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조성현]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안양똑딱이 2017. 3. 20. 14:51

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기록 속 태조왕건이 세우고 고려말 최영장군이 ‘안양사칠층전탑’을 보수했다고 등장하는 고려안양사. 좌측상단 사진은 전탑지의 전탑이 주저앉아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의 양상으로 전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려백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 우측상단 사진) 등 다량의 매장문화재가 노출되어 고려 안양사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다. 고려안양사에는 삼층석탑과 전탑이 사찰의 중심공간인 금당지 앞에 나란히 자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안양사의 석탑과 전탑지는 김중업박물관(구,유유부지, 문화누리관인근)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옛시문 속에서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 1150~1204)는 고려안양사를 방문하고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단풍진 사찰(감궁紺宮, 안양사)에 이르니, 좋은 구경에 모두 불자라 다행이었네, 푸른 못(벽담, 碧潭)은 환하여 가을 달(추월, 秋月) 교교(皎皎)하게 잠긴듯하고, 붉은 잎사귀(홍옆, 紅葉)엔 쓸쓸히 저녁바람만 부는구나...”로 시작되는 주옥(珠玉)같은 한시를 남겼다.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구,유유부지일원 등에 있던 ‘고려안양사’는 통일신라 ‘중초사’를 기반으로 태조왕건이 창사에 관여한 이래 찬란하게 지역의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조선까지 법통을 이어간 유서 깊은 사찰이다. 기록 속 ‘고려안양사’는 태조왕건, 조선태종, 최영장군, 조선의 좌정승 하윤, 문신 김극기, 과천현감 윤돈, 내시 박원계 등과 같이 국왕, 신하, 귀족, 관료 등 거물급 지배계층을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등 당대 유명승려들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있는 사찰이다.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의 도은집(陶隱集)의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 및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문헌 속 고려안양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을 만나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웠을 때 부처가 돕는 다는 설로써 간여하는 차 있어 그 말을 채용하여 전국에 탑(塔)과 불묘(佛廟)를 많이 두었는데 안양사의 (전)탑도 그중의 하나이다. 안양사전탑은 한반도 이남에서 가장 북쪽 지점에 위치한 사탑으로 기록 속 타 절에서 볼 수 없는 수려함(원문, 基爲巨麗가 他寺엔 未有也)을 자랑한다.

 

문헌 속의 고려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4년(900) 태조왕건이 궁예의 수하로 있을 때 지역을 정벌하러 가다가 삼성산 자락에서 신라계 실존인물인 능정(能正)스님과 뜻이 같아 의기투합하여 창건된 사찰이다. 궁예의 뒤를 이어 후고구려의 왕이 된 왕건은 918년 국호를 고려로 고치고 개국(開國)한다. 태조왕건은 삼성산 안양사에 숭불정책을 국가기조로 ‘안양사칠층전탑’을 남겼다. 고려최영(崔瑩, 1316~1388)장군은 젊었을 때 탑밑에 유숙(기숙)하면서 성조(고려 태조)께서 처음으로 국가 경영하심을 우러러 생각하고 장차 출세하면 태조의 뜻을 받들어 뒷날 ‘안양사칠층탑’을 중수하겠노라고 발원하면서 다짐(서원,誓願)한 바 있다.

 

고려 말 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이르러 실세인 최영은 장정을 징집하고 군납미를 감액하여 군조(軍租)를 끌어와 ‘안양사칠층전탑’의 중수(개수)를 주도한다. 전탑의 준공(낙성)시 고려왕실의 우왕(고려 제32대 국왕)이 내시(환관) 박원계(朴元桂)를 시켜 축하물품으로 향(香)을 하사했으며 승려(도승)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리고, 사리(舍利) 열둘과 불아(佛牙)하나를 탑속에 봉안하였는데 시주(布施)한 각계의 인사가 3,000명이라고 밝히고 있어 왕실사찰로서 사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려 말 최영장군은 국가의 복리증진 및 고려 재건을 위한 염원을 담아 전탑을 중수하고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낙성(준공)행사를 치룬다. 고려안양사의 전탑중수와 함께 최영은 쇄퇴하는 고려왕조를 불법의 힘을 빌어 중흥하려는 시도차원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불사(佛事)를 일으킨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안양시에서는 옛,유유부지를 복합문화공간인 ‘김중업박물관’으로 조성하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인바 있다.

2010년도 옛,유유부지의 매장문화재 2차 발굴조사과정에서는 전탑지(塼塔址)남쪽 답도(踏道)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답도시설 일부에서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이 백자 및 분청자로 제작된 연봉(연꽃봉오리)형 기와장식물 등과 함께 발굴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연봉형 기와는 전탑의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에 얹었던 기와위를 장식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전-기와-전-기와 순(順)의 전돌과 기와가 층위를 이루며 내려앉은 일괄 폐기된 양상을 통해 볼 때 전탑은 폐기되기 전(前) 옥개부위에 기와가 덮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탑지 인근에서 철정(瓦釘, 못)편이 출토되어 전탑에 사용하여 전이나 기와를 고정시켰던 와정(기와못)으로 추정된다.

 

전탑지를 발굴하면서 고려전탑의 다양한 형태와 문양의 전(塼, 벽돌)들이 사용되고 전탑을 와정을 이용하여 백자나 분청자로 제작된 연봉(連峰)형 특수기와를 옥개석 끝에 고정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계기마련과 함께 안양사칠층전탑의 구조와 축조방식을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안양사칠층전탑’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기록 속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면 ‘삼성산에 안양사가 있다. 절의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을 포개서 칠층을 쌓았고 기와로 덮었다. 제1밑층은 12칸으로 벽마다 부처와 보살 등의 화상을 그렸으며 밖에는 난간을 세워 출입을 막았는데, 그 거창하고 장려한 모습을 딴 절에서는 볼 수 없다(원문, 基爲巨麗가 他寺엔 未有也)’라고 밝히고 있어 전탑의 모습을 유추하며 그려볼 수 있다. 김중업박물관내 ‘안양사지관(일명, 고려안양사박물관)‘에는 안양사칠층전탑폐기층(廢棄層)모형, 안양사칠층전탑을 복원한 추정 이미지사진, 박석이 있는 전탑의 축소모형, 안양사전탑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 안양사칠층전탑의 탁본(명문전 등) 및 전돌 등 탑재(塔材)도 만나 볼 수 있다.

 

‘안양사명문와(’안양사‘라고 적힌 기왓장)발굴과 함께 전탑지 발굴은 문헌 속 ‘고려안양사’가 역사적인 실체로 지역에 존재했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안양시 지명유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작용하고 있다.

 

2008~2011년까지 4차례 시∙발굴조사 과정에서 속살을 드러낸 ‘고려안양사’는 구, 유유산업건물에 의해 일부만 확인되어 정확한 배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사정이지만 동∙서회랑지가 연결되고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으로 이어지는 추정 안양사 가람배치의 일단을 제한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으며, 강당지의 추정 설법단은 배치와 구조에 있어 황룡사의 설법단과 유사성을 보여 학계 및 지역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매장 유물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안양사의 금당지(金堂, 사찰의 중심 공간) 앞에는 박석이 깔린 전탑과 3층석탑(현재의 석탑은 유유산업준공 후 현 위치로 이전)을 나란히 갖춰 쌍탑(雙塔)을 보유한 가람으로 분석된다.

 

통일신라 중초사지이래 고려 안양사지에 분포하는 문화재 및 발굴성과를 분석해보면 당간지주, 전탑, 동∙서회랑지, 치미(지붕의 용마루 좌우 끝을 장식하는 대형 특수기와, 고려중기) 및 안양사권의 귀부와 부도 등과 같은 유구의 성격이 주로 큰 사찰에서 나타나고, 고려태조, 조선태종 등 왕실의 사랑을 받는 중심사찰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 사격과 사세를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고려안양사의 유산으로 보이는 현재의 ‘석수동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제 제92호)’ 및 ‘안양사귀부가’ 있는 현재의 ‘안양사’까지 안양사권으로 감안한다면 ‘고려안양사’는 일정한 시설을 갖춘 사찰로서 사세가 만만치 않은 대규모 가람이라고 여겨진다.

 

문헌 속 ‘안양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정황상 사찰아래 자연스레 형성된 촌락인 사하촌(寺下村)인 ‘안양사 마을’이 있었고, 걸어서 다리를 지나 사찰에 이르렀으며 맑은 시냇물(淸溪)곁에 있는 사찰에는 푸른 연못(벽담, 碧潭)이 있었으며, 새벽에는 날이 밝음을 알리는 닭이 울고, 사객(寺客)들의 말(馬)이 정거했으며 부속시설로 능정스님의 영정이 있던 조사당과 안양루 누각(安養樓, 누대)이 있던 걸로 추정된다.

 

안양루는 경주불국사 안양문, 김천직지사 안양루, 영주부석사 안양루, 서산개심사 안양루 등 사격이 제법 큰 전통사찰에서 볼 수 있는데 안양루, 안양문에서의 '안양(安養)'은 모든 일이 원만 구족하여 괴로움이 없는 안락한 이상향, 즉 ‘극락(極樂)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 서방정토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안양시 지명유래는 태조왕건이 창건에 관여한 ‘안양사’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 안양사(安養寺)는 안양시 지명유래의 뿌리이며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도시 ‘안양’은 극락, 낙원, 천당과 같이 이상향을 품은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철학적 지명으로, 지명 그대로 따른다면 안양시민은 서방정토인 ‘극락(極樂)’에 살고 있는 행복한 시민이다. 고려안양사는 숭불정책(崇佛政策) 기조를 펼친 태조왕건이 고려왕국을 극락정토와 같은 이상세계를 건설하고자하는 염원을 담아 건립한 사찰로 풀이된다.

 

조성현(josh1965@hanmail.net)씨는 안양사가 자리한 절터에서 태어난 안양토박이로 안양문화원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숭인의 문집에 수록된 최영장군과 연루된 문헌 속 고려안양사를 소개합니다.

 

이숭인((陶隱, 李崇仁1349-1392)의 문집에 수록된 금주(안양)에 있는 안양사탑을 다시 중수한 기록인 衿州安養寺塔重新記(금주안양사탑중신기)에 따르면(일부 생략) 아래와 같음(출처: 안양시문화해설사 카페<다음카페<‘마애종사랑’ 검색입력)

 

우리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부처가 돕는다는 설로써 간여하는 자가 있어서 그의 말을 채용 하여 탑(塔)과 불묘(佛廟)를 많이 두었다. 지금 금주(衿州) 안양사(安養寺)의 탑(塔)같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안양사(安養寺)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 것입니다. 절의 남(南)쪽에 탑(塔)이 있으니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습니다. 맨 아래층에는 빙 둘러서 12칸의 회랑(廻廊)을 만들고, 벽마다 불(佛)ㆍ보살ㆍ인천(人天)의 상을 그렸으며 밖에 난간을 만들어 출입을 제한하게 하였습니다. 그 크고 화려한 규모가 다른 절에는 없었던 것입니다.<중략>

최영은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그 경비를 제공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그 공사를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시기가 이해 辛酉年(1381) 8 월의 어느 길일(吉日)이며 완성한 시기는 辛酉年(1381) 9월의 어느 길일이고, 낙성식을 거행한 것은 10월의 어느 길일입니다. 이날은 전하(고려 우왕)께서 내시 박원계(朴元桂)를 보내어 향(香)을 내리고 도승(道僧) 1천 명으로써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거행하여 사리 열두 개와 불아(佛牙) 한 개를 탑속에 안치하는 의식(儀式)을 마쳤습니다. 시주를 바친 각계의 인사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거기에 단청을 장식한 때는 任戌(1382)년 2월이고, 거기에 상(像)을 그린 때는 癸亥(1383)년 8월이었습니다. 탑 안의 네 벽에는, 東에는 약사회(藥師會), 南에는 석가열반회(釋迦涅槃會), 西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北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의 모습을 그렸으며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에 상(像) 하나씩을 그렸으니, 소위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이란 것입니다.

일을 맡아본 무리가 4백여 명이며, 백미(白米)가 5백 95석, 콩이 2백 석, 베가 1천 1백 55필이 쓰였습니다. 아, 이것은 막대한 비용이며 거대한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완성 할 수 있었음은 다 우리 최 시중 공(崔侍中公, 최영)의 서원(誓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최공(최영장군을 칭함) 은 오직 국가의 복리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