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6.25사변은 안양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기업가로서 순탄한 길을 가던 선생의 인생에 또 한번의 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시흥군의 민보단장(民保團長)겸 군촉탁(軍囑託)이었던 선생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호계리 본가 뒤꼍에 땅굴을 파고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땅굴생활로 얻은 더부룩한 수염을 구태여 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계속해서 기르게 되는데, 이 수염이 이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에 선생은 수염과 관련하여 “부산 피란시절 기자로 재직할 때나 혹은 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때도 수염 때문에 한결같이 남의 이해를 받은 바 있고, 또한 외형이 두드러져 나쁜 일을 하다가는 남의 눈에 잘 띄게 되므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근신하게 되어 후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