기업체 또는 개인을 연결해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는 등 지역에서의 축구부 양성을 위해 노력해 축구협회가 안양축구 발전의 디딤돌이 되는데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원영희, 최구용 회장, 협회 안정궤도에 올려>그 뒤를 이어 1988년까지 4대 회장을 맡은 원영희 회장은 박 회장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순전히 축구가 좋아 후원활동을 하면서 축구협회와 인연을 맺은 케이스라 한다. 원 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축구협회가 안정궤도에 올라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내가 재임하고 있는 동안 프로 축구단인 유공(SK의 전신)이 안양에 연고를 두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프로 축구가 활성화 되지 않아서 서로 어려운 처지였는데도 항상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하면서 잘 지내서 연고지를 옮길 때도 너무 아쉬워하며 헤어졌는데, 정말 지금의 LG와 비교된다.

조윤환의 경우, 안양에서 유공을 거쳐 지금은 현대 감독이 됐는데, 산학 협동이 잘 이뤄진 좋은 선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축구단을 하나 더 만들려고 안양교육청에 참 많이 뛰어 다녔는데 결국 이루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는 것이 원 회장의 말이다.

1992년까지 5대 회장을 맡았던 (고)최구용 회장은 안양 축구와 축구협회를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공헌이 크다. 당시에 서울시축구협회와 자매결연을 맺어 타 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으며 프로축구대회를 유치하는 등 안양을 대외적으로 알리려 노력했다.

<권운상 회장, 축구 붐 조성에 기여>이어서 1994년까지 6대 회장을 맡은 권운상 회장은 와 <월드컵 대표팀 평가전>을 유치하는 등 축구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권 회장은 “축구협회는 외부의 지원 없이 회장과 이사들이 회비를 내서 운영하는 순수 자생단체라는데 의의가 있다.

선배들 역시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조직을 만들었고 우리가 도와야 된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열었다. 잘된다 싶으면 시기와 욕심이 있게 마련인데, 축구협회는 그런 사람 없이 축구에 대한 애정으로 순수하게 조직 된 단체이기에 그러한 선배들의 가르침을 후배가 이어받고 또 다시 그 후배들에게 이어주며 지금까지 왔고, 이만한 조직이 될 수 있었다는게 가장 큰 자랑이다.

요즘 LG의 연고지 이전 문제로 시끌시끌한데, 축구협회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아 나가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이 많다” 고 말했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⑧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축구발전 위한 다양한 활로 모색

안양시축구협회(하)/ 안양축구 발전의 디딤돌
프로축구단·후원회·여자축구단 등 제2의 도약 시도

지난 96년 4월 26일 안양시축구협회 제7대 장석범 회장 재임시 안양LG축구단이 안양시와 연고이전 협약을 맺었다.

지난호에 이어 안양시축구협회 7대 장석범 회장(1995~97), 8대 최경태 회장(1998~99), 9대 장석렬 회장(2000~2001), 10·11대 회장을 다시 맡게 된 이채학 회장(2002~현재) 등을 만나 회장 재임시 활동과 당시의 안양 축구에 관해 들어 보았다.

안양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안양 축구 명성의 현장에서 직접 활약한 산 증인이기도 한 장석범 회장은 “선배들이 마련한 기틀 위에서 우리는 선배들 유지를 받들어 비교적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 회장 재임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단연 프로축구단인 LG를 안양에 유치한 것이다. 프로축구단의 유치는 축구를 사랑하는 안양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지역에 프로축구단이 생김으로써 지역에 있는 초중고 축구부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고 축구 꿈나무를 육성하는데 힘이 될 뿐 아니라 전반적인 지역축구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 축구인들의 열망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1996년 4월 26일에 LG와 안양시가 조인식을 맺고 안양도 드디어 프로 축구의 물결 속으로 합류하게 된다.

장 회장은 “당시에 LG를 유치하느라 백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준비해 안양으로 오는 것이 결정됐는데, 스포츠 조선에 ‘LG 창원에 둥지 틀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틀어지나 보다 하고 놀라서 알아 봤더니 기자가 특종 욕심에 오보를 낸 것이었고 3일 후 신문에 다시 ‘LG 안양으로 확정’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지금은 우스갯소리가 됐지만 당시엔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당시 LG를 두고 창원, 대전, 안양이 접촉했었는데, 사실 안양이 가장 열악했다. 그러나 안양이 전형적인 축구도시고 가능성을 보고 선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렵게 유치했는데, 최근엔 이전 얘기가 구체화되는 것을 보니 요즘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굳이 이전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여기까지 끌어온 안양시와 LG측에 섭섭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여자축구팀 창단, 지역축구 새바람 일으킨 최경태 회장

안양 토박이로 자연스럽게 지역 축구 발전을 위해 지원하던 최 회장은 친구인 장석범 회장과의 인연으로 축구협회에 들어와 전문 축구인 못지 않게 축구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최 회장 재임 시절에는 선배들이 숙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학교 축구부를 2개팀이나 창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회장을 맡으면서 무엇보다 초중고 축구부 지원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여자 축구가 급부상하고 있던 터라 당시 덕천초등학교 윤기수 교장과 의논을 해서 여자축구부를 창단하게 됐는데, 창단 1년만에 우승을 했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덕천초등학교에 남자축구부도 만들게 되었다. 축구협회가 워낙 선후배 관계가 탄탄한 조직이라서 선배들의 노력이 내 대에 와서 결실을 맺은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안양이 남자 축구로 명성을 많이 쌓았는데 앞으로는 여자 축구가 안양 축구의 명성을 이어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다. 사실, 이제 남자축구는 국가대표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지만 여자축구는 가능성이 많다. 소질있는 여자아이들에게 많이 권하고 싶다”

어려운 시기 그랜드슬램 이룬 것 보람, 장석렬 회장

선수를 거쳐 심판으로, 그 후엔 축구 후원자로 평생 축구와 함께 해온 장석렬 회장은 심판을 시작할 때 김진강 선배로부터 입고 있던 심판복과 휘슬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정도로 지역에서 선배들의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기적으로 IMF 직후 어려운 시절에 회장을 맡았지만 2000년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었다. 덕택에 2001년에는 안양 초·중·고를 비롯해 프로축구와 일반부, 여자축구까지 우승을 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보람 있었다. 그리고 안양초교 출신으로 동파로 인해 없어진 안양초교 축구부 숙소를 마련해 준 것도 보람 있었다. 바램이 있다면 생활체육과 엘리트 축구가 하나로 합쳐졌으면 하는 것이다. 안양 축구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통일해 꿈나무 육성과 학교 축구 지원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활체육회와 통합위해 최선 다할터, 이채학 회장

초등학교와 중 고교를 거쳐 안양시 대표선수로도 활약하며 축구 사랑을 몸소 실천해 온 이채학 회장은 생활축구협회 회장도 역임하며 아마추어와 엘리트축구를 골고루 경험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프로축구단 LG의 서울 이전에 반대하며 안양축구인을 대표해 삭발까지 감행하며 안양축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 바 있는 이 회장은 “앞으로 생활체육회와 축구협회를 통합해 지역 축구 발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까지 축구협회의 숙원사업인 학교 축구의 발전과 축구단 창단을 위해서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힌 이 회장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삼성초등학교 축구부 창단을 확정짓고 중학교 팀을 신설할 계획이며 여고 축구팀도 창단 준비중이다. 안양 군포 의왕 과천 4개시 친선축구대회도 활성화시키고 올해 경기도 체육대회 시범경기로 지정된 여자축구에서 우리가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⑩ -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학교 축구’(하) / 초등학교와 여자축구부
‘축구도시’ 명성, 초등학교부터 시작돼야
최소 2개팀 신설, 고교 여자축구부도 창단돼야

이번 호는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마지막회로써 안양지역 초등학교 축구부의 역사와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자축구부에 관해 정리하면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 안양 축구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편집자주>현재 안양에 있는 초등학교 축구부로는 안양, 덕천 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덕천 초등학교와 부흥중학교에 여자축구부가 있다.

그동안 안양시 축구협회의 많은 임원들이 학교 축구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안양의 축구 명성에 비하면 빈약한 실정이다.

본 기사 2회에서 언급한바 있듯이 안양에서 최초로 조직된 학교 축구부는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소년축구대회에 참가했던 안양초등학교 축구부였다. 이후 몇 년동안 축구를 사랑하는 안양 사람들의 열렬한 지원 속에서 안양을 빛낸 많은 축구인을 배출한 안양초등학교 축구부는 6·25전쟁을 거치며 20여년간 오랜 침묵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안양중, 안양공고 축구부가 축구 강호로 명성을 드높이던 1970년대에 안양초등학교 축구부가 다시 창단 됐다. 창립 초창기의 전적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전국대회와 경기도 대회에서 다수의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2002년에는 전국에서 200여개 팀이 접전을 벌인 눈높이컵 축구대회에서 8강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동안 15명 정도의 지도자를 거쳐 현재는 안양초·중· 공고 출신의 서용석 씨가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모교라서 더 잘 지도하고 싶다는 그는 “안양에서 뿌리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다. 아직까지는 전국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신도시를 중심으로 신설된 축구부는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원이 대단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지역에서의 후원도, 자체적인 후원도 매우 약한 편이다. 지역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바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안양초교 축구부는 199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때 학부모를 중심으로 한 ‘장미회’ 라는 모임에서 축구부를 열심히 지원해 활성화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서용석 씨도 “그때는 지금은 돌아가신 정한영 회장이 이끄는 장미회에서 축구부를 위해 아낌없이 후원해 주어서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발적인 후원은 유소년 축구 활성화에 대한 자각을 가져왔고 이 시기에 안양에는 신안초등학교와 동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신설되기도 했다. 당시 신안초교는 한국전력공사가 유소년 축구부에 대한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적극 지원해 병참단 출신의 석진규를 감독으로 하는 축구팀을 창단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지원이 끊기면서 축구부도 해체되었다.

동초등학교의 경우도, 축구 붐이 형성되면서 자체적으로 창단 했다가 운영상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해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안양초등학교 축구부만 유일하게 30여년을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가 덕천초등학교가 윤기수 교장의 노력으로 1998년 여자축구부를, 1999년에 남자축구부를 창단하게 된다.

안양에서 최초로 창단된 덕천초 여자축구부는 2000년 제1회 대구시장기 남녀축구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여자축구의 돌풍을 몰고 왔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2000년에는 부흥중학교에 여자축구부를 창단해 초등학교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부흥중학교 여자축구부도 창단 이후 지금까지 전국대회에서 우승 및 준우승을 포함, 항상 3위 이내에 드는 훌륭한 성적을 유지해오고 있다. 축구부 창단부터 지도를 맡고 있는 전세환 감독은 “여자축구부의 경우, 아직은 전국적으로 30여 팀에 불과해 가능성이 많은 운동이다.

가장 시급했던 선수들의 숙소 문제는 해결 됐는데, 자체 후원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고 우리 팀원들 중 청소년 대표가 3명, 주니어 대표가 5명인데, 고등학교 축구부가 없어 실력있는 선수들을 다른 지역으로 뺏겨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하루빨리 고교 여자축구부가 창단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바램했다.

학교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축구부의 후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안양시민의 축구 사랑이 그만큼 각별했던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선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안양중학교 축구부는 창단시부터 안양의 기업인과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대일 후원으로 시작됐다.

다음은 안양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이었던 장미회의 축구부 후원이다. 많은 축구인들이 당시 정한영 회장의 아낌없는 후원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양의 엘리트축구 즉 꿈나무 육성을 위해 안양 시민이 자발적으로 만든 ‘안양시축구후원회’가 있다. 축구후원회는 1993년 안양공고가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하면서 후원회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고 1995년 안양공고가 전국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축구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뜻을 모아 만들었다.

초대에는 박유선 회장이 2대는 원영희 회장이 3대는 장석범 회장이 맡아 운영해 오고 있다. 축구후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해 안양공고에 버스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등 안양의 축구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LG 로축구단의 연고 이전 등의 문제로 축구인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는 듯하
다. 그러나 60년 넘게 축구를 사랑하며 축구를 통해 울고 웃으며 화합해 축구도시로 성장해온 안양의 저력은 한국 축구계에서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많은 축구계의 원로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초등학교 축구부를 몇팀 더 신설하고 중학교도 몇팀 만들고 대학교도 축구부를 창단해서 선수층을 피라미드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보다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진다면 안양축구의 미래는 훨씬 밝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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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6 17:2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