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600

[최병렬]오래된 곳 안양 항아리골목 이야기

오래된 곳 안양 항아리골목 이야기 안양에는 골목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며 아직도 정감있게 불리우는 골목이 여럿 있다. 밧데리골목. 변전소골목, 곱창골목, 한복골목 등등.. 1970년대 초반에 생긴 항아리골목도 그중 하나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안양에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며 인구도 늘어나고 당연히 생필품 가게가 줄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7년 중앙로가 개통되면서 안양4동의 새시장(현 중앙시장)은 인근 군포, 의왕, 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군자에서도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빌 정도로 호황이었다. 당시 그릇으로는 양은그릇과 함께 ..

[자료-최고당]군포장(軍浦場)을 아시나요.

군포장(軍浦場)을 아시나요. 군포장 (軍浦場)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장날은 명절 다음으로 기다려지는 설렘이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자반고등어와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사탕, 그 사탕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줄무늬가 들어간 왕눈깔 사탕이었다. 입안에 넣으면 오랫동안 단맛을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어린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장터는 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상당부분 과장되거나 와전되기도 했는데 장돌뱅이와 과수댁의 눈..

[심재민]지역특유의 문화예술 관광컨텐츠를 개발하라

글쓴이: 심재민/ 안양시의회 의원 기고처: 안양광역신문사(2017-02-11) 지난해 5월경 본인은 지면에 “지역자원을 활용한 문화_예술_관광 활성화 시키자”는 기고문을 실은 적이 있다. 관광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자원을 연계한 종합적인 관광 청사진을 마련해야 하고, 수요자가 원하는 특색 있는 관광 컨텐츠를 만들어 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법무부 자료에 의하면 2016년 7월부터 12월까지 중국인 방문객수를 살펴보면 7월에 93만 5천명, 8월에 89만 5천명, 9월 74만 7천명, 10월 69만8천명, 11월 53만 천명, 12월 54만8천명으로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감소 추세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한-중관계가 냉각되면..

[조성현]안양의 명물, 안양포도에 대하여

가을포도가 제철을 맞았다. 요즈음 안산대부포도축제, 안성마춤포도축제 등 포도를 콘텐츠로 한 향토축제 개최로 지역의 활력이 샘솟는 고장을 보면 부럽기 만하다. 경기도 안성은 포도축제를 ‘안성포도박물관’과 연계할 정도로 포도가 성황이며, 또한 포도 관련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과거 안양은 포도의 대표적인 고장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옛 명성을 추구하는 안양포도가 안산, 안성, 천안, 송산 등 다른 지역 출신의 포도로 대처되어 소비되고 있고, 현재 안양은 포도를 테마로 한 축제를 벌일 정도로 상황이 그리 녹녹한 상태는 아니다. 안양하면 포도가 연상될 정도로 성가를 누리며, 당시 손꼽히는 포도 주산지였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 없고, 기성세대도 아련한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잊혀져가고 있..

[최승원]안양시 근대건축과 도시 이야기

안양시 근대건축과 도시 2015.11.12/ #안양 #구술 #원로 #최승원 #옛이야기 #역사 #기록 #기억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지방의제21 안양시지속가능협의회 마을분과에서는 기획사업으로 ‘원로에게 듣다. 건축사 최승원 교수님 두번째 이야기’로 안양의 근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 편집자주 [최승원]안양시 근대건축과 도시 관악산 골이 얕고 바위가 많다. 하여 남성산 청계산11M낮지만 관악산보다 골이 깊다 하여 여성산으로 상징 白虎山돌과 石手동석조건축출연. pool조성. 방직공장. 제지산업출현. 石산업.근교도시로 볓이 풍부한安陽 밤. 쌀米. 포도. 안양천 참외밭벌말 서남은 한천과 인덕원천이 만나는 충적지( 삼각주) 범람원1894년경 일본군사지도. 고지도등 安陽村 (배산임수원리를따..

[최병렬]옛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안양 미래문화유산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중앙로변에 자리한 농림축산검역본부.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2016년 4월이면 안양시민들의 공간이 되는데 시가 어떤 공간으로 활용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세워져 있던 축혼비부터 보아야 한다.(이곳에 있던 농림축산검역본부가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가져갔다) “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한다.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

[최병렬]안양에는 국내 최대규모 개미제국 있다

안양시 안양6동에 자리한 정부 공공기관인 농림축산검역본부. 일제 때인 1942년 이곳에 터를 잡은 조선총독부 가축위생연구소 지소에서 출발해 이름만 바뀌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곳 정원 지하 땅밑에는 수십년간 존재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개미제국이 있다. 안양 사람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의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라 불리우는 이곳의 정원은 수령이 50년은 넘는 듯한 아름드리 벚나무들과 가슴높이 지름이 1m가 넘는 거대한 버드나무가 있는데 정원 경계석과 경계석 사이의 수많은 틈새들을 출입구 삼아 드나드는 커다란 왕개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검역원 정원이 개미 초군체임을 처음으로 확인한 이는 ‘개미제국의 발견’이라는 책을 낸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다. 최 원장은 국립..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안양에 경사가 났다. 유유산업 부지에서 발굴된 매장유물 가운데 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발굴조사단은 수습된 기와류, 전돌류, 도자 및 도기편 조각, 철제 동물 장식들의 유물과, 하천의 돌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중문→탑→금당(부처를 모신 공간)→강당→승방으로 연결되는 건출물터와, 좌우에 회랑(복도)이 있는 구조인 점에서 하부 초석층은 통일신라 시대의 중초사터이고 상부는 안양사의 초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는 미확인의 설(說)로만 떠돌던 안양사 터가 유유산업부지라는 것이 공인된 것이며, 이로써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그 생모(生母)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그러하니 경사가 아니겠는가. 아니 그냥 경사가 ..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홍사영-안양예술인장'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안양예술인장’ 지난 11월9일 이른 아침 7시에 샘안양병원에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이 안양예총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이는 안양 최초의 일로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물론이요 지역사회 전반에 걸친 뜻 깊은 영결식이었다. 고인이 생존시에 위문을 마친 예총 및 미술협회 임원들은 상황의 위급성에 따라 작고시에 ‘안양예술인장’으로 치룰 것을 잠정 결정하고, 유족의 동의를 얻고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한 마디로 고인이 안양지역사회에 남긴 예술적 공로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故홍사영화백의 생전의 활동상을 여기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다. 고인은 국전 입선(1981) 이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7회의 개인전, 40여회의 국내외 전시회 출품, 그리고 안양예총 회장을 비롯한 한국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