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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우리가 언제부터 '안양사람'이라 했을까?

안양똑딱이 2016. 6. 11. 08:05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99년 봄 100여명의 민방위교육생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안양이란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20세 이상 안양 시민 중 토박이의 비율과 일치하여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난다.

이처럼 코끝이 찡해진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지역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살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정주의식(定住意識)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주의식이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많아질 때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지역발전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수도권 도시들은 경제개발기에 급격한 도시성장을 겪으면서 외부로부터 서로 상이한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많이 유입되었던 반면에, 아직 이들이 지역사회에 완전하게 정착하지는 못하고 있어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집단이나 계층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수도권 도시들 중 안양은 토박이 사회의 공동체의식이 붕괴되지 않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 일개 리에 불과하던 안양의 도시성장사를 돌아보면 전국을 통틀어 70년만에 리(里)가 발전하여 면(面)과 읍(邑)이 되고, 시(市)가 된 유일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역이 도시로 성장, 발전하는 과정을 되짚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안양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의식 즉, 지역공동체의식이 생겨나는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종33년(1896년)은 태종이래의 8도제가 13도제로 변경되는 해인데, 오늘날 박달동과 석수동을 제외한 전지역을 과천군에 속한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분류하고, 일동, 이동, 내비산리, 외비산리의 4개 리는 상서면에 일동, 이동, 도양리, 호계리, 후두미동, 장내동, 발사리, 석수동, 안양리의 9개 마을은 하서면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는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의 시행으로 안양지역에서도 상서면과 하서면이 통합되어 서이면이 탄생하였던 바, 바로 이 서이면이 오늘날 안양시의 모체가 된 안양면의 전신이다.

1914년 4월 1일 탄생한 서이면은 호계리, 안양리, 일동리, 이동리, 비산리의 5개 리로 구성되었고, 면사무소는 호계리의 구 하서면사무소(현재의 호계도서관 자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고종시대의 13개 리에서 5개 리로 줄어든 사실에서 안양리가 발사리, 석수리, 장내동 및 후두미동을 행정적으로 흡수했다는 사실과 당시 벌써 안양리가 오늘날의 만안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이 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917년에는 호계리에 있던 서이면사무소가 오늘날의 안양 1 번가 구 안양옥 자리로 옮겨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양리가 명실상부하게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것이다.

불과 15년 사이에 당시 안양리가 그처럼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05년에 개설된 경부선 철도공사와 그 결과로 탄생한 안양역사의 건립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경부선 철도공사는 1901년 착공하여 다음해 6월에는 1차 구간인 영등포에서 명학간의 토목공사가 모두 끝나 건축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명학에서 평택까지를 잇는 2차 구간의 철도부설용 골재를 안양9동 병목안의 채석장에서 채취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안양지역은 철도공사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모여든 노무자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이어 1905년 1월 1일 역사가 개설되어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한 후에는 역세권을 중심으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안양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화하고, 안양리가 지역의 대표성과 중심성을 획득하자 단체나 기관의 이름에 안양이라는 명칭을 빈번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4년과 1925년에는 안양지역 최초의 금융기관인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우체국, 안양연초조합이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안양공설시장의 개장과 안양소년척후대의 창립이 있었다. 이어 1927년, 안양공립보통학교와 안양수양단, 1928년에는 안양청년회가 창설되었다. 계속해서 1930년 안양교회(장로교)의 설립, 그리고 1933년에는 안양-과천 정기축구대회가 열리고 안양유원지계곡에는 수도권의 관광명소로 안양풀이 개장되고 있다.

이와 같이 안양리가 발전하면서 안양리에만 3,000명 이상의 인구가 밀집하게 되면서 도시화한 1920년대에서 30년대 초까지의 기간동안에 자기가 속한 단체의 명칭을 통해서, 혹은 학교의 교가를 부르면서, 또는 이웃 도시와의 축구경기에서 응원을 하면서 안양사람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형성된 안양이라는 지역공동체의식과 정체성은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면서 일차적으로 완결을 보게되었고, 이후 안양이 과거 시흥군의 중심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면서 계속 발전하여 1949년에는 안양읍으로, 이어 1973년에는 마침내 안양시로 승격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수도권의 중심도시로서 다시 한번 지역발전을 위한 성숙한 시민공동체의식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안양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겨나는 과정이 타산지석이 될까하여 되짚어보았다.

2003-06-07 13: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