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52

[자료]안양역앞에 미륵 부처 있던 제13 당마소 이야기

[자료]안양 미륵은 어디로 갔나?안양 미륵의 기록은 문헌적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설에 의지하고 있다. 안양미륵당 이란 말은 정조가 아버지능이 있는 화성(수원)을 가기 위해 기획한 園幸乙卯整理儀軌에 궁에서 수원(화성)까지 거둥의 안전을 위해 척후소로 24 곳의 塘馬를 설치하는 중에 제13 당마소가 安養彌勒堂站 이란 말이 있고 口傳에는 정조가 안양을 지날 때 번번이 말이 발길을 떼지 못 하자 그 연유가 미륵부처에게 불공을 드리지 않는 탓이라 하여 불공을 드리니 비로소 말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미륵을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위치는 지금의 안양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전에는 언제 형성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여기가 미나리밭 이었..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기사]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2008/11/07 안양시민신문] 사라지는 전통문화 ‘안양의 산신제’ 문헌, 유래 등 기초자료도 사라져 일 년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마을의식인 마을제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마을제는 수목이나 비석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과 산신을 대상으로 하는 산신제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 있다. 도시개발이나 생활의 변화 등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마을제는 마을의 유대감과 친목을 도모하고, 마을의 어른들이 주민간의 갈등이나 민원을 조정하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다. 안양시의 경우 현재 4개 정도의 마을제만이 몇 몇 주민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이중 지난해부터 산신제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임곡, 매곡, 운곡마을(비산동 지역)’을 찾아 마..

안양권에서 가장 오래된 군포장 얘기

안양권에서 가장 오래된 군포장 얘기 [2007/08/13 군포시티뉴스]리포터 - 장병연 추억에나 남아 있음직한 오일장, 지금은 개발로 인해 수도권주변의 오일장이 성남의 모란 시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 군포에도 인근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나게 장을 벌렸던 유명한 이 있었다. 당시 군포장은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장날은 명절 다음으로 기다려지는 설렘이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자반고등어와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사탕, 그 사탕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줄무늬가 들어간 왕눈깔사탕이었..

안양은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효시

우리나라 영화 중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어떤 작품일까. 영화진흥위가 지난 1월 발행한 연구보고서 ‘한국영화산업 구조분석’에 따르면 ‘쉬리’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작품이라 했다. 하지만 ‘쉬리’가 우리나라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아니다. ‘쉬리 ’가 31억원의 제작비(마케팅비 포함)와 초특급흥행(전국관객 약 580만명)이라는 기록을 남긴데다 강제규 감독이 이 영화로 100억원이나 벌었으니 한국형 블록버스터 하면 팬들이 제일 먼저 ‘ 쉬리’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의 주장은 다르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였어요. 그 당시에 지금의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영화가 여러 편 있었는데 권영순 감독의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초대형작품이죠. 한양영화사가 3500 만원을 들여 만든..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전설]안양 망해암(望海庵)과 미륵불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

[자료]안양에서 출토된 금동佛像 이야기

[자료]안양에서 출토된 금동佛像 이야기 [2006/07/21 안양시홈페이지]百濟漢山光德(安養)寺址 채송화 스님에게 도서소개 도서명 : 百濟漢山光德(安養)寺址出土金銅阿彌陀如來坐像 저자 : 趙尙河 박사 (출판사 : 有韓社) 안양시립만안도서관 제75793호 (2006년 4월 20일 기증본) 귀한 책 한 권 소개하겠습니다.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도 찾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저자 조상하 박사님이 안양시립도서관에 기증한 책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첨부의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유원지) 소재 안양사지와 중초사지로 알려져 있던 古寺刹址에서 1973년10월20일 한 농부가 개 사육장을 짓기 위해 집 뒤 밭을 파던 중 지하 1m 지층에서 진흙덩어리를 발견하고는 돌인 줄 알고 집어던졌다..

[자료]박달동 군용지(軍用地) 사건(1)

[자료]박달동 군용지(軍用地) 사건(1) [06/23 안양시민신문]성결대학교 교수·안양학연구소 소장 박달동 군용지(軍用地) 사건(1) ‘새 시대 정의사회구현과 복지국가건설 및 국토통일 대성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여 오신 대통령 각하의 노고에 대하여 우리 농민 일동은 진심으로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중략-) 따라서 어느 때보다도 전 국민의 단합과 일사불란한 국력의 비축이 중요한 이때에 변방의 소사로 심려를 끼쳐드리게 됨은 「백성의 억울함은 임금의 아픔」이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쫓음이오니 저의 농민들의 하소연을 통촉하시와 진위옥석을 가려주시옵고 정의사회의 참뜻과 실상을 만천하에 밝혀 주시옵기 간망합니다’ 위 글은 1980년대 초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안양시 박달동 농지경작인 일..

[기억-정진원]의왕 덕장학교 이야기

[자료]덕장학교 이야기 [02/27 네이버블로그]귀천/귀향/귀인 덕장학교 이야기 http://blog.naver.com/jebiul7?Redirect=Log&logNo=70001533333 우리 모교 덕장초등학교 10회 동창생들은 대개 1945년생들이다. 해방둥이가 대부분이었다. 올해가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라니, 우리는 회갑의 나이, 이순(耳順)의 때가 된 것이다.해방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 잘 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하여튼 압제의 땅이 아니라 해방된 신세계에 나왔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모교가 1944년에 개교했다고 하니, 우리들의 삶은 모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나는 덕장골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덕장골에서 덕장초등학교 이름이 비롯되었다. 내 선친과 작고하신 숙..

[자료]안양에서 덕장골까지

[자료]안양에서 덕장골까지 [02/27 네이버블로그]귀천/귀향/귀인 도시가 농촌을 먹어버리는 모양을 표현하는 데 잠식(蠶食)이라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누에가 야금야금 뽕잎을 먹어가듯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도시화의 파도에 잠겨버렸다. 시골에서 유소년기를 자란 나로서는 도시라는 괴물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 같은 박탈감을 늘 가지고 있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어디 변화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지금 가보면 그야말로 알 수 없게 변화된 곳이 안양과 덕장골 사이이다. 안양은 하루에 몇 번씩 기차가 지나다니고, 플라타너스 가로수 사이로 차들이 왕래하던 지방의 소읍이었다. 삼막사 아래로 안양풀장이라는 유원지가 있었고, 근처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안양을 산자수명..

[기사]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기사]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01/20 안양시민신문]安養通學生一同 16.2.11 박찬응의 ‘이미지로 세상읽기’① 安養通學生一同 16.2.11 이 사진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지난 99년이었다. 이 사진 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숨어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해가 바뀌도록 특별한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게으른 탓이다. 지금까지 읽어낸 몇몇 정보를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진의 해석에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 아래 부분에 선명히 새겨진 ‘安養通學生一同 16.2.11’이다. 직역 하자면 ‘소화 16년 2월10일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중고생 29명이 안양역전에 모여 단체로 사진촬영을 하다’이다. 소화 16년이라면 서기 1941년이고 그해 12월7일 일본군은 진주만을 공격했다. 앞줄엔 8명이 의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