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18

[기억-최병렬]안양 과거 문화사랑방 '곧망할' & '대합실'

안양엔 끼 있는 문화예술인 사랑방 '곧망할' 있었다 “우린 망한다는 확신 아래 여기 작은 꿈을 이름하여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이론으로 출입구를 냅니다.” -곧 망할 카페 전단지- 1978년 5월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부림상호신용금고 앞 중앙시장 골목길 안쪽 건물 지하에 당시로는 아주 정치적이고 요상한 상호를 내건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Gote manghale’(곧 망할) 입니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알마전까지 안양에서 하늘새 조각가로 잘 알려진 이강식 선생(2012년 병점으로 이사를 하셨지요)과 당시 안양에서 연극인으로 활동하던 윤고성씨(미스 강원과 결혼한 후 안양을 떠나 춘천으로 갔는데 전 아직 그 이후 만나지를 못했음... 춘천의 밤..

[기억-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의 오래된 기억

[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도밭이었고 천일포도주 공장이..

[기억-황영화]내고향 안양 '양지말'

[황영화]내고향 안양 '양지말' 우리집은 안양공고옆 남향으로 있는 아담한 한옥집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때 아버지와 먼 외삼촌 되시는 분이 직접지으시고 상량식때 높다란 너까래에 아버지께서 붓으로 글을 써 넣으셨다. 대문도 기와로 덮은 작은 나무문이었고 담따라 장미넝쿨이 예뻤고 장독대옆으론 포도나무가 있어 여름에 늘 시원한 그늘을 선사했었을 뿐더러 마당엔 펌프가 있어 누나나 엄니가 시원하게 찬물로 등목을 시켜 주곤했다. 마루 뒷문을 열면 김대영이네 앞마당이 그대로 나왔고 뒷동네엔 김재록, 원명희, 박일권, 최우광 등이 앞동네엔 이원재, 김선규 등이 살았다. 뒷동네애들과는 대농뒷산에서 해 저물도록 공차고 늦게 들어와 야단을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약삭골, 지금 서 초등학교 자리 논에 물을 대서 겨울엔 솔..

[기억-최태술]안양과 設農湯(설농탕)

안양과 설렁탕 안양에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이름하여 경민식당이다. 70~80세 정도의 어르신 좀더 내려온다면 60대의 안양토박이들은 거의 안다. 안양역 구 도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가마솥을 걸고 24시간 끓여 진하고 뒷맛까지 깔끔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지금도 경민식당 설렁탕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유래는 이러하다. 안양 동안구 평촌에는 귀인동이 있다. 이 동 이름이 글자 그대로 귀인(貴人)들이 살던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이곳에 살던 귀인이란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하신 분들이다. 또 지금의 수촌 뒤 내씨들이 살았다.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생활하면서 궁중에서 하던 설렁탕을 끓여 당시 한양으로 오가는 길손에게 팔기 시작한 것이 안양 설렁탕이 유명해진 발단이라 한다. ..

[기억-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지금이야 전국 어느 곳의 어떤 도로라도 잘 포장되어 있고 저 시골구석의 차량은 물론이고 리어커도 잘 다니지 않는 길도 모두들 잘 포장이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돌아 다닐 수 있지만 60년대 말 70년대의 초 우리나라 도로포장 상태는 서울의 사대문 안과 중요한 국도와 간선도로만이 포장 되어있을 정도라서 그밖의 도로는 도로상태가 엉망이어서 차량이 지나가면 맑은 날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웅덩이에 고인 물로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예사인 그런 시절이었다. 70년대 초반시절 서울과 수원을 이어 연결하고 서울의 외곽을 형성하며 폭발적인 발전을 앞두고 있던 안양은 아직까지는 시로 승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

[기억-정진원]의왕 덕장골 촌놈 콤플렉스

그때는 백성의 대부분이 촌놈들인 세상이었는데도 촌놈 연쇄 콤플렉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었다. 아무리 화려한 덕장골의 유년시대라 할지라도 어머니 안의 꽃궁에 대해서 그것은 콤플렉스였다. 아무리 덕장골이 꽃대궐이고, 그 안에 기화요초, 은빛 강물이 흐르고, 그 위를 쪽빛 바람이 불어도 저녁이면 스산하고, 그리움과 기다림에 겨워 골짜기의 밤이 무섭고, 싫었었다. 서울이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에 촌놈 콤플렉스가 우리들을 한없는 어리보기들로 만드는 것 같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요물들이 밀려들어왔다. 지리가미와 시레이션, 분유와 디디티, B-29와 쌕쌕이(제트기), 탄피와 앞 논에 박힌 박격포, 인민군과 중공군, 데스까브도(철모)와 덴찌(손전등).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 주어졌을 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

[기억-정진원]한 장의 졸업사진, 덕장초교 10회

현실보다 이상이 언제나 더 화려하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아름답다. 현상보다 환상이 더 환상적이다. 눈으로 보는 인상보다 마음속에 박힌 인상이 더 인상적이다. 펜팔이 줄 수 있는 연면한 동경과 환상은 맞선의 자리에서 쩔쩔매게 되는 어색함과 대개의 실망보다 언제나 매력적인 것이다. 사진은 글자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거기에 시골 사진사의 에스프리가 깃들어 있으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생긴 대로 박아낸 사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사회심리학적 행동 유인들이 내면화 되어있고, 험산준령이나 구비치는 강 같은 개인사의 곡절들이 그 얼굴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것이다. 같은 집단의 단체사진을 비교분석해보라. 언제나 회중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사람은 머리만 중심부로 향해서 기울이고 있..

[기억-정진원]덕장골과 큰집골

덕장골과 큰집골 [큰집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이 서너 채 집들로 된 작은 동네였는데, 동네 이름이 ‘덕장골’이었다. ‘덕짱꿀’이라 소리 나는 대로 불렀었다. 그곳에 큰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 동네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큰 ‘덕(德)’, 집 ‘장(莊)’하여 ‘덕장골’이 되었단다. ‘큰집골’이라 하면 더 좋았을 것을 딱딱한 한자식 이름이 되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야말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집골에 진짜로 ‘큰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포일동 큰집골, 덕장골로 밀고 들어왔다. 국어사전에서 ‘큰집’을 찾으면 네 가지 정도의 뜻을 풀이하고..

[기억-정진원]1950년대 용어 기브미 껌과 갓댐

기브미 껌과 갓댐 6ㆍ25전쟁 직후에 우리 마을에 이러한 말들이 어떻게 해서 들어왔는지 잘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헬로우, 기브미’와 ‘갓댐’과 ‘사나나베치’ 등 당시로서는 아주 낯선 방언들이었다. 내 나이 예닐곱 살 때였으니까 누구들이 하는 말이 하도 이상해서 마음속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모국어도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형편에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골짜기 안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미군이 우리 동네까지 진주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맥아더 장군이나 된 것처럼 자랑삼아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해병대 출신 동네 아저씨가 전해준 것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헬로우), 손 벌려 달라 하다가(기브미), 못된 놈(갓댐)이라 욕먹는 ..

[기억-정진원]검둥이와 독구

검둥이와 독구 우리집 개 이름은 검둥이였다. 옛날 어린애를 낳으면 1 년이나 2 년 기다려봐서 호적에 올렸었다. 면사무소에 가는 사람 편에 부탁하면 가는 사람 마음대로 즉물적(卽物的)으로 작명해서 호적에 넣었던 시절도 있었다. ‘검둥이’란 이름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냥 부를 때는 ‘워리 워리’ 하였는데, 지금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검기 때문에 검둥이였다. 고유명사이기에는 싱거운 이름이었으나 검둥이라 부르면 꼬리를 치고, 잘 따랐으므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토종 잡견이었다. 잡견이란 말이 개에게 조금 미안하므로 보통개라고나 해 두자. 얼굴이 넓적하고, 귀는 아래로 덮여 있고,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온순하게 생긴 개였다. 아무 것이나 잘 먹었다. 특별한 볼 일 없는 개여서 밤이 되면 달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