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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지역 옛길 흔적을 함께 걸으실까요

안양똑딱이 2016. 6. 11. 09:27

옛길을 걷는다면 한편 역사를 걷는 것이다. 최근 옛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많아졌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태평원(太平院)과 석원(石院) 사이의 옛길. 원(院)은 조선시대 정부에서 만든 관용 숙소로 지금으로 말하면 관사와 비슷하다.

대로에는 조선시대 주막과 여인숙 기능을 했던 원(院), 말을 갈아타고 길 관리를 했던 역(驛), 역을 관리했던 찰방(察訪) 터와 각종 비석·장승·서낭당·당산나무 등 길과 관련한 흔적이 길손들을 반기고 여행자에게 또 다른 재미를 던져줄 것이다.

옛길을 도보로 걸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길에 얽힌 역사와 길 위의 사람들, 사라져 가는 문화를 직접 보고 국토를 재발견하고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라져 가는 옛길을 복원하고 이 길에 보행자도로를 만들어 걸을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옛길로는 一大路 의주로, 二大路 경흥로, 三大路 평해로, 四大路 동래로, 五大路 봉화로, 六大路 강화로, 七大路 수원別로, 八大路 해남로, 九大路 충청수영로, 十大路 통영別로 불리우는 지명이 붙어있다.

특히 과거 옛길은 신경준의 도로고에는 전국 6대로를, 김정호의 대동지지로는 9대로라 통상 말하지만 대동지지에서는 정조의 능행로를 '수원별7대로'라 따로 적어 모두 10대로라 할 만큼 정조에 의해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 중 서울-부산간의 四大路 동래대로(영남대로)와 서울-해남간의 八大路 해남대로(삼남대로), 평해-서울간의 三大路 평해대로(관동대로)가 국토를 걸으며 종.횡단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옛길이며 七大路인 수원別로는 테마가 있는 옛길로 관심을 끌고 있다.

옛길 대로중 하나인 八大路 해남로는 경도를 출발 해남까지 이어지는 970 里 길로 그중 지역구간을 살펴보면 숭례문(崇禮門,남대문)-동작진(洞雀津)-승방평(僧房坪)-남태령(南太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店)-사근평(肆覲坪)-진진대(遲遲臺)-수원(水原)을 지나 해남(海南)-남리역(南利驛)-우수영(右水營)까지 이어진다.

또한 정조의 능행로인 七大路 수원別로는 창덕궁을 출발 수원까지 100 里 길이며 숭례문(崇禮門,남대문)-노량진(露梁津)-문성동(文星洞)-시흥(始興)-안양행궁(安養行宮)-사근평행궁(肆覲坪行宮)-지지대고개-노송지대-수원행궁(水原行宮)-건릉(健陵) 구간이다.

특히 정조의 능행로에 나오는 지역 지명을 살펴보면 시흥행궁(始興行宮)-백산앞들-염불다리-만안교(萬安橋)-안양참발소(安養站發所)-장산모퉁이-군포천-서원냇다리-청천평-서면천교-원동내-사근평행궁(肆覲坪行宮)-진진대(遲遲臺)이 나온다.

八大路 해남로에 나오는 지명중 인덕원(仁德院)은 안양시 관양2동이며, 갈산점(葛山店)은 안양시 평촌동 갈뫼마을, 사근평(肆覲坪)은 사근내. 의왕시 고촌동, 진진대(遲遲臺)는 지지대고개. 미륵당고개로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파장동 경계의 고개를 말한다.

또한 七大路 수원別로에 나오는 지명중 안양행궁(安養行宮)과 안양참발소(安養站發所)는 현재의 안양시 안양1동 674-29(안양1번가) 아카데미극장 일대이며, 사근평행궁(肆覲坪行宮)은 현재의 의왕시 고촌동사무소, 원동내는 과천현 광주현 경계를 말한다.

옛길을 따라 국토 도보여행에 나선 어느 부부가 전국의 길을 따라 걸으며 국토순례기를 기록했다. 인터넷(www.jayuchon.com)에 상세히 기록한 글 가운데 八大路 해남로(삼남대로)의 구간중 수원-의왕-안양-과천 구간을 걸으며 쓴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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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내손동에서 흥안로로 이어지는 옛길

의왕으로 들어선 길은 왕복 10차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차선 하나의 폭이 3미터가 넘으니 인도까지 치면 대략 4십여 미터 정도의 길 폭이다. 옛길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데 2백년전 6천여명에 달했던 행렬이 이 길 위를 다시 이은다면 정조는 무어라 했을까?

씨잘데기 없는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골사그내를 지나쳐 의왕시 고촌동으로 든다. 이곳에서 삼남대로는 과천으로 향하고 능행로는 시흥으로 갈라지는데 길들이 새로 뚫린 산업도로에 묻혀진지라 갈래길 찾기가 가늠이 안된다.

마침 고촌 파출소에서 마련한 쉼터가 있어 잠시 엉덩이를 눌러 앉힌다. 아내는 마실 물을 얻기 위해 파출소로 들어간다. 자유촌 가족은 물을 구할 때 인적이 뜸한 길에서는 주유소(우리에겐 주수소이다.)를 이용하고 도심에서는 파출소 등 관공서를 애용한다.

파출소 앞에는 구부러진 길이 놓여 있는데 조금만 관심두면 내를 덮은 길임을 쉽게 알아챈다. 어느덧 자유촌도 족집게 도사가 다 되었남.. 내를 건너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고촌동 동사무소가 있는데 정조가 쉬어 갔던 사근행궁이 있던 자리이다.

쉼을 마친 길은 1백여미터 쯤 올라 고촌초등학교로 드는 '효행길'로 드는데 경수산업도로에 뭉개지지 않고 용케 살아 남은 길이기도 하다. 이 길로 6백여 미터 정도 계속 걸어 나가면 길은 산업도로와 다시 합류되는데 이 지점이 능행로와의 갈래길이 아닌가 싶다. 또 여기서부터 일정 구간의 옛길은 소멸되고 만다.

자유촌 가족은 오전동의 골목길로 들어선 후 오전초등학교부터 다시 옛길을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길은 가구거리를 지나 효성초등학교 앞으로 하여 내손동의 '흥안로'로 이어지는데 가구거리부터 흥안로까지의 옛길은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효성초등학교를 조금 지나 진달래아파트가 끝나는 곳부터 흥안로까지 6백여 미터의 옛길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삼남대로는 흥안로와 만나면서 크게 훼손되어 아예 흔적을 감춘다.

흥안로를 따라 인덕원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내손택지개발지구'라 하여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이 일대가 갈뫼 즉 갈산참(葛山站)이 있던 곳인데 이젠 이름조차 사라질 운명이다.

옛 지도를 보면 '주막(酒幕)'이나 '참(站)' 또는 '점(店)'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어 용어에 대한 정리가 잘 안되기도 하는데 이곳 과천현의 갈산도 갈산주막, 갈산참 등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갈미라고도 하는 갈뫼 마을은 한자로는 칡'갈'자를 사용하나 칡과는 관련없이 길이 분기되는 갈래 길로서 '갈라지다'의 첫 음절 '갈'의 음차 표기라 한다. 이는 우리말과 한자 표기에서의 차이이며 지명으로 옛길 찾기에서 종종 애를 먹는 사안이기도 하다.

갈미마을 이름 뜻은 갈래길을 말하지만 뜻과 상관 없이 마을은 찢겨졌는데 광주에 속했던 갈미는 일제시대의 도로개설로 진작부터 갈라졌고 지금은 행정 구역으로도 안양과 의왕으로 갈라졌으니 어쩌면 이름 뜻의 철저한 왜곡이거나 아니면 마을의 팔자이던가.

갈미를 지나면 안양 평촌동으로 들어서며 '민백이'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에도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안양시지(安養市誌)에는 이 마을 유래를 '과천, 인덕원, 갈미 등은 관아와 원이 있어 지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데 반해, 이곳은 좀 외진 곳이다. 한양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행려자들이 날이 저물면 민박을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민박이(民伯洞)라 했다고 한다.'고 적혀 있는데 자유촌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정조의 원행길 처음 5년간은 남태령을 넘는 바로 이 길을 이용하였었다. 우리는 대개 정조의 '효행'으로만 초점을 맞추지만 각도를 조금만 바꾼다면 정조의 원행이 민중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쉬어 갔다는 이유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전설로 내려오는 지명이나 사연들이 많다. 오늘이 이러한데 당시에는 어떠했겠는가.. 왕이 원집이라도 들렸다면 그 원집의 원래 기능은 그 날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누가 왕이 앉았거나 누었던 곳에서 쉬거나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설령 쉬어가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분위기에 밀려난 힘 없는 나그네들은 사그내원과 인덕원 사이의 길에 놓인 유일한 마을이었던 이 민백이 마을로 몰려들었을 것이며 마을은 나름의 원집 노릇을 했을 터이다. 이는 정조의 원행으로 끼쳐진 막대한 민폐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민백 마을에서 인덕원 사거리까지의 지금 길은 동쪽으로 가다 조금 꺾여 나가지만 옛길은 반대쪽인 서쪽으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인덕원으로 들어가는데 길은 모두 주택가로 변해 완전히 사라졌다. 인덕원은 환관이라고도 불리는 내시들이 운영하였다 한다.

서울 종로구의 봉익동에 집단 거주하기도 했던 내시들은 남성이 거세된 특수한 신분이어 자손을 둘 수 없었지만 왕의 가까이에 있었던지라 나름의 권력과 재물도 지녔고 하여 이들의 양자가 되려 하거나 청탁을 하려는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내시들이 이곳에 모여 살 게 된 연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내시들은 많은 공덕을 베푼 듯 하다. 땅 이름도 덕을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불렸는데 원이 생기면서 인덕원이라 부르고 되었다.

내시들은 갑오개혁과 조선왕조가 문을 닫으며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밀려나게 되었고 내시들은 양주군 장흥에, 상궁들은 서울의 정릉 골짜기에 집단촌을 형성하여 살았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과거지사가 되었다.

인덕원사거리를 지나 과천길로 든다. 길은 왕복 12차선이다. 중앙 분리 화단까지 더하면 길 폭은 자그마치 5십미터에 달한다. 이런 길은 무단 횡단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처음부터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걸어야 하는 한마디로 징글징글한 길이기도 하다.

갈현을 넘어 과천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갈현동의 찬우물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도 물 맛에 대한 정조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니 수원을 출발하여 과천에 이르도록 정조를 빼고는 얘기거리가 없다.

삼남대로 수원-과천구간 24km
관두포⇔해남⇔영암⇔영산포⇔광주⇔장성⇔정읍⇔태인⇔삼례⇔연무⇔계룡⇔공주⇔광정⇔천안⇔칠원⇔수원⇔과천⇔한양

2004-10-08 04:4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