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인덕원에서 경수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도권 순환도로에서 호계동 신 군포사거리 사이에서 구릉지 같이 약간 솟은 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이 곳이 바로 '덕고개(德峴)'이다.
덕고개 주민과 갈미, 인덕원 주민들이 과거 구 군포사거리 근처에 있던 군포장(軍浦場)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덕이 온다고 해서 덕고개라고 칭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덕고개는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당시 현재의 모습으로 낮추어져, 지금은 자동차로 주행할 때 고개의 흔적 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덕고개에서 신 군포사거리를 향하여 진행하다가 오른편으로 약 200미터 못 미친 지점이 바로 과거 안양지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되었던 '덕고개교회'가 세워졌던 곳이고, 현재의 지명으로는 안양시 호계1동에 해당한다.
덕고개에 교회가 세워진 시점은 1895년으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분 선교사가 제물포에 기착한지 10년이 지난 때이고, 과거 시흥군 강역에서는 현 시흥시 무지동에 세워졌던 '무지내 교회'(1895년)와 더불어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다.
이 덕고개에 안양지역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 곳이 과천공로변이라 교통이 편리했고, 또 인덕원, 고천, 당말, 금정 및 호계동의 지리적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5일장인 군포장이 서서 물자와 인마의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도 빨랐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덕고개교회는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감리교회였다. 1900년 4월 4일자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의하면 '과천편지'라는 제목으로 덕고개 사람 허 대진이 1895년 세례를 받았다고 하고, 천국복락을 위하여 소작하던 남의 논 수십 석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 이 때가 바로 안양에 개신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점이 되는 것이다.
이어 「조선감리회연회록」(1900.5, 1901.5)에 의하면 덕고개교회의 교인들이 열심이어서 60이 넘은 사람도 열성으로 예수를 믿어 술, 담배를 끊었다던가 혹은 70이 넘은 노인이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01년 당시의 덕고개교회의 신도 수는 입교인 23명에 학습인 43명을 합쳐 도합 66명이었다.
또한 당시 덕고개교회는 예배당이 없어서 개인집에서 예배를 보곤 했는데, 마땅한 공간이 없어 추운 겨울에도 반밖에 실내에서 예배를 볼 수 없었던 사실과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이웃 주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온갖 어려움 속에 교회를 건축하고자 애쓰고 있었다는 등의 기록도 보인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가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는데, 온갖 어려움 속에 마침내 1901년 교회건축을 완료하자 과천군수가 즉시 헐 것을 지시하고 교인 둘을 잡아갔다가 관찰사의 지시로 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 안양지역에 뿌리를 내린 덕고개교회는 이후 경수국도를 따라 기독교가 전파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1897년에는 의왕시 초평동(당시 수원부 초평리)에 초평교회가 들어선 데 이어 경수국도를 거슬러 올라와 현재의 의왕시 학현에 학현교회(1904)를 세우고, 1910년에는 장로교회인 부림리교회(현 동성교회)가 인덕원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간선도로를 타고 기독교가 전파되는 특성이 안양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시흥시 무지내교회(1895)에서 안양시 박달동 범고개교회(1897)로 이어진 후 다시 안양시 석수1동의 삼막골교회(1901)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감리회연회록」에 의하면 1906년에는 덕고개교회가 새로운 교당을 신축한 기록이 보이고, 이어 1907년에는 덕고개교회에 여학교가 있어서 여성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려가던 덕고개교회는 1908년 이후에는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져버려 구구한 추측을 자아내게 했는데, 그 사연은 1995년 리 진호 장로가 쓴 '안양지방 감리교회백년사'에 의해서 밝혀졌다.
리 진호 장로가 삼성교회 당회록을 통하여 확인한 내용에 의하면 삼성교회의 창립자들이 1907년 덕고개교회에 다니던 중, 1909년 장로교 목사 피터스(A. Peters)가 내교하여 문답을 통하여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덕고개교회가 1909년부터 장로교로 넘어갔기 때문에 감리교측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어 당회록은 1909년 이후에는 삼성리에 교회를 조그마하게 신축한 후 독자적인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가 1915년에 교회를 크게 증축하자 덕고개교회는 이전해서 완전히 삼성교회와 합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리 진호 장로에 의해서 삼성교회의 과거사가 밝혀지자 삼성교회는 후에 당회를 통하여 창립연도를 1895년으로 수정했다고 하는 바, 안양지역에 최초로 세워졌던 덕고개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삼성교회는 그 후 1925년 지교회로 군포장교회를 설립하였고, 군포장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양 동익 전도사에 의해서 1930년 서이면 안양리에 개척된 교회가 바로 오늘날 안양제일교회와 안양중앙교회의 모체인 안양교회(장로교)라는 사실을 통해 19세기 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안양지역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덕고개교회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리 진호, 안양지방감리교백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안양지방회, 1995.
이 승언, 안양시 지명유래집, 새안양회, 1995.
안양시, 안양의 구비문학, 1998.
덕고개 주민과 갈미, 인덕원 주민들이 과거 구 군포사거리 근처에 있던 군포장(軍浦場)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덕이 온다고 해서 덕고개라고 칭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덕고개는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당시 현재의 모습으로 낮추어져, 지금은 자동차로 주행할 때 고개의 흔적 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덕고개에서 신 군포사거리를 향하여 진행하다가 오른편으로 약 200미터 못 미친 지점이 바로 과거 안양지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되었던 '덕고개교회'가 세워졌던 곳이고, 현재의 지명으로는 안양시 호계1동에 해당한다.
덕고개에 교회가 세워진 시점은 1895년으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분 선교사가 제물포에 기착한지 10년이 지난 때이고, 과거 시흥군 강역에서는 현 시흥시 무지동에 세워졌던 '무지내 교회'(1895년)와 더불어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다.
이 덕고개에 안양지역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 곳이 과천공로변이라 교통이 편리했고, 또 인덕원, 고천, 당말, 금정 및 호계동의 지리적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5일장인 군포장이 서서 물자와 인마의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도 빨랐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덕고개교회는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감리교회였다. 1900년 4월 4일자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의하면 '과천편지'라는 제목으로 덕고개 사람 허 대진이 1895년 세례를 받았다고 하고, 천국복락을 위하여 소작하던 남의 논 수십 석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 이 때가 바로 안양에 개신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점이 되는 것이다.
이어 「조선감리회연회록」(1900.5, 1901.5)에 의하면 덕고개교회의 교인들이 열심이어서 60이 넘은 사람도 열성으로 예수를 믿어 술, 담배를 끊었다던가 혹은 70이 넘은 노인이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01년 당시의 덕고개교회의 신도 수는 입교인 23명에 학습인 43명을 합쳐 도합 66명이었다.
또한 당시 덕고개교회는 예배당이 없어서 개인집에서 예배를 보곤 했는데, 마땅한 공간이 없어 추운 겨울에도 반밖에 실내에서 예배를 볼 수 없었던 사실과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이웃 주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온갖 어려움 속에 교회를 건축하고자 애쓰고 있었다는 등의 기록도 보인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가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는데, 온갖 어려움 속에 마침내 1901년 교회건축을 완료하자 과천군수가 즉시 헐 것을 지시하고 교인 둘을 잡아갔다가 관찰사의 지시로 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 안양지역에 뿌리를 내린 덕고개교회는 이후 경수국도를 따라 기독교가 전파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1897년에는 의왕시 초평동(당시 수원부 초평리)에 초평교회가 들어선 데 이어 경수국도를 거슬러 올라와 현재의 의왕시 학현에 학현교회(1904)를 세우고, 1910년에는 장로교회인 부림리교회(현 동성교회)가 인덕원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간선도로를 타고 기독교가 전파되는 특성이 안양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시흥시 무지내교회(1895)에서 안양시 박달동 범고개교회(1897)로 이어진 후 다시 안양시 석수1동의 삼막골교회(1901)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감리회연회록」에 의하면 1906년에는 덕고개교회가 새로운 교당을 신축한 기록이 보이고, 이어 1907년에는 덕고개교회에 여학교가 있어서 여성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려가던 덕고개교회는 1908년 이후에는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져버려 구구한 추측을 자아내게 했는데, 그 사연은 1995년 리 진호 장로가 쓴 '안양지방 감리교회백년사'에 의해서 밝혀졌다.
리 진호 장로가 삼성교회 당회록을 통하여 확인한 내용에 의하면 삼성교회의 창립자들이 1907년 덕고개교회에 다니던 중, 1909년 장로교 목사 피터스(A. Peters)가 내교하여 문답을 통하여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덕고개교회가 1909년부터 장로교로 넘어갔기 때문에 감리교측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어 당회록은 1909년 이후에는 삼성리에 교회를 조그마하게 신축한 후 독자적인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가 1915년에 교회를 크게 증축하자 덕고개교회는 이전해서 완전히 삼성교회와 합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리 진호 장로에 의해서 삼성교회의 과거사가 밝혀지자 삼성교회는 후에 당회를 통하여 창립연도를 1895년으로 수정했다고 하는 바, 안양지역에 최초로 세워졌던 덕고개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삼성교회는 그 후 1925년 지교회로 군포장교회를 설립하였고, 군포장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양 동익 전도사에 의해서 1930년 서이면 안양리에 개척된 교회가 바로 오늘날 안양제일교회와 안양중앙교회의 모체인 안양교회(장로교)라는 사실을 통해 19세기 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안양지역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덕고개교회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리 진호, 안양지방감리교백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안양지방회, 1995.
이 승언, 안양시 지명유래집, 새안양회, 1995.
안양시, 안양의 구비문학, 1998.
2003-06-07 13: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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