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772

[20261017]과천초등학교 개교 역사 1900년으로 12년 앞당겨야 한다

과천초는 1900년 설립된 과천군공립소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동안 공식 개교 연도는 1912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지난 2025년 학교의 역사적 출발점과 공식 연혁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관련 사료를 토대로 한 객관적인 검증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관련 연구용역과 정비사업 예산이 2026년도 본예산에 반영됐고, 도교육청은 올해 4월부터 8월까지 국민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도내 설립 100년 이상 초등학교 83곳의 연혁을 조사했다. 관보와 신문 등 9개 유형의 사료를 교차 검증한 결과, 과천초를 비롯한 8개 학교에서 기존 연혁에 이전 설립 역사가 빠진 사실이 확인됐다. 학교 설립년도가 1912년으로 소개되어 왔던 과천초등학교의 출발점을 12년 앞선 1900년으로 수정해야..

[20261006]옛 문헌에 기록된 조선시대 금천현(衿川縣) 농사(農事)

조선시대 금천현의 농사(農事) 세종실록>>(1454) 지리지, 금천현>을 보면 금천의 토질에 대해 ‘그 토질이 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서로 반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2,762결(結)인데 그 중에 논이 2/5이다.’라고 하였다.결(結)은 곡식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결부법(結負法)의 시행에 따른 토지의 한 단위이다. 결부법에 따른 토지의 기본단위는 줌(파(把)) 뭇(속(束)) 짐(부(負 ; 卜)) 목(결(結))으로서 열 줌이 한 뭇, 열 뭇이 한 짐, 백 짐이 한 목 곧 일결(一結)이다. 결부법이 곡식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거름지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일결의 면적이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달랐다. 토지는 대략 6등급으로 나누어졌는데 조선조 후기의 경우 일..

[20261002]옛 문헌에 기록된 조선시대 금천현(衿川縣) 인구(人口)

1. 세종실록>>(1454) 지리지, 금천현>1)호(戶) : 327호2)구(口) : 937구 2. 여지도서>>(1757~1765) 금천현>(강희(康熙) 갑자(1684)년 장적(帳籍))1)원호(元戶) : 1,873호2)구(口) : 7,763구(남(男) : 3,322구, 여(女) : 4,441구) 3. 호구총수>>(1789) 금천현>1)원호 : 1,934호2)구 : 7,245구(남 : 3,360구, 여 : 3,885) (1)현내면(읍내리 박산리 안양리)원호 : 326호구 : 1,032구(남 : 502구, 여 : 530구) (2)동면(독산리 가리산리 문교리 난곡리 장내리 신림리 봉천리 상도리 성도화리 서원 리)원호 : 322호구 : 1,268구(남 : 580구, 여 : 688구) (3)남면(광화대리 광명리 노..

[20260927]성호 이익 1707년 冠嶽山藥水菴記(관악산약수암기)

2026.09.27./ #아카이브 #옛기록 #since1907 #기행문 #관악산 #이익 #관악산약수암기/冠嶽山藥水菴記(관악산약수암기)는 조선 후기 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1707년 관악산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으로, 산의 경치와 사찰, 암자, 폭포 등을 묘사한 글이다영주대(靈珠臺): 관악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묘사됨.자하동(紫霞洞): 동·서·남·북 네 곳이 있으며, 특히 동자하가 폭포와 못이 있어 가장 아름답다고 기록.의상봉(義上峯): 의상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언급.관악사·원각사: 산 중의 사찰들.영주대 정상: 세 방향으로 전망이 트이고, 절벽에 불상을 새겨놓았으며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단이 있었다고 기록.등불 구멍: 바위 끝에 구멍을 파서 등불을 두었는데, 도성 안에서..

[20260923]안양의 역사와 문화 자료집속 마애종 옛 기록 사진

2026.09.23/ #아카이브 #마애종 #문화유산 #기록 #자료 #옛사진 #안양의역사와 문화/1998년 2월20일 발행한 안양문화원 향토사료 제1집 "안양의역사와문화" 자료집에 수록된 마애종 기록사진,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경식교수팀 조사. 보호각을 씌우기 전의 모습이 담겨있다.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은 들어봤어도 '마애종(磨崖鐘)'이란 말은 처음 듣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는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유일하게 바위에 새긴 종(鐘)이 있는 데 그것이 '마애종(磨崖鐘)'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이다. 현재의 안양시 석수동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 자리 주변 일대는 고려시대 중초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때 안양사가 있었다. 두절의 폐사되는 과정은 기록으로 남은것..

[20260922]안양 관양동 송유관 기름유출사고 오마이뉴스 기사

지하철 4호선이 안양 인덕원 구간을 통과할 때 기름냄새와 악취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승객들의 민원이 2001년 12월부터 철도청 홈페이지에 제기하면서 표면화된 후 시작된 안양 관양동 기름유출사건을 취재했던 오마이뉴스 기사 [송유관과 도심숲이야기] [20230712]2002년 발생한 인덕원역 기름 유출사고 진실 규명 과정https://ngoanyang.or.kr/7957[20240824]매미의 우화과정 볼수 있는 귀인동 뚝방 숲길https://ngoanyang.or.kr/9404[20250801]안양 귀인동 잣나무숲 매미 우화(탈피) 흔적들https://ngoanyang.or.kr/104512004년도 안양권 10대 뉴스 선정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

[20260916]안양장(安養場)-시대동(市垈洞)-구시장(舊市場) 기록

안양장(安養場)은 1872년 조선시대 지방지도 과천현>편에 표기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장으로 1926년 1월28일 상설시장이 개시됐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깃불이 들어왔으며 1998년 재개발되기까지 지명은 시대동(市垈洞) 일명 구시장(舊市場)이라 불리웠다.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安養場)과 군포장(軍浦場)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군포장은 과천현 관내이며 안양장은 금천현 관내였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5일장이던 안양장에..

[20260914]안양본백화점 무료쇼핑버스 운행 리플렛(since1985)

2026.09.14/ #아카이브 #안양 #본백화점 #since1985/ 안양본백화점 무료쇼핑버스 운행 안내 리플렛(코스및 시간표).전국박물관 e뮤지엄에서 발견. 의왕시 향토사료 소장. 안양 본백화점은 백화점 주인인 남궁본씨의 이름을 따라 명명하여 안양시내 중심지인 삼원극장 사거리(현 안양CGV)에서 안양역 방향 좌측인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668-339에 1983년 11월 23일 개점한 안양에서 두번째 백화점이었다. 이곳은 용화사(일명 미륵당)란 절이 있던 자리로 본백화점은 지하2층 지상 6층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면적 8,456m2에 직원수 129명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컸을뿐 아니라 초현대식 시설과 영업방식을 채택하여 기존의 재래시장에 비하여 쾌적한 쇼핑공간을 제공하고 옥상에는 어린이놀이터등 문화공..

[20260907]조선시대 금천현(衿川縣) 특산물 '붕어와 참게'

경기 안양은 조선 후기 시흥현에 속해 있었다.시흥현은 본래는 금천현이었는데 정조 때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조선시대 금천현의 특산물은 안양천에서 나는 붕어와 참게였다. 붕어는 한자로는 즉어(?魚)로 썼다. 즉(?)이 붕어를 뜻하는 한자이다. 그리고 참게는 한자로는 해(蟹)로 썼다. 해(蟹)는 게를 뜻하는 한자이다. 그런데 영등포의 특산물인 참게는 기록에 따라서는 생자해(生雌蟹)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생자해는 산암케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게는 제철이면 참게 꽃게 할 것 없이 숫케보다는 암케가 더 맛있다. 그래서 특별히 산암케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요즈음 안양천의 물이 깨끗해지면서 안양천에서 다시 참게가 난다고 한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다. 이 지역의 특산물이었던 참게를 안양천변의 갈대와 함께 안양..

[20260907]조선시대 금천과 시흥현에서 나라에 바치던 토산물

조선시대 금천과 시흥현에서 나라에 바치던 토산물 세종실록>>을 보면 그 당시 금천현에서 나라에 바치던 토산물 지초(芝草)와 함께 금천현에서 나던 약재(藥材)로 백편두(白扁豆)가 등장한다. 백편두는 우리가 울타리에 심던 제비콩 중에서 흰 꽃이 피는 제비콩의 열매를 일컫는 한자말이다. 자주꽃이 피는 제비콩 열매의 한자말은 흑편두(黑扁豆)이다. 제비콩은 대체로 울타리에 심기 때문에 보통은 울콩이라고 부른다. 백편두만을 약재로 사용하는데 주로 설사 등 소화기계통의 약재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산림경제>>라는 책을 보면 한열병(寒熱病)을 앓는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 금천현은 시흥현으로 개명되는데 시흥현에서 나라에 바치던 토산물로 금은화(金銀花)의 꽃줄기가 있었다. 금은화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