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0. 14:34

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 안양 수푸루지 마을의 이야기
 
임곡마을은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을 볼 수 있는 비봉산이 품고 있는 곳이다. 대다수(임곡 1.2지구) 지역이 주거환경개선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임곡3지구에는 아직 사람이 한명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골목길과 기와집, 철지붕집, 판잣집, 양옥집, 다세대, 다가구 등 마치 건축물의 변천사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수푸루지'(林谷洞)는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또 마을에서는 예전에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 정상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유적으로는 안양 유일의 향교지(평화보육원 자리)와 영의정 류정현, 청풍군수 심간 등의 선현 묘가 있다.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임곡1지구와 임곡2지구에 이어 마지막으로 임곡3지구 재개발사업이 추진중에 있다.
 
안양 원로 병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1977년 이재준 이사장이 대림대학을 설립했다. 원래 이 학교 부지는 무허가촌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 낙후되고 위험한 무허가촌을 철거, 이주토록 지시해 안양 최초의 아파트였던 임곡아파트가 완공됐고, 후에 대림대학이 매수해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대림대학은 1977년 6월 학교법인 대림학원이 대립공업전문학교로 설립해 개교했으며 1979년 대림공업전문대학으로, 1990년 대림전문대학, 1998년 대림대학, 2011년 ‘대림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대림대학교와 안양여중고는 설립 모체가 (주)대림산업으로 같다. 사진 자료를 보면 대림측은 당초 안양여중고를 이 곳으로 이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비산동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비산동 일대는 허허벌판이었다. 하루 밤을 자고나니 어디선가 산이 날아와 앉아,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후로 날아온 이 산을 비산(飛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비산1동은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비산리로 바뀌었고, 안양면에서 안양읍을 거쳐 1973년 안양시 비산동으로 개편됐다. 동쪽으로는 비산3동, 서쪽으로는 비산1동, 남쪽으로는 비산2동이 있다.안양시 자료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 ?∼1644)이 그의 부친인 심간(沈諫. 1560∼1624. 청풍군수 역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박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 [정진원]수푸루지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이 나중에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구시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다가 사라져버렸다. 시장의 북쪽 끝부분에 있었던 소시장터를 지나서 안양천 다리(임곡교)를 건너면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을 ‘수푸르지’라고 하였다. 그것이 여느 동네 이름과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마을 이름이 한자로 ‘임곡’임을 알게 되었다. 한자 지명 임곡(林谷)에서 그 훈(訓)을 빌려 써서 수푸르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변화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순수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아주 어색하거나, 당치도 않은 한자어로 바뀐 것들은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숲이 우거진 골, 즉 임곡은 ‘숲골>숲울>수풀>수푸르다>수푸르지→임곡(林谷)’으로 부르기 쉽게 변화되었을 것이다. 두 강이 합쳐지는, 즉 ‘아우러지는’ 곳에 ‘아우라지’라는 지명이 된 것과 같은 음운 변화일 터이다.
 
■ 비산대교와 수푸루지 마을(1970년대)
 
안양 만안구와 동안구를 연결(안양 중앙로에서 산업도로와 관악로) 하는 비산대교(길이 98m) 공사가 한창인 1970년대 초반의 모습으로 안양천을 동서로 가로질러 교각만 세워져 있다. 사진 좌측은 안양 만안구쪽 우측은 이마트 쪽으로 뒷쪽으로는 망해암이 있는 비봉산과 수푸루지 마을이 보인다. 현재 대림대학이 들어선 비봉산에는 산 증턱까지 판잣집이 들어선 것이 살기 힘들었던 당시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안양역사사료관
 
비산대교는 1975년 6월25일 당시 안양동 지역(현재 만안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비산동 지역 개발과 교통량 증가에 발맞춰 동서축을 연결하는 교량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다리를 세웠으며 동서 연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90년 9월에는 홍수로 교각이 침하되고 상판 슬라브가 내려앉는 피해를 입어 6차선으로 확장 보강됐고, 교통량의 증가와 매년 장마철 되풀이되는 안양천 수위상승으로 내하력 부족 등의 결함에 따라 99년 8월 재난위험시설 D등급 판정을 받아 재가설이 추진된다. 이에 지난 2002년 12월 철거를 시작으로 재가설공사에 들어가 99억3천만원을 들여 2005년 11월 16일 현재의 다리를 완공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 다리는 13m 높이의 조형물 4개와 경관 조명을 설치했고 교량 상판을 아치형으로 바꿨으며 종전 7개에 달하던 교각이 3개로 줄여 교각 사이를 넓히는 등 대공사를 했다. 공사 과정에서 당초 안양시는 비산대교를 전면 철거후 재가설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1일 6만대의 차량이 이용하는 교량이 전면 통제될 경우 극심한 교통난이 발생할 것이 우려됨에 따라 공사를 좌우 절반씩 실시했다.
 
■ 대림대학과 수푸루지 마을(1970년대)
 
안양시 비산동 안양천변 논(현 한화 꿈에그린아파트)에서 바라본 임곡마을과 비봉산의 옛 사진. 비봉산은 산 봉우리가 두개다. 우측 봉우리는 중턱에 망해암이 있는 산이고, 뒷 봉우리는 안양항공무선표지국(비행기 등대)이 있는 정상으로 정상에는 둥근 건축물이 있다. 앞서 올린 사진과 비교해 볼때 비봉산 좌측의 판잣집들이 철거된 것으로 볼때 1970년대 중반이 아닐까 싶다. 사진 우측 산자락(부지 조성)에 안양여중고교 부지 라는 글씨가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당초 안양여중고를 이곳으로 이전하려다 대림대학을 설립했다. 대림대학은 1977년 6월 학교법인 대림학원이 대립공업 전문학교로 설립하여 개교했으며 1979년 대림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 1990년 대림전문대학, 1998년 대림대학, 2011년 ‘대림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대림대학교와 안양여중고는 설립 모체가 (주)대립산업으로 같다. -사진출처: 안양시역사사료관
 
● 평화의 집 자리가 안양향교?안양에 안양향교가 있었다?. 과천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1944년 1군 1향교 제도에 따라 시흥군 관내 3개 향교(안양<安養>, 시흥<始興>,과천<果川>)를 폐합, 과천향교라 개칭한 것을 1959년에 다시 시흥향교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그렇다면 안양향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안양시에 확인한 결과 안양향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상임위원은 옛 어른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안양 비산동 평화보육원 자리가 안양향교였다고 말한다. 보육원 내를 돌아본 바로는 석탑, 돌 등이 있는데 이것이 안양향교와 연관이 있는지는 좀더 확인해야 할 일이다.
 
평화의 집은 1946년 6월 안양시 비산1동 산136번지에 사회사업 평화보육원(1946.9월 설립인가. 원장 송규환)으로 설립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반발하자 대구, 부산 등지로 50여명이 피난해 생활하다 1952년 9.28수복 이후인 동년 12월에 되돌아 왔으나 건물이 전소되어 천막을 임시숙사로 하여 생활했다. 1953년에는 안양 석수동에 주둔하고 있던 미 83보병기대대와 지원을 받아 복구 작업에 나서 숙소(36평), 목욕탕(12평) 등을, 1963년에는 예배실겸 사무실(31평)을, 1970년에는 강당(70평)을 신축한다. 현재 이곳에는 2살부터 18살까지의 아동 99명(남 43명, 여 56명)이 27명의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 화재로 22명의 여성노동자가 숨진 그린힐 봉제공장
 
“안양이라는 도시는 8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여공들이 밀집해있던 도시로 기억된다. 안양이 큰 도시가 된 것은 6,70년대 여공들의 경공업 단지 덕분이다. 그 중 88올림픽 시절 그린힐 화재 사건이 여러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잊혀져 있었고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1년 12월 11일 영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 박찬경 영화감독 시네토크
 
1988년 3월 25일 안양시 비산1동 그린힐 봉제공장(비산종합상가 빌딩 3층)에서 화재가 나서 여성 노동자 28명중 22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3.7평의 방에서 5~8명씩 새우잠을 자면서 이을 했는데 폭력배들이 들어올지 모른다면서 쇠창살을 내리고 밖에서 문을 잠구고 아침에 경비원이 쇠문을 따주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계단에는 인화성 물질이 강한 케시미론 섬유들이 쌓여 있었고 여성 노동자들은 세면장의 환풍구를 통해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그 밑에서 질식해 죽었다. 남은 생존자는 회사에서 치료를 방치하다가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다니다 병원에 버리고 달아났다.
 
화재로 숨진 여자노동자들의 아픈 얘기는 제3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2010)에서 박찬경 감독의 첫 장편영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를 통해 테어났다.. 이 영화는 안양이라는 도시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잊혀진 이야기들을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뒤섞인 독특한 형식 속에 담아냈다.
 
김인순, <그린힐 화재에서 스물두명의 딸들이 죽다>, 1988,(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
 
 
● 안양 관악로에 '자전거전용도로' 있었다
 
안양시에는 오래전 도심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었다. 비산동 이마트앞에서 인덕원 사거리까지 관악로의 인도 쪽 1개 차선을 분리대로 막아 조성된 자전거도로(4천820m)는 완벽한 수준으로 당시에는 자전거도로를 따로 조성한 사례 또한 드물어 자전거 동호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자전거 전용도로였다.
 
이에 안양시는 지난 2001년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안부)가 실시한 '2001 자전거이용활성화사업 평가'에서 전국 3위를 차지해 우수기관 평가까지 받으며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선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돌연 이 자전거 전용도로는 지난 2001년 자전거전용도로와 차도를 분리하는 분리대가 해체되고 자전거 전용도로는 길가주차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자전거도로의 질적 수준은 현격히 낮아졌다. 자전거 이용자 안전이나 자전거의 신속성이 고려되지 않은 조치였다. 그렇다고 보행자의 안전울 확보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는 자전거와 보행자 모두에게 옳지 않은 조치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안양시 자전거 동호회의 한 관계자는 “관악로 자전거전용도로는 전국 지방자치단체들 가운데 가장 선도적이고 모범적인 것”이었다며 “이를 용도폐기하고 인도위에 선을 그어 자전거도로라고 부르는 것은 전형적인 생색내기”라고 말했다. 실제 관악로 자전거전용도로가 폐쇄된 이후 안양시는 이 구간의 인도 위에 아스콘 포장을 한 뒤 자전거도로 표식을 해뒀지만 만성적인 불법주차 차량과 상가 적치물, 잦은 도로 파손 등으로 ‘무늬만 자전거도로’로 전락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 임곡마을에는 안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좁고 가장 긴 골목길이 있다.
 
● 임곡마을 산자락에는 동네 우물이 지금도 있다.
 
● 임곡마을 뒷산(비봉산) 정상에는 비행기 등대가 있다.
 
 
● 안양 구시장(옛 시대동/ 현 안양1동) 이야기
 
안양시장(이하 구시장)은 1926년 1월 28일 5일장으로 개장되었던 안양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9년 안양지역에서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으로 과천을 거쳐 서울로 가던 시외버스정류장과 국밥집에 중국집, 대장간에 우시장, 쌀창고 등이 있던 안양장터이자 옛 다운타운이었다.
이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안양역사가 개설되자 이 지역이 행정과 경제의 소통의 공간으로 급격한 물동량의 증가와 인구유입을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참고: 인구 1900년대 초 약 3,000명/ 1912년 3,462명/ 1936년 9,234명/ 1940년 1만명/ 1949년 2만명
 
구시장은 기차와 자동차로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도 있었지만 마침 안양시장보다 앞서 있었던 군포장이 1925년에 있었던 대홍수로 물에 떠내려가자 자연히 안양리의 안양시장이 군포장의 상권을 흡수하며 당시 안양리 지역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시흥군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구시장은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러 올 정도로 농산물,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거래되는 품목이 아주 다양했다. 또 매년 정기적인 씨름대회가 열려 1등에 황소1頭, 2등에 광목 1疋이 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했으며, 서커스 공연 등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선거유세나 각종행사 등 지역정치의 발원지였다.
 
안양시지를 보면 구시장은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이 농산물 15만 6천원, 잡화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도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데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했다.
 
구시장은 1961년 5. 16 직후인 11월 6일 안양4동에 중앙시장(새시장이 부름)이 개장하면서 상권을 빼앗기자 한때 우시장으로 변신하며 상권의 부활을 모색했으나 침체의 길로 접어든다. 여기에는 하천변에 위치한 저지대였던 관계로 홍수때마다 침수피해를 입고, 주위를 에워싼 한국제지와 태평방직 같은 큰 공장들과 철로 등으로 인한 통행의 단절과 고립화도 한몫을 한다.
 
구시장은 안양역이 가깝고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며 유동인구가 늘어나자 한때 시장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모색하지만 뒷골목 상점과 노점들이 택지로 바뀌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구로 전락하면서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현재의 자리에는 1970년 세워진 육교만이 남아 있다.
 
참고: 안양시의 주거환개선사업지구 추진을 보면 안양9동 율목지구(2000년 6월 완공), 비산1동 임곡1지구(2003년 3월 완공)와 석수1동 구룡마을(2003년 9월 완공), 안양1동 구시장(2004년 12월 완공), 삼성천마을(2004년 10월 완공), 임곡2지구(2006년 12월)
 
 
■ 안양 구시장(1960년대 추정)
 
 ■ 안양 구시장 철길 건널목(1960년대)/ 아래사진(1970년대)
 
사진은 1920~1960년까지 안양에서 가장 번화가로 당시에는 구시장이라 불리우던 시대동(市垈洞) - 현 안양1동의 1960년대 중반의 풍경이다. 사진 중앙의 길로 내려가면 철길 건널목이다. 열차가 지나갈땐 땡땡땡 소리와 함께 차단봉이 내려온다. 철길 옆에는 건널목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서울과 과천가는 버스들이 이 길로 다녔는데 땡땡땡 철길을 넘고, 수푸루지 다리를 건너고, 비산동성당 앞과 안양운동장 남문 앞과 관양동 수촌마을 등 옛길로 해서 넘어갔다. 건널목 주변에는 이발소, 중국집, 양복점 등이 즐비했었고, 오른쪽 건물 2층에는 상록수 다방이 있었는데 안양 최초의 다방이 아닐까 싶다. 철길 지나 오른쪽으로 커다란 쌀 창고가 있었는데, 창고 앞은 넓은 마당으로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철길을 건너 왼쪽 골목길을 따라 가면 허스름한 주택들이 이어지고 한국제지 공장 담벼락을 따라 안양천쪽으로 가면 정문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육교가 놓여진다. 구시장에는 1983년 태평방직 자리에 진흥아파트, 2002년 1월 한국제지 자리에 삼성래미안이 들어서고 구시장 또한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2004년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안양1동 태평방직(1970년대)/ 현 진흥아파트
 
안양1동 진흥아파트 자리에 있던 태평방직의 모습으로 사진 아래로는 경부선 철길이 지나고, 사진 좌측은 구시장이며, 사진 윗쪽으로는 수푸루지 마을이 보인다. 그 앞쪽에 자그마한 다리가 안양천을 건너는 수푸루지 다리로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안양에서 비산동을 거쳐 과천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 지역경제 크게 기여했던 ‘태평방직’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을 인수해 공장 확대에 나선 김성곤이 1956년 5월 15일 인수한다.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다.
 
태평방직은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면서 금성방직 자리에는 택지 분양에 따른 안양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 대농단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태평방직 자리에는 그 이후 진흥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 안양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가 있다?
직접 식수? 기증 식수?... 기록 조차 없지만 과거 산업도시 안양 위상 증명
 
진흥아파트 단지 초입에 있는 느티나무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 서기 1955년 4월 5일'이라는 백색의 사각철재 표식이 세워져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관리사무소 직원도 이 나무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할뿐 아니라 정작 이 아파트 단지에 살고있는 주민들 또한 이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안양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느티나무가 심어졌다는 1955년 당시 이 자리에는 삼흥방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흥방직은 1953년 1월 서선하 사장이 설립했다가 1956년 금성방직 김성곤 사장이 인수해 태평방직으로 바뀐 곳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안양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였다.
안양에는 수량이 풍부한 안양천이 있어 일제 강점기부터 대규모 섬유공장과 제지공장들이 들어섰다. 해방이후인 1950~60년대에는 산업시설들이 줄지어 자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의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안양을 몇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0월 17일 이기붕 민의원의장,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공보실장 등과 함께 안양을 찾았다. 이는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이 동양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안양시 석수동에 마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현재 석수2동 아파트와 군부대 자리) 기공식에 참석한 것으로 당시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94호)에는 영화연극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촬영소 모형도를 돌아보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어 1956년 10월 17일에는 안양3동에 있던 금성방직과 안양4동에 있는 삼덕제지 공장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했다.(대한뉴스 제94호)
그러나 1955년에 안양 삼흥방직(이후 태평방직)을 방문하거나 기념 식수한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느티나무에 이승만 대통령 기증 식수란 표식이 부착됐을까.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안양에 온다고 해서 가봤더니, 안양역에서 태평방직까지 흰 광목이 깔렸고 대통령이 그 위를 걸어와 나무를 심는 것을 봤다. 그때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기념이라며 대통령이 밟고 지나갔던 광목을 조금씩 찢어가기도 했다."
이는 2008년 11월 14일자 <안양시민신문>에 실린 글로 안양토박이며 아파트 관리계장을 했던 서아무개(64)씨의 증언이다.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진흥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그 나무를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서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기증식수가 아닌 방문 기념식수가 되어야 한다. 이에 안양시 문화유산팀 김지석 전문위원에게 확인한 바로는 "1955년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 금성방직을 방문했는데 그때 이 대통령 이름으로 기증식수를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자가 맞지를 않는다. 함태영 부총리가 안양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15일로, 그는 당시 금성방직 공장을 방문했다. 영상 기록물(대한뉴스 제66호)에는 방직공장의 내부 모습, 일하는 직공들,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작업모습을 살피는 함태영 부통령, 공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찾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나무 옆에는 목재 표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하게 부식돼 2005년에 현재의 철제 표식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증식수'로 표기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주민이 증언과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규모 굴뚝공장들이 많았던 안양을 찾았던 기록을 볼 때 이 느티나무는 과거 산업도시로서의 안양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기념물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 안양1동 진흥파트 단지에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식수(기증)한 나무. 나무가 있는 곳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진흥아파트 단지내 8동 3∼4호 입구로 수종은 느티나무, 현재 크기는 밑동 둘레 약 1.6m에 높이 약 20m로 수령은 70~80년 정도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