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674

[자료]안양에는 정겨운 동네 이름 있었다

남부동 시대동 중앙동 석수동 양지동 장내동 교하동 냉천동 소골안 주접동 덕천마을 골안 명학동 능골 병목안 창박골 담배촌 구룡마을 삼막골 벌터 신촌 범고개 붓골 박달리 ..등 과거 안양에는 졍겨운 이름으로 불리우던 고유 명칭이 있었다. 동네 이름은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안양 1.2.3.---9동, 석수1.2.3동 등 멋없이 숫자로 일렬을 세워 획일화 시켜버렸고 3동은 9동으로 분동이 되면서 위치 또한 뒤죽박죽이다. 물론 순수 우리말로 불리우던 동네 지명을 일제강점기 당시 한자로 풀어내면서 그 의미가 적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옛 지명은 나름의 뜻과 고유의 이름을 지닌 특별한 것이고 독특한 특색대로 풍기는 맛 또한 제각각으로 그 시절 불렀던 동네 이름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오물오물 되살아난다.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기사]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2015.10.07]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조선시대 영등포까지 거느린 거대도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땅 일부 서울 편입 김범수 기자 발행일 2015-10-07 제37면 광명·안산 등 독립으로 해체 위기도 현재 42만 산업도시 제2 중흥기 맞아 ‘서울의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 어느 지역이 먼저일까’. 서울을 오가는 경기도민은 한 번씩 의문이 생기는 지역이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다. 심지어 한자어 역시 시흥(始興)으로 같다. 이처럼 다른 지자체에서 같은 지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쪼개지고 축소된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에 있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경기도 시흥군은 오늘날의 서울 영..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경인일보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애민정신 다져진 능행 안양상권 '탄탄대로' 정조, 사도세자 6차 원행부터 시흥로 이용 조선시대 교육·과학·예술 '통신사 역할' 1930년대 섬유관련 공업지역 자리매김 행정구역·경계 변경 거듭 교통요충지로 ▲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돌로 만안교를 건립하면서 이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는 역대 누구보다도 궁궐 밖 행차가 많은 임금이었다. 이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

[기사]길, 그곳으로 가다·30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기사]길, 그곳으로 가다·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경인일보] 30. 제주로 >1< -국도 1번의 모태 조선후기 6대로(大路) 가운데 서울에서 제주까지 잇는 서부의 간선도로가 '제주로'이다. 이 길은 해남에서 바닷길을 통해 제주까지 닿았으므로 육지부의 종착점 지명을 따 '해남로'라고도 하고, 동래로의 별칭이 영남대로이듯 이 길은 '호남대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주로는 경기도에서 과천~수원~진위~평택 등을 경유하며, 영화역·장족역·동화역·청호역·가천역 등이 본 도로를 관리했다. 제주로는 문헌에 따라 통영로의 분기로로 취급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수원로와 더불어 1번 국도의 모태가 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도이다. 1번 국도는 일제시기에 신작로로 정비된 제주로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으나, 산업화 과정..

[자료]청계산 청계사와 조심태 장군

[자료]청계산 청계사와 조심태 장군 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 [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청계산 청계사의 조심태 장군 정조의 개혁 도운 최측근…사도세자 원찰 지정 주도 청계산은 한남정맥의 주산중의 하나이다. 안양, 의왕, 서울의 양재까지 아우르는 이 산은 경기중 남부 지역의 시민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청계산을 오르는 이들 대부분이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올라가서 이수봉을 지나 국사봉을 거쳐 양재동 옛골로 내려오는 산행을 한다. 약 3시간 반에서 4시간에 이르는 이 산행은 청계산 주요 봉우리를 거치면서 산행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가장 대중적인 이 산행로와 더불어 청계산 등산의 진미를 보여주는 곳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바로 청계사 등산로이다. 청계산에 청계사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기억-정진원]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기억]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이 나중에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구시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다가 사라져버렸다. 시장의 북쪽 끝부분에 있었던 소시장터를 지나서 안양천 다리(임곡교)를 건너면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을 ‘수푸르지’라고 하였다. 그것이 여느 동네 이름과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마을 이름이 한자로 ‘임곡’임을 알게 되었다. 한자 지명 임곡(林谷)에서 그 훈(訓)을 빌려 써서 수푸르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변화된 ..

[기억-정진원]왜 하우고개인가?

[기억]왜 하우고개인가?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하우고개’ 란 고개 이름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의왕시 청계동에서 성남시 판교(너더리) 쪽 뫼루니로, 부천시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하우고개이다.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서 아미리로 넘어가는 하오고개도 있다. 왜 하우고개라 하였을까? 넘기 어려운 고개를 힘겹게 오를 때 ‘하우 하우’ 가쁜 숨소리에서, 아니면 고개 마루에 올라앉아서 내쉬는 ‘하아― 하아―’ 소리에서, 또는 산적이나 귀신을 만난 두려움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외마디 소리에 따른 의성어가 지명으로 굳어졌나? 학고개(鶴峴)가 ‘학고개>학오개>하우고개’로 음운변화를 거쳐서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정설일 듯싶다. 여우가 출몰하는 여우고개[호현狐峴]를 좋게 ..

[기억-정진원]덕장골과 큰집골

[기억]덕장골과 큰집골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덕장골과 큰집골 [큰집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이 서너 채 집들로 된 작은 동네였는데, 동네 이름이 ‘덕장골’이었다. ‘덕짱꿀’이라 소리 나는 대로 불렀었다. 그곳에 큰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 동네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큰 ‘덕(德)’, 집 ‘장(莊)’하여 ‘덕장골’이 되었단다. ‘큰집골’이라 하면 더 좋았을 것을 딱딱한 한자식 이름이 되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야말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집골에 진짜로 ‘큰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포일동 큰집골, 덕장골로 밀고 들어왔다. 국어사전에..

[기억-정진원]‘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기억]‘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2010/11/05 안양광역신문]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천안역에서 출발해서 안양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통근(학)차’가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증기기관차가 머리였었고, 나중에는 디젤기관차가 되었으며, 지금은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된 전철의 시대이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육중한 증기기관차가 수증기 물방울 뿌리며 기적을 울리면서 안양역으로 들어왔다. 서울 학생들의 등교와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안양역 아침 통근차의 출발 시각은 오전 7시경이 아니었나 싶다. 통근차를 놓치게 되면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므로 통근차가 안양역에 들어올라치면 사람들이 허둥대면서 역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저녁때가 되면 두 번인가..

[기억-정진원]1960년대 인덕원 사거리 풍경

[기억]인덕원 사거리 [2010/08/28 안양광역신문]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인덕원 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