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22

[기억-정진원]의왕 청계사 초입 언덕배기 '옥박골' 지명유래

마을이름을 대할 때에는 그냥 가까이 가서, 있는 그대로 보고, 쉽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마을이름을 상고할 때에는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선입개념을 버리고, 본질을 ‘바로 보는(직관)’, 이른바 ‘현상학적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 가운데 우선은 ‘한자(漢字)’의 우상이고, ‘한자화(漢字化)’의 오류이다. 한자화는 본래말보다 더 좋은 뜻으로 음역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엉뚱한 한자를 쓴 경우가 허다하다. ‘참새울[작동(雀洞)]’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름인가, 그것을 ‘진조동(眞鳥洞)’이라 했고(연천군 백학면), ‘쇠무덤’은 소의 무덤이란 뜻인데, 그것을 셋이 모였다는 뜻으로 ‘삼회리(三會里)’라 했으니(가평군 외서면) 우습지도 않다. 마을이름에서 쉬운 것을 어..

[기억-정진원]의왕 오매기 마을 지명유래

의왕시 오전동에 오매기란 마을이 있다. 지금 의왕문화원이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백운호수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동네이다. 그곳에서 아래로 사나골, 용머리, 목배미, 뒷골, 백운산 등 작은 마을들을 합쳐서 넓게 오매기라 부르기도 했었다. 8ㆍ15 해방 때에 약 70호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분은 그곳에 집[막(幕)]이 다섯 채가 있어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골짜기에 동네가 형성될 때에 집 다섯 채가 한꺼번에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 해도 마을이름을 바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이다. 움막이 아닌 다음에야 집을 막(幕)이라 하지는 않았으며, 다섯 채 집이 만들어..

[기억-정진원]교통 요충지였던 의왕 한재굴

의왕시 청계동에 한재굴이란 동네가 있다. 지금은 고가도로가 얼기설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이 되었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덕장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개울 건너에 한재굴이란 마을이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동네였다. 판교ㆍ성남으로 나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안양에서 가끔씩 들어오는 버스의 종점이었다. 당시에는 대단한 터미널이었다. 한재굴에서 청계ㆍ 청계사, 학현ㆍ원터, 백운호수ㆍ능안 방면 등의 세 길이 만나서 안양 쪽 한길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재굴’이라 했었다. 그것을 어떤 근거에선지 ‘한직동’이란 조금 딱딱한 한자 이름으로 고쳐 썼다. 마음이름, 특히 그 작명 이유를 살펴보는 데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는 대부분의 마을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억-정진원]덕장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모두가 6ㆍ25 전쟁 이후에 시골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요즘하고 달라서 당시 시골의 초등학교는 새로운 변화와 놀라운 쇄신의 중심점이었다. 우선 책상과 걸상이 있는 교실이 얼마나 기이한 공간이었던가. 언제 의자라는 것에 앉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리창이 있는 교실, 기다란 복도,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면서 고무신을 얹어놓곤 했었던 복도 끝에 있었던 신발장, 분필과 흑판, 처음에 낯설었던 동무들 등이 모두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배워서 알게 되는 신학문의 깊은 맛을 무엇에 비견할 것인가. 양주동이 영어 문법 공부의 처음에 나오는 3인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눈길 얼마를 걸어가서 그 뜻을 배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너와 나를 뺀 우수마발..

[기억-정진원]학의천은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청계산 청계사 옆 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실개울 물은 상청계ㆍ중청계ㆍ하청계를 거치면서 물이 조금씩 불어나 한직골 옆에 이른다. 하우고개, 원터, 독쟁이 쪽에서 내려온 물도 한직골 조금 아래쪽에서 그 물과 합쳐졌다. 광교산 바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능안 쪽 모락산에서 내려온 물이 백운호수에 고여 있다가 무넘기를 넘쳐 내려서 삼벌내에서 다른 두 물줄기와 합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삼벌내’라니,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서 된 시내라는 뜻인가 보다. 이 물줄기가 양지편 앞, 벌모루 앞을 지나 흐르는데, 안양 쪽으로 흘러가므로 안양천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학의천이라 한다. 덕장골 안의 두 실개울, 우리 집 옆을 흘러내린 물과 동편 사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벌모루에서 학의천과..

[기억-정진원]1912년 안양에 전기 처음 들어온 기억

등잔불에서 전등불까지 등잔불. 그것은 따듯하고, 푸근했다. 그 불빛은 지나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 미칠 것도 아니었다. 디테일한 것은 과감히 소거해 버리고, 아주 대국적으로 사물을 보게 했다. 대서특필(大書特筆)만 돋보기 없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어스름이었다. 등잔불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사랑방 머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등잔은 대개 백색 자기였다. 뚜껑에는 창호지를 말아서 심지를 박는다. 밖으로 조금 잡아 빼서 끝을 조금 남기고 가위로 잘라낸다. 등잔은 등잔걸이 위에 놓는다. 가늘고 약한 불이어서 콧숨만 조금 크게 내어도 꺼졌다. 켜 있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했었지만 막상 꺼지고 나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에 가득했었다. 그러면 됫박 성냥 알을 찾고, 화로에 남은 불씨를 찾다보면 ..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 늘 푸른 운동장 )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

[기억-조성원]무의식에 스며들었던 국민교육헌장

[조성원]죽어라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1968년 12월 5일 . 결혼기념일은 가물가물한데 그 날만은 까먹지를 않는다. 아침에 눈뜨면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노래가 훈육처럼 흘러나오던 그 무렵. 학교 모든 교실 앞에는 붓글씨로 쓴 국민교육헌장 액자가 정성스레 놓여 있었으며, 모든 교과서 앞부분에 실려 있었고,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모든 국가 행사 앞부분 식순에는 반드시 국민교육헌장 낭독이 있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줄줄 암송하듯이 외우고 통독한 덕분으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지금도 한 줄 빼놓지 않고 적을 수 있다. 그 시절 그렇게 외워댔던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달콤하기는커녕 머리 쭈뼛 서고 통증을 유발하는..

[기억-조성원]작은고추처럼 매웠던 소골안 아이들

[조성원]작은고추처럼 매웠던 소골안 아이들 (외국에 나가면 꼭 떠오르는 말) 작은 고추는 맵다. ' 참 그 속담은 우리에게 유효적절하다. 체구가 약간 작더라도 벅찬 일을 잘 치러내는 강단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흔히 우린 이 말을 쓴다. 어릴 적 앞줄을 벗어날 수 없던 아이로 그 말이 그 시절부터 꽤 위로가 되고 또 든든하였다. 난 그 말을 한 기억으로 꽤 실감한다. 원래 수컷들이란 자웅을 겨뤄 제일 힘이 센 자를 고르는 본능적 기질이 있지 않은가. 그 시절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부가 지배하는 교실안과 교실 밖의 공기는 사뭇 달랐으며 서열 또한 틀렸다. 시내 쪽에 사는 아이들은 소골안쪽 보단 얼굴도 뽀얗고 행색도 괜찮았다. 타이스 양말을 신은 것 하면 가죽 가방에 운동화를 버젓이 신고 다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