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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0. 14:29

[조기찬]1970년대 초 안양읍내 이야기


 

지금이야 전국 어느 곳의 어떤 도로라도 잘 포장되어 있고 저 시골구석의 차량은 물론이고 리어커도 잘 다니지 않는 길도 모두들 잘 포장이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돌아 다닐 수 있지만 60년대 말 70년대의 초 우리나라 도로포장 상태는 서울의 사대문 안과 중요한 국도와 간선도로만이 포장 되어있을 정도라서 그밖의 도로는 도로상태가 엉망이어서 차량이 지나가면 맑은 날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웅덩이에 고인 물로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예사인 그런 시절이었다.
70년대 초반시절 서울과 수원을 이어 연결하고 서울의 외곽을 형성하며 폭발적인 발전을 앞두고 있던 안양은 아직까지는 시로 승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곧 시로 승격이 돼야 할 정도로 높은 인구 증가 의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지만 도로사정은 엉망으로 안양역전 앞을 통과하는 1번선 국도만이 왕복 2차선으로 포장 되어있는 상태로 만약에 시로 승격을 한다 하더라도 도시기반시설이 취약한 입장으로 도시와 농촌이 혼재하는 그런 상태였다.
안양읍은 서울에서 부산과 목포를 목적지로 출발하는 급행열차마저도 영등포에서 정차한 후 이곳 안양을 건너뛰어 수원역에서야 정차할 정도로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직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 미미한 존재의 읍이었다.
그러나 채소농사를 주로하는 서울시 외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안양의 토질은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모래진흙이었기 때문에 포도가 많이 재배되어 포도밭이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로 포도주가 생산되었는데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라디오를 통하여 선전되는 안양포도주의 성가는 드높았지만 아직은 자연식이니 웰빙이니해서 건강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쏘세지나 햄 등의 인스턴트 식품들이 새로운 영양원으로 여겨지는 세월인지라 포도주의 소비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외국산 포도주의 수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포도주를 생산하여 판매를 하였겠지만 외국인을 접대하는 호텔식당이나 일부 양식레스토랑에서 판매되고 있었으며 종교적 행사등에서 사용하는 이외에는 소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언젠가부터는 우리 귀에서 포도주의 광고 소리가 멀어지고 말았는데 이는 안양에서 포도밭이 없어지고 주택이나 공장들이 확장되는 전조이었던 셈이다.
수리산과 청계천 자락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은 안양천을 형성하였는데 맑은 안양천에서는 쪽대로 고기를 몰아서 잡힌 고기들로 매운탕을 끓였고 여름이면 하동들의 멋진 수영장이 되었으며 저녁이면 수줍은 공장의 처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물놀이를 즐기곤하였는데 이를 놓칠새라 짖궂은 총각들은 후렛쉬를 들고 아가씨들의 몸매를 훔쳐보느라 찬이슬을 무릅쓰고 잡초 풀속을 헤메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안양의 주접동 건너편에 위치한 동양나일론 뒷 동산에는 진달래는 붉게 타올랐고 평촌동의 들판은 푸르기만하고 맹꽁이,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의 발전은 이곳이라고 그냥 두지않고 서울과 인접해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에서 밀려나온 사람들과 공장들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는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여성인력을 쓸어담기 좋은 경공업 위주의 공장들이었다.
특히 방직공장과 봉제공장이 많았는데 태평방직, 금성방직, 동일방직, 삼풍산업, 동양나일론,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기타 수다전자, 동화약품, 동아제약등의 공장들과 제지공장들도 많았는데 이곳 공장들은 여성인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여성근로자가 대다수인지라 일시적으로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루어 여자 5명에 남자 1명 정도이다보니 사회적인 문제가 많이 발생함은 물론 시쳇말로 잘생긴 남자의 인기는 끝간데를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부인만을 바라보며 '일편단심 우리 마누라'만을 부르짖던 이 지역의 순진한 남편들도 시선만 돌리면 젊고 예쁜 여성들이 수두룩하게 많아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누라보다도 훨씬 젊고 싱싱한 여성들이 받아만 준다면 눈을 돌리어 마음도 주게 되는 것이 마음씨 검은 남자들의 일반적인 속성일런지 모르지만 조금 마음만 바꾸고 시간만 할애하면 가까운 곳에서 젊고 예쁜- 속말로 싱싱한 여성들이 많아 마누라가 없어도 별로 불편한 점을 모르겠는데 이 고장 특유의 질흙이 많은 토양 때문에 비만오면 질퍽대는 비포장도로와 개발이 되는 곳들이 모두 진흙탕인 환경인지라 장화없이는 불편하다고하여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몹쓸 말이 한동안 유행된 적도 있었다.
과연 이러한 말들이 유행할 정도로 여자들이 많았는가 하는 사례는 영화를 관람하는 인원으로 가늠할 수 있었는데 TV도 잘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오락시설조차 여의치 않아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관람이나 가끔극장의 무대에 올리는 쇼를 관람하는 것으로 오락을 대신하고 문화생활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양에는 3 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안양역전의 북측에 위치한 화단극장과 새로 길이 뚫렸지만 아직은 포장이 되지않은 비포장도로인 중앙로에 위치한 삼원극장과 안양극장 등이 그들인데 그중에서 여공들이 제일 많이 몰리는 곳이 화단극장이었다.
화단극장은 새로 지은 삼원극장이나 안양극장보다는 개관한지가 오래되어 시설은 취약했지만 관람료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조금은 후미진 곳의 허름한 극장으로 시골에서 갓올라온 시골처녀들이 접근하기가 쉬웠으며 또한, 여공들의 취향에 맞는 국산영화를 위주로 상영하였기 때문에 새로 지어 말끔한 삼원극장이나 2층으로 올라가는 안양극장보다는 여공들에게 인기가 높아 휴일등에는 장사진을 이루고 매회 매진을 기록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인원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성으로 여공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안양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단극장 앞에서 5분만에 애인을 구하지 못하면 바보'라는 할 정도의 말까지 나돌 정도였으니 사정을 알만하지 않는가?
이렇듯 여성인구가 많아서 역전옆에 위치한 태평방직의 월급날이 되면 안양의 모든 제비와 건달들이 태평방직 정문에 모두 모인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시절부터도 직업적인 제비들과 건달들이 들끓어 여자들에게 기생하여 무위도식하는 부류들이 부지기수라서 그들의 독아에 헤일 수없이 많은 여공들이 시련을 겪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1973.7.1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되었는데 인구가 5만 이상이면 시로 승격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안양은 급작스런 인구밀집현상으로 도시가 팽창되어 당시의 시민이 18만에 이르렀으니 너무 늦은 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시기반시설은 인구의 집중에 비해 미치지 못하여 미비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나마 1974년에야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1 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면서 경수산업도로의 역할을 제대로하면서 시로 승격한 안양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갖추게 되었으며 이와함께 중앙로의 거리도 포장되었다.
서울의 위성도시로 발전한 안양시는 위락시설에서조차 서울시의 부담을 떠안았는데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서울시에서 미처 채우지 못하고 넘쳐내는 수많은 행락인파를 끌여들여 그나마 휴식을 허용한 곳이 바로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안양유원지이다.
백만평 정도의 안양유원지에는 수영장과 보트등 각종놀이시설과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호텔시설까지 갖추어져있어서 주위에 산재한 포도밭과 함께 잘 어우러져 당시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곳에 들를 정도로 시설을 잘 갖춘 쉼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일주일의 쌓였던 피로를 말끔이 씻어주기에 충분한 명소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안양유원지는 삼성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에서 흘러 내리는 삼성천변에 자리잡고 있어 경치 또한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삼성산과 관악산의 등반을 시작하는 시발점과 도착점으로서도 한몫을 다하고 있었다.
이곳 안양유원지 안의 석수동 산 2번지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안양사'라는 절이 있는데 안양이라는 이름도 이곳의 안양사라는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안양이라는 뜻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모든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을 뜻하는데 최근에 안양사 발굴터에서 안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발굴함으로 그 역사를 재확인 하였다.
안양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삼막사'라는 절 또한 유명한데 신라 문무왕때 원효,의상,윤필 등 3인이 절을 지어 불도에 정진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 삼막사에는 여근석과 남근석이 있는데 여근석에 동전을 붙이면 사내애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는데 이처럼 옛날의 사찰들에는 우리의 오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적인 성신앙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당시 금성방직의 그라운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잔디가 덮인 축구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제규격에는 미치지 못하여 정식경기는 개최될 수 없었지만 국제경기를 하기 위해서 외국의 잔디구장에 적응하는데 필요하여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공장의 종업원들이 없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몸을 풀고 운동을했는데 TV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선수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으니 영광이었고 행운이었는데 이회택, 김진국, 이차만, 황재만 등의 선수들이 기억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한 선수나 스타들이라하여도 사인을 요구 한다거나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가 습관화 되지않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음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당시는 TV가 흔하지 않아 일반가정에는 잘 보급되지 않아서 국가대표팀의 경기나 고교생의 야구경기나 기타 유명한 권투,레스링의 빅게임이 있을 때는 TV가 설치된 다방으로 몰려들어 TV를 보곤 했는데 나란히 줄을 맞추어 진열해 놓은 의자에 앉아 평소 찻값의 두배에 해당하는 찻값을 지불하고 관람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애국자가 되지 말라고하여도 애국자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응원 또한 열렬했는데 경기가 진행될수록 열기가 차오르다 보면 돌아가는 선풍기가 있어도 덥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말하는 법이 없는 세월이었다.
그렇듯이 가전제품의 보급이 시원치 않아 냉장고도 드물었는데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서는 맥주병에 막걸리를 담아 깊은 우물에 넣어 냉각시킨 막걸리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수박,참외등의 과일들도 같은 방법으로 냉장시키거나 물에 담궈 놓았다 시원해지면 먹곤했었다.
그 시절에도 오는날의 생맥주집이나 맥주타운과 같은 막걸리홀이 유행했었는데 시원한 차림의 날씬한 아가씨들의 서비스도 곁들여 금상첨화였는데 막걸리홀의 이름으로는 럭키홀, 스타홀, 비치홀, 아폴로홀 등의 서양 이름을 가진 막걸리홀 등이 안양역전을 주위로 많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 재미있게도 인간을 달에 처음 착륙 시켰던 우주선인 '아폴로호'를 본딴 막걸리홀의 이름이 이색적이었는데 아폴로호는 아폴로박사를 탄생시키기도 하였고 당시 유행성결막염에도 아폴로눈병이라고 명명을하였을 정도로 그 유명세를 자랑했으니 막걸리홀의 이름이라고하여 가릴 이유가 없어 상호로 사용했겠지만 이렇듯 동양음식과 서양 이름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루는 시절인가 보았다.
이러한 막걸리홀에서도 맥주병에 담긴 막걸리를 팔았는데 안주로는 새우깡이나 스넥류를 내놓고 안주라고 하면서 한접시에 막걸리값의 2ㅡ3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바가지상혼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조금 비싸더라도 요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실비집보다 나은 주점형태의 술집에서 마음놓고 퍼질러 앉아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고 진한 안주도 맛볼 수 있는 속칭 방석집들이 안양역 뒷쪽에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오늘날과 같이 바가지만 팍팍 씌우는 방석집과는 다른 그런 방석집이었다.
그 술집들은 한국식 이름으로 구월옥, 경남옥, 영남옥, 호남옥, 진주옥 등으로 자신들의 고향이나 유명한 지방의 이름을 상호로 내걸고 영업을하는 한국식 주점들이 유행을 주도했는데 그중 구월옥에는 김마담이라는 걸물이 존재하였는데 얼굴도 수수하였고 몸매 또한 날씬하지도 않은 풍만에 가까웠는데도 다른 젊고 예쁜 아가씨들보다 인기를 독차지하고 많은 손님을 유치하였는데 그 이유는 김마담은 기분이 좋으면 가끔 노래를 부르는데 어떻게나 잘 부르는지 기성가수는 저리가라할 정도의 실력으로 손님들의 혼을 쏙 빼놓곤 했는데 특히 한명숙의 노래인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부르면 자지러질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걸들도 떠나고 건물들도 철거되어 흔적조차 간곳이 없으니 그 또한 격세지감이다.
  
원제목: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었다(2012.10.22)
출처: http://blog.daum.net/kccho28/134?srchid=BR1http://blog.daum.net/kccho28/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