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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정조의 화산능행(花山陵幸)과 안양(Ⅰ)

안양똑딱이 2016. 6. 11. 08:00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제 22 대 정조(正祖·1752-1800, 재위기간·1777-1800)임금은 훌륭한 학자요, 뛰어난 개혁정치가이면서도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

학자로서 정조임금의 진면목은 최근 정조시대를 연구하는 30, 40대 소장학자들의 모임인 '문헌과 해석'을 통해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정조임금이 친히 지은 시문과 어록으로 구성된 홍재전서(弘齋全書)는 임금의 문집으로는 역사상 비교할 바가 없는 100책, 18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며, 또한 194종의 책을 정조 자신의 주도하에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편찬하고 있다.

정조대에 편찬된 문헌목록집인 군서표기(群書標記)에 의하면 활자본과 목판본이 83종 644책, 필사본이 112종 3,460책이어서 도합 194종 4,004권에 이르는 문헌이 편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 이는 황제의 재위기간 중 2, 3백 권의 책을 내면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던 중국과 비교해도 엄청난 결과물이다.

개혁정치가로서의 정조는 영조 말년이래 집권해오면서 부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벽파의 끈질긴 저항을 자신을 옹립한 시파의 도움을 얻어 분쇄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고, 이후 당파정치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

숙종이래 실각한 남인이나 서북인과 서자를 등용하였으며 비록 그의 죽음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서얼차별제도의 타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주자학의 공리공론적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을 발전시켜 조선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열었으며, 행형제도나 세제의 개혁 등 행정혁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600여 종 이상의 제도개혁을 한 분이 바로 정조대왕이다.

정조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는 효행은 비운에 간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이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을 겪은 정조의 슬픔과 효심은 나이가 들어 묘소를 참배할 적마다 엎드려서 봉분의 잔디를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때론 슬픔이 지나쳐 혼절하기 조차하여 신하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재실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효성을 가진 정조는 즉위 초부터 매년 한 두 차례씩 사도세자가 묻힌 양주 배봉산 영우원(永祐園, 현 구리시)을 참배하고, 경내를 두루 살피곤 했다.

그러나 경내의 지세가 얕고 형국이 협소한 것을 돌아가신 부친에 대하여 민망스럽게 생각하여 길지로 묘소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전국의 명당을 찾던 중, 마침내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결정하고, 이장하여 원호(園號)를 현륭(顯隆)이라 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정조 13년(1789년)이다.

이후 정조의 화산능행은 춘행(春幸)과 추행(秋幸)으로 나뉘어져 이장 이듬해(1790)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2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보통 춘행은 사도세자의 탄신일이 있는 1월 21일을 전후하여 행해졌는데, 농번기를 피하여 농민의 폐해를 최소화하려는 정조의 배려 때문이기도 하였다. 추행은 8월 삭망사이에 거행되었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춘행을 원칙으로 하였다.

정조의 능행로는 제 1 차(1790)부터 제 5 차(1794)까지는 노량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행궁에서 1박을 한 후, 인덕원, 호계동을 경유하여 고천의 사근창주필소(필자주 : 현 의왕시 고천동 사무소 자리로 임금이 쉬어간 곳은 주필소라 하고 숙박을 한 곳은 행궁이라 부름)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을 통과하여 현륭원에 이르는 노정을 택했다.

그러나 이상의 노정이 다리가 많고, 남태령과 같은 험준한 고개가 있어 길을 닦고 쓰는 백성들의 고초가 심한 것을 정조가 근심하여 민폐를 줄일 방도를 연구할 것을 지시하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노량진에서 시흥을 경유하여 안양동과 호계동을 거쳐 고천으로 넘어가는 금천로정(衿川路程)이 길이 넓고 평탄하여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자 정조가 윤허하여 도로의 정비에 착수하여 당년(1794)에 공사를 끝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능행을 했던 8차(1797)의 추행에서 김포 쪽을 택해서 간 것을 빼고는 6차례에 걸쳐서 금천로를 이용했다. 금천로정을 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부친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 김 상로의 형 김 약로의 무덤이 과천시 찬우물에 있는 관계로 이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 개척한 것이 바로 금천로정이라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

이리하여 금천현의 치소에는 임금의 숙박을 위하여 행궁(行宮)이 설치되었고, 안양에는 쉬어갈 것에 대비하여 안양주필소가 마련되었으며 물살이 센 안양천(현 삼성천)에는 만안교(萬安橋)가 가설되었다.

이듬해에는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시흥(始興)으로 변경하였으며 이후부터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금천로를 시흥로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6차례에 걸쳐서 정조는 시흥로를 이용하여 화산능행을 행하였고, 이는 이후의 안양지역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바, 여기에 대하여서는 '만안교와 안양행궁'에 이어 '정조의 능행이 안양지역에 미친 영향' 등 계속하여 게재하고자 한다.

2003-06-07 13:0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