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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재의 안양 만안교는 이전복원한 것이다

이야기보따리/자료

 

현재의 안양 만안교는 이전복원한 것이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이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며 홍예가 7개인 다리는 만안교가 유일하다. 
정조(正祖, 1776~1800재위)는 1789년 아버지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하는 능행 거둥길(임금의 나들이길)에 나서 처음에는 왕궁인 창덕궁을 나와 용산을 지나 노량진에서 배다리(용양봉저정)를 놓아 한강을 건너 동작에 도착한 후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과천(온온사)을 거쳐 안양의 인덕원을 경유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정조가 즉위한 지 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인 1795년 음력 윤 2월9일 새벽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화성행궁(봉수당) 길에 나선 6차 원행부터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과 안양 석수동을 거쳐 구 군포사거리와 의왕을 경유하여 수원에 이르는 새로운 길인 시흥로(현 만안로)를 이용한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으로 시흥행궁을 지나 석수전철역 인근 대박산 앞길, 관악역 인근 염불교(念佛橋)를 건너 만안교(만안교비)를 건너고 안양행궁(行宮, 安養站, 驛舍, 주필소)을 지나 구군포사거리까지의 길로 조선시대에 놓여진 신작로의 개설뿐 아니라 이후 경부철도와 함께 국도 1호선의 시작이며 안양의 근현대화 과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시흥로 개설에 대해서는 과천길에 부친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이 있어 노정을 바꿨다는 야사도 전해지나 근본적으로는 남태령이라는 높은 고개로 행차에 어려움이 많아 과천로에 비해 길이 편한 새로운 거둥길의 개설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원행은 대단했다. 이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보면 5천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기록을 보면 동행한 사람은 1807명이고 말이 796필이었으며, 행차의 전 과정에 동원된 사람은 5661명, 말이 1417필이었다고 합니다. 왕의 행차 시에는 나무다리(木橋)로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하는데 당시 안양으로 들어오는 안양천에는 원래 다리가 없었다. 정조는 나무다리를 임시로 가설해 건너는 거둥길이 불편했던지 만백성이 안양천을 편히 건너도록 하기위해 만안교 축조 지시를 내린다.
이는 앞서 경기관찰사 서용보에 의해 돌다리가 추진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던 것을 1795년(정조 19년) 당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전국의 석수쟁이들을 불러 모아 단 3개월의 공역 끝에 같은해인 1795년 9월에 길이 15장(약 31.2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깐 돌다리를 완성한다.

만안교가 이렇게 빨리 완공을 보게된 것은 경기도관찰사를 위시하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 개성, 강화 등의 유수(留守)까지 동원될 만큼 큰 사업이었지만 안양천 주변과 삼성산 등에 교량 건축용 좋은 석재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안교가 완공된 것을 크게 기뻐한 정조는 교량을 건설한 편의가 만백성에게 미쳐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이 튼튼한 다리를 통하여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너게 된 것을 기린다는 뜻에서 '만안교(萬安橋)'라 직접 이름을 짓고, 감독자에게 후한 상을 내린다.
현재 다리앞에는 만안교비(萬安橋碑)가 세워져 있는데 공사를 감독한 경기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이던 호조참판 조윤형(曹允亨)이 쓰고, 학신 유한지(俞漢芝)가 예서체로 전면 ‘萬安橋(만안교)’ 글씨를 썻다.
비문에는 "원행이 편안히 오가기를 만 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며 만백성에게까지 평의가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졌고 만년토록 성은을 입고 자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쓰여져 있다. 즉 만안교는 왕이 효를 행하되, 만백성이 또한 고루 이로움이 있게 지은 다리로 탕평책과 같은 균등정책, 적극적인 애민사상의 백성관 등으로 국정을 이끈 정조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할 수 있다.
정조는 시흥로 개설과 만안교 완공 후 1796년(을묘년) 7번째 원행부터 시작해 1797년, 1798년, 1800년 시흥로와 만안교를 이용했는데 이동 경로를 보면 왕궁을 출발해 노량진에 점심을 드신후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시흥행궁에서 1박하고 시흥행궁을 출발해 대박산 앞길 - 염불교 - 만안교- 안양참 - 장산우 - 군포천교 - 서원천교 - 청천평 - 서면천교 - 원동천 - 사근참 - 사근행궁을 지나 지지대를 넘어 수원으로 갔다.
특히 1796년에는 안양참(安養站)에서 (站=잠시 쉬는 곳)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대추를 고은 미음 다반을 드리고, 사근참 행궁(지금의 고천)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지지대 고개(처음에는 사근현 다음으로 미륵현 이었다) 넘어 저녁때 화성(수원)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정조 임금은 어가를 타지 않고 융복(戎服=군복) 차림에 말을 타고 갔는데 안양 사람들의 민정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1796년의 음력 1월 7차 거둥길과 다음해인 1797년 8차 거둥길에는 안양사람들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당시 왕의 거둥에는 안전을 위해 궁에서 수원까지 24곳에 척후복병(현 시대 대통령 이동시 경호원들)들을 배치하였는데 이것을 당마(塘馬)라고 한다.  안양 주변에는 5곳의 당(塘)이 있었는데 11塘 大博山前坪(지금의 금천구 시흥동), 12塘 安養鶴後峯前坪(지금의 양명고 뒷산), 13塘 安養彌勒堂站(지금의 안양역/ 과거 미륵당), 14塘 鳴鶴村前坪(지금의 명학역 부근), 15塘 道陽里 下村(지금의 군포시)에서 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케 했다.
특히 야간 거둥에는 지역 백성들 가운데 착실하고 위엄 있는 자를 선별해 고군(임시 군병)을 구성했는데 이 때 인건비로 출궁 시 고가는 7전 환궁 시 고가는 3전을 지불했다고 한다. 또한 안양행궁 거둥길에 좌우 횃불은 672개로 이 가운데 300명은 시흥에서 372명은 과천에서 책임지게 했다.
정조는 1797년 8차 원행 환궁 때인 2월 1일 안양행궁에 도착해 신하들에게 점심을 베풀며 안양 주필소의 식목이 엉성함을 탓하고는 이번 봄에 각별히 신경 써 나무를 관리할 것을 하교한다. 또한 지방관 김사의로부터 안양천 근처의 충훈부 농지에 보를 쌓아 여 두락이 개간되고 부근 거민의 수가 31호로 늘었다는 보고를 받기도 한다. 또 재위 24년이며 춘추 49세를 맞는 1800년에 마지막 원행을 다녀오는 2월 18일 환궁 시 안양주필소를 지날 때 부근 민가에서 불이 나 급히 군사를 보내 불을 끄게 하였다.
이와같이 만안교 가설과 시흥로의 개설은 조선 후기 당시 시흥현 변방에 속하던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새로운 신작로 개설에 따라 교통로가 대폭 확대되면서 보부상들의 왕래가 빈번해 지며 안양지역에도 상업 중심지(현 안양1동)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안양시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현재의 만안교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래 만안교는 현 위치에서 남쪽 약 480미터 지점에 있었다. 보다 상세히 설명하면 안양천위에 놓여진 안양교(구도로)를 지나 안양예술공원 지하차도앞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현 영화아파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번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 약 200미터 북쪽의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석수교회앞 삼막천 위로 옮겨 다시 축조한 것이다.

이때 다리의 방향도 하천의 흐름에 따라 동서로 길을 건너게 90도 돌려 놓아졌다. 또 주변 난간이나, 또 바닥 석을 보면 다른 곳에서 사용하던 가공된 돌이 깔려 있는 것이 보여 옮기는 과정에서 원형대로 옮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1972년에 촬영한 원래 자리에 있는 만안교 기록 사진을 보면 당시 교각의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다리위에 난간이 추가 설치돼 변형됐음을 보여주는데 현재보다 더 길었다. 제 어릴적 기억으로 과거 기존 만안교 다리 뒷쪽으로 하얀 건물의 공장(주, 벽산 창고)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나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만안교가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놓여졌을텐데, 현재의 안양천 물줄기와 맞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당시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천변에 뚝을 쌓고 철교를 놓으면서 안양천 물줄기를 돌린 것으로 추측되는데 정확히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연구해야할 할 숙제로 보인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의 다리 축조의 중요성을 지닌 만안교를 무지몽매하게 이전함으로 역사적 현장을 훼손한 것은 너무 안타깝다. 만안교가 놓여져 있는 원래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길가 담벼락에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가 놓여져 있다.
한편 정조의 능행차시에는 왕의 숙박과 휴식을 위해 '행궁'(주필소)을 짓기도 했다. 현재의 안양역 인근인 안양1번가 골목길에도 안양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유시(오후5-7시) 오랫동안 앓던 피부병이 심해져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게 된다. 정조가 승하한 이후 안양주필소는 1868년 헐리도 만다. 이 자리에는 아주 자그만한 표지석만이 놓여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 안양에 남은 원행의 흔적은 사실상 만안교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 만안교비(萬安橋碑)
 
萬安橋碑頌 并序
 
南充縣治南二十里有安養川即華城 輦路也惟我 聖上歲謁 園寢由是川以濟今春又奉
慈駕利涉川以是顯于世凡 幸行地方有川必有橋橋以木 駕過輒撤去冰之澌水之涉者
病焉前道臣臣徐龍輔以是橋之有所重也將以石代之未及就賤臣受 命來莅以孟秋啟基三
閱月而功告成延可十五丈袤可四丈高可三丈爲閘者五逮上 聞賞監董人及工匠有差 特
錫名曰萬安臣謹按王者就橋之安始於漢帝之長安而未聞奉 慈駕以行徒杠輿梁作於成周
而亦未聞代之以石傳之萬年也是橋也幸處華城 輦路 聖駕之一年一度 慈駕之十年一
度駕六龍和八鑾安而徃安而還萬萬年如一而推其餘迤及萬姓使遠近行李視以康莊無揭厲
險阻之患而萬萬年戴 聖恩頌 慈德豈不誠盛矣乎哉橋之始也伐石于川之傍有石出焉可
以▨▨▨▨減其半神若有助其亦異矣臣拜手稽首記其事系之以頌曰
王幸于 園一度一歲 天臨虹橋歲以萬計 與福偕至其下有川 時奉 慈駕萬安萬年
恩及萬姓坦履齊歡 於干於萬安如砥磐
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京畿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水原府留守開城府留守江華
府留守廣州府留守都巡察使 奎章閣檢校直提學臣徐有防謹撰
嘉善大夫戶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臣曹允亨謹書
學臣俞漢芝(謹書前面)
監董僉使 金天寶 營稗嘉善徐浹修 刻手邊李三興 治匠邊首鄭一成
五衛將張 烻 營校嘉善徐毅麟 石手邊首崔貴得
五衛將金大衍 營吏 李孝錫 朴福乭
五衛將金元爕 虹霓邊崔興瑞
上之十九年九月 日立 
 
<만안교 비송 서문을 겸함(萬安橋碑頌 并序)>
 
남충현의 주치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연로이다. 우리 성상께서 해마다 원침을 전알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자가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넜으니 이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무릇 행행지에는 하천이 있기 마련이고 하천마다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아다가 왕의 행행이 지난 뒤에는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 풀릴 때나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전 도신 서용보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로써 대체하여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미천한 신이 명을 받고 취임하여 맹추에 이 일을 착수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니 길이는 15장이요,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갑문이 다섯 개이다. 임금께서도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공장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도 내리셨다. 신이 생각건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나라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강과 여량은 성주 때에 이루어졌으나 돌로만들어 만세에 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 연로에 있으니 성가(聖駕)는 1년에 한 번, 자가(慈駕)는 10년에 한 번씩 육룡(六龍)에 멍에를 메이고 팔란(八鑾)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년토록 성은을 입게 되고 자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 하천가에서 돌을 채벌하는데 과연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할 수 있어 마치 신이 도운 것 같았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배수계수하고 그 일을 기록한다. 송은 다음과 같다.
 
왕께서는 해마다 한번씩 원침에 행행하시오니 이 다리 건너시길 만 번을 하시옵소서.
복록과 함께 이르게 되리니 아래에는 내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가를 모시고 만년동안 만안하소서,
은혜가 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 서유방(徐有防) 삼가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조유형(曹允亨) 삼가 씀
학신 유한지(俞漢芝) 전면 삼가 씀
 
감동 첨사 김천보
오위장 장정
오위장 김대연
오위장 김원섭
영패 가선 서협수
영교 가선 서의린
영리 이효석
각수변 이삼흥
석수변수 최귀득 박복돌
홍예변 최흥서
야장변수 정일성
 
    상지 19년(정조 19, 1795년) 9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