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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안양똑딱이 2016. 6. 13. 16:36

 

[기사]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 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경인일보

 
[길에서 뿌리를 찾다·15·끝]안양 시흥로(현 만안로)

애민정신 다져진 능행 안양상권 '탄탄대로'
정조, 사도세자 6차 원행부터 시흥로 이용 조선시대 교육·과학·예술 '통신사 역할'
1930년대 섬유관련 공업지역 자리매김 행정구역·경계 변경 거듭 교통요충지로

▲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돌로 만안교를 건립하면서 이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년 재위)는 역대 누구보다도 궁궐 밖 행차가 많은 임금이었다. 이 가운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진 현륭원(顯隆園) 참배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했다. 정조의 능행 거둥길(임금이 나들이 가는 길)은 초기에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안양의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1795년 6차 원행부터는 시흥과 안양의 석수동을 거쳐 구 군포사거리를 지나는 시흥로(현 만안로)를 이용했다.

정조의 시흥로 개설은 과천길에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있는 김약로의 무덤이 있어 노정을 바꿨다는 야사도 전해지나 근본적으로는 남태령이라는 높은 고개와 과천로에 비해 길이 편한 새로운 거둥길의 개설이었다.

# 정조의 정신이 깃든 시흥로

정조는 조선의 27대 왕 중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이 추구했던 시대적 사상, 배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국왕과 신하가 한 몸이 돼 정국을 쇄신하고 국가를 안정화하는 데 있어 일체적인 국정 체제를 갖췄다면, 정조는 탕평책과 같은 균등정책, 적극적인 애민사상의 백성관 등의 철학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 환어행렬도

이 같은 정조의 철학은 현 안양의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안양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됐으나 한자의 뜻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시흥로의 개설과 만안교 건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흥로는 단순한 원행길이 아닌 조선시대의 교육과 경제·과학·예술 등을 안양에 전파하는 통신사의 역할을 했고, 만안교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보호시설이다.

정조는 만안교 건립 당시 안양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걱정해 다리의 재료를 나무가 아닌 돌을 사용했다. 조선 후기만 해도 왕의 행차시에 이용되는 다리는 행차시에만 임의로 길을 닦고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다가 행렬이 지난 이후에 다시 철거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만안교를 건립하며 이 같은 관례를 과감히 철폐한 것이다. 이후 만안교는 1980년 국도 확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석수동 삼성천에서 만안천으로 옮겨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시흥로의 명칭도 만안로로 변경됐다.

만안로는 만안교에서 시작해 안양역을 경유하고 명학역에 이르는 총 5㎞ 구간의 국도다.

# 안양 발전의 가교 역할을 한 시흥로

조선 후기 당시 시흥현에 속하던 안양은 시흥로 개설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시흥로가 개설되면서 안양지역의 상업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새로운 신작로 개설에 따라 교통로가 대폭 확대되면서 보부상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때문에 그동안 별다른 상업중심지가 없던 안양지역에도 드디어 상업 중심지(현 안양동)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에서 안양면으로 개칭되기 이전까지 시흥로는 시흥과 과천의 행정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1871년 고종 즉위 8년에 만들어진 경기읍지 시흥현도에도 시흥로에 설치된 만안교가 과천의 경계(果川界)라고 기록돼 있다.

▲ 경기읍지 시흥현도

이후 시흥로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안양을 비롯 경기도의 발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경부철도와 국도 1호선이 인접해 있다 보니 상거래 활동이 타 지역보다 활발해지면서 안양지역에서 파급된 경제효과가 인근 도시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인 1930년에 들어서는 시흥로가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시흥로 일대에는 발달된 교통을 이용한 조선직물, 조선견직, 금성방직 등 섬유관련 기업들이 잇따라 입주해 지역경제를 이끄는 중심공업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흥로는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는다. 당시 행정기관인 안양읍은 대지의 활용도를 높이고 공용시설의 정비를 위해 시흥로를 중심으로 제2차, 3차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한다.

▲ 만안로 전경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마무리된 1970년대 이후부터 시흥로 일대는 서서히 섬유산업 중심지역에서 상업중심지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초에 접어들어 안양의 대표적인 중심상권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시흥로 일대는 행정구역 일부 변경과 법정·행정동 경계변경 등 변화를 거듭해 현재에 이르러서는 중심상권지역에서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의 명학역과 관악역을 잇는 교통요충지로 변화했다.

# 정조, 시흥로를 통해 애민정신을 실천하다

정조는 즉위 20년을 맞는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시흥로를 통해 제6차 원행을 떠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정조의 행차길에 동행한 사람은 1천807명이고 말이 796필이다. 또 행차의 전 과정에 동원된 사람은 5천661명, 말이 1천417필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행차는 정조 즉위 기간에 12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때마다 '화산 능행차' 행렬을 위해 지나는 길목마다 나무를 심고 다리를 놨으며 왕의 숙박을 위해 '행궁'을 지었다.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안양행궁과 만안교 역시 정조의 행차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들 건축물은 현재 안양을 대표하는 유·무형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정조는 시흥로 개설과 만안교 완공 후 안양 사람들의 민정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된다.

옛 문헌을 보면 정조는 능행차시 행렬이 지나는 지역민들 중 착실하고 위엄이 있는 자를 임시 군병으로 뽑아 횃불을 들고 서는 보폭등으로 고용했으며, 안양지역에서만 300명의 주민이 보폭등으로 기용돼 높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경기읍지 시흥현도

또한 정조는 1797년 제8차 원행을 다녀오다 안양행궁에 잠시 머물며 지방관으로부터 안양에 사는 백성들의 노역은 물론 지역 현안들을 보고받고 즉시 해결토록 했다.

이처럼 정조는 시흥로를 통해 철저한 민정 파악과 더불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상명하복의 통치력을 보이며 민생안정에 노력했다.

자료제공/안양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