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나의이야기 -
보리가 익어 추수시 비산동 태평방직사택에서 돼지도 키우고 살던중 6.26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식량이 현지 조달이라 추수기를 남침의 시기로 보았다. 모든 피난민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새하얀 무명 흰옷을 입고 경부선철도를 들어서자 마자 인파가 몰리는 중 넘어져 모친의 무릎에서 피가 심하게 나와 피난을 포기하고 집으로 철수하였다. 국군들은 안양천 안양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를 다하였으나 무너지고 적치가 되었다. 동네 심 씨네 큰 한옥은 내무서가 되어 긴 충을 멘 인민군이 지키면서 동네사람들을 통치하였다. 동네 큰집은 아군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수난이다. 식품을 현지 조달하는 인민군은 우리집에서 키우던 새끼 밴 돼지를 공출하였었다, 이내 뱃속에 있던 새끼는 바켓스에 넣어 집으로 보내주었다.
비산동 심반장집(심재황4년 같은 반) 사랑채에 살면서 한참 무더운 여름날 모친은 내무서 호출로 다녀온 후 사색이 되어 여자경찰 때 찍은 사진을 나와함께 아궁이에 태웠다. 낙동강전선에서 잘나가고 있기에 죽이지 않고 대기상태였다. 전세가불리하다고 잠시 피신하라는 정보를 받고 어른들은 허겁지겁 며칠간 피신하였다. 나는 며칠간 먹지 못하고 스플리지 개울가에 누워있으니 너 염병이냐? 하고 물어보는 어른이 있었다.
9월20일경 우리 동네사거리에 미군장갑차와 짚차 스리쿼터 들어오고 동네어린이와 노인들이 모였다. 미군은 쵸코렛트와 껌을 나누어 주면서, 뒷산 산신각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무전을 쳐서 쌕새기(전투기)가 폭격하게 한 후 미군장갑차는 산으로 들어갔다.
1.4후퇴
겨울이 깊어지자 현역다음 고령자 제2국민병 1개중대정도가 시흥군청에 모여 점호를 하고 계부와 함께 남으로 먼저 내려왔다. 급식용 일종을 빼돌려 많은 국민병이 아사병사하자 청치적문제로 크게 번져 책임자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제2국민병 사건은 전쟁중 부패로 생긴 큰 사건에 하나였다.
태평방직 관사에 국군요양부대사 들어오고 우리집에서는 친절히 거들었다. 모친은 당시 큰 재산인 재봉틀과 새 옷을 관사 지하실 반공호에 넣고 흙으로 봉인하고 피난준비를 하였다. 이후 지하실에 숨긴 재봉틀 옷등 재산은 주변할머니의 먹이 감이 되었다.
서울서대문구 옥천동 외가에서 할머니와 외삼춘 4녀가 걸어서 우리집으로 왔다. 출발하는 트럭에 매달려 태워달라고 애걸하여 모친과 나와 이모둘이 옥천으로 가고 외조모 외삼춘 이모 둘은 대전에 떨어졌다. 안양역내 에서는 탄약열차가 고장으로 지붕위 피난민을 내려서 도보로 가계하고 폭파해 한동안 열차바뀌 들이 여기저기 둥굴러 다녔다. 내리게 할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고 일부 숨어있던 피난민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차바퀴 등 파편이 여러 해 굴러다녔다.
강원도 박수근 가족들은 군용차로 안양에 피난와 충혼탑북측 아는 집 움막에서 며칠을 앉아서 잠을 잤다고 부인의 자서전에 나온다. 피난민은 허가 없이는 지정된 피난지를 떠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옥천은 야간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초병을 죽이고 홍문에 몽둥이 박아 주였다는 이야기로 공포에 떨었다.
옥천은 산이 많은 금강 상류로 풍광 있는 소읍으로 육여사 친정 육관수 큰한옥을 가보니도 하였다. 경찰들하고 남강에 꽝(병에 모래를 넣고 폭약을 넣고 심지에 연결하고 불을 부쳐 물에 던지는 무기)으로 물고기 잡아 천렵한기역이 난다. 밥과 소금물만 먹다 내가 앞을 못보자 옆집에서 개울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 끌여 먹으라고 하여, 송사리를 잡아 끌여 먹으니 앞을 보았다. 당시 술이 부족하여 멜칠 알콜로 술을 만들어먹다 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1951년 9.28 수복후 비산동에 들어오니 지하실물건은 피난안간 옆집 할머니들의 차지로 소문나고, 우리 거지가 되었다. 모친은 시장에 나가 개떡( 밀겨 쌀겨등을 개서 쪄 만든 떡으로 현쑥떡 같고 영양가는 있으나 맛은 없다,)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에는 오긍선박사 같은 유지들도 부대찌개(간스메고기 햄, 소세지, 빵부스러기 들이 석여진 상태로 끌인 항가리 굴라시 같은 형태) 를 시장에서 사먹는 처지였다.
섵달 그믐이 되자 남자들은 화토치기를 한다. 계부도 여기에 개떡장사 밑천을 잃고 거지가 되었다. 51년 겨울 우리는 모친의 사촌이사는 수원 외사촌 오빠집으로 내려가서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작은 대청마루에 가마니를 깔고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최씨 아저씨는 이동영화관 영사기사로 있다가. 세류동 야산에 주둔한 반공포 부대 장교식당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영사기를 운전하였다. 그래서 조수가 필요해 계부는 조수로 고용되었다. 며칠지내다 시내에서 다리를 건너 좀 지나 우측, 1번국도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 세 번째 역기역자 소농의 한옥 집으로 이사하였다. 역기역자는 (ㄱ)기역자를 뒤집어놓은 형태로 서북풍을 막는 유리한 형이다. 앞 동내는 공동묘지가 있고 동남쪽 멀리 화장터가 보이고 밤에 사자死者를 지계에 메고 다니는 것을 보면 무서웠다. 뒤는 중국인 농장이며 농장으로 찔러 가면 5분정도 등굣길이 짧아지나 우리집 북동코너에 수체물이 모이는 농업수용 드럼통이 지하에 묻혀 있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해 나는 이 길로 다니지 않었다. 내가 이사 후 옆집친구가 헛딛어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장교식당은 설탕과 일본산 귤이 풍부해 몰래 가지고 나오면 돈궤에 가득 모을 수 있는 큰돈이 되었다.
봄이 되자 나는 집 서쪽 방향 수원천 건너 20분 거리에 있는 세류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는 일본인주로 다니던 학교로 2층의 붉은 벽돌 건물로 폭격으로 반만 남았었다. 단임은 퉁퉁한 아즘마 스타일로 내가 공부는 잘하지만 숙기가 약해 반장을 못 시켰다고 모친에게 말했다고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배웠는데 국어교과서에는 ‘영이야 영이야 나하고 놀자’ 가 처음 배우는 말 이었다.
적기가 인천에 유류저장고를 급습 할 때는 수원비행장 주변 방공포부대들이 비행장하늘에 탄막을 쳐 적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할 때는 아주장관 이었다.
여름에 점연병이 돌때는 수원천변에 돈사를 옮기고 옆에 간이원두막치고 사는 것을 보았다.
초겨울이 되자 세류국교 서남방 4km 야산 반공포 부대 근처 동네부농 농가農家로 이사하였다. 농가는 역기역자 배치집으로 지붕이 듬직한 초가집 사랑채이다. 안채는 일남이녀 농가로 아들이 수원농대학 축구선수인데 호롱불 석유 넣다 불이 붙자 진화하다 얼굴이 많이 딘 청년이었다. 당시에는 호롱불관계화제가 많었다. 여중에 다니던 딸은 나에게 양말 장갑 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2학년에 올라가 중학생들과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멀고 힘들어 지각하면 수원시장에서 놀다가 동네사람한테 들켜 모친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다. 결국2학년 두어 달 다니다 계부의 폭력으로 가정불화가 생겨 늦가을 부산에 잠시 간적이 있다. 모친이 부산에서 일시 갈치를 길에서 팔았는데 길에는 인플레로 돈 가치가 떨어져 길에 버린 헌 돈이 종종 눈에 띠였고, 피난민이 서울로 떠나고 나고 있어 철지난 해변 같은 모습이었다. 부산은 바람이세어서 서울말은 안통하고 어부들이 고기잡이 시 사용한 부산악센트를 사용해야 전달이 되었다.
이때 부산에 있던 이중섭은 친구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에 가서 대표적인 전성기 그림을 남기었다.
계부직장이전으로 오산 비행장주변 광명학교 3년 과정을 잠시 공부하였는데 품금을 치며 ‘잘자라’ 우리아기 자장가노래를 가르쳐준 이쁜 선생님 참 좋아보였다.
이후 정전으로 다른 차원의 전쟁이 지속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전겸임교수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운영위원장역입
앙가주망건축사사무소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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