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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안양지역의 기독교전파(2)/ 삼막골교회

안양똑딱이 2016. 6. 11. 08:02

행정학 박사, 성결대 교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분 선교사들이 1885년 4월에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후 10년이 지나면 안양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초기 기독교 선교루트는 주로 간선도로를 끼고 이루어졌다. 안양지역의 기독교 전파과정을 돌이켜봐도 덕고개교회(1895, 안양시 호계동), 초평교회(1897, 의왕시 초평동), 학현교회(1904, 의왕시 학현마을), 부림리교회(1910, 현 인덕원 동은교회)는 과천 공로상으로 전파된 교회들이고, 무지내교회(1895, 시흥시 무지동), 범고개교회(1896, 안양시 박달동), 삼막골교회(1901, 안양시 석수1동)는 시흥-안양간의 도로를 타고 차례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흥-안양간의 도로주변에 세워졌던 안양지역 교회 중 범고개교회는 1896년 11월에 사오십 명이 모여 교회창립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만이 '조선그리스도인회보'(1897년 3월 24일자, 1897년 7월 28일자)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삼막골교회의 설립과 개척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지고 있다.

삼막골교회는 시흥지역의 초기 기독교인이며 항일투사인 하영홍(일명:주명, 1879-1915)에 의하여 삼막골에 설립된 감리교회였다. 삼막골은 석수1동 한마음선원에서 삼성산 기슭까지를 이르는 자연부락으로 당시 60여 호에 달했던 하씨 집성촌이었다. 의금부도사를 역임했던 하우청(1561-1622)의 묘를 이곳 뒷산에 쓴 후손들이 묘 아래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하우청의 10대 손이 바로 하영홍이다.

하영홍은 1900년 12월에 기독교인이 된 후, 전답을 팔아 마련한 돈 180원으로 1901년 8월에 삼막골교회를 짓고 창립예배를 드렸다. 당시 쌀 한 가마에 4원이었다고 하니 지금 돈으로 약 800만 원을 가지고 교회건축을 한 셈이 된다. 교회건립 봉헌예배를 위하여 무지내교회의 지도자 김동현이 개회기도를 하고 있고, 또한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작성된 선교일지에도 항상 무지내교회를 출발하여 범고개교회를 거쳐 삼막골교회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세 교회는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감리교 선교사들의 지도와 감독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902년 5월 미국인 선교사 스웨어러(W. Swearer, 1871-1916, 한국명:서원보)가 작성한 '감리교연회록'에는 당시 삼막골교회의 전도사업이 지도자인 하영홍의 지도력에 힘입어 놀랄 만치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덧붙여 당회원 4명에 학습인이 25명으로 합이 29인이고, 주일학교는 선생이 5명, 학생이 35명이며 여자매일학교에도 학생이 5명 있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매일학교라는 이름을 통해서 당시 교회들이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남녀를 분리하여 예배를 보고 교육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핍박을 받고 있던 삼막골교회에 도움을 주고자 선교사들이 시흥군수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더니 긍정적인 답변을 하더라는 내용도 싣고 있다.

이와 같이 전도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던 삼막골교회는 뜻하지 않은 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삼막골교회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1904년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은 전쟁수행을 위해 무력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에 협조하던 부패한 관리들이 인부들의 노임마저 착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격분한 농민 수천 명이 시흥관아로 몰려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군수와 그의 아들 및 일본인 2명이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시흥군지'(始興郡誌)는 이 사건을 외세인 일본과 부패한 관리들에 저항했던 '제2차 시흥농민봉기운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제2차 시흥농민봉기운동'을 주도했던 중심인물 중의 한 명이 바로 삼막골교회의 지도자로서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하영홍이었다. 하영홍은 사건 직후 체포되어 15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다 병을 얻어 10년 만에 출소하지만, 이듬해 감옥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농민봉기 이후 지도자를 잃은 삼막골교회는 박해를 피해 교우들마저 뿔뿔이 흩어져버려 몇몇 가정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사라지고 만다.

이 삼막골교회가 존재했던 위치는 안양지역의 기독교전파과정을 최초로 정리한 리진호 장로에 의하여 밝혀졌다. 경수산업도로에서 삼막사로 올라가는 길로 약 2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500살 먹은 늙은 느티나무 조금 못 미친 하천 변이 바로 삼막골교회가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오는 8월은 삼막골교회 건립 100주년이 되는 달이다.

삼막골교회가 섰던 자리에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 어려운 시대를 몸바쳐 살았던 개화기 선각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이 우리 후학들이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참고문헌

시흥군, 「시흥군지」, 1989.
리진호, 「안양지방감리교회100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안양지방회, 1995.
이승언, 「안양시지명유래집」, 새안양회, 1996

2003-06-07 13: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