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1932년 서이면 안양리, 현 대농단지 약 1만평의 부지 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 설립되었다.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8.15 광복 직전, 4개에 불과하던 제조업체 수는 6.25사변 직전까지 약 14개 업체에 종업원 수 1,068명에 이를 정도로 안양은 순탄한 도시화 및 산업화의 길을 걸어 왔다.
여기서 초기 안양의 산업화에 기여한 업종을 조사해 보면 양질의 공업용수가 있어야 가능한 산업 즉, 방직공업과 제지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0년대를 전쟁에서 입은 피해복구에 보내고, 61년에 조사해 보니 안양읍 관내의 공장 수는 6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종업원 수는 3,687명으로 늘어나 기업체의 규모는 대형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중 안양의 대표적인 공장은 금성방직이었다. 전성기에는 종업원 수가 약 3,000명에 달했고, 월급날은 안양경제가 봉급특수를 누릴 정도로 지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기업이었다.
이와 같이 막강한 영향을 지역사회에 미치던 금성방직은 1967년 대한농산(이하 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보다 기업환경이 좋은 청주공단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부지는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주택단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민은행 안양지점 뒤편을 대농단지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연에서 비롯되었다. 대농이 떠나면서 안양의 섬유공업도 말라버린 안양천과 더불어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광복 후 적산기업의 인수와 산업화과정이 안양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안양 토착자본의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전쟁피해로 침체를 면치 못했던 안양의 산업은 5.16 이후 공업화정책에 편승하여 1971년에는 제조업체 수 64개를 기록한 후 ‘75년 143개, 이어 ‘80년 374개, ‘91년 743개, 그리고 ‘98년 말 제조업체 수 1,111개에 31,509명의 종업원을 기록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여 왔으나 이후 감소세로 돌아섰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안양의 산업성장의 배경에는 안양의 편리한 교통,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 및 최상의 공업용수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서울의 공장입지 억제정책으로 갈 곳을 잃은 업체들이 서울에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입지조건이 좋은 안양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또다시 환경이 변하여 안양시는 수도권 정비지역으로 제조업체의 신설이 어려워지고, 공장지역도 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규모도 대·중기업이 감소하고 소기업이 전체의 89%를 차지할 정도로 축소되고 있다. 또한 시대추세에 따라 주도업종도 섬유·화학·기계금속분야에서 점차 전기·전자·정보통신업종과 같은 첨단 산업분야로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지금까지 안양의 산업화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 인접한 탓으로 서울에서 넘쳐나는 산업과 퇴출되는 업종이 곧바로 안양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안양의 산업화과정이 안양이 아닌 외지 인물이나 자본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안양의 산업구조 개편방향이 굴뚝산업은 퇴조하고, 첨단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과 연계되어 발전해 온 것이 안양의 산업성장사라면 현재 서울에서 넘쳐나거나 경쟁력을 잃은 업종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기·전자·정보통신업종으로 재편되는 우리 안양의 기업형태가 소기업위주라면 집적이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을 만치의 많은 기업이 몰려들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기업들의 편의시설을 만드는 데 소홀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소기업의 특징이라는 것이 인적자원을 주자원으로 하는 특징이 있는 만치 시설이나 용지 및 자본에 우선하여 인간중심의 산업환경이나 초고속통신망과 같은 정보망의 확충 및 기업하기 편리한 금융 시스템 등을 구축하는 데 훨씬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산업화가 외부환경에 의해서 주어진 산업화였다면 21세기의 산업화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인 산업화이길 바라면서 새 천년, 새로운 산업으로 거듭난 안양의 모습을 상상하여 본다.
♧ 금성방직 :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 성곤 씨에 의해서 1948년 10월 조선직물주식회사 바로 옆에 설립되었다. 금천지(1950)에 의하면 경영난에 처한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되는데, 당시 안양사람들이 김 성곤 씨를 찾아가 종업원의 고용을 승계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6.25사변으로 조선직물주식회사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당해 불타버렸으나 수복 후에 UNKRA(유엔 한국부흥위원단)의 자금으로 복구에 성공한 뒤 굉장한 호황을 누렸다. 후에 시멘트공장 건설로 자금난에 처하자 대한농산에 팔렸다.
안양내일신문 314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8.15 광복 직전, 4개에 불과하던 제조업체 수는 6.25사변 직전까지 약 14개 업체에 종업원 수 1,068명에 이를 정도로 안양은 순탄한 도시화 및 산업화의 길을 걸어 왔다.
여기서 초기 안양의 산업화에 기여한 업종을 조사해 보면 양질의 공업용수가 있어야 가능한 산업 즉, 방직공업과 제지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0년대를 전쟁에서 입은 피해복구에 보내고, 61년에 조사해 보니 안양읍 관내의 공장 수는 6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종업원 수는 3,687명으로 늘어나 기업체의 규모는 대형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중 안양의 대표적인 공장은 금성방직이었다. 전성기에는 종업원 수가 약 3,000명에 달했고, 월급날은 안양경제가 봉급특수를 누릴 정도로 지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기업이었다.
이와 같이 막강한 영향을 지역사회에 미치던 금성방직은 1967년 대한농산(이하 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보다 기업환경이 좋은 청주공단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부지는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주택단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민은행 안양지점 뒤편을 대농단지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연에서 비롯되었다. 대농이 떠나면서 안양의 섬유공업도 말라버린 안양천과 더불어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광복 후 적산기업의 인수와 산업화과정이 안양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안양 토착자본의 형성에 있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전쟁피해로 침체를 면치 못했던 안양의 산업은 5.16 이후 공업화정책에 편승하여 1971년에는 제조업체 수 64개를 기록한 후 ‘75년 143개, 이어 ‘80년 374개, ‘91년 743개, 그리고 ‘98년 말 제조업체 수 1,111개에 31,509명의 종업원을 기록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여 왔으나 이후 감소세로 돌아섰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안양의 산업성장의 배경에는 안양의 편리한 교통,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 및 최상의 공업용수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서울의 공장입지 억제정책으로 갈 곳을 잃은 업체들이 서울에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입지조건이 좋은 안양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또다시 환경이 변하여 안양시는 수도권 정비지역으로 제조업체의 신설이 어려워지고, 공장지역도 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규모도 대·중기업이 감소하고 소기업이 전체의 89%를 차지할 정도로 축소되고 있다. 또한 시대추세에 따라 주도업종도 섬유·화학·기계금속분야에서 점차 전기·전자·정보통신업종과 같은 첨단 산업분야로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지금까지 안양의 산업화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 인접한 탓으로 서울에서 넘쳐나는 산업과 퇴출되는 업종이 곧바로 안양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안양의 산업화과정이 안양이 아닌 외지 인물이나 자본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안양의 산업구조 개편방향이 굴뚝산업은 퇴조하고, 첨단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과 연계되어 발전해 온 것이 안양의 산업성장사라면 현재 서울에서 넘쳐나거나 경쟁력을 잃은 업종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기·전자·정보통신업종으로 재편되는 우리 안양의 기업형태가 소기업위주라면 집적이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을 만치의 많은 기업이 몰려들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기업들의 편의시설을 만드는 데 소홀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소기업의 특징이라는 것이 인적자원을 주자원으로 하는 특징이 있는 만치 시설이나 용지 및 자본에 우선하여 인간중심의 산업환경이나 초고속통신망과 같은 정보망의 확충 및 기업하기 편리한 금융 시스템 등을 구축하는 데 훨씬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산업화가 외부환경에 의해서 주어진 산업화였다면 21세기의 산업화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인 산업화이길 바라면서 새 천년, 새로운 산업으로 거듭난 안양의 모습을 상상하여 본다.
♧ 금성방직 :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 성곤 씨에 의해서 1948년 10월 조선직물주식회사 바로 옆에 설립되었다. 금천지(1950)에 의하면 경영난에 처한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되는데, 당시 안양사람들이 김 성곤 씨를 찾아가 종업원의 고용을 승계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6.25사변으로 조선직물주식회사와 같이 미군의 폭격을 당해 불타버렸으나 수복 후에 UNKRA(유엔 한국부흥위원단)의 자금으로 복구에 성공한 뒤 굉장한 호황을 누렸다. 후에 시멘트공장 건설로 자금난에 처하자 대한농산에 팔렸다.
안양내일신문 314
2003-06-07 13: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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