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06

[문원식]탈공업화시대의 안양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90년대 초 수도 서울의 배후 침상도시로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자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기 이전까지의 안양의 산업화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단계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사가 개설된 1905년부터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선 1932년까지로 불과 십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에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고, 학교와 시장 및 교회 등 도시 기본시설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로 '도시형성기'라 부를 수 있다. 2단계는 1932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으로 '전기산업화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당시 안양을 대표했던 공..

[문원식]안양지역의 기독교전파(2)/ 삼막골교회

행정학 박사, 성결대 교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분 선교사들이 1885년 4월에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후 10년이 지나면 안양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초기 기독교 선교루트는 주로 간선도로를 끼고 이루어졌다. 안양지역의 기독교 전파과정을 돌이켜봐도 덕고개교회(1895, 안양시 호계동), 초평교회(1897, 의왕시 초평동), 학현교회(1904, 의왕시 학현마을), 부림리교회(1910, 현 인덕원 동은교회)는 과천 공로상으로 전파된 교회들이고, 무지내교회(1895, 시흥시 무지동), 범고개교회(1896, 안양시 박달동), 삼막골교회(1901, 안양시 석수1동)는 시흥-안양간의 도로를 타고 차례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흥-안양간의 도로주변에 세워졌던 안양지역 교회 중 범고..

[문원식]안양지역의 기독교 전파(Ⅰ)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인덕원에서 경수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도권 순환도로에서 호계동 신 군포사거리 사이에서 구릉지 같이 약간 솟은 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이 곳이 바로 '덕고개(德峴)'이다. 덕고개 주민과 갈미, 인덕원 주민들이 과거 구 군포사거리 근처에 있던 군포장(軍浦場)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덕이 온다고 해서 덕고개라고 칭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덕고개는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당시 현재의 모습으로 낮추어져, 지금은 자동차로 주행할 때 고개의 흔적 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덕고개에서 신 군포사거리를 향하여 진행하다가 오른편으로 약 200미터 못 미친 지점이 바로 과거 안양지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되었..

[문원식]구시장(舊市場)의 부침과 안양의 상권변화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서이면 안양리에 최초의 공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1926년 1월 28일, 안양 1 동 구시장 자리에 안양시장이 5일장으로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안양시장은 시흥군의 중심이라는 위치상의 강점과 기차와 자동차로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 및 당시 안양리 지역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안양시장은 1929년, 안양지역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고, 정기적인 씨름대회나 서커스 공연 등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선거유세나 각종행사 등 지역정치의 발원지이기도 하였다. 또한 시외버스 정류장이나 맛이 좋은 국밥집도 모두 안양장터에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옛 안양 1 번가였다. 이처럼 영화를 누리던 안양시장은 하천변에 위치한 저지대였던 관계로..

[문원식]정조의 화산능행(花山陵幸)과 안양(Ⅰ)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제 22 대 정조(正祖·1752-1800, 재위기간·1777-1800)임금은 훌륭한 학자요, 뛰어난 개혁정치가이면서도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 학자로서 정조임금의 진면목은 최근 정조시대를 연구하는 30, 40대 소장학자들의 모임인 '문헌과 해석'을 통해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정조임금이 친히 지은 시문과 어록으로 구성된 홍재전서(弘齋全書)는 임금의 문집으로는 역사상 비교할 바가 없는 100책, 18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며, 또한 194종의 책을 정조 자신의 주도하에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편찬하고 있다. 정조대에 편찬된 문헌목록집인 군서표기(群書標記)에 의하면 활자본과 목판본이 83종 644책, 필사본이 112종 3,460책이어서 도합 194종 4,004권..

[문원식]어수(御水)물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AD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이 삼성산 자락에 안양사(安養寺)를 창건한 이후, 세월이 가면서 안양사 아래 마을을 안양리(安養理)라 부르고, 이 안양리가 발전해서 오늘날 안양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극락정토를 일컫는 안양(安養)이란 말과 같은 멋진 지명을 우리 안양시가 갖게 된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 바, 상식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이유 몇 가지를 들면 그것은 바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경관과 살기 좋은 인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들인 관악산을 뒤로 두고, 좌우로 청계산과 몰악산 및 수리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속을 학의천과 안양천이 합류하며 흘러나가는 형세를 취하고 있는 곳이 바..

[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위해 삼성천에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전인 1794년, 안양리(安養里)에는 안양주필소(安養駐 所)가 당시의 경기감사 서 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원래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行宮)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안양행궁(安養行宮)이라고 불려지게된 안양주필소가 원래 있던 자리는 안양1동 674-29번지인 지금의 아카데미극장 1층에 있는 강촌목장이라는 식당에서부터 그 뒤편 주차장 건물과 로얄호텔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 건물 우측 하단에 세워진 표석..

[문원식]만안교(萬安橋)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이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6차(1795)부터 과천로에서 시흥로로 변경하면서 안양에는 안양행궁(安養行宮)과 더불어 만안교(萬安橋)가 가설되었다. 시흥에서 안양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가던 능행길은 후에 국도 1 호선이 되었고, 그 중에서 만안교에서 시작하여 안양역전을 경유하여 구 경찰서 자리에서 끝나는 안양노정은 만안로(萬安路)라 이름지어져 지금도 그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 삼성천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목교로는 임금이 행차하는 어가의 행렬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연유로 해서 당시 금천현감 서 유방에 의해서 정조 19년(1795) 9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

[문원식]수리산(修理山)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수리산은 안양시의 진산(鎭山)으로 시 서쪽에 높이 솟아 관악산 및 모락산과 더불어 안양을 감싸안고 있으며, 예로부터 안양을 보호하는 주산(主山)으로 안양사람들이 마음을 의탁하던 명산이다. 수리산은 태을봉(488m), 슬기봉(451m), 관모봉(426m) 및 수암봉(395m) 등과 같은 영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군자 앞 바다와 소래 염전 및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볼 수 있다. 또한 수리산 자락에서 솟아나는 물은 계류이거나 샘물이거나 모두 수질이 좋아 섬유산업과 제지산업이 안양에서 일어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군포시와 안산시와 함께 수리산을 공유하고 있는 안양시는 수리산의 전체면적 3,099㏊ 중 약 44%에 달하는 면적을 점유하고 있는 관계로 3..

[문원식]새 천년, 안양 100년의 의미

성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80년대 말 지금의 평촌 신도시 개발공사 도중 선사문화유적지가 발견되었다. 다량의 고인돌과 토기파편 등 출토된 유물들은 생각보다 일찍 이 지역에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안양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헌종년간(1842-43)에 간행된 ‘경기읍지(京畿邑誌)’시흥현도(始興縣圖)인데, 지금의 석수동 지역을 안양리(安養里)라고 표기하고 있다. 안양에 대한 최초의 인구자료는 영조 35년(1759)의 호구조사 기록인데, 현재의 석수동, 박달동을 제외한 나머지 안양지역이 속한 하서면의 인구를 1,51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역마를 이용한 교통의 중심지이던 과천과는 달리 전형적인 농촌 촌락의 형태를 띠고 있던 안양이 발전의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