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경기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들인 수리산, 관악산, 청계산, 모락산 등에 둘러싸인 안온한 분지 속에 자리잡은 안양시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은 발굴된 유적이나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대로 과천에 속한 하부 행정단위였던 안양시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율진군(栗津郡)이 되었다.
이어 고려조로 넘어오면 다시 과주(果州)로 고쳐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천현(衿川縣)과 통합하여 잠시 금과현(衿果縣)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과천현(果川縣)으로 부르다가 고종 32년(1895)의 행정단위의 명칭변경으로 과천군(果川郡)이 되었다.
삼막사나 불성사, 염불암 및 망해암 등 안양의 대표적인 사찰들은 대부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설립된 고찰(古刹)들이다. 또한 AD 900년경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 창건되어 '안양(安養)'이라는 지명의 기원으로 알고 있는 안양사와 지금은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지로 변모했지만 평촌들을 불교적 용어인 '다라니(多羅尼)들'이라고 부른 것 등으로 볼 때, 안양은 과거 불교가 융성했던 전형적인 농경사회였고, 그래서 지명에도 그와 같이 불교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농업을 주산업으로 영위하던 시절의 안양의 지역중심은 수리산의 가파른 동북면에 위치하여 다라니들과 같은 넓은 들을 배경으로 갖지 못했던 안양리가 아닌 호계리였다. 그래서 호계리에는 치소(治所)에 해당하는 면사무소가 있었고, 지식인들도 당연히 이곳을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당시 안양 일대의 교역을 위한 중심지는 구 군포사거리께에 섰던 군포장(軍浦場)이다.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열렸던 군포장의 개장시기는 대동법이 실시된 조선 후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고천과 당말, 금정, 호계리, 갈미 및 인덕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입지상의 강점과 과천공로와 시흥로의 교차지점이라는 교통상의 이점을 등에 업고 조선시대이래 지역의 교역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착실하게 해왔던 것이다.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에 모처럼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효도대왕으로 불렸던 정조임금이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제6차부터 과천공로 대신 시흥로를 이용한 일이었다. 정조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안양리에는 1794년 안양행궁(安養行宮)이 건립되었고, 안양천에는 그 이듬해 만안교가 가설되었다. 이어 1796년에는 정조임금이 행궁이 있는 안양리의 발전을 위하여 군포장을 안양리로 옮길 것을 명하자 이 조치에 항의하여 군포장시의 40여 호에 달하는 백성들이 화성으로 내려가는 좌의정 최 제공을 붙잡고 생계가 막힐 자신들의 처지를 엎드려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정조임금께서는 안양리와 군포장에 개장일시를 달리하는 별도의 장시를 각각 개설하여 양쪽을 모두 편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금년에 발간된 '군포시사(軍浦市史)' 군포장시편에 실려있다.
정조대왕이 화산능행을 위하여 만안교를 가설하고, 시흥로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안양리에는 여러 가지 발전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혹자는 이때부터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리가 과천을 앞질러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양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발전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리가 과천을 앞질러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과천과의 인구와 물산의 비교 및 시흥로와 과천공로의 이용빈도 등에 관한 자료의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시흥로의 개설이 안양리의 근대화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는 논거에 대하여도 근대화의 기준이 되는 정치·경제·사회상의 여러 요소들의 다양한 변화상을 추적해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근대화에 관한 한 우리 나라와 같은 제3세계 국가의 경우 대부분 국내적 근대화 요인, 즉 자체적인 산업화가 선행되지 않는 상황하에서 자본주의의 침투(the penetration of capitalism)라고 하는 국제적 근대화요인(International modersization factor)으로 인하여 근대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특성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안양지역이 국제적 근대화요인에 의하여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안양지역의 근대화시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산업화의 진행을 분석하기 위하여는 왈라스(S. Wallas)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의 사회생태적 요소들, 즉 인구(population), 조직(organization), 경제(economy), 기술(technology) 및 상징(symbolism)과 같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추적함으로써 안양시의 산업화로 인한 도시성장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기준시점은 국제적 근대화요인이 내륙지방으로 침투하는 전형적인 형태가 도로 및 철도의 개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에 역사(驛舍)가 개설되는 1905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1905년 1월 1일에 개통된 경부선철도가 안양을 통과하고, 안양리에 안양역사가 개설된 일은 그때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했던 안양리 일대를 이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안양역사 개설 이전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안양 인구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조시대 당시의 호구조사기록과 큰 차이가 없는 약 3천 명 정도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지역의 정치·행정의 중심은 치소가 있던 호계리였고, 주산업도 그대로 미작위주의 농업이었으며, 행정구역도 정조시대와 다를 바 없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그야말로 살기 좋은 농촌마을 이었다.
여기서 앞서 언급된 시흥로라는 교통수단이 생기면서 안양리가 발전하고 근대화되기 시작했다는 논거에 대한 반대논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안양리 발전의 전기가 된 시흥로는 없던 도로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이미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던 도로에 임금의 행차를 위해 폭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시흥로의 개설이 안양리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작이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안양장시를 안양행궁 옆에 개장하여 행궁 주변지역의 발전을 꾀하려 한 정조의 의도는 이후 안양장시에 관한 기록이나 물증이 별반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정조 사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양리의 인구변동에 관하여는 안양의 원로이신 장 배순(1921년 생) 옹이 증언하고 있는데, 18년 전에 작고한 모친 강 주희(1883년 생) 여사께서 1897년 군포 궁내동에서 안양행궁 옆으로 시집올 당시 안양리의 집을 다 합쳐도 열 채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하니 정조의 능행이 안양리의 산업과 인구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로 그림과 같이 일제가1895년과 1926년에 제작한 두 종류의 군사지도를 제시할 수 있는데, 철도가 들어서기 전과 후의 안양리와 이웃 과천 및 군포지역의 변화 상을 약 30년의 시차를 두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1895년 지도에는 과천공로는 두 줄로 선명하게 표시하고 있으나 시흥로의 표시는 미약한 것으로 봐서 19세기말까지는 여전히 과천공로가 시흥로에 비하여 비중이 높은 주도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1905년 안양역사의 개설로 안양리가 지역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이후의 사회생태적 요소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이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인구변화를 추적해보면 1912년에 3,462명을 기록했던 인구가 1925년 6,165명, 1935년 8,957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어 1940년 1만, 1948년 2만, 1960년 5만, 마침내 1972년에는 10만을 돌파하여 오늘날 인구 6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정조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하여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河西面)의 행정구역통합이 이루어져 서이면(西二面)이 탄생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호계동의 하서면사무소를 서이면사무소로 그대로 사용하다가 1917년에 이르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안양리로 서이면사무소가 이전하고 있다. 1941년에는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행정명칭을 변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안양리가 지역의 대표성을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어 1945년에는 안양면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던 시흥군청이 안양리로 이전하고 있고, 1949년의 안양읍 승격 후 마침내 1973년 서이면 사무소가 안양리로 이전한지 약 60년만에 시 승격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리(里)가 변해서 시(市)가 된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안양리로 유입된 인구는 주로 만안로를 따라 안양역에서 안양초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을 중심으로 주택과 상가를 형성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시장, 학교 및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조직을 필요로 하는데, 그 결과 1926년 안양공설시장이 현재의 구시장 자리에 들어섰고, 안양공립보통학교가 과천공립보통학교(1912), 군포공립보통학교(1926)에 이어 1927년에 개교하고 있다. 1930년에는 군포장교회(1925년 설립)의 양 동익 전도사에 의해 안양리에 안양교회(장로교)가 세워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안양리의 초기 도시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로 경제요소를 보면 미작위주의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고 있던 안양이 역사개설 이후 산업도시로 변모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농업의 형태도 1929년 일본인 농장주에 의해서 설립된 고뢰영농법인(高瀨榮農法人)을 주축으로 하여 양잠과 포도와 같은 과수를 위주로 하는 고부가가치 근교농업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중 산업체의 변화과정을 추적해보면 1932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현 대농단지와 석수동에 각각 조선직물주식회사와 조선견직주식회사라는 근대적 방직공장이 설립되면서 안양의 산업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 간행된 시흥군지인 '금천지(衿川誌)'에는 1949년 현재 안양지역 14개 제조업체의 종업원 수가 1,06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6.25 사변은 안양의 산업을 위축시켰지만 금성방직 등 노동집약적 산업체의 특성으로 종업원 수는 오히려 늘고 있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66년 32개 업체에서 71년 64개, 80년 374개, 91년 743개에 이어 98년에는 1,111개 업체에 31,509명에 이르는 종업원 수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넷째,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안양의 영농기술은 쌀 농사를 위한 전근대적 농경기술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나 양잠 및 과수농업을 위한 고부가가치 영농기술을 일본인 농장주들이 가지고 들어오면서 한층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산업기술에 있어서도 섬유나 제지 및 기계공업 기술이 안양의 발전을 선도하는 기반기술로 자리잡으면서 안양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안양이란 도시에서 느끼는 상징(symbolism)의 변화도 일어났다. 과거 안양이란 명칭과 다라니들이라는 지명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상징적 형상은 철도 개설 이후에 안양에 가서 마음만 바로 쓰면 의식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 즉 고용기회가 많은 도시라는 근대산업도시의 이미지로 변하면서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양시의 도시성장과정에서 보여지는 주요한 특성과 발전 요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농경사회에 머물렀던 19세기말까지만 하여도 안양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였다.
- 20세기초 철도개통 등 국제적 근대화요인의 영향으로 안양이 근대 도시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공업화라는 국내적 근대화요인의 영향으로 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 수도권 규제 등 공업입지 여건이 악화되면서 안양의 산업발전은 정체 국면을 맞았으며 평촌 신도시 개발을 계기로 탈공업화 및 주거 도시로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안양의 도시성장이 가능하였던 것은 안양이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 제대로 편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양시의 근대화 시점은 안양리가 교역과 산업의 요충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안양역사의 개설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를 계기로 농경시대의 중심지였던 호계리에서 교통상의 강점을 바탕으로 안양리가 산업사회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양의 근대화 시점에 대한 논의를 접고, 이미 탈근대화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안양이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도시정체성을 가진 특색 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지를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군포시사편찬위원회(2000), 「군포시사」.
시흥군(1950),「금천지」.
시흥군(1989),「시흥군지」.
박희정(2000), “안양시의 도시성장과 근대화”, 안양학연구소 창립세미나 발표논문.
안양시지편찬위원회(1992), 「안양시지」.
원행정례(1790).
이 승언(1996), 「안양시지명유래집」, 새안양회.
이 승언(1985), “안양의 유래”, 「안양문화」 제4권, 안양문화원.
역대로 과천에 속한 하부 행정단위였던 안양시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율진군(栗津郡)이 되었다.
이어 고려조로 넘어오면 다시 과주(果州)로 고쳐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천현(衿川縣)과 통합하여 잠시 금과현(衿果縣)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과천현(果川縣)으로 부르다가 고종 32년(1895)의 행정단위의 명칭변경으로 과천군(果川郡)이 되었다.
삼막사나 불성사, 염불암 및 망해암 등 안양의 대표적인 사찰들은 대부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설립된 고찰(古刹)들이다. 또한 AD 900년경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 창건되어 '안양(安養)'이라는 지명의 기원으로 알고 있는 안양사와 지금은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지로 변모했지만 평촌들을 불교적 용어인 '다라니(多羅尼)들'이라고 부른 것 등으로 볼 때, 안양은 과거 불교가 융성했던 전형적인 농경사회였고, 그래서 지명에도 그와 같이 불교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농업을 주산업으로 영위하던 시절의 안양의 지역중심은 수리산의 가파른 동북면에 위치하여 다라니들과 같은 넓은 들을 배경으로 갖지 못했던 안양리가 아닌 호계리였다. 그래서 호계리에는 치소(治所)에 해당하는 면사무소가 있었고, 지식인들도 당연히 이곳을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당시 안양 일대의 교역을 위한 중심지는 구 군포사거리께에 섰던 군포장(軍浦場)이다.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열렸던 군포장의 개장시기는 대동법이 실시된 조선 후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고천과 당말, 금정, 호계리, 갈미 및 인덕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입지상의 강점과 과천공로와 시흥로의 교차지점이라는 교통상의 이점을 등에 업고 조선시대이래 지역의 교역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착실하게 해왔던 것이다.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에 모처럼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효도대왕으로 불렸던 정조임금이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제6차부터 과천공로 대신 시흥로를 이용한 일이었다. 정조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안양리에는 1794년 안양행궁(安養行宮)이 건립되었고, 안양천에는 그 이듬해 만안교가 가설되었다. 이어 1796년에는 정조임금이 행궁이 있는 안양리의 발전을 위하여 군포장을 안양리로 옮길 것을 명하자 이 조치에 항의하여 군포장시의 40여 호에 달하는 백성들이 화성으로 내려가는 좌의정 최 제공을 붙잡고 생계가 막힐 자신들의 처지를 엎드려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정조임금께서는 안양리와 군포장에 개장일시를 달리하는 별도의 장시를 각각 개설하여 양쪽을 모두 편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금년에 발간된 '군포시사(軍浦市史)' 군포장시편에 실려있다.
정조대왕이 화산능행을 위하여 만안교를 가설하고, 시흥로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안양리에는 여러 가지 발전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혹자는 이때부터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리가 과천을 앞질러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양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발전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리가 과천을 앞질러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과천과의 인구와 물산의 비교 및 시흥로와 과천공로의 이용빈도 등에 관한 자료의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시흥로의 개설이 안양리의 근대화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는 논거에 대하여도 근대화의 기준이 되는 정치·경제·사회상의 여러 요소들의 다양한 변화상을 추적해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근대화에 관한 한 우리 나라와 같은 제3세계 국가의 경우 대부분 국내적 근대화 요인, 즉 자체적인 산업화가 선행되지 않는 상황하에서 자본주의의 침투(the penetration of capitalism)라고 하는 국제적 근대화요인(International modersization factor)으로 인하여 근대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특성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안양지역이 국제적 근대화요인에 의하여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안양지역의 근대화시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산업화의 진행을 분석하기 위하여는 왈라스(S. Wallas)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의 사회생태적 요소들, 즉 인구(population), 조직(organization), 경제(economy), 기술(technology) 및 상징(symbolism)과 같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추적함으로써 안양시의 산업화로 인한 도시성장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기준시점은 국제적 근대화요인이 내륙지방으로 침투하는 전형적인 형태가 도로 및 철도의 개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에 역사(驛舍)가 개설되는 1905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1905년 1월 1일에 개통된 경부선철도가 안양을 통과하고, 안양리에 안양역사가 개설된 일은 그때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했던 안양리 일대를 이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안양역사 개설 이전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안양 인구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조시대 당시의 호구조사기록과 큰 차이가 없는 약 3천 명 정도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지역의 정치·행정의 중심은 치소가 있던 호계리였고, 주산업도 그대로 미작위주의 농업이었으며, 행정구역도 정조시대와 다를 바 없는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그야말로 살기 좋은 농촌마을 이었다.
여기서 앞서 언급된 시흥로라는 교통수단이 생기면서 안양리가 발전하고 근대화되기 시작했다는 논거에 대한 반대논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안양리 발전의 전기가 된 시흥로는 없던 도로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이미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던 도로에 임금의 행차를 위해 폭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시흥로의 개설이 안양리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작이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안양장시를 안양행궁 옆에 개장하여 행궁 주변지역의 발전을 꾀하려 한 정조의 의도는 이후 안양장시에 관한 기록이나 물증이 별반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정조 사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양리의 인구변동에 관하여는 안양의 원로이신 장 배순(1921년 생) 옹이 증언하고 있는데, 18년 전에 작고한 모친 강 주희(1883년 생) 여사께서 1897년 군포 궁내동에서 안양행궁 옆으로 시집올 당시 안양리의 집을 다 합쳐도 열 채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하니 정조의 능행이 안양리의 산업과 인구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로 그림과 같이 일제가1895년과 1926년에 제작한 두 종류의 군사지도를 제시할 수 있는데, 철도가 들어서기 전과 후의 안양리와 이웃 과천 및 군포지역의 변화 상을 약 30년의 시차를 두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1895년 지도에는 과천공로는 두 줄로 선명하게 표시하고 있으나 시흥로의 표시는 미약한 것으로 봐서 19세기말까지는 여전히 과천공로가 시흥로에 비하여 비중이 높은 주도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1905년 안양역사의 개설로 안양리가 지역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이후의 사회생태적 요소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이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인구변화를 추적해보면 1912년에 3,462명을 기록했던 인구가 1925년 6,165명, 1935년 8,957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어 1940년 1만, 1948년 2만, 1960년 5만, 마침내 1972년에는 10만을 돌파하여 오늘날 인구 6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정조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하여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河西面)의 행정구역통합이 이루어져 서이면(西二面)이 탄생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호계동의 하서면사무소를 서이면사무소로 그대로 사용하다가 1917년에 이르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안양리로 서이면사무소가 이전하고 있다. 1941년에는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행정명칭을 변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안양리가 지역의 대표성을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어 1945년에는 안양면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던 시흥군청이 안양리로 이전하고 있고, 1949년의 안양읍 승격 후 마침내 1973년 서이면 사무소가 안양리로 이전한지 약 60년만에 시 승격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리(里)가 변해서 시(市)가 된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안양리로 유입된 인구는 주로 만안로를 따라 안양역에서 안양초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을 중심으로 주택과 상가를 형성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시장, 학교 및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조직을 필요로 하는데, 그 결과 1926년 안양공설시장이 현재의 구시장 자리에 들어섰고, 안양공립보통학교가 과천공립보통학교(1912), 군포공립보통학교(1926)에 이어 1927년에 개교하고 있다. 1930년에는 군포장교회(1925년 설립)의 양 동익 전도사에 의해 안양리에 안양교회(장로교)가 세워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안양리의 초기 도시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로 경제요소를 보면 미작위주의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고 있던 안양이 역사개설 이후 산업도시로 변모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농업의 형태도 1929년 일본인 농장주에 의해서 설립된 고뢰영농법인(高瀨榮農法人)을 주축으로 하여 양잠과 포도와 같은 과수를 위주로 하는 고부가가치 근교농업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중 산업체의 변화과정을 추적해보면 1932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현 대농단지와 석수동에 각각 조선직물주식회사와 조선견직주식회사라는 근대적 방직공장이 설립되면서 안양의 산업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 간행된 시흥군지인 '금천지(衿川誌)'에는 1949년 현재 안양지역 14개 제조업체의 종업원 수가 1,06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6.25 사변은 안양의 산업을 위축시켰지만 금성방직 등 노동집약적 산업체의 특성으로 종업원 수는 오히려 늘고 있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66년 32개 업체에서 71년 64개, 80년 374개, 91년 743개에 이어 98년에는 1,111개 업체에 31,509명에 이르는 종업원 수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넷째,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안양의 영농기술은 쌀 농사를 위한 전근대적 농경기술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나 양잠 및 과수농업을 위한 고부가가치 영농기술을 일본인 농장주들이 가지고 들어오면서 한층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산업기술에 있어서도 섬유나 제지 및 기계공업 기술이 안양의 발전을 선도하는 기반기술로 자리잡으면서 안양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안양이란 도시에서 느끼는 상징(symbolism)의 변화도 일어났다. 과거 안양이란 명칭과 다라니들이라는 지명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상징적 형상은 철도 개설 이후에 안양에 가서 마음만 바로 쓰면 의식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 즉 고용기회가 많은 도시라는 근대산업도시의 이미지로 변하면서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양시의 도시성장과정에서 보여지는 주요한 특성과 발전 요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농경사회에 머물렀던 19세기말까지만 하여도 안양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였다.
- 20세기초 철도개통 등 국제적 근대화요인의 영향으로 안양이 근대 도시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공업화라는 국내적 근대화요인의 영향으로 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 수도권 규제 등 공업입지 여건이 악화되면서 안양의 산업발전은 정체 국면을 맞았으며 평촌 신도시 개발을 계기로 탈공업화 및 주거 도시로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안양의 도시성장이 가능하였던 것은 안양이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 제대로 편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양시의 근대화 시점은 안양리가 교역과 산업의 요충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안양역사의 개설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를 계기로 농경시대의 중심지였던 호계리에서 교통상의 강점을 바탕으로 안양리가 산업사회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양의 근대화 시점에 대한 논의를 접고, 이미 탈근대화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안양이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도시정체성을 가진 특색 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지를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군포시사편찬위원회(2000), 「군포시사」.
시흥군(1950),「금천지」.
시흥군(1989),「시흥군지」.
박희정(2000), “안양시의 도시성장과 근대화”, 안양학연구소 창립세미나 발표논문.
안양시지편찬위원회(1992), 「안양시지」.
원행정례(1790).
이 승언(1996), 「안양시지명유래집」, 새안양회.
이 승언(1985), “안양의 유래”, 「안양문화」 제4권, 안양문화원.
2003-06-07 13: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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