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18

[기억-정진원]남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정진원]님태령에서 부림말까지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

[기억-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정진원]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까지 “… 동재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 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춘향전」의 한 대목이란다. ‘동작진(洞雀津)-승방평(僧房坪)-남태령(南太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 店)-사근평(肆覲坪)-지지대(遲遲臺)-수원(水原)’ 김정호의「대동지지」가운데 일부분이다. ‘중화(中火)’한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점심을 한다는 뜻이므로 한양을 바삐 떠나 한강을 건너고, 세네 시간 걸려서 점심때쯤 인덕원에 당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몽룡이 인덕원에서 어떤 점심을 먹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학의천이 흐른다. 그 개울을 건너면 벌말(평촌)인데, 마을 규모가 비교적 큰 편으..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초등학교의 봄소풍

봄소풍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상큼한 이 노랫말을 들으면 지금도 나는 풀 향기 그윽한 푸르른 아이가 된다. 환경미화 기간이 지나면 어느 새 산천은 온통 짙게 푸르렀다. 흡사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아다지오의 선율로 시작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흐름으로 펴져 경쾌한 알레그레토 교향곡으로 변한 왕연한 산천초목의 느낌이다. 시와 때를 구분하는 질서와 정렬 그리고도 분수껏 품위를 스스로 낮추는 봄의 꽃 마음을 읽는다. 그 시절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빛나는 청춘의 계절을 음미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순진한 꿈은 마냥 부풀었다. 5월은 어버이날에 스승의 날 그리고 우리의 날이 있어 늘 분주하였으며 더욱이 5월 초는 반드시 봄 소풍을 갔기 때문..

[기억-이용구]안양에 비친 당시 제일교회의 모습

이 글을 쓰신 이용구 선생은 1926년생으로 제일교회가 창립된 1930년도에는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였지만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생활과 안양의 당시 모습들은 눈썰미 있게 보아 두었다가 그의 책 '양지마을의 까치소리' 등을 통해 안양지역 사회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편집자 주- 내가 나가는 안양제일교회 80년사(1930년~2010년)가 발간 되었습니다 여기에 투고한 글이 등재 되었기에 전기 하오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030.5.17 창립) 1930년 당시 안양은 서울역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안양역을 중심으로 밀집된 곳에만 겨우 전깃불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밤이면 희미한 석유 등잔불만이 가물거리는 고장…..

[최병렬]안양지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향토사는 지역사·국사·민족사의 모체요 뿌리로, 곧 모든 역사의 콘텐츠라 할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지역향토사를 연구, 탐구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고, 문화원들도 이같은 연구를 소홀히 하고 있어 과거사의 연구는 커녕 현존하는 사실들 조차 제대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채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안양지역의 향토사에 대해 박식하거나 자료를 수집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분들이 여러분 있지요. 안양지역 변천과 행정사에 박식한 변원신 선생, 안양사 발굴을 안양청원할 정도로 안양시 연구에 몰두해 온 지역원로인 정덕한선생, 안양시 홍보실에 근무하며 70년대 부터 안양지역을 사진 기록에 담은 이정범 선생, 1968-69년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애 근무하며 안양지역의 풍물을 컬러슬라이드와 흑백필림에 담아낸 닐 미..

[기억-최병렬]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안양지역에 음식점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아마도 한양가는 길목인 인덕원 사거리 일대 자리했던 주막에서 당시 오가던 길손에게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정일뿐 기록은 없다. 안양시는 2006년 안양시민축제 당시 음식문화축제를 준비하면서 안양의 대표음식으로 설렁탕을 선정해 과거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다. 자료를 조사한 안양문화원 최태술 위원은 “지금 동안구 평촌에 귀인동이 있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 하신 귀인(貴人)들이 살든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또 수촌마을에는 내시촌이 있어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궁중에서 하던 선농제 행사에서 끓이던 설렁탕 기술을 알았을 것이다”며 이를 통해 설렁탕이 일반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

[기억-최병렬]안양 병목안 기찻길옆 2층 ‘길모퉁이까페’

안양에서 처음 카페 명칭 붙였던 ‘길모퉁이까페’ 1970년대 안양에서 카페란 명칭을 사용한 곳은 안양1동 CGV옆 기찻길 골목 2층에 있던 길모퉁이카페가 아닐까 싶다. K연구소에 다니는 남편을 둔 서른 살을 갓 넘은 예쁜 누나가 커피와 함께 진토닉 등 칵테일과 위스키 등을 팔던 가게였다. 지금은 50대 중반이 된 친구들이 겨울에는 난로 불을 쬐며 노닥거리며 암울했던 현실을 고민하고 LP음반을 뒤적거리며 ‘까라마드르 조르쥬(길모퉁이 카페의 작가)’를 이야기했다. 당시 청년들의 주머니가 허전하던 때여서 주인 누나가 공짜로 주는 따끈한 커피와 술 한잔에 고마워하고 풋풋하고 넉넉한 쓰임새에 감동하며 간혹 안양9동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한 화물열차가 지나치기라도 하면 도로에 멈춰 기나긴 차량들을 보는 것도 또다른 ..

[기억-정진원]1950년대 안양시장(구시장) 이야기

[정진원]그곳에 ‘안양시장’이 있었다 50년 전 안양시장(市場)은 그야말로 궁벽한 산골 촌놈을 어리둥절케 한 별유천지였었다. 당시 수푸르지(지금 비산동)에서 안양천 다리(지금 임곡교)를 건너서 철길을 넘어 경수국도까지의 오른편 넓은 터에 안양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안양의 유일한 시장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상전벽해 시장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거나 머슴의 지게꼬리를 잡고 힘겹게 걷고 걸어서 그곳엘 갔었다. 구리고개 언덕에 올라서서 한숨을 내쉬면 멀리 신세계 안양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었다. 구리고개 밑에 운곡 마을을 오른쪽에 두고 산모롱이를 돌면 제법 곧게 된 한길이 뻗어있었는데, 거기를 걸으면서 안양쪽을 보면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

[기억-정진원]1950년대 안양 인덕원사거리

[정진원]50년 전 안양 인덕원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덕원 사거리는 대처였다. 우리 마을에 없는 것들, 볼 수 없..

[기억-최병렬]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의 음악다방들

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 음악다방 이야기 1970년대는 통기타, 장발, 나팔바지와 함께 LP음악을 들려주었던 DJ가 인기를 누리던 음악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다방의 추억이 유별났던 곳은 단지 차만 팔고 약속장소만이 아니라 그 시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믄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뽀얀 담배 연기로 가득찬 다방은 유리창 속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DJ'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카펜터스와 아바, 스모키 등의 팝송과 때로는 신나는 디스코 장단에 흥겨워하는 모습은 지난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자리했던 '음악다방'속의 한 풍경이다. 음악다방의 얼굴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박스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지고 경외스러웠던지.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