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427

[20250327]안양 향토문화 <만안답교놀이> 실태조사

답교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밟고 노는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1987년 실태조사를 통해 안양에서는 호계지역과 만안교지역에서 답교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착취에 따라 경제적 여유가 점차 없어지면서 1920~30년경에 사라졌다고 한다. 안양만안답교놀이는 실태조사와 원로들의 고증을 통해 호계지역의 답교놀이와 만안교지역의 답교놀이를 실존하는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유산)를 중심으로 복원한 것으로 놀이는 길놀이, 다리밟기놀이, 무동춤놀이, 선소리꾼놀이, 대동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1988년 첫 재현이 이루어졌으며, 1989년 제6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첫 출전하여 공로상을 받았다. 현재 안양만안답교놀이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 시기에 시민과 함께하는 대동놀이로 재현되..

[20250326]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과 화성(華城) 축성 고찰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구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는 의왕시청 별관이 있는데, 입구에는 눈에 띄는 표석이 하나 있다. 표석의 전면에는 사근행궁 터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과거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거동할 때 머무는 임시 궁궐로, 그 목적은 화성행궁(華城行宮)처럼 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온양행궁(溫陽行宮)의 사례처럼 온행,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처럼 전쟁 시 피난 등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새로운 성을 쌓아 도시를 형성하고, 수원에 이르는 경유지마다 행궁을 설치하였다. 모두 6개소의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 있던 사근행궁(肆覲行宮)이다.  사근행궁은 ..

[20250325]잊혀진 독립운동가, 의왕 하우현성당 윤예원 신부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병항쟁을 비롯해 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인사들 가운데도 의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신도를 비롯해 사제와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미 친일로 돌아선 교회지도부의 거부로 종교적-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없었지만, 천주교인 역시 겨레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당시 천주교회의 주교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다.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

[20250322]이등박문에 짱돌 던진 원태우지사 사건 기록

2025.03.21/ #아카이브 #기록 #역사 #안양 #항일운동 #원테우 #원태근 #조선총독부 #판결문/한국근대사료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기록에서 원태우지사의 판결.선고문을 발견했다. 선고문 내용을 보면 그동안 전해지고 있는 것과 다르게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자료에 원 지사의 주소지는 京畿道 果川郡 安養市場 22통 不詳로 기록돼 있다. 이는 현재 원 지사 생가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안양1번가 농협(현 안양1동)이 아닌 과거 시대동 구시장(현 안양1동)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이름과 나이는 元泰根(원태근) 당시 20세로 기록돼 있어 현재 불러지고 기록되는 원태우와 다르다.이는 공식기록을 통해 이름, 사망일자, 이미지 등 가짜 정보가 안내되고 지식백과 등 온라인상..

[20250319]여지도서(輿地圖書) 금천현(衿川縣) 안양리(安養里) 기록

2025.03.19./ #아카이브 #고지도 #여지도 #금천현 #안양리 #since1759/ 영조 35년(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금천현도(衿川縣圖)에 명기된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리(安養里) 지명이다.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말하는데  행정표기로는 첫 기록이 아닐까 싶다. 『여지도서』는 조선 영조 1757년∼1765년에, 왕명으로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55책으로 편찬한 전국 지방지이다. 읍지라고도 한다. 총 55책이며 필사본이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 진지 1개 등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행정구역 중 39개 읍의 읍지가 누락되어 있다. 편찬된 지 200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편을 위해 왕명으로 각 읍에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해서 ..

[20250319]안양읍내 최초의 예배당 제일교회 시작된 곳

2025.03.18/ #기록 #역사 #안양 #제일교회 #since1930 #지도/ 경기도 안양읍내 최초의 예배당인 제일교회(安養第一敎會, Anyang First Presbyterian Church)가 시작한 곳. 제일교회 80년사 사료집에서.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안양노회 소속 제일교회는 1930년 5월17일 양동익 전도사에 의해 안양청년회관에서 「안양교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창립당시 안양지역은 경부선 안양역 개설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지만 주변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신도들이 성경을 개별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그러던 중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가 신도들의 교회설립 요청을 받아들여 양동익 전도사의 주도로 교회가 창립되었다. 교회 창립당시..

[202503015]1899년(광무3년) 발행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자료명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귀저자 시흥군(始興郡) 편(編)광무삼년십이월(始興郡邑誌(京畿道), 光武三年十二月) , 始興郡邑誌(京畿道), 光武三年十二月 청구기호 K2-4252 MF번호 MF35-246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地理類/方志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https://jsg.aks.ac.kr/dir/view?dataId=JSG_K2-4252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 디지털장서각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ㆍ기본서지 자료명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귀 저자 시흥군(始興郡) 편(編) 자료명(이칭) 시흥군읍지(경기도), 광무삼년십이월(始興郡邑誌(京畿道), 光武三年十二月) ,jsg.aks.ac.kr 일반사항· 자료명(한글) 시흥군읍지· 사부분류 사부..

[202503015]1899년(광무3년) 발행 <과천읍지(果川邑誌)>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자료명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귀 저자 과천현(果川縣) 편(編)자료명(이칭) 果川縣邑誌(京畿道) , 과천현읍지(경기도)(果川縣邑誌(京畿道)) 저자(이칭) 果川縣(朝鮮) 編 , 과천현(果川縣)청구기호 K2-4214 MF번호 MF35-246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地理類/方志 출처: 장서각(SJ_JSG) https://jsg.aks.ac.kr/dir/view?dataId=JSG_K2-4214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 디지털장서각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ㆍ기본서지 자료명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귀 저자 과천현(果川縣) 편(編) 자료명(이칭) 果川縣邑誌(京畿道) , 과천현읍지(경기도)(果川縣邑誌(京畿道)) 저자(이칭) 果川jsg.aks.ac.kr · 자료명(한글) 과천현읍지· 사부..

[20250314]안양천 옛이름 大川(대천) 수록 신중동국여지승람

2025.03.15/ ##아카이브 #고문서 #대촌 #안양천 #신중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에 기록된 안양천의 엣 지명 대천(大川)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천(大川)이 금천현의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5리(里)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의 관악(冠岳) 청계(淸溪) 등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나와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陽川縣)의 철곶포(鐵串浦)로 들어간다.  당시 금천현 구간을 대천이라 기록한 것인데, 금천현에서 가장 큰 하천이란 뜻으로 보통 순 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표기로 많은 고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천현의 안양천 구간을 철곶포라 불렀음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포구나 갯가의 특수한 지형을 하천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20250315]사라진 지역사를 분석한 <시흥의 열두딸들> 글

서울시 영등포, 구로, 관악, 동작, 서초, 금천 6구와 경기도 안양, 광명, 안산, 과천, 군포, 시흥 6시가 한때는 시흥군이라는 하나의 지역이었다. 시흥군이 근현대 격변의 역사를 거치며 열두 딸 지자체들로 다시 태어난 결과, 조선시대 시흥군의 중심지였던 시흥동은 지금 시흥시가 아니라 금천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왜 시흥군은 열두 딸들로 조각조각 나뉘었을까? 시흥군에서 서울과 경기 서남부의 도시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글쓴이는 기업 연구직에 종사하며 역사, 지리, 문자, 클래식 등 잡학 지식에 관심이 많은 회사원인 이원규님. 사라지고 잊혀지고 왜곡돼 가는 시흥군 지역사에 대해 자세한 조사와 분석과 연구에 감탄과 감사와 더불어 박수를 보낸다. https://brunch.co.kr/bru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