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8 안양광역신문]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인덕원 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덕원 사거리는 대처였다. 우리 마을에 없는 것들, 볼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에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인덕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으나, 옛날 원이 근처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 인마 왕래의 요지라는 점 등을 볼 때 틀림없이 원이 있었을 것이다. 원이란 조선시대 숙박시설로서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에 있었다고 한다.
인덕원은 한양의 관문에 있었던 원으로서 수원 방면에서 온 사람들이 과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숙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한양 가는 사람이 과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인덕원부터 길 준비를 하고 눈치를 살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덕원 동편 청계산 자락에 원터라는 마을이 있다. 전에 원이 있었던 터라는 뜻의 지명일 것이다. 그곳은 판교(널다리)를 건너 하우고개를 넘어 인덕원 쪽으로 오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었을 것이다. 서울 부근 북동쪽에 퇴계원, 북서부에 홍제원, 남쪽 남산 아래 이태원 등지와 황해도의 사리원, 충청도의 조치원 등지는 모두 원과 관련 있는 지명들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어릴 적 인덕원은 사거리였다. 북동쪽 구석에 막걸리 집 한 곳, 남동쪽에 가게 하나,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주막 하나, 북서쪽으로 이발소를 하는 살림집 하나가 사거리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안양장, 또는 가끔 군포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이 인덕원 사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벌말(평촌) 쪽에 있었던 주막은 양쪽 여닫이 판문이 달려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서서 반 발짝쯤 내려서면 봉당이었고, 그 한쪽으로 긴 다리 목로가 있고, 목로 위 천정에는 남폿불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막걸리 몇 사발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청계 쪽으로 있었던 가게는 잡화상이었다. 시골 가게치고는 규모가 있는 가게여서 웬만한 물건들은 다 있었다. 각종 사탕이 둥근 유리병에 담겨서 맨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말린 오징어 한 묶음이 매달려 흔들거리고, 막소주 댓병 궤짝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담배는 상자째 방안에 놓고 팔았었다.
인덕원에서 동쪽길로 들어가면 지금은 판교, 성남, 분당, 경부고속도로로 나아갈 수 있지만, 당시는 덕장골, 논골, 상청계, 원터, 학현, 의일, 붓골, 능안 등지가 산골의 막다른 동네여서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인덕원-판교간 도로가 개통된 지 오래 되었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개통되어서 한직골 상공이 고가도로로 얼기설기 볼썽사납게 되었다. 지금 서울외곽순환도로 청계요금소 근처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서, 거기서 더 올라가면 하우고개였다.
초여름 산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나 늦여름 칠월비 겨울땔감 풀을 베러가는 나무꾼들이나 들어갔던 산고개였다. 남쪽으로는 벌말, 민백이, 갈뫼, 멀리 범계(호계동) 근처를 지나 군포로 나가는 길이 있어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서쪽으로는 부림말 쪽으로 외나무다리가 놓여져 있었으며, 부림말을 지나 가운뎃말, 말무데미, 뺏말, 구리고개, 운곡, 수푸르지 등을 거쳐 안양에 갈 수 있었다.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안양 동쪽의 한길(대로)이었다.
인덕원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길이 있기는 하였으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금은 그 네 방향으로 대단히 넓은 길들이 만들어지고, 지하로는 지하철 4호선이 뚫고 지나가 인덕원은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렇게 큰 사거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상전벽해이다. 지금 인덕원 사거리는 정녕 대처이다. 엄청나게 큰 사거리가 되었다. 땅속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달리고 있다. 그곳에 인덕원역이 만들어졌다. 인덕원역에 내려서 서울구치소, 농업진흥공사 방면 ②번 출구로 나가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내 고향 마을에 갈 수 있다.
진터 앞을 지나고, 성고개 산모롱이를 돌면 바로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벌모루이다. 벌모루 언덕배기에 서울구치소 정문이 있다. 그 윗동네가 내 고향 마을이다. 지금은 서울구치소 직원 아파트가 두 동 세워져 있다.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에 내릴 때면 나는 땅속에서 그 당시 인덕원 사거리 지상 달밤에 일어났었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는다. 그때 우리들은 집 떠난 강아지들처럼 길섶에 한 줄로 서서 사정거리를 경쟁하면서 깔깔대고 웃었었다. 거기가 바로 인덕원역 출구가 만들어진 그 푸서리였다.
지금 나는 그 길섶 아래를 정수리로 바치고 지하 인덕원역 의자에 잠시 앉아 타관행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정진원(72)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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