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엔 끼 있는 문화예술인 사랑방 '곧망할' 있었다
“우린 망한다는 확신 아래 여기 작은 꿈을 이름하여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이론으로 출입구를 냅니다.” -곧 망할 카페 전단지-
1978년 5월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부림상호신용금고 앞 중앙시장 골목길 안쪽 건물 지하에 당시로는 아주 정치적이고 요상한 상호를 내건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Gote manghale’(곧 망할) 입니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알마전까지 안양에서 하늘새 조각가로 잘 알려진 이강식 선생(2012년 병점으로 이사를 하셨지요)과 당시 안양에서 연극인으로 활동하던 윤고성씨(미스 강원과 결혼한 후 안양을 떠나 춘천으로 갔는데 전 아직 그 이후 만나지를 못했음... 춘천의 밤 무대를 예술적으로 만들었다는 소문만)가 손을 맞잡고 운영했지요.
곧 망할은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2번째로 생긴 소극장이자 갤러리겸 카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이색적으로 실내를 2층으로 꾸미고, 미술소품 인테리어로 눈길을 사로 잡았으며 공연과 연극, 고전 음악감상회가 열리는 등 꽤나 분위기 있는 카페로 입소문이 나면서 끼 있는 사람들의 아지트로 80년대 안양이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는데 한 몫을 했지요.
특히 유신의 몰락과 계엄령이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대의 젊은이들은 이곳을 해방구로 삼았는데 지금은 중견이 된 수많은 예술인, 연극인, 연출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79년 당시로서는 보기가 쉽지 않았던 연극공연 ‘정복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 지하실 공간에서 연장공연까지 하는 히트작이 되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곧 망할’이라는 가게 이름 때문에 체제 전복을 노리는 불온분자의 아지트로 의혹을 사면서 중앙정보부 안양 분실(지금은 없어진 안양1동 사무소 지하실시에는 정보부 요원이 상주하면서 안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시대였지요)에서 "간판을 내려"라고 지시해 결국 곧망할은 고전음악감상실 '대합실'로 상호가 바뀝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장 이강식씨는 경찰서 보안과에 불려 다니는 고초를 겪은 것은 물론이고요.
이후 아픔은 계속됩니다. 시장통 한복판에 자리한 대합실에 젊은이들이 북적이자 "와우 내가 해도 뭔가 될 것 같은데..." 하고 눈독을 들인 집주인이 임대 비용을 엄청나게 인상을 요구하자 결국 문을 닫고 맙니다.
간판 '곧 망할' 처럼 말입니다. 대합실은 아늑했던, 정말 비밀 아지트처럼 꾸며놓었던 공간을 건물 주인에게 내주고 안양 1번가로 이전합니다. 그 자리가 현재 동서연결지하차도와 구도로가 만나는 끝자락의 좌측 골목길에 있는 라이브카페 '세시봉'(안양 토박이들은 아직도 '째즈'라 부르지요) 입니다.
까페 ‘곧 망할’에 이어 ‘대합실’은 경영난으로 2000년에 문을 닫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사라졌지만 아직도 안양의 끼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70년대말에서 90대까지 안양지역을 기반으로 문화공동체를 이루었던 의미 있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대부분의 다방이 음악다방으로 팝송를 주로 들러주던 시절 고전음악을 틀고, 은은한 조명이 켜지는 박공예 조각공방까지 대합실은 지역문화 운동의 거점이었지요.
대합실을 문을 닫고 난 자리에는 이후 커피집 '샤걀의 눈내리는 마을'이 들어서 젊은 연인들에게 아늑한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저도 꽤 그 공간을 꽤 많이 이용했지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도 이후 폐업을 하고 맙니다. 그 자리에는 알파공원(안양1동사무소)옆 여관건물 2층에서'째즈'카페를 운영하던 김청래씨가 인수해 '쎄시봉'이란 상호로 라이브카페를 현재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청래씨는 1980년대 유명세를 날리던 키타리스트인데 동생은 김청로씨로 저하고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입니다. 형은 키타, 동생은 올겐을 했는데... 80년대 속칭 '오구리'-스텐드바에서 두 형제를 모르면 간첩이었지요. 지금도 쎄시봉에는 이장호 영화감독 등을 비롯한 70-80음악인들이 찾아와 즐기고들 가지요.
안타깝게도 동생 김청래는 마치 음악인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40대에 세상을 떳으니 일찍 간 것이지요. 제가 청계공동묘지에 묻었는데 영구차가 한대 더 있었는데 여고생이 묻히더라고요. 날씨는 우중충한데 떠날때 외롭지 않아 다행이다며 깡소주(당시는 소주가 25도짜리)로 나발을 분 기억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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