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56

[자료]안양권 도시의 변천과정(1)

해방이전의 안양지역의 인구현황을 살펴보면, 1914년 소위 府令 제111호에 의한 전국적인 府郡面廢合이 이루어질 무렵, 시흥군은 舊 安山郡과 舊 果川郡이 합해져서 위치와 면적ㆍ인구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그 후 1931년 4월 1일 시흥군의 군청소재지인 永登浦面이 永登浦邑으로 승격되고, 5년 후(1936)에는 永登浦邑 중의 핵심 부분인 永登浦里 등 4개 리와 북면에 속하였던 鷺梁津理 등 6개 리가 京城府에 편입되자, 시흥군의 위치는 전보다 훨씬 남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1941년에는 西二面이 安養面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부터 「안양」이란 지명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시흥군하면 으레 안양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8.15광복 직전 1942년의 시흥군 관할구역은 8면 71개 里가 되었다. 당시 시..

[지역]우리고을 명품점포를 소개합니다

안양권 명품점포들을 소개합니다 MBC 생방송 오늘 저녁 257회 (2015.11.24)에 소개된 안양 박달시장의 웰빙빵박사. 찐빵 하나에 5원 할때 부터 빵을 만들었다는 37년 베테랑 솜씨의 장인이 찐빵과 도넛, 꽈배기 등 옛 추억의 빵을 파는데 알고보니 경기도가 2015년 선정한 전통시장 명품점포다. 찐빵 하나도 건강한 빵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흑미, 단호박, 쑥을 넣어 만들어 내고, 거기에 맛있게 튀겨진 꽈배기와 도넛의 고소한 향기에 사람들 발길 사로잡으니~ 맛은 기본이요! 전통시장 특성상 가격도 착하다.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박달1동 60-4번지031-469-0049 경기도 명품점포 인증제는 명품점포를 찾는 고객의 증가는 물론 그 고객들이 해당 전통시장 내 다른 점포의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시장 ..

[구술]김대규시인에게 듣는 내 고향 안양3동 이야기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 ‘사랑의 팡세’ 김대규 시인 “ 안양을 삶과 문학의 어머니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삼등객차를 타고 오렴.” - 김대규 시인의 엽서 - 이 시를 읽으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고향’은 그의 고향 안양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기도 하다. 1960년 고교 재학시절 시집 ‘영의 유형’으로 등단해 고향인 안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작품 활동을 해온 한국문단의 중견시인이자 안양지역 문화예술계 어른인 김대규(73) 시인의 아호는 ‘문향(文鄕)’이다. 여기엔 삶과 문학의 어머니인 고향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평생 안양을 사랑하고 흙의 문학, ..

[자료]1번국도 의왕구간에 대한 역사/의왕시사

1번국도의 연혁 현재 한국의 공설도로(公設道路)는 고속국도[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광역시도, 지방도, 시·군도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보통국도로 불리는 일반국도는 고속도로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와 항만·공항·관광지 등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양대축이다. 2004년 말 총 56개 노선으로 짜여진 한국의 국도는 총 길이가 1만 4,264㎞에 달하고 포장율도 계속 증가되어 97.4%에 이른다. 국도는 전세계적으로 남북축으로 뻗은 노선에는 홀수번호를 동서축으로 가로놓인 노선에는 짝수번호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한국에서도 남북을 종관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서쪽에서부터 1·3·5·7번을 부여하였으며,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남쪽에서부터 2·4·6번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8·9·10번국도가 북한에 소..

[자료]1940년부터 시작된 안양지역 축구사

1940년부터 시작된 안양지역 축구사 이 자료는 2003년 안양시민신문과 안양시축구협회가 공동기획으로 정리한 안양축구사입니다. 현 안양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권보형 사무국장이 당시 안양시민신문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지역체육계의 원로들을 만나고 인터뷰하여 10회에 걸쳐 연재를 했던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최병렬- “60년전에도 안양은 축구도시로 명성 높았다” 안양시민신문·안양시축구협회 공동기획 - 안양축구의 원류를 찾아서 안양 사랑하는 지역 유지들의 축구사랑 남달라 축구명문 전통속 축구 최강도시 자부심 갖게 돼 2003년 12월 26일(금) 01:01 [안양시민신문] 안양시축구협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안양시 축구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에 뜻을 모으고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안양지역..

[기억-정진원]장터(장대 場垈)

장(場)이 서던 곳이 장터이다. 대개는 오일장, 닷새에 한 번씩 장이 서는 정기시였다. 물건(상품)의 수요공급의 균형을 시간 차로 조절하던 전통시장 시스템이다. 그래서 정기시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돌림(장돌뱅이)이 있게 마련이었다. 전국 어디에나 그런 장터가 있었다. 이른바 전통시장으로 명맥을 지키고 있는 곳도 있지만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대개는 대규모 상업지역, 상가로 변화되면서 퇴색되어 버렸다. 안양에도 안양장이 열렸었다. 비산동에서 임곡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소시장, 왼쪽으로 태평방직공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철도 길까지 좌우로 안양(시)장이 있었다. 새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이 구시장이 되더니, 지금은 장터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장터에 얽힌 이야기는 다 말할 수 없이 많다. 독립..

[기억-정진원]읍내, 안양

지금은 경기도 안양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시흥군 안양읍이었다. 시흥군에 딸린 하나의 읍이었다. 군에 딸린 면 소재지가 도시 모양을 갖춰가면서 인구수가 2~5만 명 정도가 되면 읍이 되었다. 당시 안양읍의 다운타운에 안양읍사무소,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시흥군청, 군청 맞은편 길 건너로 안양경찰서가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나가면서 왼쪽으로 안양성당(지금 안양중앙성당)이 있었고, 거기서 성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냉천동이었다. 언덕배기에 구세군 교회가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려서 정오를 알렸다. 시계가 드물던 시대의 관의 대민 서비스였다. 당시엔 교회들도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알리기 위에서 30 분 전에 초종, 11 시에 재종을 쳤었는데, 그 종소리가 조용한 시골에서는 십리..

[기억-정진원]안양, 역전부락

먼저 경인선, 나중에 경부선 철로가 깔리고, 여기저기 역이 만들어지고, 철마(기차 汽車)가 놀라운 길이와 크기와 대단한 위세로 기적(汽笛)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일이었다. 시골 마을길에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다는 것과 그 철도, 철마, 역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였다고 하면 공연히 친일 사대주의자들을 추어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 알 만한 이는 아는 것이므로 이만 해 둔다. 여하튼 그렇게 만들어진 역은 신문명·문물·인류가 이합집산하는 거점이 되었다. 60여 년 전 필자는 안양역에서 노량진역까지 기차로 통학했었다. 당시 안양역은 단층짜리 역사였다. 그땐 대단한 것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건물이었다. 입구..

[기억-정진원]50년 전 안양의 다운타운

50년 전 안양의 다운타운 정진원/ 문학평론가/ 고향 의왕 청계동 50년 전 의왕의 덕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어느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안양의 고모님 댁에 얼마 동안 기숙한 적이 있었다. 등잔불 밑에서 공부했던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전등불을 보았다. 저녁 어스름에 불이 들어오고, 밤늦게 나갔다. 고모님 댁 길 건너에 바로 안양읍사무소가 있었다.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당시 안양의 다운타운(down town), 전문용어로 중심업무지구(CBD)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도심지역에는 여러 행정기능이 집중되어 있어서 경관 상으로도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당시 안양읍사무소, 그 옆에 시흥군청, 군청에서 작은 길을 건너 맞은쪽에 안양경찰서가 가깝게 노른자위 트라이앵글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안양..

[기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반월저수지와 운크라 국제구호 손길 닿은 논밭의 젖줄 본오뜰 포함 안산 지역 가뭄해갈 6·25 전쟁후 '유엔한국재건단' 맹활약 농업용저수지등 경제기반시설 투자도 안산 반월지역에는 개교한 지 90년이 넘는 반월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남산 뜰이 나오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호수같이 넓고 예쁘게 단장이 된 반월저수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넓은 저수지와 함께 어울려 우뚝 솟은 터미산성은 예전에 쌓았던 작은 산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인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저수지 제방 동쪽 끝에 가면 돌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半月水利組合 운크라 韓美合同事業地區 竣功 4290年 12月 15日'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것은 반월저수지가 195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