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이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6차(1795)부터 과천로에서 시흥로로 변경하면서 안양에는 안양행궁(安養行宮)과 더불어 만안교(萬安橋)가 가설되었다.
시흥에서 안양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가던 능행길은 후에 국도 1 호선이 되었고, 그 중에서 만안교에서 시작하여 안양역전을 경유하여 구 경찰서 자리에서 끝나는 안양노정은 만안로(萬安路)라 이름지어져 지금도 그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 삼성천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목교로는 임금이 행차하는 어가의 행렬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연유로 해서 당시 금천현감 서 유방에 의해서 정조 19년(1795) 9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보게 된 것이 바로 만안교이다.
만안교가 이렇게 빨리 완공을 보게된 것은 부근의 하천에서 교량 건축용 좋은 석재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만안교가 완공된 것을 크게 기뻐한 정조는 감독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교량을 건설한 편의가 만백성에게 미쳐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이 튼튼한 다리를 통하여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너게 된 것을 기린다는 뜻에서 만안교란 다리의 이름도 직접 지었다는 내용이 만안교비(萬安橋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가 가설된 이듬해부터 정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다섯 번이 아닌 도합 네 번 이 다리를 통과하여 화산(花山)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1795년에는 시흥로를 이용했지만 만안교가 가설되기 전이었으니 빼고, 1797년 8월과 1789년 8월의 추행은 각각 김포에서 안산행궁에 이르는 노정과 성남의 헌인릉을 참배하고 과천행궁에서 숙박한 노정이었다.
따라서 1796년, 1797년, 1798년 및 1800년의 춘행에서 만안교를 이용했기 때문에 도합 네 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안교는 현재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의 교량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아치형 석교이다. 31.2미터의 길이와 8미터에 이르는 폭을 가진 만안교는 7개의 아치형 갑문을 통하여 물길을 안내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석조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하천 바닥에는 두께가 두 뼘(30-40센티)에 달하고, 가로/새로 평균 70-80센티에 이르는 박석을 남북으로 30.8미터, 동서로는 31미터, 총 289평의 면적에다가 깔아 놓고 있다.
이는 홍수 때 물살에 바닥이 패여 기둥이 뜸으로써 교량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참고할 만한 교량축조기술로 생각된다.
원래 만안교는 만안로에서 안양유원지로 올라가는 교차로에서 삼성산 쪽으로 약 2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1980년 국도확장책의 일환으로 지금은 북쪽으로 약 200미터 올라간 삼막천으로 옮겨져 있다.
영·정조 시대의 지도에는 과천현과 시흥현의 경계를 삼성천(필자 주: 당시는 안양천이라 부름)으로 표시하고 있고, 고종시대의 규장각지도에서도 만안교가 가설된 삼성천을 경계로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고산자 김 정호가 만든 19세기 중반의 대동여지도 등에만 현재의 안양 만안지구가 시흥현에 표시된 것으로 나오는 바, 이 시기의 행정구역 변천에 대한 후속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1950년에 간행된 시흥군지(始興郡誌)인 금천지(衿川誌)의 만안교 항목에서 정조를 아버지의 묘소를 찾느라고 정치할 겨를이 없었던 임금으로 묘사하고, 경수간의 관민들은 정조의 능행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틈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조그마한 한촌에 불과했던 당시의 촌민들의 입장에서 약 6,100여 명에 이르는 임금 행차의 수발이 고생스러웠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하간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만안교를 바라보며, 있던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라도 해야 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흥에서 안양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가던 능행길은 후에 국도 1 호선이 되었고, 그 중에서 만안교에서 시작하여 안양역전을 경유하여 구 경찰서 자리에서 끝나는 안양노정은 만안로(萬安路)라 이름지어져 지금도 그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 삼성천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목교로는 임금이 행차하는 어가의 행렬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연유로 해서 당시 금천현감 서 유방에 의해서 정조 19년(1795) 9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보게 된 것이 바로 만안교이다.
만안교가 이렇게 빨리 완공을 보게된 것은 부근의 하천에서 교량 건축용 좋은 석재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만안교가 완공된 것을 크게 기뻐한 정조는 감독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교량을 건설한 편의가 만백성에게 미쳐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이 튼튼한 다리를 통하여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너게 된 것을 기린다는 뜻에서 만안교란 다리의 이름도 직접 지었다는 내용이 만안교비(萬安橋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가 가설된 이듬해부터 정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다섯 번이 아닌 도합 네 번 이 다리를 통과하여 화산(花山)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1795년에는 시흥로를 이용했지만 만안교가 가설되기 전이었으니 빼고, 1797년 8월과 1789년 8월의 추행은 각각 김포에서 안산행궁에 이르는 노정과 성남의 헌인릉을 참배하고 과천행궁에서 숙박한 노정이었다.
따라서 1796년, 1797년, 1798년 및 1800년의 춘행에서 만안교를 이용했기 때문에 도합 네 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안교는 현재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로 조선 후기의 교량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아치형 석교이다. 31.2미터의 길이와 8미터에 이르는 폭을 가진 만안교는 7개의 아치형 갑문을 통하여 물길을 안내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석조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하천 바닥에는 두께가 두 뼘(30-40센티)에 달하고, 가로/새로 평균 70-80센티에 이르는 박석을 남북으로 30.8미터, 동서로는 31미터, 총 289평의 면적에다가 깔아 놓고 있다.
이는 홍수 때 물살에 바닥이 패여 기둥이 뜸으로써 교량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참고할 만한 교량축조기술로 생각된다.
원래 만안교는 만안로에서 안양유원지로 올라가는 교차로에서 삼성산 쪽으로 약 2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1980년 국도확장책의 일환으로 지금은 북쪽으로 약 200미터 올라간 삼막천으로 옮겨져 있다.
영·정조 시대의 지도에는 과천현과 시흥현의 경계를 삼성천(필자 주: 당시는 안양천이라 부름)으로 표시하고 있고, 고종시대의 규장각지도에서도 만안교가 가설된 삼성천을 경계로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고산자 김 정호가 만든 19세기 중반의 대동여지도 등에만 현재의 안양 만안지구가 시흥현에 표시된 것으로 나오는 바, 이 시기의 행정구역 변천에 대한 후속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1950년에 간행된 시흥군지(始興郡誌)인 금천지(衿川誌)의 만안교 항목에서 정조를 아버지의 묘소를 찾느라고 정치할 겨를이 없었던 임금으로 묘사하고, 경수간의 관민들은 정조의 능행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틈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조그마한 한촌에 불과했던 당시의 촌민들의 입장에서 약 6,100여 명에 이르는 임금 행차의 수발이 고생스러웠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하간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만안교를 바라보며, 있던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라도 해야 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3-06-07 1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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